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도 8,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영화가 유행인 걸까. '점프 아쉰'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만영화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 시절을 추억하려거나 이쁘게 분칠하려는 투는 아니다. 그 시절 태어나서 자라나 방황하고

 

사랑하고 턱없이 진지하다가 이내 웃음이 빵 터지는 그런 청춘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감독의 친형이 살았던

 

삶을 재구성한 실화라고 하니까 더욱 단단하고 거품없는 현실감이 느껴지는 거다.

 

 

영화는 제법 길다. 러닝타임이 두시간이 넘어가니 꽤나 긴 셈이다.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체조'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만 알고 시사회를 갔는데, 영화 속에 체조도 있고 빗나간 청춘도 있고 남자들의 우정도 있었으며 부모와의

 

화해라거나 살짝 시큰한 사랑 이야기까지, 말하자면 일종의 갈라쇼 같은 영화이기도 했던 거다. '빌리 엘리어트'와

 

'비트'와 '친구' 같은 영화들이 각각 하나에 담았던 이야기가 노련하게 하나의 인물에, 하나의 이야기에 꿰여든다.

 

 

그런 영화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영광의 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만 8,90년대의

 

풍경이나 정서가 살짝 오글거릴지언정 줄곧 따뜻한 시선으로 아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며 다음번 그의 스텝은

 

어디로 얼마나 '점프'하는 게 될지 바라보게 되는 거다. 예측했던 곳에 예측했던 멋진 동작으로 착지할 걸 기대하고,

 

실제로 그가 다소간의 우회나 방황을 거쳐 예측했던 곳으로 무사히, 멋지게 귀환하는 걸 보면 충분하니까.

 

 

자칫 산만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었을 곡절많은 스토리를 탄탄하게 한 호흡으로 꿰어낼 수 있었던 건, 영리하게도

 

감독이 남자의 감정을 적절한 선에서 끊어준 덕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와의 화해라거나 호출 교환원 그녀와의

 

애틋한 사랑, 비장미와 남성미가 물씬했던 불량 청소년들의 싸움과 비극, 심지어 그가 세계대회에서 멋지게 뜀틀을

 

딛고 몸을 휘돌아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영화는 먼저 눈물을 보이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그건, 표현의 진부함을 감수하고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이 영화가 남긴

 

명대사 하나로 충분히 수렴될 것 같다. "만약 울고 싶다면 물구나무서기를 해. 그럼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을 거야."

 

그 대사를 발판으로 아쉰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멋진 도약을 성공시켰고, 감독은 이 영화를 여느 숱한 청춘영화와는

 

다른 차원으로 차별화하는데 성공한 거 아닐까.

 

 

 

 

 

 

 

모처럼의 진한 술자리였다. 열시간이 되도록 이어지던 아주아주 진한 술자리.

중학교 이학년때의 친구 둘을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난 거니까, 대충 십칠년쯤만이었던 셈이다.

해가 지기 전 삼겹살을 구우며 시작된 자리는 쭈꾸미로 이어졌고, 그때 노래방으로 놀러다녔던 것처럼

노래방에 몰려가 각자의 노래 실력을 점검받고는 다시 곱창을 씹다간 맥주에 마른 안주로 마무리까지.


문득 가방에 카메라가 있단 걸 기억해내고는 주섬주섬 꺼내들고, 옥도령의 뻘건 卍자가 십자가의 불빛을 잠식하고

노래방 포차의 하트 모양이 그 뻘건 卍자를 다시 잠식한 창밖 풍경을 찍은 건 새벽 세시가 넘어서였던 거다.

열네살의 내가 녀석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어떻게 같고 또 달라보이는지,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더 취하는지 어지럼증도 나고 해서였던 거 같다. 담아두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쓰고 역겹던 레몬소주 피처를 하나 마시며 인상쓰던 녀석들이었는데, 그보다 쓰고

힘든 경험들이 자연스레 쌓인 탓일까. 소주는 헛개나무를 담궈둔 것처럼 밍숭맹숭, 술술 넘어가고 있었다.

그새 한 녀석은 6년을 만난 여자와 파혼을 했다고 했고, 다른 녀석은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와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 나는, 니 녀석들 결혼식에 못 가보나 했더만 잘 됐네, 라고 말해주고 말았다.







@ 터키, 이스탄불.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는 멀고 먼 출퇴근길을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책 볼 시간을 벌고 있다 했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지 삼년째인 친구는 올해 첨으로 유럽여행을 해봤다고 했다.


내가 못 가본 길들,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하여 닫혀버렸던 길들, 그런 다른 이들의 현재가

지금 나의 현재를 위로하고 긍정하는 발디딤판으로 쓰인다면 굉장히도 이기적이고 치졸한 짓.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현재와 나의 현재가 그닥 어느 한 편의 승리라 이야기함직한 것도 아니고,

난 책으로 둘러싸인 그의 환경과 쉼없는 지적 자극으로 활기찰 그의 환경이 부럽긴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현재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진 않다. 앞으로야 모르겠지만서도.

깜빡깜빡 위성 신호를 놓치는 DMB를 퍽퍽 치대며 잠깨우듯 그렇게 우선 내 정신부터 차릴 일.







시테섬에는 콩시에르주리(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에 목이 잘릴 때까지 갇혀있던 감옥이라는데

별로 가보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가 보았다..)과 인접한 생 샤펠 성당과 노틀담 성당이 가장 큰 볼거리라고 한다.

말하자면 어느 여행가이드북에나 나와있는 must-see 포스트랄까, 근데 계속해서 성당만 도는 것 같아 살짝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자연 내 걸음도 휘적휘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흐릿흐릿하며 빗발이 흩뿌리더니 때마침 기습적으로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려붓는다. 난 프랑스 날씨도

마치 익히 알고 있는 영국의 날씨처럼 그렇게 변덕스럽고 흐린 줄은 몰랐었다. 유학생 친구의 말을 빌자면, 얘들은

볕이 잘 들어 양지바르고 날씨가 좋은 땅을 찾아 주변으로 전쟁을 일삼을 수 밖에 없었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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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든 볕을 따라 냉큼 분수대에 내려선 참새들, 파리엔 비둘기도 많고 참새도 참 많다. 거리나 공원에 주저앉아

빵을 뜯다보면 참새들이 십여마리씩 둘러싸고 빵쪼가리를 노리는 건 예삿일일 정도.

비 따위 개의치 않고 노틀담 성당에서 시테섬 서쪽으로 걷던 중에 오락가락하던 비가 어느 순간 오지게 내리기

시작했고, 난 잠시 비를 그을 생각으로 나즈막하게 턱진 길가 가로수 옆 풀떼기에 앉아 비를 피했다.


그리고 만난 그녀, 아까서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싶더니 결국 날 따라잡고는 나랑 같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겠다고 들어와 섰다. 서로를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었음을 왠지 알아채고는, 이대로 말않고 계속 서있음

민망하겠다 싶은 타이밍을 잡아채고 Hi~*

약간 마른 몸에 갈색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뜻밖에도 의외의 굵은 톤의 목소리로 대답을 주더니, 몇 마디 나누다가

우리가 같은 곳을 찾고 있음을 알고는 같이 가잰다. 나야 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묘미이니만치

냉큼 앞장섰다. 문제는..이러저러한 수다를 떨며 걸어도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생샤펠이 보이지 않았단 것.

그녀의 이름은 다니엘, 남자 이름같다고 했더니 뒤에 le가 더 붙으면 여성형이 된단다. 첨 알았다.

건축학도라는 그녀는 방향감각이 없었고, 나 역시도 네비게이션 없이는 운전하기가 힘든 상황인데다가 코엑스

지하에서 여전히 생경한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시테섬 남쪽 강변을 끼고 계속 걷다간 결국

섬끝에 이르고 말았다.

...그제야 이야기를 좀 주섬주섬 가다듬고는 각자가 가진 맵을 보충해 가며-그녀의 대축척지도, 내 소축척지도-

다시 빠.꾸. 몇 번의 갈림길과 결단을 요청받은 후에야 생 샤펠 성당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사실 둘다 별로 그곳에

방문하는데 열의를 갖고 있지 않은 탓이 컸지 싶다.


스물다섯이라는 그녀는 은근슬쩍 청소년 가격으로 거의 반값에 생샤펠 티켓을 샀고,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은근슬쩍

청소년 티켓을 구매. 9유로에 가깝던 티켓값을 4.8유로에 사고 나니 왠지 마음이 맑아 밝아진 느낌.


그렇지만 그 스테인드 글라스는 역시 대단했다. 서민용이었다던 다소 담백한 1층의 공간을 훌쩍 넘어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선 2층은, 조심해요 다니엘, 괜찮아요 써니, 이러면서 올라선 2층은 딱 들어서는 순간 화려한

유리창 빛깔을 묻혀서 내리꽂히는 색색의 광선들로 가득했다. 그 광선을 반사시키는 금색의 기둥과 장식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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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갱장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만들어낸 신적인 분위기도 때론 즐길만 하다 싶었다.

숱하게 마주친 성당들, 그 안에서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인간들은 결국 스스로 신을 불러내고 만들어내고 있는

게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 그러한 믿음이 모이고 모이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신을 불러내고, 또 영혼을

정화하기도 할 뿐더러, 그런 믿음이 기실 이렇게저렇게 역사를 움직여왔다. 그게 긍정적이던, 혹은 부정적이던

믿음 자체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거다. 감세정책이 무조건 '표심'을 얻는 현상이라거나, 단적으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도, 경제를 살리겠거니 했던 믿음이 자초한 무시무시한 결과인 게다.


Danielle은 캐나다의 70-80%가 무교일 거라면서 자기도 역시 종교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여태 자신이 파리에

머물면서 찍었다는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사람은 없고 전부 건물에, 파이프에, 바닥에..그런 것들 뿐이다. 니 사진은

왜 한장도 없냐 했더니, 자신은 파리에 건축물들 공부하러 왔기 때문에, 또 그걸 즐기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공사판

현장 사진같은 것들만 찍고 있노라는 대답. 벽에 붙어서 사진 몇장을 찍더니 휙 돌아보고는 자긴 됐댄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저렇게 반짝대고 있는데. 난 좀 더 느긋하게 돌아보려고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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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혼자 다니느라 내 사진이 없으니 좀 찍어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잰다. 몇 장 찍고, 이 냉담한 건축학도의

지식을 재고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고딕 양식의 건물들에선 창문이 애초 엄청 좁고 작았는데

갈수록 커지는 걸 볼 수 있다는 둥, 중력과 건물 자체의 무게를 이렇게저렇게 지탱하고 있다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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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나도 어느 정도 분위기에 젖었다 싶어서 생 샤펠을 뒤로 하고 나섰다. 밖으로 나서니 정작 하늘은

찌뿌드드했고 햇살도 없었던 걸 보니, 스테인드 글라스 자체가 좀더 밝고 화사한 실내를 만드는 기능도 의도한 게

아닐까 하는 내 해석에, 명민한 건축학도 다니엘도 수긍하더군. 날 인정하다니 머리가 좋은 아가씨인 게다.


알고 보니 다니엘도 나처럼 그닥 빡빡한 일정표는 갖고 있지 않았고 걸어서 파리를 돌아다니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여서, 우리는 일단 오늘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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