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서 대강 얼개만 써두었던 리뷰..다시 풀어서 쓰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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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후퇴

2007년에 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으로 프레시안이 주최했던

좌담회를 모은 책. 당시 대선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서

나온 이야기들은 불과 1년도 안 되어 너무 멀어진 '얘기'거나 혹은

너무 섬뜩해진 '예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은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고착되었노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농담삼아 MB가 되면 이민간다했었는데..이렇게 쉽사리

국내외 정치/경제/사회의 전분야에서 망가져버릴 줄은 몰랐다.

지난 20년을 조망하는 책을 보면서, 고작 지난 몇달간..그리고 향후

5년간 얼마나 '희망'과 '성숙'이라는 단어와 멀어져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몇번이나 책을 처박아두곤 했다.


#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역량 간의 갭

불꽃놀이 같은 열망의 폭발은 소진의 징후일지도. 예컨대 87년 5월항쟁의 폭발은

6,7,8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외면했다. 딱 그만큼의 각성에 알맞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 소란스러움과 야단스러움을 감당할

준비가 된 '시민'을 키우지 않는 교육/매체. 오히려 시민 의식과

역량을 소진시키기만 하는 교육/매체. 타협과 협상, 소통을 모르는

이뭐병..MB는 어쩜 이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그를 뽑은 '우리'라는 양비론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뽑았으니 닥치라는 놈은 너나 닥치시고,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MB리콜운동을

말하며 정치를 경제적 메타포로 헷갈리게 하고 싶지도 않다.)


#2. 열망이 있기는 할까?

독재/군사정권/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민주주의' 말고.

절차적 민주주의 말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선결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먹고 사는 데 도움 안되는 것들로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것들.

'실용'이라는 단어에 매료당한(당했던) 사람들.


#3. 몇가지 내 생각

한국에서 민주적 문화의 성숙을 막는 몇가지 질곡. 군대/군대식

학교/군대식 기업/유교적 가부장제/되먹지 않은 어른들.

촛불든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난 아무리 싫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 사회에 이러저러한 빚을 지고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사회를 변화시켜왔던 어른. 평생 아이인 척 살 수

없을 바에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보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하준식의 사회적 대타협이란...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우려, 그리고 지향까지 동의하지만 경로면에서

매우매우 불만스러운 이야기.

또하나, 비판만이 아닌 삶의 긍정을 말해야 하는-자본주의의

공포 문화/선망 문화를 넘어서기 위해-시민운동 혹은 문화운동이

사회나 삶의 모순, 질곡의 근본원인들을 지적해내는 까칠하고도

불만섞인 시각과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던 문제..


지금 내 삶이, 사회가 이러이러하게 문제가 있다, 불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당신 삶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으니 괜히

경쟁의 논리와 박탈의 틀 내에서 시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한입으로 두말하기..의 위험을 벗어나야 할 텐데.

나만 그런 걸까. 두 사람의 관계는 대개 '넌 참 이기적이야'란 말, 그리고 '난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말로 하는

땅따먹기같다. 어디까지가 과연 이기적인 건지..그리고 어디부터가 이타적인 건지 그 명확치 않은 경계설정과

의미부여는 당연히 어느 쪽이 더 약한지에 달려있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하다란 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약점을 잡히고 있단 얘기. 투전판에서 패를 몽창 까보인

후에야 뭘 어쩌겠는가. 그래서 게임같은 연애를 즐기는 건, 상대와의 샅바싸움이기도 하고 꼬리잡기 게임같은

건지도 몰라. 상대보다 조금은 더 우월한 고지에서..내 마음은 보전한 채 상대의 마음을 뺏겠다는 그야말로

'이기적인' 경기규칙.


이번에는 그 이기적인 경기규칙을 넘어서서, '난 정상/넌 이기적'이란 자기중심적인 소아병을 이겨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살벌한 투전판 위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봄볕에 갓 말린 보송한 이불 위에서 뒹굴듯

그렇게 다정하고 장난스런, 그치만 서로를 위한 긴 여정 위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엑셀로드의 게임이론이

망측스럽게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무한반복될 거라 믿는 게임에선 윈-윈의 가능성을 찾는 게 인간이니까..

약점을 처음에 누가 먼저 얼마나 많이 쥐어주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쥐어준 건 내 약점이지만, 그녀는 내 약점을 이해하고 고이 보듬어줄 보석함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협박하는 게 아니라 외려 약점에서 장점과 강점을 발견해내며..넌 약하지 않아,

혹은 난 너만큼 약해..라고 말해주는 것. 그런 게 가능할 거라 믿었다.


물론 모르지 않았다. 한발 밀리고 두발 밀리다 보면 과연 내가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질 뿐

아니라, 그녀 역시 '난 정상'이라며 강변할 영역 역시 한없이 넓어지게 만드는 거라고. 길들임..이라는 단어를

이런 때도 쓸 수 있다면, 최소한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그어놓고 그건 지켜내야 하는 거라고

그녀에게 알려야 했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그 경계에 길들여져야 했다.


다만 여러가지 상황으로 난 그럴 수 없었고 한발 두발 밀려났다. 그저 밀려났다고 불안감만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한발 두발 밀고 들어왔다기보다는, 자신이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린

그저 처음 우리가 그어놓았던 '이기적'이란 의미 그곳에서 한걸음도 밀리거나 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밀려났다고, 비참해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 묻는다. 난 이기적이었나. 이기적으로 변해갔나. 자기애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연애놀음에서 한발짝이라도

멀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입장에 서 본적이 있었던가.


운전을 할 때, 특히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면, 종종 앞차와의 추격전을 벌이곤 한다. 앞의 검은색 그랜저,

50m, 30m, 10m, 0m, 아싸..추월. 그리곤? 다시 앞에 차가 나타난다. 이번엔 흰색 카렌스, 50m, 30m, 10m, 0m,

다시 추월. 계속해서 내 앞의 차들을 넘어서고 도로를 장악하려고 한다. 거침없는 정복욕이랄까..

때론 추월하려던 목표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더욱 거리만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일렁이는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상처입는 자존심. 비록 여전히 전반적인 도로의 흐름보다 앞서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여전히

앞서 뛰어넘었던 몇 대의 차들을 뒤에 두고 있다 할지라도 이미 먹어버린 것들은 기억하지 않는 나쁜 습관.


그런 습관의 발현인 걸까. 기억나지 않는다. 난...노력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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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켓 두장, 그리고 최소 삼십분의 땡땡이 예상시간에 혹해서 집체 헌혈행사에 참여했다. 트레이드타워

정문에 늘어선 헌혈차들. 저혈압이라며 뺀찌먹고선, 이럴순 없다 하며 다시 신청서를 귀찮게 작성해선 옆 차에

올라 검사를 받았다. 10분전의 뺀찌..부적합 판정 기록이 어느새 내 발목을 잡아서 왠만함 이번에는 쉬시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간호사 누님의 말에 투덜투덜대면서 기어코 피를 뽑았다. 가만히 누워서, 이마와 발끝에서부터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종의 가학? 그리고 피학의 동시만족? 나에 대한 as-is 분석과 to-be 분석..내가 가진 능력과 비전 내지

희망에 대한 매일매일의 새로운 분석은, 새로울 것없이 매일매일 우울하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 능력-소질-관심사-지식-자격증-점수-숫자..뭐하나 맘에 드는 것도, 깊이 벼리고 내세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갑남을녀, 장삼이사, 뭐 그렇고 그런 아무개. 그리고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들, ...난

뭘 갖고 싶은 걸까.라는 곰팡내 나도록 오래고 단물빠진지 오래인 질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이게 내게 최선의, 아니 차선의 결과라도 되는 건 맞는 건지. 그리고

이곳은, 내게 맞는 최소한의 십원짜리 팬티라도 되어줄 수 있을지. 아니라면, 아니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모르겠고, 아무것도.

혹은 두렵고, 정말 모르겠고, 아무것도.


단순히 몇 개의 굵직한 행사가 거듭되어 쌓인 피로 탓일까,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적대기

시작된 탓일까, 회장/부회장의 개념없는 언행들에 진력이 난 탓일까, 아님 이 곳의 학교 선배들 모습을 보며

지레 질려버린 탓일까...혹은 이명박의 사진만 봐도 울화가 치밀고 욕지거리가 나온지 오래인 심리적 분격상태

탓일까, 그리고 얼마전 문득 떼거지로 만났던 대학원생들, 그리고 유학생들의 jargon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말았던 탓일까.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에 휩쓸려 대충대충 정신없이 지내는 하루하루.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허하게 남는 탓일까. 대체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요새 까칠해졌다. 지하철에서 고딩들이 떠들면 니들 안방이냐고 큰소리로 갈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줄타기하는 사람뒤에서 툭툭 쳐대는가 하면, 걸을 때 앞에서 느긋하게 걷거나 역주행하는 사람들에겐 감정실린

어깨를 날려준다. 그래, 사실은 내 앞에서 신경거슬리게 만드는 게 네온사인 간판이던 사람이던, 뭐가 되었건

있는 힘껏 한방 날려줬음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왕임 주먹도 덕분에 피칠갑 좀 했음 좋겠고.


밤늦은 지하철, 영등포구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멍하니 넋놓고 서있는 사이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댔다. 황급히 뛰쳐나와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오지 않았어도 될 길을 멍청하게 되밟아 가면서, 죽어버릴까 하고 사십번은 뇌까렸다.

이게 뭐하는 거냐..집에 가 쉬어야 할 몇분의 시간을 왜 이렇게 멍청하게 허비하는 거냐..아니 잠깐, 요새 넌

시간을 쓰는 거냐 시간을 지우는 거냐..죽어버릴까, 라는 구간반복 무한재생.


어제 엄마가 사왔던 정장바지는 엉덩이가 숨쉬기 힘들었다. 허리는 여전히 31-32정도에서 유지되고 있고 배도

그닥 변질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방심한 엉덩이에 살이 올라붙고 있었다.

우울해져서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래서그래서. 오늘 오후 두시간동안 헌혈이랍시고 땡땡이치고는 '죽음'을 타이밍좋게 체험했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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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신분으로 처음 받은 예비군 훈련은 3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 나흘동안..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어떻게든 시간을 잡아 죽여보려고 MP3플레이어도 가져갔고, 시사인 이번주호나 타임지같은 잡지도 몰래

꿍쳐갔으며, 스도쿠 게임기도 들고 들어갔지만 별무소용. 일단 전투복을 걸치고 군화에 발을 꿰고 난 이상

몸은 무거워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그에 더해 방탄헬멧(혹은 하이바, 혹은 철모..라 불리는 것. 아직 우리말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단어들이 꽤나

있다. 마치 "안경닦는거"라 불리는 수건처럼.), 수통에 덜렁이는 탄띠에 환갑은 제대로 넘었을 칼빈소총을

장착하고 나니 걸음걸음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더위. 어찌나 덥던지. 04년 8월에 이집트 배낭여행갔을 때, 특히 룩소 왕의 계곡즈음을 자전거로

돌아보던 때의 그 막막하고 숨통을 조르는 더위의 재림. 그때는 하루에 1.5리터짜리 물병을 네개씩 마시면서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다녔다지만, 지금은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전투복을 차려입고 점심시간에 충성마트를

잠깐 이용해 아이스크림 한개쯤 사먹을 자유 뿐.


쉴새없이 들리는 사격장으로부터의 총성, 새로 개발된 연습용수류탄의 그다지 연습용스럽지 않은 폭발력과

파열음, 사열대에서 삑삑거리는 마이크에 대고 질러대는 병정놀이 오타쿠들의 쇳소리..소리없이 내리쬐는

절대적인 태양광선의 아우성까지 더해서,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시간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해야 할만큼

내가 한가하거나 여유롭지가 않은데, 이것저것 맘에 걸리는 것도 많고 몸을 보채는 것도 많은데, 싹뚝

잘라낸 4일간의 시간동안 그저 멍하니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래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난 납득되지

않았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둔탁하고도 거친 말들과 그 뒤에 버티고 선 사고방식들, 그 모든 걸 비주얼하게

보여주는 얼룩덜룩한 국방무늬가 가시처럼 날 쿡쿡 찔러댔고, 난 처음 입대할 때처럼, 처음 예비군 훈련 받을

때처럼, 그렇게 하나도 익숙해지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채 그저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 죽이는 법을 까먹지 않게 하려고 우르르 불러모았댄다. 북괴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류탄을 던지랜다.

책임이 있으니 의무도 있는 거랜다.(이게 무슨 말인지..자유가 있으니 책임도 있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자유 운운하기엔 넘 척박하고 열악한 상황이니 병정놀이오타쿠들, 교관들도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나름 변형한

거겠지.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라는 속편하고 살짝 효험도 있다는 체념 역시 무기력해지는 이상한

공간인 게다, 군대란.) 비상식으로 가득차서, 외려 상식을 들고 말하기엔 유치해 보이고 까칠해 보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래도 4일간의 소득을 하나 꼽으라면..군내 식당에 붙어있던 광우병 관련 정부홍보물들을 죄다 잡아 찢고

왔단 사실 정도? 그리고 스도쿠를 한 30판 했고 잡지를 두권 봤으며 팔뚝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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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이란 단어의 의미를 새겨 본 적이 없었다. 역종을 바꾼다..는 의미. 마침표의 뉘앙스는 담겨 있지 않았었다.

이중국적 문제부터 김일병의 '사고'까지. 병역 기피자들에 대한, '문제사병'에 대한 들끓는 분노가 돌아간 곳은,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거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대/한/민/국/에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뿐이었다. '우리는 하나였다'란 반쪽짜리 진실의 울먹임처럼, 이아이들 모두 다 내자식같다는 말이 담은

교묘한 울타리처럼.

군대 안 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그만큼의 농밀한 부러움임을, 숱한 '문제사병'을 죽여왔던 총구가 이제

밖으로 돌려졌을 뿐임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감정의 극단과 극단에 선채 배설을 위한 쉬운 해답과

쉬워보이는 상대만 밟아대는 걸까.


근 1년만에 전투복을 입어봤다. 월욜, 화욜 훈련했던 석박사들보다 약간은 말을 안 듣는다는 교관들의 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순순하게 충성~이라고 경례를 올려붙여주고, 툴툴대면서도 열을 맞춰

'이동'하는 나 자신과 개구리얼룩 속에 묻혀버린 사람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쩔수 없이 착해빠진

먹물들이라고, 풍선처럼 부푼 머리에 감정이 눌려버린 공허하고 얕은 인간이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거 같았다.

강렬하게 뭔가가 가슴에서 치받아 오는 걸 느끼면서, 정말 자연스럽게 티비에 나올법한 예비군 아저씨의 모습..

웃도리 풀어제치고 주머니에 손찌르고 모자삐뚜름히 돌려쓴..을 연출할 수 있었지만, 교관 아저씨가 옆에 지나갈

때마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고 단추를 채우는 척했다. 배터지기 직전의 개구리같이 바람만 잔뜩 들어갔다.

총을 쏘기가 싫었다. 훈련소 때 탄알이 총안에서 뭉그러졌던 사건 이후 삼사십살은 훌쩍 넘은 총을 믿을 수도

없었지만, 총을 다룰 때 나는 신경질적인 금속성과 호흡을 깨뜨리는 파열음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못쏘겠습니다'하고 열에서 빠져나왔으면 좀더 맘이 편했을라나. 굳이 말앞에 '머리가 아파서'란 말을 붙이고

말았다. 어찌 생각하면 솔직하지 못했고,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이런 '연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합당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역할이다. 어찌됐건 저들은 교육을 시켜야 하는 입장이고, 약장수처럼 떠들어대며 말안듣고 통제안되는

예비군들에게 군인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맡은 역할은 정말 쓰잘데기없고 짜증만 나는

훈련을 최대한 개기고 민간인임을 잊지 않으며 군복이 주는 마력과도 같은 압박감과 대치하는 것.

말로 자신의 사정..개인적인 의사를 이해시킬 여지도, 필요도 없다.

원하는 게 각기 달라, 결국 그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양쪽 다 신경만 곤두선채 스스로 회의가 들고 만다.

대체 이 나라는 어찌 되어가는 것이냐, 그리고 대체 이 같잖은 병정놀이를 왜 해야하냐.

그런데 교관들의 홈경기였고, 내겐 일종의 어웨이경기였다. 더구나 복장과 말투와 스케줄..같은 것들을 장악당한

채, 스멀대며 돋아나는 이전의 원치않던 습관들과 기억들을 쓰게 바라봐야했다. 여전히 북괴란 단어를 쓰고

정신나간 김일병을 저주하며, 그리고 갈수록 전우애가 상실된 채 '빠져가는' 군대를 한탄하는 교관들이.

전쟁놀이, 병정놀이에 몰입한채 진지하게 계급과 조직을 신봉하는 그들은 너무 많은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이왕 온거 열심히 하다 나가자'라는 맹목적인 성실함의 호명, '누구 한명이 방만하면 나머지 동료들이

힘들어진다'라는 식의 연좌제적인 책임감 부여. 그러한 식의 꼬임은 언제나 말문을 막고 만다.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막상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까지 바싹 끌어당겨졌었다. 참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내 의지, 내 각오를 믿고 뛰어들고 나니 주위에서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눈길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다. 바꾸어 보려다가 바뀌고 만다는, 진부한 얘기.


그리고 호루라기.

규칙적인 파공성으로 신경을 긁어놓는 그 소음을 무시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을 '강제'하면서, 발은 안맞춰도 좋으니 열만 맞춰라..고 했던 교관들. 발을 질질 끌면서도 양순하게 끌려가는
 
머리만 굵은 얼룩무늬들. 1번부터 99번. 제각기였던 스텝이, 호루라기가 울리기 시작한지 얼마안돼 대략 일정한

발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재우치는 교관들에 짜증을 내면서도, 발이 한덩이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엇박을 내딛으려 해봐도, 아님 그 거슬리는 소리를 쌩까보려 해도 내 몸은 헐떡이며 호루라기

소리하고 붙어먹고 있었다.

짜증나 죽을듯이 머리에서 거부감을 울컥 퍼올리는 것 만큼, 내게 삽입되었던 행동 패턴들과 양식들이 어느새

내 몸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득 깨달아버린 왼손의 담배처럼. 항시 경례를 준비해 비워놓아야 했던 오른손을

피해 왼손에 걸려진 담배는, 일이병때 그곳에서 내 낙하지점을 대략 상상해보기 위한 낙하물의 역할도

맡았더랬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한지 일년여만에, 다시 그 말도 안되게 어이없고 쓰레기같은 곳에 처했더니

온몸의 구정물이 들고 일어나 화답하는 꼴이다. 그치만 어째야 했는지. 어떻게 했으면 만족했을지도 사실

모르겠다. 경례구호에 맞춰 어영부영 모자끝쯤 갖다붙였던 손가락 두개쯤..을 아예 쉬게 냅뒀어야 했을까. 총

들고 다니며 전쟁얘기, 핵폭탄 얘기만 해대는 동선을 못견디겠다고 주저앉았어야 했을까.

누군가는 당연한듯 명령하고 누군가는 깍듯이 각진 자세로 부름을 받잡는 조직을 인정치 못하겠다고 뻗대봤어야

했나. '다'나 '까'의 말투 따위 엿먹으라고 귀를 틀어막아버릴껄 그랬나..

대체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예비군훈련따위,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고, 원치 않는 공간에 처하진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굳이 꾸역꾸역 찾아가서 조국을 위해 총을 쥘

몸뚱이만을 요구하는 곳에서 짐승처럼 '부려질' 필요는 없었던 거다. 근데...애초 군바리로 이름불리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한꺼풀만 들추면 인간이 사육되는 곳에서 살고 있는 거다. 남자나 여자나.

티비를 보면 진행자의 말끝마다 미친듯이 감탄하는 방청객들이 넘쳐나고, 인터넷에는 대한민국과 독도와 축구에

몰입해버린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을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앞으로 6번 더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제대..전역. 轉役. 그 공간은 근 반세기동안 그러했듯, 내 몸을 숙주로 삼고 사회를 칭칭 옭아맬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었다.

이런 제길, 잡탕인 거다. 에이리언을 품은 시고니 위버가 자살을 택하듯, 최초의 보균자가 숨을 끊었어야 했나..?

..대답이 궁해졌다. 어쩔꺼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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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시민'이란 단어가 여태까지는 촛불집회에 나섰던 국민들의 진정성과 평범함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단어를 통해 어느정도 '빨갱이괴담'과
'이념논쟁'으로 몰아가려던 반동세력들의 시도를 무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분,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많은 시민들의 실로 역사적인 대규모
집회 참여를 표현하기에도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모릅니다. 시민단체활동을 하거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유별난' 사람들만이 시민이라고 생각되던 한국 시민사회의 미성숙함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러한 '순수한 시민'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선명한 입장과 견해를 가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중립적이고 초정파적인 입장에 서있는 듯한 '순수한 시민'이란
단어로 우리를 지칭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진행된 촛불의 전진은 '변질'이라 비판받게 되고,
우리는 '변질된 시민, 빨갱이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순수한 시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민으로 가져야 할 순수함이란 게 어떠한 덕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쳤던 우리는 "미국산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고 "이명박 정부의 파행적 정국운영을 반대"하는
분명하고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최대공약수는 그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거리의 목소리와 제도정치권의 지형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자신은 정치로부터 초탈한 양, 그저 훈수나
두면 된다는 듯이 "순수한 시민"이라는 고고하고 우아한 미명 뒤에 숨어서 자신의 입장과 정치적
의견을 감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진보신당, 나와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점에서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보수 언론들의 경마식보도처럼) 누가 승기를 잡을지,
누가 뜨는 인물인지에만 가십성 흥미 위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중요한 교훈은 유실되어선 안됩니다.
그건 우리가 '순수한 시민'으로 이해관계에서 초탈해있다거나 정치적 입장이 무색무취한
고고한 원자적 존재들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지평 내에서 엄연한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가진 정치적 존재들이란 점입니다. 그걸 잊지 않는다면 각자의 입장에 맞는 정치집단,
시민사회집단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거나, 하다못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을 뽑을 수 있을 겁니다. 뉴타운이니, 737이니..에 속아넘어가지 않구요.

각자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들의 목소리는 이상화된 '시민' 전체의 순수한 목소리가
애초부터 아니었기에, 변질된 것이 아닙니다.(이명박도 시민이고, 유인촌도 시민입니다.)
좀더 명료해지고, 좀더 선명하게 '우리'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뿐인 것입니다.

촛불집회가 점점 진지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건 '변질'이 아니라 '발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보았습니다. 불필요한 '순수성' 논쟁이 촛불집회와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역량의 성숙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촛불을 든 우리 스스로 그러한 '순수성' 논쟁에 발목이 잡혀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이며, 이명박정부의 퇴진을
요청하는 시민이며, 조중동이 폐간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민이며, 진보신당이 원내진출을 꼭
이뤄내고 나아가 준비된 정권으로 국정을 담당하기를 바라는 시민입니다.


- 다음아고라토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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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 한뼘 창을 낸지 꽤 되었지만, 막상 그 곳을 채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인가 속안에서는 디글디글 끓어오르고 있다고 느꼈지만 워낙 비비 꼬인채 엉켜버린 탓이다.


그건 아마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변신한지 6개월간 내 생활 패턴, 동료집단, 그리고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할 지와 같은 자기 규정에 대한 대대적인 격변이 있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격변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며, 심지어 실제로 그러한 '격변스러움'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단지 좀더 나태해지고 삶에 대해 건방져진 내 자세가 문제일지도.


농담처럼 그렇게 얘기했던 적이 있다. 내가 글을 올릴 때는 무언가 외롭고, 힘들고, 고민이 많은가보다

생각하면 된다고. 분명한 건 난 여전히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느끼며 채워나가고 싶단 것, 불과 몇 개월만에

감각하기와 사유하기..랄까, 느끼고 생각하는 작업에 잔뜩 낯설어지고 있는 지금의 속도가 정신없이 두려웠다.

주절주절 글쓰기가 멈춰져 갔고, 하루의 키워드가 나열된 일기가 멈춰져 갔으며, 달력을 보니 어느새 6월말.


직장선배 A는 한국 사람들은 20대에 직장에 들어와서야 5춘기를 겪는 거라고 했다. 말이 좋아 5춘기지

사실은 청소년기부터 지체됐던 4춘기가 그제서야 터져나온 거라면서, 왠지 씨익 웃었다. 재수없어. 마치

지는 성숙해서 (남들과 달리) 일찍이 겪었다는 양, 또 다른 직장새내기들의 고민을 몽창 싸잡아 '4춘기'의

재림 그 뿐인양 단언하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난 그저 늘 갖고 있던 고민들과 사유 방식들을, 새로운 내 코스튬인

'직장인' 버전에 맞춰서 조정하는 중인 거다.


황망하게 쳐달려가는 하루하루, 다시 시간의 고삐를 잡으려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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