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옛길, 풀향기 가득한 그 길에 처음 섰던 건 사실 하늘이 종일 칭얼거리던 날.

날씨도 우중충하고 빗물도 그치지 않아 어쩔까 하다가 잠시만 둘러보기로 하고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쥐었다. (맑은날의 기록 : 구불구불한 산막이옛길에 풀향기가 가득.)

흙바닥이었지만 나무쪼가리들이 폭신하게 깔려있어서 물웅덩이가 생겨있거나 질척해져있지는

않아 걷기 수월한 덕분에 물기가 총총히 맺혀있는 나무들도 보고, 흰 김같은 구름을 칭칭

감고 있는 산들도 보고, 물안개가 잔뜩 피어오른 강도 보고. 삐죽거리는 솔잎 끄트머리마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물방울들이 점점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간, 주륵.

그네도, 흔들의자도, 나무와 나무사이에서 슬쩍 휘어있는 벤치도, 그리고 자연목으로

얼기설기 엮어만든 울타리도 모두 흠씬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 울타리 위에서 뱀인지

용인지 혀를 날름거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녀석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옆에는

나무를 깎아만든 오리도 있고 새도 있고, 이 길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소품들이다.

그렇지만 이 옛길을 걸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품이랄까, 포스트는 단연코 이곳이었다.

정사목. 한글로 된 음만 읽으면 감이 확 오지는 않지만 한자로 써놓으면 그 의미는 분명해지는 거다.

情事木. 아니, 뻣뻣하게 굳어있는 나무가 정사라니, 기껏해야 서로 수십년에 걸쳐서 손이나 잡는

느낌의 연리지가 고작일 텐데, 나무가 정사라니.(feat. '내가 고자라니')

정사목. 나무에 뭔가 남자표시 여자표시 이름표가 붙어있는 걸 보니 뭔가 기대가 되긴 하는데,

딱히 모르겠다. 설명에 따르면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포즈의 나무들이라는데,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원. 근데 왜 가지가 세개지, 여자 표시가 두개 붙어있는건...?

아하, 슬쩍 각도를 틀어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알겠다. 무슨 숨은그림찾기처럼 한번 그림이

보이고 나니까 이제 아주아주 잘 보이는 그림, 이 나무 진짜 그럴 듯하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음...남자나무가...여자나무를...음...[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게 한참을 즐감해주시다가, 왠지 나무들이 삐걱삐걱거리며 서로의 몸을 더듬고 비트는

듯한 환상과 함께 어디선가 밤꽃냄새가 마구 풍기는 듯한 환상이 떠오를 무렵, 정신건강에

안 좋겠다 싶어 일단은 철수하기로 했다. 마침 빗발도 좀더 굵어지고 있었고, 잔뜩 찌푸린

하늘 덕에 금세 어두워지겠다 싶기도 해서.

솔잎마다 방울져있는 빗방울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빗물을 닮았다는 느낌. 빗물에 씻기고

나니 산막이옛길도 그렇고 온통 푸르른 풍경이 더욱 싱싱해졌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편도 약 3킬로미터의 옛길 구간 내내 화장실이 없는 건 아마

자연을 지키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또 꼬맹이들 손붙잡고 오는

부모님들이나 사람들을 발 동동 구르며 울부짖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절절한

멘트를 큼지막하게 써붙일 수 밖에 없는 거다. 여기 좀 봐유, 이곳에서 버리고 가유~!


잘 되지도 않는 충청도 사투리로 몇번씩 되뇌여보다가 그 리드미컬함에 놀라며 완전

재미가 붙어버렸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성조에 맞춰서 찰지게 달라붙는 저 끄트머리의

머머해유~ 하는 맛이라니. 화장실 없슈, 없대유, 여서 버리고 가유, 돌 굴러가유, 말했잖슈.ㅋ


양반의 고향 충청도답게 화장실 표시에 등장한 남자와 여자도 아주 잘 갖춰입고 점잖기가

그지 없다. 눈을 얌전히 내리깔고 부채를 펼쳐든 신랑의 이미지와 그보다도 훨씬 수줍어

보이는 볼빨간 신부의 이미지. 나름 험한 산길을 앞에 둔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색색깔 등산복이나 간편복장과는 영 다른 느낌.


* 여행을 다니며 결코 빠질 수 없는 '답사지' 중 하나가 그곳의 화장실이란 점에서, 또 그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화장실 표시에까지 녹여내는 곳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특징적인

화장실 사진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자신이 본 최고의 화장실 표시를 제보해주실 분은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예전에는 산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옆 마을로 넘나들거나 장터갈때

이용하던 길이라던데 점차 마을이 조그매지면서 잊혀져가던 길이라고 한다. 최근에야 휘적휘적

구비진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내달리는 산길을 정비해서 근 삼 킬로미터에 이르는 '옛길'을

되살려냈다던가. 제주 올레길의 예기치 못한 성공담이 지자체에 던진 울림은 이다지도 컸지싶다.

세 그루의 연리지, 아니 여섯 그루의 연리지라고 해야 하나. 서로 사이좋게 몸을 섞은 채

고개를 살풋 외로 꼬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세 커플나무들. 연리지 하나가 생겨나기만 해도

울타리도 치고 포토존도 만들고 수액도 맞아가며 특별대접을 받는 판인데 무려 세 쌍이라니.

옛길 초입부터 계속 유유한 호흡으로 따라오는 건 괴강.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명은 괴산,

강이름은 괴강. 57년에 이승만대통령이 괴산수력발전소를 만들고선 호수가 되어버려 괴산호라

불리게 되었다곤 하지만, 조금씩 방류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미는 건지 아니면 드문드문 다니는

조그만 철선과 목선이 만드는 건지 수면에 잔물결이 꼼꼼히 새겨져 있었다.

나무에 묶인 그네에선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산아래쪽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러다 휘잉~ 하고 날면 그대로 괴강, 괴산호까지 날아가겠고만 겁나지도 않는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 살벌한 그네 대신 조용조용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흔들의자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전날 내렸던 비가 어느결에 말랐는지 보송보송한 의자에서 슬몃 나무냄새가 났다.

출렁다리, 어렸을 적 고성 잼버리장에서도 뛰놀아보고 했지만 이렇게 길고 출렁대는 다리는

처음 본 거 같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우다다 걷다가 일부러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뒤의 꼬맹이가 완전 겁먹은 거 보고 미안해져버려서 사뿐사뿐 흔들림없이 걸어보려 했지만

몇걸음 가지 못해 다시 출렁출렁. 처음 느낌 그대로, 어른들한테도 꽤나 길고 재미있던 코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단단한 흙길을 밟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흔들리던 발아래 나무판자 대신 땅을 딛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주변을 스캔하게 되는 거다.

약간 뜨겁긴 하지만 아직 설익어 부드러운 느낌의 오전 봄햇살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전의 싱그러운 녹색 풀떼기 같은 것들.

산막이옛길은 그냥 하이킹 삼아 가볍게 걷는 길도 좋지만 저 위로 본격 등산로를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좋을 거 같다. 대충 코스를 짜보자면 등산로로 크게 돌아서 산막이마을까지 가서는 옛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정도가 좋지 않으려나. 여기가 바로 등산로와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인데

등산로라기엔 넘 푸릇푸릇하고 완만한 길이 시작되는게 꽤나 유혹적이었다.


괴산수력발전소가 물을 가두고 나서 몇개 마을이 잠기고 구불구불하던 강의 생김생김도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옛길 옆을 따라 출렁이는 강물은 구불한 실루엣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강,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다. 미처 땀이 솟을 겨를도

없이 에어콘바람처럼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연화담. 지금은 연꽃이 피워올려지는 저 연못이라지만 이전에는 천수답, 논이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 여기 옛길까지 차로 달리며 놀랐던 건 마치 강원도의 느낌처럼 쉼없이 울룩불룩

높진 않아도 야무진 삼각산들이 늘어서있던 풍경. 논농사를 짓기엔 땅이 부족했던 걸까,

저 손바닥만한 세모땅에까지 벼를 심었다니. 직각이등변삼각형 모양, 올만에 떠올린 단어.

산막이옛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고 왠 뜬금없는 호랑이 상과 인형이

놓여있었다. 앞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기도 전에 뭐야 이거, 호랑이굴이야 했더니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1960년대까지 호랑이나 다른 산짐승이 자리잡고 살던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대체 왼쪽의 호랑이 인형은-ZOO COFFEE에서 들고 온 듯한-

어제의 장대비를 견디고 저리도 뽀송거리는 걸까.


적당한 강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도 있고, 그리 좁지 않은 너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신나라 걷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만하면

나타나는 전망대니 약수터니.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나, 그런 약수터의 전설이

무색하게 물이 아낌없이 펑펑 흘러나오던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친 연후라 그런지 완전완전 산뜻한 초록색을 뽐내며 옛길을 터널처럼 감싸고 있던

나무들, 그리고 제법 울창해진 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는 봄볕 쪼가리들. 어디선가 풍기는 나무냄새, 꽃냄새까지 더해지니 정말, 한없이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풀향기 가득한 이런 길만 쭉 이어진다면.

괴강에서는 선착장과 선착장, 산막이옛길의 처음과 끝을 잇는 목선과 철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옛길 위의 사람들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배를 몇번을 보내고 맞이하며 급할 것 없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선 반짝, 초록빛 나뭇잎새를 뚫고 햇살이 눈부셨다.


중간중간 지게에 얹혀있던 것들은 이곳, 산막이옛길을 노래하는 시들이 적혀있었다. 제법 많은

시들이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와 역사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다. 풍경이 이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말을 건네 들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내용은 늘 스킵,

차라리 지게 위에 늘어뜨려진 성긴 나뭇잎을 보며 안구를 정화. 피톤치드를 달라며.

어디였더라, 그랜드캐년이었던가, 바닥이 유리로 된 이 전망대는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게다.

뭔가 바닥을 보고 겁먹기에는 온통 초록빛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보들거리는

괴강의 잔물결들이었는지라 저런 꼬맹이도 펄쩍펄쩍 겁먹지도 않고 뛰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만큼

밖으로 불룩 나가서 바라본 풍경은, 강 한복판은 아니어도 대충 깊숙히 들어와 강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을 줬다. 잔뜩 굽어진 강물, 강물 따라 잔뜩 굽어진 산등성들, 또 산등성들 따라 굽어진 초록빛들.

총 길이가 채 삼 킬로미터가 안 된다는 거 같던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슬슬 길이 끝날 때가 되어가려나. 좀더 길면 좋겠는데.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가득한 채 아껴 핥듯이 한걸음 한걸음 길을 뒤로 밀어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다 보니 사진은 어느새 기백장을 헤아릴만큼 찍어대고 있었고.

산딸기길. 6월이 되어야 산딸기가 길 좌우로 잔뜩 피어나 붉고 푸른 색감이 강렬할 텐데

지금은 그저 푸른 색 일색이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는 이 길 가득 사람들이 걷는다는데

이때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주변 골목까지 차들로 빼곡하게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뭘 파종한 걸까, 갈빛 땅위에 초록색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한 듯한 평행선들 너머로 잔뜩 여윈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 도착. 여기가 산막이옛길의 끝 '산막이마을' 선착장이고, 애초 출발했던 지점은

'차돌바위' 선착장이라던가. 십오분만에 바로 가는 소형배는 오천원, 그리고 멀리 한바퀴

돌아서 한시간여 유람까지 하는 유람선은 만원.

11인승인 소형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목선이랑 철선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그 목선.

뭔가 정신사나운 만국기가 무당집처럼 내걸려 있는 거 빼고는 그래도 좀 운치가 있달까.

배 뒤로 남겨두는 궤적도 뭔가 뽈뽈뽈뽈, 통통거리는 엔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다.


아쉽게도 내가 탔던 건 목선이 아닌 철선. 11명 이상이 타면 뽀글대며 가라앉지 않을까 싶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모터배였다. 그래도 뭐, 괴강 한복판에서 올려다보는 양쪽 강가의

풍경이란 건 다른 맛이 있었으니 배가 어쨌거나.

산막이옛길 반대편 강가에도 습지가 제법 발달해 있었고, 나무가 뭉텅이뭉텅이 소보록하니

자라나 있었는데 아직 그쪽에는 이런 길이 나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참..딜레마다. 좋은

길을 보면 걷고 싶은데, 또 사람들이 한둘 모여 걷다 보면 길이 황폐해지고 자연도 조금씩

상해버릴 텐데. 산막이옛길도 잘 관리되고 보전되었으면 좋겠는데..그런 점에서 나무데크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길이 조금 아쉽긴 했다.

설렁설렁 걷긴 했지만 한시간반 정도 걸려 꼼꼼이 걸었던 길을 이십분도 안 되어서 훌쩍

되돌아오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눈으로 옛길을 되짚다가 불쑥 뜨인 난파선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칠해둔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괴산수력발전소의 유머러스함에 웃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네시간동안 잘 돌아본 산막이옛길, 다시 돌아나오는데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인이 샛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산막이옛길. 그리고 빨간 화살표가 선연한데 아까는 왜

저걸 못 봤나 했더니 주차장이 만차라 반대쪽으로 돌았더랬다.





아무리 '충청도 음식대회 금상 수상'의 간판을 내걸었대도,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

지방도로 옆에 슬쩍 숨어있는 음식점의 분위기란 건 이렇게 머리맞대고 티비를 보며 쉬엄쉬엄

넘어가기 마련인 거다. 더구나 가까운데 유명한 관광지나 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닌 곳이라면.


두어잔만 비어진 소주 한병과 바닥을 드러낸 매운탕 냄비를 남기고 점잖게 떠나간 아저씨 둘과

바톤체인지하듯 들어가 앉았다. 빠가사리와 메기와 잡어가 가득한 민물매운탕을 서빙해주시곤

'얘가 빠가요'라고 일러주시더니 이내 티비 앞에 모여앉으신 아주머니들이다.


같은 미용실을 다니시는 게 틀림없다. 한껏 뽀글한 머리 네개가 옹기종기 티비를 해바라기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문득 그림이 떠올랐다. 네분이서 쪼르르 미용실 의자를 점령해선 머리가득

'구루뿌'를 말고 거울로 티비를 넘겨보며 왁자하니 수다를 떨고 계시는 그런. 충분히 있음직한.



@ 충북 괴산.






@ 충북.

그림 속에 글씨가 들어갔다. 벤치 위에 마음이 또아리틀었다. 잘 익은 똥처럼. 돌돌돌.

I'm riding on the BOM.




kR@ 충북 영동군.


싱그럽고 하얀 버섯갓이 뽀도독뽀도독.


일제시대 탄약저장용 및 피난용으로 강제동원되어 파내어졌던 토굴이 이제는 포도주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퀴퀴한 냄새 가득한 동굴 속에서 오크통에 비스듬히 기대선 삽, 사방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들,

그리고 그 물방울과 함께 삽자루에 남은 사람의 땀 등 온갖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났을 버섯.




청남대를 거닐다 나무들 사이로 언뜻 비친 초가지붕, 청남대 제2경이라는 '초가정'이 그곳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가져왔다는 전통 생활도구를 구비한 초가집. 이런 곳에서도 고졸한

'인품'이 내는 향기가 언뜻 풍기는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 국왕들이 흉년이 들거나 새봄이 되면 몸소 허름한 옷을 입고 농사일을 체험했다느니, 따위의

이야기도 선례라면 선례겠지만, 그렇게 보여주기 식으로 꾸며진 곳은 아닌 거 같아서 엄연히 다른 거 같다.

최소한 김대중의 이런 점이 정략적으로라거나 감정적으로 어필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다가, 여긴 정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쉬고 '향수'에 젖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그맣게 꾸며진 곳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하면, 그 앞의 정자 때문이다. 호수와 그 너머 '뭍'의 부드러운 곡선, 그런 푸근하고

평화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정자에 앉아서 그는 머리를 식히고, 숨을 돌리지 않았을까. 누구라도 여기에 잠시나마

앉게 되면 뭔가 마음을 턱 하니 내려놓고 착해지지 않을까 싶은 그런 풍경.

몇몇 분들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털썩 그 자리에 앉았다.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도 저렇게 앉아

말없이 한참을 따로, 또 함께 있었지 않을까.





청남대에서 채 못다했던 이야기들, 그 중 하나는 대통령이 쓰던 화장실 이야기다. 아직 못 돌아본 코스도 꽤나

있어서 조만간 한번 다시 가봐야겠다고 다짐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기설기 쪼아올린 봉황이 마당에서 깃을 드리우고 있는 청남대. 대통령의 별장이니, 대통령이 쓰던

보트, 대통령이 쓰던 가구, 대통령이 쓰던 숟가락, 대통령이 쓰던 티비, 당연히 대통령이 쓰던 화장실도 있다.

그런 것들이 있는데도 노무현 전대통령이 충북도청에 소유권을 위임하고 민간에 개방된 후 줄곧 적자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저렇게 다섯 명을 합성해 놓는 역사의식과 '입장'의 결여. 저 사진은

그저 재임순서로 다섯명을 늘어세웠을 뿐 아무런 메시지도, 의미도 담지 못한다. 정치적 논란이나 '편향'을

우려해서였겠지만, 그래서 남는 의미는 단 하나. 29만원 있다는 살인마나 벼랑에서 떠밀린 정치적 살인의

희생자나, 그냥 '대통령'으로 마주하게 될 뿐이다. 이넘이나 저넘이나 다 똑같애, 정치인이 다 그렇지, 따위

거침없이 사방에 내질러지는 삿대질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저렇게 다섯 명이 화목하게 서 있는 모습이 현실에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인가. 청남대에서 일부

대통령의 후광을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기억을 지워버리자는 게 아니라, 무작정 '대통령'이라고 드리워진

후광을 떼내어 버리잔 이야기다.) 차라리 현실 정치에 대한 감을 조금은 더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적자 이유는, 본관에서의 내부 촬영 금지 아닐까. 청남대 본관에 실내화신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여기서 찍었다는 드라마 관련 사진들이다. 드라마는 되는데 왜 일반인은 안 된다는 건지.
 
대통령이 청남대로 쉬러 오면 몸을 뉘어서 쉬었을 그 침대. 대통령의 침대는 왜 사진찍으면 안 되는 건데, 하며

맘대로 슬쩍 셔터를 눌렀다.

대통령의 집무실. 저 스탠드는 왠지 낯익은 게 울집에 있는 내 스탠드와 같은 종류 같다. 저 옷걸이는 왠지 예전

외할아버지댁에 있던 그런 퀴퀴하고 낡은 것과 비슷해 보이고. 아, 그런 건가. 무려 대통령이 쓰는 일상용품이

일반인들의 그것과 같거나 별반 차이가 없으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와서 보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짠~ 여기가 대통령의 화장실. 세상에, 비데도 없고, 금칠도 안 된 뽀오얀 도자기색 그대로인 데다가, 작다.

사진이 많이 어둡긴 하지만 다를 게 없구나 참. 슬쩍 고개를 디밀었다가, 이내 빼버렸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별 거 없는 거다. 다만 남는 건 상상의 영역, 저기에 바지 내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았을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전임 대통령들의 모습. 더러는 술 먹고서 변기 붙잡고 토했을지도.

가끔 국무에 시달리거나 혹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시달린 때에는 '피똥 쌌을지도' 모를 일이다.

2층짜리 건물인 청남대 본관에 엘레베이터가 생긴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라 한다. 발을 절뚝거리던

그에게 꼭 필요한 거였으리라.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방, 쇼파와 골드스타 텔레비전이 놓인 방, 그 다른 한쪽에는 한식방도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옛 왕궁이니 대통령궁이니 이런 데도 사진 촬영은 다 허가하던데, 굳이 사진 촬영을 금지한 건

왜일까. 그들의 생활 소품이 찍히고, 화장실이 찍혀서 그로부터 상상력이 뻗쳐나올 걸 저어한 걸까. 그들의

'품격'과 '위엄'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들이 무슨 김태히나 송혜규도 아니고

이슬만 먹고 살 리도 없고 화장실도 안 갈리 없는 건데.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노출시켜서 격이 떨어지리라 생각할 만큼 그들이 높은 곳에 있다고 여겼던 거라면 더욱

심각한 오해다. 드라마 촬영은 허가해 놓고, 그런 스틸 사진으로 본관 1층을 쫙 도배해놓은 마당에 일반인들의

촬영은 막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청남대 전 지역은 산나물 채취금지구역, 어쩌면 이렇게 잘 보전된 채 손을 안 탄 지역에 산삼이라도 한 뿌리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기념관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손바닥 자국. 손금을 볼 줄 안다는 사람은 저 손금 중 생명선이 2009년께

끊겨 있는지 한번 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청남대의 화장실 표시. 일반인들을 위한 화장실이나 대통령을 위한 화장실이나 변기는 똑같구나, 왠지 안심한

마음으로 맘껏 사용할 수 있었던 화장실 변기.

청남대 관람안내. 혹시 다음 가실 분을 위한 자상한 배려.





반야사는 조그만 절, 아무리 느그적한 걸음걸이로도 금세 한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이다. 잠시 절 밖의 풍경을

볼까, 아까 버스로 지나쳤던 녹슨 수문이나 보러갈까 하는 참에 보살님 한분이 강림하사 산위 망경대로 오르면

문수전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빠른 걸음으로 오르면 십분이면 오른다길래 헥헥대며 뛰어올랐다.

가까워지는 문수전. 조그마한 전각이 산 위에 살포시 올려놓인 느낌이다.

올라가는 길..이라지만 산길이란 게 종종 오르고 내리는 길이기 마련이어서, 가파른 경사길에는 이렇게 벽돌로

계단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수전에 도착, 빠른 걸음으로 십분 내에 도착하긴 했는데 폐가 불타오른다. 카메라쥔 손까지 떨려서 한참

쉬어야 했다. 날이 풀려야 어서 운동을 할 텐데.

여기서 보이는 반야사의 명물 '호랑이' 모양 돌무데기들은 살짝 야윈 듯하다. 호랑이라기보다는 고양이..?

두서없이 움직이던 시선을 멈춘 곳은 저 아래쪽, 호랑이를 바라보시는 듯한 방향으로 염불을 외는 스님들과

다른 파워블로거 일행들.

그들을 조금 거슬러 오르면 인상적인 자취를 남기며 쎄하니 흘러내리는 물살이 있었다.

파노라마를 한번 찍어서 이어만들어볼까 했지만 실패, 대신에 문수전 문짝에 대고 찰칵찰칵. 스님의 센스겠지,

철사를 도롱도롱 이뿌게 말아서 손잡이로 쓰고 계시다니. 저런 거 넘 좋다.

내려다보면 바로 깍아지른 절벽의 느낌, 안전을 담보하는 엉성한 울타리. "튼튼하게"라는 주문 대신 "불심"이

들어간 게다. 저렇게 만자가 연이어지도록 하나하나 자르고 붙이기도, 게다가 색칠까지 꽤나 품이 들었을 텐데
 
말이다.

다시 문수전서 내려가는 길. 올라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해 내려섰지만 역시나, 전반적으로는 내려가야 하지만

곧잘 다시금 올라서기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여기 때문에라도 반야사는 한번 다시 와봐야겠구나, 싶었던 문수전.

반야사와 문수전을 떠나는 길, 가을길이래도 믿겠다 이건.

길에서 만난 잠수중인 나뭇가지. 초등학생도 다 아는 '물의 굴절현상'으로 가지가 세방향으로 갈라졌다.

애초 문수전을 몰랐으면 여길 와서 이 풍경을 찍고 싶었던 거다. 파랗게 녹슨 수문이 해바라기하는 투실한

고냥이마냥 조용히 하천을 굽어보는 표정.

하아, 지금쯤이면 좀더 연두연두해지고 초록초록해져서 따끈따끈하게 데워졌을 텐데.




절을 찾아가는 길은 꼭 산과 내를 찾아가는 길이 되곤 한다.

다독다독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 끝쯤, 더이상 들어갈 수 없다 싶은 깊숙한 산허리춤에서

문득 산사가 나타나는 거다.

불끈 진로를 비틀고 내려닫는 나뭇가지가 수면을 희롱하고 있다.

백화산 반야사 들어서는 입구. 커다란 대문이 반긴다.

선명한 단청보다 눈에 들어왔던 건 배불뚝한 기둥에 그려져 있던 네 마리 용.

사천왕상을 대신해서 휘감겨있는 네 마리 용인가보다.

흑백톤으로 바꾸니 또 다른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이른 봄 실개천을 가로지른 돌다리.

500년 묵었다는 나무가 굵고 커지지는 않고, 꼬불꼬불 안으로만 무성해졌다. 배롱나무랬던가. 메롱이다.

삼층석탑의 단단한 기단 위에 사면으로 네 명 부처가 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많이 올라앉아 있는 돌멩이같은

납작한 동전들. 어떻게 보면 부처를 향해 가르침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곳, '출입금지'라는 두꺼운 붓글씨가 멋지다. 금지의 '지'자가 살풋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

이런 딱딱한 표현을 쓰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종교인답게 양해를 구하는 것만 같다.

무너져 내릴 듯 살짝 위태로운 산방의 대나무울타리.

백화산 산신령의 호랑이가 출현하는 국내유일의 도량, 백화산 반야사. 절 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낙석무더기들이 흘러내린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는 건데, 글쎄. 그냥 저건 많이 휘어진 나이키 로고다.

아까 지나친 삼층석탑, 기교와 크기와 가용자원의 차이일 뿐 그것과 같은 정성이 땅에 발딛고 하늘로 뻗었다.

다소간 끈적해 보이는 개울물이 휘여휘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엉성한 나뭇가지로 까칠한 윤곽을 가리던 산이

너울너울해진 수면 위에 내려앉아 한결 부드러워졌다.

돌탑위에 또 돌을 올리자니 이미 완결되어 버렸다 싶은, 오를 대로 오른 돌탑들 뿐이다. 괜찮다. 위로 오를수록

작고 가파르고 위험해지는 돌탑이 정점에 달했다 싶으면 또 다시 그 옆에 큰 돌 하나부터 차분히 박아넣고

시작하면 되는 거다.  

오밀조밀 사이좋게 쌓여있는 땔나무들이 이쁘다. 그 땔나무가 토해내고 있을 흰연기가 굴뚝을 거쳐 사방으로

뽈뽈뽈 번져 나갔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기억합니다.





어쩌다 보니 수묵담채화처럼 나와버렸달까. 춘삼월 미친눈에도 봄볕 한줌이 그리운 게다.

여리여리한 봄볕에 온통 하얗게 타버린 풍경이지만 은근히 따스한 느낌을 찾아내고 마는 건.




'향수', 鄕愁. 아련한 느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슴먹먹한 상실감이 뒤범벅된 느낌의 단어다.

다소 멍한 눈빛으로 흐르는 물을 부질없이 갈퀴질하는 듯한 그런 이미지랄까.

정지용의 번듯한 생가가 마치 민속촌의 그것처럼 초현실적으로 시골 한복판에 박혀있는 그 곳, 곱게 입혀진

이엉지붕 아래로 낡고 헤진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지 않아 깨끗하고 주름지지 않은 채

박제된 '유물'과 수십년동안 사람손타고 때묻은 채 헐벗은 60년대식 슬레이트 건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간다는 그 실개천 옆으로는 허름한 시멘트담벼락,

그리고 드문드문 녹이 슬은 다홍빛 철문이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에 연해있다.

이렇게 이쁜 간판들을 찾아 사방으로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뛰어다니다가도,

어느새 이런 건물 앞에 서게 된다. 어쩌면 어떤 세대들에겐 이런 건물들이 이상화된 단정한 초가지붕보다 더욱

생생한 '향수'를 자극하는 모티브가 될지 모르겠다. 정지용이 살던 시기에도 저렇게 깔끔하고 아름답도록 잘

꾸며진 초가지붕을 얹고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도 한 몫 했는지 자꾸 이런 슬레이트 지붕들에 눈이 간다.

나중에 저런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도 깨끗하게 잘 정돈된 채 '박물화'되어 있을까.

그나마 아슬하게 서있는 전면과는 달리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의 뒷면.

그리고 80년대 향토예비군 훈련공고 내용을 적어두었을 양철판 하나가 잔뜩 녹슨 채 내걸려 있었다. 어쩌면

여긴 이미 '추억의 그 시절' 쯤 될 만한 운치를 구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본 것도 같고.

하얗게 식은 연탄재가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곳, 살짝만 걷어차도 떨어져나갈 듯한 문짝이 바람결에 철컹이는 곳.

이렇게 연탄을 잔뜩 쟁여두고 겨울을 보내던 풍경은 사실 내 어릴적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향수'랄 것 떠올릴 만큼 나이를 먹지도, 상실감을 느낄 만한 풍경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초가지붕보단

저 연탄무데기에서 '향수'에 가까운 걸 느끼고 말았다.

구멍 퐁퐁 뚫린 벽돌담 위의 도둑고양이. 보통 어렸을 적엔 저런 벽돌담 위에 시멘트를 얹어선 깨진 유리병조각을

촘촘히 박아두곤 했었더랬는데.

허름한 창고, 곰표 밀가루도 취급하고 설탕도 취급한다는 곳의 시꺼먼 내부는 뭔가가 숨어있는 듯. 어렸을 적엔

학교 지하실 창고니, 저런 버려진 건물이니 어둑어둑한 곳들에 손전등 들고 친구들이랑 많이 싸돌아다녔었다.

녹슨 철문 뒤, 할머니댁같기도 하고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문과 그런 오톨도톨 시멘트 장식의 기둥.

괜시리 신발주머니를 질질질 벽에 대고 문대고 다니던 그 시절.

그러고 보니 정지용 생가에서 마주쳤던 부엌의 분위기는 얼마전 '신식 슬레이트' 지붕 얹힌 양옥으로 바뀌기

전까지 넓고 시원한 툇마루를 지키던 작은 할아버지 댁과 꼭 닮았다. 물론 좀더 퀘퀘하고, 닦이지도 않는

그을음이 온통 끼어있었지만.

정지용의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그 곳은, 사실 여느 머릿속 이상향들처럼 현실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그 머릿속 그림을 아무리 재현하려 노력해봐야 백인백색,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내지 않을까. '향수'가 homesick이라기보다 nostalgia에 가까운 이유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시작하는 첫머리만 알았지 가사도 다 모르던 그 시를 지은 사람이

살던 곳이다. 충북 옥천의 정지용 생가. 사실 여행을 가도 엔간함 피하게 되는 곳이 누구누구 생가, 이런 곳인데

이 곳 역시 그냥, 새로 지은 듯한 깔끔한-사람 온기없는-집 하나 덜렁 있고 옆에 박물관이 있었다.

깔끔하고 이쁘니까 좋긴 하지만, 여기서 정지용이 살았단 걸 그려낼 수 없는 건 내 비루한 상상력 때문일까.

조금은 더 리얼한 모습을 남겨주면 좋지 않았을지 생각해 봤다.

그의 '생가' 옆에 있던 지용문학관, 시인이 조탁해낸 언어들과 시세계를 비쥬얼로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일하던 문화해설사(맞나..)분의 질문이 계속 와닿았던 인연이었다. '향수'라는 (노래)제목은

다들 알지만, 정작 그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향수란, 어떤 뉘앙스와 정조를 품고 있는 단어일까요.

"멋진 신세계"는 향수의 시인이자 최초의 모더니스트, 고도의 감각적 시어를 구사했던 정지용의 고장 옥천의

'시문학아트벨트'를 지칭한다고 했다. 정지용의 생가와 지용문학관에서, 옥천의 '향수30리길'을 따라 이어지는

그 공간에서 시인의 정취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해보자는 공감각적 프로젝트라고.

생가 주변에서 만났던 풍경들은 놀라웠다. 이런 간판들이 있다니. 이런 아이디어를 실제로 실현하다니.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모초롬만에 날려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님설거리나니....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파도.

헐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이곳은 탈곡기가 쉼없이 돌아가는 실제, 그런 곳이었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감탄할 밖에. 간판들에 눈을 못 떼고 정신없이 싯구절들을 탐하다가, 문득 삐딱한 맘이 고개를 들었다.

이 비용은 누가 다 감당했을까. 강제적으로 시행된 건 아닐까.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 물을 사며 슬쩍 물었더니, 군청에서 비용을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원하는 사람만 간판을

바꾸도록 한 거였고, 내키지 않는 사람은 안 바꿨다고. 하나 더 물었다. 간판 제목과 싯구절은 누가 정했는지.

뭐, 본인이 딱히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요청했다 하지만, 대개 '간판 만드는 전문쟁이'들이 알아서 만들어

왔다고 했다. 대체로, 다행한 대답이고 따뜻한 사업이지 싶다.

다른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훨씬 맘이 후련해졌다. 멋지다, 고 맘껏 감탄할 수 있어서였을 거다.

↓ 맘놓고 감상하기.



향수의 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난 여지껏 지랄..뭐라고? 이렇게 듣곤 했었다는, 쓰잘데기없는 사족.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중학교 다닐때던가, 왕님이 사시는 궁궐만 백칸짜리 건물로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댁들은 그보다 한 칸 모자란 구십구칸짜리 건물로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다. 백 칸이면

방이 백 개, 구십구칸이면 방이 구십구개니까 고작 방 하나 차이일 뿐, 커다랗기는 매한가지다. 


충북 보은에 그런 구십구칸짜리 한옥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 '선병국 가옥'이란 곳이다. 더구나

1904년부터 1921년에 걸쳐 건축된 건물인지라 시멘트나 벽돌도 활용되었다는둥 나름 전통과 현대가 버무려진

곳이라 하여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선병국 가옥에 들어서는 초입, 보기만 해도 여유로운 정자 하나. 누렇게 익은 솔잎들을 처마 위에 소담하게

쌓아올린 모습이 맘에 팍 꽂혔다.

비록 구십구칸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지는 않다지만 여전히 상당부분 그대로 남아서, 그 후손들과 객들의

일상생활을 떠받치는 제대로 된 집 구실을 한다고 한다. 사람 손을 계속 타야 온기도 느껴지고 보존도 되고,

그렇단 걸 알고 있는 분들이다. 장담그기 체험프로그램도 있다던가, 그래선지 와글와글 모여있는 장독들. 

(그리고 반대편께로 와글와글 모여있는 '파워블로거'분들..굉장한 장비와 굉장굉장한 글빨/말빨을 가지신.)

뒤로 산을 이고 있었다. 풍수란 거,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라도 미감의 측면에서, 자연의 어디메쯤 놓이면 이쁜 그림이 나올지에 대한 경험적 미감이 축적된

심미안으로부터 비롯한 걸지 모르겠다고. 구름이 솔찮이 낀 하늘, 덩굴이 솔찮이 휘감은 담장, 이뻤다.

조금 징그럽다 싶을 정도로 빽빽한 덩굴들, 북쪽의 응달진 곳이라 저렇게 더욱 비비적대며 살겠다고 아우성인

건가보다. 본채와 따로 떨어져서 배치된 '효열각' 기왓장 위로 삐쭉삐쭉 자란 풀떼기들이 보인다.

효열각 안으로 들어서니, 모처럼 보는 듯한 자연스레 퇴락한 단청이 멋스럽다. 너무 선명하고 작위적이다 싶은

모습, 혹은 아예 미미한 맛조차 남지 않은 모습들은 쉽게 보이지만 이렇게 살짝 바래고 씻겨나가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적당히 인간의 것이기도, 또 적당히 자연의 것이기도 한 그 기교랄까, 신비랄까.

어흥. 호랑이는 아니고 무슨 괴물딱지같긴 하지만 어쨌든, 백호의 해 기념삼아 어흥.

벽에 찰싹 붙은 채 사방으로 종횡하는 덩굴 줄기를 보노라면, 파직파직 사방으로 균열이 번져나가며 깨어지는

유리창을 초고속카메라로 돌려보는 느낌이다.

효열각을 마지막으로 올려봐주고, 안에 있는 비석을 촬영하려 몇 번 시도하다 전부 실패. 살풋 말려올라간 처마

끝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곡선이 편안하다.

만리장성만큼은 아니지만 구불구불 꽤나 긴 담장으로 둘러쳐진 선병국 가옥채에 들어서는 입구.

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담장따라 시선을 넘겨보면 운치있고 담백한 느낌의 건물들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다.

그리고 마당엔 제법 수령이 되어보이는 잘 생긴 나무 하나, 뒤로는 구름을 뒤집어쓴 아늑한 산 하나.

"이리오너라"를 여기서 아무리 외쳐봐야 건물 안에까지 안 들렸을 거 같은데. 예전에는 과객실, 방앗간채까지

있었다고 하니 아마 이옆에도 뭔가 발레파킹할 때 쓰이는 간이천막같은 거라도 있지 않았을까.

사랑채. 건물 기둥이 모두 둥글둥글한 원기둥인 게 눈에 띈다. 안채는 네모기둥과 원기둥이 모두 쓰였다던데

뭐가 전통적인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쩜 둘다 전통적으로 쓰이던 스타일인지도. 
 
바람소리를 기다리는 풍경.
 
나무 자체의 발색이 그대로 살아있는 문틀이 고상해 보인다. 화려하지 않고 깔끔하다 싶으면서.

바싹 마른 해바라기는 그런, 갓 베어낸 나무색이다.

따뜻한 발바닥을 기다리는 추운 털신.

삐뚤게 박힌 석등, 살풋 열린 정지간 문짝. 발랄한 노란빛 토담을 지그시 눌러주는 기왓장.

안채, 사실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서있었지만 살짝 돌고 나왔다. 시멘트로 마감된 기와지붕, 벽돌로

정돈된 한옥집의 아랫도리.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빨랫줄에 쭉 늘어선 옷가지와 이불들이 다정하다.

두툼한 패딩점퍼를 벗어던지듯 쭉 찢어진 목련꽃방울, 그 곳에서 봄기운이 쏟아져내린다.

부엌에서 이어진 연통이 ㄴ자 형태로 하늘을 향했다. 문짝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공들여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여기서도 계속됐다.

잘 손질된 생선, 조기인지 뭔지, 안채의 어느 나무기둥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연목구어, 가끔은 통한다.

바닥에 철퍽 떨어지는 생생한 소리와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걸 보면 분명 재래식 화장실인데, 이런 식으로

'현대화된' 재래식 화장실은 첨이다. 차마 찍을 순 없었지만 나름 발로 조종가능한 뚜껑도 있고, 찍지는 못해도

체험은 해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주황빛 함석지붕이 주변 경치를 흐트려놓아 아쉬웠달까.

돌아나서는 길, 작년 가을에 나리워졌을 낙엽들이 여전히 소복하다. 왠지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 저 낙엽들이

다시 물기를 쭉쭉 빨아선 초록빛 가득 채워 포르르 날아오르는 걸 상상하니 즐겁다. 착착, 자신들이 의탁했던

가지로 다시 돌아가 단단히 붙는 초록잎새들의 향연이라면.

살짝 삐뚤게 매달린 우편함이 외려 편안해 보인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 놓쳤던 풍경이 하나 시선을 끌었다. 저긴 뭔데 한쪽 면이 전부 저렇게 나무로 짜여져 있는

걸까. 굉장히 독특해 보이는 나무빗살무늬가 가득하다.

토담길 옆 나무 한그루가 땅거죽을 뚫고 허리케인처럼 솟아올랐다.

잘 가라고 배웅하는 풍선춤 나무 두 그루. 온 몸이 오글오글하다.



정말이지 격하게 아끼는 거다. 기운차게 달려가 뒤에서부터 (이왕이면 멱살에서부터) 잔뜩 부여잡고 거꾸로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눈 앞에 그려진 브이자를 보곤 흠칫 놀란 표정이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러셔, 조만간 달걀 들고 다시 한번

쳐들어갈지도 모른다구.



전두환 혹은 그와 비슷한 피사체에 애정을 표하고 싶은 이는, 지금 당장 짐을 꾸려 청남대로 고고씽.


청남대, [충북팸투어-청남대] 김대중과 노무현의 '아바타'가 그곳에 있다.에 이어 나머지 대통령들의 이미지도

가득 담아 올 수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전두환 대통령 때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그 이전 대통령들의 체취랄까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후로도 워낙 (여러 의미로) '씨알굵은' 대통령들이 있으니 아쉽진 않다.

참 씨알 굵은 양반. 산책로에서 제일 먼저 만났던 분인데, 이후 제각기의 특징을 잡고 있는 동상의 모습을

되짚어 보니까 저 자세는 어쩌면 구보와 각잡힌 걸음새에 익숙한 퇴역군인의 특성을 잘 포착한 게 아닐까

싶었다. 찰져보이는 몸뚱이에 완강하고 의지력있어 뵈는 얼굴까지. 딱 그사람이다.

그의 뒷모습. 맨들맨들한 동상 뒷머리에 흔히 떨어져 있을 법한 새똥 하나 없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다음 타자는 골프채를 시원하게 휘두르는 노태우 전 대통령. 그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 나는 삐라를 모았었다.

그 천연색깔 알록달록한 그림과 낯선 글씨체가 신기하고 자극적이었다. 똥오줌 못 가리던 어린 나이인지라

아마 사람들이 회피하고 어쩌면 무서워하던 삐라를 한장 두장 모아가며 묘한 쾌감을 느꼈던 거 같다. 어느날

부모님은 우표수집책 속에 우표처럼 꼽혀있던 색색의 삐라를 보고는 다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는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원래 그렇게 생긴 걸까 아님 이 동상의 작가가 잘못 만든 걸까. 본인이나

유족으로부터 초상권에 대한 합의를 받고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라 했었다. 사실 그가

재임중이던 시절, 난 최루탄 냄새 맡으며 어린이회관에 '우뢰매' 따위 보러다니던 꼬맹이였다. 그의 얼굴을

티비에서 본 기억이 없다. 입꼬리는 더더욱 기억에 있을 리 없다. 별명이...물태우였다던가.

김영삼 전 대통령. 요새도 참 말 많이 하던데, 다행인지 우리 나라 대통령 중엔 아직까지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례가 없었다. 끝까지 무사하게 피 안 묻히고 구정물 안 튀긴 대통령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깅을 워낙 좋아했던 대통령답게 흥건히 브론즈색 물들이고도 또 뛴다. 무슨 포레스트 검프도 아니고.

그의 봉긋한 엉덩이를 함께 보며 친구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클린턴이 조깅을

제안해왔댄다. 나란히 달리며 한미관계를 논해야 할 그 찬스에서, 그는 죽어라고 달려선 클린턴을 멀찍이

따돌리고 이겼다며 좋아했단다. 그러고 보니 포레스트 검프랑 비슷한 면이 적잖다.

"클린턴도 조깅으론 날 못 이겨~!" 좋댄다.

그리고 책 읽는 김대중과 자전거 타는 노무현을 만나고, 초봄 기운이 드리워진 청평호에 시선을 박았다.

청남대엔 군사시설도 함께 있었다고 하더니, 설마 그때부터 화장실 옆에 저렇게 배치되었던 건 아닐 거다.

여자는 왼쪽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그리고 볼일급한 꼬맹이는 가운데쪽으로.

대통령 광장에 들어서는 입구. 뒷 벽면에는 각국의 행정수반이 집무를 보는 관청이 있다. 한국의 청와대,

프랑스의 엘리제궁, 미국의 백악관, 뭐 그런 것들.

총 9명의 대통령. (현 대통령을 제하면) 16대 대통령까지 16번의 임기가 지났는데 인물은 9명이다. 뭐 재임,

중임이 항상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지만, 좀더 옵션이 많았으면 조금은 더 맘에 드는 대통령이 많았을지도

모르겠어서 아쉬울 따름.

옆구리에 '대한민국 헌법'을 끼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치하에서 만들어진 헌법이긴

해도 그때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의미는 지금과는 또 달랐을 거다. 당장 국토의 공공성이라거나

수도로서의 서울이 갖는 지위 따위가 해석을 통해 바뀌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장면 내각은 내각제여서 대통령 광장에 끼지 못했나 보다. 바로 윤보선 대통령으로 스킵.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어떤 대통령감인지 알아보고 평가하기엔 그의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사람. 근데, 그 사람하고 진짜 닮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흉내낸다고 선그라스 끼고 돌아다니고 그런

모습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 사람 닮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중인 거 같다. 어쩌면 요새는

그 사람보다 더욱 세련되고 고도화된 수준에 올라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엄연한 질적 차이가 있으니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엔딩은 얼마나 닮고 또 얼마나 다르게 될까.

최규하 전 대통령. 이 분이 아마 최근의 '서거 러시' 이전 가장 가깝게 돌아가신 분이었던가. 조용하게

돌아가셨던 거 같다. 무색무취한 대통령이었던 걸까, 역시 짧았던 재임 기간 때문인지도.

아까, 군대에서 구보하는 걸음새로 각잡혀서 걷던 아자씨.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광주의 전남도청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 채 파시드랑 뼈대만 남겨두었으며, 가끔 그는 현실 정치에 훈수도 둔다.

노태우 전 대통령. 그런 생각도 든다. 대통령도, 국민도, 시간이 지난다고 점점 나아지라는 법은 없다.

그건 조금은 무임승차하려거나 언발에 오줌누기식 위로를 구해보려는 얕은 꾀.

IMF라는 재앙이 터진 건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기였지만, 그게 터지지 않고 안으로만 내연해서 약자들을

사회 밖으로 튕겨내는 시스템을 만든 건 그 이후였다. 거대한 후폭풍을 불러오고 뭔가 구태의연하던 과거를

지워버려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고도화된 모순을 만들어내버린 면도 있는 거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고용 시장, 오히려 위축되는 듯한 사회복지망, 수월성 위주의 입시 교육, 민주/반민주 따위

선언적이고 허구적인 경계선에만 자족하는 지난 시대의 비주류들..그래서 김영삼 때문에 IMF가 났다고 쳐도

-사실은 다른 원인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그 뒷수습을 그렇게 한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어쨌거나, 대통령 광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태극무늬가 있다.

대통령 동상들이 바라보는 쪽엔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다. 고개도 돌리고 카메라도 돌렸다.



충청북도 청원군에 위치한 청남대는 대통령 전용 별장이다. 대통령이 국무를 보다가 내려와 쉴 수 있는 공간,

그 정도 되려면 주위 경관이니 입지 조건도 특별해야 할 테고 옛날옛적 어느 스님의 예언 같은 것들도 구비구비

서려 있어야 하는 거다. 청남대 역시, "왕이 머물 곳"이라는 예언이 일찍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곳은 더이상 대통령을 위한 곳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충청북도에 소유권을 이양한 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니, 누구든 입장권을 사면 들어올 수 있는 문턱낮은 곳이 되었다.

최외곽으로 돌면 반나절은 산책할 법한 규모의 청남대 내부에 올 초 새로 '대통령 광장'이 생겼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 왼쪽에 과거 골프장으로 쓰이던 풀밭을 끼고선 전직 대통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을 못 본 척 지나고 나니,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주쳤다.

이 분, 작년에 그렇게 가신 것도 모자라 요샌 묘소에 도깨비불이 횡행한다고 했다. 그런 번다한 세사 따위

모르겠다는 듯 초연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그는 민주화 투쟁 시절 감옥에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었다. 만델라도 그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골프장 잔디밭을 일부 밟은 채 국산 자전거에 올라앉아 손을 흔들어 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의 환한 웃음을 마주했다. 자전거를 타고, 밀짚모자를 쓰고, 그런 모습들이 워낙 친숙했던 그인지라 이런

동상이 서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뭐랄까, 일종의 아바타-화신-인 거다. '노무현'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을 똘똘 뭉쳐 놓으면 저런 게 나올 게다. '김대중' 역시 마찬가지.

작년 5월쯤, 그의 갑작스런 서거가 몰고 온 파급력은 정말 대단했다. 마치 온나라 국민들이 이제야 그의 진가를

알았다는 듯, 지켜주겠다고, 지키겠다고 울음지었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인간 노무현이 아닌 대통령 노무현에

발견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좀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그의 정책과 비전에 대한 쿨한 평가가 진행되야

하겠지만, 당장은 그렇다. 인간 노무현의 저런 소탈한 웃음은 굉장히 좋았었다.

실개천같던 산책로를 따르다가 어느 순간 대통령 광장으로 탁 트여나왔다. 미래의 대통령 동상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 두었고, 그 뒤로는 역대 대통령 동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저 '미래의 대통령' 자리에서 어떤 꼬맹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집을 넓히고 싶다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설사 남편이라

할지라도 엄벌에 처하겠노라 공약했다고 했다. 유치할 수도, 혹은 순박할 수도 있는 공약들이지만, 단상 뒤로

쭉 섰는 대통령들을 보자니 그런 '단순함' 혹은 '순박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그다지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는 조금 뿌듯했다. 그런 대통령의 단상 위에는 꼬맹이들이 그와 눈높이를 맞춰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던 듯, 흙발자국이 어지럽다. 다른 대통령들의 단상은 상대적으로 말끔한 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시, 여기서도 웃고 있다. 증명사진 찍듯 경직된 자세와 표정을 고수하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생생한 표정, 생생한 제스쳐다. 그런 모습은 그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상대적으로 갖지

못했던 '젊은 모습'이었고, '비권위주의적인 모습'이었던 거다. 그게 연출되거나 의도된 이미지 메이킹이었다고

해도, 이제 그는 '권위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대통령-인간'의 대명사로 남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청남대의 풍수지리적 예언-"왕이 머물 곳"이라던-을 들먹거리는 건 사실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코미디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근엄함과 신성성, '가오'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란

이야기다. 청남대는 왕이 머문 곳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 하나를 대표로 내세워

국가대표 공무원을 시켰던, 그 '사람'이 일하다가 와서 쉬던 곳일 뿐이다.

그가 들어올린 손이 앞선 대통령들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쳐내는 듯 하다. 그의 모습이 다른 전임 대통령에

비해 훨씬 커보이는 듯 하다. 가까운 건 커보이고 먼 건 작아보이는 원근법의 효과다. 그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그의 뒷모습을 만났다. 느낌이 달랐다. 아까는 산책로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맞이하러 나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뭔가 뒤도 안 돌아본 채 휑하니 사라지려는 듯한 분위기랄까. 그의

등짝을 바라보는데 살짝 울컥했다. 생전의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음에도.

다행히도, 그의 그런 쓸쓸하고 비감한 뒷모습 옆에는 거의 쉴틈없이 사람들이 함께 서 주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와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을 구경하고 지나친 사람들은 저 사진찍기 좋은 동상 옆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에 그리도 만만한 대통령이었던 그는 지금도 청남대에서 딱 그만큼

만만한 전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 했다.

청남대, 이 곳은 일반에 개방된 이후부터 적자 행렬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관리해야 할 시설물과 규모를

생각하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야 겨우 적자를 면하지 않을까 싶다. 그곳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전거를 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건대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박정희, 최규하, 윤보선, 이승만 대통령이 있다. 입맛대로 골라갈 일이다.)




#1.

지난 토, 일요일은 충북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말도 안 되지만 무슨 '파워블로거'와 함께 한다는

충북도청 주최 팸투어에 낄 수 있었고, 여행이란 소재로 다들 한 가닥씩 하신다는 쟁쟁한 블로거들과 함께

충북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기회였던 게다. 재미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블로그에

있어서도 뭔가 시야를 넓힐 계기도 되었고. 무엇보다 갓 봄이 다가오는 시골길을 쏘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마냥 좋았던 1박2일이었다.


#2.

마음이 아무리 사방으로 쏘다녀도 몸은 솔직하다. 당장 몸이 나른하게 처져 있거나, 전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라면 머릿속에 아무리 오만 상상과 욕심이 꿈틀거려도 전부 부질없는 거다. 예전엔 사실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혹은 몸은 단순히 마음이 타고 다니는 일종의 탈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녔다. 몸이 내키지 않으면 마음이 아무리 재우쳐 봐야

꼼짝도 않는 거다. 몸은, 마음보다 순결하다. 멍충이.


#4.

종로 바닥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왔다. 얼마전 '반폭'이라며 소주반/맥주반의 술잔을 돌리며 쉼없이

들이키던 술자리, 혹은 밉상 고참이 낀 회사에서의 술자리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쾌한 자리였다.

대학에 들어간지 어느새 십년이 넘어버린 채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며 서로 엉덩이도 툭툭 쳐주고

육두문자도 남발하는 그런 자리였어서 더욱 즐거웠는지도. 하갸 언제는 안 그랬냐만서두.


#5.

커다란 T/F에 포함되어 일할 뻔 했다. 지난 1월의 출장 이후 연이은 행사 쓰나미가 지날 만 하니 거푸 바닷속

깊이 잠수를 빙자해 꼴깍꼴깍 사경을 헤맬 뻔 했던 거다. 다행인지 무사히 지나쳐갔고, 이제 다시금 예측가능한

세상에서 예측가능한 시간표를 살아갈 수 있게 된 거 같다. 무언가 굉장굉장히 정신없이 지나버린 1, 2월.

다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새삼스런 다짐 한 번. 당장 내일부터 출근은 자전거로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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