종로의 피맛골, 왠지 추석 연휴에는 한번씩 가게 되는 곳이다. 오세훈 시장이 디자인 서울 어쩌구하면서 금세라도

다 밀어버릴 듯 하더니 아직도 '피맛골 고갈비집'은 건재하다. 워낙 추억이 촘촘이 서린 곳이라 참 반가운 곳.

몇 년전이더라, 불이 나는 바람에 가게 절반이 날아가고 그때부터 그냥 이렇게 공터로 놀리던 곳, 그 우켠에 선

건물 역시 완전완전 허름해서 무슨 폐가같기도 하고 쓰러지기 직전같기도 하지만 추석에도 쉼없이 맛있는

고갈비와 막거리를 팔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일렀는지라, 가게 안에는 혼자 와서 막걸리를 드시고 계신 머리 희끗한 아저씨 한 분을 빼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모양새도 색깔도, 짝도 제대로 맞지 않는 삐뚤빼뚤 제각기 놓인 의자들.

메뉴판이 있긴 하다. 얼마나 오래전에 붙여놓은 건지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베니어판 벽면과 비슷한 색깔로

누렇게 변해버렸지만, 사실 여기서 다른 건 맛본 적도 없다. 앉으면 그냥 갖다주는 막걸리 한 사발과 고갈비.

메뉴판에도 벽면에도 온통 낙서투성이다. 낙서라기엔 꽤나 그럴듯한 시간과 사건들을 이겨낸 것들.

나왔다. 양은으로 만들어진 양푼에 담긴 막걸리랑 고갈비 한 마리. 여기 막걸리는 뭔지 모르겠는데 탁하면서도

단 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랄까. 살짝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고갈비랑 같이 먹으면 딱 좋다.

조명은 늘 그렇듯 어두침침하다. 드문드문 박힌 채 테이블 하나만큼의 공간을 겨우 밝히는 전구, 그리고 창밖에서

슬몃슬몃 넘쳐흐른 햇살이 조명의 전부. 아,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도 있구나.

누군가 창문에 깃발을 붙여두었다. 지난 지방선거때 붙였두었던 깃발인 듯. 창밖으로 보이는 리어카들이 왠지

살풍경하다. 저게 혹시 서울시 표준형 리어카인가, 반듯반듯 주차된 그들 앞에서 현란한 녹색 거죽이 입혀진

리어카 한대가 반갑다.

어떻게 보면 토굴같은 느낌도 들고, 나지막한 천장과 울퉁불퉁 고르지 않은 바닥 높이 때문에 행동거지 하나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기분이 색다르다. 올 때마다, 여긴 뭔가 정겨움이 그득그득.

이런 화장실 표지판도 넘 좋다. 촌스런 초록색의 왠지 촌스런 남자 여자의 그림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호하고

선명했을 화살표 앞뒤꼭지에 누군가 짖궂게 장난쳐둔 모양새들까지, 웃음지을 수 밖에 없는 그림들.

온통 낙서투성이인 벽면, 여기도 뭔가 신품의 냄새를 가득 풍기던 그런 때가 있었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어디서 누구 한명 담배라도 피워올리면 금세 가게 전체에 티가 나는 그런 곳이지만 나름 환기는 잘 되어서 다행,

안 그랬음 무슨 수산시장 같은 냄새가 늘 배겨있었을지도.

이런 낙서들, 추억과 즐거움을 증거하는 흔적들. 이런 게 언젠가 무지하고 둔탁한 포클레인의 무쇠 이빨에

산산이 부서져나가리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싸하다. 그야말로 수십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작품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 벽면을 통째로 어디에든 전시한다고 해도 훌륭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이 이 공간에서

함께 했던 사람, 나눴던 이야기, 서려있는 추억을 기억하며 자신이 남겼던 낙서 한 줄을 곰곰히 찾아보지 않을까.

무엇보다 좋은 거야 그냥 이 공간이 계속 남아있는 거지만.

기둥이라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화이트로, 검정펜으로, 누군가의 기록 위에 또 누군가가 기록을 덧씌우고

차곡차곡 쟁여간다. 심지어는 전등 스위치까지. 모든 곳에 공평하게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허름한 가게 안

모든 장소에 아낌없이 내려앉았다.

아니, 눈송이는 천장에까지 채워지진 않는다. 낡고 깨져서 여기저기 덧대인 천장 쪼가리에도 어김없이 새겨지는

누군가의 메시지들.

막걸리 한 동이를 기분좋게 비우고, 고등어를 남김없이 해체하고 나서 돌아나오는 길. 들어설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웬 달마도가 입구 앞에 그려져있었다. 저건 정말, 작정하고 그렸겠구나 싶다. 기록을 남기고 전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한순간의 장난이나 술기운으로 끼적인 것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이 집 이름이 와사등이었나 보다. 몰랐다. 벌써 수십번은 왔을 텐데, 오는 사람들끼리는 그저 '피맛골 고갈비집',

이렇게만 말하면 통했으니까. 가게 주인 할머니한테 물었다. 여긴 안 없어지죠? 할머니가 그랬다. 여긴 절대

안 없어져요. 계속 있을 거야.


부디 계속 남아있었으면. 맛있는 고갈비도, 누군가의 메시지들도. 그래서 내 추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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