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뭐라면 좋을까. 그저 줄줄 울다가 나왔다.

사실은 감동을 극대화시키려 애쓰는 영화는 아니다. 드라마틱하게 빵 터뜨리는 구성도 아니고,

이금희의 내레이션이 담담한 다큐멘터리니까 괜히 눈물 빼놓겠다 달려드는 신파나 눈물폭탄도

아닌 거다. 그저, 그저 한 사람의 삶이,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커다랗고 오래남는 파장을 남길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전에 터키가는 비행기에서 한비야와 합석했을 때, 그녀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국에도

못살고 힘든 이웃들이 많은데 왜 하필 이라크니 어디니 외국인들을 도우러 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故 이태석 신부도 같은 상황, 왜 하필 수단이란 이름도 생경한 나라냐고. 한비야처럼

그도 비슷한 대답을 한다. 자기도 잘 모르지만 뭔가가 끌렸다고. 그리고 '가장 낮은 곳의

사람에게 해준 것이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는' 어른의 말씀을 따른 것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은근히 잔인한 구석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1년 8개월동안 떨어진 채

그를 다시 보거나 작별인사도 못한 수단의 아이들에게 그를 제대로 보내줄 기회를 줘야

했다는 거 알지만, 이별을 제대로 맺는 게 중요하다는 거 알지만, 그 아이들의 충격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나까지 같이 아파오는 거 같았다. 어른이 되려면 칼로 이마에 평생 남을

자국을 몇 개씩 그으며 눈물을 삼켜야 한다는 그런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들 흐느끼는 모습은.


사실은 조금 갑갑하기도 하다. '고작' 사람 한 명에 이렇게 휘저어지는 세상이라니, '고작'

사람 한 명에 이렇게 큰 변화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세상이라니. 그만큼 수단이란 곳이

열악하고 기본조차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곳이란 반증이기도 할 거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선하고 아름답던 건. 보통 '돈없는 사람=마음이 부자'라거나 '빈곤한 사람=선한 사람'

따위의 손쉬운 고정관념은 거짓이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정말 그래보였다.


신부에게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인사하던 그 아이들의 노래. 신부는 왜 하필 가르쳐도 그렇게

가슴아픈 노래를 남긴 걸까. 앞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故 이태석 신부님과 수단의 아이들이

떠오를 거 같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 예- 예-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멀리 떠나버린 못잊을 임이여

당신이 내곁을 떠나간 뒤에 밤마다 그리는 보고싶은 내사랑아"




공항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덥고 등짐은 무겁던지, 여기서 벌써 이렇게 진한 육수가 흐르는데 터키나 이집트에선

괜찮을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공항서 기어코 무료 인터넷컴을 찾아 숙제처럼 친구에게 인사를 남기고, 터키항공

비행기를 타고 창가쪽 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서 보니 창가쪽 자리란 초짜를 위한 자리구나 싶은 게, '우익'에 가려

잔뜩 갑갑한 창 너머 시야에 더해 옆좌석에 타자마자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뒤척이며 잠을 청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왠지, 이 담백한-꾀죄죄한-아줌마가 어디선가 낯이 많이 익다는 신호가 마구 쏴지는 거다. 이미 그녀가 신문을

활짝 펼쳐서 읽는 것을 보며 살짝 빈정이 상하기는 했지만, 아님 말자는 심으로 '혹시 누구 닮았단 이야기 들어보지

않으셨나요?'라 말을 걸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누구를 닮았을까요?'라고 되물음으로 답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싶어 '한비야씨 많이 닮으셨어요.'라 했더니 답이 돌아왔다. '제가 한비야에요'ㅋㅋ


그렇게 트인 말문은 이스탄불에 도착할 떄까지, 구호활동, 여행, 종교, 국가관, 역사, 외교부, 김선일 사건 그리고

이라크전,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참 많이도 이야기하고 술마시고 건배하고 그렇게 이어졌다. 저마다의 쓰임이

있고, 영역이 있고, 세상일이란 어느 한명이 다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신에 투철한 '누님'이었다. 그녀의

겸손함은 어쩌면 종교의 힘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신념과 열의는 사람에 기대어 분출된다. 누님과의 이야기중에

잡은 화두 하나, 내가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 인삼같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바에야.


누님은 이라크 국경에서 민간구호활동을 하러 가신다며 이스탄불 공항에서 아쉽게 헤어졌다. 이제 다시 혼자

시작하는 여행이구나, 싶었는데 공항서 왠 아가씨 둘이 환전하느라 낑낑대고 있는 것을 돕다가 합류하게 되었다.

친절한 터키인의 도움으로 메트로와 트램을 거쳐 '동양호텔'에 체크인, 야경이 어찌나 멋지던지 한시정도까지

밖에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바라보며 사진도 찍고 Efes 한 캔을 홀짝홀짝.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몇 년전부터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디지털 공간 속에는 모두의 마음 속에, 입가에 물려있는 말풍선이 오밀조밀

자유롭고 분방하게 퍼져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돈과 힘, 목소리 크기로 터무니없이 적은 한줌의 사람들의

말풍선이 다른 사람들의 말풍선이 들어갈 공간 따위 모두 짓눌러버린 현실세계보단 조금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그리고 조금 더 작은 것들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보다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내게 낯설거나 새로운 것들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런데 실은, 이 공간도 그런 소박한 소망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인력과 예산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가 곧 목소리의 크기, 그리고 그에 대한 반향(조회수, 댓글, 추천...)이 얼마나 되는지를 거친 수준에서나마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 블로그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블로그에 기록할 만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예산'이 보다 노출되기 쉽고 인기있는 블로그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빠질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라는 건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물론 그 두가지 요소를 투입하도록 이끄는 정신적 요소는 '열정'이나 '흥미'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대량 양산되는 포스팅들 사이에서 좋은 글을 찾는 건, 조회 수나 댓글 수, 추천 수 등으로 서열화되어

노출되는 시스템 하에서 종종 더욱 어렵다는 느낌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이 두 요소, '인력'과 '예산'이라는 측면에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그 결과 자연스레 조회수와

댓글 수, 추천 수 등 노출의 수준이 거의 19금을 넘나드는 괴물이 결정적으로 이 공간을 교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복지부와 국방부가 파워 블로거라고?"라는 이번주 시사인의 기사를 보면, 외부 필자의 기고를

받거나 기자단을 따로 두고서 쉼없이 '생활 컨텐츠'를 양산하고 있는 복지부의 '따스아리'와 국방부의 '동고동락'

두 블로그가 올해 최고의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괜찮을까? 힘센 정부가 쥐고 있는 언로가 이미

충분할 텐데, 그런 언로를 통해 제대로 발표하고 그것으로 평가받는 이미지를 쌓아올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활밀착형'의 말랑말랑한 이슈들로 포장하려 하는 건 아닌지 싶어진다. 


정부가 할 일은 블로그 공간을 활용해 연성 이슈나 전파하고 '착한 정부'의 이미지 홍보에 열올릴 게 아니라,

기업들 같은 다른 사적 공간의 힘있는 액터들이 그런 식으로 블로그 공간을 오염시키고 교묘하게 조정하는 걸 막는

거 아닐까 싶다. 이미 인터넷 클럽, 카페에서 위력을 발휘했듯, 기업들의 홍보나 상대기업 이미지 깍아내리기 등을

위한 리뷰 포스팅이나 각종 신제품, 신기술에 대한 포스팅이 개인 명의의 블로그인양 위장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 뜨려면 수천만원이 필요하다는 식의 공공연한 이야기와 이런 기업들의

숨겨진 블로그가 결합되는 순간 나타날 폐해란 불을 보듯 뻔하다.


'소통'이라는 건, 그리고 그 소통을 위해 개개인이 적절한 발언대와 '마이크'를 확보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적 소년동아던가, 뭐 그런 신문사 기자가 따갔던 내 멘트가 어이없이 왜곡되는 일을 겪었다거나,

제대직후 떠난 배낭여행길 비행기 안에서 한비야씨와 나눴던 이야기가 그녀의 입장에서 재구성되어-난 나조차

낯선 타자가 되어-칼럼화되는 일을 겪었다거나, 뭐 그런 개인적인 경험도 이유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한다고 믿는다. 최대한 왜곡되지 않을 수 있고, 최대한

억압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장서서 그 '블로그 생태계'를

교란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 2004.10.27(수) 한겨레.

외국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 청년을 만났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 세계 여행기를 읽었다는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그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몇 년 전 케냐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 근처에 우리 단체의 구호캠프가 있었다. 대규모 가뭄 긴급구호로서 식량 및 물 배분과 동시에 이동 안과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은 한센병(나병) 비슷한 풍토병과 함께 악성 안질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었다.

그 이동 병원에 40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었다. 알고 보니 대통령도 만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인데 이런 깡촌에 와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는 거였다. 궁금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나요?”

이 친구, 어금니가 모두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죠.”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고 머릿속이 짜릿했다. 서슴없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의사가 몹시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그 제대병도 잠시 생각하더니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 것 아닌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긴급구호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데는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할 것인지,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를 말이다. 나는 두 번째 삶에 온통 마음이 끌리는 사람만이 긴급구호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지치지 않는다. ‘누가 시켰어?’ 이 한마디면 일하면서 겪는 괴로움이 곧바로 사그라들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멋에 겨워 흉내만 내고, 남 탓을 하거나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다르잖아요?” 제대병이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물론 다르다. 그러니 선택이랄 수밖에. 평생 새장 속의 새로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창공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새장 속의 삶을 택한 사람들의 선택도 존중한다. 나름대로 충분한 장점과 이점이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새장 밖은 불확실하여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백전백패의 무모함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새장 밖의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새장 밖의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새장 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그러니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며칠 전 비행기 안에서 한 청년에게 던졌던 질문, 내가 나에게도 수없이 하는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며 ‘한비야 칼럼’을 마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쓰고 또 쓰고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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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이야기를 끌어나가려면, 적당하고 보기 좋게 재단된 멘트들로 상대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거겠지만,

내 생각엔 저건 별로 와닿지 않는다. 일단...저 말투...군바리틱한 저딴 딱딱한 말투를 내가 썼을 거 같냐..ㅡㅡ;;

또...저리 어눌하거나 쉽게 감동을 먹으며..내가 저자세로 나갔을 거 같냐..--; 마지막으로..내가 청년이냐..ㅡㅡ;;;

사실...'제대병'이라거나 '청년', '친구'란 말보다 걍 모군..정도 불러줬음 좀 좋아..하는 아쉬움으로.ㅋㅋ

머..XXX(23, 서울, 01x-xxx-xxxx) 이런 식으론 아니더라도 말이지. 누군가에게 해석되고, 또 그것이 누군가에게

다시 전달이 된단 건...상당량의 자중손실(dead-weight loss)을 유발하는군. 어긋나게 맞춰진 500개짜리 조각

퍼즐같이 왠지 찜찜한 느낌이다. 딱히 두드러진 차이가 있는 건 아닌데, 우리가 서로 생각했던 이야기의 초점과,

이 글에서 드러내려 했던 초점과, 그런 것들이 살짝살짝 어긋나면서 무언가 그녀가 아는 내게서 휘발되어 버렸단

느낌. 언로를 누가 확보했느냐, 누가 마이크를 쥐었느냐의 문제일까.

내 목소리가 변조됐다. 내목에 변조장치-.ㅡ^ 비야누님, 누나라고 불러달라면서요..ㅜ


조심하라구~ 조만간 마이크쥘 여러 사람들.ㅋㅋ 아니, 어쩜 우리가 가진 이 답답하고 무기력한 언어와 조악한

감정이입의 상상력이란 원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참, 한비야 그녀의 이 칼럼은 2005년 12월 발간된 "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해"(공선옥, 샘터사)라는 책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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