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두명 덮고잘만한 사이즈의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보면, 더구나 피처럼 붉은색의 붓글씨라면 가슴이 뛴다.

깃발을 볼 때마다 난 가슴이 뛰고, 또 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1학년 때 곽모군과 표모군이랑,

전경이 겹겹 에워싼 학교를 넘보다가 담을 넘어 기어코 가보았던 국보법 문화제. 그 이후로 엔엘 애들 문화제는

참 오랜만이었다. 마임보단 전투문예가 좋았던 나.


연세대의 교정에는 자주와 민족이라는 단어들이 낙엽처럼 뿌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발로 툭툭 찰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학교에서 아예 외부인사의 출입을 금하고 나선 분위기 탓도, 노무현의 '무능한 진보'라는 이미지 탓도

아니었다. 그냥, 으레 그런 시위 전야의 분위기. 더군다나 35도가 넘는다는 햇볕아래였으니.


문화제를 보면서 대체 한총련이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물론 분단국가인 한국의 지형

아래에선, 통일을 말하는 것 자체가 진보성을 일정하게 담보할 수 있겠지만, '통일과 자주'라는 성긴

그물망으로는 빠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미 '지배 진영'의 수사로 포섭되어 버린 '민족 자주'라는 이야기의

한계도 있고. 이미 그들의 유인물에는, "미사일 기술을 원천기술로 해서 남북한 양국이 과학강국으로 발전하자"

라거나, "통일이 되면 북한의 값싼 노동력으로 국가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등의 위험한 이야기들이 버젓이

실려있다. 민족의 딸로 성화된 효순, 미선의 여성성,그리고 부끄러운 민족의 치부라서일까, 거기서 배제되기

십상이던 성매매 여성들의 죽음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우리 '민족'처럼 순박하고 착하지 않아서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다. 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정화하고 순결한 양 치장하고 싶은거 같다. 우리나라가 "분단의 족쇄를

끊고, 미제의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면"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찬 세계가 도래한다는 건가. '양키'와 '원숭이'와

'뙤놈'이 우리보다 센게 문제라는 건가. 그물망을 보다 섬세하게 짜보려는 노력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반미투쟁!이라는 꼬리말이 무색하게, 영어단어들이 무딘 혀끝에서 적잖게 튀어나왔다. 문화제에서 사장과

노동자는 오로지 통일을 위해 어깨를 걸었으며, 통일은 무조건 되야한다는 말에서 공감을 요구했다.


결국, 한총련 혹은 민족자주 진영은...멘탈리티로 뭉쳐있을 뿐인 거 같다. 민족에 대한 센티멘탈리즘과

전통사회에의 향수. 미국을 최종 심급의 거악으로 규정짓는 순간 세상사는 단순해진다. 어찌보면 이미 한총련은

비전이 희미해지고 있다. 통일 이후에..그들은 어떤 비판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까. 통일이 마치 세상 끝날인

것처럼 절대적으로 봉헌된 마당에. 노무현을 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재고 있다. '민족'과 '자주'는

더이상 비주류가 아니다. 센치한 녀석들.


통일을 말하고, 민족을 운운하는 건, '민족정론'을 자처하는 우파 보수 언론들이 해야 할 거 아닌가. 왜 이땅에선

그런 것들이 빨갱이로 몰려 '좌파'로 매도당하지? 좌우가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대체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좌파'라고 칭하는 진영은 어떻게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는 걸까.



#. 왜 동아일보는 노무현을 '좌파정부'라고 까대냐는 내 질문에 선배기자가 했던 말. 원래 좌우는 상대적인 거야.

치사하고 교활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불신감을 심어놓은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 이거지.

#. 다 쓰고 나서 봤더니, 난 어쩜 '좌'라는 단어에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센치하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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