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세난이 가중되면서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강남권 등 지역에서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의 60% 수준까지 치솟자 전세입주자들이 아파트에서 연립이나 다세대주택, 단독주택 등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고 같은 서울 지역에서도 값싼 다른 지역이나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서민들의 주거 수준이 하향이동하는 현상이 잇따르고 일부 있는 것.

아울러 아파트의 경우 전세난이 매매가격을 밀어 올리는 현상도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서민들의 내집장만 여건도 더욱 험난해지고 있다.

■전세난 속 서민 주거환경 악화


3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주택 전세난이 서울 강남권에서 강북지역 등으로 확산되면서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다.

서울 반포동의 부동산명가공인 관계자는 “최근 아파트의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자금이 부족한 신혼부부나 무주택 서민들이 인근 단독주택가로 몰리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서초구 방배동이나 동작구 사당동 일대 단독주택의 전세가격도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개발로 주거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더욱 악화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저가 수요가 몰린 빌라, 단독주택 가격도 크게 오르면서 이제는 저소득층이 서울 내에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2000년대 초에는 더 좋은 생활환경이나 투자처를 찾아 서울 거주자들이 외곽으로 나갔다면 지금은 전세자금이 부족한 무주택 서민들이 김포나 광명 등 경기 외곽지역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용산구 시티부동산의 한 관계자는 “용산구 일대에 새로 분양한 재개발 아파트 전세값이 2억∼3억원을 호가하다 보니 인근 단독주택이나 빌라 전세가도 모두 억대로 급등했다”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전세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경기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용산구 용문시장 일대에서는 불과 2∼3년 전만 해도 3000만∼5000만원이면 투룸짜리 전세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돈으로 원룸 빌라도 구하기 힘들다.

ⓒ 파이낸셜뉴스 (2009-08-03 17:44:21)


저녁 7시에는 어김없이 용산 참사 현장 바로 옆 골목에서 추모미사가 열린다. 6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제단을 설치하고

미사 준비가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다. 대체 이런 골목에서, 더구나 차들이 씽씽 달리는 8차선도로를 바라보며..미사가

가능할까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 걸까, 생각이야 약간씩 다르고 해법 또한 다를지언정 가슴속 답답함이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와서 이 자리를 채웠는지 모르겠다. 바닥에다가 길다란 깔개를 십여줄 깔아놓는 걸 방금전에

보았는데, 잠시 한눈판 사이에 사람들이 사이좋게 자리를 메웠다. 어린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도 보이고, 혼자

오신 듯한 할머님도 보이고, 친구들끼리 온 듯한 젊은 처자들도 보인다.

7시. 미사가 시작됐다. 난 문정현 신부님이나 다른 빈민활동 담당하시는 신부님이 늘 미사 집전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190여일째 진행되는 추모미사라 그런지, 전국에서 신부님들이 오셔서 돌아가며 집전을 맡는다고 하셨다.

이날은 인천에서 오신 신부님이 미사를 주관하셨다.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고 윤용현님을 위한 생명평화미사.

미사라고는 하지만 종교, 혹은 가톨릭의 신을 위한 제의가 아니다. 시작성가는 노찾사의 그루터기 1절. 민중가요가

골목 안을 꽉 채웠고, 골목을 삐져나간 가요소리는 지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신앙을 전파하려는 전도의

목적이 아니라, 세속의 일을 세속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설득의 목적으로 열린 미사다.

제단을 향해 미사 참석자들의 머리가 숙여진다. 부디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벼르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늘에 계신 분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관하시라 하고, 땅에 있는 우리들은

땅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일들을 알아서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한쪽에는 '질서유지선' 뒤에 정복 차림 의경 넷이 뭔가 열심히 전화도 받고 무전도 받고, 보고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의경 네 명이 질서유지선을 설치하고 현장의 질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이들이 질서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미사가 골목을 메우고 집전되고 있는데 정작

경찰들은 그렇게 질서정연하고 성숙한 분위기 바깥에 쫓겨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질서유지선이 왜 저기에 쳐져 있는지도 궁금하고, 이 경찰아저씨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기에 나란히 넷이서

서있는지도 궁금하다. 사람들이 경찰에 질서를 부여해준 것만 같다. 경찰을 위한 질서유지선인 거다.

그러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진행되는 미사. 혹은 미사의 형태를 빌어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산 자도 더불어 위로하는

신부님의 부드럽지만 힘있는 나직한 말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쳐다본다.

앞에 길게 깔린 깔개들 말고 뒤에는 색색의 간이의자가 놓였더랬다. 엄격하게 열이 맞춰서 놓이지는 않은, 편할 대로

의자를 땡겨서 앉아 미사를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인 데다가, 나처럼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적잖았지만

미사 분위기만은 그 어느 미사보다 팽팽하고, 살아있었던 느낌이다.

7시 반..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다시 한번 올려다본 참사 현장. 네모반듯한 아가리들을 시꺼멓게 벌리고 선

건물이 참...흉흉해 보인다. 건물 탓은 아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 탓이다.

여전히 질서유지선이 경찰들로부터 미사 참석자들을 보호해주고 있었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치만 조금씩 속도를 내어 용산 참사현장을 벗어났다. 공기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거긴.

진상 규명은 사실상 그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어느정도 된 상황아닌가. 누가 잘못한 건지, 안전수칙을 누가 어겼는지,

그리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대충 언론보도로 (중구난방식일지언정) 노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선.

과잉진압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생존권대책 마련없는 난개발정책 중단하라.

단순히 약자에 대한 도덕적 공감이나 정서적 동정심으로 그쳐서 될 문제가 아니다. 한번으로 끝날 일도 아닐 뿐더러,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리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학살를 용서하지 않다!" 서툴고 얼핏 웃기는 말, 그렇지만 흔들림없이 다부지게 내려간 ㄹ의 획이라거나

90도로 딱딱 꺽여있는 단정한 서체를 보자니 그 문구를 쓰는데 기울였을 열의와 집중도를 알겠다. 외국인들이

아마 '연대'하러 와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그 뜻은 분명히, "용산학살을 (일으킨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였을 거다.

"대학생이 함께 하겠읍니다!" '읍'의 센스도 센스지만, 반드시 이길 거라는 격려가 와닿았다.

아예 시커멓게 문대버린 벽면에 남아 있는 건, 꽃잎, 그리고 꽃잎 사이로 부유하는 다섯 분의 영정사진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다. 위에서부터 단정하게 써내려갔는데 기둥이 모자라 말을 다 못한 느낌.

여지없이 아스팔트 바닥도 선전 공간이 된다. "이윤보다 사람이다."

이윤 대신 사람을 챙기란 말이 아니다. 이윤을 챙겨도 사람부터 챙겨놓고 챙기란 말이다. 이것도 못하겠다면..

여기 사람이 있다. 잊지 않는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 잊지 않는다.

3천쪽을 공개하라..는 구체적인 요구조차 묵살당하고 있다.

경찰은 인제 큰일났다. 담벼락에는 살벌한 가위 표시, 공중화장실에는 "견찰사용금지" 표시. 어쩔 테냐.

'내 인생이랑 상관없는 대한민국 7%의 부유층을 위한 건물.' 그걸 위해 부서지는 93%의 생존 공간.

어쩌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란 믿음 내지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7%의 가능성에 눈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개천에서 용나기란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감에도.

우비를 붙여 놓고, "국민들이 완전히 뒤돌아 설 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이걸 설치한 사람의 센스도 센스지만,

완전히 뒤돌아 서게 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갈수록 섬뜩한 공포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오세훈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광화문광장, 오늘도 10명이 기자회견 중 끌려나갔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광장'이란

아무런 소음이나 불만세력의 '준동'없이 모두가 하하호호하며 개별적으로 즐기는 공간만을 이른다. 나머지는 얼룩.

빠염~* 플리즈 빠염~^^

그래도 웃자. 왠지 이 삼엄하고 살벌한 땅 위에 저런 스마일 표시가 강림하다니, 이걸 적은 사람은 초인인 게다.

그래도 웃자. 맞는 말인데, 이 상황에서 웃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왠지 먹먹하다.

차라리 이게 인간적이다. 전경은 걷지마, 라고 땡깡을 부리듯. 떽!! 이라는 고함소리까지.

지우려고 애쓰는 사람과 지우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 누군가 촌평했듯 독일 베를린 장벽에 그려졌던 온갖 그림과

메시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무언가에 대한 항의, 희구, 그리고 열정.

건물 중 아직 철거되지 않은 한 동의 건물에는 민노당 용산4구역세입자분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적잖은 갈등이

이미 있었는지 온통 빨간글씨로 도배되어 있다.

인권의 사막 용산. MB정권의 흉터 용산. 양심의 집결지 용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용산.

작가선언의 이런 언명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함이다. 양심의 집결지가 되어야 하며,

더이상 밀려날 수 없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곳이 용산이어야 한다.




 
"니들이 경찰이면 나는 송혜교다".ㅋㅋㅋㅋ 문득 웃음이 터졌었다.

거울까지 달아놓았다. "거울아 거울아".

"이명박씨, 당신이 선택하시라!" 이미 그는 수차례 선택을 선언해왔다. 새삼스레 바랄 것도 없지 않나..는 게 갠적인 생각.

"용산 참사 해결없이 이 땅에 민주주의란 없다."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목숨값도 가벼워야 합니까...

씁쓸했던 손자보 하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언젠가 새벽은 온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시절

했던 말이다. 이만큼, 뒤로 돌아갔다.

버려진 매트리스 세개로 그려진 세폭짜리 그림. 입에서 포클레인이 나오는 그대는, 진정한 트랜스포머.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라는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만평들을 다시 만났다. 반갑다기보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때만 해도 2개월이나 지났으니 뭔가 해결이 되겠지..했는데 어느덧 6개월이 넘어간다.

"돈놀이로 사람 죽이는 이 미친 개발을 당장 멈춰라." 돈과 사람 사이에 부등호를 세운다면 아가리가 돈 쪽으로 가는 세상.
"삶 자체를 철거하는 재개발 정책."

다섯 분의 영정이 실크스크린같은 형태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걸 굳이 다시금 지워버리려 한 누군가의 덧칠이 보인다.

이건 전쟁이다. 이 좁고도 별볼일없는 담장을 둘러싼 여론 싸움이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지우며, 다시 그 위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공간은 보수언론이 장악한 거대한 체스판의 아주아주아주 미미한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만큼 날 것의, 그만큼 적나라한 이야기가 활자화되는 거지만, 동시에 그건 그만큼 세가 약하고 외롭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MB 퇴진. 의원내각제였다면 벌써 정권이 열번은 넘어졌을 거라고 손호철 교수가 그랬던가.

길바닥 역시 유용한 선전공간..이라기 보다는, 통로가 없다. 이들이 발언하고, 동의를 구하고, 자신들의 목청을 높일

공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온 비명같은 외침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깊이깊이 새겨진다.

"철거하면 이명봙". 봙.

"공권력 메롱". 굳이 지난 촛불시위 때의 발랄함과 재치있는 움직임들을 들지 않아도, 조금씩 그들은 우스워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고 있으니, 풍자의 의욕은 날로 높아간다.

"우리는...더 큰 울음소리로 살아날 것이다." 그치만 때는 진보세력조차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게 만드는 시대.

울음소리가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해야 하는 시대.

어느새 용역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버렸다. '용역경찰 박살내자'.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란 책의 표지에 나왔던 판화 그림이 붙어있었다.

"비록 패배가 지금 우리의 삶일지라도, 우리는 사랑도 알고 꿈도 안다." ...

돌아보다 보니, 무슨 전시회나 미술관을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짧막하지만 생생하고 강력한 아포리즘들과 그림과 사진,

판화와 만평, 때로는 설치미술작품같은 것들까지. 그래피티가 별거인가. 어쩌면 애초 그래피티 정신엔 훨씬 어울린다.

이렇게 누군가가 열심히 지우는데 여념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때론 무지막지한 상말이 난무할지라도,

용산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현세던가, 처음 포돌이 포순이 캐릭터를 제공하며 집회 현장에서 인형가죽을 뒤집어쓴 경찰을 만들어냈던 게.

그야말로 양의 가죽을 쓴 늑대란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물론 모든 경찰 구성원을 싸잡을 생각도 없고, 경찰력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착한 척 귀여운 척 '민중의 지팡이'입네 하면서도 결국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학살도 주저치 않는 엄연한 '합법적 폭력조직'의 양면성이 엄존한단 걸 잊으면 안 될 거 같단 이야기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랍니다..그날의 화염이 자꾸 눈 속에 어른거려서..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참사가 벌어졌던 건물 옆 골목을 들여다보니 지역 전체가 재개발로 인해 허물어진 상태였다. 이미 많이 부서졌고,

앞으로 철거를 앞둔 듯 텅 비어버린 건물들. 거기에 철거민분들과 유가족들은 다시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여기 아직 사람이 산다. 여기, 사람이 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반년, 여기에 있는 사람, 여기서 외치는 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걸까.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흥얼거리며, 아...나도 한때는 철거민이었고

소상인, 노점상이었으며 의분 넘치는 운동권이었노라고 자뻑에 취해 있는 걸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때도 반입이 금지되었던 만장용 대나무다. 죽창으로 언제든 변신할 수 있어서라나.

사실 용산참사의 일차적인 평가는 너무너무 명료하다.  생존권 투쟁에 나선 철거민에 대한 과잉진압. 거기에

덧붙여 철거민에 대한 보상의 법적 문제라거나 재개발사업의 불합리함, 등등을 따질수야 있겠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여섯 명이나. 안전수칙도 어기고, 그것도 용역과 함께 과잉진압했다, 미안하다, 진상조사해서

재발 방지하겠으며 책임자에 대해 처벌 확실히 하겠다. 이런 말 한마디 못한다니 말이 되나.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정도도 이분들에겐 사치스러웠나.

그러는 와중에 전면에서 부딪히는 건 극도로 날카로워진 철거민분들, 유가족분들과 전/의경들을 앞세운 경찰이다.

이곳으로부터 심심찮게 들렸던 신부님들에 대한 구타, 과잉 대응 사례들은 급기야 천주교 측의 공식 항의로까지

이어졌었다고 들었다. "권력자의 개", 혹은 "민중의 보호자"라는 극단적인 그림 가운데 근래 급격히 어느 쪽에

가까운 모습이 선연히 부각되는 건 사실이다.

주변 철거완료지역을 에워싼 벽에 붙어있는 경고문. 애초 손해 보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하루아침에 퇴거를

강요당한 철거민들이 살 길을 터달라고 이곳에 버티는 순간, 불법점유, 무단침입, 업무방해, 재물손괴, 폐기물관리법

위반, 폭력행위, 주거침입, 특수주거침입죄..에 더해 안전사고의 책임까지 몽창 떠맡게 된다. 국가의 보호로부터

배제당하게 된 그들인지라, 용역에게 협박당하고 구타당해도 의지할 곳이 없다.

"우리의 웃음이 없는 민주주의 민생은 거짓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환상인지도 모른다. 가진자들은 여전히 그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절대법칙은 공고한데

대체 뭐가 민주주의란 말인지. 그게 현실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궁해지는 거다.

용산 참사 유가족분들을 돕기 위한 장터랄까, 포차가 열렸었나 보다. 철거된 건물들, 철거될 건물들이 온통 주위를

삼엄하게 메운 가운데 샛노랗고 새파랗고 새빨간 간판이 왠지 슬프다.

바로 뒷 건물은 그림책 화가분들이 전시 공간으로 쓰고 계셨다. 전시공간이자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는지 사람이

계속 상주하는 것 같았다. 우린 끝까지 간다. 우린 힘들지 않다. 최면 문구와도 같은 그런 말들을 현수막에 내걸고.

옆의 텃밭은 고추, 상추, 깻잎, 열무 등 이런저런 채소류를 품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드시라는 소개글과 함께,

'공동선을 위한' 공권력이란 문구가 언뜻 눈에 띈다. 공동선은 별게 아니다. 같이 살자는 거.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피해주지 않고 함께 살려나가자는 거. 쉽다면 이토록 쉬운 거다. 채소 나누기만큼.

한 쪽에 쌓인 녹슨 쥐덫들. 아마 예술하시는 분이 작업하려고 놔두신 건지, 퍼포먼스나 작품에 이미 쓰였던 건지.

80년 광주 학살, 09년 용산 학살. 단순 등치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리고 희생자에 대해 '우리'라는 마인드를 갖기란

더욱 쉽지 않을 거다. '전라도치'나 '철거민'이나 '우리'란 단어로 묶기는 어렵기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란 책의 한대목에 그런 말이 있다. 철거민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철거민이 될 거란 상상은 꿈에도

못했노라고. 마치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처럼 재개발 사업이 닥친 거고, 제도적으로 '보험'조차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음은 그 이후에야 깨달은 것 뿐이었다. 그뿐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만든 현수막인 듯 하다. 맞춤법도 맞지 않고, 다소 낯선 색감에 못알아들을 단어들이 가득하지만,

그 의도와 의지만은 분명하다.

집은 살 것, 상품이 아니라 살 곳, 기본적인 권리다. 집을 이윤을 위한 상품으로만 여기는 순간,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순간 그 공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이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계속해서

열악한 지역으로, 철거와 재개발을 기다리는 지역으로 옮겨가 결국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그들의 게으름, 못 배움, 재수없음, 팔자...를 운운할 바에야, 차라리 2등국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솔직하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몇몇 작품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이 연필 그림.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다.

얼굴이 비어있는 여섯번째 영정사진, 그 경찰과 유가족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부는, 그들에게는

제대로 사과하고 유감을 표했을까. 그조차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을 부수고 생겨난 멋진 도시는, 가구수도 적고 집값도 월등히 뛰기 마련이다. 주변집값도

덩달아 뛰어 버리니 결국 집주인과 세입자를 막론하고 원주민 대부분에겐 동네를 떠나는 길 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정비해요. 시멘트를 발라서.

문득 걱정이 생겼다. 이런 작품 찍어올리는 것도 저작권 위반일까. 작가의 의지와 별개로 고발당할 수 있다고 얼핏

들은 거 같은데..문제가 된다면 바로 삭제하는 수 밖에. 쫓겨날 일없어 좋겠다, 불지를 놈없어 좋겠다.는 마지막 문구.

영업합니다, 란 간판이 되려 휑한 분위기를 더했다. 뒷쪽으로 쭉 늘어선 음식점들이 몇군데 문을 열긴

했지만...아마 조만간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거다. 제대로 보상은 받으셨을까.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걸까. 바로 옆의 맥주집 지하로 내려가는 길엔, 폴리스라인이 쳐져서 출입을 금지했다.

참...황량하다. 잔뜩 깨져나간 유리조각들이 흥건한 물처럼 고여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거리며 기울어지는 시각. 건물 철거가 완료된 공터를 둘러싼 가림막에 마지막 햇빛조차 텁텁하다.

사람이 살았던 곳, 누군가가 살림을 하고 누군가가 미래를 상상하며 몸을 뉘였을 곳. 세입자의 재산을 털어

건설자본과 구청, 일부의 배만 불려주는 현재의 재개발이 쓰나미처럼 예기치않게 지나고 난 현장이라 더욱 살벌하다.

돈없고 빽없고 힘없으면 당해야지, 어떡하냐. 라고 묻는다면 역시 할 말이 궁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란 게, 그정도로

허약하고 별볼일없었다.

이런 식의 구도를 굳이 잡고 싶진 않았다. 뭔가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을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런 의도가 아니고, 사실 그런 구도로 보는 게 맞지도 않는다. 이건 '부'를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한쪽 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집의 내부가 훤히 보이는 집 한채를 마주쳤다. 적나라하게 내부가 드러났다. '집'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안온함과 포근함 따위 모두 휘발되어 버린, 시멘트 블럭만 거기 남아있었다.


용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런 거다. 적나라하게 내부가 드러났다. '우리'란 단어에서 헤아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란 게 얼마나 황공무지한지.





신용산역에서 내려 조금 걸었더니 저 앞에 문득 많이 보던 건물이 보인다. 특히 '세무사 조xx 사무소'라는 저 파란 간판.

문득,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직접 와보는구나.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여기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구차한' 밥그릇싸움에 사형을 언도한 그들.

저 위에서 여섯 생목숨이 날아가 버렸다. 망루를 짓고 올라간지 하루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그야말로

'테러분자들을 진압'하듯 불구덩이 속으로 토끼몰이해버렸던 거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은 커녕 3000여쪽의 수사기록도 공개하길 거부하고, 진상 규명조차 마냥 소홀한 정부. 그들은

피해자 측에 대한 책임있는 사과나 유감 표명 등은 고사하고 어떤 대화도 일절 거부해 왔다.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사제단과 피해자대책위, 철거대책위원회 분들이 분향소를

설치하고 매일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저번주 금요일, 이날은 참사, 혹은 학살이 발생한지 무려

193일째 되는 날이었다.

시끄러운 도심의 소음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점차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신호등을 건너니

아마도 작가선언 측에서 나온 듯한 분이 길거리 선전전을 하고 계셨다. "평범한 시민이었다. 죽여야 했는가?"

뭐라도 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우선 현장을 지나 근처 슈퍼에서 집들이 선물용 휴지를 사가는 길, 유족분들 중 한분인 듯한

아주머니께 들려드리며 "어머니, 잘 풀렸음 좋겠어요."란 멘트를 하고 싶었다. 건물 위에 언뜻 잔뜩 불에 그슬려 허물어진

컨테이너가 보인다.

자, 여기서부터 일상이 깨어져나간달까. 사람들이 부산하게 쏘다니던 거리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뭔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안하게 만드는, 생경한 단어들과 '낯간지런' 호소들.

선연한 빨강색에 느낌표로 끝나는, 뭔가 강력한 어조로 요구하는 선전물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재개발을 틈타

한몫 벌어보겠다고 눈이 벌건 '속물'도 못 되었었다. 바랬던 건 단지 재개발 중에 영업을 계속하기 위한 가상가 제공,

그리고 재개발 이후의 임차/임대상가를 보장하라는 것이었을 뿐. 그조차도 묵살당하고,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건

누구의 책임인가.

전철연의 삑삑거리는 소음 섞인 스피커, 낯설고 무서운 투쟁가, 그런 것들에 대한 관용, 나아가 이해를 바라는 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사실 무섭고 낯설기는 소리없이 사람을 짓밟는 세련된 공권력이 한 수 위라고.

검찰은 수사기록 3천쪽을 법원의 명령까지 거부하고 벌금을 감수하며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는 아마

용역과 경찰과의 공동 작전을 펼쳤던 정황이나 진압작전이 아무런 안전조치없이 취해졌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을 거란

추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의혹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비공개하는 이유는,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닐까.

7월 초에 인터넷 공간에도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경찰의 진압훈련 시범 중에 용산 참사와 너무나도 흡사한 그림이

나타났던 것. 경찰은 이미 용산참사를 '도심 테러리스트 섬멸'작전 정도로 규정지은지 오래인 듯 하다.

분향소 앞을 지키고 늘어선 화분들. 조그마한 꽃집처럼,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봉싯봉싯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꽃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을씨년스런 건물에 자리잡은 분향소가 풍기는 허름한 분위기에

더해, 조화라거나 거대한 화환 같은 것들 하나 보이지 않는 삭막함까지 사람맘을 쳐댔을 거다.

분향소는 한산했다. 검은색 전철연 조끼를 입고 다니시는 분들은 의외로 매우 밝고 의연하셨다. 뒤늦게서야 이렇게

찾아뵙고 착잡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스스로가 더욱 부끄러웠다.

다섯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역시 조그마한 화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참사 이후 6개월, 아직 이분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끊임없이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이 정부 인사들에게 용산 참사란 마치 먼 옛날 일인양 까맣게 잊혀진게

아닌가 두렵다. 이분들에 대한 완벽하고 단호한 무시.

분향소 왼쪽에 지어진 평상엔 신부님들이 인터넷도 하고, 책도 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시며 자리를 지키셨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 오른쪽 평상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나지막한 평상은 왠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쉬어갈 수 있다고 유혹하는 듯 해서 나도 잠시 앉아 땀도 식히고..신부님과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듣고.

그러고 보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가시는 모양이다. 수박에 생수에 포도, 사과에 쌀포대까지. 좋은 분들이 많다.

다섯 분의 생전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분향소 옆 유가족 분들의 살림터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치 내장이

터져나온 생선처럼 삶의 '누추한' 흔적들은 여기저기서 불에 그슬린 양동이로,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냄비로

나타난다. 이런 것들을 안전하고 위협없는 공간에 부려놓고 일상을 살아갈 만큼, 그만큼의 보장도 못해주는

정부라니 한심하다. 화가 난다.

유가족분들의 일상 아닌 일상은 분향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한쪽에서 매 식사를 준비했고, 또 건물외벽에

의지해 늘어뜨려진 빨랫줄에는 하루치의 빨래가 널려 있었다. 이토록 신산스런 삶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이분들이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어느 한계에 도달했음을, 정말 그분들 말씀처럼 '악밖에' 남지 않은 싸움이다.

건물을 반바퀴 에둘러 보았다. 어느 지점에선가 올려다본 하늘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 팍삭 허물어져내린 컨테이너의

잔해로 가려져있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여기였다. 이곳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은 용산 주변 출근길을 온통 마비상태에 빠뜨렸으며, 용역들과 공조하여

토끼몰이식 강경책을 일관했고, 안전대책 하나없이 죽어라, 하며 기름불에 물을 끼얹었다.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에는 반짝반짝 세련된 색감의 닭장차가 마치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 프라임처럼 늠름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닭장차 안에도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양푼이며 냄비, 식판들이야 있겠지만 차곡차곡 잘 갈무리된 채

깔끔하게 숨겨져 있을 거다. 이건 인간의 존엄성 문제기도 하다.

참 허약하기 짝이 없는 철판 한장이다. 폭발물과 위험물질이 가득하고 인근 주민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해치워 버린 거라지만, 실제로 주변 주민들은 아무 위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바 있다.

"죽이지 마라. 민중이 이긴다." 죽이겠다고 달겨들면 사실 방법이 없다. 죽고 나면 이렇게, 끝인가 싶기도 하다.

용산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한동안 여론이 술렁댔었고 이로써 정권이 끝난다는 성급한 예측, 기대섞인 전망도 있었댔다.

그렇지만 그렇게 산뜻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이야기란 거, 현실에서 찾긴 쉽지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철거민 분들, 저 망루에 오르셨던 분들의 마음이다. 정권 퇴진시키자고 올라간 거 아니다.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이한몸

열사되겠다고 올라간 거 아닌 거다. 내게 살 길 좀 마련해 달라고, 반토막나고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으니 생계 대책

마련해달라고 올라간 거다. 용역이 경찰과 손잡고 죽어라죽어라 괴롭히니 올라간 거다.


최소한 국가라면, 정부라면, 지들이 국가고 정부를 '자처'하겠다면, 국민이 먹고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닌가.

가톨릭사회교리에 따르면, 양심에 따라서 거부할 권리란 '공권력,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한다. 전/의경들한테도

못할 짓이다. 그들도 이미 큰 상처를 입었을 터, 거기에 더해 스스로 용기를 갖고 불의에 항거하라 말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명령의 발화자가 더욱 혐오스럽다.


그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을 아프고 병들게 한다.

고양이에 열광한다. 알레르기가 있다. 고양이까페에 갔다. 오줌을 쌌다.(1/6)

[사진] 고양이 클로즈업..@ 고양이까페.(2/6)

[사진] 스스럼없이 테이블을 차지한 고양이녀석들..@ 고양이까페.(3/6)

[사진] 대자로 널부러진 고양이들..@ 고양이까페.(4/6)

[사진] 가지런히 네발모은 고양이녀석들..@ 고양이까페.(5/6)


에 이어 여섯 번째로 이어지는 고양이 사진選입니다.ㅎㅎ

고양이의 몸에는 늘씬한 팔다리가 차곡차곡 접혀서 숨겨져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제트 만능팔~이 덜컥

튀어나오듯, 고양이의 재빠르고 군더더기없는 움직임은 항상 우월한 기럭지로 뒷받침된다.

어렸을 적 몇십번씩 보았던 디즈니 만화의 고양이캐릭터들, 그리고 그 오리지널버전의 애기고양이까지.

까페 안엔 고양이들이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이런 '고양이수납공간'.

아마 기어코 만지고 비비고 안아주겠다는 손님들이 있으면 쪼르르 이런 곳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저렇게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공간 밖을 내다보며 말이다.

1층위에 2층, 2층위에 3층, 3층위에..각 층마다 거주하고 있는 고양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2층집 고양이가

애써 1층집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고개를 뺴꼼히 내세웠지만, 들은 척도 않는 나쁜 1층집 고양이.

그와중에 입맛다시는 3층집 고양이는 뭐고.

큰 대자로 뻗어 두발을 널부러뜨린 욘석은 여전히 잠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아늑한 바구니 안에서, 그것도 제몸과 색깔이 똑같은 보호색을 띈 바구니 안에서 옹송그린 고양이 한마리.

뭔가 놀란 표정의, 눈을 똥그랗게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고양이.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고양이들 밥먹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시작되어버린 눈싸움.

의자에 사람처럼 기대 앉아선 주변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하양고양이.

그리고, 유독 내 가방에 관심을 보이던 몇몇 고양이들. 가죽냄새가 너희들을 흥분시켰던 거니.

짱구의 울라울라춤은 아마 고양이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

뭔가를 붙잡고 자야 안심이 된다는 듯 밧줄에 팔 하나를 걸쳐놓고 뒹굴거리는 대자 널부러진 꼬마 고양이.

까페 한구석에는 상처입은 유기고양이가 철망 안에서 적응 중이다. 뭔가 부럽기도 하고 착잡해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눈빛이라고 느꼈다.

이제 슬 갈 준비를 하려는데, 눈치를 챘는지 좀체 내 가방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급기야 앙탈을 부리는 녀석.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난 손님들, 여기저기서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하는 고양이들.

막판에 워낙 귀엽게 구는 통에 정신이 쏙 빠졌다. 아주 그냥 내 가방을 제 둥지삼아 끌어안고 살 기세다. 좋은 기세다.

형님 저는 이만.

왠지 이 녀석이 내 가방위에서 취하는 포즈들이, 요새 연예인들 섹시화보니 하며 찍어대는 그 사진들과 비슷한 포즈에

분위기에 눈빛이다. 요염한 녀석 같으니라고.

기어코 떨쳐내고 일어섰더니, 마침 옆 테이블에 와서 앉는 사람 가방으로 쪼르르 옮겨가 버린다. 순간판단력이나,

대응속도나...나무랄데 없이 쾌속하다. 아마 이녀석은...가방에 대한 페티쉬를 가진 듯.

집에 가는 길, 횡단보도에 빨간 불이 길어서 살짝 넘어섰다가 경찰아저씨가 쫓아왔다.

딱지를 떼고 말았다.ㅜ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마치 짚을 이고 불섶에 들어간 것'과 같다며 알러지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했다.

삼일동안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지냈다.






꺄아~~ 완전 귀여워~!!

얼굴을 살짝 돌리면...꺄아~~ 너무 귀여워~!!

반대편 얼굴도 보여주셔요 고양이님~~! 꺄아~~~

고양이님과 눈높이를 맞춰 카메라를 들이대는 즐거운 한때.

꺄아~

응? 

꺄아~ 마치..해변가를 걷던 잘빠진 구릿빛 피부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부르는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살짝 돌아보는 듯한 분위기랄까. 방심한듯, 무심한듯, 하면서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라는.ㅋ

이 몰입한 눈빛연기. 앞에 각잡고 앉아있는 고양이들을 눈빛만으로 제압할 기세다. 근데, 실은 아무것도 앞에 없었다.

왠지 심통스런 표정의 고양이. 나 지금 진짜 삐졌거든. 말걸지 마 흥. 정도랄까.

짝눈뜨니까 완전 불량해 보여. 왕년에 껌 쫌 씹었던 고양이. 그치만 별로 무게감은 없다.

완전 귀여운 새끼고양이. 눈을 몇번 꿈뻑거리다간 정신못차리고 잠들어버렸다.

흔히 여성의 눈을 두고 '고양이눈'이네 뭐네 하지만, 똑같은 고양이눈도 눈가 주름이 약간씩 씰룩거리면서 영

다른 분위기를 풍긴단 말이다.

왠지 고양이가 아니라 부엉이나 올빼미를 떠올리게 만들던 녀석.

이 아이들은 말을 할 줄 아는데 안 하고 있거나, 말을 이해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믿게 만드는 눈빛을 가졌다.

이렇게 우아하고 의젓한, 그야말로 왕족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양이는 처음 봤다. 다만 저 갈기갈기 갈기수염이

밥먹을 때 많이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



"5월18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문화광장등 국립극장 곳곳에서 전시될 예정이며,
전시외에도 공연,체험등의 아랍관련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니,
남산이 푸르른 요즘, 
시간이 가능하시다면, 발걸음 하셔서,
아랍문화의 향기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는 4시부터 8시까지 오픈예정입니다.)"

라고, 아랍문화축전 담당자분이 이메일을 주셨다. 정작 내가 갈 수 있을까..싶은 타이밍의 날짜들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사진과 글이 전시된 곳을 다녀오지 않을까.ㅎㅎ

혹시 아랍문화에 관심있고 다른 여행사진들이나 캘리그래피, 헤나, 아랍음식 등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며칠전 올렸던

아랍문화축전 행사 관련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아랍문화축전]꾸스꾸스를 먹고 이라크영화를 본 후에 수단전통혼례에서 결혼하기.)




애초 위드블로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리뷰어를 신청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차례로

그의 미술작품들, 그의 수기노트들, 그리고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삶 어느 순간순간에 포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미지들이 바로 내가 지금껏 다 빈치 그에 대해

그나마 갖고 있던 조각조각 분절된 정보들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쉽게

멈추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멈추어선 경계 그 내부를 세계의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때론 그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오늘날 현대과학이

검증해낸 과학적 사실들을 일찍이 깨우쳐버린 다 빈치나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당대의 상식에 반함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프로이드나 니체 같은 사람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후대인들을 자신의 어깨 위에 태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재평가되고, 아 이러저러한 것들은 이미 그가 얘기했던 것들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식으로 그치곤 한다. 다 빈치가 그렇다. 그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시도, 방법론들은 너무

일렀다. 그야말로 그는 '너무 일찍 깨어난 사람'이었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할 만큼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작동 원리를 탐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잡한 수기 노트에 적힌 글과 그림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열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을 재구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책이다.

그가 자신의 사고를 기록해둔 수기노트들조차 제대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의 삶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 빈치 앞에 붙는 온갖 수사들, 천재니 편집증

환자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생아였다느니 등등 손쉽게 레테르를 붙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따라가며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풍성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하얀 수염이 뒤덮인 늙은 현자로서 멈춰있는 다 빈치가 아니라, 그의 어릴 적 모습과

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 앞에서는 지금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친밀한 느낌이 한층 커져 버렸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용 인문/사회 도서다. 몰랐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나서 이런 책을 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다소 망연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엇보다 책 마지막 쯤에 있는 다 빈치의

수기노트를 웹상에서 일부 열람 가능토록 한 웹사이트 주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현재 그의 수기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레스터 사본은 물이 가진

모든 성질과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www.amnh.org/exhibitions/codex/index.html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으니 한번 죽 읽어보며 수기노트에 담긴 그림 일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또 영국국립도서관의 사이트에서는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의 수기노트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데,

왜 그런지 난 계속 못 보고 있다.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digitisation.html#leo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0점
캐슬린 크럴 지음, 장석봉 옮김, 보리스 쿨리코프 그림/오유아이
빈 마음 속의 동요(Riot in empty heart), 고상우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구불구불 잘 말린 머리칼과 비대칭의

앞머리. 그리고 새침하게 내려뜨린 기인 속눈썹 밑에는 어떤 눈빛을 숨기고 있을까. 뺨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음을 은유하는 걸까. 한참동안 바라보았지만 좀체 그녀의 속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2층에는 좀더 그럴 듯한 공간이 있었다. 아마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지 중간중간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 너른 공간을 채운 커다란 사진작품들은 그 몽환적이고 묘한 느낌의 색감으로 뭐랄까, 공간 자체를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멀스멀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색이 뒤집어진 사진들과 죽어버린 듯한 색감의 역사만으론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와타나베 曰) 사람 두 명을 집어넣다.

몇 개씩 천장에 달려있는 샹젤리제들하며 높은 천장, 아마 1, 2층 통틀어서 이공간이 가장 야심차게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전시된 작품들도 대형작품이나 연작이 많았다. 이 전시회 관련 기사에 함께

뜨는 사진들이 모두 이 곳에서 찍힌 것들임을 와보니 알겠다.

이 곳이 한때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서울역사의 일부였음을, 그리고 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였던 곳임을

증거하는 흔적들. 그니까 여긴 '교양실'이자 '제1전시실'이었던 건가. 아님 '교양실'이었는데 '제1전시실'로 바뀐

걸까. 어느 쪽이던 이상하다. 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소심하게 문짝 위에 올라붙은 명패는 대체.

사진들이 보통 잔뜩 헐벗고 남루해진 벽들을 가리듯이 걸려있던 다른 방들과는 달리, 이방은 그래도 멀끔한

나무장식들도 살아있다.

정확한 이름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라디에이터라 그러나. 흔히 보는 것과는 다른, 조금은 고색창연해보이는 모습의

라디에이터가 수줍게 벽면 안쪽으로 숨어있었다. 저건 혹시 일제시대때 설치된 건..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생김새나 때깔이 그때까지 거슬러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 켠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런 벽난로도 있고, 여기 그러고 보니까 댄스홀 정도로 써도 별 손색이 없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터키의 톱카프 궁전이나 파리근교의 베르사유 궁전, 머 이러저러한 궁전들에서 보았던 천장높고

화려하게 치장된 방들에야 못 미친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하지 싶다. 다소 키치스럽긴 하지만 유럽의

고풍스런 건물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왼갖 장식들. 아님 이 방에 들어서기 전 내가 지나온 곳들이 워낙 눈높이나

기대치를 낮췄던 탓일까.

그 방을 빠져나오니 다시 시작된 버려진 건물 순례. 깻잎처럼 붙어있는 낡고 닳은 벽지조각과, 온통 터져버린

페인트칠, 그리고 배관설비와 전깃줄이 몽창 드러난 헐벗은 곳에 드문드문 이빨빠진 샹젤리제의 불빛이

붕붕 떠있다.

이게 그 깻잎사이즈로 벽에 남은 벽지의 추억..이랄까.

고색창연한 문짝에 달린 놋쇠장식들. 둘러보다 문득 들었던 생각은,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나 궁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어정쩡한 근대 따라잡기 시대에 지어졌던 이런 건축물들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비록 서구 문화의 껍질만을 흉내낸 거라거나 어색하고 어설픈 미성숙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지금까지 흘러온 걸 테니까 말이다.

창문에 저렇게 흰색 천을 늘어뜨리고 빛을 가려놓았다. 영화 '디 아더스'같은 데 나왔을 법한 주인없는 집에서

가구들이 모두 흰색천을 뒤집어쓰고 창문에도 흰색천을 가려놓는 장면이 떠올랐다.

2층 어디메쯤에서 내다 본 옛 서울역사의 머리꼭대기. 분명 새파랗게 맑을 하늘이 지저분한 유리창에 겹쳐서는

누덕누덕해졌다. 어디쯤에선가 방에 들어서면 새로 지어진 서울역사에서 KTX가 출발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고스란히 들리기도 하고, 또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몸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같은 장소를 찍는데 카메라 렌즈가 빛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머금느냐에 따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사진전을 보면서 카메라를 찰칵대려다 보니 왠지 주눅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좀더 잘 찍어야 되지 않겠냐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저런 각도, 저런 느낌의 사진은 따라 찍어봐야겠다 싶어 눈여겨보게 된다.

예컨대 요런 사진도, I'm lost without you. 작가가 적당한 느낌의 벽에 저렇게 낙서를 해놓고 사진을 찍은 건지

아니면 우연찮게 저런 낙서를 발견하고 찍은 건지야 알 도리가 없지만, 중구난방 쓰레기통같이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는 맘속에서도 뚜렷이 형체를 갖추고 한가운데서 소곤거리고 있는 저 문장. 저 마음.

세상에 막 출현한 아이. 아직은 삶이란 더러운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 지라 인상이 바가지다. 금세 잊고 찡얼대며

젖을 찾고선 배시시 웃겠지만.

나도 파리를 갔었고, 그 중 며칠은 비가 내렸으며, 에펠탑은 지나는 길에 몇번이나 발에 채였음에도, 더구나 노란

색이 아닌 파란 색 에펠탑이었거늘. 사랑은 ㅁ다. 사진도 ㅁ다. ㅁ은 타이밍. 그치만 사진은 ㅁ+ㅁ'랄까.

ㅁ'는 역시나, 영감 혹은 스킬. 꽤 다른 것들인데 하나로 묶고 만다.

내가 에펠탑이 보이는 저 샤요궁전 발코니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바로 저런 포즈..

Reflection. 올해 계획 중 하나는 데세랄을 기어코 사는 거다.

뉴욕에 있을 때 그래피티들에 열광했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자연스레 박살난 합판 벽재와 뻘건

글씨의 낙서들은 이미 뭔가 자체의 생명력을 얻은 듯 했다.

고대의 벽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고작 백년은 커녕 수십년밖에 안 되었을 사람의 더께가 조각조각 부서져내리는

광경이라니. 저런 식으로 계속 벗겨지고 벗겨지면 차라리 엄청나게 깔끔하고 깨끗한 뭔가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치 여름철 뙤약볕에 잔뜩 탄 살결에서 보풀이 벗겨지는 것 같다.

걱정스럽던 건 여기 정말 불이라도 나면 비상구 표시등은 제대로 켜지기나 할까, 스프링쿨러 따윈 언감생심일테고.

그래서였을지는 모르지만, 문들을 활짝 열고서 고정시키는 데에는 어김없이 통통하고 짜리몽땅한 빨간 소화기가.

소화기들을 엊그제쯤 일제점검하며 한번 걸레질이라도 했는지 다들 유난히도 반짝거려서 조그만 위화감도 일었다.

무슨 영화 세트장같은 느낌이었다. 침침한 조명 아래 한켠엔 사진액자가 열맞춰 늘어서 있고, 다른 쪽엔 오래전에

쓰였을 뿐 더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늘어서있고. 창틀에 걸려 부서진 햇살은 복도끝에 정좌한 액자에 무심히

내려앉는 중이다. 차분히 아래를 굽어보는 있으나마나한 샹젤리제까지.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쩌면 이 곳의 전시 스타일을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잔뜩 낡고 부서져내리는 공간에

사진을 전시하려다 보니 빨간 테이프로 대충 창문틈도 바르고, 화살표도 바닥에 대충 찍찍 만들어 붙이고, 조명

틀 역시 각목으로 대충 뚝딱해서 훤히 드러나게 세팅하고. 또 그래야 공간과 전시가 어우러질 테고. 실제로 깨져

있던 창문이 하나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고 저걸 보고 사람들이 나머지 유리창도 발로 차거나 돌을 던져 깨뜨릴 것

같지는 않다.

그 허술하고 긴장감없는 전시 기획을 한 눈에 보여주는 간이 의자..랄까, 이거 제대로 버틸까 겁나서 앉을 엄두도

못 냈다. 널빤지 몇개로 뚝딱거리고는 자주빛 벨벳같은 걸 살짝 얹어선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킨 거 같은데 전시장

전체에 적지않게 살포해 놓았더랬다. 하기야 이곳에서 가죽이 매끈한 푹신 의자를 바라지도 않는다.

날 상당히 감동시켰던 문구들. 촬영자(작가..라는 거창한 말 말고라도)의 인문학적 배경과 감성적 섬세함, 결국엔

촬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장의 사진. 애매모호하고 사적으로 보일지라도, 작가 그자체를 바로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 언어나 문자에 비해 직관적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긴 한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일 테지만, 사진을 좀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은 욕망이 불끈.

드디어 세시간여 관람을 끝내고는 출구를 찾아 다시 입구로. 사진전에 왔으니 사진들을 보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옛 서울역사를 이렇게 구석구석 구경하고 다닐 수 있던 것도 무지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게

고작 세시간 돌아보고는 관련 포스팅을 세개나 하며 사진을 덕지덕지 올리면서 주절주절대는 이유기도 하다.


어제는 연휴 마지막날이자 내생일이었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며칠전부터 맘에 담아두었던 사진전을 보러가기로

했다. 혼자 유유히 전시회 보러다니는 걸 함께 보러다니는 것 만큼이나 좋아함에도 한동안 혼자 뭘 보러 갔던 적이

없었단 걸 문득 깨닫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서울역사로 향했다.
번듯한 서울역사의 높다란 계단위에서 바라본 옛 서울역사는 커다랗고 밋밋한 건물들 사이에서 위축되어 보였다.

낡고 닳아보이는 담갈색의 벽과 청회색의 지붕에서 풍기는 고즈넉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차갑고 깍쟁이같아 보이는

유리와 철의 배합인 서울역사에 비기자면, 못나고 수더분한 시골아지매같다. 서울역사에 갓 상경한 할머니같은.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거리로 올라설 때면 늘 뭔가 당혹스러움과 낯섬이 포함된,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한쪽에선 으레 종교를 선전하는 악다구니가 들리고, 이공간의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는 타인들이 돋을새김처럼

눈을 어지럽히며, 겨울임에도 코를 찡하게 파고드는 노숙자들의 노골적인 냄새. 게다가 대개 이곳에선 성난

사람들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사기를 북돋우는 장면을 마주하길 기대했었고, 나 역시 그런 열기를 품고 오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적 284호. 옛 서울역사는 사적 284호였다. 둘레를 온통 칭칭 감고 있는 저 출입금지의 팻말이 어디서 끊겨있을까.

아마 그곳이 이 안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 입장하기 위한 입구일 테다.

마치 폴리스라인처럼 둘러쳐진 출입금지선 너머엔 비둘기들만 유유히 주인인 양 뽐내며 걷고 있다. 그 위에서부터

운치있게 나려드는 아치형의 기둥, 달랑 내려뜨려진 조명등이 작동은 할까, 문득 궁금했다.

옛 서울역사의 야트막한 2층 건물은 꽤나 넓은 양지바른 공간을 노숙자들에게 許하고 있었다.

건물이 높아지면 그늘도 길고 짙어진다. 바랜 갈색잎을 잔뜩 달고 섰는 나무를 살짝 굽어보는 퇴락한 역사.

빙 둘러쳐져 있는 출입금지 폴리스라인에 난 균열을 발견했다. 2008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언뜻 보면 잘 알아채기

어렵겠다 싶은 게, 바로 앞에 있는 화단의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수북히 시야를 가리고 있다. 옆으로 틀어서 잘

보이게 사진 한장.

들어섰다. 팔천원짜리 대인 표를 끊고 썰렁한 전시장으로 들어섰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천장. 가뜩이나

관람객이 드문 점심때쯤의 휑함과 누추함을 더 강렬하게 하는 천장의 터져나간 페인트와 장식무늬. 단정하고

심심한 네모무늬 창문에서 쳐들어오는 햇살도 천장에는 가닿지 않는다.

태극무늬가 바로 세워지게 딱 각맞춰 한번 찍어본다. 태극무늬를 품고 있는 봉황 네마리가 박제처럼 뻣뻣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예전엔 좀더 금빛으로 번쩍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1층 홀 한가운데에서는 "Black Dogs"라는 이름이었던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작가의 특별전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저런 느낌을 낼 수 있구나, 라는 내 감탄은 어쩌면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되었던 그들의 고백과도 같은 짧은 수기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과 글, 두가지 텍스트가 조합되면

그중 하나만 쓰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깊이있게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사진과 이 텍스트는 사실 제 짝은 아니었는데, 머 사실 이렇게 저렇게 얽어놓으면 다 그럴듯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고 비로소 생각해본다. 어쨌든 텍스트는 "나는"이라고 말을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순간 낯설게

만들어주었던 일종의 화두랄까. 그리고 꽃덤불이 땅속에서부터 피어오르듯 단단히 땅위에 피워올려진 저 사람.

아마 엉덩이 밑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뿌리가 뻗어나가 있을 거 같다.

서울역사 안에 있는 커다란 시계는 여전히 안녕했다. 제 시간에 맞춰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혹시 알고 있으려나.

2009년에는 1초가 늘어난다지 아마. 누군가 챙겨줘야 할 텐데. 음..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 있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시계와 비교하기는 많이 담백하달까.

뭐랄까, 롯데월드 어드벤처같은 놀이공원에 가면 돌처럼 위장한 속이 텅텅 빈 플라스틱 껍데기들로 포장된 공간이

많이 보인다. 대리석 대신 시멘트 위 처덕처덕 발라진 하얀색 페인트를 조명빨로 숨기고 있기도 하고. 그런 느낌.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세워진 대리석기둥들과 요모조모 장식이 곁들여진 천장과 사면의 벽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어색한 키치의 냄새가 난다. 그런 위화감과 조악함이 한국이 근대를 수입해온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트렌드랄까

지배적인 심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허옇게 분칠된 고등학생의 어설픈 화장술이 자꾸 연상되던 대리석 기둥들.

한 옆에는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게시판이 있었다. 각자 찍은 사진을 들고 오면 한명이 무료입장 가능하댔나.

그리고 관람객들이 맘에 드는 사진에 스티커를 붙여 가장 많이 받은 사진 출품자에게 상품을 준다는 식이다.

꼭 저렇게, 엉덩이 한가운데 붙이고 양 볼에 연지곤지를 붙여넣는 사람들이 있다.(내 취향이다..랄까.)

역사에 있는 방들, 복도들을 모두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제각기 특징을 가진 문들을 지나 다른 공간으로

넘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방의 인테리어, 그리고 새로운 느낌의 사진들. 비록 문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소화기였다는 사실이 계속 걸리적거렸음에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전선이 빨랫줄마냥 늘어져 있고, 온통 헐벗은 벽면에 뼈대가 드러난 채 설치된 조명시설들. 사진보다는 그 전시

공간 자체에 한동안 눈이 먼저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귀퉁이가 깨진 천장에는 그래도 예전엔 꽤 발랄한 선홍색으로 발색했을 이국적인 문양들도 보이고, 드문드문

이빠진 채이긴 하지만 불을 밝힌 샹젤리제도 있고. 이곳이 역사로 활용되던 시절 이곳은 무슨 공간이었을까.

철창살이 끼워진 유리창 너머 보이는 출입금지의 표지. 정말 철창살 너머, 저런 폴리스라인같은 경계선을
 
바라보자니 어딘가 사건 현장 한가운데 들어와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이 건물과 이 공간이 보이지도 않는

양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외부의 사람들. 하기야 밖에서 보면 딱 철거되기만을 기다리는 노쇠한 건물이다.

건물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송가 소리,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선전선동 소리.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닥에 엉성하게 화살표를 만들어 붙여놓는 데에도, 출입금지 구역을 막아놓을

때에도, 그리고 벽면에 동선을 그려넣거나 들어가면 안 되는 문에 엑스자 표시를 할 때에도, 게다가 하다못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딱지를 붙여두는 데에도 모두 빨간색 테이프를 활용했으니..가히 만능 테이프라 할만하다.

건설현장에서 노가다할 때 느꼈던 콘크리트 건물 날것의 싸한 냉기와 살짝 두렵기까지 한 낯선 느낌. 이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손때를 탔다면 훨씬 인간적이고 따스한 공간이었을 텐데, 여긴 더이상 쓰이지 않고 버려진

곳. 사람의 온기를 잃고 뭔가 괴물같고 초현실스런 느낌이 뭉실뭉실 커나가서는 순식간에 공간이 황막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역시 역사를 개조해서 만든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상상하면서 왔었지만, 막상 와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을 잠시 재활용하는 정도인 듯 하다. 나름의 운치도 있고 외려 그런 막나가는

인테리어가 내 맘에야 꼭 들지만, 어쨌든 이상태를 보면 계속 전시공간이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은 아닌것

같다. 파이프가 이렇게 구불구불 벽과 천장을 타고 구불거리는 걸 보면 외려 퐁피두미술관하고 비슷하다.

커다란 사진작품들이 걸려이씨고, 그 옆에 그 사진보다 작은 조그마한 문이 나있다. 왠지 사물의 비율이나 크기에

대한 감각이랄까 현실감각이 시험에 든 느낌이 들었다. 원더랜드에 와서 하얀토끼를 쫓는 앨리스같은. 그치만

이 원더랜드는 많이 헐었군. 파이프가 얼기설기 벽을 기어다니고, 하얀색 백열등은 할짝대며 사진을 탐한다.

그리고 어둠이 들이찼던 공간은 사람이 연다.

이런 풍경. 사진 자체가 이미 '익명성'이란 제목의 초점잃은 누드사진이었으니..내 시선이 가닿았던 곳은 사진들이

아니라 역시 오래되어 자갈처럼 쌓여있는 벽돌들이었다. 뭐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진다. 반듯반듯 모서리의

까칠함까지 살아서 잔뜩 긴장한 채 열맞춰 쌓여있었을 벽돌들이, 비록 그 모서리의 까끌함이야 여전하다 할지라도

훨씬 긴장이 풀린 채 처억 척 늘어서 있다. 저대로 수천년쯤 지나면 피라밋이 마치 자연적인 산처럼 느껴지듯

그런 무위'자연'의 경지에 들지도 모른다. 가만히 냅둔다면.

문득 들어서니 이방의 테마는 뭐야, 거울의 방정도로 잡은 건가. 사진작품이 내걸려있는 벽면이 온통 맞은편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사진 한 장. 혼자 다니는 데 치명적인 약점 하나는, 자신의 사진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행인지 불행인지.

문득 눈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하려다 눈에 띄었다. 저 스테인드글라스. 원래 있던 거였겠지? 뭔가 조잡하다 싶은데

살짝 유쾌해지려고 했다. 그 쌩뚱맞음도 그렇거니와, 대체 이 공간은 어떻게 쓰였던 거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제법 운치있고 잘 보존되어 있는 방이었다. 천장에 붙은 장식들도 그랬지만, 벽지 가운데쯤 둘린 띠도 그렇고,

가지런히 내려앉은 커튼도. 노란색 불빛이 따스하다.

방마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저 벽난로들. 실제로 쓰였던 건지는 모르겠다. 애초 쓰였는데 벽돌로 막아둔 것 같기도
 
하고, 애초 장식용으로 설치된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고. 저런 벽난로가 있는 방,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면

참 볼 만 했을 텐데 아쉬웠다.

어떤 전시실은 이전의 허름한, 그치만 나름 자부심을 가졌을 명찰을 채 떼지도 않고 있었다. "귀빈실". 일종의

VIP대기실이란 얘긴데, 역시 이곳저곳 망가지고 해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한쪽 천장이 온통 무너져내려있었다. 참 심하다 싶으면서도, 저 상태 그대로 안전사고의 위험없이 보존될 수 있다

하면 그 또한 살짝 파격적인 전시 공간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아니라면 뭐, 리모델링을 싹 하던가 해서

조금은 더 깔끔하게 꾸며도 좋을 거 같고. 1층을 이리저리 종횡하면서 옛 서울역사가 어떻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있는지도 많이 보았지만, 건물 자체가 나름 매력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잔뜩 허름해보이지만, 과거에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면서 서울로 올라와 출세를 꿈꾸고, 누군가는

시골(지방)으로 되돌아가서 남겨둔 사람들을 그리기도 하고. 그렇게 버글버글했을 그림을 맘속에 그려보면

금방 또 이미지가 퍼올려진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은 서울역사에서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를 배웅했던 기억들과 함께 이 삭아가는 건물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세줄요약)

1. 난 굳이 전철에 시사인을 놓고 내린다.

2. 시사인을 보니 구 서울역사에서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을 한다더라.

3. 오르세 미술관보다 매력적인 공간이 생겨난 게 아닐까. 가보련다.



조금 안 좋은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출퇴근길 오며가며 시사주간지를 읽고 나서는 꼭 머리 위 짐칸에 그 잡지를

얌전히 놓고 내리곤 한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고, 5호선처럼 종점에서 차고에 들어갔다가

한번 싹 쓰레기를 치우고 다시 나오는 데 말고 2호선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만약 운이 좋다면) 최대한 수거하시는

분들 눈에 안 띌 수 있는 데로 나름 신경도 쓰고 있다.


조금은 사람들이 내가 보는 잡지를 함께 봐줬으면 하고, 그로부터 조금은 더 색다른 시각과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어서 굳이 그러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잡지를 위에 올려놓자마자 누군가 덥썩 집어갈 때 참 기분이 좋다.


저번주 시사인 69호(09. 1. 5일 발행)에 나왔던 기사 중에, 구 서울역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

대한 내용을 읽고선 꼭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관련기사 : 옛기차역에 걸린 인간이 만든 풍경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80)



벽지가 너덜거리고 파이프 배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면서도, 세월의 더께가 입혀져서 뭔가 미묘한 느낌과

함께 따뜻한 운치가 느껴지는 서울역사 건물은 굳이 뭔가 더 손대고 이뿌게 꾸밀 필요 없이 독특한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옛 역사가 미술관으로 변신한 사례는 이미 파리에서 오르세미술관을

둘러봤기 때문에 별로 낯설거나 생뚱맞지는 않았다. 외려 무지 반갑기도 하고,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도가

가능하다니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꼭 가보고 싶어졌다.


오르세미술관처럼 구 서울역사도 이전에 특징적이던 전면의 커다란 시계를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을까. 그리고

오르세미술관처럼 그곳의 높은 천장을 그대로 살린 채 정말 탁 트인 느낌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의 오르세미술관 보다는, 약간 쇠락한 듯 하면서도 온기가 여전한,

서울역사의 때묻고 살짝 꾸질하기까지한 외관이 더욱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다.

([파리여행] '오흐세미술관'이라고 읽어야 파리지앵?(http://ytzsche.tistory.com/174)




새롭게 메탈과 유리로 치장한 초현대식 서울역사가 생겨나기 전까지, 드문드문 기차를 타던 기억이나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마중갔던 기억, 그리고 그 역사 앞에서부터 깃발든 단체들이 모이기 시작해 집회를 하고는

소공동 쪽이나 종로쪽으로 거리 행진을 함께 했던 기억들. 공식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원래 1월 15일까지 하기로

했던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을 2월 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단다. 아마 생각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그건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탓일 수도 있고, 또 이런저런 기억이 서려있을 서울역사에서 새로운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계속 쓰면서 불편한 건데, 구 서울역사 구 서울역사 라고 되뇌이는 거 좀 바보같다. 뭔가 이뿌고 그럴듯한

이름이 있으면 좋겠고, 그전에 그 공간이 계속 예술과 문화를 위한 공간으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동대문운동장이나 서울시청 별관(..이던가)처럼 오래고 낡았다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니까.


꼭 가야겠다.


국기를 거꾸로 매달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위기 상황을 알려 도움을 청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명박, 10년의 민주화 시기를 순식간에 증발시킨 자신의 존재가 위기임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게, 이명박을 따르는 그의 수하들은 이런 것도 하나 못 잡아내는 바보들인 걸까,

아님...지능적인 이명박의 안티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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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돌고래같이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흐르면서 왠지 모를 바다 깊숙히 어두운 곳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내 위장과의 첫대면.


건강검진이 있는 날이었고, 처음으로 내시경을 경험했다.

난 억지로 눕혀져 주사를 맞는 짐승처럼 옆으로 뉘여진 채 자전거에 바람넣는 호스처럼 생긴 내시경을 공포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우악스럽게 내 입을 쑤시고 들어가는 검은색 호스에 나는 왠지 '겁탈당하는' 느낌이었고...

30여초 동안 후비는데 정말 게거품을 줄줄줄 흘리며 끊어질듯 불안한 숨을 내쉬었더랬다.

내 십이지장에는 헬리코박터균이 원인이 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궤양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조직검사를 위해

철사 하나가 슝슝슝 들어가서 살점을 조금 떼어낸듯 한데, 난 광우병 걸린 소마냥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정신이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못할 짓이었다. 몹쓸 짓이었고. 참...내장을 직접 보겠다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극단까지 밀어올린 우악스럽고

미친거 같은 시술이란 감상. 알고 보니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내시경은 여전히 두껍기로 소문난 구식의

그것이라는. 목젖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으로 하루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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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질반질하고 핑크빛선연했던 내 귀여운 내장사진을 갖고 싶었는데, 비슷한 사진이라도 찾아보려 구글신에

빌었으나 역시 내것만한 것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사진을 빌려와 조금이나마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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