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스트리트가 위치한 부기스 지역에서 리틀 인디아역까지는 걸어서 대략 10분, 곳곳의 공사판 사이로 이런 원색의 아파트도 지나고.

 

 이렇게 깊숙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사람들이 삥 둘러선 공사판 가림막을 지나서 도착한 곳. 그야말로 진짜배기 인도의 축소판.

 

 북적거리는 거리와 시끄러운 인도 음악의 무규칙한 조합. 심지어 무질서하게 지나며 클랙션을 울려대는 차들까지 판박이다.

 

  

 싱가포르의 세련되고 고급진 이미지는 간데없고 끽끽 소리내는 양은냄비를 늘어놓고 온갖 꽃장식을 팔고 있는 가게들.

 

하다못해 건물들 뒷켠의 골목까지 인도스럽도록 신산하다. 이걸 집이라 부를 수 있을지 고심케 만드는 허술한 방벽들.

 

 그리고 조각보만한 공간에서 삐져나와 골목 귀퉁이를 차지한 채 야채를 다듬고 카레냄새를 풍기는 인도 출신의 사람들.

 

 더러는 삐쭉하니 늘어뜨린 나무막대를 따라 온통 뒤엉킨 빨래들을 그나마 단정하게 늘어뜨리느라 여념이 없기도 하고.

 

 

골목마다 숨어있는 힌두교 사원, 모스크, 그리고 불교 사원까지 잡신들이 총망라된 거리에 소만 풀어놓으면 딱 인도겠다.

 

 그리고 값싸보이는 배낭여행객 전용 숙소들과 이메일 체크를 위한 인터넷 까페들이 넘실넘실.

 

이제 싱가포르 시내 남쪽에 위치한 차이나 타운을 들러보러 택시를 잡아탄 찰나,

 

유리창에 붙은 one singapore이란 표어가 눈길을 끈다. 무슬림이건, 힌디건, 혹은 불교도거나 심지어 파룬궁신도건 간에.

 

 

 

 

촘롱, 해발 2,170미터까지 내려온 셈이지만 이제부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는 죽 올라가는 한 길이다.

 

제법 큰 이 마을에서 당분간은 누릴 수 없을 따뜻한 물 샤워를 즐기고 떠나기 전, 새벽 댓바람부터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훤히 보인다.

 

안나푸르나 1, 안나푸르나 사우스, 그리고 두 갈래로 갈라진 물고기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 마차푸챠레

 

(마차 : 물고기, 푸챠레 : 꼬리)의 봉우리가 아무런 장애물없이 훤하게 보이는 아침이다.

 

 

밤새 묵었던 촘롱의 롯지. 그래도 비에 쫄딱 젖은 옷들과 우비들은 모두 방앞의 빨랫줄에 걸어놨지만, 밤사이에 말랐을리 만무.

 

 

안나푸르나 1과 안나푸르나 사우스.

 

그리고 마차푸챠레. 슬쩍 빗겨올라치는 햇살이 뚜렷한 선을 긋는다.

 

4일차의 아침. 오늘은 촘롱에서 시누와를 거쳐 2,920미터에 있는 히말라야 캠프까지 올라가는 걸로 일정을 잡고.

 

그새 태양은 불쑥 떠올라 산봉우리들과 거의 눈높이를 맞췄다. 여전히 시꺼먼 어둠 속에 잠겨있는 산의 아랫도리.

 

창밖으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봉우리의 저 디테일한 근육들과 하얗게 반짝거리는 만년설이 빚어내는 몽환스러움.

 

 

숙소의 내 방 앞을 장식했던 티벳 불교식의 부적들.

 

 

역시나 2인룸이었지만, 이 롯지의 여남은 개 되는 방이 텅텅 빈 채였으니 혼자 넓찍하게 쓸 수 있었다.

 

 

  출발해서 몇 걸음 옮기기도 전. 아침밥 짓는 연기가 부엌의 문짝 위로 새어오르고 닭들과 염소들이 겁없이 길을 막고 서는.

 

 

온통 산악지대다 보니 바퀴 달린 도구를 쓰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 당나귀를 시키거나 아님 사람이 직접 나른다.

 

 

이렇게 자기 키를 훌쩍 넘는 짐꾸러미도 어떻게든 꾸메꾸메 엮어서 한발한발 조심스레 옮겨다니는.

 

 

커다란 협곡 위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 굉장히 길고 출렁거리는 게 장난이 아니어서 소름이 슬쩍.

 

그나마 다리 옆 얼마전까지 썼다는 허름하고 다 부서져내린 다리를 보니 이게 훨씬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잠시 쉬어가는 참, 촘롱 위에서부터는 미네랄 워터도 팔지 않고 그냥 히말라야 산에서 내려온 물들을 끓여서 정제해서 판다고 하더니.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물값과 음식값이 비싸진다. 그래봐야 물 1리터에 400원 어간에서 1000원 어간으로 오른 셈이지만.

 

 

제법 화사하게 꾸민 집 한 채 앞뒤로 층층이 다랭이논이 가꾸어져 있고, 알록달록한 색색의 빨래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여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저 산등성이들 사이로 요리조리 걸었던 것만 같고.

 

잠시 쉬어가는 참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니 새파란 게 옆엣 롯지의 새파란 굴뚝과 깔맞춤을 했나 싶다.

 

 

 

어느 집에서는 갓 태어난 듯한 새끼고양이가 베개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만, 이미 내 몸도 힘들어서 쓰다듬어줄 생각도 못하고.

 

 

아침에 출발하고 또 네다섯시간, 점심을 먹기로 한 마을, 시누와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니 걸음이 다시 빨라진다.

 

 

어제 촘롱까지 오는 길에 워낙 무리를 한 탓인지 오늘은 체코에서 왔다는 70대 노부부와 페이스를 맞춰 걷던 참이었다.

 

78살의 할아버지와 77살의 할머니. 오르막이건 내리막이건 평지건, 한결같은 페이스와 보폭으로 걸어가시는 게 뭔가

 

인생의 연륜이 묻어있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드는 두 분. 그래서 결국 무턱대고 달리는 젊은이들보다 빨리 도착하던.

 

할튼, 해발 2,360미터 시누와에 도착. 점심시간이다.

 

안나푸르나 푼힐 전망대 코스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를 합쳐서 대략 8일쯤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중 2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현재 해발 1,540미터 고지의 티케둥가의 롯지.

 

한국에선 밀크티, 인도에선 짜이, 그리고 네팔에선 찌야. 차 한잔과 Gurung Bread, 말그대로 구릉족의 전통빵 하나를 꿀과 함께

 

먹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조금 양이 모자랄까 싶어 꿀을 듬뿍듬뿍 발라 먹어주는 센스.

 

현재시간 6시, 창밖은 어느새 환하게 날이 밝았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쉼없이 쏟아져들어온다. 밤새 짖던 개는 뉘집 개일꼬.

 

엊저녁 가이드에게 배웠던 네팔의 독특한 숫자 체계, 그리고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 붉게 칠해진 달력.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티벳 불교도들,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문턱 양쪽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날밤 친해진 스페인에서 온 친구와 그의 가이드. 히말라야 트레킹은 대개 한두명의 소수로 와서 가이드나 포터가 한둘 붙는 형태다.

 

 

고뇌하는 당나귀. 다리를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지만 늘 그렇듯 그는 온순하고 순종적이다.

 

 

쉬지 않고 혀를 차고 기합소리를 넣으며 당나귀들을 몰아대는 꼬맹이, 카메라를 보더니 든든하게 포즈를 잡았다.

 

 

다리 저편에서는 어느 부부가 당나귀 등짐으로 닭장 가득 우겨넣어진 닭들을 동여매는 참.

 

 

이른 아침 제법 소슬한 바람에도 슬몃 땀이 배어들 만큼 걸었을 즈음, 어느 집에서는 뒤늦은 밥연기가 피어올랐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식을 갖게 해준다는 '영험'을 가졌다는 비석이 불쑥 눈앞으로.

 

 

꽤나 화려하게 치장을 하려다가 실패한 모양, 남아있는 잔해는 왠지 화투의 6, 매화그림 같기도 하고.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들른 롯지, 밀크티 찌야를 시키고 땀을 식히려는데 꼬맹이 동생을 얼르고 달래는 누나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미리 챙겨갔던 볼펜을 두어자루 꺼내들고 누나랑 동생한테 하나씩 쥐어주었더니 '나마스떼'도 두손모아 인사해주고

 

방긋방긋 경계심없이 활짝 웃어주는 거다. 심지어는 꼬맹이를 업었던 숄을 풀어서는 저렇게 해맑해맑한 표정으로 패션쇼까지.

 

그 와중에 깜놀, 이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이 앵그리버드가 뭔지는 알까. 근데 여하간 옷과 신발에는 저런 캐릭터들이.

 

마시고 난 찻잔, 먹고 난 식판들은 모두 마당 한쪽 구석의 세면대로. 히말라야가 쉼없이 흘려보내는 물이 호스를 타고 콸콸 흐른다.

 

이 집은 그래도 센스있게도, 호스로 물을 사용할 때는 뚜껑을 닫고, 아닐 때는 저렇게 다른 호스로 연결해서 다랭이논으로 직행.

 

 

주인댁이 사는 방문이 열려있길래 슬쩍. 어떤 분위기인지 기웃기웃.

 

 

허름한 삶의 터전, 철사와 전선으로 칭칭 동여맨 슬레이트 지붕엔 녹슬고 날카로운 못이 불쑥 튀어나와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온통 나무와 곡선,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다.

 

 

 

 

길 한 복판에 덜컥 서서는 지나는 이를 뒷발로 차겠다고 벼르는 듯한, 결기어린 눈빛의 염소 한 마리.

 

 

 

울레리Ulleri라는 마을에 접어들었지만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참, 점심은 2,210미터 고지에 위치한 반탄티Banthanti라는 곳에서 먹기로.

 

매콤해보이는 새빨간 고추가 야트막한 집 지붕 위에 얹혀 햇볕 아래 반짝반짝.

 

 

 

계속해서 오르막길, 가파른 계단길이 계속되다 보니 체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있는 참에 통닭들이 어른어른거린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차피 걷는 길은 뻔하다지만 각자의 페이스가 다르고 체력안배를 위해 쉼표를 찍는 지점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앞서거니 뒷서거니, 때로는 몇걸음 차로 붙어다니다가도 훌쩍 멀어져 안보이기도 하고. 만나면 더욱 반가울 수 밖에.

 

 

대나무로 바구니를 엮고 계신 할아버지와 마을 어르신들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서는 천하태평의 기세로 잠든 검둥이.

 

 

 

 

여기도 페인트칠, 다소곳한 손놀림으로 창틀을 갈색으로 칠하고 계신 아저씨. 근데 왜 다들 파란색과 갈색 일색일까.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평지. 세가지 모드로 천변만화하는 트랙의 변화 속에서도 일정한 자신만의 속도와

 

체력안배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정말 중요하다.

 

 

신기한 게 사방에서 봇물터지듯 흘러내리는 냇물, 개울들이 모두 약간씩 회색빛을 띄고 있다는 사실. 빙하가 녹아내려서 그럴까.

 

 

 

이제 점심을 먹기로 스케줄을 짜둔 반탄티Banthanti 어귀로 도착. 돌로 쌓아둔 휴식처에 삼각형 모양 제단이 설치되어선 향내음이 물씬.

 

그리고 그 위로는, 히말라야 지역에 여전히 존재하며 활동중이라는 마오이스트들의 표시. 낫과 망치의 그림이 선명하다.

 

최근에도 트레커나 등산가들을 향한 테러를 저질렀다고 했던가. 여전히 이 깊은 산에 의지해 게릴라 활동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은근히, 의외로 많이 보이는 한글들. 어느 롯지에서고 'Noodle' 메뉴에서는 '신라면'을 찾아볼 수가 있을 정도다.

 

드디어, 바탄티에서 점심을 먹을 롯지에 도착.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아 들어간 주방에 슬쩍 따라들어가 구경을 잠시.

 

 

 

경주 불국사에 이어 찾은 곳은 석굴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석굴암 가는 길은 그야말로 지그재그. 지리산 대청봉을 보고 달리는

 

와일드한 드라이브 코스에 비길만한 커브와 경사로가 연속된 구간이었다. 불국사에서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는데 왕복 2시간쯤.

 

전혀 기억에 없던-하긴 관광버스로는 이런 짧은 터널을 지나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겠지만-터널이랄까 문을 지나다 말고

 

잠시 차를 세웠다. 아마도 석굴암의 내부 한쪽 면에서 봤거나 혹은 국사책 어딘가에서 봤던 기억이 어렴풋한 나한이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달까.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 커브가 심한 이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산을 꽤나 올라왔다 싶더니 역시나 전망이 탁 트였다.

 

 

구름이 조금 끼어있는 날씨가 아니라 완전 청명하고 파란 하늘이 반짝거리는 날씨였다면 저 아래 경주 시내가 좀더 잘 보였을 듯.

 

석굴암이 주차장 바로 앞에 있을 거라고, 전혀 근거는 없지만 그냥 막연히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서부터 또 한참

 

산길을 걷고 오르고 해야 도착하는 게 바로 석굴암. 여기는 그저 주차를 하고 티켓을 구매하는 입구에 불과하더라는.

 

 

알록달록한 연등이 양쪽에서 길을 안내해 주고, 산등성이의 짙은 그늘을 따라 걷기엔 꽤나 추워서 쉽지 않다고 느낄만큼

 

깊은 산의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길을 따라 이십분여 걸었을까.

 

불쑥 나타난 건물 한 채. 이게 석굴암이었던가 살짝 당황하고 있는데.

 

불쑥 나타난 저 위의 자그마한 또다른 건물 한 채. 이게 바로 석굴암 되시겠다.

 

원래는 석굴암의 외벽이 저렇게 시멘트로 발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고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본존불의 이마에는

 

거대한 보석이 박혀서 때에 맞춰서 광선을 석굴암 내부로 찬연하게 반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하간, 내부는 촬영금지.

 

그런데 정말, 석굴암의 본존불상은 굉장했다. 비록 유리벽으로 막힌 채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했지만, 인상은 압도적이었다.

 

소소한 세상사, 갑남을녀의 개인적인 고민은 비집고 들어가기도 민망할 만큼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것을 마주하고 있는 표정이랄까.

 

최소한 일국의, 아니 인류의 차원에서 대두된 문제들, 나타날 문제들에 대한 깊고도 고귀한 명상과 성찰을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신적인 지혜와 깨달음이 가득한 자의 표정과 눈빛이었다. 굉장히 우아하고 존엄한 분위기, 이런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자를 뭐라고 부르던, 당신과 나는 절대 동등하지 않으며 그 지혜와 깊이에 있어 난 하잘것 없는 미물이노라고 고백하고야 말 듯한.

 

이런 분위기의 부처를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할 만큼, 마음을 뒤흔들어버렸다. 분명히 예전에도 이걸 봤었을 텐데. 비록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지만, 그 때 전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도, 그리고 지금 이런 분위기와 표정에 충격을 받은 것도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이건 전혀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자 극한에 달한 신성함..에 가깝지 않을까.

 

 

 

조금은 멍해진 채로, 저런 부처에게 세사 잡일을 고하고 일신의 복을 기원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달까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석굴암의 부처는 사람들이 복받고 행복하게 사는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인류 모두의 정신적 고양과 열반이랄까, 그런 것들에 주의를 온통 쏟고 있는 거다.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라

 

살짝 경직되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지만.

 

 

 

그리고 석굴암에서 내려와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담은 몇몇 풍경들. 비록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가깝진 않고, 또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길 역시 그리 쉽거나 가깝지 않지만, 석굴암의 부처님을 만나는 건

 

어쩌면 세속화된 부처들, 인간화된 신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굉장히 드물고 경이로운 순간으로 남을지 모른다. 내가 그랬듯.

 

 

 

 

 

 

천하제일 비색청자전(1-3부), 청자 변기의 호사로움.

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전시중인 청자들 중 특히 4부, 국보급 명품들을 하나하나 조곤조곤 살펴보면서

 

담아본 사진들을 중심으로 포스팅하기로 한다. 딱히 말을 더할 것도 표현할 것도 없는 듯.

 

 

 

 

 

 

 

 

 

 

 

 

 

 

 

 

 

 

 

 

 

 

 

 

 

 

 

부산에 갈 때마다 들르고 싶다가도,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도 하고 번번이 서면이니 부경대 주변에서 술만 빨다

오기 일쑤여서 매번 마음만 움키고 말았던 곳, 해동 용궁사. 인터넷 공간에서 스쳤던 이미지들은 전부 이런 식,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들 위에 버티고 서서 해안가에 넓게 자리한 그럴듯한 사찰이 해동 용궁사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던,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해동 용궁사'. 글씨가 빨강색으로 적혀 있는 거라거나 중국

느낌이 나는 불상들이 으레 봐왔던 한국의 절들과는 느낌이 다른 거 같다. 그런 느낌은 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올해 삼재라는, 원숭이띠의 지신상. 열두 지신상이 쭉 늘어서 있었고 올해 삼재에 해당한다는 띠 앞에는 저렇게

삼재, 라고 표찰이 붙어있었다. 내년이 나가는 해라나, 삼재란 게 뭔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거 피함 좋겠다.

귀여워서 눈길을 붙잡던 벤치들. 손오공이 날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었다던 고사를 떠올리게 만들던 손바닥 모양의

의자하며, 고양이인지 쥐인지 호돌이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털 복슬한 동물이 대리석 의자를 받치고 있는 벤치.


꼭대기에선 까치가 꼬리를 쫑긋거리며 균형을 잡고 있는 탑의 앞에는 자동차 타이어 모양을 본딴 이름표가 붙었다.

'교통안전 기원탑'. 잘됐다 싶어, 오토바이 타고 다닐 때 사고나거나 다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얼른 향에 불을 쟁이고

꼽고는 몇번 절을 했다. 딱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경계하는 효과는 있지 않을까.


해동 제일의 관음성지, 라는 간판이 걸린 화려한 정문을 지나야 비로소 해동 용궁사에 한발 들어선 셈이다. 아직까지는

절 경내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맛보기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황금빛 몸뚱이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용의 얼굴이 조금

못생겼다 싶기도 하고, 역시 많이 보던 형태는 아닌지라 시선이 갔다.

무려 득남불. 이 부처님의 배를 어루만지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건지, 다른 부분은 거칠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불룩 튀어나온 배만 유독 저렇게 반들반들 닳고 닳아버렸다. 효험은 있는 거려나. 조금 의심스럽지만.


바닷가로 나아가는 길, 석등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딱히 계단 난간이 없어도 빼곡하게 세워진 석등이 충분히 난간

역할을 해주고 있을 정도였달까. 어느 석등 위엔가 동그마니 솔방울이 놓여 있었다.

본전이 나타나기 전, 또 하나의 불상이 눈에 띄었다. 가슴팍에 백원짜리 오백원짜리를 붙여놓고 있는 이 부처의

이름은 '학업성취불', 이름처럼 책을 조신하게 펴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보고 있는 거다.

드디어 해안가로 나오니 석교가 하나, 그리고 그 석교 너머로 바다와 맞붙은 본전과 부처상들이 보였다.


돌계단을 지나면서도, 행운의 동전인지 뭔지 저 동자승이 들고 있는 바구니나 그 밑의 바구니에 동전을 던져넣으면

행운이 있을 거라는. 본전에 아직 도착하기도 전인데 조금 지쳐버렸다. 뭐 이리 빌고 돈넣고 하는데가 많은가 싶어서.

그치만 절의 위치는 참 상서롭달까, 이렇게 검푸른 바다가 코앞에서 하얗게 부서져내리는 곳,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가득한 해안가에 자리잡은 절이란 건 본 적이 없다.

본전 옆에 안치되어 있던 황금색의 토실토실한 미륵불상. 아무래도 여기는 중국의 영향을 좀 직접적으로

받았거나 그런 곳 아닐까 싶다. 부처상들도 약간씩 중국 냄새가 나는 거 같고, 뭔가 한국에서 흔히 봤던

얼굴이나 풍채, 분위기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본존불이 모셔진 본전, 바닷바람에 해어지고 아이들 손장난에 빵꾸난 문창호가 불규칙하게 또다른 문양을 만든다.


커다란 청동 조각의 용이 앞발을 허공에 움킨채 굳어있는 곳 아래에는 빼곡하게 동자승이니 부처상 같은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씩 사람들이 돌멩이 얹는 마음으로 올려둔 걸까.

그리고 해수관음상. 한손에 정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 수인을 맺고 있는 모습이 엄숙한 기운을 자아낸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에서 맞고 있는 해수관음 발치에서 촛물을 질질 흘리며 잘도 타들어가는 촛불들.

관음상 옆에 서서 내려다본 해동 용궁사의 전경, 기와지붕이 사방에서 모아쥔 듯한 분위기 속에 바다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탑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지하로 좀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신비한 약수터' 위에 버티고 선,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세의 아기부처.

사람들은 그 위에 머리부터 물을 부어 씻기기도 하고 발치에 있는 다른 동자승 인형들도 같이 씻기기도 하고.

천수관음 대불상에서 내려오는 길, 어짊을 닦는 문이라는 뜻의 수인문 앞으로 출입금지 글자가 요란하다.

아까 기와지붕들로 둘러쌓였던, 가운데 있던 탑 주변에 있었는데 가까이 가고서야 눈에 띄인 건 황금돼지 두마리.

얼마나 큰지 어른이 양팔 가득 안아도 반정도밖에 안 잡힐 듯한 돼지 콧구멍에 동전이 수북하다.

등용문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야트막한 아치문. 사람들이 고개를 조심하지 않으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만큼 낮다.

본전 아래에 있던 기념품점이랄까, 염주나 기와시주 같은 걸 담당하는 곳인데 재미있는 걸 두개 발견했다.

바람방지, 여자떼는부. 이런 게 과연 효과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고, 얼마나 절실하고도 보편적인 문제면 저런

부적이 레디메이드로 만들어져 팔리나 싶기도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이라거나 특별한 때 동물을 사서 풀어주는, 방생하는 곳. 쑤욱 들어온 바닷가 너머로 용궁사가 보인다.

방생하는 곳 옆에 있던 또다른 부처님. 이곳저곳에 모셔진 부처님들은 저마다 능력이 하나씩 출중하시어, 어느분은

병을 낫게 하고 어느 분은 재산운을 틔워주고 어느분은 공부를 잘하게 해주고 어느분은 만능이시고..좀 심하지 싶다.

물론 한국의 절들이 대개 삼신각이니 산신각이니 무속신앙의 신들이나 토속 종교의 신들까지 함께 모셔지는 그런

공간이었던 건 맞지만, 이곳처럼 이렇게 분업체계가 잘 갖춰져 복전을 요구하는 부처님들이 곳곳에 모셔진 절은

정말 처음 본 거 같다. 용궁사의 위치라거나 풍경 등은 정말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이쁘고 인상적이었는데, 다른 의미로

이곳저곳에 모셔진 부처님들 역시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다. 남자아이를 원해? 교통안전? 학업성취? 무병장수?

뭐든 돈넣고 빌기만 하면 이뤄진다는 '매매'가 이뤄지는 건 아니었음 좋겠다.

집착하지 말라는 법구경의 이런 구절을 바위에 파놓은 게, 당신이 지갑에 담아온 모든 지폐들을 이런저런 보시함에 전부

털어넣고 가라는 종용의 의미를 담은 건 아니길 바라며.





영광 법성포는 인도 간다라 출신의 고승 마라난타가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바닷길로

들어올 때 최초로 당도하여 불법을 전파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무포', 아미타불의 의미가

담겨있는 명칭으로, 이후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으로 법성포(法聖浦)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듯 백제 불교의 최초도래지인 이곳 법성포에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기념성역을 조성해두고 인도 간다라 특유의

불교조각과 건축양식을 따른 기념조형물들과 기념 공간을 마련했다고. 그런저런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사찰과 주변 조경이 산책삼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사진찍기에 제법 괜찮은 곳이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최초도래지 입구로 들어가는 길, 외길을 따라 드문드문 늘어서있는 가로등 너머로 시퍼런

하늘이 참 좋았다. 특히나 가로등 바로 밑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날아가는 비행기의 뒷꽁무니가 보이는 것 같기도.

청명한 가을하늘 저멀리로 마음도 같이 붕붕 날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온통 붉은 열매가 지천으로 매달려 있던 풍경. 어찌나 왕성하게도 다닥다닥 붙어있던지

살짝 무섭거나 징그럽다고까지 느껴졌지만, 그래도 저렇게 프레임을 조금 잘라 들여다보면 나름 가을스럽던.

바다쪽 말고 산을 끼고 있는 길쪽으로는 철조망이 조금 둘려있었고, 철조망에 기대어 장미꽃들이 피어있기도 했다.

나름 단단한 꽃망울을 터뜨리곤 뾰족뾰족 가시를 발톱처럼 드러낸 장미꽃이라지만 철조망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끄트머리 철사 앞에선 여려보이기만 할 뿐. 

함께 나섰던 사진작가분이 억새를 가리키며 한번 찍어보라 하여 찍어본 사진. 살짝 역광을 안고 찍는 게 더 이쁠 수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카메라를 쥐고 자리를 잡는 바람에 왠지 민망해져서 살짝 찍어보곤 빠졌다. 


드디어 정문 도착. 과하게 임팩트를 준 거 같긴 하지만, 정문의 자바라식 철문이 정말 햇빛을 받아서는 저런 느낌으로

반짝반짝하고 있었단 말이다.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쏘아 들어가는 대신 저 화분이 눈에 들어와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돼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화분은 무슨 돼지저금통처럼 금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고, 돼지의 모양 역시 돌돌 말린 돼지꼬리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표정도 참 탐스럽고, 두 볼에 찍힌 연지곤지같은 보조개도 귀엽다. 


기념공원에서 가장 바다쪽으로 몸을 내밀고 있던 정자, 그 안에 모셔져 있는 동종 하나. 몸통 안에서 울림을 더하는

소리가 종 위쪽의 저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면서 나름의 진동과 웅얼거리는 울림이 깊어진다고 들었는데.

저 너머로 불(佛)자가 새겨진 정원과 부처상이 보이고, 앞으로는 부처의 자비심처럼 온세상을 향해 뻗어나갈 듯한

기운을 풍기는 범상치 않은 나무가 서 있었다. 가지들의 뻗친 형세하며,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묻어있는 

나뭇잎들의 분위기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계속 눈에 밟히는 나무였다.

마라난타 존자의 상과 그가 전래했다는 불교유물, 불교 설법의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던 간다라유물관. 안에 사람이

한명도 앉아있지 않았지만, '사진촬영금지'라는 말을 고분고분 들었던 건 마라난타 존자가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나를 내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곳에도 가을은 여지없이 내려앉았다. 불그죽죽해진 나뭇잎들이 하나씩 둘씩 짝지어 내려앉았다.

간다라 불교에서 연원한 여러 인물들과 부처상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 모양의

조형물의 지붕 사방으로 매달려 있는 종에 제법 섬세한 문양이 보였다. 바람이 불때마다 날개옷을 너울거리는

청동종 안의 사람이 땡그랑땡그랑 울었다.

나무데크로 정비되어 뭔가 집회를 위한 장소로 마련해둔 듯한 공간에 놓였던 긴 화분 하나에서 꽃이 한뿌리채 통째로

떨어져선 한층 아래 바닥에 낙하해버렸다. 스스로의 의지로 떨어졌을 리야 없겠지만 자꾸 비장한 누군가의 자살,

누군가의 투신과도 같은 이미지가 중첩되어 보여서 굉장히 잔인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사바세계의 풍진만물을 세심하게 굽어살핀다는 부처님을 챙기는 건 정작 저렇게 두 눈알을 번쩍거리고 있는

CCTV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아직 공사가 채 마감되지 않아 밑의 기단이 헐벗은 콘크리트 더미로 남은

미완성의 부처라서 힘이 딸리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에서 얻어낸 오방색을 기반으로 꽃단장한 단청의 화려하고도 자연스런 색감, 갓 칠한 느낌 그대로 선명하고

또렷한 그 오방색 단청도 나무랄데 없다지만, 역시나 가을엔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의 오묘한 빛깔로 물든 단풍이 최고.


아직 공사가 미완이라지만 사람들의 소원은 완공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돌멩이들로 마감한 한쪽 축대의 돌들을

뽑아내서는 돌탑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들의 절절한 마음. 밑단의 돌을 하나 더 뽑아 위에 개어두면 언젠가는

모든 소원들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르지만, 다소 투기적인 마음으로 '나만 아니면 돼'라며 소원 하나의 무게를

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바심난 돌멩이들의 무게를 수천년간 견뎌내온 인류의 신이란 작자에게 조의를 표한다.


2층에 있던 법당, 생각보다 담백하고 부처상 역시 3D의 입체상이 아닌 2D의 그림으로 갈음되어 있었다. 법당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던 건 반질하지만 유난하지 않은 나무 책상, 목탁과 죽비의 담담한 광택.

그나저나 사람들은 왜 저렇게 젖꼭지에 집착하는 걸까. 아랫돌 빼서 윗돌 괴며 소원을 빌었던 그 손이 그 손 아닐까.

다른 분위는 텁텁한 대리석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유독 젖꼭지 두개만 반질반질, 좀만 더 있음 말갛게

광택이 생길 거 같다.

돌아나오는 길, 그러고 보니 밑에서부터 위에 모셔진 부처상까지 오르는 길은 108계단으로 맞춰졌었다. 인간세상을

살아내며 겪게 된다는 108개의 번뇌. 계단 한걸음한걸음 그 번뇌와 세사의 번다함을 되짚어보고 끊어내며 올라갔다

내려왔어야 했는데 뒤늦게 알아챈 탓에 그러지 못했다.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카오산로드에서 동쪽으로 걷기로 맘먹은 날이었다. 점점이 몰려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지나치며
 
무작정 걷다가, 문득 어디선가 징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개의

징을 산발적으로 두드려대는 댕댕대댕댕 소리. 저건 뭔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왠 자그만

동산이 있고 꽃과 나무가 우거졌으며 태국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점점 커지는 징소리는 이제

머리 위에서, 커다란 말풍선에 담긴 채 하늘에서 징징 진동하며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집 위의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듯 계단을 따라 사람들을 따라 조금 올랐다. 옆으로는 꽃과 나무,

반대편으로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건지 인공적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중턱쯤에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수많은 종들. 잡아당기는 손들.

길 양쪽으로 온통 종들이었다. 울림통 안에서 웅얼웅얼대며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징 치듯

댕, 하고 짧게 끊기는 쇳소리였지만, 사람들이 순례하듯 지나며 일일이 하나씩 울려주고 있던

덕분에 끊기지 않고 대앵대앵- 울려퍼지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징도 하나. 어찌나 많이 부딪혀댔는지 나무가 온통 뭉그러져버린 데다가

받아주는 징의 볼록한 부분도 한참을 움푹하게 꺼져들어갔다. 뭐, 그럴 만도 한 게 나 역시도

수십개의 종들을 울리며 올라왔지만 그 손맛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징의 웅웅거리는

울림과 찌릿찌릿한 손맛이라니.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않음 좀더 두들겨보고 싶어지는.

그 이후로도 길은 계속 가늘게 이어지며 동산 위로 이끌었다. 종 역시도 계속 이어졌고, 가만 보니

종들의 듬직한 등짝에는 이 곳의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있었다. 푸 카오 텅, Golden Mountain.

높이 80미터로 정상에 황금색 탑이 세워져 있어 수많은 태국 불자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나. 계단수는

무려 320개를 헤아리는데, 사원은 전체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메루산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런 건조한 사실들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쓰레기통. 쓰레기를 버리란 건 알겠는데

저 해골바가지 그림은 뭔가 싶었다. 태국어를 알았다면 해골바가지 밑의 간단해보이는 몇글자쯤

해독해 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드디어 도착한 산..이라기보단 야트막한 언덕의 정상. 사원이 하나 세워져있고 깃발이

나부꼈다. 황금빛 칠이 번쩍거리는 건물벽은 방콕 시내가 반사될 듯 반짝거렸다. 원래

여기를 지을 당시에는 방콕 시내를 벗어나 평화로운 교외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여기까지 도시가 우물우물 삼켜버려 예전의 정취와는 판이해졌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들 중 일부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나름 1960년대까지 방콕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사원인만치 그만큼 보물들이 많이 모셔진 걸까.


그런데 이건, 네모난 금박들이 펄럭펄럭 나부끼는 헐벗은 불상들. 선풍기가 돌고 건물 안 공기가

휘몰아 돌면서 불상에 붙어있던 금박들이 파닥파닥 날뛰고 있었다. 더러는 위태롭게 나부끼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또 더러는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위나 옷위로 내려앉기도 하고.

거의 다 벗겨진 채 누워있는 와불, 아마 저렇게 금박을 한겹한겹 입히는 것도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일일텐데 뭔가 입혀드리는 날짜가 정해져있나보다. 그리고 문득 돋는 세속적인 생각 하나,

저 금박들이 진짜 금일까. 24K는 아닐 테고 18K나 14K쯤? 꽃가루처럼 날아다니는 금박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건물 중앙에 모셔진 황금빛 번쩍거리는 불상 하나가 포인트였다. 동서남북 사면으로

뚫려있는 한 가운데에 모셔진 불상은, 황금 금박이 촘촘하게 붙어있어 바늘꽂을 곳 하나 찾기 힘든

그런 번쩍번쩍한 느낌이면서도 또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 앞에 털썩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분의 뒷모습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부에 워낙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밖을 향한 창문이 온통 활짝 열려 있어서 딱히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밖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들, 밖으로 고개를 빼문 아이들, 그리고 멀리까지 내려

보이는 방콕의 전경.

뒤에서 아이들의 눈을 따라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태국 국기와 황금산 깃발이 나부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낮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뒷켠으로 뾰족뾰족 서 있는 사원들. 그리고

멀찍이 이 언덕보다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의 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옥상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금탑이 있었다. 하늘로 향할수록 긴장감넘치게 뾰족해지는 저

삼엄한 탑의 모양은, 거꾸로 지상의 소원과 염원들을 모두 흡입하겠다는 듯 굉장히 크고

넓은 밑둥아리를 갖고 있었다. 그 앞에 가지런히 무르을 모아꿇고 손을 맞붙인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이나 조심스런 몸가짐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와중에도, 큰 금탑 주위의 사면에 하나씩 버티고 선 커다란 징은 계속 대앵, 대앵.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채를 잡길래 카메라를 들어 'May I'했더니 방긋 포즈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진중한 한 방, 사방으로 부들부들 퍼져나가는 울림이 언덕 아래로 낙하했다.

신 앞에 꽃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종을 바치고, 그리고 빨간 천에 소원을 적고. 탑을 감싼

천에 직접 만든 색색의 리본을 달아주기도 하고. 기도를 바치는 존재가 신이라면 굳이 저렇게

써놓거나 박아넣지 않아도 다 알지 않을까. 아닌가, 신은 눈이 하나라서, 그 시선이 내게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노력하는 게 더 빠를 거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좀더 큰 목소리로

좀더 튀고 마음에 들만한 걸로 신을 꼬드기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지도 모르겠다.

선박박물관에서 봤던 그 굉장한 용 머리가 여기에선 몸통까지 제대로 묘사된 채 종을 물고 있었다.

이거..용이 아니라 새였던가, 대체 뭐지 싶을 만큼 상상력이 발휘된 동물. 그 밑으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소원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용머리가 사람들의 소원들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금세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건가, 그런 분위기를 노린 건가 싶기도 하고.

이쁘게 만들어진 화환들이 탑 여기저기에 걸렸고, 하얀티에 청바지를 입은 긴머리 아가씨의

뒷모습이 참 이뻤다. 발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미동도 않고 곱게 두손 모은 채 뭘 그리도

기도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까지 절로 숙연해지고 뭔가 간절해지는 느낌.

다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은 마치 손잡이라도 되는 듯 종을 하나씩 잡고서 댕댕거리며 내려왔다.

뭔가 조금은 더 조신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내려오던 길에야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푸 카오 텅, 혹은

GOLDEN MOUNTAIN. 황금산. 저렇게 빙빙 도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렸고, 걸으면서 쉽없이

징이나 종을 울려댔던 거로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걸려있는 꽃 한다발까지.



황금산 정상에서 탑돌이를 하던 분들, 그 와중에 징을 울리며 풍경을 뒤흔들던 그 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 소리가 좀더 생생하게 잡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실제 음량에 많이 못 미쳐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주홍빛 옷을 둘둘 감고 머리를 박박 밀은 승려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과 신심은

정말 대단한 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희끗거리는 할아버지가 두 승려와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았고, 할아버지가 번쩍 치켜든 검정우산이 그 두 젊은 승려의 몸위로

온통 서늘한 그림자를 내리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터미널이나 공항에 있는 의자에도 마찬가지. 늙은 할아버지가 젊은 승려들에 깍듯하게 양산을

받쳐주는 그림에야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들의 '노약자석'에는 어김없이 승려가 들어가있다.

마치 미이라처럼 온몸에 둘둘 천을 감고 있는 듯한 형상이 바로 승려, 그러고 보면 '노약자석'이란

우리나라식의 이름이 적절하지만은 않은 듯. 장애인석, 노약자석의 개념에 담기지 못했던

임산부들을 위해 별도의 스티커를 붙이곤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배려석' 정도의 넓은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지.

어느 골목을 걷다가 문득 호기심이 동해 들어갔던 이름모를 조그만 사원의 뒷뜰. 그리고 빨랫줄에

내걸린 채 산뜻하게 색깔을 내고 있는 승려들의 주홍색 천들. 정말 저 옷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저 적당한 모서리를 잡고 적당하게 몸에 감으면 되는 걸까 싶어졌다.

그리고, 스님들의 거쳐 주변에서 떠들지 말아달라는 저 절박하고 단호한 손바닥 그림. 실은

저 그림이 떠들지 말라는 건지 들어오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스님들이 근처에

계시니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라는 의미란 건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1. 아놔, 카메라가 갑자기 두동강 나서 바닥에 철푸덕. 이제 막 길을 나서서 해장국골목서

한그릇먹고 일어나려다가, 엉덩이가 그대로 붙어버렸다.


#2. 황남빵 한박스 사들고 가끔 꺼내먹으며, 비닐봉다리에 담긴 카메라 두조각 달랑거리며

걷고 있다. 대릉원, 첨성대, 계림, 월성과 안압지를 지나 황룡사지에서 잠시 휴식중.

#3. 걷는 것만큼 확실하고 단단하게 이동하는 방법은 없지 싶다. 내가 감내할 만한 속도로

주위사물들을 하나씩 만지듯 분별하며 뒤로 흘려보내고, 주위 분위기에 흠뻑 젖을만큼

스스로와 풍경을 동화시켜준달까.

#4. 경주 시내를 빠져나와 오릉, 박혁거세니 유리왕이니 소설속 인물같은 이들의 소설같은

무덤을 둘러봤다. 저 언덕들은 참 곱게도 잔디를 입혀놨단 생각만 들 뿐, 죽은 이들이 쉬는

공간에서 느껴져야 할 답답함이나 무거운 공기가 없다. 이천년 가까운 시간이 죽음의

무겁고 퀘퀘한 냄새조차 날려버렸다. (그나저나 안내판엔 온통 한자뿐. 그것도 손글씨.)


#5.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린 우물이라 신라의 우물, 나정인가. 예수보다 육십년쯤 먼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발견된 우물이 아직 남아있단 게 더 신기. 우물이니 알이니

동정녀니, 섹스(혹은 불륜)를 숨기거나 신성화하려는 전략이란 점에서 예수나 혁거세나

베들레헴이나 경주 나정이나 오십보 백보.


#5. 나정에서 포석정을 지나 삼릉골로 가는 길이다. 포석정 뒷길로 남산을 오를까 하다가

매표소 아줌마에게 추천을 청했더니 역시 삼릉골로 오르는 게 볼 것도 많고 길도 재밌다고.

남산은 당시 신라인들이 부처가 머물고 있다 생각했던 곳이라 했던가. 골짜기마다 잔뜩

조성된 석탑과 석불 따위 불교 유적들이 대단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산에 기대듯 부처에

기댔던 거다. 아니면 부처에 기대듯 산에 기댔는지도.

#6. 삼릉골이란 이름은 골짜기 입구에 세 개의 커다란 릉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막상

언덕만한 왕들의 무덤이래봐야 남산에 의탁하고 나니 그다지 위신이 안 선다. 왕이

자연에 귀의한 느낌이랄까, 산자락에 오체투지의 자세로 늘어붙은 것 같은 젖꼭지 세개.

#7. 워낙 삼릉골을 따라 조성된 탑이니 부처가 많은지라 이름모를 조각들도 뒹굴고 있었다.

그 중 문득 시선을 사로잡던 저 미묘하게 불룩한 위치와 모호한 손놀림.

#8. 선각육존불,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여섯 부처를 그려놓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바위

자체의 무늬와 오랜세월 깍이고 다듬어진 자취 때문에 선을 하나하나 식별하기가 이젠

쉽지 않아진 그림판. 군데군데 청동처럼 녹도 슬었다.

#9. 저 바위의 효용은, 그보다는 저 위로 좀더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해바라기했을 때다.

왕릉같이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선을 그려내는 경주의 산들이 바라보였다.

#10. 돌아나오는 길에 어느 새로 짓는 듯한 전통음식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지붕위로

어벙벙하게 웃고 있는 저 표정, 조그만 눈과 헤벌쭉한 입이 그렇지만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2010년에 다시 그린 경주인, 신라인의 얼굴일지도.


* 경주남산 가이드맵.




타이페이 시내의 남서쪽, 화시제야시장이 바로 인접해 있는 시끄럽고 번잡한 거리에 범상찮은 누각을 과시하는

절이 하나 있다. 서울로 비기자면, 삼성동 봉은사..라기보다는 도심의 조계종이나 실상사쯤으로 비기는 게

맞을래나. 좀더 번잡하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콕 박혀 있는 그런 느낌.

타이페이 시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절, 룽산쓰(龍山寺), 용산사다. 근 삼백년 가까이 된 절인데 벌써 몇차례

천재지변이니 전란에 시달려 온 지라 지금의 건물은 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거라고 한다. 근데 이 때깔이나

분위기는 거의 이 도시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버티고 있었던 듯한 터줏대감의 포스.

밖에서는 좀 한적하고 외따로 툭 동떨어진 느낌의 사찰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이

바글바글, 단위면적당 인구밀도는 룽산쓰 주변에 비해 꽤나 높겠다.

밑에도 온통 공양물들로 가득하다. 큰 불이라도 난 양 사방에서 태우는 향에서 퍼진 연기는 가실 줄을 모르고,

사방에서 무규칙하게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 사이에서 순간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공양물을 바치고 향을 흔들며 손을 모았다. 조그마한 꼬맹이든, 머리하얀 할머니든, 자력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은 거다. 어떨 때는 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펄펄 피어오르는 향로 속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푹푹 찌는 지옥에 와 있는 느낌도 살풋.

본당에 안치된 영험하다는 관음보살 외에도 모시고 있는 신들이 많다. 가이드북에 따르자면, 보현보살, 마조,

관제, 삼신할머니 같은 신불들. 제각기의 목적에 맞는 신을 찾아 '성적 올려달라고', '사랑을 이뤄달라고', '돈벌게

해달라고', 그런 것 쯤일까. 문득 든 생각인데, 요새는 '오래 살게 해주세요'는 별로 신에게 빌 꺼리가 못 되는 거

같다. 보통 드라마보면 의사 소매춤 잡고 비는 거 같던데.

한 바퀴 사원을 돌아보니 온몸이 온통 땀투성이, 게다가 살짝 훈제된 햄처럼 향내랄까 탄내가 시즈닝되어버렸다.

아쉬웠던 점은, 뭐 워낙 도심 복판에 있는 절이라 그렇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쉴 만한 공간이 없다는 점. 사실

절이 쉬는 데야 아니라지만, 그래도 한국의 절들처럼 여유로운 부지를 가지고 숨통이 트이는 여지가 없어서.

절 자체의 생김도 그렇다. 단정한 빛깔의 기둥이 열짓고 있는 한국의 담백한 절들과는 영 딴판으로 기둥 하나씩

붙잡고 봉춤 중인 우리의 용님. 화려하고 이뿌지만 폭염 속에서 잠시 앉아 땀 식힐 곳이 넘 아쉬웠다는.

돌아나오는 길, 계속 뒤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게 되는 건 뭔가 계속 아쉬움이 남고 좀더 돌아보고 싶은

마음때문인 거다. 좀만 더 햇살이 직사하지 않는 시간대에만 왔어도 좀더 멋지게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좀만 더 기다려 해가 기울면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쩌면 정말 어딘가의 모습을

온전히 발견하고 캐내려면, 매 계절, 그리고 하루의 아침점심저녁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봐줄 여유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아마 확실할 거다.

뭔가 복잡하고 정교해 보이는 저 처마의 생김생김은, 손을 뻗어 한번 살살 쓸어보고 싶게 만든다. 나무를 깍아

만들 걸까 아니면 뭔가 틀에 찍어낸 걸까.

룽산쓰에서 벗어나 조금 걷다가 길 건너편에서 마주친 스쿠터 한 대, 갈빛 옷을 저며입고 계신 스님 한분이

운전 중이셨다. 저 분은 룽산쓰의 봄여름가을겨울, 아침점심저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다 알고 있겠지.

살짝 부러워졌다. 사람들이 이토록 꽉꽉 미어지는 곳이 정작 숨기고 있는 표정을 알고 있을 스쿠터 스님.




노틀담 성당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구경하게 된 미사 집전 장면, 아마 파리 추기경이 직접 와서 집전하는 것

같던데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아름다운 성당과 더불어 멀리부터 순례해 오는 듯한 사제들과 수사들이 

파리 시내 가운데서 압도적인 경건함을 피워올린다.
 
양쪽으로 쭉 늘어선 관광객들과 구경꾼들을 헤치고 노틀담 성당으로 스며들듯 빨려드는 하얀 옷입은 신의

대리인들. 이미 미사를 보려는 교인들은 성당 안에 만석이었다.

왠지 가톨릭교와 관련된 오리지널 버전의 이미지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벽안의 백인 (남성)신부다.

최근까지만 해도 하느님-혹은 신-의 이미지 역시 서양 백인남성의 그런 이미지 일색이었다가, 얼마전부터

그런 성상이나 성가에 대해 '한국적' 시즈닝이 가해졌다고 알고 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예수님, 국악풍의

성가라는 건 바람직한 변화인 거 같긴 하다.

사실 '신성함'의 외피를 두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지도 모른다. 정숙하고 느릿한 발걸음, 신과 그 위엄을

상징하는 온갖 악세사리와 기호들, 그와 나의 공통 인식기반이 되는 문화적 컨텐츠들. 예컨대 천지창조니

부활이니 하는 신이 역사한 사건들에 대한 경외감.


그런 건 모두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의 외피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법정스님 선종 후 터져나온

봉은사 명진스님에 대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외압설에 대해 '종교인이 정치색이 심하다'느니, '모든 걸 버리고

조용히 하라'느니, 따위의 조언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성함과 종교적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법정스님이 4대강 사업에 강한 반대 입장을 밝혔던 건 어떨까. 세상에 뒹굴며 세속에서 힘쓰는 게 곧

'더러워지고' '신성함을 해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워낙 관광객이 많은지라, 앞에는 미사를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성당 가운데쯤 바를 쳐 두었다.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정숙하게 걸러진 햇살, 십자가에 집중된 조명,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선율과 울림까지

미사 참여의 목적이 아닌 '구경'의 목적으로 들른 사람들조차 위압한다.


미사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뭔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글로리아, 아멘, 이정도? 근데

말을 못 알아들어도 하울링 심한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신부님의 낮고 단정한 음색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혹은 신성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에 비하면 요새 나오는 더미 파이프오르간은 상당히 간소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다. 애초 천장이 저리도

높고 공간이 넓은 성소를 짓기란 요새 세상에 불가능하니, 파이프 오르간의 성스러운 효과음 역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 연출되어야 하는 거다.




열반을 뜻하는 와불이 있어 열반 사원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는 왓 포. 46미터나 되는 거대한 와불상이 눈을 홉뜨고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는 곳이다. 왓 포는 또한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자 가장 커다란 사원이랜다.

오돌토돌한 머리가 무슨..손에서 갖고 놀며 혈액순환을 돕는다는 그런 건강보조기구 닮았다. 온통 금빛으로 찬란한

불상인데, 왜 난 저게 정말 금일까 두께는 얼마나 될까 18K정도는 될까 요런 생각만 나던 걸까. 부처님 죄송염~*

미끈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부처님. 크기는 크지만 사실 디테일은 그닥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다리라고 쭉 뻗은

원통 두개를 붙여놓곤 끝이다. 어찌 보면 하반신 마비인 거 같기도 하고. 부처님 다시 죄송염~*

자개로 삼라만상을 표현했다는 부처님의 발바닥. 무슨 도장같이 파여져 있다. 이렇게 거대한 발바닥, 그리고 이런

그림으로 가득한 발바닥은 아마 이게 세계최고지 싶다. 그림은 하나하나 세밀하게 자개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나씩 뜯어보아도 참 이뻤다.

거대한 부처님이 누워계신 방안에는 벽을 따라 쭈욱 헌금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왠지 저 항아리마다 동전 하나씩

빠짐없이 전부 봉헌하면 뭔가 소원성취 인생역전될 거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방을 둘러메었던 어깨에는

땀이 흠뻑 젖었던 이 때는 8월..쯤이었던가.

왓 포의 바깥에는 이런 뾰족한 탑들을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딱히 열을 지어 서있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아무

곳에나 자유롭게 산개해 있다는 느낌. 저 기묘하고 이국적으로 생긴 탑이 하나만 덜렁 떨어져 있었음 얼마나

뻘쭘했을까. 배경처럼 층층이 세워진 왕궁의 지붕과 다른 것들과 맞물려 딱 어울린다.

이런 탑, 그리고 저런 문, 그 앞에서 지키고 선 거대한 석상까지..조영남 식으로 말하자면, 여기는 태국의 방콕,

왓포사원 앞마당입니다~* 타일을 하나하나 붙여서 저런 무늬를 만들고, 규칙과 배열을 만들어낸 것이 신기하다.

품도 엄청 많이 들었을 테고 시간도 그만큼 많이 들었을 거다. 하기야 과거의 사람들에겐 무던하고 참을성있게

몇십년, 한평생, 혹은 몇 세대에 걸쳐 일을 해낸다는 게 그다지 두렵거나 망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

요 쬐꼬맣고 귀여운 코끼리 모양의 수호상은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되었달까, 그 코끼리 코로 열린 문짝을 고정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근데 저렇게 바싹 말아올려진 코 모양이 영락없이 뭔가 힘껏 끌어당기는 모양새지 싶어

가만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났다.

다른 퉁퉁하고 묵직한 느낌의 수호상과는 달리, 상당히 얍씰하게 빠진 보디라인을 가진 이런 청동 수호상도 있다.

여긴 왓 포 사원과 인접한 다른 불당이었는데, 스님이 앉아 있는 자세가 워낙 다소곳하니 이뻤다. 무슨 일을 하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의 몸짓, 태, 이런 것들은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오랜 기간 연마한

발레리나의 손짓, 몸짓처럼 더없이 매끄럽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그 흐름과 분위기랄까. 스님은 부처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당신의 뒷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 같았다.

금빛찬란한 좌대 위에 올라앉은 부처님 위에는 작은 양산도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 꽃으로 온통 장식된

좌대 아래에는 국왕의 사진도 보였고 다른 스님들인 듯한 분들의 사진도 많이 놓여있었다. 조명의 효과랄까,

부처님은 그 모든 걸 지긋이 내려보고 있던 느낌.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청룡언월도를 꼬나쥐고 있는 걸 보니, 이 수호상들은 좀 최근에 만들어 세워진 것 같다.

저 수염은 왠지 '캐리비안의 해적2'에선가 나왔던 문어 수염 선장을 생각나게 한다.

저토록 정교하고 섬세한 문양들은 거리를 어느 정도 격하고 바라본다고 해서 디테일이 뭉개지지도 않을 뿐더러,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하나하나 박아넣었을지 절절이 느껴졌다. 돌출된 타일이래봐야 주변 것들에 비해 고작해야

몇 밀리미터 어간이겠지만, 그런 약간의 도드라짐으로 이런 입체감과 깊이를 느끼게 할 수 있다니 감탄했다.

우리 부모님. 뭔가 화보집 촬영이나, 적어도 2009 S/S 의류패션집처럼 나왔지 싶어서 살짝 자랑질.ㅡㅡ;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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