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의 빌딩숲 사이를 걷다가 문득 발견한 거대한 글자탑. L.O.V.E. 글자가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그 글자의 크기가 뭔가 낯설만큼 커서-저렇게 큰 글자로 씌여진 책장 한 페이지의 사이즈는 또

얼마나 클까-주변의 풍경을 살짝 일그러뜨리는 듯 했다. 붉게 달아오른 러브.

신주쿠의 도쿄도청 뒤쪽, 오거리던가 사거리를 건너려다 저 너머에 있는 빨간 글자조각을 발견한 거였다. 사실

그보다 먼저 눈에 띄었던 건, 사거리를 삥 둘러 세워진 신호등과 가로등을 고리처럼 이어주던 환.

그 글자가 거기 놓였다는 게 보이지도 않는 듯 완전 무심하게 지나는 사람들은 도쿄의 현지인들, 이렇게 요리조리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은 여행자들..이라지만, 사실 이런 글자가 서울의 테헤란로 어디메쯤 덜컥 떨어뜨려놓은

듯 놓여있으면 지나칠 때마다 기분이 묘해질 거 같다. 너무너무 익숙하고 뻔해서 진부해진 공간이 문득 새로워지고

재미있어지는. 발바닥을 간질간질하는 느낌. 혹시, 이 글자 외지인에게만 보이는 건가.

이번엔 측면 사진. 정면에서 2D로 볼 때와 또 다른 3D의 위엄. 그리고 두툼한 깊이가 느껴지는 만큼이나 더욱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고 주변공간을 휘어버리는 그 간질간질함.

사실 이 오리지널 'LOVE'의 또다른 버전은 파주 헤이리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그걸 보고 꺄아~ 하면서

마냥 신기해했던, 포스팅까지 했던(Alice in 헤이리.) 기억. 그 때 보았던 건 그치만 한글 자모로 만들어놓은 것,

게다가 훨씬 작고 귀여운 사이즈에 얄포름한 두께를 가진 것이어서 이만큼의 임팩트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같은 모양새여도 그 크기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단 건, 아무리 본질이 이러니저러니 잘난 척 해도

생각보다 사람이란 동물이 단순하고 곧이곧대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걸까.

내킨 김에 신주쿠의 야경 한 장. 신기하게 생긴 건물들이 쭉쭉 시원하게 뻗어오른 그곳.





공룡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니지만, 여태 인류가 상상해낸 공룡의 표정 중에선 가장 불쌍한 표정 아닐까 싶다.

다른 광포한 육식공룡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다가 바닥을 기어 도망가려는 듯한 애틋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이 녀석, 표정이 너무 인간스럽달까. 애니의 왕국 일본이어서 이런 표정의 공룡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게 가능했던

건 아닐지. 어떻게 보면 조금 '개'같이 생기기도 했지만서두.



@ 일본 도쿄, 모리타워에서 열린 공룡전 광고판에서 한 컷.






지브리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 미타카 역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미술관을 에워싼 공원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또 하나. 미타카 역에서 지브리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꽤나 매력적인 산책로라는 이야기에 그쪽으로 바로

빠지기로 결심은 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있는 공원에서 좀더 여운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움찔움찔.

아까 뛰어들어오느라 보지 못했던 지브리 박물관/미술관/스튜디오의 간판.

끝내 문을 나서서 돌아나오는 길, 샛노란 칠이 산뜻한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안의 커다란 토토로가 배웅해주는

듯하다. 이제 막 스튜디오에 들어선 꼬마아이 하나가 토토로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나와 미타카 역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태풍 '곤파스'가 가로수를 뽑고 휘두른다던

서울과는 달리 이곳 도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죽어나간다는 전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던 중. 비행기 타고 고작

두시간도 안 날아가는 거리인데 이토록 판이한 날씨라니. 이런 점에서도 가깝고도 먼 나라, 맞다.

이국적인 느낌의 신호등, 빨간 신호등의 불빛이 유난히 붉다.

사실 미타카역에서부터 지브리 미술관으로 걸어오면서 점점 줄어들어야 하는 숫자, 미술관까지 300미터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 푯말을 들고 있는 토토로도, 푯말 위에서 휘영청 몸을 꺽어내는 도마뱀도 귀엽다.

한참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 시간 아닌가, 오후 두세시경. 옆에 개천을 끼고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그렇지만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즈넉하고, 조용하면서 깨끗한 거리.

나무도 많고, 집들도 아기자기하고, 그런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니 금세 지브리 미술관에서 멀어진다. 어느새

500미터나 떨어졌다. 거꾸로, 미타카역에서 이 길을 따라 지브리 미술관을 향하는 길도 생각보다 금방 가닿을듯.

어느 집 앞마당에 얼기설기 세워진 대나무 울타리에 붙여진 안내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개와 고양이 그림이

귀엽다. 뭐, 이런 개나 고양이가 마당에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그런 걸까.

좀더 걷다 보니 다른 그림들도 눈에 띈다. 아이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포스터들, 그리고 검정귀를 가진

하얀 강아지가 푯말로 붙어있는, 그런 류의 귀여운 안내판들.

그리고 칠백미터. 토토로 말고 다른 캐릭터들도 푯말을 들고 있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리

뭐니뭐니 해도 지브리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는 역시 토토로. 붉은돼지 아저씨가 푯말을 들고 있기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거 같고.

이번엔 파란 불, 이건 또 아까 신호등과는 모양생김이 다르다. 햇살은 워낙 내리쬐이고 그늘은 또 그만큼

짙고, 도무지 광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도쿄.

신호등 앞에는 이렇게 멈춰서서 기다리라며 발자국 모양까지 그려넣는 세심함..이랄까 유머러스함이랄까.

장난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브리 스튜디오-미타카 역을 잇는 이 산책로의 이름은, '바람의 산책로'. 아닌 게 아니라 개천을 따라 쓸듯이

불어내리는 바람이 머리빗처럼 순순한 방향으로 행인들을 빗어넘기고 있었다.

문득 툭 튀어나온, 그렇지만 너무 과하게 튀거나 부조화스럽지는 않은 일본 스타일 강렬한 집도 한 채 지나고.

그러다보니 벌써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부터 천백미터. 그리고 거의 코앞까지 당겨져버린 미타카역.

지브리에서의 여운을 곱씹으며 마음을 탁 놓은 채 걷기에 딱 좋던, 딱 알맞은 거리와 분위기의 산책로.





도쿄의 야경을 보겠다고 도쿄타워에 오르는 건, 뭐랄까, 코끼리를 보겠다며 꾸역꾸역 코끼리 등짝을 기어오르는

개미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도쿄타워의 내부가 궁금하다면야 모르겠지만, 도쿄타워없는 도쿄의 야경은

왠지 심심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도쿄타워가 있는 도쿄의 야경을 보려면 모리타워에 가라고들 한다.

롯폰기힐즈에 있는 모리타워, '고작' 52층짜리 건물이지만 그래도 왠지 서울에 있는 54층짜리 트레이드타워보다

많이 높고 커보인다. 단순히 타워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 쇼핑몰과의 연계라거나, 빌딩 주변의 녹지공간이라거나

본격적으로 마련해둔 전망대 공간이나 모리미술관 같은 시설물들이 양팔을 활짝 벌려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분위기 때문인 거 같다.

전망대로 바로 직행하는 엘레베이터, 모리 아트뮤지엄과 도쿄시티뷰, 전망대가 있는 52층. 타이완의

101빌딩처럼 미친 듯이 빨리 쏘아져올라가는 느낌은 없었지만 뭐, 괜찮다.


그리고 다른 것들보다 도쿄의 야경. 도쿄는 참 크다는 느낌, 게다가 빌딩들이 이렇게 촘촘하게 늘어서있단

것도 인상적. 아무리 서울의 도심이래봐야 고작 몇 블록만 지나면 하늘까지 치솟던 스카이라인이 어느결에

땅으로 잔뜩 가라앉아있기 마련인데, 여긴 도쿄의 도심중에 도심이라고는 해도 참. 게다가 사방에서

반짝이는 불빛들까지.

도쿄에 오기 전 '도쿄타워'를 이제야 보았었다. 생각보다 영화 중에서 도쿄타워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내부의

모습도 그렇게 많이 노출되지 않았는데 다녀온 사람들은 전부 생각보다 별 거 없더라는 입을 모은 반응들. 낮에

보면 더욱 별거 없다는 둥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갔지만, 불빛이 온통 내려앉은 도쿄 시내에 우뚝 서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불이 환하게 켜진 도쿄타워는 꽤나 멋지다.


모리 미술관에서의 전시와는 별도로, 전망대 내에서도 다른 특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룡전'. 전망대의

유리는 뭔가 빛이 난반사되지 않는 특수유리를 갖다 꼽아놨으면 좋겠는데 사방에서 빛이 튕기는 바람에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지만, 심하게는 이렇게 공룡 한마리가 도쿄타워를 쥐고 흔드는 듯한 일루젼이 펼쳐졌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에 있다. 정확히는 도쿄의 JR선 '기치조지(Kichijyoji)' 역과 '미타카(Mitaka)' 역 사이,

거의 그 중간에 걸쳐 있다고 해야 하려나. (참고 : 낡고 더러워진 도쿄 JR선 전체지도.)

해서 코스 잡기가 상당히 애매한데, 나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는 (늦어서) 택시로

이동, 지브리에서 보고 나오는 길은 미타카 역까지 산책길을 걸어서 이동, 그리고 에도도쿄건축공원으로 향했다는.


아, 지브리 미술관은 한국에서 미리 표를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성수기 때에는

2주 전쯤엔 해야 안전할 듯. http://ghibli.ktbtour.co.kr/ 여기에서 하는 게 한국에서 사전 예약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열심히 기치조지역으로 가는 길, 전철 끝에 탔더니 시원하게 앞창이 전부 트여있다. 물론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지하 터널뿐, 그리고 매 역마다 마이크를 잡고 프로의 솜씨로 역 안내방송을 하는 철도운전사 아저씨도 빼놓음

섭하겠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매주 화요일과 국경일에 휴관하며, 그외의 날엔 10시, 12시, 14시, 16시에만 입장할 수 있다.

입장 후에는 언제 퇴장해도 상관이 없으나 입장시간만은 지켜달라던 간곡한 부탁이 사전에 있었는데도 늦고

말았다. 사실은 기치조지역에서 살살 걸어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잡아탄 택시 안에서 사진 한장.

생각보다 기치조지역은 꽤나 도쿄 외곽에 있어 멀기도 했고, 생각보다 기치조지역과 지브리 스튜디오 간의

거리도 솔찮이 떨어져 있었던 탓.

일본 택시도 한번 타 볼만하다 싶던 게,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더라는 사실. 기사분은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할아버지셨지만, '지브리스튜디오'하니까 한 큐에 알아들으셨다. '하야꾸하야꾸'하며 조금 채근해볼까 하다가

그게 '빨리빨리'란 말이 맞던가 문득 혼란스러워져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결국 10시를 십분여 넘기고 말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줄을 선 채 입장 대기 중.

내부에서는 카메라 촬영 금지, 음식물 반입금지, 흡연 금지, 그리고 휴대폰 금지. 휴대폰? 아무래도 요새

휴대폰에 사진 촬영 기능이 기본으로 들어가있으니 그걸 막고자 함인 듯. 스튜디오 내부의 분위기가

외부로 새나가는 걸 꽁꽁 막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결국 내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그저 하야오가 그린 너무나도 감격적인 원화들과 금세라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앉아 작업을 계속할 것만 같은 작업실의 재현공간, 그리고 곳곳에 수북하게 꽃처럼 피어났던 담배꽁초들의

이미지만 가득한 채 완전 가슴먹먹해져서 옥상 정원으로 올랐다. 옥상 정원에 오르는 길, 마치 아이들 놀이터에서

흔히 보이는 우주선 모양의 뱅글뱅글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다. 온통 담쟁이가 휘감고 있던 그길을 오르는데,

무슨 '천공의 성 라퓨타'를 탐험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둘러보는 거 같기도 하고.

옥상 정원에 오르면 바로 눈에 띄는 게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지키던 로봇 병사의 모형. 이 녀석이 큰 팔과

다리를 흐느적대며 금세라도 새둥지를 품어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친근하고 섬세하게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주위에 대한 사려깊음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그의 고개가 사뭇

수그러져 있어서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저기 아까 가슴 두근거리며 줄서 기다리던 그 천막이 보인다.

그리고 한층한층 눈을 뗄 수 없이, 그야말로 온 벽면 전체를 핥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밖에 없었던, 여기 그냥

죽치고 자리깔고 살고 싶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건물. 사방이 온통 초록빛 식물로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지브리가 만들어온 그 온갖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쉼없이 졸졸대며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하늘 높이 펄럭이는 지브리의 깃발. 하야오와 지브리, 그들의 작품에는 '반딧불의 묘' 정도만 제외하면 국적이

불분명한, 그리고 시대도 불분명한 시공간이 배경이 된다. 갈색머리와 검은머리가 공존하는, 그리고 기계문명과

녹색의 '원시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중세 성을 본딴 듯한 깃발이나 온통 녹색으로 휘감겨

있지만 내부에는 나름 기기묘묘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들 역시 그런 것들의 반영일까.

공중 정원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다. 로봇 병사를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면 나타나는 조그마한 오솔길,

그길 끝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 실물 사이즈의 모형이 나타난다.

만화로 먼저 나타나고 그걸 현실세계에서 실물로 다시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물로 눈앞에 나타난 비행석의

모형을 보고 나면, 이 세상 어디엔가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거대한 나무를 의지한 채 둥둥 떠있을 것만 같다.

그 밖의 다른 캐릭터, 다른 공간들 역시 어디엔가 숨어 있을 뿐, 미처 발견치 못하거나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공중 정원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건물 내에서만 불가능하다. 공중정원으로

오르는 테라스에 놓인 이런 신기한 벤치라거나, 다른 것들은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건 그나저나, 다리가

달라붙어 있는 생선이라고 해야 하나, 생선처럼 생긴 강아지라고 해야 하나, 혹은 프로펠러 꼬리가 붙어 있는

4족보행 탈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언젠가 지브리의 만화에서 등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연예지망생인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입장권, 입장권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지하1층에 있는 조그마한 영화관의 영화표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브리의 단편 네 편을 번갈아가며 상영한다는데, 한 20분간의

그 짧은 영화를 보고 또다시 하야오를 우러러보게 되고 말았다. 아 그의 상상력이란. 상상력과 통찰력이란.

그 아름다움이란.

지하 1층에 있는 조그마한 앞마당에 있던 빨간 지붕을 가진 낡은 펌프. 잔뜩 우그러들은 채 정감가득한

물잔이 두 개 놓여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펌프도, 끽끽 작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펌프질을 하면 물이 진짜로 쏟아져 나온다.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외벽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창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녀를 도왔던 검둥이

요정들이 바글바글 창문밖을 내다보겠다고 아우성 중이다.

풍경이 매달려 있고, 땔감으로 쓰려는 듯 한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둔 나뭇가지들, 누군가 저 커다란 나무등걸에

땔감용 나무를 대고 도끼질을 신나게 해댈 것만 같다.

끝까지 감탄하게 만드는 지브리. 아, 지브리와 하야오 정말이지 당신들 최고. 마당 가운데의 하수구 뚜껑마저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챙겨주다니 당신들은 정말.

정말, 돌아나오기 싫었다.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지브리 스튜디오를 가고 싶다는 오랜 소원에서 시작되었더랬다.

기념품샵을 이잡듯 뒤지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만 살 수 있을 법한 걸 골랐다. 그의 제작실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하던 원화들 복제본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점쯤 사가겠다 맘을 굳게 먹었는데, 정작 그런 원화를

활용한 엽서나 그림 따위는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 그렇지만 한국에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돼지 관련

아이템들이 좀 보여서 그걸로 얼추 만족하다. 하야오의 작품 중 내가 손꼽는 작품 중 하나, 붉은 돼지.

돼지는 국가나 전쟁 따위 인간의 일에는 관심없어, 라는 붉은 돼지의 시크하면서도 단단한 한 마디.

그리고 지브리 입장권과 마찬가지로 필름을 일부 잘라내어 만들어낸 책갈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몇 컷이

담겨 있었다. 대충 여섯 컷쯤 들어가있는데 이건 뭐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아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모습이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 그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모션을 구현한단 얘기겠지 싶다.

마지막으로 산 건 지브리 스튜디오 옥상정원을 지키고 있던 로봇 병사의 모습, 미니어처 형태로 명함 따위를

꽂도록 만들어둔 주석 장식품. 사무실에서 날 지켜주셈, 병사님.ㅋ

돌아나오려는데 지브리 스튜디오 앞의 안내원이 머무는 조그마한 안내데스크에 놓인 장식이 눈길을 끈다.

붉은 돼지같기도 한 모양에, 입에서 모기향을 담배연기처럼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던 모습.

돌아나서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 정원으로 올라서는 우주선 모양 동글뱅이

계단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보였고, 온통 짙푸른 녹음으로 덮인 고풍스런 건물이 보였고,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하야오와 지브리의 꿈같은 이야기들이 보이는 듯 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마법의 솥 같은 존재랄까. 그런 경외감.
 
일단은, 당분간 안녕, 토토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떠나는 길을 배웅해주는 토토로의 뚱하지만 믿음직한 표정.

저만한 사이즈의 토토로라면 눕혀두고 그 배 위에서 잠들어도 될 거 같은데 정말.

다들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게다. 좀처럼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 만큼, 다른 관람객들도 이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어떻게든 토토로와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지브리미술관 구조를 소개하는 브로슈어, 그치만 이것만 봐서는 통..뭐가 뭔지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무려 한국어를 포함한 다섯개 언어, 일본어까지 합치면 여섯개 언어로 소개가 되어있음에도 그다지 쓸데있는

정보는 안 담겨 있는 거 같다. 명색이 미술관인데, 더구나 지브리의 특성을 살려 만화로 표현해놓은 지도인데.

지도는 보고 나면 여기가 어디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최소한 알아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브로슈어 뒷면에 적혀 있는 문구 하나, 이 모든 의혹을 해소하는 강력한 단서가 되어 주었다. '미아가 됩시다,

다 함께!!'라는 문구다. 영어로는 'Let's lose our way, toghether'라나. 이들은 지브리 미술관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길잃고 홀리게 만들어 기념품점을 싹싹 긁어가게 만들고, 지브리홀릭으로 만들 생각인 거다.


더구나 미술관 내 사진촬영, 비디오촬영은 모두 금지라니. 이러니 지브리에 두고 온 내 금쪽같은 추억들이

더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풍화되는 거다.

지브리의 입장권 두 장. 이걸 갖고 미술관 지하 1층으로 가면 오로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지브리의

단편 만화영화를 볼 수 있다. 약 15분에서 20분 가까이 되는 작품을 매시간 세 타임씩 틀고 있었다.


위의 입장권은 '붉은돼지'의 한 장면, 밑의 입장권은 '포뇨'의 한 장면, 필름을 이렇게 몇 컷씩 잘라내어 다시

입장권으로 재생한다는 발상도 참 감탄스럽다. 이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념품.

지브리 스튜디오 입장권을 사전 예매하고 현지에서 받기로 했는데, 한국에서 미리 예약할 수 있는 곳은 대한여행사

뿐이라고 많은 블로거분들이 그렇게 알려주셨기로 나 역시.





비록 굉장히 낡고 더러워졌지만, 저 낡음이 어느 가방의 어느 모서리에 쓸렸는지, 그리고 저 얼룩이 어느 식당의

점원이 실수로 엎지른 간장 종지에서 번져나왔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이드북에 절대적으로 빈곤하던 교통지도 중 JR선에 대한 갈급한 욕구를 이 지도 하나로

전부 해갈할 수 있었단 점. 기치조지역의 '지브리 미술관'을 찾아갈 때, 그리고 도쿄 도심을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도는 JR선의 대략적인 그림과 윤곽이 궁금할 때 매우매우 도움이 되었었다.




점점 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맹렬해졌다. 하라주쿠의 쇼핑스트리트를 돌다가 슬쩍 찾아간 메이지신궁에

도착했을 무렵은 대략 그쯤이었다. 하라주쿠는 패션과 쇼핑의 거리, 그 일정에 슬쩍 양념처럼 집어넣었던

메이지신궁은 그저 해떨어질 무렵의 산책코스였으니 얼추 맞춘 셈이다.


일본의 하고많은 신사 중에서도 '신궁'은 특별히 역대 일왕('덴노'라는 고유명사로 불러주는 게 맞을 거 같긴

하지만)을 신으로 모셔놓고 있다는 둥, 그 중에서도 특히나 조선의 식민화를 감행했던 때 재위했던 메이지

일왕을 모시고 있다는 둥의 배경지식은 별반 감흥이 없었다. 그냥 뭐, 후쿠오카나 다른 곳에서 잔뜩 본 신사나

별반 다를 거 없잖아.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고 의지하고. 혹은 그저 습관, 전통으로써 유지되고.

일왕을 신으로 모시는 거야 그네들의 종교인 '신토'에서 기본 교리에 속하는 거고, 조선을 식민지화한 그네들의

야만적인 결정도 결정이지만 그보다는 그로부터 해방된 후 뒷처리를 여전히 못하고 있는 나라에서 새삼 남의

나라 와서 격분하는 것도 우스운 일. 그래서, 그냥 해떨어질 무렵의 고즈넉한 신사를 산책하듯 돌아보았다.

어느 신사, 신궁이나 그렇듯 입구에는 도리이(鳥居)가 서 있다. 이게 하늘 천天자로부터 유래한 모양이라고들

하던데, 어떻게 보면 비슷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또 영 꿈보다 해몽인 거 같고. 6시 가까이 되어서 그런지 뭔가

방송에서 신사 방문객들의 퇴장을 종용하는 멘트가 일어, 영어로 계속 흘러나왔고 사람들의 흐름도 전부

입구로부터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일단 방송은 무시, 롯데 월드 6개가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면적에 넙데데하게 자리잡은 이 메이지신궁을 전부

돌아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그냥 본전까지만, 아니면 가볼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보기로 했다. 사실은

생각보다 해가 일찍 지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었다. 여섯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하다니, 어쨌든 그 어느때보다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도 가고 있었구나. 쳇, 그보다 '일출~일몰'이라는 애매모호한 메이지 신궁의 개방시간이

문제인 거다.

도리이를 지나 한 십여분 걸어들어간 거 같은데 본전은 커녕 본전을 가리키는 푯말도 아직이다. 커다란 석등에

번쩍 불이 들어왔고, 어디선가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쿨럭대며 나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신사가 크다는 사실에, 그리고 예상보다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 신사에나 이렇게 입구쯤에 짚으로 감긴 단단해 보이는 술병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몰랐는데, 이건 술이 잘 익기를 기원하며 주류 회사에서 제물로 바친 술통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술들이 나름의 라벨을 붙인 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걸 보면, 마치 방문자들을
 
향해 광고를 하려는 게 본심, '혼네'일지도 모른다.

파르스름한 어둠이 소리도 없이 땅거죽에 웅크려 앉기 시작했다. 노랗게 빛나는 석등 위의 불빛이 묘한

아늑함을 자아내기도 하면서도, 어느 순간 지나는 사람 한 명 없이 온통 적막할 뿐인 너른 대로 위에 둥둥

떠오른 듯한 낯선 느낌으로 목 뒷덜미를 쿡쿡 찌르기도 했다.

본전으로 가는 길은 온통 짙푸른 숲길, 길 양켠에서 뻗어나온 탐욕스런 녹색 가지들이 서로의 어깨를 짚어내야

만족할 태세로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신사에 들어서기 전까지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채웠던 건

히라주쿠의 온갖 샵들에 전시된 중절모와 원피스와 각종 액세서리들. 그것들 역시 왼쪽에서 오른쪽까지의

시야 전면을 온통 가려버릴 듯한 삼엄한 기세로 조그마한 도시 하나를 점령해 버린 듯 했다.


히라주쿠를 서울의 어디랑 비교해봐야 할까 생각해봤지만, 홍대나 삼청동이나 압구정동이나 명동, 그 어느 한

곳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공간을 합쳐놓은 조그마한 소도시 정도로 놓아야 사이즈면에서나 분위기면에서나

비스무레할 듯. 일본은 확실히 대국인 거다. 인구면에서나, 도시의 사이즈면, 발전도면에서나. 1억 2천의 인구와

5천의 인구, 아무리 서울이 인구과잉의 초고밀집지역이라 해도 도쿄의 사이즈나 밀집도에 비길 바는 아닌 듯.

결국 본전까지는 포기. 거의 떠밀리다시피 돌아나와야 했다. 이미 입구에는 철문이 닫혔고, 시간은 칼처럼

지키는 일본인들은 다소간의 에누리도 없이 방문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걸까,

아쉬움에 카메라에 담았던 쪽문으로 빠져나오고 나자 등뒤에서 철컹, 문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보니 올해 여름은 짧막한 휴가를 두 번이나 가게 되고 말았다.

7월에 다녀온 타이완, 그리고 내일부터 다녀올 일본 도쿄.

회사 일정상 살짝 무리한 감이 없진 않지만, 여름휴가철 문닫는 셈치고 미친 척 휴가.

며칠 전부터 내 네톤 아뒤는 '토꾜로 토끼기 D-xx'.


공주박물관에서 둘러봤던 문화유산 중에 눈에 띄던 것 하나,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의 왕관.

그야말로 'before & after'를 내걸고 선전하기 딱 좋을 만큼의 드라마틱한 차이를 보이는 오리지널과 카피.


인간은 왕관이랑 달라서 지금 내 상태가 후줄근한 왼쪽인지, 그래서 오른쪽의 살짝 얼띠지만 번쩍번쩍한

모습으로 옮겨가려는 건지. 아님 오른쪽으로부터 다소 후줄근하고 꼬질꼬질해졌지만 시간의 향취가 묻어나는

왼쪽으로 옮겨가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 중 하나는 before,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after가

되겠지 뭐. 아님 말고.ㅋㅋㅋ


해서, 9/1~5 출타합니다~*


< 생존 일본어 어휘대백과사전?!?!? >

곤니찌와, 야빠리, 기모찌, 가와이, 요로시꾸네, 오이시, 아레, 아리가또, 니뽕, 이예, 하이, 센세, 스미마센, 고멘고멘, 삥, 마끄도나르도, 다찌마와리,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오겡끼데스, 사요나라, 곰방와, 도죠, 사께, 아사히 비루, 오꼬노미야끼, 오네가이시마쓰, 기무치, 다꽝, 덴뿌라, 큐슈난지, 헨타이, 히키코모리, 오타쿠, 망가, 미야자키 하야오, 잇힝, 아사다 마오...;;;;







● 일시 : 2010년 8월 20일(금) PM 18:18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옛 "異彩가 꿈꾸는 경험적 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http://ytzsche.tistory.com)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 내용 : 본인이 알고 있는 도쿄/오사카의 강추 여행지를 알려 주세요!!
 
 1) 여행지의 이름과 가는 방법, 본인이 그곳을 강추하는 이유까지 적어주시면 좋겠습니다. 
 2) 동선과 시간을 감안하여 하루 코스를 제안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제공 : 초대장 8장

제공기준 : 여행 일정 및 장소에 대한 정보를 검토하고 가장 제게 맞겠다 싶은 정보를 주신 분을 여덟분 선정토록 하겠습니다^^

이왕이면 너무 잘 알려지고 가이드북마다 빠지지 않는 그런 곳 말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본인의 경험상 너무너무 좋았다 하는 곳이면 선정될 가능성이 높아지실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대장을 드리는 걸로 너무 고급 정보를 부탁드리기엔 염치가 없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녀와서 리뷰는 꼭 올리는 것으로 보답하도록 할께요!!)


In Hono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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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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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V.P
ytzsche.tistory.com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마침 밤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고 나니 3시반. 전철다니길 기다리기로 하고 여관과
아가씨를 권하는 여성분들께 죄송해하며 비됴방으로.


모든 곳에서 의미를 찾으며 모든 곳에서 이러저러한 지침을 받으려는 건 물론 아니지. 때론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도 하고 그저 일종의 재미만 요구하는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고. 그치만 하다못해 무협지나 만화에도

무언가-말투던 단어건간에-得이 될만한 게 있다는 게 내 경험이라서. 이 영화보고 나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멋진 영화인데..무언가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느낌. 마술을 볼때처럼,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한구석이

미진한 느낌이랄까. 스토리 끝의 갑작스런 반전에 원인이 있었나..


그 생경함의 출처는, 숙고 끝에 다다른 답안인데 아마도 이질감인 거 같다. 전혀 말이 안 되는 환타지틱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며 '빙의(라 부를만한 것)'의 허무맹랑함을 거의 완벽히 지워버렸으니

말이지. 하긴 동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거보다 정도가 훨씬 세지 싶네. "우리는 우주에서 왔어!" 정도로.


마지막의 히로시에 료코가 '까슬까슬' 아빠-남편의 턱을 만지는 장면에서야 군더더기같던 결혼식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결국 남편이 그녀를 딸로 호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는 멋지게 그 변화-아내에서 딸로의-를 이루기
 
위한 연극을 했던 거..남편-아빠는 잠시 발끈해서 그녀의 새 신랑에게 제의를 하고..두대 갈기겠다는, 한대는

딸내미를 위해. 한대는 그녀를 위해. 한대를 있는 힘껏-머리도 희끗해졌으면서-갈기고서 잠시 pause..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새인생이 시작된 걸 축하해.


그저 맹목적인 애정 내지 의욕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뿌게 만들어내기가

곤란하다. 그저 무작정한 친밀하고도 따스한 분위기만이 맥없이 흐르는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담을 그릇을

잃어버린 정신이 역할갈등을 겪으면서..어찌할 수 없는 그 변화를 수긍하기 위한 서로의 노력. 그 노력을 눈멀지
 
않게 하기 위한 이벤트가 결국 영화의 중종반간의 스토리지 싶다. 거의 성공해가는 단계에서 굳이 그걸 폭로하는

그녀의 의도가 남편에게 전해지는 순간, 주먹은 멈추고 그는 웃어 줄 수 있게 되어 결국 사랑이 성공하는 셈이랄까.


성공...이란 말보다는 매듭..이란 말이 더 나을라나. 사랑의 매듭.


어쨌거나 지금은 비됴보고 집에 와서...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ㅋㅋㅋ



(2003.12.24)

몰랐는데 '카모메 식당'과 감독이 같다. 모타이 마사코라는 주연 배우도 세번째 여자로 등장했었다. 알아채기

전에도 왠지 두 영화가 느낌이 같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용한 이야기일 거라고.

사실은 그런 첫인상과 감독과 배우 한 명 빼고는 많이 달랐다. 가끔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거나 심지어

능청스럽다 싶도록 느그지게 빼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닮았지만, 느낌은 영 달랐다.


전통과 인습, 혹은 전통과 전설. 그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을 이렇게 유쾌하게,

또 깊이있게 표현한 영화는 잘 못 봤던 거 같다. 금테둘린 채 무겁게 먼지 속에 가라앉은 '전통'의 이미지가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바가지머리'로 치환되어 버린 순간, 파리의 최신유행 빠숑(fashion)과 촌티 사이를

위태하게 넘나드는 그 스타일을 경계로 꽤나 근본적인 이야기가 작은 마을 속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의 동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가지 머리' 마을로 들어온 '찰랑찰랑 갈색머리'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질시하는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질투와 부러움을 성찰하고 솔직히

소리내어 고백할 줄 안다. 외부인을 맞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기적인'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친구가 되고 덩어리로 뭉쳐든다. 그렇게 열린 채로, 나이많은 사람부터 무서운 엄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통'이라며 예스라고 할 때 쉼없이 물음표를 매달고는 급기야 전통에 반대하며 가출도 감행하고 시위도

하는 거다. 커서 멋진 노를 외치는 멋진 데모꾼이 될 거다.


비록 살색그림 가득한 빨간 책에 열광하고, 슬슬 철봉에 거기도 문대는 맛도 알아버린 장난꾸러기 녀석들이긴

하지만, 만약 '어른이란 타인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꼬맹이 아버지의 기를 쓰고 멋져보이려는 말이

맞다면 녀석들은 이미 어른인지도 모른다. 마을의 룰, 규칙, 전통보다 먼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전통'이 깨져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아프게 될 사람을 또다시 먼저 생각하는 녀석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바가지머리를 유지하는 건 누군가에게 싫은 일이 되니까 반대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머리를 없애는

건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는 거다.


그 아이들과 미용실 아주머니의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는 수미상관, 그렇지만 아이들의 머리모양은

바뀌었다. 바리깡으로 밀리고 나서는 아직 형태를 잡지 못했다. 다시 바가지 머리로 길들여지지는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강한 척 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울어버렸댔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아픔을 모두에게 남긴다는 걸 고백함에 다름아니었다. 아주머니 역시 어른이니까

그 어른스러운 아이들에게 우악스럽고 일방적인 아픔을 전가하진 않을 거다. 어른이니까 조금은 더 양보하고

참아주면 좋겠다.


바가지 머리, 그런 거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모든 건 변하며 사람은 늙으니까, 실은 모두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척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잇값은 해가면서,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아픔, 짊어지게 될 아픔은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떼 피워가며 빨갱이니 뭐니 난동피우는 늙은이들, '反기성세대'라며 갈아엎자느니

죽이자느니 증오의 언어를 뱉는 젊은이들, 둘다 촌티 풀풀 나는 바가지 머리다.



어디나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지만, 핀란드는 다르다. 열심히 바닥을 훑으며 줏었던 버섯들을 어느새 흘리고

올 만큼 사람을 홀리는 숲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소박한 식당에 모여앉아 밥을 챙겨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네들의 손놀림, 몸가짐,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여유로움'과

'아늑함'이라는 단어를 깊이깊이 각인시킨다. 낯선 타지로 여행을 나선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걸까.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물이라 했던가. 그냥 여기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눌러 앉을 수도,

지도를 펼치고 눈감고는 아무데라도 찍어서 떠날 수도, 여행가방의 분실을 핑계삼아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머무를 수도 있는 건데. 그 곳에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세 여자가 있었고, 그녀들은

가게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대로 젖어든다. 정정해야겠다. 핀란드라 다른 게 아니라 그녀들이 다른 거다.


핀란드가 아니어도, 그녀들이라면 어디서든 숲을 살갑게 헝클어뜨리는 바람을 불러일으킬 거 같다. 어디서든

빵을 굽고 주먹밥을 쥐며 손님들을 다정하게 불러모을 거 같다. 그런 가게가 근처에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실 커피에 마법의 주문을 속삭여주는 주인이 있고, 소박한 가게의 인테리어에 맞는 앞치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걸치고 있는 점원이 있고. 그런 가게가 있다면 잠시 핀란드로, 어디로던 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앉아있을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그녀들도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지는 않을 터다. 완벽하다 싶은 조합은 하염없이 멈춰있을 수는 없고,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아쉬워 하며 빈자리를 쓸쓸해 할 거다. 몸이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떠나

더이상 이 잔잔하고 고요한 '여행'의 동반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에 푸짐하게 웃어줄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데모, 그렇지만, 세상의 끝날에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맛난 것들로 파티할 때 다시 모이리라는 기대만 있다면야. 결국은 다시 모으고 모일 수 있으리란

기대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다.이.조.브.


아오모리? 어딘지 사실 잘 모른다.

사과로 유명하다니 여기 사과가 그럼 아오리 사과인가, 이런 잡생각이 떠오를 뿐이고,

네부타 마츠리로 유명하다니-'마츠리'가 축제란 뜻이니까-주지육림의 축제가 벌어지는가, 싶을 뿐이고.


근데 알고 싶다. 작년말 후쿠오카를 짧게나마 다녀오고, 그 전에 트랜짓하며 딱 하루 도쿄를 거닐었던 기억뿐인데,

일본에 대해 점점이 박혀 있는 기억들이 커지고 넓어져서 선이 되고 면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혹 내가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빌려 '아오모리'라는 곳을

느껴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은, 이 응모는 꼭이 내가 가고 싶다, 라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 중 누군가는

당첨될 그곳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피드백 요청의 글이 되겠다.



* 신청은 이곳으로. 아오모리 서포터즈 모집 이벤트!



'환상의 커플'에서 '서프라이즈', 그리고 '출발 비디오여행'으로 이어지는 일요일 오전의 프로그램 라인업은 내겐

늦잠에 대한 욕망을 식히는 강력한 유인이 되고는 한다.

방금도 여느 때처럼 서프라이즈를 보며 늦은 밥을 먹고 있는데, 북한에서 로켓을 발사했다는 일본 보도가 인용되며

속보가 뜨더니 여지껏 특보를 계속하고 있다. 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가 남았는데.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도 모르는데.(아직까지 난 첫번째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로봇 애인 이야기)


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가 북한의 로켓 발사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야 농담삼아 말한 거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다. 그것도 대부분의 소스는 일본 측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들이야 아소 다로 총리의 국내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대대적인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거고, 북-미간 관계가 일본의 입장과는 달리 급격히 호전되는

상황 자체를 못마땅해 하는 차에 요격이니 뭐니, 소란의 판을 키우고 싶었을 거다.

미국은 24시간 뉴스 채널 CNN에서 속보로 떴지만 관련된 정부의 입장은 나오지 않고 있고, 러시아나 중국은

예견된 상황이었으니만치 유별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댄다.


북한의 말대로 로켓이 통신위성이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하고, 그렇다면 국제사회의 반응은

더욱 온건해질 수 밖에 없지 싶다.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했니 어쩌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교적수사일 뿐

가장 중요한 키는 미국과 북한과의 입장 조율에 있을 거고. 북한의 로켓 발사가 거의 성공적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이제 뭐, 상황은 끝인 거 아닌가.

일본의 요격이나 발사 실패로 인한 일본 본토의 피해라거나 그런 것 없이, 발사 지연에 대한 온갖 억측들을

불식시키고 깔끔하게 날라갔고, 그렇다면 남은 건 북한의 무력(과학력?) 과시에 대한 주변국의 인식 변경,

그리고 이로 인해 압박을 받게 될 미국의 적극적 대응이다. 그게 전향적 접근이 될 지, 혹은 더욱 강경한 접근이

될 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당장이야 원칙적이고 강경한 이야기를 해도 결국 유화적인 태도로 나설 거 같다.


근데 이렇게까지 공중파를 낭비해야 하나? 그것도 심층적인 분석은 거의 없이 외신은 어쩌니, 외국 정부 반응은

어떠니...기실 시끄럽게 떠드는 건 일본밖에 없는데. 이번 이슈에 대해 좀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하는 보도를

하던가, 아니면 그냥 속보로 화면 밑에 둥둥둥 떠다니는 자막으로 만족하던가. 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다. 보도를 위한 보도? 어쩜 이런 식의 감정적인 반응이 북한의 의도에 말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 반해 '벚꽃놀이 나선 상춘객'들의 반응은 쿨하다. 왜 이렇게 야단스러운지 모르겠다는.

대부분 국민들이 체감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 쟤네 또 뭐 쐈나..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근데 한국은, 대체 북한에 대한 종합적인 전략과 일관된 자세는 있기나 한가. 아무런 비전도, 전략도, 혹은

최소한 북한에 대한 입장조차 불분명해 보인다. 깝깝시리.


아...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는 대체 언제 하려나.



후쿠오카(福岡)이라는 지명을 풀어보면 '행복의 언덕'이란 뜻 정도 되려나? 그곳에서 지냈던 며칠동안의 추억을

마음 가득, 그리고 카메라 가득 담아서는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아사히맥주공장에서 공장
견학과 함께 맥주

시음도 맘껏 하고, 다자이후에 가서 텐만구, 큐슈박물관, 고묘젠지, 그리고 엉성하게
한글 광고가 써져있던

가게들도 구경했다. 이수영 뮤직비디오에 나왔다는 유센테이코헨, 한때 큐슈번주의
별장이었다는 그곳에 가서

한적한 정원을 거닐기도 했고, 라멘과 음식들은 매번 어김없이 성공적이었으며,
아크로스 후쿠오카에서 바라본

후쿠오카의 전경은 굳이 올라가보길 잘했다 싶었다. 캐널 시티나 어딘지
딱히 짚을 수 없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헤매듯이 쇼핑도 했었다. 구시다신사에서 짝짝 박수치며 흉내를
내보았던 건 역시 잘했다 싶고, 순박해 보이는

아저씨가 한국인이라며 반겨주던 텐진 시내 포장마차(
야타이)는 꼭 한번 더 가보고 싶었더랬다.

당연한 듯 길을 잃고서는 지도 탓을 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다른 길로 빠져서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같은 풍경들을 마주했지만, 때로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 그저 쉬고 싶은 맘뿐이기도 했다. 같이 배를

타고 왔던 그 많던 한국인 여행자, 혹은 관광객들은 전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아사히맥주공장에서 한 무리의

한국인 단체관광객들과 맞닥뜨린 때 빼고는 아무 눈치 안 보고 활개치며 다녔었다.

후쿠오카에서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 마을을 꼭 가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살짝 섭섭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으로 하카다항 국제터미널로 향했다. 사실 '행복의 언덕'

후쿠오카에서는 서울과 부산이 도쿄보다 가깝다고 한다. 그만큼 가까운 곳이니 언제든 맘만 울컥하면 달려올

수 있지 않을까..환율만 좀 미쳐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번에 나설 때도 고작 사흘만에 백엔당 원화환율이

백원 이상 올라 천오백원을 넘나드는 바람에 식겁했었다.

터미널 이용권을 구매하고, 유류세를 별도로 또 내야 한다. 유류세는 2,000엔이었던가 부산항에서의 유류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은데 터미널 이용료는 약간 더 비싼 것 같다. 대인 500엔. 부산항이 2,500원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실제로 여행에서 쓰는 경비 중에 참 많은 부분이 교통비로 들어간다.

마치 공항에 있는 항공사 부스처럼 말끔하게 차려진 게 프레임 내에서는 그럴 듯 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실 저

프레임을 넘어서는 곳에는 벽들이 버티고 있는, 그런 조그마한 여객 터미널이다.

역시 일본, 이라며 한국을 향해 돌아설 때까지 날 감탄케 했던 건 저 반짝거리는 쓰레기 분리수거통. 물론 한국에도

저렇게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도록 구분되어 있는 쓰레기통이 대세라긴 하지만, 하나씩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것도

드문데다가 왠지 저렇게 깔끔하게 운영되는 건 못 본 거 같다. 뭐 여기라고 별 수 있겠냐 싶고 알고 보면 어제 밤에

새로 사서 들여놓은 쓰레기통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최소한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봤던 것들은 지방

중소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있는 것처럼 퀘퀘하고 지저분했었다.

일렬로 서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배를 타고 있다. 조그맣지만 참 잘도 달리는 배, 비록 바닷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게 꽁꽁 싸매진 상자박스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등버스 정도는 되는 좌석과 안락함이 느껴져서 그닥

답답하지는 않았다. 아마 갑판으로 나가서 바람을 쐴 수 있게 열린 구조라면 벌써 몇 사람은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를 못이기고 날아가버리지 않았을까.

부산으로 향하는데 조금씩 물방울이 창문에 튄다 싶어서, 파도가 높구나 했다. 그런데 날카롭게 찢긴 칼자욱처럼

쭉쭉 늘어지는 빗방울들이 하나둘 그어지더니, 유리창을 가득 덮어버렸다. 海雨.

좌석 앞 주머니에 들어있는 면세상품 쇼핑책자. 저런 식으로 배가 바다 위로 배의 뱃면을 둥둥 드러내놓고 달리다

보니 그렇게 흔들림도 없고 왠만큼 거칠어진 파도에도 크게 영향받지 않나보다. 바다 위로 비가 솔찮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다지 배의 진로에 장애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부산. 짧은 여행은 끝이 나고, 너무너무 길어서 그 사이 누군가는 지쳐 나가 떨어지고 또다른

누군가는 질려서 식욕조차 잃는다는 한평생만큼 이어지는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후쿠오카 여행기 끝.
 


"삶에 대해 곰팡내를 풍기는 낡아빠진 시시한 말들을 지혜로 여기는 자는 식탁에 앉을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심지어는 맛있게 먹기 위한 식욕조차도 가지고 오지 않는다." F. Nietzsche.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떠나기 전에도 구시다 신사가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또한 어떤 의미가

서려 있는지 그런 건 잘 모르고 갔다. 다만 여행정보를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면서 살짝 흠집나듯 기억에 남았던

건 누군가 구시다 신사에서 좋아라 하며 일본식 참배를 하는 사진을 올렸던 여행후기에다가, 또다른 누군가가

이곳엔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마냥 좋아라 할 수만은 없지 않냐고 쓴소릴

던졌던..그런 익숙하고도 새삼스런 반응이었다.


익숙했던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가 마치 '연리지'처럼 얽혀 있어서 어딜 건들든 양국의 상처와 피해의식을

자극하기 십상이란 것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부부처럼 일심동체가 된 연리지라고 해도 알고 보면 하나로

붙어버린 지들끼리 영양분과 수분을 더 많이 흡수하겠다고 싸우지 않을까 싶다. 인간과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전자 사이에도 이기심이 그칠 날이 없어 쉼없는 전쟁과 꼼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본이나 한국이나

오랜 원한과 오랜 우월감-열등감 관계에 부비부비해왔기 때문에 더욱 날카롭고 민감한 듯 싶고, 그게 만성화되다

보니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거 같다.


그러면서도 또 새삼스러웠던 이유는, 그런 이야기와 감정의 골이 남아있는 그 경계에 내가 직접 찾아 본 적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지 싶다. 말하자면 옛 적국, 혹은 옛 조국의 원수 품을 찾아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생생한 과거를 들추어 내고 마는 기회가 될 거 같았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은 코빼기도 못 봤고 난 그런 뭔가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기보다는 그저 조용한 도심 속 절간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칼은

유료 공개인데다가 공개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다나 머 그렇댄다. 별 관심도 없긴 했다. 명성황후의 피를 부른 건

그 칼이 아니라 이미 헐떡대며 숨을 몰아쉬던 오랜 왕국, 그리고 강성하게 일어나던 이웃나라와의 구조적 문제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하자면, 명성황후가 조선의 국모란 말은 좀 찝찝하다.

그 말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 어떻게 대통령과 관료 등 근대적 정치시스템을 전근대의 왕, 사대부의

이미지와 중첩시킬 수 있는지까지 생각하면 더 찝찝하다.

조선의 국모란 말, 그것만 놓고 봐도 그렇다. 시해당하기 전 당대 조선사람들에게는 외국문물에 홀린 사치스러운

여자라거나, 시아버지 대원군을 잡아먹고 무능력한 고종을 이리저리 조종하는 교활한 여자라거나, 그런 평들이

적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실제로 그녀가 조선이 혼란기에 길을 찾아 나서는데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 어떠한

비전을 갖고 있었는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못할 만큼 당시의 조정이 미미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최소한 그녀가 조선왕조와 조선이란 나라의 근본, 백성들을 위해 크게 품을 줄 아는 '국모'였는지는 의문이다.


가설 1. 그녀는 말하자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손에 처형당함으로써 '국모'의 지위를 획득한 게 아닐까.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자국의 '신민'되었던 자들에게 처형당하고 왕조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면, 그녀에게 과연

'국모'라는 칭호가 가당키나 했을까. 물론 그녀를 제거함으로써 대한제국황실의 외교 다변화 노력(혹은 전략없이

시류에 따라 임기응변하는데 그치는, 힘없는 국가의 우울한 이이제이 노력)이 좌초하였다거나 고종에게 확실한

무력 시위를 통해 다른 움직임을 미연에 봉쇄할 수 있어 이후 일본의 침략이 수월해 졌다는 지적도 있지만..결국

전근대적 사회를 극복하려면 그녀와 황실은 어떤 식으로던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을 거다. 최소한 그런 거다.

그녀를 '국모'라고 칭하거나 그에 준하는 애정을 표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 


그녀가 드라마틱한 목소리로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한국인임에서

비롯하는 일말의 가슴뭉클함을 느낀다면, 그건 아마도 그 외침의 대상이 외적, 일본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닐까 싶다. 어떤 면에선,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일본인에게 당했기 때문에 그녀가 외려 민족주의적인 아이콘으로

스러져가는 왕조의 상징으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가설 2. 그녀를 국모라고 칭하는 데에는, 채 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대한제국 혹은 제왕적 시스템에 대한 일말의

기대나 환상이 있는 건 아닐까. 이건 좀더 위험한 건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라곤 하지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과 얼개 이외에 사람들의 의식이나 사고방식은 여전히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면이 없지

않은 거다. 예컨대 한국에 여전한 사농공상 류의 귀천의식, 대통령과 공무원에 대한 거대한 복종(그만큼 거대한

불만은 차치하고라도), 교육(이라고 쓰고 시험이라고 읽는다)을 통한 신분상승의 오랜 꿈, 그리고 성숙한 토론을

어렵게 하는 온갖 권위(나이, 학력, 지역...)에 대한 인정. 이야기의 소요를 일으키고 시끄러운 논쟁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악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누군가 '성군'이나 '천자'와 같은 제왕적 지도자를 다시 소환하고 싶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실제로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로 한번 뽑은 대통령이니 더이상 어쩔 수 없다는 류의 입장이나, 박정희같은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시끄럽기만 한) 정치인들 다 쓸어넣고 비전을 제시하길 바라는 류의 시대

착오적인 입장이나,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는 육영수같은 영부인상을 얻기 위해 시장통과 뒷골목으로 발품을

팔고 또 일정한 효험을 보고 있는 정치인의 아내들이나, 오로지 부모의 은덕을 입어 아무런 정견도 소신도

없는 사람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굳건한 상황이나...후우...정말 '국모', 그리고 '국부'를 원하는 걸까.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과 왕에게 바라는 것은 달라야 하며, 대통령을 대하는 예의는

하늘의 현신인 왕에 대한 예의와는 달리 인간을 대하는 예의이면 차고 넘친다. 대통령님, 대통령 각하, 요딴 단어는

좀 피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파란 기와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과 그 주변 똘마니들은

전혀 모르는 거 같아서 중언부언해버렸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아니다 싶을 때 욕도 할 수 있고

성질 못이기면 자리에서 끄집어 내리자고 외칠 수도 있고, 실제로 끄집어 내릴 수도 있는 예의도 포함되는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12일 라디오연설에서처럼, 자신이 야기한 국회 내 혼란상을 두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해머'로

내리쳤다느니 따위 막말을 하는데야...

어쨌든,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구시다신사 이곳에 있다고 해서, 글쎄..굳이 이곳을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이를

악물며 돌아본다거나, 괜시리 숙연해지고 장엄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건, 옵션이다.

사람이 죽은 것 그 자체가 분명 비극이지만, 거기에 뭔가 의아한 정치적 의도가 첨가된 의미를 부여하며

'충성스런 한국인(더구나 당연하다는 듯 조선인의 연장으로서의 한국인)'으로서 의식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싶은 사람이나 그런 진지함을 뒤집어 쓰던가. 역사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굳이 "어떻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있는 신사에 들어가 웃고 박수치며 절할 수 있느냐"라고 갈구지 않아도 뭔가를 생각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내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돌아본 구시다 신사, 방금까지 주절주절 써내리면서 몇장씩 사진들을 올렸지만..다른 신사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소원을 빌고, 물로 입을 헹구고, 잘 다듬어진 정원을 보고..다만 이 때 무슨 행사가

있던 건지 아님 여긴 늘 저렇게 대나무 장대를 세워두는지 모르겠지만, 저거 왠지 익숙하다. 무당들 집에 세워진

깃대랑 비슷한 의미, 비슷한 유래 아닐까.

절하는 법이 구분동작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1) 사당 앞의 저 굵은 줄을 한번 당겼다가 놓고는, 가볍게 목례하듯

반절을 하고, 2) 두번 절하..라는 거겠지? 3) 박수를 두번 짝 짝 치고, 4) 다시 한번 절을 한다. 5) 마지막으로는 음..

또다시 가볍게 목례하듯 반절을 하라는 건가..사람들이 돈던지고 저렇게 뭔가 꾸벅꾸벅 하는 걸 옆에서 아무리

지켜봐도 왜그리도 구분동작과 매칭시켜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던지.


함 나도 해봤다. 너무 어설프고 겸연쩍어서, 뭔가 빌고 어쩌고 한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이 그냥 몸짓만 최대한

따라해보겠다는 심정으로 했다. 취한 것은 흉내, 버린 것은 내용..이랄까.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소원을 적어 주렁주렁 걸어놓는 저 나무판..그림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이 복던지는 고양이가 젤로 인상적이다.

눈밑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느낌으로, 무지 지치고 힘들어보이는 표정이랄까. 왠지 저녀석한테 복을 받아야 할 게

아니라 저녀석한테 복을 되려 좀 줘야 할 거같은 맥빠진 눈빛. 역시..눈빛이 생명이다.

신사 내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화려한 가마. 저건 누굴 태우고 언제 쓰이는 건지, 박물관에 진열된 과거의 유물과

달리 아무런 설명도 안 붙어있다. 그건 아마 여전히 실제로 쓰이고 있고, 박제화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의 손때가

더해지고 있기 때문일 듯.

좀 뜬금없다 싶던 이 오줌싸개 소년은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빨간 머플러를 감고선 안 어울리게시리 시크하달까

어른스럽달까 싶은 표정을 짓고 있다. 물이 쫄쫄쫄 나오는데, 리얼하구나 싶었다.

신사 한켠에는 무슨무슨 단체나 개인이 봉헌한 듯한 저 엔자 문이 차곡차곡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그 열주문들이

굳건히 박힌 흙바닥에 빈틈없이 채워져있는 갈퀴질 자국. 저렇게 빈틈없이 바닥에 고랑을 내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자신이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빠져야 할지, 그리고 언제 밀고 언제 당겨야 할지 같은 '밀고 당기기'의 고수가

한 갈퀴질임에 틀림없다.

신사 본당은 아니었고 옆에 별채처럼 세워져있던 건물. 프랑스에서 네모난 하드 모양으로 싹둑싹둑 가차없이

잘려있던 가로수들에 깜짝을 놀랬었는데, 여기는 뭐랄까 원통형 모양으로 나무를 정돈하는 건가. 그치만 주변의

유유한 연못과 휘영청 늘어져내린 나무들 사이에서 저렇게 혼자만 "Simpson"와이프같은 머리 모양으로 가꿔져

있다는 건 그다지 나무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유쾌한 기분은 아닐 거 같다.

그리고 일본스럽다..라는 식으로 내게 굳어지고 있는 이미지들, 야박하리만치 단정하고, 나무 자체의 발색을 살려

차분한 느낌의, 화려하지 않고 잘 정돈된 네모난 벤또꾸러미같은 신사 건물들.

이 처자는 누군데 딱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구시다신사에서 밖으로 걸어나가는 길. 뭔가 등불도 주렁주렁하고,

글자 빼곡한 비석도 좌우로 시립해 있고, 그리고 신사 밖을 향해 뻗은 대리석 포장길을 따라 걸으면 바로 버스와

사람들이 번잡스럽게 살고 있는 후쿠오카 시내라는.

놓칠 뻔 했는데, 한켠에는 또 돌로 만들어진 그 예의 문들이 차곡차곡 채워져있다. 그리고 그 앞쯤에서 뭔가를

이빨가득 물고서 수호하고 있는 개인지 늑대인지 여우인지, 여튼 네발짐승 하나의 석상.

구시다 신사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담배 한대를 맛있게 피우고 떠나는 흡연장소의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사이 적지않은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담배를 한대 뻐금대며 태우고는 떠나갔더랬다.

그리고 그 앞에 놓여있던 재떨이가 압권. 이런 사고가 잦은가..? 아이의 얼굴과 담배의 불티부분, 그리고 어른의

손 높이가 같은 높이로 그려져있다. 그 밑에 떡하니 붙어있는 거대한-어른 몸보다도 길고 두꺼운-느낌표.




이번 여행기는 좀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흘러가는 거 같은데..하카다항에 내려서 패키지 관광객들이 우르르 대형

버스에 올라타고 나면, 다소 한산한 느낌의 하카다항 건물 앞 도로변에 붙어있는 버스 정류장 안내판. 일어,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적혀 있다. 텐진과 하카다 역 방면 버스가 몇 번인지, 운임이 얼마인지에 대한 2008년 11월 버전

정보랄까.

역시 하카다항 국제터미널에서 주요 버스 노선이 몇시몇시에 출발하는지에 대한 2008년 11월 버전 정보.

저렇게 세분화된 주중, 토요일, 일요일의 버스 시간표는 거의 오차없이 딱딱 제시간을 맞췄던 것 같다. 한국선

이리저리 구불구불해서 좀체 불편한 지하철과 배차 간격이 쉽게 지켜지지 않는 버스 때문에 도무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데, 저렇게 시간대를 딱 지켜서 운행되는 버스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막차 시간이 정말 이르더라는 것 정도?

하카다항 터미널건물에서 나와 처음 밟은 후쿠오카 땅, 그리고 처음 본 풍경은, 어찌 보면 살짝 김이 빠질 만큼

한산하고 변두리스러운 느낌의 도시랄까. 그치만 하늘이 어찌나 이쁘던지 마냥 설렜었다.

아까 그 버스 표지판 앞에 있는 정류장. 제각기 캐리어 하나씩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버스 노선도를

눈여겨 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지도를 신문처럼 펼쳐 보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그 위로 그야말로 하늘색이

그득히 담긴 하늘.

경제학 복수전공을 하면서 졸업논문을 준비할 때, 버스나 지하철 광고판이 얼마나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일종의 경제적 UP & DOWN의 지표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디어를 냈었다. 지하철광고공사나 그런

곳의 협조를 얻어 지하철 광고가 어떤 형태로 몇 곳이나 가능하며, 실제로 팔려나간 정도는 얼마나 되는지 자료를

얻을 수 있다면 경기를 선행하거나 후행하는 식으로 추세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텅빈 지하철 광고판, 계약기간이 지나 뒤집어 게시되고 있는 광고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 탓일까. 외국에 나가면 광고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를 꼭 유심히 보게
 
된다. 여름에 갔던 파리 지하철은 빈 공간이 거의 없이 광고가 꽉 차 있었고, 이번 일본 여행에서 봤던 버스와

지하철 광고판도 그닥 텅 빈 곳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이런 식의 버스 사용안내로 채워진다고는 해도.

앞에 타신 한국인 아주머니들은 소녀처럼 설레셨다. 당장 버스를 타고 요금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부터 설왕설래

하시면서도 마냥 즐거우신 표정들. 그분들께 알려드린 것처럼, 버스 뒷문으로 탑승해서 정리권이라고 적힌 곳에서

번호표를 떼어내 자리에 앉으면 된다. 그러면 버스가 출발하고, 앞쪽에 있는 1부터 32까지 숫자가 적힌 전광판에

버스 승차금액이 나타나게 된다. 구간에 따라 요금이 할증되는 시스템인지라, 정류장을 많이 지나칠수록 180, 220,

250..뭐 그런 식으로 숫자가 커진다. 그리고 내릴 역이 되면 자기가 갖고 있던 정리권 번호에 맞는 금액을 지불하고

내리면 된다는 식..

정리권은 이런 식으로 생겼는데, 아주 엷게 한자로 정리권, 그리고 오른쪽엔 좀더 진한 글씨로 숫자가 적혀있다.

흔들리는 차안에서 일케 땡겨서 찍을 수 있었던 이유, 버스가 신호에 걸리거나 해서 멈추게 되면 바로 시동을

꺼버렸다. 에너지 절약 차원인 걸까 아님 공기오염 방지 차원인 걸까..이래저래 좋은 거 같긴 하다. 시동을 자꾸

껐다 켰다 하면서 기름이 더 소모되는 게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머물었던 호텔은 하카다역 옆의 도요호텔(東洋호텔)이란 곳이었다. 머 특별할 거 없는 조그맣고 깔끔한 비즈니스

호텔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카다역 근처에 있는 호텔들보다 텐진 시내에 있는 호텔들이 더 놀기에는 좋지 않나

싶지만, 암만해도 하카다역 근처가 좀더 숙박료가 쌌던 거 같다. 그리고 머, 후쿠오카가 그렇게 거대한 도시도

아닌지라, 사실 숙소는 어디든 상관없다. 워싱턴 모뉴먼트 옆에서 노숙도 했었는데 모.

도요 호텔. 밋밋한 외관만큼이나 할 말없는 밋밋한 내부 인테리어였지만, 그래도 2박3일간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중간에 쉬러 돌아오기도 하고..자그마한 술판을 차리기도 하고..

11층짜리 건물이었구나, 머물렀던 곳이 8층이었던가..그러고 보니 호텔을 들고 나면서 한번도 다른 손님들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탔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심플한 '開', '閉' 표시만 덩그러니.

호텔 로비. 사실 이거 호텔이라기에도 좀 민망할 정도지만, 그렇게 고급스럽고 럭셔리한 게 아직 몸에 맞지 않는

나이인지라(혹은 나이라고 주장하는지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거칠고 무질서스러운 나라들에서 막무가내식으로 돌아다니는 배낭여행이 훨씬 좋다. 다만 저녁 때에는 단백질이나

좀 그럴듯한 음식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들기는 하고 있지만.

호텔에 짐을 던져주고 걷기 시작한 거리에서 딱 마주친 기모노 복장의 아주머니 네 분. 일렬횡대로 인도를 꽉

채우고 앞서 걷고 계셨는데 어딜 가시는 건지. 뭔가 7인의 사무라이 필이 살짝 나는 게 어딘가 한판 하시러 가시는

건 아니겠지.

거리의 핸폰 가게. 우와~ 이뿌다, 싶은 핸드폰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엘쥐의 쪼꼬렛폰을 여태 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아직 맘에 드는 디자인의 핸드폰을 못 봤다..란 거였는데 글쎄, 앞줄의 귀여운 것들이나 뒷줄 오른켠의

빤짝이는 유리상자같은 것들이라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 같다.

무슨 가게인지 얼핏 감이 올 수 밖에 없었다. 커다란 강아지 인형, 그리고 창문 가득 붙어있는 개발바닥 자국.

멀찍이 보면 강아지 사진이나 엑스레이 사진같은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실은 요 강아지 인형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귀엽다 싶어서.

후쿠오카에서의 첫 점심. 구시다신사를 향해 걷던 도중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는 작은 골목을 발견했다.

뭔가 인사동 뒷골목이나 명동 뒷골목 같은 곳의 맛집 거리같은 느낌? 이 골목에서 역사적인(?) 첫 점심을

해결하기로 맘먹고 골목으로 진입했었다.

실망스럽게도 아직 시간이 이른지 문이 닫혀있는 가게가 많았다. 그 와중에 두둥, 문을 열고 있는 가게 발견.

라멘집이었고, 하카다의 라멘은 위시 리스트에 들어있었고, 배는 이미 고팠으며, 다리도 아팠기 때문에 냉큼

들어섰다.

자그마한 가게에 뭔가 사진과 장식품들, 쪽지가 빼곡하게 붙어있고, 양념장통이나 소스통마저도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비적대며 빼곡하게 공간을 메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요약컨대, 왠지 이집 맛있겠구나 하는 느낌.

일본어로만 씌여진 메뉴판에 몇 가지 런치 스페셜이 있길래, 그 중 아무거나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더니 요런

라멘이 나왔다. 저 안에 들어있는 무려...곱창. 곱이 가득한 곱창이 아낌없이 잔뜩 들어있었고, 가뜩이나 돼지뼈로

푹 고아진 걸쭉하고 진한 국물맛에 곱창의 느끼함이 더해졌다. 무지 맛있게 먹었다. 국물까지 싹 먹었더니 뭔가

장어를 세네마리 구워 먹은 만큼 몸보신을 했다는 느낌? 힘이 불끈 솟았다.

그렇게 힘내서 골목을 나서니, 바로 구시다 신사가 보인다. 고지를 불과 몇 걸음 앞두고선 든든히 속을 채웠으니

가히 최상의 타이밍. 그리고 골목 한 옆에선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한류스타들.


유명한 관광지 A와 B, 그 두 점을 이으며 달리는 길에는, 알게 모르게 숨겨진 재미난 것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치의 만화와 몽글몽글한 글씨로 뭔가 한국에서라면

딱딱한 표어로 "차에선 뛰지 맙시다" 정도로 (그것도 노란 바탕에 검은 고딕체 글씨쯤으로) 표현할 법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에 걸려서 잠시 멈춰설 때마다 시동을 아예 꺼버리고 대기하는 여유롭고 속편해 보이는 운전기사분들,

그걸 당연히 여기며 누구도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지인들...모두 낯설지만 내 호흡 역시 한번 길게

내뿜고 맘을 느슨하게 잡도록 해주는 순간들이었다. 텐진 시내 신호등을 건널 때마다 흘러나오는 살짝 유치하고

단조로운 느낌의 노랫소리하며...그런 순간의 강렬한 느낌들을 전하기란, 사진과 글을 아무리 이리저리 엮어보아도

좀처럼 쉽지 않은 일 같다. 어쩌면 내가 찍는 사진들은 아직 그런 긴호흡의 장면이나 느낌을 담아낼만큼은 커녕

당장 짧은 한호흡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어서 더욱 그럴지도.


그런 와중에 찍히는 아무 상관도 없고 내용도 그닥 부어넣기 힘든 이런 사진. 정말 단순히, 저 수달처럼 생긴

동물 만화캐릭터가 귀엽다는 느낌만으로 카메라를 들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찍어놓고 보니 느낌이 반감된다.

가와바타(KAWABATA)..? 여긴 텐진에서 구시다진자였나 캐널시티로 가던 중에 우연찮게 마주친 쇼핑 공간,

강남지하상가나 회현상가 같은 쇼핑 아케이드랄까. 제법이나 길게 이어진 통로 양측으로 의류, 악세서리, 소품,

음식 등등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복잡한 동선을 요하며 전체를 이리저리 훑어보기가 쉽지 않은

쇼핑몰 형태의 것보다 이런 식으로 일자로 쭉 늘어선 형태가 개인적으로는 더욱 보는 재미가 쏠쏠한 거 같다.

가와바타 쇼핑아케이드..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하고, 그 입구 왼켠에 세워져 있던 이 줄타는 느낌의 아저씨상이

잠시 시선을 끌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고 그중에 또 많은 사람들이 관광객처럼 보였지만 그다지

아무도 이 동상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갔던 듯. 그래서 나도 잠시 보다가, 슬몃 인파 속에 묻어서 아케이드

안에 진입하고 말았다. 사실 일본어만 주렁주렁 써져 있던 그 안내판을 아무리 봐도 뭔가 이사람이 누군지, 왜

포즈는 저모냥인지 알 방법은 없었던 거였다.

지그재그 양쪽을 즈려밟으며 조금씩 전진해 나가는 재미랄까. 그렇게 좌, 우, 좌, 우 가게를 하나씩 구경하다 보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직선거리로는 고작 몇백미터 밖에 못 나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또 그럴 때는

꼭 배가 고프거나, 다리가 무지 아프다는 신호가 오는 때이기도 하다.

그럴 때 문득 눈에 들어온 단팥죽 가게..랄까. 뭔가 아케이드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다른 가게들의 밋밋하고

특색없는 외관과는 달리 본격적인 모양으로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 마침 어디에선가 방송용카메라를

들고 가게 안에 들어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맛집 소개 프로그램같은 느낌?

안에 들어가니 몇 석 안되는 좌석이지만 이미 꽉 차 있는 상태였고, 가게 안 쪽은 바로 하천쪽으로 뻥 뚫려 있어

어르신들이 단팥죽..같은 걸 먹으며 문득문득 바깥을 내다보곤 했다.

이쯤 되면 그냥 한국의 단팥죽과 같다..라고 해도 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경단이 저렇게나 큰 데다가 단팥죽과

함께 먹는 게 단무지가 아니라 닥꽝(이거 어떻게 쓰는 거지..?)일 테니 꼭 한국의 그것과 같다고는 말못하겠다.

일본 음식스럽게 부드러우면서도 달달한 느낌.

그 단팥죽..같은 걸 먹고 다시 힘내서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던 중 만난 화지(和紙)가게. 정말 이쁘고 세련된 색감의

종이가 많기도 했고, 편지지, 편지봉투, 종이인형, 심지어 만들어지기 전의 종이인형 재료까지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어서 한참동안이나 질리지도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편지봉투들, 특히나 저 분홍빛이 왠지 마음에 팍 꽂히는 편지봉투는 사놓으면 언제든 누군가에게라도 편지를

써보낼 때 유용할 듯 싶었지만 말았다. 편지는 내용이 중요한 거다..랄까.

무슨 일인지 문을 닫고 있는 가게도 있었는데 그 문에 내걸린 표지판을 굳이 안 보더라도, 저 공손히 인사하고 있는

그림만 봐도 딱 알겠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문을 열지 않았다네, 라고. 그나저나 저 그림그려진 사람, 팔이 은근

무지하게 짧은 거같다. 목덜미를 넘어 등덜미까지 훤히 보이도록 깊숙이 수그리고 인사를 했으면, 두 손은 아마도

무릎팍이 아니라 바닥에 손바닥을 온통 대고 있을 정도로 내뻗어졌어야 정상아닌가 싶은데.

이게 바로 현실을 왜곡하는 만화적 상상력의 발현.ㅋ

그리고 또다시 느릿느릿 가다가 마주친 이 아저씨들. 아마도 행운권 추첨이라거나, 즉석 뽑기같은 거 아닐까. 이

아케이드 내에서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저 다람쥐통 같은 뽑기 기계를 돌려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시스템 말이다. 저 할머니는 아쉽게도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멋쩍게 돌아섰던 거 같다.

가다가 지쳐서 중간중간 후다닥 걸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재미없다 싶은 가게는 뛰어넘기도 하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시식코너도 몇개 스킵하기도 하면서 반대편 출구에 나왔다. 여기서 바로 구시다진자가 옆에 보였고

그 바로 옆에는 또 캐널 시티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던 것 같다.

캐널 시티로 가는 길, 후쿠오카중앙은행의 광고판이 떡하니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 이미 모인

채, 새롭게 여기저기서 도우려고 뛰어오는 사람들과 함께 후쿠오카중앙은행을, 혹은 일본경제를 앞으로 밀고

나간다는 느낌의 그림은 정말 일본스러운 뭔가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캐널 시티로 이어지는 통로는 무지하게 길어서, 후쿠오카 시내의 건물들 사이를 꼬불거리며 이어지는

길다란 육교같은 공중대로를 한참이나 걸었던 느낌. 조명도 침침하고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이 통로 끝에서

캐널 시티로 합류하면 별안간 대낮같이 밝고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쇼핑몰이 나타난다.

배고파서 들어갔던 어느 라멘집에서 열심히 라멘을 만들던 젊은 청년들. 여기는 무슨 체인도 아니고 딱히 이름난

맛집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일본 라멘이 정말 내입에 잘 맞거나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는 결론으로 날

이끌어준 장본인들.
뽀얀 국물에 둥둥 뜬 기름 몽우리. 그리고 얇지만 탄력있는 면발에 깊이 스며든 구수한 맛.

교자도 시켰더니 이렇게 세모난 모양의 만두가 나왔었다. 후쿠오카에 무슨 한입교자가 유명하니 어디가 맛있니

하길래 꼭 맛보겠다고 몇군데 맛집도 알아두고 했지만, 다 필요없다. 그냥 우연찮게 길거리를 걷다 이쯤에서 배가

고팠고 별 거부감없이 들어가서 시킨 음식이 맛있으면 대박. 아니어도 딱히 기대가 과잉하진 않았으므로

다이조브데쓰네.

갑작스런 장면 전환 같지만, 모스 버거의 테이블마다 놓인 '지역한정' 남만지역 특산 버거 광고. 모스 버거도 첨엔

뭐 별다를 거 있겠어, 하고 별로 시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어쩌다 보니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게

맛을 보니 꽤 괜찮았던 케이스였다. 내가 먹었던 건 저..왠지 남만북적동이서융이라며 지들빼고는 전부 오랑캐라던

중국의 중화사상을 되새기게 하는 남만버거는 아니었고 기본 모스 버거였는데, 다소 작지만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빵과 고기의 조화가 꽤나 괜찮았다.

이 사진은...음...신촌이나 강남 어딘가 쯤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처자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도촬한

거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이 1그램도 묻어나지 않지만, 잘 보면 왠지 스타일이나 머리 모양

등에서 니폰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모스 버거의 옆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즐기시던 일군의 처자들.


똥*일보 인턴기자질을 마쳐가던 즈음, 인턴들에게 4면의 지면을 주고 담고 싶은 기사를 취재해 오라고 했던,

마지막 기념품삼아 신문을 직접 만들어 보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이른바 '바이라인'이라는 기사 아래의

자신 이름 석자가 실리는 것에 환상을 갖고 있던 인턴 동기들은 저마다 열의를 갖고 이런저런 기사거리를

제안하고 취재를 하겠다고 했으나, 사실 무해하고 '건전한' 장난감같은 4면짜리 인턴신문으로 견인코자 했던

관리자들의 태클로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다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인턴신문에 그래도 각자 바이라인 하나씩은 넣어야 한다는 게

또 보기 좋고 건전한 마무리를 위한 전제조건이었달까..결국 난 친구 하나가 발제하고 허가를 득한 주제에 대해

함께 취재하러 나가게 되었었다. 그건 바로 서울에서도 도서관 마냥 한사람씩 공간을 칸막이 쳐놓고 음식을 팔고

있는 음식점이 생겼다는 것. 당시 명동교자와 일부 음식점이 점심 때 혼자 와서 밥먹는 직장인들을 위해 그런

일인용 칸막이가 둘러쳐진 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뭐 여러 사정 끝에 그 기사는 하나의 트렌드를 짚고 있다기엔 무리가 있다 하여 짤리고 말았으나, 그때 처음으로

일본엔 이미 그런 식의 1인용 식당이 왠만큼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 후쿠오카를 여행하며

드디어 직접 그런 식으로 구획된 라멘집을 경험했으니.

캐널시티에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져서 찾은 라멘집. 일본 라면을 두고 느끼하다거나 맛이 너무

진해서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첫날 자그마치 '곱창 라멘'의 죽도록 느끼하고 진득한 맛에 반한

후로는 하카다식 라멘에 홀딱 빠진 상태였달까.


근데 여기, 다른 음식점들처럼 가게 앞에 자판기가 있어 표를 사서 주문하는 건 비슷한데, 뭔가 자리배치도에 파란

불빛으로 '空'자가 적혀 있는 게 특이했다. 뭐지? 테이블이 어디가 비어있다고 표시해 놓은 거 같긴 한데.

자리에 앉기 전 주위를 둘러보다 입구쯤서 발견한 추가주문용지. 드문드문 한자는 뭔말인지 얼추 추측은 하겠다만

일본어가 얼기설기 섞여있어서 좀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뭔가 돈을 더 내야 추가로 뭔가를 더 집어넣어

라면을 만들어주겠다는 뜻인 듯.

자리에 앉으려니 의자 하나, 그리고 딱 도서관 칸막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만큼을 허용하는 둘러쳐진 테이블.

대체 음식은 어떻게 나오나 싶어 앞쪽으로 고개를 빼어보니 가운데엔 서빙하는 점원이 앞뒤로 움직일만큼의 좁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으로 이렇게 칸쳐진 도서관 책상이 열지어 있는 구조였다.


혼자 와서 밥을 사먹을 수 있다는 건, 때론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거나 철이 들었다는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무지 꺼려지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그런 피치못한 순간에 이처럼 혼자 조용히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은폐된 채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란 꽤나 매력적이겠다 싶었다. 앞쪽에 마주보고 있는 사람과 행여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길게 드리워진 커튼같은 천조각은 더욱 완벽하게 자기 자신과 앞에 놓인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제공하게 될 거 같다.

옆에 젓가락통에 함께 꼽혀 있는 종이에는 한국어로 라면 기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몇가지 옵션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기름기 정도, 라면의 감촉, 그리고 비전 조미료를 얼마나 넣을지 같은 것들을 무난한

한글로 적어놓고 있었는데, 꽤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 반증이지 싶다. 다만 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저 항목, "궁극의 신맛"이 대체 무얼까..심플하게 '있다'와 '없다'만을 선택할 수 있는 양자택일

그 기로에서 난 일단 '있다'를 선택했다.

이게 바로 '궁극의 신맛'이 있는 라면. 살짝 퍼진 느낌의 네모난 라면그릇에 담긴 건 기름기 둥둥 떠다니고 마치

한국의 꼬리곰탕처럼 진한 육수맛이 인상적인 라멘. 한국의 라면을 떠올리게 된다기보다, 오히려 사골탕이나

꼬리곰탕같이, 뼈가 흐물흐물해지도록 고아낸 뿌연 육수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런 것들은 식으면서 마치 젤리나

묵처럼 국물이 걸쭉하게 굳어버리곤 하는데, 분명 이런 후쿠오카의 라멘도 그렇게 될 거 같다.


뭐랄까, 음식의 계보를 따지자면 일본의 라멘은 분명 한국의 라면보다 꼬리곰탕같은 사골국물에 훨씬 가까운

음식으로 판명되지 않을까 싶다.

이치란. 가이드북에 따르자면, 여기가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라멘 전문점이란다. 자그마치 1960년도부터

이어온 비밀 양념장이 푹 고아진 돼지뼈 국물에 더해져서 느끼하지 않은 국물맛이 난다고 하는데, 글쎄 난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는.


회사가 코엑스에 붙어있는 나로서는, 그다지 쇼핑몰 같은 곳을 굳이 돌아볼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실제로

캐널시티를 돌아보면서 몇몇 샵들이 조금 재미있기는 했지만, 커낼시티는 그냥 후쿠오카에 있는 조금 큰 쇼핑몰

정도라고 치고 다른 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몰 밖으로 나와 천장이 트인 공간에 서니 이미 캄캄해진

어둠을 배경으로 캐널 시티의 화려한 조명이 이뿌게도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때는 11월 말. 이제 슬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달구기 시작하는 타이밍에 맞춤하게도,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런저런

태피스트리..라고 하던가, 그런 장식물들이 반짝거리는 조명에 둘둘 감긴 채 뭔가 특별한 광경을 선사하는

커낼시티의 거죽. 솔직히 내장은 그닥 신선치는 않았단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해 기분을 업시켜주는 이런저런 사진들을 보면서 거죽이네, 내장이네 하고 있는 나는

뭔가 싶지만, 어쨌든 이미 작년 크리스마스는 지났고 올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엔 너무 멀단 말이다. 그러고

보자면 사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은 항상 느지막히 10시나 11시쯤부터 시작했었고, 눈뜨고 나서 느끼는 그

허망함이나 부질없음의 느낌은 마치 질긴 고기를 잔뜩 씹고 나서 잇새가득한 이물감 같은 것이었다.


역시 크리스마스는 이브가 최고. 뭔가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기에 딱 좋은 날짜란 말이다. 12월 24일.

한 켠에는 무대 장치도 되어있고, 뭔가 공연도 드문드문 준비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이곳을 거닐던 짧은

시간 동안에는 어디에서도 가슴뛰는 기타의 굉음이나 누군가의 호기로운 노랫소리 따위 들을 수 없었더랬다.

이런 건 참 비슷하달까, 상상력의 한계라고까지야 하진 않더라도. 코엑스몰이니 다른 복합쇼핑공간이니 하는

곳은 모두 노래짱 선발대회니 특별공연이니 하는 것들과 쇼핑공간을 융합시킨지 이미 오래인 거다.

이 것들은...어디서 봤더라, 뭔가 애니에서 봤던 듯한 캐릭터들이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없다. 그냥 단순히

디즈니 만화의 캐릭터를 갖다 쓴 거 같기도 하고, 우야튼 좀 맥락없이 세워진 이 녹색 동물들은 대체 크리스마스와

어떤 연관성이 있길래 저렇게 선물까지 잔뜩 받아가며 알바를 뛰고 있는 겐지.왼쪽 다람쥐 녀석 왠지 왼쪽 입꼬릴

찌그리고 쪼개는 게 기분나쁘다.

이거 자꾸 맘내키는 대로 쓰다보니 anti-Christmas의 기운이 강하게 뻗어나가는 느낌이지만, 정말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사라진지는 오래인 터..굳이 크리스마스 액세서리라고 생각지 말고 단지 이렇게저렇게 꾸며진 이쁜

장식품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저토록 후하게 보이는, '나는 관대하다'라고 창문모양 입으로 온통 외치고 있는 듯한 선물의 집은 역시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고서는 쉽게 소화할 수 없을 유난스럽고 두드러지는 장식이긴 하다.

커낼 시티에서 맘에 들었던 것 중 하나, 마당이랄까 이 열린 공간을 걷다가 문득 예고없이 마주치는 분수대. 전혀

사람이 다니는 길과 구분되어 있지 않고, 물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 역시 바닥면과 같은 높이로 숨겨져 있어서

느닷없이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면 왠지 유쾌한 장난질에 속아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몇 그루의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그 트리들에 빨간 우산을 하나씩 들린 것처럼 조명이 서있다.

루돌프 사슴코 모양 시뻘건 불빛을 밝혀든 버섯 같은 조명등. 조금만 더 날카롭게 각도가 섰다면 붉게 달아오른

화염의 창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분수대와 더불어 커낼 시티에서 맘에 꼭 들었던 것 하나는, 바로 요 흡연구역이었다. 어렸을 적 우산을 두세개쯤

동시에 펼쳐놓고 조그마한 텐트를 치고 들어가 공간을 꼭꼭 여몄던 기억이 나게 만드는, 그런 왠지 비슷한 모양의

흡연구역. 저 동그란 천막 같은 곳에 들어가 담배를 피면 왠지 기분도 색다를 거 같다. 게다가 저 푸르스름한

간접 조명은 대체 어디서부터 쪼여지는 건지.

그러고 보니 난 커낼 시티의 후면으로부터 전면의 정문으로 역주행한 셈인가. 어쨌거나 커낼 시티를 한바퀴

관통하고 돌아보는 정문의 산뜻한 네온사인이 깔끔하다.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휘황찬란하거나 거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기도 쉽지 않을 만큼 왜소하거나 너무 밋밋하지도 않고.

이건...커낼 시티를 떠나 텐진 쪽으로 걷다가 문득 마주쳤던 일본의 모텔 가격표. 혹시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랄 뿐.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요금체계가 좀 정교한 게 아닌가 싶다. 180분짜리 REST, 100분짜리 SHORT

TIME, 그리고 FREE TIME과 STAY. 요 두개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선홍색 꽃잎들이 미묘하달까.



아마 도요호텔에서 투숙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어판 관광안내지도 일부를 복사해서 비치해놓은 듯 하다.

한국에서 들고 갔던 가이드북에 나와있지 않은 세부 사항이라거나, 세세한 골목같은 경로를 탐색할 때 꽤나

쏠쏠하게 도움이 되었던 지도였다. 축척이 1:4000이니까 거의 50미터 버전의 내비게이션하고 비슷한 수준아닐까.

후쿠오카 시내 관광을 계획중인 분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듯.





하카다역 인근 숙소에서 가까운 전철역까지 걷다 보면 몇군데씩 새로 생겼다는 '신장개업'의 빠찡꼬게임장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바다이야기가 성행했고, 지금도 변종 업소들이 성행하고 있다지만 나와는 별로 인연이

닿지 않는 장소들인 터, 도박장이라고는 몇년전 강원카지노랜드 가서 슬롯머신 하다가 만원정도 기부하고 온 게

전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공기중에 붕붕 떠다니고, 그렇지만 아직 신장개업중인지라 약간 어설픈 기류가 흐르는

그 곳에 들어서니 왠 배용준사마와 최지우히메가 보인다.


오...역시 이들이 일본에서 좀 먹히긴 하나 보다 싶기도 하고, 게임기 자체가 온통 겨울연가, 그 둘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걸 보니 좀 살짝 질리기도 하고. 대체 저건 무슨 게임일까 잠시 궁금해하다가 돌아서고 말았다.

그 옆라인에 늘어선 또다른 게임기..마치 바다이야기처럼 스크린이 있고, 뭔가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던데 역시

좀처럼 어케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바글대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옆에서 살짝

어깨너머로 배워서 직접 땡겨보기라도 했을 텐데, 워낙 사람도 없고 휑뎅그레한 분위기여서 금방 문밖으로 나섰다.

텐진 쪽으로 가다가 마주친 영화관, 건물 둥근 모서리에 입구가 펼쳐져서는 이런저런 일본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왠지 간판도 그렇고, 외관도 그렇고 중후하달까, 고풍스러운 느낌이 짙었다. 사실 우리나라도 한 십년전만 해도

종로나 명동즈음의 영화관은 다 저런 느낌 아니었던가 싶은데, 급속히 멀티플렉스관들이 생겨나면서 볼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가끔 일제강점기나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정도.

텐진으로 가는 길,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웠고, 야트막한 하천에는 커다란 네온사인 불빛들이 늘어지게 비쳤다.

살짝 비가 내리더니 땅바닥이 금세 촉촉해졌고, 텐진 한 가운데쯤 보도에 박힌 방향 표시판은 공항, 역사 등등의

방면을 안내하며 밟히고, 비에 씻기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다시 하카다역 근처로 돌아나오는 길. 빗방울이 묻어 울룩불룩해진 차창 너머로

어릿하게 굴절되어 들어오는 불빛들. 왠지 모르게 사람을 애잔하게 만들었던 외국의 낯선 밤거리.

하카다역 근처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들어가려 했다. 일본에 온 김에 제대로 된 이자카야에서 오꼬노미야끼 같은,

일본식 안주들과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서울에선 열걸음마다 채이는 이자카야 술집이

역 근처에선 좀체 찾을 수가 없던 거다. 어찌어찌해서 들어간 술집에선 오꼬노미야끼 같은 것 대신 꼬치류를

주로 팔고 있었다.


게다가 메뉴판은 온통 일본어뿐,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어서 옆사람들 먹는 것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켜

음식을 주문해야 했다. 다행히도,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 후쿠오카에 와서 사신 지 오래되셨다는 한국분이셔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 몇가지 안주류를 무난히 주문하는데 성공. 팽이버섯베이컨말이꼬치, 닭고기꼬치, 관자꼬치,

게다가 실패였다고 후회하고 만 고래고기까지. 울산 사는 군대 선임이 늘 고래고기를 한번 맛보여주겠노라고

약속만 하고 여지껏 못 지켰던 터여서, 늘 고래고기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넘실대던 터였다. 그렇게 과거의 오랜

욕구를 따라 질러버린 고래고기는, 시커먼 색의 고기가 가지런히 잘려서 한 열 점 나왔던가. 어찌나 짜던지, 또

어찌나 고기가 퍽퍽하던지 한입 살짝 베어물 때마다 사케 한모금을 머금어야 했다.

정말 맛있던 건 이 가리비 구이..랄까. 속이 옹골찬 가리비 하나를 큼직하게 몇조각으로 썰어서는 버터를 조금

넣고 조개구이집에서 굽듯 철판 위에서 굽는 거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게다가 탱탱거리면서 쫀득거리는

가리비의 식감이란. 손님들이 들고나고 주문하고 호출할 때마다 큰소리로 이럇사이마세~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어쩌구~ 라고 경쾌하게 떼지어 외치는 종업원들의 외침 속에서도 홀연히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리비.

한참 먹고 마시다가 문득 바라본 자리 앞 철판에선 김을 걷어낸 삼각김밥 모양의 주먹밥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뭘까..이미 어느 정도 배도 찼고 술도 오른 상태였지만 한국 돌아가서 저런 걸 또 언제 맛볼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고는 싸가기로 했다.

찰지게 모양잡힌 하얀 삼각밥이 철판 위에서 몇번씩 뒤집어지는 동안 꺼뭇꺼뭇하게, 또 누릇누릇하게 익혀졌다.

그리고 얼추 지금쯤 꺼내지 않으면 타지 않을까 싶은 타이밍에 맞춰, 주방장 아저씨가 앞뒤로 간장을 발라주고는

철판에서 건져냈다.

숙소에 돌아가 포장된 삼각주먹밥을 풀고는, 가져갔던 위스키 미니어처병을 홀짝대며 안주삼아 맛을 봤는데 역시

조금 과하게 먹는게 아닌가 싶긴 해도 먹을 땐 먹어주는 게 남는 거란 확신이 들었더랬다. 겉은 누룽지처럼 살짝

딱딱하면서도 간장 때문에 달콤짭조름하고, 속은 밥알들이 쫀득하게 찰싹 엉겨있고. 꽤나 맛있었다.


그치만 주점을 나서면서 살짝 기분이 찜찜했던 건, 왠지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4000엔이 약간 넘을

정도로 나왔는데, 물론 다른 단품 안주들에 비해 월등히 비쌌던 고래고기나 가리비구이를 시켰고 잔술도 꽤 많이

시켰다고는 해도..은근히 머릿를 굴려 예상했던 금액과 적잖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맛있게 마시고

먹었으니 됐다고 치고 금세 머릿속에서 휘발시켜 버렸다.

그보다 조금 전 술에 기분좋게 취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카다역 옆 굴다리를 지나는데 별 생각없이 한장

찍어본 사진, 카메라도 같이 술을 마셨었던 겐지 사진 속 불빛들이 온통 일렁인다.

 




 

남자의 색 파란색, 남자화장실에 그려진 기저귀 찬 쪼꼬만 애기. 올 11월 일본 큐슈에 갔을 때 하카다 역 안의

화장실에서 발견했던 왠지 기분 좋아지는 화장실 표시. 이제 남자가 애기 기저귀 갈아주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정도로는 세상이 변하는 있는 게다.

그림만 봐서는 카이로 쿠푸왕 대피라밋 정도에 있어야 할 것 같은 화장실 표시이지만, 사실은 일본 하카다 역 근처

자그마한 비즈니스급 호텔 로비의 화장실. 대체 왜...?

하카다 근교 다자이후에서 마주친 화장실 표시. 일본색이 풀풀 나는 선남, 선녀의 그림이랄까.

이수영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큐슈 유센테이코헨의 화장실 표시. 손발을 쫙 펼친 적극적인 남성의 큰대(大)자

모습과는 달리 손발을 곱게 모으고 노란색 끈으로 동여매인 듯한 여성의 모습이 대비된다.

11월 말, 남북간 육상 교류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지기 직전쯤 다녀온 개성에서 손꼽히는 '고급'음식점에서 만난

화장실 표시. 남한의 고위 공직자들, 정치인들이 숱하게 다녀갈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조각조각난 '위생실'도

모자라 앞에 빨간 펜으로 '남'이라고 써놓은 게 엉성엉성하다.

화장실 내부를 잠시 볼작시면, 딸랑 하나 있는 '편의시설' 그리고 세면대도 따로 없이 초등학교 때 걸레빨던 곳처럼

대충 만들어놓은 개수대에서 알아서 일보라는 듯. 당연히 핸드 드라이기나 심지어 휴지조차 없었다.

10월, 사우디-카타르-쿠웨이트 출장을 다녀오면서 마주쳤던 남녀 화장실 표시. 턱수염 콧수염이 덥수룩한 아랍의

남자가 반짝반짝 불빛에 반사된 채 왠지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우연찮게 조명도 어두컴컴하게 받아버린

여성이 검은 히잡을 쓰고 검은 망사로 얼굴에 격자무늬 빗금이 둘러쳐진 건 아랍 지역에서 상대적 열위가 두드러진

여성의 위상을 반영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표정도 살짝 입을 앙다문채 새침해 보인다.

사우디였던가, 공동화장실의 남성용 편의시설. 왜 저렇게 길게 쭉 턱을 내뻗고 있는지 얼핏 보면 '큰 것'을 위한

시설로 보일 정도지만, 엄연히 저건 '작은 것'을 위함이다.

카타르의 쇼핑센터에 있던 화장실, 한 켠에는 앉아서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도꼭지가 늘어서 있다. 무슬림들이 사는

세상에선 당연시되는 것들, 이집트나 카타르를 막론하고 모스크 입구에 꼭 설치되어 있는 발씻는 곳.

쿠웨이트 국제공항 내의 화장실. 살짝 당당한 포즈로 양허리춤에 손을 괸 남자와는 달리, 손발이 경직된 여성의

치마가 뾰족하다. 그러고 보니 두 발 사이의 간격도 다르다. 살짝 쩍벌남의 기운이 느껴지는 남성.

아랍 삼국의 호텔을 돌면서 계속 마주쳤던 룸 내의 화장실. 욕조와 편의시설 사이에 놓인 저 제3의 편의시설은

뭘까, 생각하다가 비데의 일종임을 알고 무지 신기해했었다. 그렇지만 얼마전 송년회삼아 그랜드인터콘티넨탈

호텔 룸에서 일박을 하면서 똑같은 시설물을 마주하곤, 이건 왠지 글로벌 스탠다드인가..하는 깨달음이 번뜩.

8월 파리 여행에서 숙소삼았던 유학생 친구의 집에서 만난 화장실. 세면대와 욕조는 다른 공간에 있고

덩그러니 지저분한 편의시설 하나만 비치되어 있는 조그마한 공간.

퐁피두센터 옆에서 만난 공중화장실. 뭔가 쌔끈한 메탈 튜브가 떠오르는 외관이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항상

내부에서 모종의 거사가 진행중이었거나 심각한 냄새의 원천이 되고 있어서 차마 발들일 수 없거나 했다.

어느 여름, 가족들과 함께 삼청각 찻집에 갔다가 예기치 않게 마주쳤던 한국식 화장실 표시. 국내에서 내가 본 것

중에 이만큼 세심하고 이뿌게 한국의 미를 살리려고 애쓴 화장실 표시는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사소하고 하찮을 수

있는 화장실 표시 하나에도 생각보다 많은 걸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또 나처럼, 누군가는 그 표시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찾아내려 애쓰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싶다.


다자이후역으로 가는 길, 양옆에 늘어선 상점들이 성업중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던 건 이 뽑기기계.

마치 수백마리 종이학들이 푸드덕대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주홍빛 종이가 투명한 원통 안에서 서로 부딪쳐가며

나부끼고 있었던 거다. 저 꼬맹이는 첨엔 다소 움찔거리며 겁내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 저 종이새들이 그악스럽게

휘몰아치는 기세에 겁먹었겠지만, 이내 손을 조심조심 내뻗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의젓하게 지켜봐주는 오빠.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도 꼬마손님들이 쉼없이 다녀간다. 닌텐도DS니 WII니 그런 경품이 걸려 있다는 것도

꼬마손님들을 이끈 동기겠지만, 저렇게 원통안에 갇힌 채 맹렬한 기세로 날아다니는 종이를 한번쯤 손뻗어

잡아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더욱 크지 않았을까.

사람 참 많다. 다자이후 역에서 다자이후텐만구, 혹은 고묘젠지까지 이르는 그 짧은 구간에 빼곡하게 늘어선 작은

상점들도 꽤 볼만한 게 많아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좀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꼬맹이가 두손으로 캔을 그러쥐고 마시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저 말똥말똥한 눈망울하며.

'소녀떼'들도 주말을 맞아 놀러온건가. 아님 하교길에 잠시 들른 건가. 군것질거리를 파는 몇몇 가게에는 여지없이

그네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있다. 일본 교복이 이뿌단 말은 많이 들었는데, 역시 예외는 있는 법이다.

고명에서 매실향이 조금 나는 찹쌀떡이랄까. 얘들을 머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소녀떼 팬들을 모아들이고

있던 것의 정체는 바로 이것. 한 개에 105엔, 다섯 개에 525엔, 열 개에 1050엔, 열다섯 개에 1575엔, 스무 개에

2100엔. 많이 산다고 전혀 가격할인이나 덤도 없는 시크한 가격체계.

이곳에서 유명한 건가 보다. 똑같은 걸 파는 가게가 몇개나 늘어서 있었는데, 손님이 많은 집은 줄이 엄청 길게

늘어서 있고 없는 집은 썰렁했다. 만드는 방법은 약간씩 달라서, 어떤 집은 이렇게 손으로 반죽을 떼어 틀에 넣고

만드는가 하면, 또 다른 집은 마치 호두과자 기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만들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는데, 역시 기계로 만드는 곳에는 별로 사람이 모여있지 않았다. 가격이 다르지도 않았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손맛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테다. 달다 싶으면서도 쫀득하고 부드러워

금방 먹게 된다. 그렇다고 찰떡처럼 찰지지는 않고 살짝 흐물흐물한 편이라, 많이 사갖고 들고 다니기는 무리였다.


덧붙이자면, 이건 '우메가에모치'라는 떡이라고 한다. 이하는 '후쿠오카 관광가이드북'의 관련 자료 내용.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이 에노키샤에서 불우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조묘니'라고 하는 노파가 공을 동정하여

가끔 이 떡을 가지고 와서 공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공이 서거했을 때 이 떡에 매화나무 가지를 덧붙여

보냈다는 고사에서 기원되어 우메가에모치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떡에 공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 우메가에모치를 먹으면 병마를 막을 수 있다는 특효가 있다고 하여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

좀..앞뒤가 맞지 않고 매화와 떡을 잇는 이야기가 워낙 빈약하다 싶긴 하지만, 어쨌든 병마를 막을 수 있댄다.

근데 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은 죽어버린 거지?ㅡㅡ;

한국 관광객이 역시 많은지, 종종 한국어 설명이 병기되어 있는 곳도 눈에 띄었다. 근데 이게 뭥미.."감자기 경단"??

감자 경단이면 감자 경단이지 감자기는 뭐람. 난 첨에 얼핏 '갑자기 경단'이라고 읽었었다. 갑자기 경단이 먹고

싶어지면 와서 먹으란 겐가 했다.

한국인이 이 관광객 틈에 어딘가 스며들어 있겠지만, 일본/중국/한국인의 구분을 잘 해내는 편인 나로서도 찾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11월 중순께 급격한 엔고 추세로 인해 뜸해졌을 수도 있고, 한국관광객들의 여행 비수기라

그럴 수도 있겠고. 서양 관광객도 거의 눈에 안 띄었는데 찍고 보니 용케 비 아시아권으로 보이는 관광객 한명이

사진에 잡혔다.

꼬치는 300엔~ 무지하게 비싼 거 아닌가. 한국이던 일본이던 관광지 주변 물가란 건 참..그렇다.

그렇게 다자이후 역까지 돌아나왔다. 바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조금 반대편길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 넓은

번화가가 펼쳐져 있지도 않고 시골 읍내처럼 한두 블럭에 걸친 상점가가 보여서, 금세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들이 폭이 좁다. 대부분 슬림하게 빠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건물들의 색감도 대체로

차분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간판도 한국처럼 서로 튀려고 그악스럽게 다툼하는 자극적이고 천박한 색과 모양이

아니라는 게 또 하나의 발견.

"티셔츠가 아주 싸지고 있습니타?" 티셔츠가 싸면 싼 건지 대체 싸지고 있는 건 뭘가. 아주 싸지고 있으니 조금더

기다렸다가 사라는 건가. 이걸 발견하고 재밌어서 한참 실실거렸다.

같은 가게, 티셔츠에 씌여진 일어 단어들을 삼개국어로 설명해 놓았다. "무책임", "우리 길을 간다!", "파란만장",

뭔가 그럴듯한 의미가 있어보이고 적당히 반항기 어려보이는, 딱 내가 좋아할만한 문구들이 적혀있었는데, 마지막

하나 설명을 보고 대체 뭘까 한참 고민해야했다. "깨지만 나무"???? "Bad boys or Bad girls"가 대체 왜 그렇게

번역이 되는 걸까. 게다가 깨지만 나무..란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이냐. 근데 정말 "Bad boys or Bad girls"을

한국어로 어떻게 바꿔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좀 격하게 나가자면 "씨X놈X들", 좀 부드럽게는 "나쁜 녀석들"정도?

하카다 큐슈난지. 대학 다닐 때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을 왔던 친구가 큐슈 출신 남자였다. 교환학생을 와서 머리로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 '간'을 사용해 공부하러 왔다던 그와 숱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배운 몇 안되는 일본어 중

하나. 큐슈난지. 한국에 경상도싸나이가 있듯 일본엔 큐슈난지가 있다고 했다.

우유부단 티셔츠. 아...이 가게 정말 재미있는 티셔츠나 소품들이 많아서 한참동안 구경했다. 저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왠지 우유부단해지는 건가.

금세 끝나버린 번화한 골목 뒤에는 또 무슨 신사인지 절인지. 예전 철없을 적 좋아라, 하면서 보았던 일본 만화

"오 나의 여신님"의 주인공들이 사는 절이 이런 곳 아니었을까.


지독히도 남성중심적인 판타지로 가득한 그 만화에서. 찌질한 주인공을 둘러싼 세명의 여신이 가진 이름들은,

알고 보니 게르만 전설에 나오는 세 운명의 여신 노르네스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었다. 과거를 아는 우르트르

(울드), 현재를 담당하는 베르트란디(베르단디), 그리고 미래의 여신인 스퀼트(스쿨드). 그치만 개인적으로 이

세명은, 메이드/선생/아줌마(엄마) 취향을 위한 베르단디, 군복녀/SM/누나/직장녀 취향을 위한 울드, 그리고

롤리타(소녀)/안경녀/여동생/교복녀 취향을 위한 스쿨드로 짜여진, 이후 일본의 연애시뮬레이션게임의 섬세하게

분류된 캐릭터 구축을 위한 선행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걸까.

조금 더 걸어가다가 보게 된 다자이후의 주택가. 다닥다닥.

푸른 대나무밭에 기대선 집들 역시, 다닥다닥.

계속 걸어나가다 보면 어디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조금씩 풍경이 시골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까지 보이는 걸로 보아 더 가봐야 돌아올 때 힘이 들테니 돌어가자는 판단을 내렸다. 발의 피로도가 누적되는

것을 감수하고 미지의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탐사하기엔 이득보다 비용이 커질 뻔한 지점에서 돌아서다.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고등학교. 학교이름을 저렇게 크게 써두는 것도 한국에서는 못 본 거 같다. 보통 교문에

자그마한 문패를 걸거나 표지석을 세운 게 전부아니었나. 적어도 내가 봐왔던 한국의 학교들은 그랬던 듯.

문득 앞에서부터 오는 버스를 보고 놀랐다. 운전수가 서서 운전하고 있네, 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그리고 다자이후에 온 관광버스들은 모두 저런 분홍색 옷의 안내원이랄까, 조수랄까 앞좌석에

타고 계셨던 거 같다.

돌아가는 길. 개찰구는 뭐, 한국이랑 별반 차이는 없다.

티켓을 사서 처음 들어가면서 넣으면 저렇게 구멍이 뚫려서 나오고, 나오면서 넣으면 그냥 먹어버린다.

텐진행 급행열차. 밝은 하늘색 차체가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귀엽다.

굳이 일본어를 몰라도 영어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다. 편하면서도 살짝 섭섭한 게,

여행을 가서 모르는 사람 붙잡고 말걸고 길묻고 친해지고, 그런 것들도 재미가 쏠쏠한데 자꾸 표지판에 의존하게

된단 말이다.

다자이후에서 텐진까지. 여긴 거의 일본어밖에 안 쓰였다. 이래서야 까막눈.




고묘젠지를 둘러싼 야트막한 담장길을 따라 나오는데, 단풍나무가 빼꼼히 배웅을 한다. 들어설 때 보이지 않던

풍경, 나무 밑둥으로 하얀 자갈이 고랑을 그리며 깔려 있는 모습이라거나, 저 건물 너머 그림같이 이쁜 정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묘젠지에서 다자이후 역으로 돌아나가는 길, 길 양옆에 이런 울타리를 쳐 놓았다. 푸른 대나무를 다듬어 긴

장대로 만들고는, 목책에 구멍을 뚫어 걸어두거나 저렇게 대나무를 가뿐히 접어 고정시켜 놓은 모습이 특이하다.

커다란 규모의 관광포스트들, 예컨대 다자이후텐만구, 큐슈국립박물관, 혹은 고묘젠지 이외에도 자잘한 사원이나

사당같은 것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아마도 관광객) 출입금지인 걸로 보아 신사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곳인 걸까.

오후가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753명절을 지내러 부모님 손잡고 텐만구에 가는 듯한 가족들하며, 점점이

보이는 소풍나온 듯한 학생들까지.

그런 와중에도 비둘기 한마리에 완전 몰입해 있는 귀여운 딸내미. 주위의 공기가 들썩들썩, 사람 버글대는 휴일

분위기로 꽉 차 있지만 그런 따위에 연연치 않는 듯, 꼬맹이와 비둘기 주위엔 왠지 다른 질감의 공기가 느껴진다.

석탑 위에 버티고 선 저 동물형상이 우스워서 사진을 찍었는데, 글쎄 잘 안 나온 거 같다. 물고기나 해마 비슷하게

생긴게 꼬린지 발을 힘껏 차올리고서는 마치 물구나무서다가 고개만 꺽인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다.

고묘젠지의 담장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바로 이렇게 민가들이 버티고 서있다. 커다랗게 적힌 한자들 때문일까,

뭔가 한국같지만은 않은 분위기가 풍기는데, 그게 어디서 비롯하는지 모르겠다.

국화 화분을 앞에 내놓은 채 장사 중인 가게도 있고. 근데 이사진은 내가 뭘 찍고 싶었던 걸까.ㅡㅡ;

이렇게 이쁘게 잘 관리받고 있는 집도 있고. 일본의 집은 작기로 유명하다는데 그렇게 봐서 그런지 정말 다 작아

보인다.

이건 뭘까. 뭔가 넓은 부지를 차지한 채, 사당을 둘러싼 녹지에 원형 산책로까지.

그렇게 다시 다자이후 역근방까지 도로 나왔다. 살짝 꾸물꾸물한 하늘, 꾸물꾸물 모여들어 이젠 장사진을 이룬

관광객들 혹은 참배객들.

화장실을 잠시 가려는데 여기도 남/녀 표시가 특이하다. 여기저기서 이렇게 화장실 남녀표시를 그간 찍어온 것만

따로 모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다. 선남, 선녀.

다자이후 근방에는 다자이후텐만구, 큐슈국립박물관, 그리고 고묘젠지가 일단 역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금방금방 돌아볼 수 있고, 약간 떨어져서 절이라거나 유적지, 혹은 과거 토성의 흔적같은 게 산재해 있다고 한다.

다자이후 역에 가면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고, 거기서 빌려서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갔는데

별로 의지가 없어서였는지 찾지 못했다. 후쿠오카(텐진)역에서 다자이후까지 가는 법은 위와 같음.ㅋ


"위험하다!!"라는 표지판이 산책로와 산책로가 아닌 건물옥상 어딘가를 구분해 놓은 이곳은 후쿠오카 한 복판의

계단정원을 품은 건물, 아크로스 후쿠오카. 계단식 건물 옥상 가득히 펼쳐진 녹지에 구불구불 나있는 산책로를

빗겨나면 왠지 건물 내부 어딘가로 쿵,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이 엉성한 한국어로 된 경고판때문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다.


후쿠오카 한복판에 나무가 무성한, 비탈진 야산같은 건물이 있다고 들었다. 여행을 다니며 건축물 순례를 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았던 터라 그냥 모르쇠 스킵할까 하다가, 텐진 중심부 근처길래 설렁설렁 산책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후쿠오카를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는 개천, 물이 마르는 겨울철 11월이라 그런지, 아니면 수량 자체가 원래 풍부치

못했던 건지 물이 잘박잘박하다. 유속도 그렇게 빠르지 않아 수면 바닥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고 냄새도 조금

풍겼다. 이걸 또 '신화적인 돌파력'을 가졌다는 어떤 사람이 본다면 싹 갈아엎고 수돗물을 흘려보내자고 할지 모를

일이지만..그래도 여긴 선진국 일본이다.

지나가며 잠시 들러본 섹스샵. 일본이라 좀더 특이한 게 많지 않을까 했는데, 올 여름 파리 몽마르뜨언덕 아래의

섹스샵거리에서 봤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파리여행] 물랑루즈 거리의 홍등가.)

단물이라곤 한방울도 남지 않은 '지구촌시대'라는 단어를 빌어 생각하자면, 사람들 혹은 남자들의 성적 취향과

자극원까지도 지구적 차원에서 보편화해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AV와 정체불명의 옷가지들,

중국제 성인용품의 세례를 받고. 성의 영역에서도 개별성과 고유성은 지켜져야 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

고유의 섹스샵, 고유의 성인 문화..머, 이미 뭔가 차고 넘치도록 있긴 한 거 같긴 하다만 그런 유흥문화말구.

지도에 따르면 대충 요  신호등을 건너 작은 다리만 건너면 바로 계단식 숲처럼 꾸며진 건물,

아크로스 후쿠오카가 보여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머...여느 거리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높이의 반듯한

건물들 밖에는, 딱히 시야를 잡아끄는 것이 없어서 갸우뚱대며 파란 불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가까이 가니 네모반듯한 한 켠이 점차 무너져 내리며 땅바닥까지 끌리는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반짝이는 건물 외관에 동강동강 비쳐지는 맞은 편 건물의 적나라한 토막 마술쑈까지.

건물을 따라 쭈욱 걸었다. 무슨 야구장 스타디움같은, 계단식 관중석이 있는 원형돔을 종으로 절단한 내부를 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맨들맨들하게 절단면이 빛나는 걸로 보아 상당한 고수의 실력이다.

아크로스 후쿠오카에서 잠시 내 시선을 돌리게 했던 건 이 폭주족틱한 복장의 자전거 아저씨. 그렇다, 아저씨.

뒷모습만 보면 젊은 애가 뭔가 주렁주렁 매달고 자전거를 타고 있구나 싶지만, 사실 앞을 보면 살짝 주름이 얹히기

시작한 연세의 아저씨라는.

아크로스 후쿠오카, 이 건물은 애초 국제회의, 문화, 정보 시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는데 실제 내부는 그다지
 
색다르진 않았던 것 같고, 건물 한쪽 사면을 층층이 타고 올라가는 저 녹색의 물결이 정말 신기했다. 좀 만화같기도

하고, 왠지 열대우림지대의 오랜 옛 유적을 타고 올라가는 짙푸른 녹색 덩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여튼간에

저 계단식 정원은 건물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산책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크로스 후쿠오카의 녹색 계단과 맞닿아 있는 자그마한 녹지는 바로 텐진 중앙공원.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기도 하고,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한쪽에서는 젊은애들이 빈 플라스틱 술병을

들고 묘기를 연습중이다. 뭔가 했더니 아마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가보다. 다양한 모양의 병을 가져와선

저글링도 하고, 둘이 주고 받기도 하면서 병이 깨질 염려가 없는 잔디밭 위에서 오래오래 연습을 했다.

저렇게 배경으로 초록빛, 드문드문 붉은 단풍빛이 가득 얹힌 건물의 완만한 경사면을 두고 있으니 풍경이 무지

나른하기도 하고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텐진 중앙공원의 놓인 벤치, 적당하게 뒤로 누운 벤치에 반질거리는 짙은 나무색이 사람을 부른다. 

시루떡처럼 층층이 얹힌 그 녹색 계단식 정원에 오르는 첫 관문. 이 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도, 다들 올라갈

수는 있는데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는 식의 말만 있어서 난 끝까지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뭐, 좀 꼬불대며

올라가야 하는 거 같긴 했지만 우거진 수풀 때매 제대로 길은 안 보였고, 까짓 길어봐야 건물도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얼마나 걸리겠냐 싶어, 출발.

조금 올랐다 싶어 길을 되짚어 돌아보니 '풀떼기'들이 금세 시야를 막아섰다. 좀 가다 좌회전 한번, 또 좀 가다가

우회전 한번, 얼마후 다시 좌회전, 이런 식으로 우르르~ 좌르르~ 스텝정원을 올라섰다.

거의 다 올라왔다 싶을 즈음, 유난히 붉은 잎사귀를 소담히 얹은 여윈 나뭇가지가 후쿠오카 시내를 덮었다.

꼭대기에 올라와서 내려다본 아랫마을 풍경. 건물만 빼곡한 공간과, 이 곳 아크로스 후쿠오카가 품고 있는 작지만

짙은 가을숲, 그리고 텐진 중앙공원의 느낌이 영 다르다.

사실 전망대는 1미터 정도 위에 따로 설치된 공간이 있지만, 문이 닫혀있다. 아마 목욕탕 휴일 표시하듯 빨간 색

글자로 토,일,휴일을 적어놓은 걸로 보아 '정기휴일'이겠거니 하고 별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머 사실 조금 위에

더 올라서서 보나 지금 여기 높이에서 보나 비슷한 거다. 게다가 후쿠오카시의 마천루라는 게 상당히 나지막해서,
 
그러고보니 여기보다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여기 앉아 혼자 빵과 우유를 먹던 아가씨도 내려가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는

멍하니 아랫쪽 어딘가를 바라보던 양복쟁이 아저씨도 내려갔다. 슬 그림자도 길어지고, 문득 바람이 차다고 느껴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등장한 경찰관 아저씨, 내가 한국인임을 한눈에 알아보곤 말보다 행동으로,

내려가라고 연신 손사래를 친 덕분에...마치 쫓겨내려오듯 후다닥.

내려오는 길은 반대방향으로. 그니까 오른 길을 되밟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아크로스 후쿠오카를

좌우로 헤집으며 내려가는 길. 아까 오르면서 만났던 빨갱이 단풍보다 더욱 선명하고 짙은, 그래서 더욱 이뿐

단풍을 만났지만 살짝 사진 한장 찍고 말았다. 사실은 단풍잎을 챙겨오고 싶었는데..경찰관이 계속 따라내려오며

지켜보는 바람에 엄두도 못냈다는.

내려오고 나니, 경찰관이 왜 그렇게 몰듯이 따라내려왔는지 알 거 같다. 애초 정원에 올랐던 정원 입구에는 오늘

더이상 입장이 불가능함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고 문도 굳게 닫혀있었던 것. 아마 경찰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은

혹시 없는지 살피면서 한번 코스를 순회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나랑 계속 겹쳐서 내려왔던 게다. 내 뒷통수가

솔찮이 따갑다고 느꼈던 건...아마도 과민반응이었던 듯. 하기야 이렇게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워낙 군데군데

으슥한 곳이 많아서 자칫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겠다.

텐진 시내로 가서 저녁을 챙기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았다. 어느덧 해도 많이 기울었고, 건물빛은 다소

둔탁해진 느낌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고풍스런 옛 대리석 궁전과 철재와 유리 재질의 유리 피라밋을 하나의

풍경안으로 잘 엮어낸 느낌이라면, 여기는 건물 하나에 자연의 영역, 그리고 인간의 영역을 오밀조밀하게 중첩해

놓았다는 느낌이랄까.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지 싶고, 또 한번 들렀다면 꼭 올라가볼 만한 계단식 정원이었던

것 같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해서 슬슬 오르기 딱 좋은 동네 뒤 야산같은.



일본식 포장마차를 '야타이'라고 한댄다. 후쿠오카엔 나카쓰쪽 야타이가 유명하다고는 하던데, 가기 전 귀동냥한

팁들에 따르면 그쪽은 이미 많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더럽혀졌다'고 했던가. 바가지도 심하고, 맛도 그냥

그렇고, 친절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중평이었다. 우선 나카쓰쪽 야타이를 구경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텐진쪽

야타이를 가기로 맘먹고 호텔을 나섰다.
자전거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텐진의 거리.

텐진 기차역 부근의 횡단보도, 해가 살짝 뉘엿거리며 넘어가는 시간대, 택시기사 아저씨는 벌써부터 차에 조명을

밝혔다. 퇴근하고 번화가를 활보하는 직장인들이 확실히 늘어나서 거리는 더욱 붐비기 시작했다.

텐진(天神)역의 사통팔달한 지하상가 내 점포들은 10시부터 20시까지 영업을 한댄다. 그리고 통로의 개폐시간은

새벽 5시 반부터 24시 반이라나. 지하상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아무 구멍으로나 나서서 조금만 걸으면 저녁엔

금방 야타이를 찾을 수 있다.

텐진 지하상가는 11월 중순부터 이런 치장을. 아마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단장한 듯 한데 뭔가 유치하고 엉성해

보인다. 그치만 지하상가 천장을 온통 파란 불빛으로 치장하고 나니 어쨌든 크리스마스 기분은 살짝 동하는 듯.

서울도 명동지하상가나 강남지하상가 천장을 저렇게 꾸며놓으면 조금은 더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이제

12월도 중순인데 그다지 서울 거리에서 연말 분위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길가다 마주친 야타이. 윙버스에서 추천하는 야타이 위치들과 가게 이름을 뽑아오긴 했는데, 그걸 보고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냥 아무 곳이나 내키는 곳을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느 곳에 무엇이 있더라, 하는 후기를

참고해서 굳이 그곳을 찾다보니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가게들 사이에서 괜히 거길 고집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꼬리잡기하듯 뱅글거리며 골목길을 돌던 중 마주친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아 주문하는 라멘집,

그치만 살짝 촌스런 노랑초록파랑 불빛이 일렬로 늘어선 '누름'버튼에는 메뉴가 지정된 것보다 비어있는

버튼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자판기는 정반대, 빈틈없는 진열과 누름버튼으로 전면을 메우고 있다.

일본을 두고 자판기의 왕국이라고도 하던데, 정말 이렇게 빼곡한 담배 자판기는 무시무시한 포스가

느껴진다. 네모난 담배갑의 오와 열을 딱 잡고 늘어세워서는, 왠만한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많은

종류의 담배를 팔고 있는 자판기.

도시의 야경. 후쿠오카시의 중심가, 큐슈지방 최대의 번화가라는 이곳은 그렇지만 서울보다는 조금 덜 복잡하고,

조금 덜 시끄럽고, 그리고 조금 덜 큰 거 같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도쿄 중심의 중앙집중식 개발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대학교 때 무슨 강의에선가 들었었다. 한국 제2의 도시라는 부산과 수도 서울 간의 격차가 너무

현격하게 나는 것처럼, 아마 도쿄와 후쿠오카간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문득 그 네 도시간의 부등호 관계가 궁금해졌다. 도쿄>서울, 서울>후쿠오카, 후쿠오카>부산? 부산>후쿠오카?

자리를 잡고 들어간 야타이, 이미 아저씨 세네명이 정면에 앉아 잡고기탕에 아사히 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한 직장동료인 것처럼 보이는 형님누님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번에

후쿠오카를 다녀와서, 일본사람들이 조용하다느니 타인을 배려한다느니, 깨끗하다느니, 그런 식의 '상식'에

반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왔다. 택시 기사들은 보행자 신호임에도 횡단보도를 무시하는가 하면, 전혀 조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위를 아랑곳않고 떠드는 식당, 호텔 로비..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무지 반가워하면서 오래전에 누군가 꼽아두고 간 한글 명함을 수고로이 찾아 보여줬다.

후쿠오카에 다녀간 누군가 이곳이 맘에 들었었나보다. 약간의 취기가 묻어나는 글투로, 행복하세요~ 랜다.

오뎅도 맛있고, 뒤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건 잡고기들이 잔뜩 들어간 탕이랄까, 그냥 간단히 잡고기탕 정도.

그거랑 따뜻한 사케 한잔을 마시자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마주앉은 형님누님들과 영어를 빌어 말도 섞고

간단한 생존 일본어를 선보이기도 하고. 대머리 주인아저씨 미소가 푸근했다.

말이 안 통한다네, 바가지를 씌우네, 온갖 조언들을 명심하고 왔었지만 이건 너무 쉬웠다. 짧은 몇마디에 마음이

훈훈해졌었고, 주인 아저씨는 한국에서 왔단 얘기에 어찌나 반가워하며 신나하시던지, 경계심이 녹아내렸다. 

잡고기탕 한 그릇, 오뎅 다섯개, 따뜻한 사케 세 잔 정도시켰던가, 1300엔밖에 안 나와서 내일 또 와야지 했었지만.

짧은 일정으로 다녀올 때 아쉬운 건, 맘에 들었던 곳을 다시 한 번 찍을만큼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뭘

먹어도 맛있고 어딜 가도 좋으니..계속 새로운 곳,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거다. 대체 얼마쯤 되는 일정이어야 긴 거냐고, 얼마쯤 되야 갔던 곳을 다시 찾겠냐고 묻는다면..글쎄, 그러고 보면

짧은 인생, 한끼를 먹어도 맛있는 것, 새로운 것을 먹겠다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는 것 같다.


가게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내일을 기약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은 힘들 테고 담에 언젠가 또 후쿠오카에 오게 되면

꼭 찾아보겠다고 다짐.

포장마차 안에 있는 동안 날이 더 쌀쌀해졌다.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풀렸던 몸이 다시 옹쳐매여지는 느낌의 추위.

입김을 내뿜으며 찍으려던 풍경에, 입김은 안 찍히고 술기운에 젖은 손가락의 떨림만 담기고 말았다.

텐진(天神)이라고 쓰인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숫자들은 몇번 버스인지를 나타내는 숫자들. 그리고 각 노선마다

쭉쭉 뻗어나가며 지나치는 정류장들을 그려놓고는 일정 구간을 넘어서는 순간 할증되는 금액들이 빨간 색으로

적혀있다. 예컨대 하카다역(博多驛)즈음까지는 100엔, 그 이후부터는 220엔.

게다가 평일(월-금), 토요일, 일요일 버스시간표가 다 따로 게시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막차 시간이 이르다. 조금만

더 미적거리다 일어났으면 텐진서 하카다역 근처 숙소까지 걸어가야 할 뻔 했다. 택시비는 무지하게 비싸다는 얘길

어디선가 또 들어놨어서.

집에 오는 길, 하카다역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도요호텔 앞길이 나온다.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앞에서 다코야끼를

팔고 있는 게 보인다. 왠지 일본의 다코야끼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차선 방에 가서 술안주 삼아 2차

술판을 벌여야겠다 하고 냉큼 샀더니, 녹차 캔음료 두개에 사탕 두개, 게다가 물티슈까지 두개 바리바리 비닐봉지

안에 챙겨주는 거다. 따로 다코야끼 위에 뿌리는 가쓰오부시도 챙겨주고. 오....이런 친절하고 세심한 서비스라니.


다코야끼 자체는 서울에서 먹어본 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문어냄새가 조금 더 풍기는 거 같다는 호의 섞인

편향된 느낌과 약간 더 쫀득한 거 같다는 역시 호의 섞인 주관적 식감을 제하고 나면, 녹차캔 두 개와 사탕 두 개,

물티슈 두 개만큼, 그리고 그걸 건네주던 아저씨의 살가운 미소만큼 더 맛있었다는 게 정확할 듯. 


해가 갓 떠오르려는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부산 후쿠오카를 향하기 직전이다. 한번 꼭 가보아야

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문득 생겨난 찬스에 얼씨구나, 하면서 올라탔다. 비록 언제 환전하는 게 좋을까 환율추이를

보던 며칠새 백원씩 급등하는 환율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후쿠오카에 뭐가 있는지, 서울에서부터 어떻게 왔다

갔다 하는 게 좋을지 요리조리 따져보면서 여행 자체보다 좋기도 하다는 '여행의 전희'를 맘껏 누렸다.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KTX입구 오른쪽으로 이렇게 순환셔틀버스 승차장이 있다. 전철역으로

한정거장, 부산역-중앙동역(여객터미널이 있는) 구간을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은, 그렇지만 7시 50분 가까이

되어서야 첫 차가 운행한다. 내가 탈 배는 오전 8시 30분 출발, 한시간 전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하라 했으니..셔틀은

아쉽지만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기본요금 거리, 참 부산 택시의 기본요금은 1900원이다.

11월 중순에는 그래도 기름값이 꽤나 내려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오를 때와는 달리 그렇게 금방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 왕복 뱃삯 이외에 유류세가 부과되는데, 부산에서 갈 때는 삼만원, 후쿠오카에서 올 때는 이천엔. 100엔에

대략 1500원 이상하고 있으니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금액의 세금이 부과되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서

부두 이용료도 내야 한다. 부산에서는 3,200원, 후쿠오카에서는 500엔. 가기 전 인터넷이나 여행사를 통해 정확한

액수를 알아보려 했지만 워낙 변동이 심한 탓인지 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야 정확한 금액을 확인했다.

드디어 출발, 부산서 후쿠오카까지 고속으로 주파하는 이 배는 수면위 2미터를 부상해서 달린다고 한다. 왜 그

호버크래프트처럼 공기를 분사해서 떠 있는 건지, 아님 다른 뭔가 원리가 적용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간한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3시간이면 충분히 후쿠오카에 닿는다고 했다. 푸른 하늘에 날아가는 갈매기떼들이 부럽지

않게도, 드디어 비행기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으로 외국을 밟게 되는구나, 싶은 느낌.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니,

 한'반도'라곤 하지만, 기실 섬나라에 살고 있었단 실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고속여객선의 실내. 상당히 안락한 의자에 넓찍한 공간까지. 우등고속버스, 혹은 그 이상으로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통 배를 타면 느끼는 파도모양의 율동감이 거의 안 느껴졌다.

깔끔한 식판거치대에 배 안내문, 면세품 이용안내문까지 가지런히 꽂혀있다.

옆에 지나치는 저 배는 대마도로 가는 배란다. 최근 일본 우익세력이 대마도의 실효적 지배권이 한국인에게 넘어

간다느니 어쩐다느니, 결국 독도를 노린 술수를 부리고 있다지만, 어쨌든 저 배에 타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았다. 실제 대마도땅을 한국인이 매입한 것도 고작 0.5%라던가, 그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던데, 엄살쟁이 우익들.

배는 이렇게 부산항의 등대를 지나,

망망대해를 달렸다. 시속 80킬로미터라고는 하지만, 어디 하나 기준잡을 곳이 없는 망망대해인지라 그 속도감이

별로 실감이 안 난다. 다만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는 느낌, 파도 따위에 아랑곳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이건 물에 둥둥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수면 위 2미터 수준으로 공중부양한채 달리는 배인 거다.

한 세시간 가까이 지날 즈음, 우리가 가는 곳에서 오고 있는 여객선이나 고깃배들도 보이고, 첨엔 쪼그만 점처럼

보였던 섬들이 금세 부풀어오르더니 시야 뒤로 사라져 버렸다.

저기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형체를 드러낸 대형 관람차가 있는 곳에서 후쿠오카 인근 여행명소가 시작되는 거다.

저기가 이름이 뭐였더라,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조금 가야 하는 곳이라고 봤던 거 같은데.

하카다항에 거의 도착할 즈음, 배의 속도가 완연히 늦춰졌다는 느낌과 함께 입국 안내가 시작되었다. 양손가락

지문을 모두 요구하는 일본의 과도한 입국 심사가 인권 침해라는 비판도 많지만, 사실 주권국가 일본이 그러겠다면

딱히 외부에서 막을 방법은 없는 거다. 일본에선 일본 법을 따라야 하는 건 기본이요, 들어갈 때도 일본 법에

따라야 저런 '입국이 허가되지 않'는다는 협박에 쫄지 않을 수 있는 거다. 그치만 이미 저런 흉악한 안내문 자체로

살짝 심리적 위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얼마전 내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이야기에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 아니, 한국정부도 못 믿는데 일본정부는 어떻게 믿냐 말이다.

하카다항에 배를 대고 세관으로 올라서는 길, 부산까지 213킬로미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있는 항만의 건물.

웰컴투 후쿠오카, 세관을 거치기 전이라 그런지 촘촘한 그물이 일본땅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세관을

통과해야 비로소 그물이 걷힐 테고, 그러고 나서 맘껏 후쿠오카를 거닐어주겠다고 두근두근.

부산발 후쿠오카행 고속여객선 티켓. 배는 1층, 2층으로 나뉘어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그리고 시속

80킬로-실감나지는 않았지만-로 달린다는 배답게 선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놓고, 듬성듬성 설치된 티비로

영화를 상영해 주었다.


일본에 왜 이렇게 고양이들이 많은지, 그리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만화, 액세서리, 소품들이 다양한지 모르겠다.

이유는 몰라도 고양이가 눈에 띌 때마다 꺄아~ 하며 쫓아가선 사진을 찍기 수차례, 제풀에 지쳐서 나중에는 옆에

고양이가 멀뚱히 날 좀 찍어줘, 라 해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기도 했다.
하카다역 근처 캐널시티 쇼핑몰에서 만난 고양이 인형. 이 므훗한 표정하며, 두손곱게 모아쥐고 투명한 유리공을

받쳐든 폼하며, 번들거리는 T존까지. 입꼬리, 혹은 눈꼬리가 어떻게 살짝이라도 비틀리느냐에 따라 표정과

느낌이 그야말로 천양지차로 바뀌고 만다. 당장 요 두마리도, 조금 덜 과감하게 웃은 왼쪽 녀석이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고 순한 느낌이라면, 오른쪽 녀석은 왠지 잔뜩 장난꾸러기 같다.

후쿠오카 대로변의 한 주차장에서 등을 웅숭그린 채 사주경계 중인 호랑무늬 고양이. 복슬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앞발이 귀엽다.

구시다신사였던가, 신사에 있는 소원적는 나무판에 그려진 고양이. 축 늘어진 볼살을 그려내고 싶었던 듯 한데,

왠지 어색한 주름살로만 보인다. 그래도 천금과 만복을 가져다주는 고양이라니 번쩍 쳐든 앞발과 살짝 초점잃은

시선이 귀엽다고 치자.

큐슈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잡화 전문점이라는 텐진 니시테츠 야쿠인역 인근 INCUBE 매장을 둘러보다가 한켠을

가득 메운 고양이에 혹했다. 섬세하고도 자부심강한 야옹이들의 러시.

하카타역 옆의 쇼핑몰 커낼시티를 걷다가 마주친 또다른 고양이들. 자세히 보면 사슴, 돼지, 토끼 등속도 보이지만

내겐 전부 고양이로 보인다. 특히 저 까만 고양이가 자꾸 눈을 당긴다.

텐진, 나카쓰 거리를 걷다가 문득 뒷통수가 근질거려 돌아본 곳에 버티고 앉았던 두 마리 얼룩 고양이. 깜장이랑

하양이 굵게 얼룩져 있는데, 두마리 다 콧등성이에만 조그맣게 검은 얼룩이 두드러진다. 도망가지도, 겁내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당당한 녀석들.

다시, 인큐브(INCUBE) 매장에서 만난 깜장 고양이. 저 몽환적인 눈빛과 축 늘어진 사지하며, 따스하고

살짝 거친듯 부드러운 느낌의 재질하며. 은빛 단추로 표현된 코와 은은히 웃고 있는 입 모양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던 체셔 고양이 때문이었던 듯.

몸뚱이만 서서히 지워져 나가고 난 후에도 그의 웃음소리는 남아서 사방을 울렸다는 그 입째진 고양이의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가 좋았다. 

초점이 뒤에 있는 황금거북이한테 맞아 버렸는데, 요 두마리 고양이 장식품도 참 이뻤다. 심플하게 표현된 바디와

머리 위 장착된 두 개의 똥글똥글한 안구까지. 유려하게 슬쩍 웨이브를 탄 꼬리의 곡선도 미끈하다.

온갖 동물들이 인형으로 만들어지지만, 얼마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산 이뿐 낙타인형과 더불어 이렇게 귀여운
 
고슴도치 인형은 본 기억이 없다. 보드랍고 포근한 느낌의 고슴도치.

실사 고양이인형..이랄까. 땡그란 눈을 두리번대는 것 같은 왼쪽 녀석도 귀엽고, 살짝 자긍심에 차 업되어 있는

느낌으로 코를 들어올린 오른쪽 녀석도 귀엽다. 어리버리하지만 순해보이는 왼쪽 녀석과 야무지고 똘똘해보이지만

살짝 건방져보이는 오른쪽 녀석, 멋진 짝이다.

닥스훈트 밑에 깔린 새끼 강아지.

그리고 토토로~* 역시 인큐브의 잡화매장에서 찍은 건데, 한 코너가 온통 만화 캐릭터 상품들로 가득했다. 그 중

가장 눈여겨보았던 건 역시 토토로. 말도 몇마디 없고 단순히 행동과 표정만으로 존재감을 전달하는 이 캐릭터에

왜 그렇게 꽂혀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요녀석의 캐릭터상품을 내 사무실 책상에 꼭 올려놓을 생각.

당장 2009년 달력도 팔고 있었지만, 글쎄..1년만 놓고 버려야 한다는 건 좀 아쉽길래. 토토로 분수대를 사실 가장

갖고 싶다는.

만화의 나라 일본에서, 이런 식의 상품 설명 만화가 그려진다는 건 좀 굴욕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저

어색한 표정, 어색한 동작, 어색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그려진 그림이라니.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밑의 아가씨는 저게 혀라고 빼물고 있는 건지 저건 뭔가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그림.

일본의 음식점이나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본던져주는 고양이가 살짝 변형된 오른쪽 고양이. 이 아이는 다소

과하다 싶게 속눈썹을 그려놓아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나름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참해 보인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 왼쪽 므흣고양이.

이런 식의 아이디어 상품. 비록 메이드 인 이태리..라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여튼 일본에서 봤으니깐. 저런 깜찍한

시계는 하나만 덜렁 있음 왠지 별로일 듯 하고, 다른 고양이 컨셉 소품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괜찮을 거 같다.

저런 독특한 소품들에 따르는 일종의 '규모의 경제'효과랄까, 한두개로는 별로 괜찮단 느낌이 없지만 여러개가

뭉쳐 있어야 비로소 그 진가가 살아나는 듯한.

전혀 고양이나 동물과 상관없지만, 저런 관람차 모양의 액자, 혹은 회전목마 모양으로 실제 돌아가는

액자도 꽤나 참신한 아이템이지 싶다. 애기들 사진 꽂아서 곁에 놔두면 혼자서도 재미있어하며 잘

갖고 놀지 않을까.

텐진의 어느 펫샵에서 만난 고양이. 엄청 나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장난삼아 살짝 톡톡 건드렸더니 귀찮다는

듯 몸을 딩굴거린다. 왠지 한손으로 다른 한 팔뚝을 잡고는 뻐큐를 날리는 것 같은 포즈, 그리고 시크한 저 표정.

얘들도 동물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커낼시티와 붙어있는 구시다신사에서 만난 상상속의

동물 녀석.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 잘 못 봤던 거 같다.

보통은 이렇게 회색빛 돌을 깍아서 만들지 않나. 얘는 근데 왜케 복슬복슬해 보이는지, 푸들의 몸을 빌린 거 같다.

얘는 표정이 맘에 좀 안든다.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느낌의 눈빛. 게다가 살짝 입꼬리를 말고 웃고 있다.

신성한 소라며 대접받는 소 동상도 신사에서는 흔히 보이는 것 같다. 딱히 귀여운 느낌은 없고, 걍 동물이니까

끼워 준 셈.

부록삼아. 이 아이는 동물인지 식물인지..명확치 않으나 유산균 캔디를 샀더니 그 사은품으로 딸려있던 걸로 보아

유산균이라고 봐야 할 거 같다. 유산균은...식물은 아니니 포함시키기로 하고, 사실 유산균 캔디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휴대폰 고리를 갖고 싶어서 산 거였다. 꽤 귀여운 데다가 일본 여행의 기념품도 될 수 있을 듯하여.

일본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휴대폰에 달고 좋아라, 하면서 찍은 사진. 저 입모양은 딱 빙긋 웃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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