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점심때 소주, 저녁때 소주, 그리곤 맥주로 입가심..했더니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종점에 사는 것이 좋은 점도 있구나 싶었다. 선택지를 버리면, 맘편히 잠들 수 있다. '저, 여기서 내려요' 정도의

대사가 방해하지 않는한, 여닫히는 문과 그 밖에 펼쳐진 풍경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1) 일개미가 쉴새없이 먹이를 실어나르듯, 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루짜리 fact를 주워모은다. 자유롭다고도,

자유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박이 만만해보일 수도, 혹은 이미 자기검열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일정한 수준내에서 자신의 입맛대로 상큼한 먹잇감을 골라든다.


2) 이른바 데스크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무엇이 'new's인지, 어떤 것이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이성적으로 결정된다. 찜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방기사쓰듯.


3) fact는 언어로 짜여지기 시작하고, 그럴듯한 레테르로 포장된다. 글말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단어를

배치하고 뉘앙스를 얹어주며 아웃복싱의 쾌감을 느끼다. 어디에 힘을 실어줄지 결정하는 정교한 구조물. 물론,

스트레이트성 기사는 역삼각형의 흉칙한 바디.(이제 신문을 읽는 독자가 신속성, 가독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 문체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4) 기사의 표현과 호흡이 유지하던 아슬아슬한 객관성의 외피는, 논설과 칼럼에서 화려하게 재정렬된다. 무질서한
 
듯 뿌려져있는 철가루를 바싹 긴장시키는 강력한 자기장. 기사면에 헐겁게 매달려있던 구슬들을 꿰맨 바늘은

누군가에게 날아가 꽂힌다. 조선의 계륵, 동아의 '약탈정부', '노무현조크' 따위 유치한 삿대질,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유아틱한 정부의 막말은 차치하고라도.


0) 애초, 객관성은 무리다. 기자들은 사실 기능공이다. 누추한 현실을 재단해서 뭔가 있어보이게 짜깁기하는

바느질공. 아니, 기자는 단지 한 땀만 꿰매는 건지도 모른다. 각자가 가진, 서로 구태여 확인하며 맞춰볼 필요없는

정향에 따라서 허용된 한땀을 꿰맨다. 삐뚤빼뚤하게 엮여나간 실의 궤적은 때론 비둘기를, 때론 매를 그린다.

혹은 정신나간 art brut일지도.



...'동아일보'라는 덩어리를 깨서 보기 시작했다. 80년대 해직기자들은 아무러해도 결국 무능력과 비사교성으로

짤릴 처지였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지식인의 군기'를 요구하는 선배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5시가 다가오면 죽을듯 괴로워하며 헛구역질하듯 글을 토하는..안쓰런 족속인거다.

하지만 사회에 버티고 선 건, 동아일보 기자 누구가 아니라 논설과 칼럼을 두른 동아일보 덩어리다. 대체

마이크를 쥔 건 누군가. 기자에게 쥐어진 건 고작 외마디 fact를 울리는 캐스터네츠 아닌가 싶다. 짝. 짝. 짝.

누군가가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아, 물론 모든 신문은 정향이 있어야 한다. 동아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언론'의 문제. 1인 1매체가

불가능하다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괴리감의 존재. 게다가 잔뜩 우그러진 정향이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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