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선수재 및 배임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그가 조중동, 혹은 동조중의 엄호를 받아 보석으로 나오곤 두번째

공판이었다. 대각선으로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검버섯핀 왕년 깍두기 스탈의 할배가 정몽구인줄은 몰랐다.

그는 포승을 차지도, 병원복을 입지도 않고 방청석에 앉아 있다간, 특별히 제공된 푹신한 의자에 앉아 네명

피고인 중의 수괴임을 자랑했다.--;


검찰은 변호인단이랑, 증인이랑 싸우고 있었다. 초동수사 쯤에 어설프게 뱉었던 말들의 사전적의미를 잘

주물러서 방향을 바꿔보려는 증인들의 '잘 기억이 안납니다', '모르겠습니다' 랩소디. 현대우주항공을 왜

두차례나 증자했는지, 0원으로 평가받은 주식을 왜 5000원으로 몇백억어치씩 발행한건지, 그대들에게

구조조정이란 결국 '청산'의 다름아닌 말이었는지, 정몽구는 자기 개인빚을 왜 계열사에 떠넘긴건지, 하나도

풀리지 않는 신비. '절차적 정의'를 찾는 과정은 너무도 지난하다.


네 시간동안 에어콘도 안 나오는 답답한 법정에서, 어디 장례식에 온 양 깜장양복쟁이 현대맨들이 우글우글한

사이에 껴서, 선배가 시킨대로 말하나 빼놓지 않고 다 적고 있으려니 문득 한심해졌다. 아무 알맹이도 없는, 이미
 
모든 신문들에서 몇번씩 우려낸 이야기를 왜 이렇게 소중히 받아적고 있을까. 펜도, 종이도 아깝단 생각.

증인이랑 변호인이랑 입맞춘 게 뻔히 보이고, 논리도 어떻게 끌고 갈지 뻔히 보이는데-국가 경쟁력 운운..-왜

여기서 웃기지도 않은 개그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하고.


신문은 '일용'할 정보를 판다. 유효기간은 하루. 만물은 유전한다. 며칠전까지 현직이던 조부장판사의 법조비리

이야기로 며칠째 시끄러웠지만, 계단형의 진보를 무작정 믿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기둥을

휘감고 뺑뺑이치고 있고, 신문에서 다루는 사건, 사람, 논조, 모든 건 무성생식중이다. 기자란 건, 참 허무할 거

같다.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글나부랭이로, 무엇을 전하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서래마을같은 엽기적인

사건도 몇년 전, 또 몇년 후 마주칠 사건. 정몽구의 보석, 그리고 웃기는 공판도 몇차례씩 보아온 그것. 데자뷔는

뇌의 작용만이 아니다.


하루살이에게나 소중한 게 신문아닐까. 어쩌면 지금 중요한 건 무슨무슨 사건..이 아니라, 도돌이에서 다카포로

무한반복하는 리듬이다. 신문이 죽는 이유는, 더이상 new's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본 기사, 어디선가 본 말투. 아마도 예측가능한 결말. 재미없다. 원심력이 필요하다.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 늦잠 좀 자고 동생데릴러 드라이브 좀하고 '시월애' 좀 보고 천호동가서 친구들이랑

양주먹었더니 다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인턴시작하고 매일 술을 먹었다. 거의 모든 점심, 저녁마다 반주삼아

마신다는 술이 몇병씩으로 늘어났으니. 술자리의 즐거움이 조금씩 소실되며 '술자리'가 '일자리'로 변질되는

느낌이 짙다. 이것도 '음주'로부터의 소외 현상인겐가.


법조팀으로 옮긴 후, 대검찰청에 견학을 다녀왔다. 인천 가월도 어린이들과 함께 둘러본 대검 내부에서, 검사와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푸근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여검사는,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감옥가는 거요, 오리걸음이요, 토끼뜀이요. 어디선가 사형이요, 라고 머리굵은 대답. 검사는 반가워하며

그렇담 사형이 뭘까, 하고 꼬리를 물었다. 선뜻 대답을 하지못하는 아이들. 이제 검사가 곤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형이란 건, 사람을 죽이..도록 시키는 일. 이란 게 그녀의 늦은 대답이었다. '사형'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이토록 단순한 설명을 쉽게 내뱉지 못하는 건, 토끼뜀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아이들에게 도무지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였으리라. 어쩌면 사형을 합리화하는 지반이란 게 생각보다 약할지도 모른단 기꺼운 생각.


법조팀가서 처음 마주친 사건은, 최근 대법원과 대검찰청 간에 굵은 갈등선을 그은 '김홍수 브로커관련

조부장판사 건'이었다. 마지막 남은 성역이라 칭해질 만한 중진급 판사, 브로커, 고위직 출신 변호사가 얽힌 수뢰

사건인지라 검찰로서도 쉽지 않았던 듯. 대검 3차장검사와의 언론브리핑에서 칼을 품은 말들이 소득없이

날라다니는 것을 보고, 그날 저녁 조부장판사의 '정치적인' 사표가 수리되고 바로 선배기자와 전화인터뷰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음..결론적으로는, 불쑥 터져나온 법원의 치부를 가능한 이뿌게 봉합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판검사간의 갈등도 다시 잠복.


에어콘도 시원찮고 천장만 휑뎅그레한 법원건물은 참 위압적이다. 기자 생활 10년까지는 자신이, 자신의

취재원과 동류인 거라고 착각하고 거들먹거린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높으신 분'들과 함께 밥을 먹다보니, 그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난민촌같이 부산스럽고 정신없는 기자실로 돌아가면 조금

정신이 들려나..매일같이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는 게 무지 힘들다. 원래 여름엔 나시에 쪼리 하나 찍찍 끌고

다니는게 젤인데..ㅠ.ㅠ

"신문은 싸우면서 만드는 거다."

국제부 선배기자가 했던 말이다. 동아일보에서 국제부란 공간은, 귀양지랄까, 다소 소외받고 있는 곳 같다.

정치부에 있다가 노무현 탄핵사태때 미운털이 박혀서 떠밀린 선배. 신문은 싸우면서 만드는 거라면서,

동아일보에 굵게 그어진 균열선 하나를 보여준다. 평기자들 대 데스크 윗계급 사이. 사회부에 왔어도 마찬가지다.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있는 선배들도 동아일보의 '삿대질'같은 기사들을 보고 아연해한다.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동아일보'란 덩어리가 내부의 다양성을 무시해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히 그어버린

전선은 많은 것들을 지워버린다. 요샌 젊은 기자들이 동아일보 데스크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알아서' 골라

쓴다는 것, 세무조사때 조선과 중앙의 개뻘짓과는 달리 동아는 기자총회를 거쳐 아무런 조직적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부서가 관할하는 기사에는 전혀 서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fact를 다루는

기자는 결국 기능인에 불과하다는 것.

눈높이를 어디에 맞추냐에 따라 새로운 문맥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인턴기자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한겨레만 보며 감정적으로 치닫고 아주 순진하고 이상적인

편향성을 가진 대학생" 정도랄까. 선배기자들과 말을 섞으면서 계속 부딪히는 편견. 생각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대학생이라고 덩어리짓는 힘보다 갈기갈기 찢는 힘이 클지도 모르는데. 확고한 ready-made의 시각이 편할지는

몰라도, 공허해질 뿐이다. '구호'에서 '구체'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동아일보 국제면은 해외토픽인가.

 조금이라도 한국에 관련된 기사는 다른 지면으로 넘어간다. 여타 신문도 마찬가지지만, 동아일보의 국제면은 특히 그렇다. 포차 떼고 장기두는 격이다. 미일-중러의 군비 경쟁,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정치면에서 다룬다. 북한, 독도문제는 정치, 사회면, 그리고 동원호는 사회면이었다. 오늘자 발제를 봐도 그렇다. 사실의 선택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점은 알지만, 국제면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대체로 무미하다.

 국제부에서 종합면이나 사회면을 빌어 쓰는 기사는 그렇지 않다. 동아일보는 국제면을 약간은 진지한 일종의 해외 토픽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국제부 기자는 국제면과 일반 지면을 오가면서 기사를 쓰는 것이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지적은 무의미해지겠지만, 국제면 자체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가.



사실을 꿰는 바늘은 누가 쥐고 있는가.

 국제면에서 기사화된 ‘미국’, ‘레바논’ 등의 먼나라 이야기들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의미를 던지게 된다. 스트레이트성의 기사들은 나름대로 깊이 있는 이해와 전문지식을 가지고 쓰여졌고,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사실들을 꿰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국제부 외부의 칼럼진이나 논설위원이고, 아주 가끔은 ‘기자의 눈’, ‘광화문에서’를 확보한 국제부 기자이다.

 동아일보는 국제부(라는 정체성이 존재하는지는 차지하고라도)에서 그러모은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고정적인 공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동아일보의 정견과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조율이야 불가피하겠지만, 동아일보가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스펙트럼 내에서 국제부 기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에 나서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과 해석이 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이 바로 언론들이 논조를 세련화하고 서로 소통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초석이다.



여전히 특파원이 필요한가

 인터넷을 통해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오늘날, 특파원은 해당 지역의 뉴스에 대한 우선 접근권을 상실했다. 특파원에게 남겨진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현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생함을 기사에 투영하는 것이 하나이고, 해당 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취재를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특파원 제도는 그러한 문제 의식없이 구태의연하게 운영되는 것 같다.

 지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파원을 보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단기 특파원 제도를 활용하거나 현지 언론과의 제휴를 강화해서 현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파원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마치는 개인적인 소회

 신문은 더 이상 신속성이나 가독성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굳이 신문을 찾아보는) 독자들은 수준도 높고 관심도 크다. 역피라미드형의 우람한 기사틀은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를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흔히 칭하지만, 인턴을 해보니 그보다는 ‘사실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아직까지는 적절한 듯하다.

 국제부의 인턴 프로그램이 참 좋았다. 기자를 본격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본격적인 기자 훈련보다 이곳의 분위기와 개략적인 이미지를 얻는 것이 훨씬 유익했다. 그리고 이아무개 선배, 김아무개 선배를 비롯한 국제부 기자들도 인턴기자를 귀찮아하지 않고 살갑게 챙겨주는 것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점심시간에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뉴스브리핑 갔을 때 이아무개 선배가 점심은 어떡할 것인지 네 번이나 전화를 해서 챙겨줬던 것이 제일 가슴에 와닿았더랬다. 부장님, 이아무개 선배님, 김아무개 선배님의 술 약속도 잊지 않고 있다.



하나 더.

 동아일보는 보수지다. 이는 위험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은 말로 들려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두 주간 하면서,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많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던 ‘동아일보’라는 ‘공기’는 이제 나름의 내부 동학을 가진 ‘기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보수적인 논리와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이 ‘기업’의 영업방식이다.

 다행인 것은, ‘찜질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질방 기사를 쓰더라’는 인턴 동기의 이야기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국제부의 선배기자들은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어서 좋았다. ‘보수’, 혹은 (상대적인 개념어로서) ‘좌파, 우파’라는 단어가 거부감없이 쓰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동아일보를 바란다.

아침뉴스에 나온 이명박 인터뷰에 깜짝 놀란 구절이 있었다. 대통령이 된 지금 더이상 국내엔 경쟁자가 없으며,

이제 자신의 경쟁자는 해외의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이야기. 이들과 경쟁해 대한민국을 선진 일류국가로 만드는데

매진하겠다고 밝혔다는 거다.


얼핏 듣기에는 모든 걸 '오해였다'고 발뺌하는 귀에 익은 그의 레퍼토리만큼이나 진부하고 천박한 그냥 그런

거라고 넘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미 대한민국의 경쟁상대는 세계라느니, 기술자, 노동자, 학생 등 국민의

경쟁상대는 외국의 기술자, 노동자, 학생 등이라는 식의 공익광고는 이미 셀 수 없이 쏟아졌던 데다가,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통한 공공선의 창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편리한 '상식'이 되어버린 상황인 터이다. 그렇지만,

뭔가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그게 대체 어떠한 종류의 불편함이었는지 하루 내내 찝찝한 기분을 되씹고

말았다.


교과서에는 아마 정치를 무엇보다 사회적인 합의를 창출해내고 민생의 안정, 국민의 공공선을 위한 절차와

내용이라고 할 게다. 혹 교과서와 현실이 따로 굴러가는 세상이라 해도, 최소한 한국에서 바라는 정치의 '政'자가

'正'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도덕성과 정의를 의미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제가

우선이네, 실용주의가 우선이네 보수언론이 까불어대도 그에 더한 도덕적 잣대는 이미 지난 몇년간 크게 상승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나 인사 검증의 번번한 파열음은 어느새 높아진 국민/언론의 잣대와 지체된

기존 인물군과 '갑'의 인식간 괴리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두 부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공선을 창출하는 것과 사회 정의와 건전한 '상식'을 수호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 했을 때 일단 이 부분에는 경쟁의 이미지가 들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더구나 그 자리가 일국을 감당하고

상징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임에야. 그건 정치지도자가 외국과 경쟁할 부분이 아니며, '다스리는(治)' 차원의

것이지 경쟁과 평가를 위한 객관적, 계량적 수치가 크게 대두될 수만은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경쟁과 서열매기기를 위해서는 숫자놀음이 필요하다. GDP가 얼마로 늘고, 대운하로 인한 고용유발이

몇만명, 경제효과 몇백억, 한미FTA로 시장이 얼마어치나 늘고, 그 모든 걸 귀결시킨 한국의 국제경제력 순위는

몇 단계 상승했다는 등의 지표. 정치라기보다는 경제, 정부라기보다는 기업에 적합한 마인드..

IMF 이후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를 거쳐왔고, 새삼스레 정치의 본령을 말하고 경제적 이슈-성장과

발전제일주의랄까..-에 경도된 정부를 지적하기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경쟁상대를

언급하며 결의를 다지는 것은 나름 충격이었다. CEO형 대통령을 자처한 MB에겐, 성과와 수치로 이야기하는

기업의 생리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는지 모르지만 내겐 아직 정치라는 게,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갖는 다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M 컨설팅사에서 2차 인터뷰를 보고 왔다. 1차 인터뷰는 한 번, 2차 인터뷰는 두 번, 3차 인터뷰는 세 번. 거기에

서류심사와 Critical Thinking Test란 90분짜리 객관식테스트를 합치고 다소의 허세를 섞으면 총 여덟 차례의

관문이 뿅.하고 나타난다. 사실은, 2차와 3차에 진입하면 어쨌건 2번, 3번, 인터뷰를 본다는 점에서 관문은

다섯 개다.


케이스 인터뷰에는 나름 적응도 되었고, 살풋 즐길 줄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여름에 RA 정해질 때

인터뷰어가 워낙 칭찬을 해줬던 탓이다. 어떤 방식으로 현상을 쪼개고 접근할지를 먼저 가늠한 후에, 서늘한

큰칼로 고래를 해체하듯이 덩어리덩어리 떼어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사전 설명과 목차 제공도

필수. 마지막으로는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떠한 차이점이 생겨났을지, 어떠한 근거로 그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게 된 것인지 한마디 언급해 주고. 실제 접하게 될 사례들의 축소판과 같다고 얘기되긴 하지만, 일종의

지적 유희랄까..현실을 너무 쉽게 설정해놓는 찻잔 속 폭풍, 그런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문제는, 아주 커다란 문제가 나왔었다. 더구나 인터뷰어가 직접 맞닥뜨려 다뤘었던 문제였던 데다가, 예기치

않은 영어면접이 이미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 후였다. 문제는, "샌드위치 위기에 처한 한국 제조업중 한 개사가,

1) 노동인력의 의욕 상실, 2) 노조와의 단체교섭 결과 인센티브 및 상벌제도 무력화, 3) 노동 독려를 '노동착취'와

동일시하는 노동자의 의식'수준'에 처해 어떻게 노동생산성을 제고할 것인지"였다...그걸 알면 내가..ㅡㅡa


어쨌던 답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논리를 세워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니까..노동생산성은 노동력

인풋 대비 아웃풋 이라고 정의하고 시작했다. 그치만 문제는, 아무리 라인을 재배치하고 설비에 투자하고
 
서베이를 통해 발굴한 새로운 인센티브 요인을 활용하고 등등을 하더라도, 노동 강도의 강화는 피해갈 수

없다는 것. 인터뷰어의 말을 빌면, 노조가 기업의 '팔다리를 꽁꽁 묶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해 낼 방법을 찾으라는데, 도무지 각이 안 나왔다. 내가 한시간동안 몰입해 있던

그 관점에서는, 노조는 기업의 성장, 한국 경제의 성장을 질곡하는 족쇄 바로 그자체였다.

한국 경제성장사의 이면에 드리워진 역사적 부채, 심화되는 경제적 왜곡, 한국경제의 시스템적인 문제, 그런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혹은 계보적인 이야기들은 당장의 market share, 이윤율 제고에 아무런 힌트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현학적인 주제일 뿐. (기업의 생리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생리란 그런게다.)


현장에서 삼개월 동안 작업복을 입고 직원들과 함께 했다는 그 인터뷰어는, 쥐어짜낸 몇 개의 내 아이디어들을

전부 블로킹해 버렸다.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아니며, 당장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플랜이 필요하다고 했다. 궤멸.

치사하다, 막판에 대안 하나를 고수하려다 둘 사이에 첨예한 기류마저 흘렀지만..끝내 남김없이 격침.

다소 공격적이고 현장의 느낌을 중시하는 듯한 그 인터뷰어에 대한 반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 답을

찾아내어 이후 꾸준한 노동생산성 향상을 이뤄냈다고 얘기할 땐, 살짝 적개심마저 들었다. 제길. 대체 답이 뭐냐.

정말 찾긴 찾은 거냐.


완전히 지쳐서 나와버렸다. 쥐잡듯 농락당하고 무시당한 느낌. 여유가 없어보인다는 피드백은 내게 흔치 않은

것이었고, 뭣보다 자평컨대 1mg의 분석력도, 여유도 자신감도, 지력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사상 최악의 인터뷰.

정신 좀 차릴라고 에스프레소 투샷을 마시면서도 쓴 맛도 못 느꼈다. 압박이 너무 강했고, 영어 면접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않은 탓에 압박이 더욱 커져버렸댔다. (아직도 취업준비생 자세가 덜 된 거라고, 궁시렁궁시렁.)


그나마 믿고싶은 구석은, 면접 첫 오분간이 무엇보다 결정적이라는 항간의 소문. 그에 발맞추어 몇마디 차분함과

스마트함을 가장하는 말마디들을 준비했던 것. 일테면, "시작하기 전에 제가 따로 준비해온 레쥬메와 필기구를

꺼내도 되겠습니까." 뭐 이런..-.ㅡㆀ 그리고, 2차니까 아직 한 차례의 기회가 남아있단 것. 평균을 내던 합의를

하던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 맘대로 하던 간에..한 차례 더.

기록 지침: 위대한 항로에서 항해할 때 항해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섬의 자기를 기록해서 그 자기의 방향에 따라 각 섬을 들러가며 항해해야 한다. 기록 지침이 없다면 위대한 항로에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영구 지침: 기록 지침과 달라서 한 번 섬의 자기를 기록시키면 그 지침을 어디로 옮기든 반드시 그 섬만을 가리키는 지침.

- 원피스 단어백과사전 中 -



그러고 보니 이곳은 여전히 '어디든 되거나 어련히 잘 되겠지'라던 불과 한달전의 마인드의 기록에서 멈춰있었다.

실은 이미 '어련히 잘 된' 홀가분함을 느끼는 목표상실의 멍청한 상태를 지나,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나 라는

긴장감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상태랄까.

연말의 싱숭스러운 분위기를 핑계로 맘껏 늘어져서는 무슨 말로 자신을 추스리기 시작해야 할지 엄두를 못내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새 최초의 홀가분함은 퇴락하고 새로이 부딪힐 문제, 선택들이 정신차리고 진지해지라고

재촉하고 있으니.



수십여 곳에 지원을 했고, 하이바도 안 씌워주는 퀵서비스를 타고 시속120을 넘나들며 가능한 선택지를 넓혀

보고자 욕심을 부렸다. 세달동안 온갖 업종의 기업들 앞에서 내가 했던 말과 보였던 행동은 팔할이

'내숭'이었으며, 04년 이래 늘상 껴왔던 반지를 빼는 행위나 한미FTA를 찬성한다는 프리젠테이션, 혹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친구와의 선약 대신 회사를 택하겠다는 대답들이 전부 그러한 내숭..혹은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꼭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사실 '꼭 가고 싶은 곳'이란 단어로 내가 여태까지 지시해 왔던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선망하던 삶을 이뤄줄 것 같은 레디메이드 형태의 틀이었는지 모른다. 어느정도의 진보성을 두르고 중상류

이상의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미국보다 20-30년 늦은 한국에서 2010년쯤 대박예감의 '보보스'족이랄까.

그치만 그렇게 헐겁거나 만만한 선택지는 없었다. 물질적/비물질적 '보수'와 자신을 위한 '여가'라는 두 측면은

여지없이 상충했으며, 나자신 이미 88만원 세대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정말 뽑아줘서 마냥 감사할 뿐인 일개

구직자였던 거다.



엊그제 동아일보 인턴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랑 같이 인턴면접을 봤던 친구가 그때 많이 놀랐노라는 얘기를

했다. 내 빤짝이는 귀걸이를 보며 면접관이, 직장에 들어갔을 때 그걸 빼라 그러면 어쩔 거냐 그랬더니 내가

그랬댄다. 그 정도의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조직이라면 안 가겠다고. 전혀 잊혀졌던 기억이었다. 음..지금까지

내가 의지해온 것들은, 기록지침이었던 걸까. 어딘가 도착하면 도구로서의 효용을 다하고 버려질 뿐인. 갈지자

행보를 부추기는 기록지침말고..흔들리지 않는 영구지침을 한개쯤 품고는 있는 걸까. 나 자신에 대한 혼란.

협소한 정치적 지형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부하게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혼란.



오늘 우연찮게 중경삼림을 다시 봤다. 당신과의 기억을 통조림에 담는다면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만약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대사. 그 대사가 먹히는 이유는, 대다수의 기억은 편리하게도 유통기한이 파인애플

통조림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일 거다. 사랑과 삶, 영구지침과 만년짜리 기억. 한살 더 먹는다는 따위로,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는 따위로, 그걸 찾는 '척'만 하게 되는 건 싫다.

'정신'이라는 부분에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든 게 전적으로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말하는 건 과할지 몰라도, 그로부터 정신분석이라는 '과학'이 출발한 건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고찰하고 분석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정신 자체에까지 뻗어가 체계를 갖추고, 인과(내지
 
상관)관계를 발굴하고..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과 정신세계 자체를 분석 대상에 올렸다는 점에서, 자칫

외부 세계의 존재 그자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극한의 지적 탐험이랄 수 있겠다.


흔히 정신이라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것이 실은 의식의 얇은 표피 이면에 광대한 무의식의 세계(그의 후기엔 이드,

에고,슈퍼에고로 나누기도 하지만..)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 꿈이나 히스테리, 혹은 예술가의 승화된

작품세계에서 순치되거나 굴절된 형태로 그 무의식이 나타난다는 것 둘, 그리고 의식의 세계, 혹은 문명의 세계가

압박하고 있는 그 무의식 혹은 원시적 세계의 본령인 원초적 성적 본능(리비도)의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 셋.(물론 융 같은 경우는 무의식의 본령이 성적 본능에 있다는 전제에 문제제기를 했다지만)


모든 문학작품에서 '발견'해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보이듯 모든 것을 성욕의 충족 내지 표현으로

환원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유아기의 성욕과 그로 인한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후

삶의 방식들에서 확장된 은유로써 유추해 내는 건, 어쩌면 일상의 권력관계의 양태를 뭐랄까, motherous and

fatherous(이런 단어가 있다면)의 두 대표적 형식으로 대별하는데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정치학으로 평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잡생각.


우야튼 이런 점에서, 무의식이 단지 유아기의 성적 욕망으로 결정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융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만인은 무의식 앞에서 평등하다." 만약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란 당위적이기만 한 속빈 선언의

내실을 채우고 싶다면, 아마도 "무의식 앞에서'라는 한정적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모나리자를 그려낸 다빈치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리고 히스테리를 앓거나 개꿈을

꾼 갑남을녀도, 무저갱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욕망의 발생/저항/충족(혹은 왜곡된 충족)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어미의 젖을 탐욕스럽게 빠는 어린애의 욕정, 한용운도 어디선가 애타게 불렀던 '우리

누이'에 대한 은밀한 애정, 다빈치가 그려낸 불쾌한 '어머니의 유혹하는 미소'(@ 모나리자).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인데다가, 세상을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풍요로운 만화경이다.

원하면 사서 끼고, 싫음 말고.

예술, 문학, 정신분석 - 8점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오늘도 점심때 소주, 저녁때 소주, 그리곤 맥주로 입가심..했더니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종점에 사는 것이 좋은 점도 있구나 싶었다. 선택지를 버리면, 맘편히 잠들 수 있다. '저, 여기서 내려요' 정도의

대사가 방해하지 않는한, 여닫히는 문과 그 밖에 펼쳐진 풍경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1) 일개미가 쉴새없이 먹이를 실어나르듯, 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루짜리 fact를 주워모은다. 자유롭다고도,

자유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박이 만만해보일 수도, 혹은 이미 자기검열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일정한 수준내에서 자신의 입맛대로 상큼한 먹잇감을 골라든다.


2) 이른바 데스크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무엇이 'new's인지, 어떤 것이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이성적으로 결정된다. 찜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방기사쓰듯.


3) fact는 언어로 짜여지기 시작하고, 그럴듯한 레테르로 포장된다. 글말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단어를

배치하고 뉘앙스를 얹어주며 아웃복싱의 쾌감을 느끼다. 어디에 힘을 실어줄지 결정하는 정교한 구조물. 물론,

스트레이트성 기사는 역삼각형의 흉칙한 바디.(이제 신문을 읽는 독자가 신속성, 가독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 문체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4) 기사의 표현과 호흡이 유지하던 아슬아슬한 객관성의 외피는, 논설과 칼럼에서 화려하게 재정렬된다. 무질서한
 
듯 뿌려져있는 철가루를 바싹 긴장시키는 강력한 자기장. 기사면에 헐겁게 매달려있던 구슬들을 꿰맨 바늘은

누군가에게 날아가 꽂힌다. 조선의 계륵, 동아의 '약탈정부', '노무현조크' 따위 유치한 삿대질,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유아틱한 정부의 막말은 차치하고라도.


0) 애초, 객관성은 무리다. 기자들은 사실 기능공이다. 누추한 현실을 재단해서 뭔가 있어보이게 짜깁기하는

바느질공. 아니, 기자는 단지 한 땀만 꿰매는 건지도 모른다. 각자가 가진, 서로 구태여 확인하며 맞춰볼 필요없는

정향에 따라서 허용된 한땀을 꿰맨다. 삐뚤빼뚤하게 엮여나간 실의 궤적은 때론 비둘기를, 때론 매를 그린다.

혹은 정신나간 art brut일지도.



...'동아일보'라는 덩어리를 깨서 보기 시작했다. 80년대 해직기자들은 아무러해도 결국 무능력과 비사교성으로

짤릴 처지였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지식인의 군기'를 요구하는 선배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5시가 다가오면 죽을듯 괴로워하며 헛구역질하듯 글을 토하는..안쓰런 족속인거다.

하지만 사회에 버티고 선 건, 동아일보 기자 누구가 아니라 논설과 칼럼을 두른 동아일보 덩어리다. 대체

마이크를 쥔 건 누군가. 기자에게 쥐어진 건 고작 외마디 fact를 울리는 캐스터네츠 아닌가 싶다. 짝. 짝. 짝.

누군가가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아, 물론 모든 신문은 정향이 있어야 한다. 동아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언론'의 문제. 1인 1매체가

불가능하다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괴리감의 존재. 게다가 잔뜩 우그러진 정향이라면야.

이번주는 아시아재단이나 ICG같은 곳으로 인터뷰 반, 견학 반 다니느라 상당히 바쁘게 지나갔다. 내일은

저번주부터 추진했던 이스라엘 대사와의 인터뷰. 첨에는 사실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대사랑 인터뷰해봐야 동아일보 지면을 이스라엘 찌라시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런저런 기사를 찾아서

사전 조사를 하다보니 이자식..생각보다 매콤하다. 국제부 선배가 오늘 중동 문제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해줬는데, 딱 그만큼 매콤하다. 이스라엘은 '영토와 평화'를 교환하고자 하며 성경이 점지해준 땅에 조용히

살고 있는데, 테러단체들이 숨통을 졸라온다는 거다. 사실의 채택조차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새내기 교육하듯'

그리도 강조하던 기자들이 정작 균형을 잡는 건 레바논이 '제대로 된' 주권국가가 아니라서 주권침해가

성립되는지가 애매하다는 지점이다.


당하고 있는 사람이 착할 거란 건 환타지다. 장갑차에 치었다고 갑자기 '순결한 애국처녀'로 둔갑하는 건

코미디다. 하지만 똑같이 테러로 맞대응하는 이스라엘이 '평화, 사랑' 운운하는 건 혐오스럽다.


질문지 위의 번호 붙은 것은 선배들이 선정해준 질문에 내멋대로 살짝 시즈닝, 그리고 #표시는 내가 묻고 싶은

것들. 대체 이게 기사가 어찌 나오려나......또 내 질문은 짤려버리는거 아닌지.

음음...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도 보수적이다. 의외인 건, 프레시안 편집부장이던가...가 동아일보의 전직

국제부장이란 사실. 인턴을 조금더 일찍 왔어야 했던가.ㅋㅋ


1. 이스라엘은 이번 사태를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은 자위권이 갖추어야 할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는 대응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2. 이스라엘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어린이나 노약자 등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 헤즈볼라와는 관련이 없는 일반 주거지나 사회 기반시설에도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이스라엘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3. 이스라엘 총리가 이란을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는 등 점차 대립구도가 아랍권 대 이스라엘의 구도로 변화하고 있다. 헤즈볼라를 무력화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장이 기타 지역(시리아나 이란)으로 번질 수도 있는가.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는 한 전장이 두 나라로 확대되지 않는다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전황이 장기화되는 경우에도 이는 유효한 약속인가.


4. 이스라엘은 현재 레바논에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휴전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분열되어 있는 레바논 내각은 헤즈볼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레바논 남부를 무인지대화하거나 다국적군이 주둔하도록 구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번 사태의 궁극적인 바람직한 해법은 무엇이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 레바논의 유엔 감시단원들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초소가 파괴되기 전까지 6시간 동안 무려 10차례나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이스라엘군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사무총장도 이를 고의적인 공격으로 규정하며 규탄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은 무엇인가.


#.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작전으로 헤즈볼라가 약화되면, 비록 레바논이 치르고 있는 희생과 대가가 크지만 레바논 정부의 주권 행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향해 수행했던 비대칭전쟁의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가 점유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단시간 내에 현장을 장악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벌어졌던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 사실 여부를 떠나 노르웨이 등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미 여론과 함께 반유대 여론도 대두하고 있다. 올해 3월 주한 이스라엘대사도 연세대 채플 시간에 강의를 하던 중 강한 반발을 샀던 일이 있는데, 한국 대중들의 반유대 정서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강연 도중 아랍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하고 민주주의도 전혀 모른다는 등의 아랍권 비하 발언)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이어 정권마다 반복되던 독도 문제가 곧바로 불거져 나왔다. "2MB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독도 괴담'을 방불케 하는 <요미우리>의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사안 자체의 심각성은 독도 문제를 금세 여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또, 대북문제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정부는 이번만큼은 '건수'를 잡은 듯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독도 괴담'의 주인공인 만큼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 꽤나 가상하다. 하지만 역시 '2MB'는 역시 '2MB'다.
 
  청와대는 <요미우리>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내분을 획책한다며 비난했다. 동시에 독도 문제로 맹공을 퍼붓는 야당에 대해서도 '자국 정부보다 일본의 우파 신문을 믿고 대통령을 공격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국민보다 극우 언론을 믿는 정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2MB를 제외하곤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같은 날 나온 다른 보도를 보자. 2MB 대통령은 지난 15일 부산시 업무보고 및 부산 발전전략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우(內憂)는 하나가 돼 극복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초점을 잠시 '공화국 북반부'로 돌려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 정부와 언론의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지도부와 인민을 분열시키려는 음해공작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북한의 식량위기는 미제의 고립 압살 책동 때문이니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전 인민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에 핵 문제를 제기하는 남한의 '동족'에 대해서는 모두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하고 있다.
 
  극적인 비교를 위해 다소 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다. 외부의 적과 어려운 환경을 설정하고 그것을 빌미로 내부의 총화단결을 호소(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하는 수법은 나치 이래로 전체주의 세력들의 고전적 수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아군'의 악덕을 비판하는 내부 구성원들은 '적군'을 이롭게 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숙청 대상이 된다. 일본 재단의 자금을 지원받는 낙성대 연구소-노파심에서 말하자면 필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친일적'이기 때문에 매도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보다 일본 언론을 인용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민주당이 '국가의 반역자'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수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부터 반대세력에게 '반미 민족주의 진보'로 낙인찍힌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한 대일발언과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을 통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는 반대세력이 자신에게 붙인 딱지를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참여정부 때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사회 각 계급을 재편했고, 이에 따른 불만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다. '국익'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정치적 논란을 종결짓고, 잘못을 전가하는 보도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친일세력'으로 규정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 민족의 해체를 주장해 대표적 '친일세력'으로 인식되는 '뉴라이트' 세력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2MB 정권의 총화단결 호소는 참여정부가 자극한 민족주의 정서와 맥락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극한 민족주의 역시 '선진 국가'를 위한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2MB의 노골적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 포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2MB의 딜레마는 자신은 끝없이 국가주의를 강조하지만,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종족담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족주의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MB 정권은 국가주의를 향한 질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다.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해 신중한 대응을 주문-금강산 문제에 대한 쌍팔년도 식 발언을 보자면 특별히 성숙한 정세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념적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언론을 보라", "여야도 없고, 진보-보수도 없고 모두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는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안에다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이 노골적으로 총화단결을 호소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외치면서도 마치 외부의 적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것인 양 대내적 단결을 호소하는 것은 다소 형용 모순 같다. 과연 무엇을 위한 총화단결일까?
 
  이러한 모순된 국가주의 드라이브가 계속된다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두 얼굴이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MB 정권은 '우리 민족끼리'에 대한 반명제로서의 친일, 친미적 보수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종족담론을 끌어들일 수 없다. 또 2MB 정권은 참여정부의 '황우석 현상' 같은 국가지도자와 민족의 구세주가 일치하는 통일된 내셔널리즘도 확보할 수 없다. 그렇지만 2MB의 대외정책 실패와 일본의 우경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 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2MB의 우군보다는 대항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촛불이 시작된 이래 '민주-반민주'의 구도로 나타났던 대립구도가 10년을 더 후퇴해 '매국노-민족'의 구도로 전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구도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2MB 자신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당부분 위험한 조짐이 보인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도 관광 붐이 일어나고, 독도 관련 영화가 개봉되고, 독도 관련 법안들이 무더기로 발의되는 '독도 마케팅'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촛불시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막연하게 표출된 내셔널리즘은 독도라는 구체적 대상을 만나 본격적으로 발현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는 양자가 서로를 '반국가 세력', '매국노'로 규정하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양자를 포괄하는 내셔널리즘 자체의 상승작용을 유도하며, 이렇게 강화된 내셔널리즘으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립의 발단이 된 내우외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힌 대외정책의 막장은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호소된 총화단결의 끝은 계급지배의 강화로 귀결된, 레이거노믹스의 파탄이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아마 앞으로 2MB 정부가 무엇을 하든 그 태생적 한계와 특유의 촌스러움으로 인해 단결된 국민의 동원에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가 아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지배블록에 대한 도전연합의 저항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전선이 내셔널리즘 내에서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정부가 주권의 두 요소인 대외적 자율성-사실 2MB 정권 하에서는 이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과 대내적 수행력 모두를 상실하는 순간이며 대항세력마저 내용물이 다를 뿐 형태는 같기에 그 미래마저 기약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요구되는 자세는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외교문제를 빌미로 주제넘게 시민사회에 대해 윽박지르는 것을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인 외교에 충실하게 임하고, 시민들 역시 독도관광 따위의 쇼에 열광하기보다는 정부의 외교정책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2MB 외교정책의 문제점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그것을 방치한 건 우리들 자신이다. 사실 우리가 일장기를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 정부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는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독도 관광 한번으로 숭고를 체험하기에는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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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매국노 대 민족'의 구도로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지만-촛불시위에 태극기가 나오고 미국에 대한 불명확한 입장 속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덧대어지면서-독도 문제 이후 더욱 심각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구도로 빠져버려 민족주의 담론내로 포섭되는 순간, 한국이나 동아시아 전체에 상당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

사실 기자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단지, 짜장면 받침이 되더라도 일정하게 확보된 지면을 장악한 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마이크'를 쥔 그들이 부러웠을 뿐.


국제부를 2주간, 사회부를 2주간 하게 됐다. 원래는 국제부 대신 정치부를 가고 싶었는데, 글쎄..암만해도 전공을

감안한 듯하다. 한국에서 '국제면'은 무슨 이야길 해야할까. FTA, 개성공단, 동아시아 군비경쟁과 우익화, 유엔,

북한문제..아니다. 국제면만이 실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얼음축구공을 핥고 있는 북극곰 사진과 어딘가

먼 나라의 축제 사진. 아니면 미인대회 사진?


FTA를 둘러싼 찬반논의가 간과한 건, 이미 한국은 벨트까지 끌러져내린 상태란 거다. 더이상 한나라의

정권이나 시민사회가 독존할 수 없는 세상, 미국조차도. 국제면 폐쇄를 건의해야겠다. 사회, 경제, 정치..살점은
 
모두 뺏긴 채 앙상하게 레바논 넝마 한벌 걸치고 있는 꼴이다. 그것도 경쟁지'조선'이 치는 만큼 따라간 기사.


아니면, 깊이다. 가십거리야 이미 사이버공간에 넘쳐난다. 최근 미국 외교정책의 전환이나, 중동과 유대인의 문제

그리고 약간의 국제정치학적 씨즈닝을 곁들이면 어떨까 싶은데. 글쎄...기사가 한국과 가까워지는 순간 다른

지면에서 요리된다. 조선처럼 적극적으로 국제기사를 '활용'해서 국내 정치를 까는 것도 아니고. 멕시코 대선을

보며 '일자리도 못만드는 정부는 필요없다'는 식.ㅋ


국제부 선배 하나가 그런다. 기사문에 익숙해지면 글을 못 쓰게 된다고. 이건, 어디에서도 잘려나갈 수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글. 우람하지만 정형화된 역삼각형의 근육미는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다. 도마뱀 꼬리처럼 언제고

잘려나간 준비가 된 나머지 글들이 허하다. 속보성이 떨어진다면, 훨씬 호흡을 잘 갖춘 글이 먹힐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하긴, 알고 있었다. 하루치 상식(내지 상식인 양 포장된 교묘한 프로파간다)을 파는 지식 노동자, 먹고

살아야 하는 밥벌이로서의 기자질. 술자리서 부딪혔던 부국장단 아저씨들은 그들이 이미 태반의 삶을 실어버린

동아일보의 이미지와 정견에 대한 신념이 있었지만, 젊은 기자들은 그렇지 않은 거 같다. 뭐..좀더 깊이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어디까지가 그들의 의지였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타협선일까. 땅따먹기 놀이같단 생각이 든다.

선을 그어 자유로이 밟을 수 있는 땅따먹기.

기자가 뭘까라는, 오늘 시작된 인턴 수업 매 시간마다 내게 불편하게 내질러졌던 질문. 사실 그다지 진지하게

뭘까~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어서, 일단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관망세를 취하다. 진리를 구성하고,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고, 머 그런 것들이 짚어졌다. 김학준 사장은 조선 시대의 사관과 언관에 비유를 하기도,

혹은 군사독재 시절 정의의 횃불로 비유를 하기도 하며, 권력에 대해 결연하게 맞장뜰 수 있는 자세를 강조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기자는 어떤 축복을 받은 직업이긴 할게다. 자신의 호기심을 도발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쾌감. 무엇 하나 전문지식을 쌓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자유롭게 알고 싶은 것들을 공부해가며 자신의

발로 눈으로 직접 알고 싶은 사실을 캐낸다는 것. 그저 쏟아지다시피 제공되는 정보에 만족하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입장일 거다.



하지만, 지금이 유교적 기치가 공고했던 조선 시대나, 악과 정의의 구분이 선명했던 군사독재 시대와 같을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되고 나선, 오히려 제멋대로 호명되는 '민주주의'의 허울. 역설적인 이념 과잉의 시대에서
 
'민주주의'라는 둔탁하고 애매한 수사로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확고한 지반은 이미 무너졌다.

도끼를 짊어지고 왕에게 상소를 하던 심정으로 오늘날 언론의 사명을 운위한다는 것은, 내게 다시 황장엽씨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이 중심되는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그의 철학-함이 결국 기대고마는 '민주주의', 그것은

그러나 '미치광이'가 지배하는 북한을 의식해야 하는 한국에서는 의사 민주주의, 곧 반공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채

제기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을 온통 묻어버린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기가 옳다는,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경직성으로 귀결된다. 맞장뜨자라는 도전적 사고. all or nothing의 극단성.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각.



오늘날 기자에게 필요한 건, 진부하지만 똘레랑스 같은 거 아닐까. 물론 자신의 정견이나 의견이 없을 수야

없지만, 그조차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한부분을 구성하는 톱니같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구성되는 진실에

수만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고, 압축성이 생명이라는 짧막한 기사글에 담기는 진실이란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자기 반성..주제 파악. 좀더 경험해보면, 어떻게 생각에 살이 붙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누군가의 잠재력과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결혼하기 전에 미리 좀 살아봐야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듯, 직접 함께 일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타입을 알기가 힘들다.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내재된 능력과 취향을 닥치기 전에는 모르는 판국이니

타인을 비교, 평가한다는 건 애당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결한 활동이다. 어찌됐건 살아가면서 일정한 경쟁이 요구된다는 대전제

하에서, 우리 사회의 경쟁이 얼마나 과다하고 비인간적인지를 차치하고서, 경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판단

기준이 필요해진다. 그건 이력서에 나와있는 학점, 토익성적, 자격증, 어학연수 등의 기록이나 때론 동산/부동산

보유 정도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무엇보다 출신대학이 절대적이다. 그 치열했던 고등학교 교육을 뚫고선

공고하게 서열화된 대학에 차례로 채워나갔다는 것은, 분명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중요한 잣대로

기능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잣대로서 기능하는 학력이 어느 순간 권력화되고 구조화되어서, 여러모로 스스로의 영향력을

확대재생산하는 '절대반지'가 된지 오래라는 것이다. 대학의 위계에 따라, 사회적인 직업군에도 일반적인

경향성이 생겨난다. 여지껏 공고했던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정책적 반응으로 최근 이력서의 출신학교란을 빼는

등의 시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이른바 명문대 입학생의 출신성분이 갈수록 상층화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끼리 밀어주는 연고주의는 이러한 학벌의

영향력을 한층 강화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출신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인기학과/비인기학과의

문제이기도 하여, 점차 높아가는 경쟁의 파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메타적인 측면을 도외시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학벌주의는, 혹은 서울대학교 프리미엄은, 비서울대 출신이나 서울대 출신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비서울대 출신은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불만과 출신 대학에 올인해야 한다는 '교훈'을 각인하게

된다. 이러한 교훈이야말로 공교육을 파탄내고 사교육 광풍, 멀게는 부동산문제까지 일으킨 장본인이 아닌가.

서울대 출신 역시, 자신이 학벌의 덕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계속해서 증명해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된다. 한국 내 대학위계의 최정점에 안착하기 위해 부차시되었던 자신의 적성, 희망 등은 여전히

접어두어야 하고, 일렬로 달리는 레이스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밤잠을 설쳐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요새는 '서울대 폐지론', '학벌주의타파종합대책' 등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려는 '세력'도 준동하고 있고 말이다.

(서울대..라는 게 한국 교육체계 '피라밋'의 정점에 선 하나의 상징이라 비판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서울대가

사라져도 제 2, 제 3의 '서울대'는 당연히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는 애초 그러한 '피라밋'을 설정하고 당연시하는

교육 체계와 그 이면의 교육철학의 깊숙한 문제를 건드려야 할 문제다.)



그러한 '불순세력'의 준동에 너무 걱정은 마시라. 서울대라는 간판은 그렇게 녹록하진 않으며 거품이 빠진다 해도

여전히 최상급 레어 아이템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니까. 갈수록 부식되어 유명무실화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서울대'라는 위상이 역설적으로 대학의 상아탑적 기능, 혹은 취직공부에 목매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바라건대 그러한 시간에 '학벌주의'에 대한 논란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한 논란이 비록 '엘리티시즘'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이나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다소간 '묻지마'식 비판/비난으로 흐르는 면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학벌에 대한 비판 및 해체 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한 경쟁과 획일적인 위계를 드러내는 것과 맞물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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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홈페이지 팝업 퍼왔는데, 이런 내용엔 Copy-left가 적용되야 하는 거 맞겠지? 라고 혼자 납득했다.

정세가 얽히고 섥혀있긴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국민은 이미 이명박을 심판했다.

아무리 PD수첩을 걸고 넘어지고, 진보연대나 대책회의를 걸고 넘어져도, 그리고 진보신당에 대한 백색테러까지

자행하며 구도를 흐리려 해도, 당장 갈비탕을 못 먹게 된 내 짜증과 분노를 씻을 수는 없다.

얼마전 GS 중역들과 함께 했던 회식에서 전무 하나가 내게 마치 인사면접보듯 질문했다, 술이 불콰히 취해서

이런저런 얘기중에. 윤선생은, 자네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건 날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자기소개서, 에세이, 커버레터를 쓸 때 잠시 손을 멈추게

되는 지점. 어쩔까 하다가, 늘상 몇마디 공격을 허용하고 마는 대답을 그대로 읊었다.

무엇이 되겠다는 완결된 꿈은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의미를 찾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원점에서 항상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변덕스럽진 않습니다.



만약 레쥬메를 들고 하는 Q&A였다면, 아마도 나는 이런 식으로 좀더 읊조렸어야 했을 거다. 이력을 얼핏 보면 좀

미친년 널뛰듯 한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밑에는 일관된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제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책임감이라 쓴 에세이 역시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함이였구요. 운운.



정형화된 남성성은 목표지향적인 반면, 여성성은 과정지향적이라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무언가를 갖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 무엇을 향해 치닫는 '남성적' 성품이란 게...상당히 희박하다. 똑같이 '성취'라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예컨대 이번학기 학점과 같이, 그건 분명 목표학점을 찍어놓고 달린 결과라기보다는 리포트, 중간,

기말..하나하나 찍어나가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사람들간의 관계 역시 그렇다. 對이성 관계에 있어서도, 애초부터
 
뭔가 이뤄보겠단 심잡고 만난다기보다는..그냥 만나는 게 좋고 보는 게 좋고 그러다 보면 뭔가 되든 안되든, 그런

것 같다. 그냥 '지금의' 것이 좋은 건데, 그 '지금의 것'으로부터 어떤 정향을 추출해내는 사람에겐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람을 겁내고 감정을 두려워하는 내 핑계일지 모른다)



과정 자체를 즐긴다는 말은, 그래서 사회적 통념상 '불건전'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슬며시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보고 있겠다는 말을 뒤집은 것인지도 모른단 얘기다. 원하는 목표 대신 목표를 향하는 길 자체를

즐기겠단 말, 어디로 어떻게 꺽이고 변화/변전/변질/변색/혹은 퇴색(?)되더라도, 사후적인 한마디,

이를 앙다물고/기꺼운 표정으로/썩소를 지으며/비극을 연기하듯, '재밌었어.' 혹은 '그걸로 충분해.'



내가 정말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운전대를 잡고 '지금 현재'만 주시하는 고속주행에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밟혀도 차가 휘청하듯이, 조그마한 일 하나에 마음 전체가 왈칵 쏟아지기도 한다. 애초

별것아닌, 아주아주 사소한 일 하나라 할지라도, 그건 몇달몇년 간의 내 의지를 순식간에 뒤엎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 그 바램, 의지란 것 자체가 뭐 그리 대단한 이유나 설득력이 있었겠냐만, 관성에 기대어 응고되어

가던 그 마음이란 게, 한순간에 휘발되어 버린다. 고시를 그렇게 그만 둘 수 있었던 것도, 사람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돌아서면 무지 차가울 것 같다는 누군가의 사려깊은 통찰도, 결국은 같은 궤적에 있는 것

같다. 현재를 탐닉하는 마음, 그리고 한순간의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일) 엇나감, 그리고는

망설임 없는 돌아섬. 그 돌아섬에는, 이러한 사건,일상,이벤트를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는 자기만족 내지

자기위안과 자족감이 가득한 데다가, 애초 무언가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장애나 집중력핍진증의

징후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애초 전형적인 여성상에 비추어진 '과정지향적'이란 단어 자체에 마초적이고 악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진 않은가 의심할 판이다. 아님, 초점을 보다 좁혀서, 나 자신의 성품이란 게 단지 '다소 여성적'이란

식으로 넘어갈 게 아닌 무언가 문/제/가/있/다/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끝까지 추구해서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쇼부'를 보고야 말겠다는 우악스러움(혹은 집요함/보다 중립적으론 굳건함)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여태까진, 어렴풋이 느껴졌던 그러한 빈궁함의 이유를 '목표'가 없다는 데서 찾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일본 애니에서 느껴지는 그 상실의 미학. 이쁜 비극. 그런 결말. 마지막을 얼마나 농도짙은 애수, 혹은

싱실감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듯이, 거침없이 '추락하는' 캐릭터들. 애초 목표를 향해

쏘아진 살이 아니었다는 듯이. 얼마나 이쁜 궤적을 그리며 하루하루 추락했는지가 문제였다는 듯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 과정이 충실하고 이뿌다면 된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고 나타나는 돌부리가 버거워지는 순간 널부러지며, '에라 모르겠다

여태 즐거웠으니/행복했으니 됐다'라는 식의 방탕스러움 그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이고, 그런 식으로 해석할 여지 역시 충분히 예측가능한 거였다. 그치만 역시나, 발딛어

직접 감촉하기 전까지는 모든 땅이 미지의 섬이었던 게다.



목표를 놓쳐선 안 되는 거 아닐까. 책임감이란 거,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납득할 만하지도 않지만.



아, 그 전무가 내게 치고 들어온 공격은 그런 거였다. 와이프, 혹은 여자친구가 그런 모습에 실망하지 않겠나.

내 대답. 그런 나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관계가 불가능하겠죠. 잘한 대답인진 모르겠지만,

전무는 그저 내 어깨를 몇차례 두들겨 주고는 술한잔 말아주더군.

원칙적으로 1학년 수업이지만 묘하게도 고학번들에 점령당한 대학국어 섭, 자그마치 외교과 97학번 선배까지

모시고 있으니. 자기소개 삼아 몇명 되지도 않는 새내기들한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얘길 해주라는 강사의 말에

저마다 인생 다 살아본 늙은이처럼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놀고 학점 신경써라, 전략적으로 사고해라,

술마셔봐야 남는거없다, 인턴 등 경험을 많이 쌓아라..무슨 얘길 하느냐보다 더 날 거슬리게 만들었던 건,

그 태도였다.


고작 대학이란 공간내에서 위와 아래에 놓였을 뿐인데, 마치 세상의 한끝과 다른 한 끝에 선 양, 어깨에 힘준

말투와 회상조의 어투. 마치, '내가 살아보니 이러니까 넌 저렇게 살아라'라는 어른들의 훈계와 같은. 늙기도 전에

늙어버린 척 하는 꼬라지하고는.


하긴, 나도 어느순간 더이상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감정에 먹힌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거부감이

생겨났었다. 말마따나 손톱만큼 펼쳐낸 감정을 두고 수박만하게 읽어내는 호들갑도 버거웠지만, 좀 중심을 잡고

누구든 와서 기댈만한 그런 씩씩한 모습을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지글지글 끓는 사막 한가운데서

휘영청 늘어진 그림자를 펼친 야자수같은, 그런 노회함과 여유로움을 [가질, 드러낼, 과시할]때가 되었다고.

그건 이미 일종의 자기검열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감정이 부글부글 끓는 순간이나 감정에 모가지째 먹히려는

위태로운 순간에도 꾹 눌러 참고서는..이제 그럴 때는 지났어, 라고.


사실은 여전히 나 자신에게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일 투성이. 역맛살이 있고 사람만나는 걸 좋아하는 내가
 
여행 가이드를 하면 안 될 이유. '방황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어?' "왜 피하는 거지? 대답은? 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 거지?" 당장이라도 짐싸매고 내키는대로 여행 좀 하고 싶은데 내 발목을 붙잡는 것들의 정체.

'3월엔 토익, 4월엔 한자, 5월엔 컴퓨터.' "별수없이 당신도 벌써 노쇠해버린 건가."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항상

새롭고 똑같이 낯선 이유.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약점을 상대에게 쥐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너지기 위해 존재할지 모르는 특별함의 아우라. "대체 당신이 스스로를 잘났다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자존심빼고 뭐가 있지?" 잠시 '노출증'을 고민했던 내게 7년쯤만에 반복해 들린 씁쓸한 질타, '당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그동안 조금은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도 뭘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건지 감을

못잡겠어." 그런가 하면 또다른 목소리, '혼자 사는 법을 좀 배워야 할 거 같아.'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다만

만의 하나를 찾고 싶을 뿐야." '웅얼웅얼웅얼.', "웅얼웅얼웅얼." '넌 누구냐', "그러는 넌 누구냐."


그러고 보면 내게 안정되고 성숙한 멘탈리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건 말도 안 된다고 믿고 있는걸. 어른스런 모습..이랄까. 그건 고인물 같은 거라, 썩어가길 기다리는

것뿐야..라는 강변. 난 그런거 포기.

(이데올로기전이다. 이데올로기전에서도, 근래의 과학전에서처럼 정밀한 외과수술과 같은 surgical strike,

국부공격이 필요하다.)


다물으다.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뜻을 지녔다는 우리의 고어로 알려진 이 단어는, 80년대 초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의 열풍을 선도한 베스트셀러 '다물'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식민시기 일제의 잔인한 악행과 천여번의

침탈만 당했던 애끓는 약자의 비애를 미래 언젠가 통일한국의 기개와 대비시키며 식민사관의 사슬을 끊어내자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남북한의 통일은 물론 토문강 이남의 연해주, 만주를 되찾고 (여전히

일각에서 주장되듯) 산둥반도 부근의 동중국까지 '다물'하여, 토끼같은 형상의 한반도에 짓눌려있던 한민족의

기개가 되살아나 평균신장까지 서구인보다 더 크게 된다는 거다. 그게, 우리가 다물해야 할 세계최강 최고민족

최종 버전의 역사이자, 원래의 우리모습이라는 주장. 흔히 민족사관이 빠져버리고 마는, 결과적인 자기 부정 내지

자기 혐오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소설이다. 형이상학적인 또다른 목적론과 병든 인간.



아직 주몽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내건 '다물多勿'의 의미는, 수세적인 상황인지라 그 외연이 적절히 통제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소간의 설득력과 적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내지 당시의 전세계-패자인 한나라와 이에

기댄 부여에 대항해서, 상실한 삶의 기반(다소 서정적), 혹은 고토(다소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의 터전

(다소 선동적)..이랄까, 뭐가 되었던 간에 그 땅뙈기를 되찾겠다는 데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뭐..물론 그 땅에

'백성이 주인되는 땅'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왜 하필 주몽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이 땅 위에서 가장

강대하고 융성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고토만 회복하면 되는지 아님 어디까지 쳐부셔야 가능해지는지, 왜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건 '주몽의 착한 백성'과 '적들의 무장한 병사'들 뿐인지 등등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투성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대 왕국의 성립을 위해 제창된 '되찾음'의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상실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제시되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편이 그에 대항하여 무언가 더욱 설득력있고 피끓는

명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의 외연을 좁히고 명확히

할수록 유리해지는 거다. 지금의 미국이 제시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데올로기가 그 외연을 이슬람 문화

일반으로 넓혀버리고 말아 더욱 곤란해지고 만 것은 반대의 사례일까.



고구려의 역사는 태왕사신기로 이어지면서, 아니 거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당장 어느정도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다물'이란 단어가 폭주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제약으로 눌려있던 그 폭력성과 저속성이 드러나는 것

뿐이지만. 물론, 당시 고구려가 실제로 '다물'을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고구려

초기에 건원칭제하며 '다물'을 연호로 썼다는 설도 있다만-모든 국가, 조금 줄이면 고대국가는 동일한 행태를

보인다. '다물' 등 나름의 관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정복 전쟁. 더이상 우아한 '역사강역'의 문제나 합리적

(국제법적?)인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을 위한, 그리고 전쟁을 수행할 백성을 동원하기 위한, 혹은

(아직 이데올로기가 백성에게까지 유효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핑계거리일 뿐이다.



독도의 영유권이 한일 중 어디에 있던 큰 상관이 없는 것보다 더, 주몽이 옛 조선의 영토를 다물하던, 대조영이

발해를 꿈꾸던, 그건 사실 사는데 별 상관 없는 일이다. 하잘것 없는 민족적 일체감을 5분정도나마 느껴보거나,

우리민족도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이중으로 왜곡된 자기 비하에 빠지고 싶다거나..이런 건 비추. 그저 하나의

퓨전사극으로만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암만해도 붉은악마가 재등장시킨 '치우천황기'나 민족주의를 빙자한

온갖 극우주의적인 주장들과 종교들이 낭자한게..일본이 뭐만 하면 헤드라인으로 '극우주의 부활' 이러는데

사실 한국이 더 문제다. 멀쩡하게 잘 사는 인간들을 갑자기 한이 가득한 못난이로 비하한 채, 과거 '깃발을

꼬나들고 대륙을 호령하던 영웅'을 처방하는 민족주의(내지 민족사관)는 이미 정부의 FTA 옹호 광고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미국하고 경제 자유화하자는 거지, 누가 깃발쥐고 말달리며 쳐들어가자했냐 말이다. 그런

메타포가 정부에서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라니..볼 때마다 참..가슴이 덜컥덜컥한다. 조금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면, 이 병든 인간들은 영웅을 부를 게다. 전쟁을 부를 거 같다. 아니, 이미 전쟁과도 같은 사고방식은

시작된지 오래다. 우리는 이미 전쟁에 동원된지도 모른 채로, 나와는 상관없는 전쟁중인지도 모르겠다. 대개

은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가 순순히 죽으러 나가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이러 나가는 게 전쟁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된 이미지 그 자체일 뿐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단지

'일본인이 없는 일본의 지배'를 고도화했을 뿐인지도. sub-altern학파의 이야기.)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이들을 낳으려면, 덜 방황하려면, 거대한 고독 속에서 사회적 위험물로 변하지 않으려면

모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해야 한다는 것이 통치자들의 판단이었다...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를 장려해야 했다.

개인들의 실패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실수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한두 번 실패했다고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제 몫으로 만들어진 반쪽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신화를 믿는 한 사람들은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 광적인 요구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몇몇 운 좋은 사람들이나 사랑을 누렸지만 이제 좋은 것은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상에

따라 우리 사회는 사랑을 모든 이와 그네들 일생의 중심이자 기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구도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 성적 충동을 해방시켜야 했지만 대신 성행위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수단이란 걸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랑 없는 섹스는 모욕이고 착취이며 상대를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란 생각은 금세 만인의 지지를

얻었다...


공권력은 일체의 감상적 사랑을 배제한 섹스만으로는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대중을 시장 원리에 복종시키려면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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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보다 보면,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 혹은 사랑을 기다리기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으면 자동차부터 장만하고, 멋진 남자를 잡으려면 마스카라부터 사라고, 남편에게

사랑받으려면 밥솥을 바꾸고, 아이들의 사랑을 얻으려면 보험에 들어라는 식이다. '죽어도 좋아'란 영화는,

이제 어르신네들까지 쑤석거리면서 그 사랑찾기 대열에 합류시키려는 '놈들'의 프로파간다일지 모른다.

OST는 끝까지 반짝반짝했지만, 스토리는 갈수록 값싼 광택을 내는 플라스틱보석처럼 후져버린 '소울메이트'..

뒤늦게서야 우르르 봐버리고 나서의 씁쓸한 뒷맛을 말끔히 씻어낸 소독용의 매콤한 공업용 메탄올같은 책.

단 메탄올은 에탄올이 없을 때 고작해야 입에 머금을 정도의 대용품일 뿐, 삼키면 죽는다.

사랑하면 죽는다 - 6점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홍은주 옮김/세계사


그럴 줄 알았다.

검찰에서 관련 죄목 최저형에 가까운 7년을 구형할 때부터,

김용철변호사의 양심선언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내부고발자인 그에 대한

딴지걸기만 계속되던 때부터,

삼성을 싸안고 도는 언론/검찰/정권/정당들의 속내는 그러했을 거다.

이참에 깔끔하게 후계문제며 상속문제까지 정리해버리자고.


사실상 무죄방면에 면죄부용 구형에 판결이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이건희의 사유물이자 승계재산이라고

법적 인증까지 해준 셈이니, 이건희는 속으로 웃고 있을 게다.(이후 기사를 보니 겉으로도 웃고 있었다.)

화낼 거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욜부터 일욜까지 죽어라죽어라 하면서 쌓이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나섰을 때 그를 보면서 참..가슴이 먹먹했었는데.

정의구현사제단 분들이 말했듯 巨惡이란 단어 앞에서 그 분은 얼마나 좌절스러웠을까.

하물며 지금은, 어떤 심경이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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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베네수엘라, 쿠바..

프레시안에서 체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여정을 좇은 여행 사진전을 열었다. "시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 답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지 시에게 묻는다면 시는 그 답을 해줄 것이다." "여행이

무엇인지.." "사진이 무엇인지.." 그런 식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맥락과 관심사를 통해 외부

사물들을 이해한다. 240여장의 사진을 넘기며 그 때 가졌던 감정과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를 두시간여 조곤거리던

다소 지루했던 사진전에서, 나는 그 여정에 거쳐간 국가 이름들이 갖는 이국적인 느낌에 취해버렸다.

아-르-헨-티-나. 베-네-쥬-엘-라. 페-------루. 큐-바.



#2. 외교부의 미운 털.

이번주 월욜에 있었던 한-아랍 소사이어티 창립총회 때 일이다. 외교부 참사관 하나가, 문득 우리 진영 쪽으로

와서 그런다. 당신이 XXX대리에요? 언제 입사했어요? 여자친구는 있어요? 네, 얼마 안됐습니다. 있습니다.

여기서 내 멘토선배가 한 마디, 여자친구가 얼마나 이뿐데요~* 그 참사관 말이 외교부의 직원들 사이에 나에 대한

성토대회가 한시간이나 열렸댄다. 회장의 일정과 필요를 빙자해 끊임없이 귀찮게 한다나. 신입직원답잖게.

같이 하는 행사니만치 그쪽과 우리쪽의 정보가 공유되야 했고, 나 역시 주겠다는 빈말만 계속하며 짜증내는..

무례하고 건방진 외교부 직원들과 계속 독촉하라는 팀장님 사이에서 얼마나 열받아 있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십장생들. 어쨌든 행사는 무사히 마쳤고 다음날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 모두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선에서

마무리. "행여 제가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 운운" 은근히 그런 거 잘한다, 맘만 잘 먹으면. 니들한텐 어디던

모두 을의 입장이어야 한다는 니넘들의 강변, 인정해줄 수도 있다.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까 그런

갑-을 장난질은.



#3. 박제가 된 천재..는 아니지만.

이상의 그 표현이 날 향했던 건 두번째다. 첫째는 내가 제대하고 고시공부를 할 때. 대체 내가 정부기관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며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날 안타까워하던 식이었달까. 두번째는 엊그제,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군시절 중대장님. 거기에서 뭘 할거냐며 5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박제가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 녀석'이, 서울대 외교학과란 딱지를 갖고서, 메인 스트림..유학도 다녀오고 뭔가

'그렇게' 비전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냐고 했다. (여전히 난 그 '그렇게'의 의미를 전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참 다른 두 개의 방향..이랄까. 체게바라는 죽고나서야 박제가 되어 맥주병 포장지, 티셔츠, 건물외벽을

장식한다지만..난 벌써 박제가 되어 이후의 쓰임과 이전 기억의 용도를 고민하는 것 같아 착잡하다. 아직

살아있는데. 두 지적 모두 내가 요새 답답해하는 이유를 어슷하게 관통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10년 후, 아니 5년 후, 하다못해 1년 후..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을까.



#4. 내 문제는..

직장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멀찌감치 밀어뒀던 가치들..그것들이 헐떡대며 내 등뒤를

잡아채고 내리찍는 사이에, 지금 이곳이 내게 허한 빈 공간들을 채울 의미있는 뭔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 애초엔
 
그게 그래도 꽤나 긴 토막의 텀일 거라 생각하고서는, 내가 안정성과 자기관리를 위한 시간 대신 '포기한' 혹은

포기했다고 믿고 싶은 고액 연봉, 커리어 관리, 다이내믹한 분위기을 대신할 뭔가를 찾는 건 마치 휴대폰 배터리

갈듯 금방 될 거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2월, 3월, 4월, 5월. 아무런 대안도, 새로운 공간도,

흥미도 관심사도 발굴하지 못한 채 지나고 있다. 이걸 희생한 대신 얻겠다던 저것..이 아직 손에 잡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게 뭐여야 할지도 전혀. 감이 없는 상태란 게..날 바싹 말려 박제로 만들고 있다.

'신입직원'으로서의 허니문은 이제 끝났고, 누추하고 더러운 현실이 보이면서 대체 내 '위생관념'과 '긍정적인

사고'란 게 얼마나 갖춰져 있을지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다.



#5. 오늘은.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선배와 술한잔 했다. 안티로 가득한 거리의 정치 그리고 단지 '이명박'과 '광우병'에 초점이
 
맞춰진 지금의 패닉 상황이 기회일지, 위기일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난 위기가 맞다고, 아니려면 FTA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초점을 넓혀가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달에 채 백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몇 년째

일하는 사람들, 딱히 대단할 것도 없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은 마음에 찍히는 숫자가 불었을 테다.

문제는, 나처럼 그 어디에도 하루하루 숫자를 불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 사실 입사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걸로 암담해하는 건 건방진 걸지도 모른다. 6시 좀 지나 사무실을 막무가내로 나서서 경복궁 사진전으로 달렸던

건 그런 암담함을 지워내려는 육체적인 욕동.

방금 티비서 비타민인가 하는 건강-웰빙의 열풍을 타고 부르는-프로그램을 보며 하나 앞으로의 트렌드를

예견하게 되었다. 키스하면, 위장병이 전염될 수 있단다. 헬리코박터 감염숙주가 남한땅 성인의 70프로라니.

헬리코박터가 인간에 기생한건지 인간이 헬리코박터에 기생한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요새처럼 죽도록 '웰빙', 벽에 똥칠안하고 오래 살길 꿈꾸는...분위기라면 백방 키스가 터부시될 게 뻔하다.

키스하다가 위장병 걸린 인물 하나 티비에서 띄워주고 책쓰다가 위장병으로 죽을때쯤 공익광고에 나올게다.

여러분 키스하지 마십쇼. 그거 독약입니다. 학자들은 키스가 야만인의 의학적 무지와 혹은 악의로부터 비롯된

'가미가제'식의 입술공격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발견해낼 것이고, 인류문명의 발상지 모처에서는 전쟁중에

도려낸 적들의 입술을 금박도자기에 봉인해 놓은 유물이 발견될 것이다. 어용철학자들은 '키스'행위를 선진질서

및 문화의식 고양에 장애가 되는 범죄로 규정짓고, 앞으로 키스는 지정된 장소-예컨대 헬리코박터 및 구취를

순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입술비데가 비치된..-에서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커플만이 할 수 있겠지.

물론 일각에선 의료보험도 안되는 건강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없는 빈한한 커플을 구제하라거나,

입술비데기 비치장소를 확대하라거나 하며 반발하겠지만. 결국 누군가가 휴대용 입술비데기를 만들어내어

'신지식인' 반열에 등극할 것이고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인류는 일만년 역사의 '키스' 행위를 폐기하고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내어 서로를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일백년 후 우리의 손자/녀들은 키스를 하는 장면이 삭제된 영화를 골동DVD로 볼 것이고 왼갖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들도 모자이크 처리될 게다. 아마 조각상같은 경우라면 맞닿은 입술이 레이저로 태워지지

않을까, 유머가 있는 녀석이 책임을 맡았다면 그저 대갈을 한대 후려갈겨 입술을 돌려버린다거나 입술사이에

종이 한장 끼우고 말지도 모르겠고. 아, 그냥 두명에게 마스크를 씌워버리는 게 최선이겠구먼.

도덕책에선, 22세기 문화인은 입술을 내보이지 않는다고 기재된 채 오래 살고 싶으면 키스따위 하지 말라

그러겠지. 아마도 월마트에선 박하향나는 입술 제독용 방독면을 번들로 팔지도 모르겠고. 밤늦게 들어온 자식

녀석의 입을 지시약 기능이 첨부된 페이퍼로 눌러보고 키스한 자취가 드러나면, 마치 지금 부모들이 담배갖고

아이와 실랑이하듯, 등짝을 후려치며 "너 키스 안끊을래?"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가능한 핑계로는, 글쎄...

"당했어" 정도랄까.ㅋ
1. 내무생활

2) 내무실 정리정돈이 불량하다고 지적시

혼자 계속해서 여러 방법을 이용 정리정돈을 한다.


3) 군기가 빠졌다는 등의 이유로 지적받을 때

지나가다 지적받았을 경우 신속히 관등성명을 크게 복창하여 군기를 표현한다. 평소보다 소리를 크게 한다.


5) 축구 시합시 열심히 안 한다고 지적받을 때

끝까지 상대를 쫓아다닌다. 공과 관계없이 계속 뛴다.


6) 고참이 심하게 장난칠 때

갑자기 부딪혔을 때는 부딪힌 부분에 심한 통증표현 (선임병의 미안한 감정 유발)


7) 노래를 시켰을 떄 잘 생각이 안 날때

노래 하나 외우고 입대하라.


8) 내무실에서 발냄새가 난다고 짜증을 낼 때

빨리 세면장으로 가서 발을 씻고 온다.




2. 훈련 및 교육

10) 직무교육/훈련, 기본군사훈련시 수준 향상이 잘 안될때

복명복창을 크게 하고, 휴식 시간에도 혼자 연습


11) 정신교육 중 졸았다고 지적받을 때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신속히 일어나서 뒤쪽에 서서 교육받음


12) 훈련시 힘든 표정을 짓는다고 지적받았을 때

"아닙니다!"라고 씩씩한 행동으로 계속한다.


15) 복장을 잘못 착용해서 지적받을 때

신속히 뒤로 돌아 교정하고 잘못했다는 표정/대답을 한다.




3. 기타

16) 누나나 애인 친구들을 소개해 달라고 할 때

누나가 약혼, 결혼 예정이라고 아쉬운 듯 말한다. 나이가 많은 것을 말하거나 예쁘지 않다고 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애인과 친구들이 군인을 싫어해 걱정인듯이 말한다.


20) BX에서 물건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선임병이 눈치줄때

선임병에게 "먼저 사십시오"하고 자리를 양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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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군대에 있을 적(2002-2004) 받았던 교육자료 중 발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군대는 쑈다.ㅋ

사회 생활, 학교 생활에서도 능히 응용될 만한 것으로 대략 여겨짐..이랄까.

#1. 엊그제는 성대에서 진중권의 르네마그리트 강연을 들었다. 진중권이 애초 미학자였단 사실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왕의남자'나 '타짜'에 나왔던 유해진과 똑같단 생각은 들을 때마다 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내가 많이 겹친다고 생각하는 인물. 정치적인 입장이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말투도 조금.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체험'이라는 단어로, 일상성에 함몰된 사물을 복권시키는 마그리트의 예술을 해명하려

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고립시키거나, 중첩시키는 잡종화의 기법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도구적,

실용적 의미를 벗겨내고자 하는 시도라는 해석.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메타적 해석과 비판적 재구성, 그건

내가 마그리트를 예술적 의미의 좌파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2. 그의 그림인 줄 모르고 좋아했던 몇개의 작품들이 있었다. 진중권의 강연회 다음날에는 세시간동안 그의

전시회에서 놀았다. 일단 한번 쭉 돌고, 빽빽한 인파를 피해 다시 한번 거닐면서 맘에 들었던 그림들만 다시 보기.
 
이런저런 작품들이 내 걸음을 잡고서 놔주지 않았지만 그다지 리뷰는 내키지 않으므로 생략. 그저..단지 나뭇잎과

비둘기를 합쳐놓은 그림들보다..'눈물의 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훨씬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에다가, 송충이

하나가 커다란 나뭇잎-새(?)를 갉아먹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요새 주위에 하도 사랑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와닿았다. 눈물의 맛은 누가 보고 있는 걸까. 새의 가슴을 갉아먹는 송충이? 가슴이 휑하니

갈아먹힌 새? 둘다? 누가 누구를 울게 했고, 누가 누구의 눈물을 맛보고 있는 걸까..라는. the flavour of tears.

오케이, 그림 찾았다.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이레네, 혹은 아이린(Irene)이라는 인물의 발굴.
 
첫째, '이레네 혹은 금지된 책'이란 작품. irene의 철자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계단이 그려져 있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째, '대화의 기술'이란 작품. 다소 해석하기 쉬운 듯한 이 그림에는, 그려진 글자가 숨어있다. 내가 보기엔

IRENE정도로 보이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셋째, 마그리트가 찍은 무성영화를 보면 Irene이란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뭉실대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도슨트에게 질문했더니,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였다나. 음..그래서 저 그림의 밑에는 남자 둘이

서 있는 건가. Irene이 저만큼 커보였을 수도, 그녀를 저 불분명한 글씨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혹은,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쌓아올려진 저 돌들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수도. 어쨌거나, 어쩐지 공식적인

사생활이 깔끔하다했다. 머..말년까지도 마그리트 부부는 무지 행복해 보이긴 했지만. 아, IRENE을 마그리트와

묶어보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4. 부모되긴 무지 힘들 거 같다. 평일이었고, 오전이었음에도, 인간들이-특히 학부형과 아이들이-파도처럼

철썩댔다. 애들한테 쉼없이 질문하거나 설명하거나..이건 뭘까, 저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열린 질문은 그래도

무언가 귀를 기울일 만한 아이의 대답을 유도하지만, 표현기법이 어떠니 저 사물은 무엇을 의미한다느니 등의

진부하고 꽉 막힌 설명은 참..힘들어 보였다. 열을 올리며 설명하는 어머니나, 지루하고 다리아파하는 아이나

서로 못할 짓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이번 전시회 관련해 뭔가 찾아봐도 마찬가지다. '검증받은' 작품들만

그림파일로 쉼없이 전파되고, 그에 대한 '검증받은' 감상 역시..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작년 피카소전때도, "난

뭔지 잘 모르겠고 뭐라 의견을 낼 만한 자신도 없지만, 내가 긁어온 글에 의하면 대단하다더라, 이그림이

대단하다더라"..거개가 이런 '안전한' 태도다. 흠...싫어.

묘한 이질감을 주는 제목처럼, 한풀이식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돋우는 영화는 아니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정말 적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에서..오지에서 독특한 가면 문화와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은

럭비도 배우고, 창가도 즐기고, 인종과 이념 같은 것이 부질없어지는 '환상적인' 상황에 처한다. 뙤놈이나 왜놈

운운하는 대사가 있지만, 그다지 현실적이라거나 실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동막골은, 그런 곳이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데, 그중에서도 맘에 툭 꽂혔던 장면이 있다. 무엇이 불안한지, 아니면

두려운지, 무릎을 바싹 땡긴채 웅크리고 자는 앳된 군인의 옆머리에 강혜정이 꽃을 꽂아주는 장면. 그리고는,

아주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꽃잎을 두어번 쓸어내리는. 촉촉한, 보들보들하면서도 생생한 그 감촉..은, 그네들이

'작대기'라 부르던 우왁스럽고 둔탁한, 그리고 선뜻한 총의 감촉과 정확히 대척하고 있다. 풍선처럼 유유히

낙하하는 폭탄의 질감 역시. 꽃잎을 쓰다듬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미친X, 아님 광년이라 불릴 수 있는

세상이다. 다행히도, 동막골은 그런 미친X를 포용, 아니 이해하고 있었고..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마을 전체의

슬픔이 된다.


언젠가부터 나비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여 흰나비를 백의민족 어쩌구의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한. 다만 호접지몽, 장자지몽 이전에..나비효과 같은 걸 연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의 나비

날갯짓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폭풍.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무엇이 어긋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총을 겨누며, 맨몸으로 폭격기에 맞서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대답은, 도식적인 구도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쉽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는.


예측할 수 없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인간들은 서로가 원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 부지불식간에 쌓아올린 업?

구조? 관계? 아님...간주관성?--; 그런 것들로 보이지 않게 서로 구속되어, 싸우고 웃고 울고 죽어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며칠전에 본 박수칠 때 떠나라의 신하균은 두가지 작품을 동시에 했음에도 캐릭터가 하나도 안 섞였다. 멋진
 
배우에 멋진 영화들. 올여름 대박 세영화다 가족들이랑 심야로 봤다. 이사가기전에 가까운 센트럴시티 무지

이용한다.ㅋ


난 항상 사랑니가 났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이가 아파 병원에 가면 사랑니가 이미 다 난 상태라 하고,

그것때문에 아프단다. 너무 쉽게 생겨나고, 너무 금방 아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님 살짝 둔해서 무지하고,

다 자라고 나서야 뽑아버리는..참 멍청한..어쨌거나 어제는 입안으로 망치와 메스(조각칼같은), 뽁뽁이가

들어갔고..염증을 제거한다고 엄지손톱만큼 살을 잘라냈다. 치료받고 담주에나 뽑아낼거 같은데..항상

뽑혀나가기만 한다. 달이 삼분지이가 지났다. 근데, 전화요금이 기본료 더하기 2614원.


이번달, 군대 녀석들이랑 논다고 전화 은근 많이 썼지 싶었는데, 아마 저번달 기록 경신하지 싶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사고 방식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 까칠한 사고방식을 예비한다. 예컨대 티비에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어쩌구..'하면서 멘트를 하는 건 아이들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거 같아 싫을 수 있다.

아이들이 왜 소중한데? 우리의 미래라서? 우리 사랑의 결실이라서? 우리의 역사를 이을 거라서?

굳이 아이들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온통 '우리'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한국어에 그토록 즐겨쓰이는

'우리'란 단어는 '나'의 욕망을 집단 속에 숨기고 자신의 모난 구석을 숨기려는 피해의식의 오랜 발현일지

모른다.) 결국 소중한 아이들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 갖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작아서 이뿌지 않냐는

항변에도, 이뿐 그림이나 조각 장식처럼 최소한 당신 눈이 보기에 이뿌기 때문 아니냐,라고 까칠하게 대꾸해 줄

수 있다.


방금 티비에서 '우리 소중한 아이들에게 더러운 불량식품을 먹이는 어른들에겐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란 멘트를

보고 문득 생각났지만, 차라리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아우라를 덮어씌우지 않고 솔직히 돈벌기에 몰두할 뿐인

그들이 정직한 건지도 모른다. 정직하다기보단, 그들은 사람을 무차별하게 대한다는 거다 최소한.

그들의 무차별함이 한쪽 극단에 서있다면, 다른 한 극단의 무차별함은 역시, 종교적일 수도 있을 만큼, 사람을

이름으로 인식하는 거다. 아이라서 좋고, 여자라서 좋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용준이라 좋고 소희라서 좋고 뭐

그런 거여야지 않을까 싶다. 아나운서가 갑자기 성인군자라도 된 양 어린이들의 수호천사라도 된 양 우리 소중한

아이들..어쩌구 하는 게 무지 역겨워져서 까칠해져버렸다.

장갑차에 치이고 민족의 순결한 딸아이들이 되는 것처럼.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좋은 게 좋은 거고 분위기 망치기 싫다고 좋게좋게 가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까칠하게 생각한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은, 중력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효과가 있는 데다가, 관성까지

더해져서 좀처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가족, 학교, 회사, 선배, 후배, 동기, 친구, 애인..

그 모든 것들에 때론 정당하고 때론 부당한 무게를 실어버리는 말이 바로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래서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계속 가는 거다'라는 귀결. 관성처럼 이어지는 관계, 상대의 쓰임을 감안하고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거나 온통 수단화되어 버린 관계. 희한한 건, 대부분의 집합명사들은 그러한 수단으로서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족. 학교. 지역. 기수...그런 것들.


여기까지. 이곳에서 순치되고 '정화'되어서 말랑말랑해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뭔지 모를 것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영육의 펄떡임은. 까칠까칠. 그녀가 잘 잡아주고 있던 내 까칠한 부분은 이런 식의 푸닥거리로

씻겨내려간다.

다시 고쳐 생각하면 사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관계는 매 순간 그

관계를 리셋하며 다시 완전히 풀었다 매는 신발끈 같아야 할 거다. 한발 내디딜 때마다 신발끈을 다시 풀고

조여야 한다면 미쳐버릴 거다. (그게 날 줄곧 괴롭혀온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좋은 게 좋은 거여야

하는 그런 지반 위에서 살고 있다. 일년, 반년, 한달, 일주일 단위로 적당히 끈의 매무새를 고쳐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과 지도요령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넣겠다고 한다.

MB의 '실용노선' 외교가 결국 거덜나고 있다는 또 하나의 표징이다. 북-미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에서 냉전적

대북강경정책은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었으며, 이제 쌀을 주니 직접대화를 하니 부랴부랴 수습에 나서보지만

사실상 남-북간 대화채널은 모두 끊어진 상태다.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내세웠지만 이 역시도 성마르고

아마추어적인 접근으로 인해 쇠고기 문제, FTA 문제..뭐 하나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못하며 MB 정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뢰도마저 땅에 떨어졌다. 중국은 '친미정권'인 MB정권을 잔뜩 경계하며 북한포섭하기에

발벗고 나섰고, 일본은 준것없이 '과거는 씻어버리자'는 선언을 받아들고는 독도를 내놓으란다. 더하자면,

자원외교랍시고 중동지역의 나라들을 순방하고 각종 경로를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한다고는 하지만, 실무적으로

얼마나 그 나라들과 가까워지고 전략적으로 서로의 가치를 제고시키는지는 잘 모르겠다.



막말로 그렇다. 독도가 '한국'이란 나라의 땅이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땅이던, 나와는 상관없다.

땅 한조각 갖지 못한 내게 독도같은 '바위투성이 섬', 혹은 '갈매기들이 똥싸고 가는 섬'이 어느 국가로 귀속되던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닌 것이다. 독도가 우리 땅이란 걸 걸고 넘어진 일본은 물론 조갑제가 말한대로

'미친놈'이긴 하다. 조갑제에 동의할 때도 있다니 놀랐지만...그는 냉정하고 당당한, 그치만 차분한 대응을

주문했고, 나 역시도 일정부분 동의한다. 다만 나는 독도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격발되는 사람들의

'민족주의적이고 혹은 국가주의적인 반응' 자체가 염려스러우며, 독도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중요하다는 가치판단은 해당 시점에 이슈가 되는 다른 여러 문제들, 예컨대 서울시의회의 전례없는 수뢰사건,

광우병 관련 정부지정 우려식품이 680여개에 달한다는 보도, 언론에 대한 정부의 재갈물리기, 금강산 피격 사건,

쇠고기협상 국정조사, 그리고 일상적이지만 더욱 중요할 수 있는 비정규직 문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들

말이다. 당장 독도를 일본이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일반인들...국민들이 나서서 어쩐다고 될 문제도

아닌 그야말로 국가간의 문제인 거다. 김종필은 폭파할까, 했다가 누구는 못준다 했다가, 일본총리는 달라고

했다가 조용했다가..뭐 그런 식으로, 그저 양국 고위 정치권력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탁구치듯 핑, 퐁 하고 왔다갔다 하는 문제였던 게 여태까지의 진행 사정이다. 그러한 그들만의 리그에 힘을

보태기 위해 장식되는 민족주의적 수사들과 요란하게 치뤄지는 각종 이벤트들로 인해, 가뜩이나 MB 때문에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새 '국민'으로 호명되고 '피끓는 독도지킴이'로 동원되는 것 뿐이다.



독도를 넘겨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작해야 민족적 감수성만을 자극할 뿐인 땅덩이 문제에, 온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아우성칠 일인가 싶다는 거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독도의 경제적 효과까지 감안해서

분노하는 것 같지도 않다. 독도를 영유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넓은 영해와 EEZ, 혹은 대륙붕에서 어로 활동이나

기타 광물자원을 채취하는 등 잠재적인 가치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그로 인한 내 주머니

속사정이 조금은 풍족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 일이다.



역사적으로 누구 땅이었다느니, 고지도에 기재되어 있다느니, 다 좋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근대국가로

틀지워지기 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했는지,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호명되는 것이 어떠한 효과를

낳는지를 되돌아보는 기회일 때 더욱 값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느새 위험한 수준으로 넘실대는

한국의 민족주의, 혹은 우석훈이 말한바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그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을 키워내는

첩경일 테다.



백두산에서, 독도에서 태극기 흔든다고 대체 해결되는 게 뭔가. 게다가 민족사관이랍시고 반만년 역사에 금칠을

해서 '한단고기'네 뭐네 인류의 시조이자 선택받은 민족이라 주장해서 해결되는 게 뭔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고수해서 우리가 얻는 건 뭔가.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를 다방면으로

풍요롭게 하고 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다. 꼬리에 달라붙은 일부 정치권력자가 온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분탕질치는 꼴이다.

민족주의란 게 그렇게 써먹혀 왔고, 독도가 그렇게 써먹혀 왔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을 지켜보면 될 일이다. 일본에 대고 삿대질할 일이 아니라, 정작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외교를 말아먹는 MB에 대한 규탄과 끈질긴 저항. 포커스는 '독도'가 아니라 '외교'로, '민족'을 찾을 게 아니라

'사람'으로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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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본적인, 그래서 쉽게 눈에 띄는 문제들만 해결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리고도 일단 풍경이 성립되고 나면, 그 기원은 은폐되고 만다. 쇠고기가 시중에 풀리면서

점차 촛불의 당위성과 에너지가 부식되듯...)

안전한 식품을 먹을 권리라거나, 외국에 나가서 사고를 당할 때에도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라거나, 어떠한

성격의 정책을 추진하던 과정상의 민주주의는 지켜지는...그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ABC는 '국가(권력)'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절차적/의례적 민주주의가 다져지면서 그정도는

누가 수권하더라도 최소한 확보될 거라 생각했다. MB가 당선될 거 같은 분위기에서 이민가야 되겠다고, 농담삼아

친구들과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나를 좌절시키고 있는 중이다.



보통 시위에서 자국기를 흔드는게 우파건만, 조중동과 보수세력들이 손가락질하는 '좌파빨갱이'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나라란 것부터 개인적으로는 맘에 안들지만, 어쨌든 촛불이 조금만 진지해져서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더니

바로 폭력세력, 시위꾼들로 매도되고 있다. 안전한 식품을 먹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 사전예방의 원칙이

주권사항이라는 근거로 이미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 항변에 실없는 변명과 같잖은 사과로 대응하며

끝내 버텨내고는 급기야 역공에 나선 MB의 꼬락서니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실용'이라는 도그마에

빠져서 노무현정권을 비롯한 이전 10년의 국내외적 성과를 뒤집어 엎으려는 피해의식과 망상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금강산에서의 관광객 피격사태. 하다못해 동아일보조차 사설에서 MB를 비판한다.


"이 대통령은 사건 발생 8시간 30분이나 지나서야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늑장 보고였지만 11일 오후 2시로 예정된 국회 개원연설까지 50분의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원고 내용을 바꾸거나 별도로 유감 표명을 했어야 함에도 준비해 간 원고를 그냥 읽었다. 이 사건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고에 적힌 대로 북한에 ‘전면적 남북대화’까지 제의했다. 금강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대통령 연설에 박수를 친 국회의원들과 연설 생중계를 지켜본 국민이 기만당한 기분이 안 들겠는가."(08.7.14. 이명박 정부의 ‘이완과 마비’ 드러낸 금강산 대응)


물론 그간 이른바 정통 보수를 자처해온-그 안에서도 숱한 균열선이 있지만-세력들과 MB 역시 일정한

간극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번 사건에 있어서도 '실용아닌 실용'을 주창하는 MB와 보수세력간의

시각차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리그나 권력 다툼, 헤게모니 다툼은 관심도 없지만 다만..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런 언급도, 예비적인 비판도 없을 수 없을까.

당장 날선 비판을 하라거나 격앙된 반응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을

보일만큼의 휴머니티를 MB에게 바라지도 않는다. 당신이 대표하는 일국의 국민이 죽은 거다. 전후사정을

모르니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면, 원칙적인 수준에서 우려와 유감을 표시하는 건 상식 아닌가. 북한에 대한

유화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또다시 국민의 생명을 북한에 대한 외교적 선물로 바치고자 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다가, 그의 강경일변도의 냉전적 대북정책기조의 궤를 벗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MB에 대해 분노할 때마다 번번이 부딪히고 되새기게 되는 단어는, 다름 아닌 '상.식'이다. 그는 상식이 없다.

좌와 우의 스펙트럼 논쟁 이전에...그는 기본적으로 상식이 없다...다른 표현을 못 찾겠다. 상식이 없다.

대통령이 뭐하는 자리인지는 알까 모르겠다.



굳이 직선형의 근대적/계몽사관적 역사관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퇴행이다. 나선형의

순환적 역사관에도 진보와 퇴행의 물결은 존재하는 거다. 분명히 이건 퇴행이다. 나로서는 지난 10년이

진보 일색이었다고도, DJ와 MH이 진보정권이었다고도 생각지 않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민주주의적 절차를

온존시켜왔고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선 그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담 지금은? 지금은, 제 국민을 위하지도,

국민에 의하지도, 국민의 것도 아닌 채 존립하고 있는 권력이란 측면에서...난 MB를 부정하고 싶다.



MB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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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유난히도 뚜렷하게 새겨지는 스와치 시계의 초침소리를 들으며, 일초일초 늙어가고 있다고

실감할 때가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에서 있던 구식 괘종시계의 똑, 딱, 하는 초침소리도 그렇게 명징했지만,

어느새 다가오는 '늙음'의 표징들-그러니까 '졸업', '취업', 쉽게 가시지 않는 '숙취'..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야 초침소리 속의 재우침을 느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렇게 계절은 돌고 돌 뿐이지만, 인간은 한 철 살고 지는 메뚜기처럼 그렇게 뛰다가

만다. (비록 47층에서 바라보는 하늘이야 늘상 흐린 황토빛이지만..) 어쨌든 봄빛이 일렁이는 와중에 나는, 살찐

돼지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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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 8점
정지아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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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월30일에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그 교육감 선거가 서울시민 모두의 직선으로 선출되는 사실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이 선거에 현재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후보가 나와 2강 구도로 세력대결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시는지요?  

현재 약8~9명의 후보가 등록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양대후보로 2강구도로 갈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진영은 한나라당 중심으로 공정택 현 교육감을 지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와 전교조, 진보단체들은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조차 두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고 있어 투표율과 각 진영의 조직화 정도에 따라 양쪽 모두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는 현 정부의 광우병 쇠고기 정국과, 영어몰입교육 일제고시 부활, 0교시 실시, 우열반 편성등 교육정책에 관해 심판하는 선거입니다.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관장할 수 있는 한해의 예산이 무려 6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5만5천여명의 교직원 인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 정부의 교육양극화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됩니다. 교육 공공성을 영원히 포기하느냐 아니면 다시 돌려놓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있습니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정당이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가치에 맞는 후보를 선택하시어, 7월30일 반드시, 꼭, 투표를 하고, 주변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홍보해주십시오.

교육감 선거는 정당선거와 달리 많은 분들의 공감을 이끌어낼만큼 밀착된 주제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숨막히는 교육시장에 쏟아버리는 이 미친 교육이 진정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녀를 가진 분들에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번 투표에 꼭 참여해주세요.

현재 교육감선거가 직선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기에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거소투표제(주소지가 아닌 실제거주(직장 등)하는 곳에서 투표하는)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부재자 투표인데,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셔서 투표를 미리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투표 당일날 휴가인 분들은 미리 신고하셔서 꼭 투표에 참여하세요..

그림파일을 참고하시고, 첨부한 파일을 다운받아 거소란에 체크하여 주민등록상 주소지 동장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면 투표용지가 우편으로 옵니다. 그러면 기표하셔서(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우편으로 보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거소투표 신청서를 7월15일까지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청서는 간단하며, 첨부파일 다운 받아 체크해서 보내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한표한표가 이명박 정부의 미친교육을 막아낼 것입니다.

교육감 선거에 당선되면 아이들 급식에 미국산 쇠고기가 오르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로 이명박 정부를 반드시 심판합시다! 7월30일 투표 꼭 참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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