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모란공원묘지, 어제(9/7)가 이소선 여사 발인날인지는 몰랐다. 이미 이 곳 전태일 열사 옆자리에

모셔진 줄로 알고 있었고 마침 휴가를 내었기에 찾아가 봤던 것. 그런데 그곳에 이렇게 모셔질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식은 네시부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묘소보다 한줄 뒤로, 한칸 왼켠으로 모셔지게 되는 이소선 여사. 그녀의 민주사회장을

준비하는 장례위 소속 사람들이 식을 준비하다가는 전태일 열사의 묘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했다.

정리해고 철회! 라고 쓰인 소금꽃나무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라 적힌 티를 입은

그분들의 뒷모습이 문득 굉장히 무겁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불꽃이 된 게 스물두살, 70년 11월의 그날 이후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모든 억압받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했었다. 근로기준법을 안고 몸을 불사른 70년 그때와

2011년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비감해하던 그녀, 마지막 유언처럼 남은 말은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했다.

장례식은 추모예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색소폰 등 약간의 추모공연이 있다고 했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늘어나는 현수막들. '어머니'란 단어 일색인 게 조금은 맘에 걸렸다. 여성에 대한

경의나 존중을 표하기 위해서는 꼭 '어머니'의 이미지가 씌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저 이소선 그녀,

한 사람의 위대했던 삶 그 자체로 존경하고 사랑하기에도 충분할 텐데. (물론 그녀가 전태일을 보낸

이후 모든 노동자들을 아들딸처럼 여겼다거나, 연배상으로 그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있겠지만.)

이소선 그녀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거하는 곳. 인부들이 들어가서 땅을 고르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비로소 행복하게

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태일의 불꽃을 이고 지고 살아온 한평생, 그 자체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었을 테니까.

사실, 모란공원묘지엔 '전태일'이나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과 같은 널리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도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네들의 삶이나 행적 역시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경외스럽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투쟁하고 산화해갔고, 이소선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굽힘없이 싸워왔던 거다.

4시가 좀 넘은 시각, 청계천을 지나 서울 곳곳을 들른 이소선 여사의 운구행렬이 드디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도착했다. 만장이 길목 양켠으로 빼곡히 들이찼고, 그녀의 영정사진을 앞세운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그녀의 모습, 개인적인 기억은 전혀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모습이다.

영정사진 뒤 풍물패가 지나가고, 그리고 이소선 여사. 아..어머니. 그렇게 몇 번 집회에서 뵌 적이 있었던 거

말고는 늘 전태일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분이었다.

부디..돌아가실 곳, 하늘나라란 게 있다면 40년 넘게 가슴에 묻어오셨을 전태일 열사 꼭 만나서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시민장례위원을 포함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묘역까지 함께 했다. 행렬의 앞섶에서 보이던 정치인들,

유명인사들이 있었지만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대표..최근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통합이 결렬되고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실까. 권영길 전 민노당대표도 마찬가지.

좁다란 모란공원묘지 중앙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만장들, 하나하나 씌여진 문구들을 읽어보았다.

시대의 어른이 또 한분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어려운 시기, 야만스러워지는 시대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들이

떠나는가 싶어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이소선 여사가 떠나기 직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한진중공업 사태, 비정규직 문제, 그런 수많은 난제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의 의견차라거나, 노조로 조직되지조차 못한 수많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진보 진영 내에서 노선차라거나 비전의 차이로 힘을 모으지 못하는 상황..그 모든 것들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순간이나마 극복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Vice versa. 남은 자들의 몫.

민주사회장이 시작되려는 찰나. 그녀를 보내는 늦은 여름날 날씨가 이렇게 선선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큰 부조라고 어느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각자의 일터와 생활 공간으로 들어와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사람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정리해고당하고, 철거당하고, 그렇게 삶의 가장자리로 불쑥 떼밀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던 이소선, 그녀가 돌아갔다.



▶◀ 이소선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신 곳.



‘눈물바다’ 된 85호크레인 앞, 가로막힌 ‘어머니의 영정’ (민중의소리, 2011.9.7)


다음으로, 전화연결을 통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눈물의 추도사가 울려 퍼지자 이내 추모제 현장은 울음바다를 이뤘다. 김 지도위원은 “희망버스 타고 가서 진숙이를 만나고 싶다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오셨냐”며 “희망버스 타고 가서 해고된 한진 노동자들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시던 어머니였고,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싸우는 노동자들을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라며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던 말씀은 어머니 삶에서 나온 평생의 철학이었고 지혜였다”고 말했다.

“이제 편안히 가세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 만나셔서
이승의 고통일랑 다 내려놓으시고 못다 한 얘기, 못다 나눈 정, 맘껏 나누세요.
어머니로 인해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키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머니를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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