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무수한 별들 가운데 하나를 봅니다.

 

지구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지금 그 별을 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이처럼 수천만 분의 일의

 

우연과 같은 필연으로 인연을 맺습니다."

 

 

 

몇 주에 걸친 야근을 마치고 회장 보고까지 마친 날, 회식에 더해 모처럼 아저씨들과의 노래방 자리까지.

 

그렇고 그런 트롯과 팝송과 최신 가요가 난무하던 가운데 귀에, 가슴에 확 꽂혀버린 노래 하나.

 

왕의 남자 OST이기도 했으니 모르던 노래는 아니었지만, 문득 가사가 곱씹히고 감정이 트였다.

 

 

 

 

'인연', 이선희.

 

 

약속해요 이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취한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대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수가 없죠
내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테죠
먼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생에 못한 사랑 이생에 못한 인연
먼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부엌에서 그리 크지도 않은 '톡',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서 가봤더니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하트 반쪽이 나머지 반쪽을 기다리는 중.

 

 

한 사람의 심장이 붉은 실로 묶였다는 인연의 심장을 당겨올리는 소리였다. 톡.

 

 

 

 

 

 

 

그는 그녀를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게다.

무작정 통영에 내려와서는 다소간의 인연을 빌미로 무작정 불러낸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그녀는 차를 배웅하던 그 순간.

창밖에 선 그녀를 향한 그의 손이 갈고리가 되었다. 그의 손이 유리창을 긁어내렸다.




젖이 팅팅 불은 채 아파하는 암소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지 못해 힘든 마음.

이전에는 몰랐다. 사랑받으려는 욕구보다 큰 게 사랑하려는 욕구임을.


내가 주는 걸 최대한 흘리거나 튕겨내지 않고, 가능한 오롯이 받아낼 수 있는 사람.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정말 인연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더러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치졸한 이별과 유치하고 눈멀었던 사랑을

겪고 난 뒤에도 결국 난 변하지 않았다.

참 니가 고생이 많다. 입으로만 친구찾는 녀석들에 낚여서 정선에 훅 떨궈져서는, 잘못 찾아간 펜션에서

박대당하고 신종 꽃뱀에 물려 바지까지 털리고, 과잉친절을 베풀고는 바지를 벗겨내려는 아저씨를 만나는가

하면 기껏 만난 친구 녀석은 전 여친과 잤다는 고백이라니. (비록 오해가 풀려 전 여친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는

'충격적 반전'이 있지만, 그닥 고백의 강도가 떨어지지는 않는 거다.)


실은 이 녀석,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선에 놀러가자는 친구들 꼬드김에도,

경포대에 가서 바다라도 보라는 친구 권유에도 항상 반문하는 거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지?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놓인 곳이 변한다 해서 현실이 변할리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요 괜한 돈 낭비하며

멀리까지 나가봐야 돌아오면 똑같다는 실리적인-냉소적인-계산이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짧막하게 줄여 말하자면 거기엔 술이 있었고, 거기 가서는 술을 마실 일만 있었다. 그 고생들, 무려 오박 육일에

이르는 대장정에는 늘 술이 있었다. 정선에 도착해 처음 들어선 해장국집에도, 티비와 함께 하던 허름한 펜션

방에도, 경포대의 횟집과 어딘가의 여관방에서도. 술은 사람들과 처음 얽히는 단초가 되기도 했고, 혹은 이미

설켜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까칠하게 보자면 꼭 술이 있어야 사람들과 말을 트고 관계를 쌓아나가느냐, 형님아우하며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냐, 등등 눈살을 찌푸리며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녀석이

근 일주일 동안 주종 가리지 않고 마셔댄 결과 몸도 축나고 나중엔 술잔도 기피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음주문화를 선도하려는 의도 따위도 없을 거고 말이다.


다만 그냥 오감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여행이 땡기고 술이 땡기고 또 새로운 인연이 땡겼다.

주인공 혁진이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려는 찰나, 벤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오는 설레는 가능성의 그녀.

그녀와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들이 강릉으로 함께 떠나 술을 마시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다소

들뜨고 경계심이 풀린 그들, 여행 중인 그들, 음주 중인 그들, 그리고 새로운 인연 앞에 설레어하는 그들이다.


왠지 여행과 술과 인연을 굉장히 설득력있고 강력한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는 삼위일체의 신비.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지만 역시나 술이란 '황홀한 마취와 각성의 액체', 상대와 자신의 마음/몸을 무장해제시키고

피가 들끓게 만드는 그건..곧 여행,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과 통하는 거다. 혹 그가 지금 눈앞의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디메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어디론가 흐르는

그 골목길 어귀 어디메쯤에서라도 인연은, 그리고 술집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다만 '숙취'는 조심할 것. 혼자 떠난 여행에서 김빠진 기대감만 발로 툭툭 차며 돌아오는 일이란 건

부지기수인 데다가, 더러는 '변태'도 만나 단돈 육천원에 몸값을 흥정해야 하는 굉장히 유니크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도 쌓이기 마련이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