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인천에서 대부도, 선재도, 그리고 영흥도까지 다리로 전부 이어져 사실상 육지와 같은 셈. 다리가 이어지는데


전깃줄이라고 못 이어질리 없다. 온통 사방으로 치렁치렁한 송전탑들.



선재도와 영흥도를 잇는 다리.



그리고 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의 해안데크. 잠깐 산책할 정도, 일이십분 정도의 거리가 편도로 만들어진 길이라서


올라섰을 때 챙겨들었던 맥주캔이 홀딱 비워지고는 빈 깡통만 들고 돌아왔다.




멀찍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풍경은 아무래도 인천인 듯. 


살짝 성수기를 빗겨난 해수욕장엔 둘둘이 짝지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왠지 멀찍이 보이는 송도의


높은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하니 미래소년 코난이라거나 로스트라거나 난파구조물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서기 2046년, 지구는 멸망했다. 쓰나미에 쓸려가지 않고 용케 남은 자들은 잔해를 껴안고 바다를 전전하다가


어느 무인도에 닿게 되었다, 랄까 그런 컨셉의 영화를 찍기에도 좋겠다.


그리고 통일사. 이름에서 느껴지는 쌈마이풍은 제외하고라도 아무래도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 해가 지는 풍경이


이쁘겠다 싶어서 타이밍 맞춰 올라가본 절이었다. 꽤나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달린 길 끝에는 예상보다 훨씬


작고 최근에 새로 지어진 느낌이 가득한 절이 있었다. 


절 자체보다도, 그리고 온통 나무에 가려지고 인접한 섬들에 가려져 생각보다 실망스럽던 풍경보다도, 통일사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여기서 노닐던 강아지 두마리. 똥개임이 분명한 녀석들의 살가운 손님맞이라니.



삼각대가 없고 HDR이 과하게 들었간 때의 대표적인 망사진 한장만 남은 통일사.




 

캘리포니아 남부의 가장 아름다운 해안 중의 하나라는 샌디에고 라호야 지역, 그 보석같은 해안 중에서도 특히나

 

영롱하게 빛나는 해변, 블랙 비치(Black's Beach)다. 이곳은 특히 자연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으로, 누드로

 

모래밭을 활보해도 전혀 눈치보거나 어색할 일이 없다.

 

블랙 비치는 토레이 소나무 주립 비치(Torey Pines State Natural Reserve)와 맞붙어 있는 곳으로, 다만 그 황량하고

 

아름다운 해안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통해야 한다.

 

절벽 위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는 시야에 걸려들어오는 건, 누군가가 만들어 세워놓은 세로로 길쭉한 푸른색 액자.

 

 

 

빗물에 씻겨 거대한 등뼈가 드러난 것처럼 울룩불룩한 땅을 조심해서 밟으며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

 

 

휘영청 구부러진 해안선 따라 슬며시 내려앉은 안개낀 풍경을 보고 있으니 여기가 어딘가, 문득 망연해진다.

 

 

 

열심히 내려가는 길, 전날 내렸던 소나기 탓인지 길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이제 바닷가 도착. 도착하자마자 반기는 건 해류가 세니 수영할 때 조심하라는 경고판이다.

 

그리고 곱고 새카만 입자들을 숨기고 있는 금빛 모래사장. 파도에 쓸려서 오르내리며 환상적인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곳곳에서 보이는 실루엣들. 전혀 아무런 색깔도 추가되지 않은 살색의 실루엣들이 해안선을 따라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막 도착한 사람들은 한귀퉁이에서 자연스럽게 훌렁훌렁 옷을 벗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카메라를 향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럴 땐 그저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다를 감상할 따름.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동참한 채 조금은 차갑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졌던 태평양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궜다가

 

모래사장을 거닐기도 했다. 모두 벗어던진 채 탁 트인 바닷가에서 파도와 바람과 모래에 살부빌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어디서고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잡아챌 일이다.

 

 

 

스탠리에서부터 한 사십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리펄스 베이. 중간에 인도가 없이 차도와 중첩되는 구간이 있어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걸어서 갈 만 한거 같다. 어느순간 눈앞에 펼쳐진 리펄스 베이의 전경.

 

원래 리펄스베이는 20세기초부터 상류층의 별장들이 있는 걸로 유명했고, 지금 역시 홍콩 제일의 부촌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이곳의 유명한 리펄스 베이 해수욕장이 사실 해외에서 수입한 모래로 조성한 인공의

 

해변이라는 점, 500여미터 정도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의 백사장이 전부 인공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해수욕장 배후에는 고층의 개성있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마치 요새의 해운대 신시가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온갖 것들이 금지되어 있는 해안가. 하나하나 이미지가 꽤나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틴하우 상 도교사원. 여기는 홍콩의 유력인사들이 기증한 불상과 신상들이 넘쳐나는데, 그중에서도

 

살펴볼 만한 건 바로 월하노인상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나왔던 인연끼리의 붉은실이 매어있다는 설화가

 

바로 월하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해안으로 길게 내밀어진 부두시설은 바다의 높이에 따라서 저렇게 철썩거리며 수면 아래로 잠기기도 하고,

 

아마도 좀더 낮시간에는 수면위로 불쑥 올라오기도 할 것.

 

 

 

 

속초해수욕장 아래 외옹치해수욕장, 그즈음에 잡은 펜션에서 자전거를 빌려 속초를 돌아보기로 했다. 속초해수욕장을 지나고

 

아바이마을을 지나고, 청초호를 지나 영금정까지. 그리고 내친김에 영랑호까지 한바퀴 돌아보고 다음날 설악산 울산바위에 올라

 

점심삼아 먹을 닭강정을 살 닭갈비 시장통을 들르는 코스. 11시쯤부터 타기 시작해 아바이순대로 점심먹고 돌아오니 6시쯤?

 

마음이 싱숭생숭해질 수 밖에 없는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잔뜩 응축시켜 에센스를 풀어낸듯한 짙푸른 바다.

 

 역시 새로운 지역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만끽하려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게 최고인 거 같다.

 

몇번을 왔던 사랑나무, 이제야 이게 어디에 붙어있는 건지 방향감각이 제대로 잡혔다.

 

 청초호가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가로뉘인 청호대교.

 

 

아주 옛날, 이전에 걸었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날씨도 엄청 구려서 비를 맞고 걸었던 기억.

 

 다리 위에서 굽어보는 청초호 안쪽의 속초시내 전경. 누군가의 요트가 잔잔한 물결을 일렁이며 진입하는 중이다.

 

 

 그리고 갯배. 탑승료가 200원, 작년엔가 왔을 때는 아저씨가 직접 힘을 쓰시며 줄을 끌었던 거 같은데 이젠 모터가 힘을 쓰나보다.

 

아바이 순대마을에서 막걸리와 아바이순대, 그리고 오징어순대로 넉넉하게 배를 채우곤 가까운 카페로. 카페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메모지 한장의 글귀가 눈길을 잡아챈다. 속초바다는 하늘이 녹아내린 '파이란 아이스크림'. 파아란이 아니라 파이란.

 

최민식과 장백지의 그 영화, 먹먹해지는 그 영화의 느낌이 바다로 전이되는 느낌.

 

속초에까지 와서, 이렇게 좋은 날씨에 실내에 있을 수는 없다 싶어 이내 일어나 바닷가를 잠시 거닐다가 발견한 표지판.

부산 갈맷길, 광안리해수욕장을 따라 이어지는 그 길로 무턱대고 걸었다.

 

조각배들이 허연 배를 뒤집어깐 채 넘어가는 석양을 쬐던 시간대.

 

벌써부터 한낮의 열기를 품고 뜨거워진 모래사장에 새겨진 누군가와 누군가의 사랑, 곳곳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하트다.

 

 

하나둘 광안리 저너머 회센터 건물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발포성 아스팔트가 부어져 푹신거리는 산책로 한켠에는 이런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벽면에 엉성하게 그려진 계단을 따라 시선을 자박자박 올려보니

 

두 개의 불빛이 있었다. 몇층인지 아파트의 창문 하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그리고 비슷한 높이의 갸름한 달빛.

 

 

저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어디를 향해 도약해야 하는 걸까.

 

요리조리 따져보며 사진을 찍어보던 중에도 시시각각 치솟아오르던 초승달, 아무 선택도 내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달빛 혼자 저만치 올라가 버렸다.

 

 

 

해운대 재래시장의 좁다란 골목통을 사방으로 쏘다니다 발견한 날카로운 아가리.

 

 

해운대와 동백섬을 지나 광안리로 다시 걷는 길, 신시가지의 초현실적인 빌딩들 앞으로 배를 수리중인 정비공들.

 

 

직선으로 반듯한, 그리고 낑낑대며 겨우 구부리는데 성공한 듯한 완만한 경사도를 보이는 선들이 사방으로 번진다.

 

혹은, 뒷동산에 해가 떠오르듯 둥싯 떠오른 관람차와 그 앞을 철벽처럼 버티고 선 초고층 아파트들.

 

부산의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막 다려낸 옷의 기분좋은 냄새와 섞이면 어떠려나.

 

해운대 센텀시티,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 건물로 기네스 기록에도 등재되었다던가.

 

 

옥상에서의 뷰가 시원하긴 하다.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며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는 참이다.

 

 

그리고 다시 광안리. 발맞춰 걷는 부부와 아이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인다.

 

 

몇년전만 해도 그저 술집 일색이었던 것 같은데, 호사스런 디저트까페나 이쁜 까페들이 엄청시리 늘었다는 건 좋은 점.

 

 

 

 

 해운대에서 동백섬으로 들어서기 전, 벌써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5월초의 해수욕장이 눈이 부시다.

 

 

 이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나무데크가 잘 갖춰졌던 거 같지 않은데, 동백섬을 한바퀴 빙 둘러 걷기 편한 길이 생겼다.

 

 

 

해운대 백사장이 멀찍이 보이고, 이제 사람들은 개미만한 점 모양으로 추상화되어 버린 거리.

 

 

 등대 앞에는 먼옛날 이 곳을 '해운대'라 이르며 큰 바위에 한자로 새겨놨다는, 그렇지만 지금은 다 마모되어 버린 채

 

흔적만 남은 글씨가 몇 자 있고, 멀찍이 대마도와 오륙도가 보인다는 곳을 향한 망원경이 몇 대.

 

 

 그리고 APEC 정상회담이 열렸던 누리마루..였던가. 멀찍이 광안대교가 보이고, 앞에는 시퍼런 부산 앞바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해운대 해수욕장까지. 이전에 친구들과 밤에 술기운을 빌어 걸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카메라를 쥐고서, 유유자적 홀로 걸어가는 참이다. 기억이 분명친 않지만 훨씬 정비가 잘 된 길. '갈맷길'이라 한다.

 

 

 커다란 관람차가 돌고, 그 앞으로는 어느 아저씨의 유유한 자전거 두 바퀴, 그리고 왼쪽으론 두바퀴 '구르마'.

 

 

 언젠가의 태풍이 저 바윗덩이를 여기까지 올려놓고 갔다나.

 

 정신없이 치대는 느낌의 간판숲 너머로 빼꼼히 관람차가 고개를 내밀었다.

 

 수변공원으로 회를 떠와서는 술 한잔 하고 계신 아저씨들. 파도소리가 캬아.

 

 

 이 건물은 도대체, 짜투리 공간도 버려두지 않고 온통 창문이다. 조금 징그럽기까지 한 외양.

 

 

 '갈맷길'이라고 코스를 잡아두고 드문드문 표지도 그려놨지만, 글쎄, 일단 너무 소란스럽다.

 

수출입항이 있는 항구도시답게 커다란 컨테이너 화물차들이 거침없이 내달리며 지르는 소음과 진동이 참.

 

 그래도 요트경기장에 내려앉는 따스한 봄볕을 쬐면서 꽃 한송이 요리조리 뜯어보기도 하고.

 

광안대교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바다를 내달리는 요트를 구경해주기도 하고.

 

해운대 신시가지 쪽에서는 어느 이쁜 모녀의 드라이브도 뒤따라주고.

 

 꼼짝도 않은 채 수면위의 찌만 바라보고 계신 어느 강태공 아저씨도 지나치고.

 

 그리고, 새로운 발견.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두어블럭만 뒤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해운대 재래시장.

 

 툭툭 불친절하게 끊기곤 하는 짧고 엉성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뒤채이다 보면 나타나는 재미난 풍경들.

 

 

 떡집에서 널어둔 장갑과 앞치마가 새하얗게 뒤집혀있다.

 

낡고 변색된 슬레이트 지붕 위, 형광색으로 빛나는 신발끈과 신발.

 

그런 불퉁스런 골목길 중 어느 곳, 문득 세상이 90도쯤 기울어진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게 만들던 간판 하나.

 

그리고 해운대해수욕장. 대략 두어시간 걸린 듯 하다. 쉬엄쉬엄, 설렁설렁 커피도 마시며 걸어서 그 정도.

 

 아직 5월초의 날씨건만, 이미 해운대엔 헐벗은 처자들이 바다에 입수를 하기도 하는 여름이 왔다.

 

 

그리고 묘하게 들뜨고 살랑이는 해변가의 풍경 속에서 유독 튀던 아저씨 한 분.

 

금속탐지기를 둘러메고 자신의 작업장 혹은 직장일 해운대 백사장을 한뼘한뼘, 진지하게 거북이행보중이시다.

 

 

 

태국 꼬싸멧의 아침, 조금은 흐린 남국의 겨울 하늘이었지만 잔잔하게 찰박거리는 바다 위로 금비늘이 번뜩거렸다.

 

벌써부터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를 감각하고 있는 커플.

 

 

 

빠른 속도로 떠오르는 태양, 조가비 껍데기들 틈새로 잘도 비집고 쏘아지는 햇살.

 

 

금비늘이 번뜩이는 파도가 쓸고 간 해변 모래사장 위에는 금모래가 남았다.

 

그리고 어느틈엔가 리조트 앞바다의 단조로운 풍경 속으로 틈입해 들어오는 고기잡이배들.

 

 

 

태국 중부의 국립공원 휴양지 꼬싸멧, 역삼각형 모양 자그마한 섬의 무게중심쯤에 있는 뷰포인트에서 바라본 코발트빛 바다.

 

하루 300바트짜리(약 11,000원) 스쿠터를 대여해서 거의 산악 오토바이 수준으로 역동적인 코스를 내달린 후에

 

도착한 뷰포인트, 사실은 섬의 남단까지 가보려 했지만 비포장의 산길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제법 높은 지대까지 올라와서 자그마한 섬이 온통 눈 아래, 게다가 이런 각도로 굽어보니 바닷물 빛깔도 훨씬 깊고 푸르다.

 

돌아오는 길에 섬의 동쪽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비치를 하나씩 돌아보며 쉬엄쉬엄, 음료도 마시고 바다도 보고.

 

저 서양 아저씨는 바다를 바라보며 태극권을 하는 듯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긴 모래보단 돌로 이루어진 해안인 듯, 잠시 앉아서 코코넛 주스를 홀짝홀짝.

 

꽃과 양산으로 장식된 코코넛 열매엔 물이 그득 담겨있었고, 하얗고 탱글한 젤리 역시 두껍게 붙어있고.

 

해변에선 어느 서양인 커플이 영화를 찍고 있는 중.

 

해안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로 올라가는 길, 정글 한가운데로 스며들어가는 느낌이다.

 

24시간동안 빌려서 열심히 타고 다닌 125cc 혼다 스쿠터. 기름은 일단 만땅 채워주던데, 섬 내부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절반도 채 닳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골목 어귀에선가 만났던 용 그림. 화려한 색감의 용 두마리가 입을 쩍 벌린 채 지키고 섰다.

 

동쪽 해안가에는 방갈로나 값싼 숙소가 많이 모여 있었는데, 그런 숙소들을 가리키는 표지들.

 

슬슬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서쪽 하늘.

 

 

 

둥근 홍등이 주렁주렁 내걸린 장대들이 맥주병이 놓인 테이블들 사이에 가로수처럼 불을 밝혔다.

 

 

몇걸음 내딛지 않아 바다에 들어가 파도랑 놀다 온 사람들이 물을 뚝뚝 흘리며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

 

자그마한 해안 모래사장 곳곳에 색색의 조명들이 불을 밝히고 한줌의 사람들을 꼬드기는 시간.

 

 

 

순식간에 까맣게 불살라진 하늘 아래 점점 휘황찬란한 느낌으로 번뜩거리는 노랗고 붉은 등불들.

 

 

더위가 한풀 꺾이던 9월, 커튼을 너풀거리게 만들던 살랑바람이 마냥 상쾌하기만 하던 그 때의 안면도.

 

서해의 바다 풍경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바다맛이랄 게 없는 굉장히 지지부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야트막한 갯벌을 품은

 

그 어슴푸레한 분위기는 또 나름의 맛이 있지 싶다. 바다라는 게 꼭 시퍼러둥둥 깊고 진한 느낌만이 아니라는 식의 웅변.

 

 

새까맣고 조그만 강아지 한마리가 졸졸졸 사람들 발꿈치를 따라다니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까만 눈이 반짝반짝.

 

그러면서도 겁은 많아서 막상 정면으로 사람을 마주보진 못하고 한발 떨어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간밤에 생겨난 이 모래무더기들은 어느 게가 싸지른 똥무더기들인고.

 

 

꽃지해수욕장 인근의 해변을 잠시 산책하다가 배가 고파졌으니, 안면도에 왔으면 역시 대하.

 

 

이쁜 선홍빛으로 익어가는 새우들의 팔딱거림이 잦아들고, 파라솔을 가게 앞에 늘어세운 가게 안쪽 깊숙히 비밀의 문이 보인다.

 

 

새우깡 따위 던져주는 거 받아먹고 사는 비둘갈매기가 아니라, 진짜 바다냄새 풀풀 풍기는 포스를 풍기는 갈매기떼들.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이 나무 사다리는, 어느 배에서 떨어져나간 걸까. 머리를 바다에 처박고 한없이 뭔가를 그리는 듯 하다.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키가 커졌다 작아졌다, 빨갛고 파란 물풀들이 나무처럼 모래밭에 버티고 섰다.

 

그러고 보니 멀찍이 배 한척이 지나고, 여기는 뭔가 바다 속에 초원이나 숲처럼 녹색의 띠가 사방으로 얽혔다.

 

 

 

 

 

강릉, 묵었던 호텔의 주인 아주머니에게 별 생각없이 "맛있는 칼국수 근처에 없나요", 라 물었더니 냉큼 알려주신 곳. '해궁'이란

 

곳의 푸짐한 해물칼국수. 아무래도 바닷가라 그런지 온갖 해산물이 그득그득.

 

아침을 든든히 먹은 후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포호 주변에서 드문드문 목격되는 네발 자전거를 따라 대여장소로 뙇.

 

핸들이 심플하고 단단하니 이쁘게 생겼다. 게다가 스티어링 휠이 작아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회전감.

 

경포호 옆의 공터에 여기저기서 자전거와 네발자전거..사륜마차를 주차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분들이 보인다. 추위를 막을

 

비닐 차양이 씌워진 것도 있고 그냥 날로 벗겨진 것도 있고.

 

달리기 시작, 운전하는 재미도 생각보다 쏠쏠하지만, 경포호가 생각보다 큰 호수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호수 옆에 살짝 주차해 놓고 사륜마차 전신샷. 앞에만 비닐차양을 위로 걷어올리고 삼면을 두꺼운 비닐로 막았더니 그럭저럭.

 

그러고 허난설헌의 생가로 빠지는 샛길을 달려 버렸다. 원래 호수 둘레길은 다소 안정적인 평지였는데, 다리 하나를 넘어

 

경포호에서 백미터 정도만 떨어지면 바로 나타나는 게 허난설헌의 생가. 오르막내리막이 제법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보통 사륜마차는 절대 도달하지 않는 곳에 와 버렸다는 뿌듯함.

 

 

사륜차를 한쪽에 슬쩍 세워두고 설렁설렁 돌아보고. 이미 바람이 차갑고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오는 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종아리는 살짝 기분좋을 만큼의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허난설헌 생가 뒷켠의 해송림 사이 오솔길을 내달리는 길. 아까 경포호에서 이쪽으로 올 때는 내리막이라서

 

엄청난 속도로 오솔길을 육박해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은 (당연하게도) 오르막. 꽤나 헥헥거리며 페달을 밟았다.

 

 

샛길에서 다시 호숫가 둘레길, 공식적인 사륜차의 코스로 복귀하기 직전.

 

찬 바람이 씽씽 불어도 굳이 이 사륜차를 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제 궤도에 올라 좀 편하게 달려볼까 하다가 문득 옆에서 눈에 띈 꼬불꼬불하고 좁다란, 한눈에 딱 보기에도 마구마구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흥미진진해보이는 길. 물 위에 다리처럼 놓였는데 이리저리 배배 꼬였는 것도 재밌어 보이고.

 

그래서 다짜고짜 진입. 그렇게 또다시 사륜차는 옆길로 새 버리고. 생각만큼 길은 좁아서 사륜차 한대가 꽉 끼는 듯 했다.

 

그 와중에 뭐 재미난 게 있나 싶어 뒤를 따라온 다른 사륜차 한 대. 더구나 저건 6인승이어서 휠베이스가 더 길었는데,

 

덕분에 일정 이상의 꼬불꼬불한 코너를 만나면 전부 내려서 자전차를 들어올려야 했다.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오신 중년부부셨는데 어쩌자고 따라오셔서는.

 

그래도 중간에 차를 돌리고 이리저리 움직일만한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와서, 슬쩍 주차해두고 요리조리 구경도 좀 하고.

 

호숫가 한 복판에 이런 나무데크의 다리가 고불고불 이어지는 데다가 그 길에 꽉 껴서 달리는 사륜차도 재미있었다.

 

다시 정상 경로로 복귀. 그러고 보니 길 중간중간에 조각상도 보이고, 허난설헌의 오라비인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장면들을 묘사한 조각들도 보인다.

 

목 좀 축이고 가라며 만들어둔 음수대의 모양이 재미있다. 입을 쩍 벌리고 선 개구리 두 마리.

 

한바퀴를 도는데 한시간이면 느긋하고 유유자적하게, 더러는 딴 길로 새가면서 달릴 수 있는 듯 하다.

 

타기 전에는 뭐 특별한 게 있겠어, 싶다가도 생각보다 경포호 주변으로 샐 만한 곳도 있는데다가 기본적으로

 

두 발로 페달을 저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주는 쾌감이 진하다.

 

 

 

 

강릉에 가면 꼭 들르게 되는 커피 포레스트 바이 테라로사, 경포 해수욕장에서 순긋 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송숲 옆에

 

슬쩍 숨어있는데, 그렇게 좁지 않은 건물 앞 주차장이 온통 차로 가득하다.

 

벽난롯불이 이글이글 열기를 내뿜는 1층의 공기가 2층짜리 높은 천장의 카페 건물을 지긋이 덥히고 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다소 어둑한 와중에도 중간층에 걸려 있는 인형이 눈길을 잡는다.

 

 

까페 라떼랑 아포가토, 커피를 붓기 전에도 이미 초코시럽이 촉촉하게 쿠키랑 아이스크림에 젖어들었다.

 

 

바닷바람에 치이긴 했겠지만 아직 해송림의 푸른 빛이 살아있던 11월, 햇살이 문득 봄인양 하던 잠시지간.

 

시원하게 유리창으로 구분된 야외 테라스, 겨울 바람과 얄포름한 겨울 햇살이 자유로이 드나는 공간처럼 보인다.

 

 

 

까페에서 책도 보고 뒹굴대다 보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까무룩하니 바닷속으로 잠겨버리고 까페 역시 어둠에 잠기다.

 

 

까페 입구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찻잔과 찻잔받침들이 반짝반짝 금빛을 번쩍이며 늘어서 있기도 했고.

 

 

도심의 이러저러한 까페들과는 달리 넉넉한 스탭들의 공간과 위아래로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 원두나 찻잔들이 여유롭다.

 

(아마 이건 서울과 지방의 땅값 차이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화염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사실 열기는 그다지.

 

떠나기 전 까페 건물 앞에서 노랑불빛이 일렁이는 유리창들을 한 장 담았다. 해송림 너머에서도 슬몃슬몃

 

드러나보이던, 보석을 담아둔 유리상자같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까페.

 

 

 

 

 

 

 11월의 바다, 이런 추운 날씨에도 꽃마차는 경포 해수욕장 근처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닐 포장막 안과 밖으로 울긋불긋한 조화들이 샛노란 마차 색깔과는 잘 어울려 보인다.

 

확실히 바다 근처에서 거칠 것 없이 내달리는 바람 덕분에, 소라도 팔고 번데기도 파는 아저씨 뒤를 지키고 선

 

커다란 파라솔이 마치 격류에 휘말린 말미잘처럼 촉수들을 나부끼고 있는 중. 

 

모래사장까지 들어오지는 못한 마차 대신, 경포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는 말들만 들어와있다.

 

느긋하게 누워 손님을 기다리는 말, 그리고 무릎을 구부리는 것조차 귀찮은 듯 나른한 표정이 인상적인 말. 

 

 

 바닷바람 냄새를 잔뜩 품고서, 강릉의 커피골목으로 들어왔다. 골목 입구서부터 벽면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예사롭지 않다.

 

 

 사층짜리 건물 한 채가 오롯이 까페였는데, 아쉽게도 옥상은 개방되어 있지 않았고 2층에만 올라가도 이렇게

 

한가롭고 포근한 분위기의 공간이 펼쳐졌다는.

 

 

 

그렇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두 손으로 모아쥐고 홀짝거리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코앞이 다시, 바다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울릉도 평리의 예림원(a.k.a. 문자조각공원)을 걸어나와서 다시 북쪽 해변을 따라 울릉도 서안으로 향하는 길.

 

둥글둥글 다듬어진 자갈들이 차르르륵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파도랑 얼싸안고 나뒹구는 해변.

 

 

 

시멘트 옹벽 아래까지 도톨도톨한 돌기가 선연한 분홍빛 혀를 빼물고는 온통 흐드러진 꽃무더기.

 

그러고 보면, 바다로 향한 등대의 왼쪽은 꼭 빨간색, 오른쪽은 꼭 하얀색으로 반짝거린다. 일종의 약속인 듯 하다.

 

 

현포항에 들어서는 길목, 방파제가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있는 야트막한 내해에 소심하게 뻗어나간 구름다리.

 

뒷꿈치가 완전히 아작이 나서, 게다가 울릉도의 길가엔 편의점도 슈퍼도 흔치 않아서, 급기야 현포항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경찰서에 무작정 들어갔다. 밴드랑 기타 응급약상자가 있을까 했는데, 없다며 근처의 주민분께

 

밴드를 얻어주신 경찰 아저씨를 기다리다 한 컷. 걸음이 빠른 경찰 아저씨가 화면 한구석에 잡혔다.

 

 

맨발도 답이 아니고, 밴드를 발라봐야 이미 뒷꿈치는 피칠갑을 했고. 잠시 암담해하며 쉬어가던 참. 주머니에 꽂았던

 

핸드폰은 그냥 신발에 발 대신 우겨넣고 노래를 틀어버렸다. 신발이 그대로 주크박스로 변신해 버린 참이다.

 

그래도 돌아보면, 한걸음 한걸음 걷다보니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잠시 앉아 쉬어가던 현포 전망대. 멀찍이 지나쳐온 코끼리바위니 노인봉이니, 송곳니처럼 삐쭉 튀어나온 송곳산도 보인다.

 

그리고 울릉도의 밭떼기에서 자주 보이던 저 조그마한 모노레일. 아니지, 레일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니 '모노'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워낙 경사가 심한 비탈을 일구고 가꿔야 하니 이동네엔 저게 필수품일 듯.

 

울릉도는 크게 북면, 서면, 그리고 울릉읍으로 나뉜다. 울릉도 북쪽 해변의 서쪽끝과 동쪽끝을 꼭지점으로 한 역삼각형

 

모양으로 울릉도 북쪽을 차지한 북면의 끄트머리를 지나는 참. 돈키호테를 기다리는 커다란 바람개비가 꽂힌 곳이다.

 

 

현포와 태하 사이, 그러니까 울릉도의 북면과 서면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은 구불구불 꼬부랑길.

 

슬슬 짙푸른 군청빛의 바다가 하늘로 기어오르고.

 

조그마한 초등학교 분교 앞 운동장 가득 뭔가를 널어 말리는 계신 아주머니들을 지나.(아마도 울릉도 특산나물 '부지깽이'인 듯)

 

이처럼 씁쓸하고 잔인한 이야기가 서려있는 성하신당으로 도착.

 

 

나이 어린 동남동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백골이 되기까지 사람을 원망했을까, 울릉도 앞 험한 바다를 원망했을까.

 

 

 

 

 

육칠년만인가, 참 오랜만에 다시 찾은 추암 해수욕장. 그리고 추암 촛대바위.

 

추암의 해돋이를 보겠다고 부지런히 달렸지만, 아쉽게도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어슴푸레한 빛의 띠만 보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했던 건, 마치 거대한 대포를 쉼없이 쏘아올리듯 온몸을 진동시키는 삼엄하고 우람한 파도소리.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울타리도 꾸며놓고 망원경도 가져다 놓고 그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사람 한명 찾기 힘든 추암의 해안 산책로. 해는 구름 뒤에서 스물스물 떠오르고 있겠지만 바닷바람은 살을 에인다.

 

 

 

 

아스라히 보이는 배 한 척. 그리고 수만년 파도에 으깨지면서도 여전히 뾰족 솟은 돌부리 하나.

 

 

이 곳의 풍경을 한층 더 삼엄하게 만드는 건 여느 해안선에서처럼 바다를 온통 가로막고 선 철책들.

 

 

추암 촛대바위 들어가는 길목,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부리며 서 있는 돌멩이들. 위태로운 소원들.

 

추암 촛대바위 들어가는 길의 낡은 집 한 채는, 아마도 칠팔년전에도 눈에 담아놨던 풍경이다.

 

 

 

 

파도에 떠밀려온 온갖 쓰레기들, 외적을 막아낼 철망엔 쓰레기만 걸렸다.

 

 

철망에서 흘러내린 녹물이 온통 시뻘겋게 바닥을 적시고 있는 곳. 이제 60년이 되어가는 살풍경이다.

 

 

 

 

추암 촛대바위, 해수욕장 옆에 조각공원. 얼마나 관리를 안 하고 있는지 잡초가 보풀보풀.

 

 

좀 뜬금없다 싶은 조각공원 너머로 파랑주황 슬레이트 지붕이 이어지고 그 너머 수평선이다.

 

 

 

추암의 일출을 보러 가는 화살표 따라 노니는 청둥오리들의 물결.

 

 

 

추암역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던가.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기차역은 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역사 건물도 없이 그저 철로 옆에 플랫폼 하나가 전부인 추암역. 내려다보니 주차장에 글자가 떠오른다. 공허한 문구.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해안가를 거닐고 촛대바위에 눈길을 준 후, 해가 완전히 떴지만 결국 해돋이를 보는 건

 

실패했음을 확인하고 묵호로 달려가기로 했다. 울릉도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 해돋이를 보려 왔던 참이었으니.

 

 

추암 해수욕장에 접근하려면 이렇게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굴다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옆에 사람이라도 걸어지난다 하면 꼼짝없이 조심운전해야 하는, 그런 좁고 어둡고 짧은 굴다리 터널.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을 보고선 겨울에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던 사람이 있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은 슬펐다 했다.

 

그이에게서 영화를 추천받았고, 강릉을 추천받았으며, 어느날은 나 역시 혼자 영화를 좇아 강릉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소 잿빛이었던 둘의 기억에 몇가지 빛깔을 더하는 여행. '맛있는 인생'을 따라잡는 여행이 되었다.

 

 

영화에서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나는 호텔, 경포대 현대호텔은 마침 이날이 영업 마지막날이었다. 아예 다 부수고

 

새롭게 다시 신축을 한다는 이 건물, 그래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문득, 서울에서의 번잡하고 불쾌하고 난처한 일들에서 탈출하듯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강릉,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현대호텔이었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건 호텔의 까페 카리브. 밤이었던가 아침이었던가, 그는 메뉴에 나와있지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찾으며

 

여점원을 괴롭혔고, 그녀는 귀찮은 손님의 난처한 질문에도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었다.

 

그녀가 이 곳에 묵었을 때는 미처 까페까지는 못 둘러봤다 했었다. 여기서 앉아 차라도 한잔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이번엔 함께 왔다는 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어디였더라, 경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였던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라고 딱 집어서 이야길 못하겠다.

 

사실 어디인들 뭔 상관인가.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경포 앞바다가 이렇게 이쁘다는 거,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들이

 

영화를 만들며 이렇게 저렇게 동선을 짜고 구도를 잡았으리라는 상상 자체가 재미있는 거니깐.

 

호텔 앞 로비에 있던 푹신해보이는 쇼파들. 저기 어딘가에 앉아서 그는 그녀가 일이 마치길 기다리기도 했었고,

 

그녀는 일이 없는 날 강릉 구경을 함께 나가기로 한 아침, 그를 기다리기도 했던 거다.

 

어라, 그런데 현대호텔의 마지막밤을 아쉬워했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걸까. 어느 프로축구팀 선수들도,

 

그리고 지방순회 공연중인 듯한 강부자 어르신도 체크아웃을 하곤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호텔이야 부수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고인 물을 할짝거리며 마시는 청설모 한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영화 속에서 그가 그녀를 좇아 스토킹하듯 뒤를 밟던 그 산책로, 그리고 언젠가는 그 혼자 술에 잔뜩 취해서

 

욕지거리를 우물거리며 호텔방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했던 길.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 차들이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늘어선 아스팔트 찻길 너머로 노란 모래사장, 그너머 푸른 바다.

 

그와 그녀, 그리고 또다른 그녀는 이런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호텔 앞 입구. 제법 운치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드는데, 이제 없어진다니 왠지 더 아쉬워서 쉽게 못 뜨겠다.

 

경포 해수욕장을 거닐며, 하나둘 켜지는 가게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해풍에 잔뜩 움츠러든 해송 너머로 새하얗게

 

질린 거대한 불빛 하나가 저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래사장 위 흔들의자가 저거였을까. 노랑 풀꽃이 점점이 피었다.

 

경포대를 따라 이어지는 길 위에서 불쑥 나타난 꽃마차. 세상에, 청계천변에도 꽃마차가 달리더니

 

경포해수욕장에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다. 말을 보면 기분좋게 달그락거리는 그 말굽소리를 꼭 듣고 싶어지는데

 

아쉽게도 아직 꽃마차 장사엔 제철이 아닌지 말들은 모두 가만히 서서 자는 듯 쉬고 있었다.

 

 

 

 

 

 

 

 

 

경포호를 한 바퀴 돌아보려 나선 길, 첨에 강릉에 도착해서는 여기서부터 바다인가 시끌시끌하다가 택시기사

아저씨한테 타박을 맞았었다. 그럴 만큼 크고 넓은 호수, 햇살이 모래알처럼 흩뿌려진 그 수면위로 화살표처럼

손가락질하고 나선 전망대.

너울너울. 겨울치고는 부드러운 바람이 수면에 몸을 부비며 자욱을 남기곤, 그 물결을 헤치며 오리들이 나아간다.

오리 두 마리가 둥싯둥싯 떠있는 수면 너머, 멀찍이 경포호의 반대편 끝이 보이고 그 위로 보이는 직선상의 구름 두개.

경포호 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섬이랄까.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세워진 조그마한 그 곳에는 새들이 잔뜩 와서

쉬었다 간다고 했던 거 같다. 뱃놀이가 가능하면 저기까지 배타고 나아가서 들어가 놀아도 좋겠는데.


호수 곳곳에 둥둥 떠다니며 한량질 중인 물새들. 그렇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똥꼬를 하늘높이 쳐들고는

쉼없이 자맥질하며 먹이를 찾는 게 나름의 먹고 사는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생선일까, 경포해수욕장 가는 길에 벚꽃나무가 쫙 이어지는 길이 유명하다던데, 그 벚꽃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저렇게 인공불빛이 밤에 일렁일렁거릴 가짜 나무가 심어져 있던 거다. 그런 나무에 기대어 허공에 내걸린 생선들.


호수의 가장자리, 제법 두꺼운 얼음이 수면을 덮어버린 곳 위에서는 한 무리의 새들이 뒤뚱뒤뚱, 발맞춰 걷고 있었다.

경포대로 옮겨지던 발걸음이 살짝 벗어났던 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호수 옆 밭두렁에 촘촘히 꽂힌 채

겨울바람에 떨며 문득 잊었다는 듯 파닥거리던 바람개비들 때문.


그러고 보면 이날 참 하늘이 쨍하니 맑았다. 경포대에 도착하니 모두들 쌍쌍, 게다가 문화유산 해설사까지

동반한 단체 여행객들이 우르르 있길래 똥마려운 강아지모냥 주변에서 뱅뱅 돌며 차례를 기다리다가 한 장.

경포대에 올라 바라본 경포호수. 좀더 걸으려 했는데,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그리고 계속 기다리던 호출.

그래서. 경포호의 나머지 둘레길은 다음 기회에.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하며 찾았던 강릉 경포해수욕장. 해풍을 막는 야트막한 솔숲 너머로 깔끔한 흔들의자가,

그리고 그 너머로 탈색되어버린 듯한 누런 빛의 모래사장과 퍼러딩딩한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 도달하면 더 나아갈 곳이 없다 멈추게 되지만, 사실 조금만 몸을 틀면 될 일이다. 바다와 함께, 파도소리와

함께 발맞춰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한하게 뻗어가는 거다.

모래사장엔 경사에 기대어 꽁꽁 얼어있는 잔설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여름철 뜨겁게 달궈졌던 누런 모래사장이

색이 바랜듯 창백해져버린지라 시퍼렇게 차가운 얼음눈들은 자연스레 보호색을 맞춰입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앞서 걸어간 걸음걸이들. 발자욱들이 줄맞춰 정연히 늘어선 게 왠지 땅을 헤집어둔 공동묘지같다.

무언가 저 구덩이에 넣고 봉긋하게 흙을 쌓아올리면 파도가 와서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세기말적 풍경.

바다를 따라 걷는 기분이 그랬다. 파티나 잔치가 끝난 뒤의 적막함이랄까, 50연발 폭죽이 숨쉴틈 없이 터지고 나서

텅 비어버린 채 모래사장에 나뒹구는 느낌. 겨울바다의 풍경들이 하얗게 재만 남아버린 가슴에 날아와 박혔댔다.

BGM은 서영은의 '겨울바다', 경포해수욕장에서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뭐 뾰족한 일정이 있는 것도

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냥 저 위쪽 어딘가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슬슬 걸어보기로 했던 참이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불쑥 기습하는 파도에 발걸음이 뒤척거리기도 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파도에 씻겨내리기도 하는 길.

그러다 문득 발에 채인 유리병 하나.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막힌 게,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한눈에도 파도에 실려온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였다. 뭐지, 일본에서 왔나. 아님 미국..?

그 자리에서 코르크마개를 따고 안의 종이두루마리를 꺼내 보았다. 약간 습기가 차 있긴 했지만 까끌한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남아있고, 테이프로 허리춤이 둘둘 감겨 있어 슬쩍 들춰본 속지엔 한글이 써져 있는 듯. 일단은

들고 가다가 나중에 따뜻한 데 앉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꽁꽁 언 민물길이 바다로 향하는 길, 얼음에 반사된 빛무리들이 시멘트 교각 바닥을 긁으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라는 한국의 해안가에 빼놓을 수 없는, 군부대와 군대 시설물들. 여긴 심지어 탱크가 한대

바닷바람에 녹슬어가고 있었다.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모래사장 사이로 야트막한 개울을 만들었다. 찰박거리며 위태로이 바다로 향하는

물길을 시시각각 얼리며 덮쳐오는 얼음판, 그 위로 성글게 번지는 빛그림자.


더이상 물의 흐름이 읽히지 않는 빙판, 여러번 깨지고 얼고 깨지고 얼고의 과정을 반복한 듯 조각난 얼음판들이

조각보처럼 이리저리 얽혔다.

그리고 어느 모래사장에 꽂힌 채 당당히 바다를 굽어보던 팽팽한 낚시대 하나. 가늘고 약해 보이는 낚시대가

바싹 성난 듯이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게 제법 긴장감을 머금고 있다.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뒷주머니가 허전해졌다. 아까 그 와인병 안에서 꺼냈던 메시지를 뒷춤에 꼽아넣고 있었는데

여러번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어느 틈에 도망가 버린 것. 왠지, 그 종이쪼가리를 꼭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발걸음을 되짚어 거꾸로 걷길 십여분. 이렇게 얌전히 구덩이에 놓여있는 걸 용케 다시 만났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바다가 떠밀어 보내준 메시지도 다시 찾았고,

방파제를 때려부술 듯한 소리를 내며 들썩이는 파도를 보며 계속 걸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어졌을 유리조각조차 이렇게 부드럽고 둥그런 모습으로 바꿔버리는 파도의, 바다의 위력.

특히나 겨울바다가 주는 신산하고 허한 느낌이란 건,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잘게 부숴버리다가

종국에는 남는 것 하나 없이 지워버리는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감이나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다 색깔이 한결 더 검푸르다. 잉크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수면으로 밀어올려져서는 점점

에메랄드빛으로 연해지다간 하얀 파도로 보글보글. 모래사장까지 끌려나온 파도는 뒤미쳐 온 파도에 익사해버린다.

이쯤이 좋겠다 싶어서, 메시지를 펼쳐 보았다. 누군가의 글씨가 하얀 종이 가득 적힌 채 인연을 칭하며 친구를

청하고 있었고,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인사까지 적혀있었던 메시지. 이메일 주소도 적혀있었지만

알아볼 수가 없어 연락할 도리는 없고, 배를 접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게 최선이지 싶었다.

그렇게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개울에 띄워서 바다로 흘려보내며. 중간중간 모래톱에

걸쳐 멈추기도 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 맴을 돌기도 했지만 어쨌든 바다까지 나가는데 성공.

순긋해변이던가, 간소하게 만들어진 부두가 방파제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철제구조물 위로

앙상하게 덮인 나무판때기, 그리고 딱딱한 부두시설과 딱딱하고 약한 배 사이의 완충을 위한 고무타이어.


파도가 철썩철썩 방파제에 속절없이 부딪혀 깨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부두의 외곽을 단단히 감싼 방파제,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쩍쩍 벌린 채 내팽개친 탕녀나 탕아 같기도 하다.

모래사장을 따라 계속 걷고 있는 참이었다. 경포대에서 사근진, 순긋, 순포해변까지 이름이 계속 바뀌고는

있었지만, 모래사장은 죽 이어진 한 길이었다. 물론 이렇게 중간중간 민물이 넘실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물이 마른 겨울철이라 잔뜩 녹슨 다리는 아무 쓰임도 없이 그저 거기 있을 뿐.


바다를 계속 끼고 걷자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바다가 모든 걸 지워버리고 무화시켜 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서 허무하다 했지만,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리 잘게 깨고 부수고 으깨어도 뭔가는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들이 조금씩 쌓여 모래사장을 이룬 걸 테니까. 말하자면 저건 수백년, 수만년 전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거대한 아카이브인지도 모른다.

사념(思念), 사념(沙念), 모래들의 사념들. 파도가 아무리 으깨고 바스라뜨릴 기세로 억겁년을 덤벼든다 해도

사념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갔다. 쉬엄쉬엄 사진도 찍고 돌아보기도 하며 걸은 길인지라, 게다가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걷기 쉽지 않은 모래사장으로만 따라 걸어온 길인지라 꽤나 시간을 들여 걷고 있었다.

저 너머 고래등처럼 수면 위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갈매기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석들이

싸질렀을 게 뻔한 배설물들이 성난 파도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하얀 줄무늬가 얼룩덜룩.

순포해변을 지나 계속 올라가려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해안가를 따라 철망을 얹은 철책이 끝없이

이어져있고 중간중간 저렇게 침투 대비용 표찰까지 붙여놨다. 어렸을 때는 돌멩이를 철책에 꼽아놨었던 거 같은데.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 녹슨 깡통만 굴러다니며 버려진 해변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엔 바다를, 한쪽엔 부대를 끼고서 아예 쭉 주파해버릴 생각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난리가

났다.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흔들고.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길래 은근 부아가 나서 걍 지나간다는데 왜 난리냐고

한마디 했다가, 그냥 왔던 걸음 되짚어 돌아가기로. 불쌍한 군바리들, 까라면 까는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얹었던 탈지면 솜뭉치를 닮은 얼어붙은 눈 한조각. 밟으면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게

좋아서 한참 밟고 돌아다니다가 조그마한 이 녀석은 차마 밟지 못하고 사진 한장.

이 녀석은 얼마나 묵은 걸까. 모래를 잔뜩 묵은 이 녀석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단단한 알루미늄 캔이 호일처럼

얊고 약해질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조금씩 몸이 헐어가며 모래알로 변해갈 거다.

돌아나와선 부대 뒷켠의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앙상한 싸리비를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겨울 나무, 그 위로

싸리비에 이리저리 쓸리고 번져버린 듯한 겨울 하늘. 슬몃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애초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던 참이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이 근방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고 했었다.

겨울바다라봐야, 도착하면 금세 추워져서 이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런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거짓말처럼 눈 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렇게 근 세시간, 경포대에서부터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밟아 걷던 길이 끝나고, 테라로사에 앉아

다시 또 네다섯시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끼적이고.


잔뜩 걸었지만, 쉼없이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막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따뜻한 까페 안에서 이상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던. 그렇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밤을 꼬박 샌 참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곧 동터올 시간이 되었음을 의식했고, 굳이 커다란 가방에 쑤셔넣어온 삼각대가 머릿속 귀퉁이부터

스물스물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목도리까지 꽁꽁 싸매고 내키지 않는 몇걸음 나서니 바로 경포 해수욕장의 모래변.

싱겁게 벌겋던 하늘, 날이 흐려 해뜨는 게 안 보이나 했다. 어느 순간 파도가 미친 듯이 펄쩍거렸고, 귀가 얼얼한

파도소리에 덩달아 흥분하기라도 한 듯 붉은 해가 솟았다. 잿빛의 짙은 안개같은 구름을 찢고 그야말로 불쑥, 솟았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꽉 채운 채 미동조차 없던 그 한가지 생각도 잠시 사라진 듯 했다. 다행이었달까.

환상이었다. 그 생각은 잠시 밀려났던 성난 파도처럼 내 머릿속을 온통 휩쓸고 다시금 흠뻑 잠식해버렸다. 그렇지만,

태양이 솟고 파도가 철썩이던 그 순간의 압도적이고 삼엄하던 분위기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온몸에 직접 와 부딪히는

것처럼 격하게 헐떡거리며 절정을 향해 내달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그 거대하고도 무거운 구체의 몸뚱이를 우아하고도

가볍게 하늘의 길을 따라 쳐올리던 태양의 부지런한 궤적.


 


 

@ 강릉, 경포 해수욕장.

부산 달맞이길을 걸으며 바라본 해운대 신시가지, 그리고 동백섬 너머로 광안대교가 얼핏 보인다. 옆으로 계속 바다를

끼고 걷는 달맞이길 위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내렸다.

달맞이길은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와우산 중턱의 고개길을 말하는데, 근 8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통칭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와우산 꼭대기랄 수 있는 달맞이동산에 있다는 해월정까지 걸을 생각을 하고

나선 길, 해운대에서부터 내처 걸었는데 계속 오르막길이라 조금 걷기가 부담스럽다.

그래도 날씨가 워낙 좋아서 햇살이 저토록 눈이 부시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모래사장에서 팔을 한껏 뻗어

갈매기를 부르는 여자의 몸짓 아래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근데 무슨 갈매기들이 서울역 앞 비둘기떼처럼

저렇게 무질서하게 모여있냐 말이다.

길 옆으로는 바다를 바싹 끼고 달리는 철도 레일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왠지 도시에 저런 철도 건널목이

있으면 운치가 있달까, 고풍스럽달까, 여하간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딸강딸강, 종소리가

울리고 천천히 가로대가 내리뉘이고 나면 잠시후 잔뜩 닳아빠진 쇳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

달맞이길 좌우에는 갤러리나 까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 제법 적잖이 위치해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여행자를

유혹하는 건 느긋한 아침나절의 평화로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브런치 메뉴들을 파는 까페들. 약간씩 내외부 치장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한 건물들이 모여있는 풍경은 서울에서도 낯설지 않다.

달맞이길의 어느 횡단보도, 홀쭉했던 달이 점점 차오르며 둥싯해지는 모습, 그리고 둥그런 궤적을 그리며 점점

이동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문탠로드, 부산국제영화제 때 전세계 영화인들이 다녀가며 사진도 찍고 했다는 달맞이길의 한 부분을

특히 '문탠로드'라고 이름붙인 거 같은데 그 문탠이란 게 혹시 '썬탠'할 때 그 '탠'과 '문MOON'의 결합인 걸까.

아마도 그런거 아닐까 싶은데, 맞던 아니던 간에 이름 갖고 이렇게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명센스는 쫌 아니다.




강화도 외포리 외포여객터미널, 이곳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석모도를 들어가려는 차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석모도 석포리로 불과 십분 남짓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드는 비용은

승선비용 대인 2,000원, 소인 1,000원, 승용차 14,000원. 편도비용이 아니라 오가는 왕복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식이다.

선착장 끝이 바다에 슬몃 잠겨있고, 그 앞에서부터 일렬로 늘어서서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차들. 저만치 앞에서

갈매기떼를 무슨 날파리들처럼 몰고서 오는 유람선이 보인다. 

이제 배 앞의 입을 활짝 벌리고는 항구와 단단히 연결짓도록 인도하는 아저씨, 배 한대에 승용차로 한 삼십여대이상

들어가는 거 같았는데 이날따라 관광버스로 석모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수능시험을 치고나서

보문사의 부처님께 부탁할 일이 많아서라거나, 석모도에 있는 조그마한 산들을 오르내리려는 거 아닐까 싶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석모도 가는 길 배 위에서 갈매기에 새우깡 던져주기 놀이. 이제 갈매기

녀석들도 어찌나 닳고 닳았는지 엔간한 새우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게으르게 배를 따를 뿐이다. 던져졌던 새우깡이

바다에 힘없이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바다에 살짝 내려앉아 먹기도 하고, 요행히 자기 비행 경로에 맞춤하게 던져진

새우깡만 잡아챌 뿐, 던져진 새우깡을 먹겠다고 서로 다툼하거나 사람 손가락까지 잘라먹을 듯 덤벼드는 '기백'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새우깡 안 사고 남들이 던져주는 것만 구경하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배부른 갈매기들.

▲ 네이버에서 찾아본 석모도 지도. 왼쪽 아래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와 '민머루해수욕장'이 보인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장구너머포구. 네이버 지도상에는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라는 긴 명칭으로 나와있지만

장곶포구 혹은 장구너머포구라고 흔히들 부른다고 한다. 포구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정비되어 있진 않아서

차 두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날만큼의 아스팔트포장이 되어 있고, 따로 간판이나 표지판이 서 있는 게 아니라

길 바닥에 저렇게 노랑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정도. 포구에 도착하니 낙조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횟집들이

각자의 배 이름을 걸고서 성업중이었다.

그리고 흐릿한 날씨에 벌써부터 시뻘겋게 변해버린 해가 걸쳐 있는 하늘 아래로, 마치 태양으로부터 뻗어나와

바닷물에 일렁이는 햇살인 것처럼 출렁이는 배들이 저 멀리부터 점점 커지며 눈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포구에 배들이 전부 들어와있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포구가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한 켠엔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채

시멘트 바닥 위로 끌어올려져 있던 커다란 닻이 하나.

바닷바람이 꽤나 쌀쌀했지만 바다에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그네들도 추운지 제각기

방해받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선 낚시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혼자 살짝 떨어져 있는 저 분이 눈에 띄었다. 어쩌다 보니 저 분이 낚시대를 드리워서는 저 어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재미있어서 사진으로 담아봤다.

포구나 그런 곳은 보통 갈매기떼들이 하릴없이 노니며 주인없는 생선이 있지는 않나 호시탐탐 노리는 게 상례인데,

아무래도 석모도의 갈매기들은 전부 외포리와 석포리를 잇는 카페리호를 따라다니는 거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구너머포구로 들어오는 배, 포구에서 나가는 배들이 그 사이에도 쉼없이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 곳에서 아예 바다로 삼켜지는 태양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괜찮겠다 싶어서 기억해두었다.

강화도에서 먹었던 것 중 맘에 들던 조합 하나는 강화도인삼막걸리랑 순무김치, 석모도에서도 순무가 나는지

장구너머포구를 뜨기 전 한 옆에 소담하게 무더기짓고 있던 자줏빛 순무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민머루해수욕장'.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민머루, 미음발음이 연이어 나는 이름이

기억하기도 쉽고 이쁜 거 같다. 석모도에 있는 유일무이한 해수욕장이라는데 이미 바지런한 이들은 텐트를 펼치고

바다를 바라보며 캔맥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새 날씨에 바다에 들어가긴 좀 무리겠고, 바다를 바라보며 캠핑을

하기엔 맞춤한 장소일 거 같다.

바다만 바라봐도 추워 보이는 11월인데다가 바닷바람도 제법 세차다. 아무래도 여름철 바다와는 달리 다른

봄가을겨울의 바다란 건 다분히 관상용이라는 혐의가 짙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지치지도 않고 쉼없이 달려들다간 허물어지는 파도에 질릴 줄도 모르고 시선을 빼앗기는 것.


아니면 이렇게 바닷가 모래사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전거를 타고 바퀴가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잠시 주행해

본다거나, 낚시대를 바닷가에 드리워보는 것도 괜찮겠다.


모터보트는 뭍에 잔뜩 끌어올려진 채 엔진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년 여름까지 움직이지 않으려나. 여름이면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글바글 줄서서 샤워장을 이용하고, 모터보트의 엔진도 쉴 줄 모르고 뜨겁게 달아오를

텐데, 민머루해수욕장의 여름철 풍경이 문득 환상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계절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산악오토바이, 네 바퀴의 ATV를 타고 해수욕장 근처를 돌아보거나

가볍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건 비만 오지 않으면 언제든 환영이다. 사진에 찍힌 건 그렇게 당장 드라이브를 나갈

상태는 아니고, 다만 카울 옆에 붙은 '페라리' 마크가 너무 선명해서.

천막이 걷힌 채 뼈대만 차갑게 남아있는 가을 혹은 겨울바다 위로 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뜩이나 춥고 센치한

풍경에 저런 앙상하고 차가운 알루미늄 뼈대가 시꺼멓게 타버린 듯한 모습을 보니 이정도면 이맘때 바다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센치함은 만땅 충전되었지 싶어, 이제 슬슬 떠나도 되겠다 싶었다.

민머루해수욕장을 떠나려는데, 아까 장구너머포구에서부터 잘 보이지 않던 새떼가 보였다. 갈매기는 아니고,

쐐기 모양의 대형을 이루어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들인 거 같았는데, 덕분에 이맘때 바다를 찾아 느끼고 싶은

스산함이라거나 센치함이라거나 그런 감정이 충만해진 채로 떠날 수 있엇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협재 해수욕장, 그야말로 제주도 관광의 성수기이던 8월 언젠가쯤이어서 그랬는지 해변가엔 온통 쓰레기가

검정 현무암돌바닥을 가리울 지경이었지만 나름의 운치는 여전했다.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반백 아저씨의

살짝 굽은 뒷 등덜미가 바닷바람에 조금 도닥여지는 거 같기도 하고.

해수욕장 앞으로 이어진 마을은 온통 구멍숭숭한 현무암 돌담으로 집집이 구획되어 있었는데, 그 엉성한 돌담에

하나 더 얹어진 돌멩이인 양 엉성하게 끼어 있는 새파랑 우편함이 웃겨서 사진 한장.

바다에 연한 시멘트 방조제. 하루방을 저런 식으로 표현해 놓으니까 무슨 모아이의 석상 같기도 하고, 표정도

뭔가 굉장히 엄하거나 화난 듯 하기도 한데다가 서로 등 돌리고 있으니 영락없이 싸우고 삐친 모습이다.



바다 색깔이 진짜로 이뻤는데, 사진엔 채 반의 반도 담지 못한 거 같다. 동남아의 유수한 신혼여행지 앞바다라며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여기에 펼쳐져 있었는데.


먼 바다에서 둘둘이 짝지어선 서로 마주보며 데이트 중인 어선들.

그리고 현무암질 용암이 질질 흐르다간 바다를 만나 쩍쩍 갈라지며 급격히 식어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해변가.


해녀상. 튜브를 한팔에 꿰고 있는 다소 현대적인 매무새의 해녀도 있었고, 저고리 고름을 곱게 맨 채 등짐을 지고

있는 해녀도 있었고. 그리고 그녀들 너머로 보이는 투명한 바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내려앉기 전에 바닷물에 발톱부터 담군 타이밍, 사람들이 슬슬 바다 밖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제주 한림공원에서 토실토실 잘 자라고 있던 선인장들, 심심하거나 단조롭게 생겼다 싶은 외관과는 달리 피어내는

꽃들은 제법 천연색이 발랄하니 샤방샤방한 모습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고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구는

어쩔 도리가 없어 손 뻗어 닿기 쉬운 곳에 있는 선인장들은 마치 '골든벨' 최종도전자의 그것과도 같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명찰들이 바글바글 달려있는 모습. 

이 나무의 이름은 '와싱토니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와싱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라는데 와싱톤이라..

아무래도 저 안내판은 이 '와싱토니아'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1971년쯤 만들어진 거 아닐까 싶었다.




곳곳에 있던 제주 전통 현관문인 '정낭', 자연스레 한림공원 내부의 동선을 잡아주고 있었는데, 이런 돌담들도

은근히 어거지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돌담을 허물지 말아달라는 표지판이 서 있을 정도.

내부의 온실에서 자라고 있던 뱀이나 도마뱀 같은 동물들에 더해 거북이들도. 두마리가 서로 반대쪽을 바라보면서도

무슨 탑쌓기하듯이 포개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지면 느끼는 게 아니라 보면서 느끼는 꽃들. "보기만 허고 만지지랑 맙서예!"








한림공원에는 협재굴과 쌍용동굴이 있다.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저 만화 캐릭터를 보면서 왠지 '낢 이야기'의

낢 작가 캐릭터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협재굴 들어갔다, 협재굴 나왔다. 빛이 반겼다.



그리고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왔던 정령들처럼 봉긋봉긋 튀어나온

돌 인형들. 짙고 거칠게 파인 눈매가 장난스럽기도 하고 살짝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한림공원을 떠나 바로 앞의 협재해수욕장이나 금능해변으로 옮겨가는 길, 하루방과 해녀가 어깨를 걸고는

살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강릉에 있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원래는 요새 강릉 지자체에서 꾸며놨다는 바우길을 따라 걸으려

했었다지만, 어쩌다보니 바우길 코스에서 벗어나 발길 닿는대로 걷는 일정이 되어 버렸다. 그건 아마도

뭔가 이렇게 흥미로워보이는 게 눈에 띄면 쪼르르 달라붙어 고개를 묻고 있던 일행들 덕분이기도 할 거고,

빗발이 변덕스럽게 쏟아붓던 지랄같은 날씨 탓이기도. 여하간, 코스에 대한 강박관념 따위는 버리는 게 좋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장가였던 허난설헌이 남매

사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헷갈렸던 건 그 중 누가 손위였냐 하는 문제. 허균이 오빠?

아니면 허난설헌이 누나? 왠지 허균이 늘 앞서 이야기되기도 했던 데다가 여기 이름도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인지라 허균이 손위 오빠일 거라는 추측에 무게가 실렸다. 진실은 기념공원 안에서 확인하기로.

공원 안에는 허난설헌 생가터가 있었다. 허난설헌이 태어났고 허균도 아마 태어난 곳 아닐까, 이미 한무리

방문객들에게 열심히 설명해주고 계시던 봉사자분의 말씀을 귀동냥해보니, 여기는 토담과 주변솔밭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것과 같은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의 명당터라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소나무숲 한가운데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과거엔 더욱 그럴듯한 풍광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을 듯.


처마 끝에 서려 있던 이슬로 빚어진 그물망 하나. 조선시대 이런 변방에서 태어났던 양반가 자제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저렇게 그물망 하나 풀어놓고 세월을 낚는, 권력의 중심으로 굳이 애써서

나서려 하지 않고 안분지족의 삶을 즐기는 '폐포파립'의 선비였으려나. 아니면 언제고 중앙정치의

무대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이를 갈며 쓸개를 핥던 야심가들이었을까.



아무래도 신분제에 예리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던 허균이나, 사람 대접도 못 받던 여성이었던 허난설헌

모두 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나라를 뒤엎겠다는 거대한 혁명의 꿈까지 꾸진 않았다고 하면, 에라 그냥

산좋고 물좋은 강릉에서 시나 읊고 글이나 쓰고, 음풍농월로 한세월 보내자는 생각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그들 남매는 '양반-상놈', '남존여비'의 당대 관념에 얼마나 시니컬했을까. 뭐 그렇지만 그들의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뻗쳤다는 게 함정. 힘들게 피보며 나라를 엎느니 그게 남는 장사일지도.

기념공원 앞에 있던 홍길동 기념관. 조그마한 오두막이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올라가면 뭐가 있으려나

싶어서 걍 외관만 구경하고 말았는데, 기념관 안에는 온갖 버전의 홍길동전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허균은 본인의 숨겨둔 욕망, 못 가본 길에 대한 갈증을 홍길동으로 하여금 대리충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초가지붕이 단정하게 얹혀있는 황토빛 화장실. 궁서체로 써진 '화장실'이란 글자가 나름 운치있다.

사용후기 : 사람이 그렇게 많이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관리되더라는.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 옆에 서있던 오문장비. 이 곳에 살던 허씨 5문장을 기념한 비석들로 아버지 허엽,

장남 허성, 허봉,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 이렇게 다섯 명을 허씨 5문장이라고 한단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글재주가 돋보였다며 후대에도 칭송이 자자했던 사람은 바로 허난설헌, 알고 보니

허균이 막내아들이었고 그 손위 누이가 허난설헌. 무려 6살이나 많았던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라고 한다.

허균의 생몰년도는 1569-1618, 허난설헌의 생몰년도는 1563-1589.


그녀의 글재주는 8살때 신선세계의 궁궐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상상하고 썼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에서부터 조선땅과 중국땅의 인증을 받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녀의 시는

현재까지 약 210여수가 전한다고 하는데, 그나마 그녀의 유언으로 전부 태우고 남은 게 그만큼이란다.


허초희. 이름이 참 이쁘다. 이름을 알고 나면 얼굴이 궁금해지는 건 인지상정. 그녀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빚어낸 그녀의 황동빛 조상이 기념공원 한가운데 단아하게 앉아있었다. 27살에 죽었다니 정말 이른 나이에

돌아갔구나, 역시 천재들은 일찍 요절하는 법인가 싶어 살짝 씁쓸해지던 차에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사실들이 몇개 나열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풍류를 즐기던 남편, 빡빡한 시어머니, 무엇보다 자녀들의

죽음과 태중의 아이까지 상실한 아픔. 생각보다 참, 힘들고 신산스러운 삶이었겠다.


그녀가 두 자녀를 잃고서 썼다는 시를 보면 허초희 그녀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지가 절절하다.

제목은 '아들딸 여의고서'.

 

"지난 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도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바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끓는 피눈물에 목에 메인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보며 허난설헌과 허균의 삶과 사상, 문학세계를 돌이켜보고 나니 왠지 기분이

스산해졌다. 물론 그들이 당대의 문명을 널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떨치고 죽어선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념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계속 맘에 걸린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내로서 남편과 시댁의 박대를 받고, 그렇다고 해서 조선 문단의 일원으로 제대로 평가되지도 못했을거고.

그게 허초희의 질곡이었다면 허균 역시, 본인이 꿈꾸던 세상과 사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과 갑갑증은 오죽했을까.

기념공원을 빠져나가 경포호로 이어지는 길을 찾았다. 삐쭉삐쭉 가늘고 길다란 소나무들이 이쑤시개처럼

땅바닥에 꽂혀있는 솔밭 사이 오솔길을 걸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수묵화를 보면 소나무를 저렇게 앙상하게, 그저 쭉쭉 기둥만 그려놓고 위에

한웅큼 다복솔을 뿌려놓곤 해서 상상해서 그린 거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수묵화 속의 소나무들이

그대로 실사로 표현된 공간. 


경포호로 가는 길은 홍길동의 분신들이 촘촘히도 지키고 섰다. 다리 양쪽에 선 울타리에도, 교각 위에도,

뭔가 솔방울 수류탄을 던지는 포즈의 홍길동이 거북이 등 위에 단단하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다시 바우길 위. 올레길이 파란색 조랑말표식이나 화살표로 코스를 안내해 주었다면

강릉 바우길은 저렇게 파랑색 솟대 그림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경포호 옆길로 바싹 다가서자 저너머 경포대가 보인다. 경포호가 이렇게 컸구나, 싶은 실감을 하고 있던

차라서 정반대에 있는 경포대까지 가보는 건 일단 가볍게 포기.

경포호를 따라 걷다보니 홍길동전의 스토리를 따라 조성된 조각들이 보인다. 홍길동의 어린 시절이라는

이 세 아이들의 조각 중에 누가 홍길동일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가운데의 제일 개구진 녀석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유별나게 개구장이였던 녀석이라야 나중에 크게 된다는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나저나 저런 아크로바틱한 자세라니 보통 인간은 가능하지도 않을 자세인데, 역시 홍길동의 타고난

신이함을 드러내는 조각이라고 마음대로 정리.

그리고 돌을 네 조각으로 두부처럼 썰어버리는 어마어마한 칼솜씨, 홍길동이 수련중인 장면이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의 행패..였던가. 아니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활빈단..이었던가. 형틀에 묶인 채

맞고 있는 게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에 따라 홍길동전의 전개상 기승전결 중 '승'에 해당할지 '전'에

해당할지 바뀌겠지만, 여하간 맞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무척이나 괴로워보인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게다가 저 펑퍼짐하게 까뒤집어진 채 맷자국이 도랑처럼 남은 엉덩이, 참 아파 보인다.

홍길동이 율도국을 세우기 전, 그 섬에 있던 요괴들을 처치해야 하는 퀘스트가 남았다. 아마 이 요괴들을

없애고 나서야 아리따운 여인을 얻어 혼인, 해피엔딩에 이르렀던 거 같은데. 요괴들이 짜리몽땅하고 왠지

익살맞게 생긴 게 그렘린같기도 하고, 골룸같기도 하고.

언제나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나름의 갈고 닦은 영웅포즈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홍길동이 갈고 닦은

포즈는 바로 이것, 주춤 서서는 한 손으로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거리를 잡는. 이 조각상은 특히 인상에

남았던 이유가, 홍길동의 눈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였다. 눈을 새겨넣으면 밤에 홍길동 조각이 살아나서

당장 이 나라의 탐관오리와 부패한 '조정'을 뒤집을 것이 겁났던 걸까.

이렇게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둘러보고 경포호를 따라 걷다간, 경포대해수욕장까지 가서 주변 횟집에서

회 한접시 먹는 것도 꽤나 그럴 듯한 코스였다. 허균은 익히 알고 있었다지만 그저 여류 문인의 한명으로만

알고 있었던 허난설헌, 허초희 그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거칠게나마 알게 된 것도 적잖은 소득이었고.





경포해수욕장, 사람들이 적지도 않은 모래사장 한가운데 잔뜩 녹슬은 채 방치되어 있던 중장비.

언제부터 세워져있었던 건지 온통 녹슬다 못해 캐터필러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잡초들이 싱싱하게

줄기를 뻗어올렸다. 뒤로 보이는 샛노랑빛의 탱탱한 튜브와 대비되는 흐물흐물한 노란색 껍데기가

굉장히 지저분하고 인공적으로 보이는 건 약간의 편견이 작용한 결과. 사실 탱탱하고 반짝거리지만

머리아픈 고무 냄새가 자욱할 튜브나, 시꺼멓고 끈적한 기름이 뚝뚝 새고 있을 폐차나 오십보백보.







말로만 듣던 거대 버거. 제주도에 가면 꼭 한번 먹어봐야지 했던, 바로 그 '빅허브버거'다. 접시 위에

담대하게 올라앉은 그 버거의 사이즈를 체감할 수 있는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 하다가, 손닦으라고

나온 '건강물티슈'를 바로 옆에 붙여두고 찍었다.

커플버거도 있다는데, 별로 가격차이도 나지 않는 걸로 보아 빅버거로 쏠리게 하려는 속셈인 듯.

처음 생겼을 때에 비해 가격이 점점 올랐다는 불만의 글도 어디선가 봤는데, 사실 싼 건 아니다.

갈린 허브가 섞여있는 두툼하고 고소한 빵 사이에, 조금 얇다싶은 패티와 사과니 양파니 양배추니

패티의 아쉬움을 달래고 메인 목을 풀어주는 아삭아삭한 과일과 채소가 많이 들어있어서 조금 과하게

먹어도 그렇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뭐, 저 거대한 빅허브버거도 버거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전의 금능 해수욕장과 그너머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커다란 통유리가 참 맘에 들었다. 마침 식사시간을 좀 빗겨난 타이밍이라 아무도 없던

가게에서 이리저리 구경하며 창밖도 내다보고 가게 안도 구경하고.

벽면에 아기자기하게 장식되어 있는 자그마한 화분이라거나 그림들이 꽤나 귀여운 이미지를 연출중.

따뜻한 노랑색의 조명도 맘에 들고.

그리고 화장실 표지도 발랄하다. 글자체도 그렇지만 변기에 앉아 행복해하는 꼬맹이 표정이 참.

 

해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고, 바다로 점차 잠기며 한없이 길어지는 그림자가 가게 벽면에 이런저런

기하학적인 무늬를 남겼다. 미련이 가득한듯 벽면을 야금야금 긁어내리는 뒤늦은 햇살이 따가웠다.

피자처럼 여덟조각으로 커팅되어서 나온 버거는 어느새 약간의 빵부스러기와 양배추만 남기고

전부 사라져버린 상태. 옷을 탁탁 털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리를 나섰다.

태양이 녹아내리는 바다에 뛰어들어서는 햇살을 산산이 조각내며 노니는 사람들.






강릉 경포해수욕장, 굵고 단단해 뵈는 파이프가 하나 모래사장 위에 굳건하게 박혀있었다. 사람들이 뛰어내릴

수 있고 안전하게 버틸 수 있으면 되는 게 번지점프대라면 딱 그 기능에 필요충분한 파이프. 고개를 무리하게

꺽어야 그 꼭대기와 그 위에 선 사람들이 보이는 각도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뛰려던 건 아니었다. 저런 건 돈을 받고나 뛰어내릴까, 그저 남들이 뛰어내리는 걸 보고 싶었던 건데,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느 여자분이 소리도 없이 뛰어내렸던 순간. 한없이 늘어날 듯한 줄이 어느 순간

출렁, 동시에 왈칵 뒤로 튕겨진 그녀의 목청이 비로소 터졌다. 꺄아악!


어우, 난 저런 건 돈 받고서도 못하겠다. 많이 주면 모를까.

삼양검은모래 해수욕장의 낙조.  모래빛깔이 검은 탓인지 더욱 검게만 보이는 해변가, 그리고 중부지방엔,

특히 서울 강남엔 엄청난 폭우가 내렸던 날이라 그런지 갈기갈기 찢긴 구름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한 세시간 전쯤의 삼양검은모래해수욕장 앞바다. 햇볕이 뜨끈뜨끈 내리쏘이던 제주 북부, 제주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해수욕장인데도 사람이 얼마 없었다. 이곳의 검은모래가 신경통이나 피부병에 특효를

발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참이었다.

이미 대여섯시쯤 되어 사람들이 한풀 꺾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이렇게 사람을 묻고 사람이 묻혔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으니. 어찌 보면 씨앗들을 뿌리기 전의 밭고랑같기도 하다.

여긴 또 다르다. 일일 만오천원이던가, 쯤의 금액을 내고 입장할 수 있는 모래찜질 전용 공간. 삽과 기타

전문도구로 무장한 아주머니가 순식간에 사람을 묻었다가 파냈다가 그러나보다. 밭고랑이라기보다는

무슨 대규모 플랜트농장같은 느낌. 거대한 트랙터가 굉음을 내며 왔다갔다 할 거 같은.

여하간, 정오의 햇살이 전달해준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모래는 생각보다 뜨끈거렸다. 어느 정도

깊이 파낸 모래도 그새 땅속 깊이 머금어진 햇빛의 힘으로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모래가

어두운 검정빛을 띄고 있어서 더욱 따뜻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만 남기고 온통 파묻혀버린 사진.

커다란 봉분이 따끈하게 섰고, 그 속에서 옴쭉달싹 못한 채 순식간에 땀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한 삼십분쯤 모래무덤 속에 짓눌려 있었던가, 생각보다 몸 위에 덮인 모래의 무게는 상당해서 좀처럼 쉽게

빠져나올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땀이 뻘뻘 흐르기에 이르렀고 버둥거리며 모래더미를 파헤치고선

좀비처럼 기어나와, 바다로 달려들었다. 누워있을 땐 몰랐는데 이미 많이 기울어버린 해.

그리고 잠시 후에 내 옆에서 함께 찜질하던 아빠가 일어나서 바다로. 정말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해안이 제주시 근처에 있단 걸 여태 몰랐다. 모래찜질하기에 딱 좋은 검고 고운 모래가 쪼르륵

깔려있는 아담한 해안, 햇빛에 뜨끈뜨끈 달궈진 모래인데다가, 눈앞의 바닷물도 깨끗한 편이고 경사도 완만해

놀기에도 좋은 곳인 듯 하다. 아빠가 몸에 곱게 코팅된 모래를 꼼꼼히 씻는 모습을 엄마가 바라보고 있다.

왠지 선녀와 나뭇꾼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전복한 이미지같기도 하고. 당당하게 남자를 훔쳐보는 여자랄까.

해안의 야경 사진 몇 장 더. 멀찍이 깜빡이는 노랑 불빛은 동해에서 남하한 오징어를 따라 제주도까지 내려온

오징어잡이배들이고, 하늘에서 반짝이는 빨간 불빛은 어디론가 우르르 일렬로 날아가던 헬리콥터들.

햇살의 잔영이 남아있는 바다쪽 말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새까맣다. 해안가에는 DNA 나선형 구조의

LED조명이 불을 밝혔고, 한결 더위가 가신 해변가에는 치킨이니 맥주를 들고 나와 삼삼오오 모여 마시는

사람들이 다시 출현했다.

이번엔 좀 늦게 해수욕장에 도착한 감이 있었던 데다가 수영복이고 세면도구고 전혀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간 거여서, 다음에는 모래찜질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좀더 뜨끈할 때 가는 것도 괜찮겠다.





미로공원의 대체적인 이미지는 그런 거다. 회양목류의 정원수를 키가 넘도록 길러서는 도톰하게 관리해서

이리저리 휘어지고 갈라지는 길을 뱅글뱅글 만들어두는 것. 다만 그게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나, 그냥

애기들이나 재밌다며 돌아볼 그런 난이도의 가벼운 미로일 거라고 생각했고, 미로보다는 잘 다듬어졌을

그 정원 자체가 볼 것이 더 크지 않을까 했었다. 오산이었다. 최근에 본 네이버 웹툰에서 미로를 빠져나가는

'좌수법'이니 '우수법'이니를 배워두길 잘 했다 싶었다.

비슷한 테마파크들이 서로를 복제하며 우후죽순처럼 들어선다 싶은 제주도, 미로공원 역시 여러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오래 된 곳은 이곳 '김녕미로공원'이다. 제주도 동북부의 김녕해수욕장이랑 바싹

인접해 있기도 하고, 제주시에서부터 차로 달려도 채 한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 입구 매표소에선 미로를

다 통과하면 종을 울리면 된다며, 아무리 헤매도 한시간내로는 다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미로 패스하고

난 기념 선물은 아이들에게만 준다고도 했다.)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푯말 하나. 대개가 30분 안에 종을 울린다는 이야기인데, 좀체 방향감각이나 길찾는 능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저 80% 안에 들을 수 있을지 슬쩍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1시간이 넘도록 헤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했는데 막상 미로 속에 들어서니 설마가 역시나가 될 듯한 분위기.

키를 훌쩍 넘어까지 올라간 미로의 수풀 담벼락, 길도 두사람이 동시에 지나기 힘들정도로 좁은 데다가

이리저리 격하게 휘어지고 갈라져 있어서 좀체 한치 앞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렇게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둔 모양조차 올려다보아야 하는 높이의 커다란 사이즈로 미로 속 인간들을 압박하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세갈래길,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얄미워 보였지만 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하나씩 차례로 뚫어보기로 하고 우선은 오른쪽 길로 고고.

길이 좀 아닌 거 같다. 몇걸음 지나지 않아 덤불 저 너머로는 시체라도 파묻을 듯 붉게 드러난 흙무더기

위로 삽 두자루가 꽂혀 있는 모습이 살벌했다. 미로공원에 함께 들어왔던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수가

그리 적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주위에 인기척은 없고, 미로의 벽들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괴한 분위기가 살짝. 뭐, 0.5초 만에 앞의 코너에서 불쑥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긴 했지만.

여하간 중간중간 사람들의 인적이 뚝 끊긴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는 데다가, 길이 막다르거나 혹은 조금

급하게 휘어져돌아간다 싶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표지가 필요하겠다. 뽀뽀금지. 연인들이 손붙잡고

이쪽저쪽을 상의하며 가다가, 어딘가에서 불쑥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둘만 있다고 느낄 때 인지상정인 거다.

이렇게 덜컥 막다른 길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눈높이로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담벼락인데다가 담 너머

저쪽에는 뭔가 기준으로 삼을 만한 표식도 없어서, 망망대해에서 둥둥 속절없이 떠다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휘휘 감아 돌아가는 길에서 그냥 무작정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그래서, 딱히 내 의지가 실렸다기보단

그저 되는대로 가보자, 언젠가는 길이 뚫리겠지, 라는 식의 체념과 멍때림의 상태. 아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수준의 미로일 거라 지레 짐작했던 걸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 닿은 곳은 어이없게도 입구. 차분한 맘으로 다시 미로를 재출발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한번씩은 다시 입구까지 돌아와서 출발한 경험이 있어서 딱히 내가 멍청한 건 아니..라고 자기 위안.

이번에 새로 밟는 길에선 드문드문 해골이 깔려있기도 했다. 여름철 야간개장을 한다고 밤 9시반까지 미로를

개방한다더니 혹시 저 해골들은 밤에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야광해골은 아닐지.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건 음...살짝 스릴 넘칠 거 같단 생각도 든다.

종이 매달려 있는 도착점이 눈앞인데, 좀체 저기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단 말이다. 그 와중에 아까 봤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엇갈려 마주치고, 정말 두세번 만나는 게 낯설지 않았다.


해골과 키스하지 말란 표지판. 뭔가 으스스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가 풍기는 미로공원이다.

겨우 발견한 길, 미로 위로 올라서는 계단이길래 다 왔구나 했다. 근데 아직. 갈 길이 좀더 남았더라는.

이쪽에서 저쪽 종이 있는 곳까지 다시 또 미로를 헤쳐나가야 한다니, 더구나 이렇게 위에서 바라봐도

좀체 꼬불꼬불한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로가 생각보다 훨씬 크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떻게 이리저리 길을 휘휘 돌다 보니까 불쑥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 다시 걸어보라면 또다시 헤매며

좀체 학습이 이뤄지지 않은 그 길이었지만 어떻든 도착점은 예고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다가왔다.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하니 사람들 표정이 다들 환하다. 


종을 울리고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 한번 휘휘 눈으로 온 길을 되짚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시작점과 도착점을 아무런 방황없이 통과할 수 있을까. 그치만 사실 미로는 좀

그렇게 헤매고, 뒤로 돌기도 하고, 왔던 길 또 가기도 하라고 만들어둔 거니까 대충 삼십분쯤 헤매면 미로가

가진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 거 같다. 바로 한큐에 왔다면 글쎄, 한 5분 걸리려나.

미로 밖으로 내려섰더니 이제야 미로 앞의 잘 꾸며진 정원도 눈에 좀 들어온다. 정원도 길이 꼬불꼬불하니

또다른 미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선이 야릇했지만, 그래도 잘 다듬어진 관목들과 꽃나무들이 보기 좋다.

아래는 그 정원에서 찍은 꽃들.

확실히 제주도는 따뜻한 남녘땅이어서 그런지 화려하고 커다란 꽃들도 많은 거 같고, 위에서 못 봤던

품종들도 많은 거 같다. 아니면 내가 '위쪽'에서 보았던 게 대부분 콘크리트 사이에서 비리비리한 한계절용

조경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