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신묘역) 앞에 선 안내판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와 5.18 구묘지에 묻혀야 했던 분들을 이곳에 모셔와 안장했다"는 문구다.

 

(광주 망월동 신묘역, 이 곳에 선 문재인과 안철수는 무엇을 보았을까.)

 

 

1980년 5월이 무려 17년이나 지난 1997년에야 비로소. 그리고 나서 구묘역은 잊혀지고 버려지다시피 했다.

 

정치인들도 찾지 않고, 아마 2004년이던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찾았던 게 거의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전례다.

 

 

그렇지만 구묘역은 여전히 5.18의 기억들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으며, 광주의 비극을 초래한 학살자 전두환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난 2012년 9월말의 다음 기사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문 후보는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등 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문 후보는 또 정치인들이 잘 찾지 않는 옛 묘역을 찾아 87민주항쟁 때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묘역도 참배했다.

문 후보는 "이분들 덕분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는데 자꾸 후퇴하니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구 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박기념비'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얘기를 듣고 되돌아와 이 비를 발로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민박기념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전남 담양군 마을을 방문한 뒤 세운 것으로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1989년 이 비를 부순 뒤 구묘역 입구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12. 9. 28. 기사 발췌.

 

 

 

문재인이 이 곳을 굳이 찾았다는 것, 그리고 굳이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나왔다는 건 어쨌든 유의미한 퍼포먼스다.

 

게다가 망월동 신묘역 안의 민주 열사들 영정 앞에서 저리도 해맑게 웃고 치우는 누군가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신묘역의 후문,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열사들의 영정 앞에서 파안대소를 했던 곳을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후문을 나와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구묘역이다. 전두환 정권의 회유책과 묘지 이장 책동에도 불구, 여전히 5.18 희생자가

 

119분이나 안장되어 있으며 이후의 민주화 투쟁 중 살해된 열사들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 곳이다. 제대로 다져지지도 않은 땅, 틀도 잘 갖추지 못한 채 제각기 색다르고 형이 다른 비석을 명패삼아 모셔진 분들.

 

그리고, 올라서는 곳 들머리에는 아스팔트가 커다랗게 구멍이 난 채 뭔가를 물고 있었다.

 

대충 식별되는 글자는, 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

 

옆에 선 안내판의 내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놓기로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

 

민족의 반역자요 광주민중 학살과 자주 민주 통일의 원흉 전두환이 자기 죄를 은폐하고자 학살현장인 광주를

 

방문하지 못하고 1982년 3월 10일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 잠입하여 민박 기념비를 세웠다.

 

이에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어 1989년 1월 13일 이 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었나니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1989년 1월 13일

 

 

광주, 전남 민주동지회"

 

저런 허름하고 낡은 '흔적'들이 아니었다면, 이 곳은 그저 여느 동네 야산의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뻔 했다.

 

그만큼 더욱 안타깝기도 하고, 무언가 이 나라의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강렬히 보내는, 그야말로 세계의 끝이다.

 

인혁당과 민혁당을 헷갈렸던, 프롬프터에 오타가 났던 박근혜의 진정성 없는 사과는 그들에게 상처만 더한 건 아닐까.

 

인혁당 유가족분들이 최근에 다녀가신 듯 싱싱하고 새하얀 화환 하나가 제대 위에 놓였다.

 

(그 옆에는 최근에 다녀간 문재인 대통령후보의 화환도 있었지만, 바람이 불었는지(?) 엎어진 채 꽃이 모두 시들어있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열사들, 이름이 있고 없고간에, 이 땅의 정신적 영토와 면면한 흐름을

 

지켜내온 그들은 총칼로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만큼은 최소한 존중받고 기억되고 기려져야 하는 거 아닐지.

 

그렇기는커녕 거꾸로 흐르는 세월 탓에 저들은 무덤에 누워서까지 붉은 머리띠를 동여맸다.

 

구묘역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꽃집. 색색깔의 꽃다발과 여러겹 펼쳐진 파라솔의 색감이 꽤나 화려하고 이뻤지만

 

왼쪽으로 시야에 걸린 '광주'라는 두 글자가, 그리고 묘역의 스산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모두 잠식해버리고 말았다.

 

떠나기 전. 여전히 떵떵거리며 호의호식중인 문어 대가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꺼이 즈려밟고 침을 뱉어주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그, 피해자 중 한명이었던 정치인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머지로부터는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 뉘우침이 없이 29만원이 전재산이라며 불법 축재물에 대한 추징조차 피하고 있는 그런 괴물은 사람도 아니다.

 

 

 

 

 

 

정태춘, 5.18.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도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근 10년만이었다.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기억하고 있던 광주 5.18묘역은 그사이 많이 깔끔해져 있었다. 그때에도 이미

 

신묘역의 말끔함은 억지스런 분칠로만 느껴져서 왠지 모를 거부감과 암담함을 느끼게 했었지만.

 

평일 오전시간. 신묘역, 그러니까 무려 '국립 5.18민주묘지'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관리하시는 분들이나 몇몇 보이지 않는

 

참배객들의 몸가짐에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조심스러움과 함께 역사의 무게를 감각하는 이들의 비극성이 묻어나는 듯 했다.

 

그런 역사를 이렇듯 '성지'화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일렀거나 부주의했다. 여전히 전두환이 건재하고, 5.18을 딛고 선 신군부와의

 

딜을 통해 은밀한 권세를 유지한 유신 잔당들은 다시금 명실상부한 권좌에 앉겠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새 빛이 바랜 (아마도) 2002년의 안내판. 이미 5.18은 오래되다 못해 이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과거가 되어 버린 걸까.

 

묘역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구슬프지만 우아하고 절제된 선율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 뿐, 분노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이전에 찾았던 정태춘의 노래들이라거나 5.18관련 영상들을 다시 찾는데, 이상하게도 많이들 짤렸다.

 

뭔가 오기가 생겨서, 이것저것 괜찮은 자료들을 다시금 퍼올려두기로 한다.

 

 

 

 

'민주의 문'을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서는 길.

 

 

 

 

문재인이, 안철수가, 그 이전에는 이명박과 노무현과 김대중이 섰던 그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내게 광주, 그리고 5.18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이 동영상의 첫머리, 5.18의 '모란꽃'이라 불렸다는

 

전옥주의 가두방송으로부터 시작한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계엄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그렇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세상임에도, 5.18민주항쟁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거대한 그림자와 의미를 던지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여전히 그 주역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의

 

결과와 후폭풍으로 인해서 많은 역사적 변곡선들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신 잔당의 청산 문제, 지역 감정 문제,

 

한국 사회 민주화의 지체 문제들이 그런 것들이다.

 

어쩌면 당시 광주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시민'들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며 일어선 사람들.

 

아마 전옥주는 이런 식으로 언론이 봉쇄되고 언로가 막힌 광주시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을 거다.

 

"당신들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돌아가신 날짜대로 열을 지어 누워 계신 분들. 1980년 5월 18일부터 드문드문 나타난 비석에는 어느 순간

 

1980년 5월 20일자의 죽음들이 셀 수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어미의 마음으로 새겼을, '싸우리라." 비석의 뒤에는 남겨진 이들의, 혹은 떠난 이들의 독백이 단단히 새겨졌다.

 

열다섯의 누군가는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헌혈하고 나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서른여덟의 누군가는

 

진압하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을 몰고 항거하다 숨졌다. 누군가의 아비는, 어미는, 먼저 간 자녀들의 넋과

 

뜻을 기리며 피눈물을 새겼고, 누군가의 형수는 그저 평안하길 바랬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 그나마 '상식'이 있고 그나마 '일반 국민'을 대변한다고 말해지는 자들,

 

그들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광주 민주항쟁은 어떤 빛깔로, 어떤 목소리로 기억될까.

 

 

어쩌면 그건 그들의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올바르고 균형감이 잡혀 있는지를 고백하는 바로미터와 같을지 모른다.

 

 

강풀 원작의 영화 '26년'이 여전히 제작조차 쉽지 않은 나라, 학살자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광주 5.18의 흔적을 보며 그저 슬픔을 느낄 뿐인지 분노를 느끼는지의 차이 말이다.

 

 

 

 

 

중학교 때, 죽어라 부숴라 하던 노래를 찔끔찔끔 듣던 시기에 친구가 내게 선물했던 앨범이 하나 있었다.(여전히 갖고 있다.)

 

한국의 헤비메탈 그룹이라는 '블랙홀'의 4집, Made in Korea.

 

(그림은 네이버에서 업어옴)

 

 

백제 말기에 창건되어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다던 고란사의 이야기를 다룬 '고란초의 독백' 같은 서정적인 곡들은

 

바로 귀에 꽂혔고, 알고 보니 실제 5.18 광주항쟁 때 죽어간 어느 고등학생의 일기를 가사로 그대로 갖고 왔다는

 

'마지막 일기' 같은 곡들은 그런 내막을 알기 전부터 가슴을 뜨겁게 달궜었다.

 

 

공식적으로 기억되는 비극이야 '박제화된 유물'임을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올해 2012년의 5.18이

 

아무런 공식적인 언급이나 조명없이, 권력자가 하사하는 말의 성찬없이 지나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생생하게

 

되살아나야 한다는, 원래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가 하면 "815 419 516 1212 518 629 그리고,"라며 성수대교니 삼풍이니로 이어졌었던 '공생관계'의 가삿말이란.

 

숨가쁘게 이어지던 이땅 민주화의 역사, 지금 이 가사는 어디로 이어져야 할까. 되돌이표 앞에 멈춰서 어디까지

 

돌아가야 할지 멈칫거리게 되는 느낌.

 

 

 

 

마지막 일기.

 

 

사실 두려워요 내게 다가올 시간이 아직도 내겐 너무도 벅차요 .
먼저 떠난 친구들의 눈물이 생각이 나요 아직도 내가슴엔 흘러요.
이 어둠이 가기 전에 나의 짧은 시계소리 멈추고.
워~나도 잊혀 지겠지.
달빛 아래 펼쳐 있는 나의 일기장에 그린 어머니
워~ 영원히 사랑~해~요.

* 못다한 나의 숨결은 5월의 하늘위에 붉게 펴있는 눈부신 큰빛이 되어 그리운 모든 사랑을 바라볼꺼야

이 어둠이 가기 전에 나의 짧은 시계소리 멈추고.
워~ 나도 잊혀 지겠지.
달빛 아래 펼쳐 있는 나의 일기장에 그린 어머니
워~ 영원히 사랑~해~요.

* 못다한 나의 숨결은 5월의 하늘위에 붉게 펴있는 눈부신 큰빛이 되어 그리운 모든 사랑을 바라볼꺼야

 

 

 

 

* 구글에서 '518 광주 사진'이란 검색어로 찾으면 수두룩하게 나타나는 핏빛 사진들.

 

 

 

공생관계

 

 

오렌지,야타,러브호텔,압구정,로데오거리,X세대,카피,일본,노바다야끼,가라오케,
Rock Cafe,눈먼 아이들 신세대, 놓치지 않는 장사속 그리고 T.V,RADIO


수없이 쏟아지는 일회용 스타 땀흘리지 않고 쉽게 즐길수있는 듯 똑같은 모습들 생각도 귀찮은 웃음뿐

인명경시 패륜범죄 도덕이 실종된 사회상 그러나 누굴 탓해 따지고 보면 공생관계

 

나만이 잘 살아보세 우리만이 잘 살아보세

 

삼국 김유신 김춘추 소정방 당나라 그리고 김부식 조선말기 매국오적과 일제 36년 친일파
8.15,6.25,5.16,12.12,5.18,6.29 그리고 성수대교 대구,서울의 삼풍에 비극

 

아무리 큰일에도 길지않은 기억력 아무도 책임 없는 온갖 크고 작은 사고들
항상 불안한 나날들 보이지 않는 눈물들 그러나 누굴 탓해 따지고 보며는 공생관계

 

나만이 잘 살아보세 우리만이 잘 살아보세

 

쉽게 벌어 쉽게 쓰는지 놀아야만 잘난 것인지
물은 물이요 산은 산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어둠이 지나면 새벽오고 겨울에 들리는 봄소식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변하지 않는 진리를 믿어온 많은 침묵

 

언제나 가려진 듯 하지만 결국엔 무너지는 조선 총독부, 식민사관 낱낱이 드러나는 암울한 시대의 조각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로 믿어온 많은 침묵


그들의 또다른 공생관계

 

 

 

고란초의 독백.

 

 

맑게 개인 날이어도 눈뜨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소리라도 듣고 싶지가 않아

눈 비 바람 몰아쳐도 나는 애써 견뎠어

모두 태워 지웠어도 나를 지울순 없어
홀로 간직한 기억 꽃이 떨어지던
홀로 지켜온 사랑 백제의 마음

고란사의 종소리도 묻혀 버리었지만
가느다란 나의 몸은 바위틈에 남았어
온몸으로 눈물짓는 나의 이름 고란초

 

 

 

 

 

 

 

 

 

"파편화된 채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ytzsche.

 

 

한국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찍은 건 얼마나 될까. 황정민과 전지현의 러브라인은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로맨스나 멜로도 아니고, 계속해서 비유가 가닿는 지점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해석하게 만드니

 

코미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화의 현실성에 기댄 채 눈물을 짜내는 '휴먼 다큐'식의 신파도 아니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도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순간에 잡아채이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다간

 

함께 걷는 이야기랄까. 한국의 주류 영화마켓에서 이런 잔잔하고 대중적이지 않을 영화에 황정민이나 전지현같은

 

대형배우가 출현하다니. 그들의 영화 선구안과 용기(?)에 조금은 감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일종의 우화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믿는 가슴따뜻한 바보들의 이야기는 많았다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신파나 로맨스나 휴먼다큐의 유혹을 피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차근차근 동화속 세상으로 바꾸어나간다.

 

스스로를 슈퍼맨이라 믿는 황정민을 지천에 널린 또라이처럼 여기며 일회성 방송 소재로나 생각하던 전지현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친구가 되어 그와 같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세상의 모습이,

 

상식이 낯설게 바뀌는 거다. 계속해서 번갈아 보여주는 황정민의 날고 뛰고 악당과 싸우는 머릿속 슈퍼맨 이미지와

 

옆에서 보이는 누추하고 엉성한 뜀박질과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질, 어느 순간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조금씩 잠식하던 슈퍼맨의 저력은 마지막에 폭발한다. 아이를 구하려 3층에서

 

날아올라 무사히 땅에 착지한 건지, 아니면 무거운 쌀포대가 추락하듯 툭, 땅에 널부러지고 만 건지 잠시동안

 

혼란에 빠지는 거다. 물론 이어지는 후일담은 그가 결국 죽었다는 빼도박도 못하는 현실을 명시하고 있다곤 해도,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들었던 그녀처럼 나 역시 황정민이 비로소 클립토나이트로부터 해방되어 날아올랐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별로 돌아갔다'고 한 전지현 그녀의 대사처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는 정말로 대머리악당의 저주와 같은 클립토나이트로 초능력을 잃은 슈퍼맨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끝내 80년 5월의 광주까지 가닿는 욕심많은 영화라니. 어쩌면 이 영화는 우화나 감동 드라마인 척하며 힘을

 

빼고는 있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실천적인 영화로 읽히는 게 온당할지 모른다. 광주를 짓밟은 계엄군의 총탄이

 

슈퍼맨을 일반인,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지구인'으로 만든 클립토나이트랜다. 그를 그렇게 만든 악당은 대머리고.

 

위기의 사고 현장이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모두가 못 본 척 외면하거나 발만 구르고 무기력하게 손놓고 있을 때

 

'슈퍼맨임을 잊지 않은', 슈퍼맨이었다는 그가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서는 거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물결이 봉쇄된

 

80년 광주의 상흔을 갖고 기억을 봉인한 한국사회가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으로 남아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읽는다면, 그런 맥락과 떨어뜨려 놓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몇몇 영화속 대사들은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들.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아예 잃어버려요. 그럼 내가 누군지 아예 까먹어버리죠. 악당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난 계속 사람들을 도우려 해요."

 

 

"(전지현이 잡고 있는 줄을 잡아당겨 그녀를 끌어당기며)가 이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거기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미래가 바뀐 거지. 남을 돕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것."

 

 

"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조그만 열쇠이다. 우리 모두 열쇠를 하나씩 갖고 있다. 다른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는."

 

 

영화가 굳이 전지현의 남자친구를 몽골로 떼밀어놓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서 황-전의 로맨스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는 거나, '지구가 더워지고 북극이 녹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구인들(한국인들)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세세히 주목하는 거나, 황정민이 끝내 어릴 적 80년 광주에서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길잃은 흉탄을 막아내는 장면을

 

넣은 거나,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쯤되면 또렷해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단순히 어느 마음이 힘들고

 

조금은 모자란 사람의 '포레스트 검프' 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다시금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애초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새삼 아쉽다.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와 삼성프린터

 

광고 속 이미지로 성공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데 끝내 실패했다고만 여겼던-특히 헐리우드 진출작인 '블러드'를

 

시사회에서 보고 나서-전지현 그녀가 이런 영화도 찍었었다니, 하고 뒤늦게 감탄하고 말았다. 2008년작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제법 연기자다운 결기를 보여준 거 같다. 하나도 꾸미거나 이뻐보이려 하지 않는 맨 얼굴의 모습들, 적당히

 

시크하면서도 삐뚤어진 성격을 잘 드러낸 연기, 그리고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감정의 표현이랄까. 다만

 

목소리의 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다시보기'로 좋은 영화 하나 건졌다.

 

 

 

p.s. 전지현씨, 결혼 축하해요~* 앞으로 더 좋은 연기, 좋은 영화에서 많이 보여주시길.

 

(혹시 이 리뷰를 언제고 읽게 된다면 실명으로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서 의견주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2010년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광주월드뮤직페스티벌, 작년과 마찬가지로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축제인지라 첨단쌍암공원, 빛고을 시민문화관, 금남로공원, 그리고 구도청 바로 옆의 쿤스트할레에서

삼일동안의 일정이 꽉 차 있는 거다. 이번 포스팅은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플레이스로 쿤스트할레, 혹은

아시아문화마루라 불리는 장소에서 벌어진 광주월드뮤직페스티벌 현장 스케치.

 




 

폐컨테이너 수백개를 활용해서 만들어진 아시아문화마루, 월드뮤직페스티벌 첫날 저녁에는 이곳에서

세계 각지의 뮤지션들 사이의 네트워킹 파티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날, 아직은 해가 중천에

떠있는 상황에서 먼저 구경가본 쿤스트할레 건물은 커다란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성과 같은 느낌이다.

밤이 되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 확 바뀌어버린 분위기. 내부에는 맥주 등 간단한 음료를 파는 펍이 있고

공연을 보러 온 외국인들이 제법 많아져서 그런지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공연장 2층에 올라 1층을

내려다보니 아직 공연 전이라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들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이날 저녁의 첫공연, 컨테이너 박스를 이어붙여 커다란 빅 컨테이너 박스처럼 만들어진

공연장을 꽉 채운 사람들이 적당히 무질서하게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 무대를 향했다. 열맞춰 늘어서지

않고 되는 대로 편하게 놓인 좌석 배치가 맘에 들었다.

이번에 새로 앨범을 냈다는 가수, '야야'라는 한국가수의 첫무대였다. 다소 마른 체형의 그녀는 의외의

파워풀한 보이스로 분위기를 돋웠고, 음악에 한껏 취한 채 가볍게 폴짝폴짝 뛰며 노래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관객들을 무대 앞으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는 무대 앞까지 밀려나가 노래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쿤스트할레의

커다란 컨테이너 공간이 삐걱거리며 음악에 맞추어 출렁이기 시작하던 순간, 어디선가 들고온 도라에몽

얼굴모양의 커다란 가방이 가면처럼 얼굴 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객들도 없진 않았다.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라거나, 2층 오른켠의

난간 가까이에 선 채 두주먹 불끈 쥐고 아래 무대를 응시하고 있는 교통경찰의 인형. 저 초점없고 생기없는

눈동자가 제복을 입은 채 뜨거운 열기를 풀풀 내뿜는 무대를 내려보고 있다는 이질적인 실감 그 자체가

왠지 무대를 즐기는 사람들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던 거 같다.


그리고, 자칭 '지구음악'을 한다는 다국적 밴드 수리수리 마하수리. 그들의 인상적인 노래와 연주는 모두를

거의 무아지경 상태로 몰아놓고 있었다. 국적 불명의 다양한 악기와 창법, 전혀 생소한 멜로디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그들이야말로 월드뮤직페스티벌에 딱 맞는 라인업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곳 쿤스트할레, 아시아문화마루는 꼭 월드뮤직페스티벌이 아니어도 나름 광주의 문화예술을 위한

요람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9월, 10월, 공연 일정이 꽉 차 있었고, 주류와 비주류를

굳이 가를 것도 없이 다종다기한 스타일의 공연을 위해 열려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애초 컨테이너를

활용해 이런 공간을 만든 것부터 꽤나 참신하고도 도전적인 마인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그런 발랄하고 열려있는 마음가짐이 광주를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로 이끌 주된 동력 아닐까.

밤이 깊어가는데 오히려 관객들은 숫자상으로도, 그들이 내뿜는 열기로도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타난 디제이 시코(DJ Cyco), 전혀 디제잉에 문외한인 내 막귀에도 그의 믹싱은 뭔가 달랐던 거 같다.

관객들도 그런 마음이었던 걸까. 의자를 버려둔 채 모조리 무대 앞까지 달려나가 음악에 몸을 맡겨버렸다.

그렇게 밤늦도록 이어지던 쿤스트할레의 실내 공연. 월드뮤직페스티벌을 빛내는 각국의 전통 음악을

소개하는 공연도 좋았고 아시아의 아이들이 하나된 모습으로 노래하는 모습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페스티벌을 진정 즐길 수 있으려면 이런 야밤의 뜨거운 공연이 빠질 수는 없는 거다.

 

그리고 쿤스트할레를 거점으로 벌어졌던 아시아 문화주간 행사 중에서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했던

'플리마켓' 이야기를 빼놓을 수도 없다. 인근의 광주 문화예술인들이 전부 모인 듯 직접 만든

예술작품이나 소품들을 갖고 나와 좌판을 벌인 모습도 보였고, 캐리커쳐로 쓱싹 얼굴을 그려주는

아티스트도 있었으며, 국적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옷가지들을 들고 나와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꼭 뭔가를 사서가 아니라, 그 옆에서 팔고 있던 케밥을 씹으며 두리번두리번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그 자체로 쏠쏠하게 재미지던 플리마켓.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나온 것도 아니다. 직접 그리고 오려붙여 만들었다는 카드를 두 장 사서 마켓 귀퉁이의

빈자리를 찾아 쭈그려 앉았다. 바닥에는 목이 기린만큼 긴 강아지가 꼬불꼬불 그려져 있었고, 그 얼굴 위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묘기를 펼쳐보이고 있었고. 뭐랄까, 쿤스트할레의 분방한 외양 만큼이나

분방한 분위기를 사방으로 퍼뜨려 이런 사람들을 모아들였구나 싶은 느낌.

 


낮에 보았던 아시아문화마루, 쿤스트할레의 텅빈 공연장은 바야흐로 월드뮤직페스티벌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아시아 문화의 교류, 화합의 장으로 거듭나겠다는 광주의 원대한 포부가 이곳에서부터

응축된 에너지로 아시아 국가들로 뻗어나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광주에서 즐기는 7일간의 아시아문화여행'이라는 홍보 문구가 잘 보여주듯, 올해 최초로 열린 제1회

아시아 문화주간 행사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문화가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녹아드는, 그런 기회를

여러 차례 예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강력하고 인상적이었던 무대는 역시 음악의 영역에서

아시아 각국의 전통 문화를 서로 소개하고, 알아가고, 끝내 어우러지던 그런 자리들이었다.

2011 광주 월드 뮤직 페스티벌은 문화주간 중에서도 금토일, 가장 중요한 대목에 해당하는 시기를 책임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클라이막스를 광주 도심 한복판의 금남로공원, 아시아문화마루인 쿤스트할레, 그리고

빛고을 시민문화관과 첨단쌍암공원을 넘나들며 책임져야 하는 월드뮤직 페스티벌, 가장 먼저 만났던 공연은

아시아 각국의 대표 연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각자의 고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을 선사했다.

다 같은 아시아인이라고는 하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서로 생김새도 딱히 같다고 하기 뭐하고, 표정이나

악기의 음색, 연주법 따위도 다 다르지 싶으니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기도 했다. 대체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뭘까.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만들게 되는 걸까.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수억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을 쪼개어 각자의 민족국가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아시아'로 뭉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점점 신명나게 고조되는 음악의 힘을 빌어 희미한 힌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 버린 순간 그 다양한 국적,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몽골, 베트남 등등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의

덩어리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모양이 많이 달라지고 제각기의 민족성이나 특성에 따라 변주되는

악기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원형은 지켜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뜨겁고 무더운 날씨에도 관객들은 좌석을 꽉 채우고 더러는 뒤에서 서서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페스티벌의

분위기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다는 점. 점잖게 자리에 앉아 연주되는 음악을 즐기던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쿡 눌러쓰더니 카메라폰을 들고 무대 앞까지 돌입하셔서 사진을 찍기에 이르셨다.

아마도 카메라폰 쓰는 법을 가르쳐준 손자나 손녀에게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걸 함께 나누고 싶어서 아닐까.

다음 무대는 인도네시아였던가, 왠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남국에서 왔을 법한 뜨거운 피를 가진

이들이 차지했다. 그들의 몸에는 온통 타투가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중요부위만을

가린 채 나풀거리는 천조각은 카메라를 들고 그 빈틈을 노리며 무대 주변을 맴돌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차림새나 타투들 만큼이나 노래 역시도 생경해서, 이건 혹시 자메이카나 아프리카 같은 멀고도

이국적인 곳에서 온 음악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동시에 '아시아'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적

배경이나 DNA가 이만큼 광범위하고도 풍요롭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인기 만점이었던 이들의 이 멋진 무대의상, 이랄까 혹은 전통의상이랄까.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사방에서 달려와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려는 통에 그냥 스킵하기로 했다.

은근히 여성 관객이나 여성 진행도우미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낸 듯.

계속 이어지는 공연을 보면서는 계속 그랬다. 넋놓고 그들의 음악을 즐기다가도 어느순간, 어라 근데 이게

아시아음악이라고? 그리고 저 연주자가 아시아사람이라고? 그만큼 음악적인 색깔도, 연주자의 외모나

신체적 특징들도 굉장히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전통의상에서 느껴지는 색감이나 미감 역시

뭔가 여태까지 내가 갖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상식이나 선입견이 얼마나 좁고도 편협했는지 돌이켜보게

해줄만큼 충분히 자극적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무대 뒤에서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미 리허설이나 공연 중간중간의 조우를 통해

서로 얼굴을 익힌 게 틀림없는 공연자들끼리 어느새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서 무대 뒤에서 서로 장난도

하고 웃고 떠들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던 거다. 이런 게 아마 우리가 바라는

'아시아 문화'의 정수 아닐까. 서로에 대한 열린 마음, 친밀한 감정, 그리고 저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마침 한국과 몽골의 수교 20주년을 맞이했다는 올해, 몽골에서 온 연주자들의 공연도 있었다. 선명한 원색의

옷차림에 독특한 악기들이 이목을 특히 끌었었는데,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서는 마치 짙초록색의 드넓은

몽골 초원 위를 내달리는 말위에 몸을 맡긴 듯한 그런 느낌. 초원위를 가지런히 갈퀴질하며 지나는 바람소리를

닮은 그네들의 악기도 그랬지만, 몽환적이고도 격정적인 구령소리같은 노랫소리도 매력적이었다.

 

가만히 보니 현악기의 머리 부분에 조각된 건 다름아닌 말의 머리 모양. 정교하게 말갈기와 주둥이 모양이

새겨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연주와 노래가 마냥 신기했는지 맨 앞자리에 앉아서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들의 뒷모습.

 

 

그렇게 첨단쌍암공원에서의 오픈 스테이지 공연은 일단 막을 내렸다. 아시아 각국, 조금은 친숙한 나라도

있었고 조금은 생경한 나라들도 있었지만 그네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면서 조금씩은 더 반가워지고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네들의 다채로운 복장 만큼이나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만난 아시아

각국의 연주자들, 아마도 그들이 가장 크게 서로에게 자극받고 친숙해진 계기가 된 건 아닐까. 모두가

함께 무대에 올랐던 마지막 연주는 이번 월드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그들이 서로 '아시아인'으로 느끼고

하나되는 화룡점정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광주 쿤스트할레, 여러 뮤지션들이 나오는 공연장에서 그들의 연주와 노래를 즐기다가 문득 앞에 앉은

관객들이 만든 담장의 높이가 어디선가 훅 땅으로 꺼져버린단 느낌을 받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조명 사이로 가만히 보니까 플라스틱 의자 사이에 앉은 사람들과는 엉덩이 높이가 확연히

다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근데 가만, 저 사람이 깔고 앉아있는 건 뭐지 싶어서 자연스레 시선이 멈췄다.

정말 오랫만에 보는 인형의 집, 아니면 그냥 인형의 집 외관만 하고 있는 바구니라거나 수납가방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발랄한 핑크빛 네 벽면이 시선을 확 끌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 잠시 쉬는 시간에

옆 테이블에 올려놔진 그 녀석을 요모조모 살펴보며 계속 한번 열어보고 싶다는 욕망에 손끝이

근질근질했지만, 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맘을 끝내 참아내는데 성공.


근데 정말 저게 어디서 나서 저렇게 의자로 쓰이게 된 걸까. 꼬리를 무는 의문들.




"이곳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맞서 5.18 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카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항쟁 당시 가톨릭센터에서는 천주교광주대교구청과 CBS광주방송국이 들어서 있었다. 천주교광주

대교구청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살상행위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어린 투쟁을

전국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런 곳이 이 곳,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500여명이 사상당한 곳이자, 항쟁

처음부터 끝까지의 중심무대였던 곳이다. 대검으로 임산부를 찔러죽이고 도망가는 시민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내리치고, 심지어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을 쏴갈긴 곳. 예전의 첫 느낌은 생각보다

굉장히 좁은 곳이란 거였고, 이번에 다시 찾고서 느낀 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하는 민망함.

몇걸음 뗄 때마다 세워져있는 조형물들을 마주하게 되어서 하나씩 찍어보기 시작, 그렇지만 그 조형물들이

80년 광주의 기억에 이어져있는 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기준은 작품의 형태와 제목,

그 이상 판단할 여지가 없기도 했거니와 금남로 양측으로 곤두선 건물들에 수반된 공공미술작품으로

늘어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작품이 고추상의 작품이어서 결국 판단은 작품 제목에

많이 기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내린 결론은 역시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것.

제목 : 상징.

제목 : 평화를 추구하는 무등여인상.

제목 : 평화로운 나날.

제목 : 사랑.

제목 : 여심.

물론 금남로가 온통 광주의 기억으로 짓눌려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광주시내의 중심이니 박제된

역사적 공간으로만 남아있어서도 안 되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은 거다.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한복판이니.

다만 금남로공원처럼 이렇게 약간의 공간이라도 조성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아픈 사건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너무나 아무것도 안 남아있는 거다.

금남로4가 전철역 입구에 서있는 지방 무가지 신문박스. 신문은 하나도 안 들어있었다. 그것보다 눈에

거슬렸던 건 그 뒤에 저 싸구려스럽고 촌스런 노랑색 담장.

뭔가 봤더니 노란 바탕색에 돌멩이인 양 그려놓은 회색 얼룩이 얼룩덜룩한 얄포름한 합판을 억지로

세워둔거다. 차들이 지날 때 흔들흔들거리는 게 꽤나 위태해 보였는데, 가늘디 가는 쇠줄 하나가

억지로 그 담장형태의 싸구려 장애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작은 사거리에서 만난 경찰초소. 뒤로 쉼없이 지나는 버스와 택시들, 이 거리에서 100대가 넘는 대형차량들이

시위에 합세해서 도청을 향해 행진했던 그런 날, 저런 경찰초소를 온통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전진하던 그런

날, 어쩌면 그때가 한국 민주주의 정신이 도달했던 정점 아니었을까 싶어 우울해졌다.

금남로 지하상가에도 뭐가 있나 내려가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복작복작함,

지하상가 특유의 활기와 어수선함은 좋지만 왠지 괜히 아쉽다. 지상에도, 지하에도, 어디에도 그 사건은

기억할 만한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았나 보다. 괜히 화장실 사진이나 한번 찍고.

올라오는 길, 대피소 사인. 80년에는 지하상가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치는 않다. 그랬다면 더욱

끔찍한 참사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전경들, 군인들이 사람들을 토끼몰이하듯 쫓아다녔을테니.

제목 : 꿈(DREAM).

제목 : 추의 사념에서.

이렇게 조각들을 찍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 무렵. 지하철 환풍구에 누군가 페인트로

박아둔 글자가 눈에 확 띄었다. **반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반대한다는 표시, 그리고 저렇게

오래도록 남아 뜻을 전하려는 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다. 단순히 미감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두루뭉실한 조각상들을 보다가 눈에 확 꽂혀버린 두 글자. 반대.

제목 : 꿈의 나라로.

제목 : 삶(LIFE).

2011 광주비엔날레에서 채택된 시민 공모 디자인인 듯. 큐브 같기도 하고, 뭔가 이쁜 상자같기도 하고. 저런

공공 설치물에 미감을 더하는 건 대체로 맘에 든다. 물론 주변 경관이나 색감과의 조화라는 부분이라거나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부분도 따져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누비는 디자인'이란 건 긍정적인 거 같다.

제목 : 함께 부르는 노래.

어렴풋이, 꿈 대신 해몽인지도 모르지만, 광주의 역사적 기억에 그 영감이나 의도의 부스러기를 빚지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없진 않았지만 계속 아쉬운 와중이었다. 좀처럼 딱 깨놓고 여기가 그런 공간이었다,

말하고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기념물은 왜 없는 거지. 그러다가 인도 한복판에 굉장히 어색한 위치에

설치된 벤치 두개를 보았고, 벤치에 시선이 팔려서 못본 채 지나칠 뻔 하다가 겨우 발견.

'5.18 민중항쟁 사적 4'라는 잔뜩 녹슨 글자는 쉬이 읽히지도 않는다.


사적비의 뒷면. 숫자가 4라고 붙어있는 걸 보면 다른 것들이 더 있다는 얘긴데, 요새 지자체들 잘하는 것들을

왜 여기엔 적용하지 않나 모르겠다. 포스트마다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부스를 설치해 둔다거나, 사적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비치해 둔다거나. 사실 올레길이니 갈매길(부산)이니 바우길이니 온갖 걷기코스가

개발되고 있는 요즘에, 이런 사적들을 잇는 순례길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굉장히 차별화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80년 광주의 기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 같은데. 


제목 : ~~ 문.

그렇지만 현재 금남로는 커다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불명의, 오로지 거리 미화를 위한 듯한

조각들과 '부자되세요'라는 강력한 생활형 주문에 멈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미술 자체에 불만은

없고, 오히려 다른 거리에 비해 많은 미술작품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이런 거대한 역사적 공간을

그냥 묵히고 있는 게 안타까운 거다.


제목 : 풍경.

제목 : 묵시-전환기적 시점에 서 있던 이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문화전당역, 이라는 역명을 가리키는 버스정류장. 문화전당이라.

제목 : 5.18민주항쟁을 상징하는 기념조형.

제목을 까먹은 조형물 하나를 마지막으로, 짧막한 금남로 두어 블록의 산책이 끝났다. 길 양쪽을 온통

돌아보며 확연히 건물에 부속된 조형물을 빼고 길가쪽으로 설치된 작품들만 찍었는데 정말 꽤나 많다.

그리고, 광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은유가 확연한 작품은 정말 꽤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범상치 않게 보이던 시그널. 추억의 7080 충장축제라던가. 광주의 7080은, 흔히 티비에

나오는 추억의 7080쑈라느니 하면서 달달한 통기타 노래들을 공유하는 그런 게 가능할까. 단순히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그 시대의 부조리와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들이 종종 토로하듯 그 시대에

멋내고 통기타치고 고고장 다니는, 그런 문화만 있던 건 아니었던 게 분명한데 말이다. 마냥 축제인듯

아름답고 멋지게 빛바랜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 광주에서.


내가 감정과잉의 상태로 광주를 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괜히 하나하나 민감해져서, 광주에서 사는

생활인이라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이미지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외지인이라 해서, 실제로 그 고통을 겪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해서-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다는 훌륭한

핑계에도 불구하고-할 말을 못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금남로에서 80년 광주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단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기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군부독재의 총칼과 맞선 광주, 전남 애국시도민들이 자유와

헌정수호의 결의로 굳게 뭉쳐 민주의 대**를 걸고 도청 탈환의 처절한 피의 항쟁을 전개한 곳이다.

더러는 찔리고 더러는 *고 무자비한 신군부의 탱크와 총칼에 희생된 채 수많은 사상자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는 시산시해의 격전장을 이루었다. **하여 도청앞 광장 그날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민주**의

투쟁현장으로서 마침내 역사를 넘어 죽음을 넘어 새로이 부활하는 한국민주주의의 제1번지

'5.18 민주광장'으로 명명되었다."

대리석 위에 새겨진 글자조차 훼손되고 마모되어서 보이지도 않는 추모탑, 그조차도 전남 구도청을

칭칭 휘감은 장벽 안 쪽에 격리된 채 잡풀만 무성해 있었다. 5.18 민주광장의 의의가 채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뒷방 어딘가로

밀려난 채 녹슬고 잊혀지고 지워지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80년 광주, 대학교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본격적으로 접했던 그때의 그 사건,

그 처절했던 마지막 순간에 시민사수대가 지키던 옛 전남도청 청사. 최근 그 청사 건물이 너무 낡아

붕괴의 위험까지 있다고 하여 철거하자는 측과 보존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이 맞서고 실력행사까지

있었다던가. 결국 보수,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니 다행이지만 아직 문어대가리와 물태우가

살아있는 와중에 '인권', '민주주의'같은 가치에서 '문화'로 넘어가버리는 건 좀 걱정스럽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0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풀빛

 


전남도청에서 쭉 이어지는 금남로, 5월 21일의 계엄군 발포로 54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한 걸로

추정되는 피비린내 가득한 공간. 그렇게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시민 봉기가 무장항쟁으로

전환되어 광주는 22일부터 27일까지 짧지만 의미심장한 꼬뮌의 역사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27일 새벽,

최후의 시민군 14명이 희생되면서 도청을 빼앗기며 끝나버린 광주민주화항쟁. 그렇지만, 아무리 지금

보수공사 중이라곤 하지만, 7,8년전에 왔을 때도 그랬듯 참 남아있는 것들이 없다.

그래도 그때 왔을 때는 도청의 외벽에서 총탄의 흔적도 발견하고, 나름 비장한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일종의 민주화 성지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저 초현대적인 가림막이 치워지고 나서 다시 나타난 모습도

그런 아우라가 남아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컨테이너박스를 재활용해 만든 쿤스트할레 건물에

올라 바라본 도청, 근데 이거 도청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가리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 여기가 도청 건물의 정문이었다. 가림막 안쪽으로, 그 바깥의 공사현장을 구획한 높다란 장벽 너머로

보이는 하얀 색깔의 정문. 여기 어디선가 총탄 자국을 찾았던 거 같은데 아무리 망원렌즈로 땡겨서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 어디였더라...못 찾겠다. 도청 위에 내걸린 태극기만 힘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래, 80년만

해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었다.

"전남도청 본관. 1930년 건립. 이 건물은 관공서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던 시기에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와 시공 과정에 참여하여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건립

이후 70년 이상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 된 곳이며,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산 현장으로서

전남 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에 수직으로 나란히 3개의 창을 설치하고 창문

사이에는 코린트 양식을 단순화한 주두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당시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의장이다." 1930년에 건축되었는지는 몰랐다. 굉장히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셈이다. 


붉은 연꽃이 커다랗게 피어나 있는 도청 앞 분수대, 천천히 위아래로 일렁이는 꽃잎의 빛깔이 너무

선연하다. 뒤로 보이는 도청 건물이 언제 가림막을 벗고 새롭게 단장된 형태를 내보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와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민주화의 성지로, 80년 광주의 잊지말아야 할 상흔을 그대로 후세에

전달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교육할 산 현장으로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공사현장 곳곳에 섬처럼 격리되어 있는 조형물들, 광주의 사건과 그 정신을 기리고 있을

추모탑이니 조각이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사람들 앞에 풀어놓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다.






'아시아'로 분류되는 지역에는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존재하지만, 그 다채로움 속에서도 종종 의외의

유사성이나 공유점을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사진 속 삿갓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인데, 한국에서

방랑시인 김삿갓의 아이콘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것은 베트남에선 볏짚으로 만든 '능라'라는 이름의 전통

모자라고 한다.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역에서 공유되고 있는 이 삿갓, 혹은 능라의 디자인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점이 바로 아시아 문화의 매력 아닐까.


위의 능라를 쓰고 공연을 구경하는 아이들은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동안

벌어진 '아시아문화주간' 행사 때의 모습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광주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음악, 미술, 영상, 춤, 문화 등 5대 장르에서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문화예술을 경험하고 교류하고 나아가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겠다는 비전을 천명했었다. 가장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당장 한국에 늘어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거주외국인들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씻고 화합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당장 저렇게 베트남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한몸에 지닌 아이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니까 말이다.



ㅇ 다문화 정치로 하나되는 아시아! (아시아 문화이해강좌)

'제1회 아시아 문화주간' 행사는 광주월드뮤직페스티벌, 아시아창작공간 네트워크, 아시아문화이해 공개강좌,

아시아문화포럼, 아시아 청소년문화축전 그리고 아시아어린이합창단 등 여섯꼭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전북대에서 있었던 아시아 문화이해공개강좌, 왜 아시아문화를 주목하는지, 지금 한국과 아시아는 얼마나

가까워져버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강의였다. 


한-몽 수교20주년이 된 2011년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은 약 3만명, 2008년에 귀화한 '이라'씨는

한국 최초의 다문화 정치인으로 현재 경기도 의원으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한국에 다문화 정치인이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2011년 현재 이미 130만명(인구의 2.2%)에 달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있는 걸 감안하면

정치 무대에 나서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한국의 국제결혼이 2004년 이래 매년 10%이상 증가추세를 보인다며, 특히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비록 전국에 200여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혜층은

고작 전체 다문화가정의 30% 내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앞선 '능라'를 쓰고 있는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융화되려면 정말 갈 길이 멀지 싶다.


사실 한국인의 '단일민족'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한국에 있는 700여개 성씨 중에 440여개는 외국에서

귀화해서 만들어진 성씨라고 하는데 당장 이라씨의 성도 성남이씨로 새로 만들어졌다니 귀화성씨는 점점

늘어날 게 뻔한 거다. 점차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사회에 필요한 건, 정책과 시스템 차원에서의 지원과

더불어 다른 아시아국가에 대한 이해와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ㅇ 한국 다문화가정의 공연들 (@ 광주월드뮤직페스티벌)

아시아 문화주간 중 벌어지는 월드뮤직페스티벌에는 세계적인 아시아 문화예술가들도 많이 오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아시아인들과 2세들이 꾸미는 공연들도 적잖이 준비되어 있었다. 8월의 끝물,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는 광주 쌍암공원에서 태국과 베트남의 민속춤을 추는 이주여성분들.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 양산을 든채 맨발로 무대에 올라선 태국 출신의 그녀들이다.

잠시 그녀들의 공연을 감상. 그렇게 프로페셔널하지는 않지만 갖춰입은 무대의상도 확실한 데다가

미소의 나라 태국에서 오신 분들답게 계속 방긋방긋 웃음을 잃지 않는 게 매력포인트. 프로 댄서들처럼

손으로 맺는 수인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우아한 느낌은 아니지만 한국에 살고 계신 얼마 안 되는 분들로

이런 공연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감탄할 만 하다. 


뒤이어 베트남에서 온 분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베트남의 삿갓, '능라'를 들고서 전통 무용을 보여주는

그녀들의 몸짓 역시 아마추어의 느낌이 역력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대에 오른 그녀들의 용기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졌다. 한편 무대 아래로 내려온 태국 출신 공연자분들 옆으로 다가온

아이들이 보였다. 내 자리 옆에서 엄마의 공연을 박수치며 구경하던 꼬맹이들, 금세 엄마한테 달려가서

손잡고 말걸고, 당연한 말이지만 여느 한국의 가족 모습과 하나도 다를 거 없는 모습이다.

태국과 베트남의 민속춤 공연을 준비한 곳은 광주이주여성지원센터, 이 곳과 연계되어 각국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공연에 나갈 사람을 뽑았다고 한다. 이미 라인업은 어느 정도 짜여있어서

올초 부처님오신날에도 공연을 했다는 사무국장님 말씀. 공연 시작 전 무대 뒤에서 계속 연습을 함께

하며 틀린 곳을 교정해주고 격려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게 서로 얼굴 마주하며 일상적으로 부대끼다 보면 한국 내의 다문화 가정들이 자연스레 기존

한국 가정들과 허물없이 지내게 되는 거 아닐까. 이러니저러니 차가운 책상머리에서 짜여지는 계획이나

아이디어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건 이렇게 서로 섞여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피부색이니 국적이니 언어가 다를 순 있지만 그 밑에 숨은 '사람'이 보이게 되는 건 이런 와중일 거다.

그렇다고 그런 아시아문화의 적극적인 교류나 화합이 각 나라와 각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가리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될 일이다. '아시아어린이합창단'의 공연이 있기 전 리허설 장면과 실제

공연의 모습. 아이들의 눈코입은 똑같은데,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연습할 때보다 각자의 전통을 드러내는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아래 모습이 더욱 각자의 개성도 살고 그림도 풍성하니 화려하다.

국내에 있는 다문화가정의 유소년 중에서 경쟁을 거쳐 선발된 50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다문화어린이

합창단이라더니 실력도 단연 뛰어나다. 아리랑이나 다른 영어 가사의 노래들을 부를 때 화음도 들을 만

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이나 몸짓들이 잘 가다듬어진 게 꽤나 준비했겠다 싶다. 국내에 있는 다문화가정

인구의 60%가 유소년, 그러니까 그들의 2세라고 했었다. 이 아이들을 차별없이 고난없이 얼마나 잘

품어줄 수 있는지가 그야말로 한국의 '국격'을 재는 바로미터와 같을 거라 생각해 본다.



ㅇ 아시아청소년문화축전, '아시안비트'

그런 다문화에 대한 감각, 아시아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주축은 역시 우리들의 청소년.

전국의 청소년, 대학생들과 국내 유학생이나 다문화가정의 청소년 등이 모여서 만들어낸 공연 '아시안비트'.

무슨무슨 스탄으로 끝나는 서남아시아에서부터 몽골초원을 거치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의 한국으로,

제각기의 피부색과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아이들이 허물없이 웃고 깔깔거리며 공연을 준비하더니

막상 무대 위로 올라가니 굉장히 진지해졌다.

아이들이 공연을 마치고 손에 손 맞잡고서 인사를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성별의 차이도, 국적의

차이도, 나이 차이같은 것도 모두 넘어설 수 있는 단단한 인간애를 키워나갈 수 있기를. 수월에서 왔다는

방글라데시 출신 슈학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8년이나 일했다는 그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아시아문화를 아우르는 축제인 아시아문화축제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최소한 아이들끼리는 서로 오해나 편견이 많이 줄어서 더욱 화합하는 분위기가 될 거 같다고.



ㅇ 아시아문화정보원 준비관 &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홍보관


금남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나타나는 전남구도청, 그 옆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정보원

준비관'은 이런 아시아문화를 고취하고 서로간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하드웨어의 역할을 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라고 한다.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유산 중의 공통된 부분들을 발견하고 이를 아시아 전체의

문화자원으로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아카이브의 역할인 셈이다.

아시아청소년들이 아시아문화정보원에 대한 설명도 듣고, 서로의 문화적 차이와 배경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받고 있다. 한쪽에 이렇게 마련된 강의장이나 세미나실은 앞으로 이 곳을 허브로

삼아 벌어진 다양한 차원의 학술제나 문화행사를 염두에 둔 듯 한데, 이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 각국이

모두 윈-윈하는 공간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아시아 각국의 문화자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아카이브도 구축하여 검색이 가능하고, 전시관 내부에선

아시아를 묶는 키워드가 되는 문양들, 상징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는가 하면 직접 베틀의 문양을

짜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꿈꾸는 광주가 어떻게 그 비전을 키워왔으며 얼마나 발전시켜

왔는지를 보여주는 홍보관을 구경했다. 구도청 옆의 쿤스트할레, 컨테이너 수백개를 활용해 만들었다는

'아시아문화마루' 건물에는 아시아문화주간을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광주는 이미 십여년전부터 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이 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차근차근 인프라를

갖추고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넓혀가며 이렇게 '제1회 아시아 문화주간' 행사를 열기에 이른 것이라고.

앞으로 2023년까지 내다보는 장기 비전에는 광주의 고유한 가치, 아시아평화예술도시의 꿈과 함께

아시아문화교류도시의 꿈이 더해지고 있었다.

홍보관 내부의 전시물들과 광주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속에서 아시아 각국의 주요

도시들을 밝히고 있는 전구 불빛들. 2014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완공되어 아시아문화교류의

중심공간으로 활용될 거라 하니 올해처럼 광주 일대 여기저기에 산재된 공연장을 찾아다니는 불편은

없을 거 같다. 광주의 오늘, 아시아문화의 오늘보다 내일을 그리게 되고 기대하는 이유다.

아직 '아시아문화', 그리고 아시아문화를 교류하고 화합하는 공간으로서의 '광주'라는 곳은 전부

채워지지 않은 공간과 같아 보인다. 여전히 갈 길이 멀고, 아시아문화를 운위하기 이전에 한국사회의

문화 자체도 아직 척박하고 아시아에 대한 이질감이나 심지어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많은 것을

짚어 보아야 할 거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몽골출신의 다문화정치인 1호 이라씨가 이야기했듯,

이미 한국의 제도나 사회분위기 자체가 많은 부분 나아지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일지, 내년의 '제2회 아시아문화주간' 행사가 궁금해진다.








출구라고 적힌 간판이 환하게 빛을 밝혔다.

무언가가 나오고 밀어내어지는 곳이 출구, 그런데 출구 앞 볼록거울에 비친 출구는

외려 다시금 그걸 꾸역꾸역 되짚어넣고 밀어넣는 그런 구멍처럼 보였다.


뗏국물이 말라붙은 더러운 거울은 출구의 기능을 반사시켜 뒤집은 것도 모자라서,

출구란 글자도 앞뒤로 바꾸어 구출이 되고 구출 역시 반전시키고 말았다.

왠지 막막한 느낌. 출구도 막히고, 구출도 글러먹은 더러운 거울속 세상.


1박2일의 짧은 남해안 여행이 끝나고 올라오는 길,

뭐 하나 바뀐 것도 없이 돌아올 곳만 정해져있다는 사실에 실망했던 거다.




@ 광주, 어느 백화점 주차장 출구 앞.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대통령들의 별장이었던 청남대에서 3월쯤 찍었던 사진.

반 장난삼아서였지만-전두환이 큰소리치며 살고 있는 것 말고도 어이없는 일들이 워낙 많았으므로-

그래도 오늘만큼은 순수한 분노의 마음이 응어리져 있음을 확인해 봐야 했다.


저걸 처음 맞닥뜨렸을 때나 지금이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 하나.

저게 왜, 아직도 무사히 건재한 거지.


용서를 빌고 합당한 응징을 받은 사람은 없는데 누가 용서라도 한 건가.

대통령 감투 챙긴 사람이? 천여명을 헤아리는 사상자와 실종자를 대표해서??

혹은, 펜촉을 움켜쥔 하이에나들이? 종교의 논리를 사회에 유치하게 대입하는 성자들이?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조각상이다. 앞에서 방아타령이나 불러줄까.
 
정태춘의 "5.18".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국민여러분, 계엄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시민여러분, 지금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계엄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총을 들고 빨리빨리 도우러 와주십시오, 시민여러분!"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복받치게 만드는 저 처절한 마지막 방송. 80년 광주의 마지막 목소리.


정태춘의 '일어나라 열사여'.

더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 칼 쥐고 총 가진 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구나

더 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압제의 칼바람이 거짓 역사되어 흘러도
갈대처럼 일어서며 외치는구나

여기 한 아이 죽어 눈을 감으나
남은 이들 모두 부릅뜬 눈으로 살아
참 민주, 참 역사 향해 저 길
그 주검을 메고 함께 가는구나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저기 저 민중 속으로 달려 나오며 외치는
앳된 목소리들 그이 불러 깨우는구나
일어나라 열사여, 깨어나라 투사여
일어나라 열사여, 깨어나라 투사여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바람이 분다, 저길 보아라
흐느끼는 사람들의 어깨 위
광풍이 분다, 저길 보아라
죽은 자의 혼백으로 살아온다
반역의 발굽아래 쓰러졌던 풀들을
우리네 땅 가득하게 일으켜 세우는구나
바람이 분다, 욕된 역사 위
해방의 깃발되어 저기 오는구나

자, 부릅떠야 하네 우리들
잔악한 압제의 눈빛을 향해
자, 일어서야 하네 우리들
패배의 언 땅을 딛고
죽어간 이들 새 역사로 살아날
승리 부활의 상여를 메고
자, 나아가야 하네 우리들 통일 해방 세상 찾아서

자, 부릅떠야 하네 우리들
잔악한 압제의 눈빛을 향해
자, 일어서야 하네 우리들
패배의 언 땅을 딛고
죽어간 이들 새 역사로 살아날
승리 부활의 상여를 메고
자, 나아가야 하네 우리들 통일 해방 세상 찾아서
자, 나아가야 하네 우리들 통일 해방 세상 찾아서
민중가요란 게 '감상'의 대상이 아니듯,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공식석상에서 의례화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왠지 그 노래의 생명과 본래 의미를 벗어나는 일이라 여겨졌지만, 그래도

꼭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만 불려야 하는 격하고 적나라한 다른 민중가요와는 다른 품위와 비감함이 있었다.


꼭 '적들의 모가지를 추수하는 낫'을 운운하거나 '복수의 빛나는 총탄', '들어라 양키야 뻐큐 갓뎀' 같은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도 심장을 격동시킬 수 있구나, (물론 그런 노래도 심장을 쿡쿡 쑤시지만) 노래 하나로 80년 

광주의 참상에서부터 그 이후의 지난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할 수 있구나, 싶었던 노래다.


그래서, 애국가 따위 부를라치면 손발이 오글오글해서 립씽크만 할지언정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살짝

울컥한 마음으로 숙연하게 부르게 되는 거다. (물론 그러면서도 역시 스스로 낯설고 어색해하지만.)


80년 광주를, 민주주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부글거렸던 광주를, 미국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깨뜨렸던 광주를,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적인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창조했던 잠시나마의 해방공간을 기억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을 야만스럽게 헤집었던 이땅의 지배자들을, 공수부대의 피묻은 총검과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쿠데타세력의 잔인무도함과 비인간성을 기억한다.


많이 바뀌었고, 마치 4/19 달리기가 하나의 박제화된 기념행사로 변해가듯 5/18 역시 그렇게 한발 빗겨서

바라볼 만한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아무러해도, 추모행사에서 방아타령은 아니다.

(오마이뉴스,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


나라도 불러주마.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꾸욱 눌러쥔 주먹을 흔드는 팔뚝질 대신 엄지손가락 말아쥔 뻐큐손가락이나 실컷 날려주마. 만수무강해라ㅆㅂ



p.s. 덕분에 다시 가사를 되씹어 가만히 불러보는 노래들. 왜 '들어라 양키야'는 네이X에선 검색이 안 될까.

"잠들지 않는 남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남도 한라산이여


"열사가 전사에게"

꽃무더기 뿌려 놓은 동지의 길을
피 비린 전사의 못 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 온데도 그 길 가리라 

그 길가다 피눈물 고여 바다 된대도
싸우는 전사의 오늘 있는 한
피눈물 갈라 흐르는 내 길을 가리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 다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어깨죽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투쟁
막걸리잔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가진자들의 더러운 이빨 금빛으로 번쩍이며
온 세상을 휘휘 감아 피눈물을 달라하네

아 동지여 (동지여) 적들은 (적들은)
무노동 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아 동지여 (동지여) 적들은 (적들은)
파업의 나팔소리 멈추라 한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 탄압
총 파업으로 맞서리라


"바쳐야 한다"

사랑을 할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은 때는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 에 떨면은 술도 못마셔 그렇게 먹은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 이여
번쩍이는 칼날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한목숨 걸고 지켜라


"인터내셔널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에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들어라 양키야"

랄라라 랄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
랄라라 랄라라 랄랄라
랄라라 랄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
랄랄랄랄랄랄라

찢기운 반도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진달래 칼날을 세워
여기 이렇게 굳센 가슴팍으로 그대들 앞에 섰다

순결로 씻은 조국반도 머리맡으로 침략의 불을 지른자
보라 치욕의 피로 맺은 복수로 그대들 앞에 섰다

보라 여기 이 반도를 폭압의 사슬 끊은곳
한 외침으로 명하니 이제는 이 땅을 가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뻐큐)
이 땅 분노의 함성을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갓뎀)
해방통일 몸짓을

진달래 붉게 물든 반도를 피로 붉게 물들인 자여
터질듯한 심장을 품고서 그대들 앞에 섰다
수많은 꽃들 짓이기고서 끊없는 학살 일삼는 자
한많은 영혼 가슴에 품고서 그대들 앞에 섰다

보라 결연한 의지로 불타는 강철의 신념을
민족의 외침으로 명하니 이제는 이 땅을 가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피끓는 투쟁 열기를
들어라 양키야 들어라 민족자주의 함성을
해방통일 몸짓을 

 

정말이지 격하게 아끼는 거다. 기운차게 달려가 뒤에서부터 (이왕이면 멱살에서부터) 잔뜩 부여잡고 거꾸로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눈 앞에 그려진 브이자를 보곤 흠칫 놀란 표정이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러셔, 조만간 달걀 들고 다시 한번

쳐들어갈지도 모른다구.



전두환 혹은 그와 비슷한 피사체에 애정을 표하고 싶은 이는, 지금 당장 짐을 꾸려 청남대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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