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맛있게 잘 마시는 방법 중 하나는 맥주잔을 한번 들어올려 한모금 마실 때마다 일정한 양의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 급하게 덤벼들거나 지루하게 할짝대지도 않으면서, 적당하고 일정한 템포로

맥주를 맛보는 것이 요체.


어렸을 적 키스를 잘하려면 체리에 달려있는 뒷꽁지를 입안에서 잘 휘감아 매듭짓는 법을 연습하라던 얘기를

듣고 종종 연습했던 적이 있었는데, 맥주도 마찬가지. 이렇게 크리미한 흑맥주류를 잔에 가득 따라서 거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리를 만드는 걸 확인해 가며 마시면 보는 재미에 마시는 재미까지 일석이조랄까.


에비스의 스타우트흑맥주는 달콤한 맛이 살짝 커튼 뒤에 숨은 채 이쪽을 훔쳐보는 발그레한 뺨의 소녀처럼,

쌉쌀한 맛이 막 장작개비 일백개를 힘껏 패고 굵은 힘줄이 여기저기 돋아난 당당한 마당쇠처럼 방울방울.



@ 도쿄, 에비스맥주박물관.
음식의 천국 대만에서 술 한잔 안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두개 사고, 맥주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컵라면은 아무래도 내국인용인지 영어 설명도 아주 박하게 찔끔 있어서, 대충 그림보고

맛을 그려보고, 번체자로 씌여진 한자 대충 눈치로 추측해보고.

그래서 요렇게 두 개, 하나는 왠지 길거리에서 많이 본 장면을 그려넣고 있어서, 다른 거 하나는 뭔가 그릇용기를

두 개나 쓰며 조리하는 거 같아 보이길래 풍성해 보여서.

내부에 들어간 건 비슷하다. 분말 스프 하나랑 뭔가 특제 소스 하나. 뭔가 했더니 하얗게 굳어있는 돼지기름,

아마도 국물 위에 맛있게 둥둥 떠있는 돼지기름을 낼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하얗게 굳은 돼지기름을 찍찍

봉지에서 짜내는 건 좀...쉽지 않았고 보기에도 좀...

다른 하나는 뭐랄까, 짜파게티와 비슷해 보이는 춘장 소스에 일반적인 분말 스프. 평이한 컵라면이었다.

그리고 맥주. 대만에 왔으니 대만 맥주를 마셔야겠다 싶어서, 타이완피조우. 무덥고 습해서 무지하게 끈끈한

하루를 보냈는지라 맥주 한 잔이 그야말로 '션하게' 바닥나고 말았다.

<막간을 이용해 배워보는 타이완의 음식 매너>

나쁜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 젓가락을 이렇게 용기에 꽂아 놓거나 걸쳐 놓는 것은 비매너.

(국물에 둥둥 떠 있는 기름들은 아까 하얗게 굳어 있던 그 돼지기름이 녹은 것,  확실히 대만/중국 음식은

기름이 많이 들어가 기름진 느낌이 강하다. 심지어는 컵라면에까지.)

좋은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에는 늘 이렇게 똑바로 젓가락을 걸쳐두어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젓가락 아랫부분이 국물에 담겨있지 않도록 하려는 위생상의 배려 아닐지.

그리고 용기를 두 개나 쓴다며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일종의 짜장면은 생각보다 초라한 행색, 짜장소스가

좀 많이 부족하달까, 맛이 심심하진 않은데 보기에 너무 노랗기만 해서 아쉬웠달까. 그렇지만 술안주로는

손색없던 대만의 컵라면들.





#0. 태국에서 언젠가 먹었던 맥주. 싱하. 태국 도처에 널린 사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호상-아마도

해태?-의 심볼이 새겨진 담담한 색감의 맥주캔이 책상 위에 놓였다.


#1. 파나마에 간 G는 운하 앞에 서서 "한국에 돌아오면 열심히 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자칫하면 내가 따라갈 뻔했던 출장. 아무리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의 가로수가 온통 망고나무인데다가

잘 익은 망고가 뚝뚝 떨어져 아찔하고 강렬한 향을 피워올린다고 해도, 그 꼴 안 봐서 다행. (이랬다가

또 사찰당해서 회사 쫓겨나고 법정투쟁 옥중투쟁해야 하는 건 아닌지. 어제 피디수첩에서 다룬 '민간인

사찰'이야기를 보신 분으로부터 진보신당 당비 이제 그만 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다.)


#2. 세르비아 총리, 방글라데시 총리 등이 많이 왔다갔다 하면서, 나름의 '경제외교'를 펼친다. 외교의

많은 부분이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온통 기울여지고 있는 추세상 새삼스레 '경제외교'랄 것도 없겠지만.

문제는 그런 제3세계랄까, 개도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유입되어야 할 외국의 자본과 상품들은 선택적으로

'시장'을 택한다는 것. 그들은 국가가 아니라 (국가가 조성해놓은) 시장을 본다. 시장 규모, 더한다면 구매력.


정치인들의 연설과 판촉의 꼬드김을 들으며 경제인들은 속삭인다. 저긴 시장이 넘 작아서 먹을 게 없어.

이래서야 개도국이 발전하고 절대빈곤의 수준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일국 차원에서의 인민 대 인민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민주주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은 부분 상식이 되었고

그 상식에 기대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진보를 지향한다면, 지구적 차원에서는 영 아니다. 국가 대

국가간의 관계, 혹은 시장 대 시장간의 관계에서는 민주주의 따위 통하지 않는다. 적자 생존, 규모의 경제,

형식적이나마 국가 내를 규율하는 1인1표 따위의 평등한 원리 대신 1원1표의 원리로 선택되고 결정되는

국가, 그 안의 국민들의 미래. 그나마 국제연맹이니 국제연합이니 칸트의 이상이 살아있던 때가 있었지만,

더이상 국제 관계는 정치가 아닌 경제가 규율하고 있는 거다. 외교와 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졌고.


#3. 그 와중에 누구는 전시작전권을 소고기와 팔아먹는다. 이 기묘한 셈법은, 상품을 내어주며 돈을 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전작권 환수연기에 동의해주어서 감사하다니. 소고기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실제 계산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뻔하다는 생각이 진하게 든다.


#4. 뭐랄까, 물리적 거세를 해봐야 그런 놈은 넘쳐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허벅지라도 대고 부비댈 놈이다.

이상, 술꼬장.


쟁반, 접시, 물잔, 맥주잔과 숟가락이 비닐 포장되어 있던 상해의 어느 음식점. 웬만한 음식점에 가면 음식은

맛있다 해도 대부분 찐득찐득하고 더러운 접시 때문에 살짝 기분이 상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비닐로 잘 싸여있는

식기류라면 왠지 믿음직스럽겠다 기대가 되었다. 아마도 그런 부분을 감지하고 나온 아이디어 아닐까, 일인용

식기 세트를 완전히 비닐포장해서 그때그때 서빙하는 거.

비닐을 짝짝 찢어서 접시랑 컵이랑 숟가락을 세팅하니까 이런 모양이다. 비닐 포장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그닥

깨끗하진 않았다. 물이 질질 흐르고, 여전히 군데군데 뭔가 찌꺼기같은 게 붙어있어서, 그냥 비닐 포장하나

안 하나 별차이없는 중국의 식기구나 했다.

그런 접시들을 앞에 놓고, 상해의 명물이라는 '민물게요리'를 먹었다. 새우같기도 하고 가재같기도 하고, 커다란

집게 모양의 앞발이 두 개 달린 새우라고 하면 되려나. 매콤한 양념도 맛있었지만, 껍데기를 입으로 까서 먹는

그 속살의 쫀득이는 식감이 꽤나 매력적이어서 정신없이 먹었다. 접시가 깨끗하니 안하니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

먹고 안 죽으면 되지 뭘.

맥주는 맛있는 칭다오. 한국과는 다른 디자인이 꽤나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민물게요리랑 딱 어울렸던.





어제 '공기인형'을 보고 나서부터 기네스 맥주가 무지하게 땡겼었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퇴근하고 나서 장보러 가신다는 부모님을 따라 코스트코로, 농협으로. 코스트코엔 병맥주가 없었고 농협엔

수입맥주라곤 호가든과 버드와이저 뿐이었다. 농협에 수입맥주가 있단 사실에 더 놀랬다.

집앞 편의점도 두군데 들렀다. 한군데에서 드디어 기네스 캔맥주와 조우해서, 분명 다음 편의점에선 짤랑대는

기네스 병맥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웬걸, 아예 기네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처음 편의점으로 돌아가 두 캔 사버렸다. 캔이지만 살짝 달그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서, 타협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맥주캔 두개를 한 손에 계주 바통처럼 옴쳐쥐고는 내달렸다. 캬~ 소리내어 마시고 싶었다.

꼴꼴꼴...맥주가 흘러나오면서 짙고도 자욱한 안개 덩어리를 만들다간 조금씩 검정 액체와 뽀얀 거품의 형체를

만들어 간다. 진한 커피같이 쌉쌀하면서도 굉장히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의 갈색 거품이다.

그리고, 마음. 공기인형 그녀가 백 안에 넣고 방울처럼 흔들어대던 그런 짤랑짤랑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탁성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던 이유다. 캔 속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탈탈 털고 나니 기네스의 마음이 얼핏 나타났다.

이리저리 굴려가며 자세히 살피니 하얀 플라스틱 탁구공같이 생겼다. 세련된 검정색의 중후한 알루미늄 외양

속에 저런 가뿐한 느낌의 플라스틱을 굴리고 있었다니, 다시금 공기인형을 생각한다.


텅 비어있는 속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그 결락감만 더욱 또렷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게 마음. 하찮은 플라스틱 한 조각일 뿐인데도, 그게 이렇게 다르다.

무려 "기네스 고유의 맛인 크리미 헤드(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키"는 능력을 가진 거다. 공기인형에게

마음이란 게 덜컥 생겨버리고 나서는 마냥 쓰잘데기없고 가슴 아픈 일들만 있었던 게 아니듯, 기네스 캔을

덜그럭덜그럭 귀찮게 부딪혀댔던 녀석도 마냥 쓸데없이 굴러다닌 건 아닌 셈이다. (물론 위젯 때문에 기네스는

일단 흔들거려서 흥분하고 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풍요로운 거품이 팝콘처럼 튀곤 하는 거다.)

마시고 나면 꼭 아쉬워지는 거품. 맥주라곤 마신 적이 없다는 결백함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깔끔이 주걱으로

싹싹 야무지게 닦아낸 것만큼 거품이 한점 남김없이 모조리 내게 흘러들어온다면 참 좋을 텐데. 게다가 기네스,

비싸단 말이다. 편의점에서 무려 캔 하나에 3,500원.

복부 절개를 시술했다. 그녀의 마음이 보고 싶었다. 주둥이에서 흘깃흘깃 비치는 마음조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불끈 힘줄이 선 손가락이 껍데기를 와그작, 찌그러뜨려 버렸더니 거품범벅의 '마음'이 잔뜩 당황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기네스의 마음을 얻으려면 마법의 성을 지나 숲을 건너..어둠의 동굴 속 멀리멀리 나아가야 한다. 날카로운

알루미늄제 이빨을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달그락달그락 떨고 있는 매끌한 마음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손끝에

감각을 집중한 채 섬세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쥐어도 안 되지만 너무 약하게 쥐어도 안 된다.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들이밀어도 빼내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최소 두 손가락은 집어넣어줘야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기네스의 '마음'. 일곱개를 모아서 소원을 빌면 기네스의 신이 나타난다나.




*                                                     *                                                     *

기네스 드래프트. 알콜 4.2%, 원산국은 아일랜드.

안에는 '위젯'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플라스틱공이 들어가서 제멋대로 휘젓고 있어 기네스 흑맥주 특유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 준다.


동생이랑 어머니가 프라하 여행을 다녀오며 가방에 바리바리 싸온 Kozel 맥주 삼종 세트. 맛 본다고 홀짝홀짝

하다가, 지금은 곱창에 소주 일잔으로 이차 나가기 직전. 맥주는 배가 부르다며 위스키도 두 잔 걸친 터라, 대체

오늘 술빨은 어디까지 달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뜯긴 세 캔으로 부족하여 보따리 수입해온 마지막 한 캔까지 꿀꺽, 필스너 우르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는 '레페 브라운'과 '필스너 우르켈'. 그렇지만 역시 맥주는 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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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도 까먹었고, 찾아가는 방법 따위 기억하고 있지 않은 데다가, '맛집' 관련 포스팅은 안 하기로 맘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채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작금의 상황에서 몹시도 위장을 쥐땡기는 사진들, 그리고

그 때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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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학가 거리 한복판에서 여우비를 피해 친구와 들어갔던 곳. 거대한 잔에 따라주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안주삼았던 감자튀김과 '맛좋고 소화 잘 되는' 고기. 무려 얼굴만한 잔을 강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등장한 사람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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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도 나왔댔다. 초코렛 푸딩..꺄아. 어찌나 맛있었는지. 그리고 어찌나 순식간에 바닥이 보이던지. 해서

어찌나 아쉽던지. 다시 한번 들르고 싶단 맘만 굴뚝, 으레 그렇듯 다시 이 곳을 밟기란 쉽지 않았다.



교훈. 두번 다시 못 올 것처럼 먹어라.(여행 중이라면 더더욱)


그치만 문득 찾아내 버린 그곳의 명함.




공항에 내려 마주한 표지판. 이제 좀 아랍어에 익숙해진 눈에도 완전 생경한 인도의 힌디어. 인도라고 하면

그다지 한국과도 멀지 않고-비행시간 9시간여-이름부터 꽤나 익숙한 나라 중의 하나여서 왠지 뭔가 친숙할 줄
 
알았는데 글자부터 영 낯설기만 하다. 저것도 설마 아랍어처럼 오른쪽에서부터 거꾸로 쓰는 건 아닌가 싶기도.

차를 타고 우선은 숙소로 가는 길,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버스 우측 창가에 앉아

있는데 반대쪽에서 차가 오는 게 보인다니. 중앙선의 엘지 광고깃발이 펄럭거렸다.

차들이 좌측통행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보행자의 우측통행을 시행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중앙통행을 하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여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향을 그대로 온존시킨 채 영국과 같은

좌측통행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마치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하는 것과 같은 거 아닐까 싶다. 역사적

연원이야 구질구질하고 다소 수치스러울지라도 그걸 무조건 지워버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건 답이 아닐 텐데,

뭐 편하고 익숙하고 그럼 된 거 아닐까. 나름의 맥락과 여타 시스템과의 유기적 연계가 생겨난 거를 억지로

끊어내는 거니까, 꽤나 오래 고심고심해서 정해야 할 문제임엔 틀림없는데.

그러고 보니 운전수도 오른쪽에 앉았다. 운전석이 오른쪽인 곳은 일본이랑 영국 뿐인줄 알았는데, 인도도 그랬다.

인도의 맥주, 킹피셔~ 주류광고가 금지되어 있는 인도인지라, 이들은 아예 항공사를 사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고 간접광고하고 있는 중이란다. 킹피셔 항공사가 있다는데, 로컬 항공사인지 직접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맥주는 꽤나 맛있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랄까.

인도까지 가서 한식당을 가다니 많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나름 한국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전통 한지문창살을 흉내낸 룸 문짝들과 천장의 한지 조명등까지. 그렇지만 역시 인도 나름의

변용이 가미된 터라, 단적으로 한지 조명 아래 늘어뜨려진 서양인 모양 인형.



"아사히 비~루 코~죠",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호텔 프론트의 직원들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후쿠오카에 오기 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사히 맥주를 무한정 마실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 있다고, "아사히 비루 코죠"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알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사히 맥주공장이 하카타역
 
근처에 있다는 걸 아는 직원도 거기에 무료 시음을 제공하는 견학 코스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랬다.

다행히도 난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고, 호텔 로비의 공중전화를 써서 직접 통화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야하는데다가 영어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092-431-2701. 얼마를 넣어야 할지 몰라 우선 있는 잔돈

탈탈 털어넣었다. 요금이 툭툭 떨어지면서, 안내 아가씨와의 통화가 시작. 위치를 파악하고, 시간을 정하고.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한국어가이드를 대동한 한국인들 단체 관광객들과 같은 시간으로 예약해 주었다. 원래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설명이 제공된다던가. 오픈시간은 오전 9시반부터 오후 3시까지였고, 난 3시 10분전에

도착하기로 했다.

비오는 날은 맥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사히 생맥주를 포함한 술 자체를 워낙 좋아라~하는 터라

딱히 개의치 않고 호텔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우중충한 날을 맞아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 붙여져 있던

조그만 우산 판매 광고. 참...아기자기한 글씨에, 아기자기한 광고. 일본이다.

드문드문 젖어 있는 도로 위를 건너기 전. 숙소는 하카다역 근처 '도요(東洋) 호텔'이란 곳이었고, 하카다역에서

로컬 트레인을 타고 남쪽으로 한정거장 내려가면 '다께시타(竹下)'라는 곳이 나온다고 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다케시타'라길래 왠지 낯익은 단어다 싶어, 아 다케시마? 그러면서 '竹島'를 써보였더니 그게

아니라 죽하(竹下)였다. 어쩐지...'다케시마'란 이름의 역이 뜬금없이 후쿠오카 내지에 있을 리가 없지.

이게 바로 다께시타 행 티켓. 원래 커다란 기차역이 그렇듯 잔뜩 혼잡한데다가 공사까지 여기저기서 진행중이어서

더욱 정신없던 하카다역에서 무조건 역무원에게 다가가 가는 길을 물었더니 쉽게 해결해 주었다. 티켓 사는 곳도,

기계에서 티켓 사는 방법도, 그리고 차를 어디서 타야하는지도 자상히 지도받은 후에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

참, 티켓은 편도에 320엔. 왕복 640엔이었으니...고작 한정거장 가는 건데 한국물가로 치면 무지 비싼 거려나...

그치만 후쿠오카 내에서 버스 한번 타는 데도-시내 중심구간에 한정되어 운행하는 100엔버스를 제하고는-220엔,

혹은 그 이상인 걸 감안하면, 사실 전혀 비싸단 느낌도 없이 표를 샀었다. 이미 환율에 대한 건 고작 사흘만에

환율이 백원씩 폭등하는 엔화의 강세에 질렸을 때, 피눈물을 흘리며 환전하면서 맘을 접었기 때문인지도.

하카다 역 구내. 후쿠오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느끼던 거지만, 되게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일본어 표지판이나 간판 때문만도 아닌 거 같고. 전반적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살짝 낯선 느낌을 던지는 그 무엇, 끝내 무엇인지 속시원히 모른 채 돌아왔다.

더블체크를 위해 다께시타행 기차 타는 곳을 물었더니 정말 친절하고 열심히 가르쳐준 역무원 아저씨. 타는 곳은

애초 표살 때 가르쳐주신 분 말씀이 맞았는데, 로컬 트레인은 배차간격이 무지 길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거의

20분 간격으로 있는 거 같던데, 덕분에 여유있게 도착하겠거니 했던 예상이 보기좋게 틀어지고 말았다. 이젠 되려

지각했다고 안 들여보내주면 어쩌나, 걱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 그나저나 역무원 아저씨, 카메라 의식하고는

기차 들어오는 것 무지 열중해서 바라보고 계신다.

하릴없이 20여분을 기다리면서 빗발이 점차 굵어지는 걸 보았다. 비가 내리는 걸 볼 때마다 참..인간들이 어줍잖단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어쩌니저쩌니 잘난척을 하는 인간들이지만 비가 내릴 땐 고작 우산이

전부다. 그런 식의 천조각/비닐조각으로 비를 긋는단 건 진부할대로 진부해졌음에도..별로 더 좋은 대응방법을

고안치 못하는 것 같다. 그치만 역시 일본에선 투명비닐우산이 많이 보였다. 불의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투명 비닐 우산. 모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아직 그다지 쉽게 보이진 않는다.

플랫폼 한가운데 버티고 선 스낵코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판기. 외국음식에 대한 넘치는 식욕과 호기심은 늘

절제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했고, 일본에서도 역시 곱창라면이니 뭐니 거의 돼지뼈가 흐물거릴 때까지

고아진듯한 느끼하고 진한 라면에 매료되어 버렸댔다.

한국의 '노약자석'은 기실 나이많은 분들을 위한 자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굳이 별도로 '임산부석'이란

표시를 '노약자석' 옆에 붙여야 할 정도로, 눈으로는 '노약자' 혹은 '장애인'석이라고 읽히되 머리로는 '노인'이라고

이해되는 어색한 간극이 곧잘 몇몇 사건들로 드러나곤 한다. 노인에게 자리양보하지 않는다고 폭언, 구타, 그러다

같이 경찰서도 가고, 혹은 배안나온 임산부를 억지로 일으키는 노인에 대한 항거, 분노..그런 이야기들.


일본은 '우선석'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었다. 애기가 있거나, 임신했거나, 노인이거나, 혹은 신체가 불편한 사람을

우선 앉도록 하는 우선석. 노인에게 벌떡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꼭 한국에서만 멋지고 자랑스러운 건

아닐 거다. 그리고 한국의 그것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미덕'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미덕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카다(博多), 한자음으로는 '박다'라고 읽히는 곳에서 고작 한정거장, 다케시타.

기차에서 내려 빠져나오는데 불쑥 눈에 띈 '우측통행' 표지판. 그리고 얼마전 다른 블로그에서도 봤었지만, 일본도

에스컬레이터 두줄서기는 안 하고 있었다. 한 줄서기가 굳어져 있는 것 같던데 대체 왜 갑자기 생뚱맞게 두줄로

서자고 잘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지. 이 역시 그 모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거 같은데..글쎄, 성격도

급하고 걸음도 빠른 나로서는 두줄서기는 죽을 맛이다. 괜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그냥 한줄서기가 정착된 이상

거기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게 정답아니었을까. 캠페인, 계도, 그런 식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태도란 참.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지각한 사람은 아사히 맥주를 공짜로 맛볼 기회를 박탈할지도 몰라, 라는 염려로

우산도 안 쓰고 뛰었다. 다행히 기차역에서 내려 한 백미터 정도 걸었더니 바로 앞에 보였다.

헐떡이며 들어가니 이미 견학투어는 시작했댄다. 그렇지만 내 뒤에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유있게 입장하고

있길래, 왠지 마음이 푹 놓였다. 설마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데 안 들여보내주지는 않겠지 싶어서.


처음으로 마주한 견학 포스트는 맥주의 재료를 소개하는 곳이었다. 보리니 뭐니 샘플을 구비하고 있었고, 중국집

간장/식초통처럼 생긴 곳에 담긴 보리는 직접 시식을 해볼 수 있는 깨끗한 것이라고 했다. 몇알 입에 넣고 씹어

봤더니 생각보다 무지 고소하고 달콤했다는.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견학 코스에는 이렇게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놓기도 하고, 아사히맥주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기도 했다. 저 주홍빛 판대기에 하얗고 커다란 거품이 그려진 건 왠지 환타나 써니텐 오렌지맛스럽지
 
싶었다. 그리고 저 연혁을 차근차근 보기에는 생각보다 움직이는 스피드가 빨랐다. 4,50분만에 견학을 마쳤던 거

같은데, 그렇게 빠르진 않아도 거의 쉼없이 걷기는 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앞에서 저 빨간 옷을 입은 직원분이 일본어로 설명을 해주시면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이끄는 한국인

가이드분이 통역을 해주셨다. 보통 단체여행객은 이럴 때 끼어서 설명을 듣는 배낭여행자들이나 개인여행자들을

기피하고 싫은 티를 팍팍 내던데, 이분들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가이드가 통역해주면서 내뱉는

말풍선들을 내가 혼자 들고 가서 독식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뱉어진 말들은 한없이 잘게 부서져 퍼지는

비누방울처럼 공간가득 채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담 그거 좀 같이 들으면 어때서 사람을 눈치주고 노골적으로

가라고 하는지. 뭐, 여기선 그렇게까진 안했지만 다른 데선 많이 겪었던 일이다.

중간에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는데, 왜지 사람들이 분위기잡고 앉아서 사진찍기 딱 좋은 지점같았다.

저 은빛 알루미늄 컵위에 올라앉은 건 분명 맥주거품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난 그냥 커피 위에 얹혀져있는

휘핑크림이 생각나는 건 왤까. 너무 과장스럽게 표현된 거같지만, 그만큼 아사히 맥주의 거품이 맛있다는 건

어필하고 싶었으리라 관대하게 납득하기로 했다. 이제 견학코스가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난 제한시간내에

최대한 많이 맥주를 마시기 위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중간에 마주친 맥주 모양의 그림. 저런 세세한 곳까지 맥주와 연관된 장식을 채우다니 이곳이 정말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고, 아님 익히 알려진대로 일본인의 꼼꼼하고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진을 보곤 이런 곳까지 신경써서 관찰한 사람이 더 꼼꼼하다고 이야기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를 계속 안내해주었던 밝은 웃음의 인상좋은 아가씨. 견학 코스 중 사진을 찍지 말도록 제한한 곳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사히 맥주가 어떻게 환경보호, 자원재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전시한 곳이었다. 맥주의

펫병으로는 폴리섬유를 짜내어서 직원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기타 알루미늄캔, 남은

보리찌꺼기 등도 모두 남김없이 재활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역시 입고 있는 저 옷이 100% 아사히맥주 펫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벌써 근 30여년 이전부터 그렇게 철저한 자원재생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니,

역시 선진국다운 면모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규율 그리고 지원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드디어 무료시음회장 입성. 약 20분정도 진행된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30분 가까이 시간이 주어졌던

것 같다. 누군가 여기에서 맥주를 네 잔 마셨다고 했던가, 난 그 얼굴모를 블로거에게 뜨거운 호승심을 느끼며

최소한 다섯 잔은 마시리라 굳게 다짐하며 들어섰다.

우선 첫잔은 아사히 생맥주, "첫잔은 슈퍼 드라이로 마셔주세요"라는 한국어 안내문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두번째

잔부터는 흑맥주를 마시던 생맥주를 마시던, 본인이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저 아주머니들이 따라주신다. 왜 이런

무서운 얼굴의 사진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만 맥주를 청하면 쾌속무비한 속도로 손을 놀리시는 아주머니들이

그저 고마울 뿐. 생맥주도 맛있고 흑맥주도 맛있고.

사전에 인원수에 맞춰 테이블에 저런 안주를 인당 한개씩 배치해 둔다. 그리고 중간에 초콜렛이라거나 기타 안주를

맛보라며 조금씩 더 주는데, 그런 것들은 시음회 공간 한 옆에 있는 매점에서 팔고 있는 것들을 판촉하는 거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그 매점의 매대에 마련된 시식용 안주들이 눈에 띄길래 새로 술잔 받으러 오고가는 길에 하나씩

집어들기도 했지만, 역시 맥주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안주는 없어도 그만이다.

생맥주, 흑맥주, 흑맥주, 생맥주, 흑맥주..기어이 채웠던 다섯잔은 아마 이 패턴으로 비웠던 것 같다. 듣던대로 단체

관광객들 중 술을 잘 안하시는 분들은 꽤나 많아서, 그분들은 주스 한잔만 마시고 금방 일어서시기도 하고, 매장에

무슨 안주를 파나 구경도 하고 그랬다. 그 와중에 다섯잔이라니 좀 심했다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부어라하며

마신 것도 아니고 상당히 여유롭게 마셨는데도 시간이 충분했던 느낌. 정말 30분쯤, 혹은 그이상 시간을 할애해

주었던 거 같다. 그러니 이렇게 사진도 함께 찍고, 주변 사진도 찍을 여유도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사람들이 전부 빠지고 나니 다시 자리를 정돈하고 내일 견학 프로그램을 준비하시나 보다.

어쨌든 이분들은 오늘 우리 3시 견학 일정을 끝으로 시마이.

왠지 나가기가 아쉬워서 매장이랑 근처를 살짝 둘러보았다. 생맥주와 흑맥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잔을 채우던

저 샘터가에는 이제 사람 한명 보이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매장은 뭔가 뒷정리로 분주하다.

아까 견학하면서 처음 받았던 브로슈어에 꼽혀있는 한국어 광고글, 대체 누가 쓴 건지 모르겠지만 참 빼뚝거리는

글씨에 꾹꾹 눌러박힌 느낌표들이라니, 정말정말 상품을 팔고 싶은 느낌이 확 전해지는 거 같다. 요컨대, 저

매장에서는 요런 것들을 판다는 거다. 그치만 시식해 본 바에 따르면 글쎄,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가리키는 대로 문을 나서니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치만 아까와 다른 건 어쨌건 빈속에

맥주를 다섯잔이나 들이마신 내 부유하는 정신상태. 조금씩 후끈해지는 머리와 목덜미에 와박히는 빗방울이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한 게, 이유없이 유쾌해져버렸댔다. 그냥, 취기가 돌았단 얘기.

다시 다케시타 역으로 갔더니 아까 서두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스탬프가 한 옆에 놓여 있었다. 아사히 맥주공장

기념 스탬프쯤 되려나, 찍을 만한 종이가 잡히지 않아 그냥 하얀 받침대에 하나 이뿌게 눌러 찍고는,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의 네모난 도장은 또 무슨 그림이었을까, 미처 못 보고 있었는데 이제 눈에 들어온다.

확실히 살짝 취했었던 겐가.

맥주 만드는 공정. 비단 아사히 맥주만이 아니라 모든 맥주가 이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질 게다.

들고 온 명함, 후쿠오카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들러볼 만한 코스인 거 같다. 맥주 공장이라는 곳을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아사히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갓 제조했을 거 같은 느낌의

신선하고 맛난 맥주를 맘껏 먹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꽤나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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