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간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잠시 포카라를 둘러보곤 카투만두로 날아왔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은

 

대충 대여섯시간 남은 상황, 카투만두 트리부번 국제공항에서 걸어서 십오분 거리쯤에 있는 파슈파티나스 사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무려 1,000NPR(한국돈으로 약 10,000원)에 달하는 예기치 않은 고액 입장료에 놀랐으나 사원 입구에서부터 현란한 색깔로 압도당하다.

 

나무나 석물을 파서 만든 저 도장들을 위한 염료인 것 같은데, 색깔이 어쩌면 이렇게도 곱고 화려하게 발하는지.

 

사원 비스무레한 건물이 나타나기도 전 이런 류의 기념품샵들에서부터 삼매경에 빠져 한참을 지체하고 있었다.

 

네팔의 상징과도 같은 'Buddha's eye'. 그 문양을 박아넣은 주발. 막대기를 사용해 주발의 바깥을 따라 부비면 거대한 공명이 생긴다.

 

이윽고 나타난 사원 비스무레한 건물들의 실루엣. 켜켜이 중첩된 낡은 건물들, 그리고 그 앞에서 혼자서도 잘 노는 꼬맹이 하나.

 

 

 

그리고 예기치않은 연기와 매캐한 냄새의 기습. 대체 이게 뭐야, 할 틈도 없이 시각과 후각을 빼앗겼다.

 

뭔가 굉장히 불편하고 메스껍기까지 한 냄새, 뭐랄까 고기를 굽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태우는 듯한 그런 냄새와 연기였다.

 

강 건너편에서 불구덩이를 만들고는 뭔가 열심히 태우는 사람들, 거의 다 불길이 사그라들어 연기를 뿜어내는 것도 있었고

 

혹은 이제 막 살라붙은 불이 맹렬하게 장작들을 공략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불쾌하고 역한 속을 애써 다독이며 걷다 보니 커다란 중심 탑 앞까지. 온통 구름 속인 듯 연기가 자욱하다.

 

 

그리고 붉은 축복의 징표가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온몸을 시뻘겋게 피칠갑하듯 염색해버린 조각상들.

 

그리고 다리를 건너 좀더 가까이 다가간, 그 장작더미들과 불구덩이들의 정체는.

 

마치..나무로 짜인 침대와도 같은 장작 위에 놓인 그것, 한때 웃고 말하고 움직였을 그 몸뚱아리.

 

이곳 '성스러운 바그머띠 강'을 끼고 위치한 파슈파티나스 사원은, 네팔 최대의 힌두사원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보다도 더 유명한 건, 힌두교도들의 마지막을 위한 강변의 노천 화장터가 상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금까지 누군가의 마지막을 위한 제의의 공간이었던 곳, 타고 남은 잿가루들이 강으로 쓸려내보내지고 나니

 

어디선가 비틀거리며 조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가 털썩, 소리가 들릴만큼 주저앉았다. 혹시, 주인이었던 건 아니겠지.

 

화장터 앞에서 망자의 마지막을 지키는 가족들, 그리고 관련된 종사자들. 마치 들것과도 같은 저 철판 위에다가

 

모셔와서는 정성껏 쌓아올린 나무 장작 위에 안치한다. 그리고 구석구석 고체 기름을 꼽고는 불을 댕긴다.

 

 

그게 끝. 아니, 사실 끝은 그보다 훨씬 이전일 거다. 눈을 감는 순간, 심장이 멈추고 뇌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그러고 나면 남는 쭉정이, 땅에 묻던 불로 사르던 수많은 원소로 돌아가는 건 같다. 다만 속도의 차이일 뿐.

 

 

그렇다고는 해도, 그 정제되지 않은 냄새와 연기. 가까이서 지켜보고 나니 더욱 숨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잠시 옆의 지붕이 그럴 듯한 사원으로 피신하여 숨을 돌렸다.

 

 

사실 이곳 파슈파티나스 사원은 힌두교 최고의 신인 시바를 모신 사원 중에서도 손꼽히는, 심지어 인도까지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사원 중의 하나라고 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교인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까 열심히 연기와 냄새와 싸우며 걸어왔던 강변, 문득 다시 보니 지금은 원숭이떼가 온통 길을 점령해 버렸다.

 

이 곳에 사는 원숭이떼들은 더러 먹거리를 들고 있는 사람을 습격하기도 할 만큼 악명이 높다고 한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조금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사원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참, 장작을 쌓는 모습을

 

처음부터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방망이 깎는 노인'의 자세랄까,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짝을 맞추고 높이를 조정하고.

 

그렇게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불길이 일 수 있도록 쌓은 장작더미.

 

위에 고인을 모시고 짚으로 몸과 얼굴을 잘 가리고 나면, 삐쭉 나온 두 발이 남긴 하지만 차라리 그건 덜 안타까운 장면.

 

옆엣 공간에서는 굉장히 작고 조그마한 짚덤불이 놓인 채 불이 올랐더랬다.

 

그리고 이리저리 불을 뒤채며 잔해가 남지 않도록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는 일꾼. 결국 재만 남고 나면

 

삽같은 것으로 긁어 강으로 남은 것들을 뿌려버린다. 아이들이 수영하고 뛰어노는 바로 그 강변으로.

 

 

그렇게 강변을 따라 늘어선 대여섯 개의 화장터. 마침표 이후의 잔해가 또 하나, 안식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하루에 수십번씩 벌써 수백수천날을 보았을 어미 원숭이와 그녀의 조그마한 새끼 원숭이.

 

 

 

 

천년고도 경주 남산에 찾아드는 봄. 꽃망울이 툭툭 터지며 노랑 꽃잎이 비집고 나왔다.

 

남산을 올라가는 길은 굉장히 여러갈래가 있는데, 그 골짜기마다 온갖 돌을 쪼아 모신 와불과 좌불이 숨어있다.

 

일단은 남산 아랫둔치에 있는 포석정부터 살짝 눈도장찍고 남산을 에둘러 삼릉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경주에 오면 뭐니뭐니해도 소나무. 거침없이 뒤틀린 그 기기묘묘한 생동감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와중에 이른 봄볕을 쬐러 나온 청설모 한 마리. 쉼없이 앞니를 놀리며 겨우내 아껴두었을 도토리를 까먹는 참이다.

 

그리고 삼릉. 제법 경사가 있는 곳에 울창한 소나무숲을 지나다 보면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이 둥실 떠오른다.

 

 

능 세개가 연이어 봉긋봉긋 솟아있는 곳엔 따스한 봄볕이 나리고, 주변에는 짙은 솔숲 그늘을 드리워 서늘한 기운이 뻗친다.

 

조그마한 구릉처럼 솟아난 저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을 보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

 

천년 전의 죽음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평온한 분위기로 승화되었구나, 랄까.

 

딱히 어디가 길이랄 것도 없는 남산 언저리를 더듬다 보면 이런 표지판이 보인다. 신라인의 미소와 도깨비의 형상.

 

경애왕릉을 향해 걷는 길, 곧고 늘씬하게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신비로운 기운처럼 하늘을 향해 하늘하늘 번진다.

 

 

그리고 다시, 삼릉과 경애왕릉을 지나고 남산을 향해 본격적으로 걷는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어깨를 구부려 터널을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추모 열풍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의 철학이나 인생을 기리는 게 아니라, 그가 만든 애플 제품들을 기념한다는 느낌이랄까.

그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전혀 새로운 아이템을 끄집어 냈다지만, 그게 이런 애도물결의

근거로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가 남긴 레토릭들과 아포리즘을 되씹으며 경탄하고 있는 사람들은

뭔가 그의 실체가 아닌 그의 이미지나 그림자에 열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번 추모이벤트의 셀링포인트는, 내가 보기엔, 유저들에 대해선 (매니아틱하고 일종의 상징으로

소비되기에 이른) 애플 제품에 대한 충성도를 과시할 기회란 것, 그리고 언론들에 대해선 그의

드라마틱한 성공담을 현대사회 샐러리맨들의 신화로 승격시키는 기회란 것 정도 아닐까.


한국의 찌라시들이 질리도록 미국발 보도를 받아쓰는 이유도, 그런 신화를 다시 한국에 불러내려는

거 아닐지. 그렇지만 이미 메이드인코리아 버전의 샐러리맨들 신화 혹은 환타지는 차고 넘치는 게 사실.

MB, 정주영, 이건희, 이병철,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MB가 언론사 대담중에 안철수를 두고 '학계인사'라

지칭했던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쨌거나 애플로서는 대목을 맞은 셈인 거 같다. 원했던 원치 않았던 스티브 잡스의 '시체장사'를 통해

애플의 브랜드 이미지와 스타일이 격하게 강화되고 말았으니, 그의 죽음 앞에 주판을 튕기며 쾌재를 부르던

한국의 덜떨어진 매체들과 기업들은 역풍 앞에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잡스의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면 되려나, 애플 주주들에 대한.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Scene #1.

―이번 사태 때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바로 이 자리에서 네 번째 학생이 자살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다. 세 번째 자살 학생이 있고서 9일 만이었다."
―이게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책임이고 뭐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솔직히 젊은 학생들이 그런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카이스트 사태 그 뒤' 서남표 총장 (조선일보, 2011. 4. 25)



대학의 총장이다. 더구나 세명, 네명의 아이들이 며칠 사이에 죽어간 대학의 총장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죽어간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그 '젊은 학생들'의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와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은

고사하고,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Scene #2.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4대강 사업 현장에서 노동자가 20명이나 사망한 것과 관련해 “본인 실수로 사망한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 장관은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노철래 미래희망연대 의원이 “공사 진행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생긴 것은 살인적인 공사 진척 때문”이라고 지적하자 이같이 답했다.

정 장관은 질문에 대해 “사고다운 사고는 몇 건 없고 대부분 본인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나 익사사고 등”이라고 말했다. 또 정 장관은 “현장 사고가 많이 난 것은 송구스럽지만 (공사를) 서두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라며 “야간작업을 해서 사고가 난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국토부 장관 “4대강 사망사고는 본인 실수 탓” 파문 (경향, 2011. 4. 21)



장관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면, 그런 정부의 얼굴 중 하나가 

장관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거다. 사대강 사업을 관장하는 주무부서의 장관이, 그 공사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질문 앞에서 저런 말을 했다. '본인 실수다'. 장관이 할 말은 아니다.

수십명이 죽고 있는데도 그저, 개인의 실수로만 몰아간다는 건 사람이 할 말도 아니다. 


Scene #3.

"언론에서 지난 1월 20날 그 사고를 용산 참사라고 합니다. 뭐 때문에 참사라고 합니까?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참사라고 합니다. 누가 뭣때문에 죽었습니까? 우리 경찰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신나와 시너를 끼얹고 거기에 불을 질러서 사람이 죽었습니까? 

2010. 1월 조현오 경찰총장 연설 중.



용산참사로 철거민 다섯사람과 전경 한사람, 총 여섯명이 죽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모독과 증오의

단어들은 계속된다. 테러범이라느니, 죽을 짓을 해서 죽었다느니. 전후 사정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보호해야 할 국민의 생명을 결과적으로 앗아갔다는 점에서 고개를 조금이라도 숙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는 커녕 계속해서 그들의 죽음을 물고 뜯는 건 잔인하다.


Scene #4.

서른두 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홀로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웃집 문에 붙여놓은 마지막 메시지는 ‘창피하지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였다. 많은 이들이 가난한 예술가의 비극에 놀라고 슬퍼했다. 그녀의 동료들은 이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이슈가 되었다. 복지 체계의 미비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게 다 MB 때문”이라는, 지하철 안내방송만큼 감흥 없는 이야기도 반복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 주의를 끈 것은 최씨의 부고 기사 아래에 붙은 인터넷 댓글들이었다. 명복을 비는 댓글 사이사이로, 고인을 질책하고 훈계하는 댓글이 끝없이 매달렸다. 몸이 그 지경이 될 동안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는가, 재능이 없다 싶으면 포기해야지 왜 맨땅에 헤딩을 하는가, 이웃에 밥 달라는 쪽지 쓸 힘이 있으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했어야지….


'잠수함의 토끼' 최고은씨(시사IN, 2011. 2. 23)



윗분들께서만 죽은 자를 모독하고 멸시하는 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나

존중 따위는 없이, 그저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에 따라 폄하하고 재단하기에 바쁜 건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 역시 윗분들 못지 않았다. 말이 없는 사람 앞에서

자기 맘대로 짛고 까불며 훈계하는 댓글들, 언제부터 죽음 앞에 이렇게 무감각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일본 대지진 직후 일부 언론은 국내 경제에 미칠 득실, 돈계산하기에

바쁜 기사를 써내곤 했다. 당장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죽었으니 감이 떨어졌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렇게 한건 한건, 한사람 한사람 죽어가는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고작(!) 이 정도라는 건, 특히나 그 죽음에 가깝거나 먼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 반응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정말 멋진 풍경이었다. 한라산등성을 구불텅 넘어가는 왕복 2차선, 길 양편으론 억새가 무성했고 저 멀리로는

어슴푸레 오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한뼘씩 쌓인 밤길이었고, 지나는 차 한대 마주치기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차는 멈춰야 했다. 짙은 먹장구름이 조금씩 헤쳐지면서 동이 트고 있었다. 앞뒤로 오던 차들이

조금은 일찍 알아서 피해가겠구나, 비상등 깜박이도 잘 보이겠구나, 그 와중에 살짝 안심이 되었다.

불과 그 몇십분 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형형히 헤드라이트를 밝혔던. 

내리막길, 빙판길이었다. 돛대처럼 펄럭, 펼쳐올라 부풀었던 본넷은 그나마 얌전히 구겨 닫았다.

그런 거였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차, 몇 걸음 동동거리기도 전에 발등까지 차오르게 쌓인 눈 덕에 신발도

흠뻑 젖고, 손발도 꽁꽁 얼어버렸댔다. 사실은 내가 다치지 않은 것, 누굴 심각하게 다치게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충격의 순간, 죽는 건가 했다.

제주 지역주인 '한라산'도 19도쯤의 순한 소주가 나왔더랬다. '한라산물 순한소주'. 후유증인지 만성피로인지

몸과 마음이 여전히 축축 처져있어서, 순한소주 따위 말고 저 북조선산스러운 '한라산'을 마셔버렸다.



죽음을 앞두고 발휘되는 통찰력.

'인생수업'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통찰력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그런 거 같다. "지금의 삶으로 충분해,

더이상 바라는 것은 없어"라고 생각할 만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라, 지금 여기 내앞에 놓인 순간에 만족하라,

그리고 (매끄럽게 배려된) 감정표현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을 앞두고야 깨닫지 말고, 평소부터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럽지만 강력한 제안이다.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것들.

순응과 포기는 다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고정된, 주어진 부분이 뭔지를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이상

떼쓰거나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순응이다. 반면 어떻게 잘 해보면 자신이 움직여볼 수 있는 것들임에도 지레

힘들다거나 두려워서 손을 놓는 것은 포기하는 거다. 그렇지만 생활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보자면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내가 손대면 바꿀 수 있을 부분일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해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순응하는 마음자세와 포기하는 마음자세는 대체 어떻게 다른 건지.


현실만족과 현실안주는 다르다. 이른바 Carpe Diem, 지금 이순간에 대해 충만함을 느끼며 매 순간 살라는

이야기는 그럴듯하다. 인생수업의 이 부분은 이미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에서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매순간, 매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온통 주의를 집중해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나 '애인을 만날 때 온 정신을 기울여 이야기를 나누고 예컨대 담날 회의, 일거리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현대적 이야기나 핵심은 같다. 그렇지만 역시, 추상에서 구체로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HERE & NOW, '지금 여기'라는 지점이 대체 무엇일까.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지금의 현실이라 느끼는 건

아주 피상적인 껍데기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역할도 수십가지인 판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란 것 역시 잘 생각하면 깔끔하게 정답이 나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거다. 쉽게

던지는 '순간에 충실해'란 말이 '점심시간이지만 배가 고프진 않아'란 말과 비슷해지는 건 그래서다. 뭔가

의미는 알겠는데 어쩌란 건지 모르겠는.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도 다르다. 적절한 때 적절한 수준으로 감정을 표출, 화를 내는 것이던 화를 내겠다는

예고이던 해주는 게 본인에게나 서로의 관계에 좋다는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특히 나처럼 딱히

화내지 않고 시니컬하게 반응하며 해소해 버리는 스타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반면 무턱대고 화만 내는

사람이나 화낼 꼬투리만 잡으려는 듯 보이는 사람, 그런 건 감정표현이 아니라 감정전가에 불과하다. 자신이

화났으니 너도 이만큼 화나게 만들어주마, 작정한 듯 계속 갈구고 찌르고 건드리는 사람들. 역시 개념적으로야

딱 떨어지는 정의와 설명이 주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혼동스럽다.

그러한 감정표현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상황, 받아들여야 할 불만족이나 분노를 다른 이에게 배구공 토스하듯

전가시키는 일인지 아니면 정말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의 어필이 가능하도록 안배된 일인지. 또 내가 생각컨대

적절한 감정표현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위가 상대의 입장에선 전혀 불합리하고 치졸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는 문제.(당장 죽지 않는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저자들의 탓은 아니다. 그렇게 구분하기 쉽고 해내기 쉬운 일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서야

겨우 깨닫고 인생을 새롭게 반추하게 되겠는가. 심지어 평생 그런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깨닫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판에 말이다. 게다가 머리로 알았다, 라고 아무리 외친들 게으른 몸이

그에 따르는 건 별개 문제다. 죽음이 턱밑까지 쫓아왔음을 느끼고 나서야 슬그머니 마음을 돌려먹는 거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이런 교훈들을 체화시켜 살라고 할 때 몇가지 문제점을 의식하게 된다. 우선 타인의

시선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는, 지극히도 유치하고 허세스런 문제다. 마치 식물이 빛을 따라 움직이듯 사람도

타인을 따라 움직이는 '굴타인성'이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치기로 하고, 순응과 포기, 현실만족과 현실안주,

그리고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는 대개 거의 비슷한 외형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인생에 만족해, 라는 말을 뱉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당당한 주체성과 현실만족감이 자리해 있을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현실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거짓부렁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다. 심지어 스스로도 불안해진다.


이건 사람들이 대개 타인의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하고-그만큼이나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지만-무책임하게

한다는 경험칙 때문에 더욱 신경쓰이는 상황이 된다. 다른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얼기설기

꼬여있는 줄도 모르면서 잘도 훑어내려 몇몇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우악스런 사람들. 게다가 스스로 그러한

무책임한 '평론가'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더욱 스스로를 검열하고 재우치게 되는 바보스런 처지에 빠지기도

하는 거다.


물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회광반조'와 당장에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아야 하는 쌩쌩한 생활인의 마인드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살 날이 한 해

더 줄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더 나아가 오분후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초상집에 가서도 처음의 어색함과 침중함도 잠시, 금세 배고프고 졸립고 우습고 욕망하는 게

사람인데 말이다. 배울 게 많으니 수업을 듣는 거니깐, 굳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 반잔이나, 라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다는 말,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곳에 쓰인 '삶'이라는 단어는,

혼자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게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고쳐

읽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결국은 '길동무'의 문제. 아무리 혼자서 인생을 두고 '물 반잔이나'라는 식으로

고쳐 생각하려 애쓰고 그에 맞춰 살아보려 해도, 주위 사람들이 전부 '물 반잔밖에'라는 마인드로 평가하고

충고하고 개입한다면 금세 꺽일 수 밖에 없을 거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지 않던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인생수업'은 타인을 변화시킨다거나 타인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느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평화, 자신의 행복을 찾는 법에 집중하고

있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자기 하나 바로세우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지나친

과욕이거나 자만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든 사람의 예스를 얻을 수도 없는 거다.

다만 인생에 대한 비슷한 자세를 가진 자기 편 한 명 정도만 든든하게 버텨주면 된다. 그저 꽃밭에서 꽃들이

제각기 자신의 무거운 꽃대궁을 쳐들고 꽃잎을 틔워내어 함께 아름답듯, 그렇게 누군가-그게 정말 단 한명이라

할지라도-와 함께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맞으며 '반잔 씩이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겸손해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르겠다.


덧댐. 제목이 인생수업, 수업의 시작과 끝이 인생의 시작-탄생과 끝-죽음과 맞닿아 있다면, 아직 이렇게도

사는 게 뭔지, 무엇을 좇아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건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 등산나오신 아줌마 아저씨들이

흔히 5학년이네 6학년이네 하는 말이 유난히도 와닿게 만드는 책이다.


인생 수업 - 8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이레

제주 올레길 7코스의 강정포구 인근. 여태 해안가와 논두렁길, 꽃길을 걸으며 한껏 들떠있었던 기분이 싸해졌던 구간.

올레길 표시를 지나 문득 꺽여들어간 해안길.

오묘한 형태의 조형물이 바닷가에 서 있었다. 왠지 살풍경하고 휑뎅그레한 분위기, 왤까 싶다.

조금 둘러보니 노란색 깃발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꽂혀있고, 삼엄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켠에는 천막이랄지 텐트랄지 간이시설물이 있다. 방금까지도 누가 머물러있었던 듯 하다.

올레길을 걸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을 맞닥뜨리니 정신이 없다. 우선 사주경계부터. 캄보디아어 같은 꼬부랑

글씨들까지 곳곳에 적혀있는 이 게시판을 보니 조금 정신이 든다. 아. 해군기지 부지가 여기였구나. 강정포구.

MB와 같이 주민의 동의나 의견을 묻지 않고 대규모 국책사업을-더구나 군사시설 유치를-추진하는 제주도지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최근에 제주도지사에 대한 전례없는 주민소환 시도가 투표율 저조로 부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투표를 방해하려는 여러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다고 또다른 논란이 되었으며, 게다가 '주민소환'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제도가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MB의 언질 하에 제도 자체를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상황.

바다 위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그림. 그다지 이뿌진 않다. 주민 공청회나 의견수렴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나 노력도

없이 덜컥 위에서 결정된 일이라니까 더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해군기지가 여기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인 거 같다. 또다시 가시돋힌 철조망이 둘리고, 살인무기들이

집결한 채 살기등등한 이빨을 드러내겠지. 올레길의 여유로움이나 (잠시나마) 품게 되는 관대한 마음 같은 게 그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니, 해군기지가 생기고 나면 올레길 7코스가 지금과 같이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무료 엽서와 우체통이 있었다. '바닷가 우체국'에서 보았던 잘 꾸며진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함,

그리고 진실함이 있다 느껴진다. 이곳에까지 발톱 세운 철조망을 칭칭 옭죄어야 하는지, 자연 그대로 냅둘 수는 없는지

누군가에게든 다그쳐 묻고 싶었다.

나중에 만난 택시기사 한분에 슬쩍 물었더니, 이쪽 해안에 중국 어선들이 불법조업을 많이 하니 그걸 단속하려면

해군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발전하려면 뭐라도 들어와야 안되겠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해양경찰력을 강화하면

될 일을 해군기지까지 섭외할 일인지, 해군기지가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지, '세계평화의 섬'으로 비전을 정립하고

올레길 같은 자연자원, 관광자원으로 발전해야 할 제주도의 이미지만 해치지는 않을지 묻고 싶었지만...

아마 해군기지 부지로 선정되고 나서 인근 토지에 대한 보상절차가 진행중인가보다. 이미 황량해져 버린채 버려진

비닐하우스들. 이런 장소에 해양박물관이니 크루즈항 같은 걸 짓고 해군기지를 이용한 지역축제를 개발하여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아이디어, 아...겁없이 용감하고 답답한 사람들. 그래놓고 해군기지서 기름이라도 대규모 유출되면

국민들 동원해 기름닦으라 시킬 거고, 해군기지 갔으니 공군기지도 짓자고 나설 테고, 지역축제에 혈세 낭비하며

위엣것들 사진 몇 장 남기고 선거운동 팜플렛에 한 줄 넣었으니 되었다 할 거고. 너무 시니컬한 건가.

사실 이전까지 걷던 길과 비슷한 풍경인데, 마음상태가 투영되어 버렸다. 왠지 써늘한 불안감과 싱숭생숭함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대기. 노란 깃발을 희롱하는 거침없고 둔탁한 바닷바람.

파도에 떠밀린 방파제들이 뭍까지 올라와 하얗게 말라죽어있다. 불가사리들 같기도 하다.

벌써부터 황량하고 살벌한 느낌의 바닷가를 벗어났을 때 살짝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 다시 밝고 따뜻한 느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걷는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마치 보글보글 끓여대는 냄비 속에 들어가있는

개구리처럼 조금조금씩, 점진적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다. 드라마틱한 단절이나 충격 같은 거 없이,

사실 강정포구의 살풍경함이란 그렇게 야금야금 예견되어 있었던 거였다. 빠져나가는 길 역시 그렇게 야금야금.

그렇지만 빠져나가는 길은 더욱 독했다. 이미 강정포구까지 잇는 모종의 도로 확장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머

명목상으로는 이쪽의 도로 사정을 원활케 하고 관광자원 접근성을 높이니 어쩌니 등등의 건설현장 안내문을 보긴
 
했지만, 아까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던 그 택시기사 아저씨 역시 이게 해군기지 건설 정지작업이라 보고 있었다.


여론 수렴을 날림으로 하는 이유는, 어쩌면 니들끼리 내부적으로 싸워서 힘빼 버려라, 하는 고도의 수작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용에 대한 공지와 협의가 제대로 이루어진 후에야 공통 지반 위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공통 지반 없이 각자의 지반 위에서 떠드는 꼴이다.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올레길 7코스엔 이런 공사길도 포함되어 있다. 조만간 아스팔트가 부어지고 판판하게 다져질테지만, 당장은

벌건 흙먼지가 자욱하고 포클레인의 격한 호흡소리와 진동음이 땅을 울리며, 걷는 사람 따위 배려되지 않는.

뭐, 어차피 올레길도 여름 한철 장사라 이건가. 안전띠나 보행자 안전통로 같은 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공사판 가운데를 뚫으며 걷고 나니, 시멘트를 대충 발라놓은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하아...

이 녀석. 파워가 나가버린 트랜스포머가 칙- 소리를 내며 축 늘어져버리듯 생명이 나가버렸다. 얜 어떤 소리를

내며 죽어버렸을까. 깨져버린 등딱지와, 서로 딴 곳을 향해 고정되어 버린 툭눈. 그렇지만 여전히 생기어린 채

빳빳한 다리털이 안타깝다. 대충 발린 시멘트길 위로 올라와 죽어버려 더욱 비극적인 녀석의 최후.


아, 방금 알아낸 사실 하나, 강정마을 해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이라고 한다.




8월 19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 면입니다. 어제는 양용은 골퍼, 오늘은 나로호 발사...러시아를 위한 사전테스트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로호 기술진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나로호 중요하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차피 나이 든 분들은 가시기 마련 아닙니까. 어차피 기력 쇠한 좌파정부 수장 노인네, 만평거리조차

못된다는 걸까요.

오늘(8/19)자 조선일보. 음...잉크값 좀 들었겠군요. 어떻게 보면 참 단정하다 싶고, 또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기억도 되살리지 못하는 '쉬어가기용' 만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인을 '인동초'라

칭하는 건 (갠적으로는) 80년대까지의 민주화 투쟁에 한해 고인을 평하는 것 같아 좀 입맛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에 대한 언급과 평가를 피하려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좀 낯익습니다. 아마 5월에도 비슷한 만평을 봤던 기억이 있다는 거죠.
지난 5월 어느날 조선일보의 만평입니다. 좀더 선명해지죠. 자신들이 불과 하루 전에도 줄기차게 비난하고

여론몰이를 하던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접하고..."쩝..." 이정도 느낌이었을까요. 할 말은 한다는 신문,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서거 앞에 할 말이 이리도 없었나 봅니다.
 
오늘(8/19)자 중앙일보. 신기한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은...저만의 편견일지요. 뭐랄까, 좌파정권의 수장, 잃어버린

10년의 주동자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북괴의 수장' 김정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만평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조차 북한 비아냥거리기의 소재로 소비해 버리는 중앙일보의 '통큰 만평', 감탄할 수 밖에요.

어쩌면 북한 지도자가 방한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미리 '물타기' 좀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만평입니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최근 어록을 저 구름 위 하늘세상에 말풍선삼아 띄워놓았네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분의 가톨릭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만평 속 그분의 표정,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표정이 처연하네요. 눈밑에 온통

근심걱정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경향신문입니다. 고인을 기리는 만평의 정석 아닐까 싶네요. 성함과 이미지를 넣고, 생몰연대를 적고,

고인의 행적과 생각, 평생의 삶을 떠올릴 만한 한마디를 퍼올리는 거죠.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 '인동초'라는 잔뜩 바랜 이미지,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화투사로서의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한 고인의 업적이 그의 대통령 재임 중에 이뤄졌던 걸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프레시안 어제(8/18) 만평입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울컥한 만평이었는데,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이만한 만평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불과 몇개월 전에 돌아간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오버랩시키고, 그 두분의 죽음을 재촉한 공통의 무언가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게

상식적인 반응일 겁니다.


굳이 '인동초'라는 이미지로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을 가리거나 지워버리려 하고, 남북화해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고인의 죽음 앞에서 북한 지도자 비아냥거리기에 골몰하고 있고, 아니면 아예 대담한 '생략'기법을

구사하는 언론이라면...'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단어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p.s. 혹시나 하고 8월 20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23일날 천만관객을 맞게 된다는

영화 '해운대' 이야기를 20일날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참...그러네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