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좀 작작 먹어야 한다.


모처럼만에,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불과 얼마 전에도 그랬었다, 아무런 경계심이나 뒷탈에 대한 걱정없이

정신줄 풀고선 술을 마셨다. 그런 날은 안다. 처음 소주잔을 꺽을 때 화학약품 냄새가 풍기는 싸구려 소주의

뒷끝에서 향긋함과 부드러운 감미가 맴도는 날이면, 오늘은 술 좀 마시겠구나 싶은 거다.


문득 눈을 뜨면 온전히 내 방, 내 침대다.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 약속은 모조리 펑크를 내버렸고

전화기는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상황. 안경은 챙겼을까, 지갑은 그대로 있을까, 가방은 들고 왔던가..

움직이지 않는 머릿속에 예열을 가하듯 하나씩 생각할 거리를 추가해보지만 온통 모를 일 뿐이다.


토막토막,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힘좋은 칼질에 갈치의 사체가 토막토막나듯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장면1. 어느순간 들이밀어졌던 양주병. 장면2. 화장실에서 문득 잡았던 변기의 하얗고 매끄럽던 껍데기.

장면3. 집이 어디냐고 묻던 택시아저씨의 짜증난 목소리. 장면4. 놀이터 벤치에 앉아 쥐었던 전화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어디까지가 상상인지도 모르겠고, 지금이 몇 시인지 내 지갑과 카드와 전화기와

가방은 제대로 챙겨놨는지도 모르겠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도 싫고 관자놀이부터 시작된 욱신거림은

바야흐로 머리 전체로 번져나가는 와중이다. 머리가 아프다. 아파 죽겠어서, 차라리 이런 날은 잠시

죽는 것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다.


내게 술을 권했던 것들, 사람들, 일들, 꼬라지들과 말하는 원숭이들의 생쇼 같은 것들은 작렬하는

숙취로 울렁이는 속과 머리에 비하면 발바닥 때만도 못한 것들이다. 당장 살고 봐야겠지만, 살고 보려면

이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해서 참나무통 맑은물 같은 데에 담궈두고 디톡스하는 게 절실하다. 일단 그러고

나서, 좀 알콜이 빠져나갔다 싶으면 다시 조립했음 좋겠다. 조립이 안되면 마는 거고 그냥. 다 귀찮다.


술병이 났다. 술은 좀 작작 먹어야 한다고, '체력은 국력'이라고 그랬거늘 술마시다 체력이 바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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