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 날개(1936)

시화호 갈대습지는 시화호의 수질개선을 위해 만든 국내 최초의 대규모 인공습지, 이제는 제법

수질이 많이 개선되었고 생태계가 다시 안정이 되어 새들도 많이 날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새들을 구경하는 걸 좀 있어보이는 단어로 '조류탐사', '탐조'라 하던가, 우리 나라에서 새를

구경하기 좋은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는 곳이라고 한다.

환경생태관은 갈대습지에 대한 자료들이 두개 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는 공간, 갈대습지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당장 2층 전망대부터 탐이 났다. 저길 올라가면 이 넓은 시화호 습지를 전부

바라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안개가 자욱하던 11월의 습지는 잔뜩 안개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막상 안개가 걷혔다 하더라도 고작 2층 정도의 높이로는 전부를 바라보기

힘들만큼 너른 습지였다. 가운데 잘 포장된 길을 두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습지, 그리고 그 습지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가는 갈래길들이 얼핏 보였다.

다시 생태관 1층, 시화호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농경지와 공장부지를 마련하려

방조제를 쌓고 간척사업을 하는 모습들, 그리고 호수처럼 갇혀버린 바다, 시화호가 생겨나고 이내

급격히 오염되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아픔'을 딛고 이제 갈대습지를 인공으로 조성하여

수질을 개선하고 생태를 복원해냈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오기까지, 참 쉽지 않았다.
 
갈대습지가 어떻게 수질을 개선하는 걸까, 그저 막연하게 갈대가 오염물질을 해독하겠거니

했는데 그림으로 된 설명을 보고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갈대사이로 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물속의 찌꺼기들이 자연스레 가라앉게 되고, 갈대 줄기나 뿌리에 오염물질이

부착된 후에는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분해한다는 거다.

그러면 생태관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바로 시작되는 이 드넓은 갈대밭은 결국 오염물질을

양분으로 삼아 이만큼 무성하게 자라났다는 이야기도 되는 셈이다. 인간이 토해내는 온갖

부산물과 오염물질들을 처리하느라 고생이 참 많다. 어찌보면 굉장히 비옥하고 우호적인

환경이랄 수도 있겠지만, 갈대의 입장에선 쉼없이 흘러들어오는 영양분들이 미처 소화시키기

버겁지 싶지 않을까. 돼지처럼 살만 뒤룩뒤룩 찐 갈대들이 다이어트의 권리를 호소할지도.

제일 중요한 건 아마도 유속이 느려진 물이 최대한 넓은 범위에서 갈대와 접촉하는 거 아닐까.

그게 바로 이 시화호 갈대습지의 존재의 이유,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인 셈이다. 시화호의

영어명은 어떻게 되나 했더니 의미심장하다. 'Sihwa Constructed-Reed Wetland'. 한글명칭에

비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공'이란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게 흥미로웠다.

1층의 또다른 공간에서는 이곳 시화호 습지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라니, 너구리, 멧토끼, 족제비나 청설모 따위 동물들이 흔하게 발견된다니 아까 사진에서

봤던 불과 몇년전의 시뻘건 뻘흙이 드러난 황량한 곳이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게 자연의 복원력, 위대함 아닐까. 그밖에 쉽게 보기 힘든 여러 야생화나 곤충들도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문득 이 곳의 동물들은 소중히 보호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저 박제들이

눈에 못내 밟혔던 거다. 나 뿐만 아니라 이 곳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새삼 생명의

소중함, 자연의 소중함에 민감해지나보다. 한쪽에 있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이 박제는 시화호 주변에 서식하는 조수로 부상 입은 상태로 신고되어 안산시에서 치료중

죽은 것을 자연생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다행이다. 애초 밀렵꾼의 총알이나 무지한 자동차 바퀴 따위가 부상을 입힌 거라면 다행이라

말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박제를 만들어 전시하겠다고 작정하고 사냥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산다는 몇몇 이름도 재미있는 야생화들, 이름만 들었었는데 저렇게

생겼구나. 제대로 생태공부 하고 가는 기분이다. '며느리밑씻개'라니, 이 풀은 시어미가

며느리를 싫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웅변하는 중이다.

그리고 개불알풀, 큰개불알풀. 음...민망한 이름이지만, 정작 풀의 생김은 그 민망한 이름과는

달리 꽤나 청초하달까. 암술수술이 뻗어나온 게 독특하긴 하지만, 저기서 '그것'의 '그것들'을

연상해내다니 거참 조상님네들도.

물길이 이리저리 조심조심 흐르며 습지 전체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차분한 흐름이지만

그 흐름을 따르다 보면 어느새 생태연못에 모여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그 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에게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습지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서 관찰할 수 있는 관찰로 곳곳에는 갈대습지가 어떻게 수질을

정화시키는지, 이 곳에 어떤 동물과 식물이 살고 있는지 등등 습지를 걷다보면 자연스레

궁금해지기 쉬운 질문들에 대한 답안을 마련해 두었다. 아이들의 교육공간으로도 꽤나

괜찮을 거 같고, 호젓한 관찰로를 산책하며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을 거 같고.

다만 계절은 조금 살펴서 오는 게 좋을 거 같다. 겨울의 초입에는 이렇게 습지에 가득 피었을

연꽃들이 고개를 폭폭 수그린 채 자맥질을 하고 있고, 풀과 나무들도 조금은 황량한 느낌.

그렇다고 너무 여름에 가는 것도 습지의 특성상 모기나 하루살이떼들이 극성일 거 같아

조심스럽고. 이왕 가는 거 제대로 새를 보고 싶다면 12월에서 2월경이 절정이라고 하니

망원경 하나 챙겨서 가는 게 좋을 듯.

안산수돗물의 이름은 상록수. 이 물 역시 시화호 갈대습지를 거쳐 깨끗해진 물이 돌고돌아

다시 사람들의 음용수로 변신한 거 아닐까. 뭐 바로 갈대습지를 돌아나온 물을 퍼서 음용수로

쓰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음용수 기준에 따른 몇가지 절차를 거쳐 음용수로 변신하는

걸지도 모르고. 갈대습지를 보고 바로 이런 수돗물을 보니까 더욱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뗄레야 뗄 수 없이 느껴졌다.





부여 정림사지, 왠지 그렇게만 이름부르고 끝내면 어색해지고 만다. 뭔가 더 이어서 할 말이 있는데 중간에 덜컥

끊어버린 느낌이랄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이렇게 한단어로 덩어리지어 기억되던 그곳. 부여에 도읍을

정한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란 것이 머리에 꾹꾹 눌러박혀있는 거다.


그렇지만 몇 년전 대학 섭을 째고 무작정 버스터미널 가서 바로 출발하는 티켓을 사서 달렸던, 그 때의 부여,

그때의 정림사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들어서는 길에 만난 벤치, 봉황이 활개치며 금세라도 하늘로 뛰쳐오를 듯한 율동감이 충만해 있다. 반대편엔

다소곳이 깃을 가다듬고 서 있는 봉황.

정림사지 5층석탑의 위엄. 600년 경 만들어져 이렇게 단단히 섰다고 하니 대략 1400년쯤 되었겠다.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모습, 살짝살짝 들린 끄트머리가 은근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이 석탑에다가 명문을 조각해 남겼다고 했다.

1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렴풋하나마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탑신. 기록의 힘이다. 더불어 용케도 천여년을

무사히 살아남은 이 탑의 힘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도록 생경한 연못이 탑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었다. 어렸을 때 뭔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를 다룬 전래동화를 읽었었는데, 무영탑의 설화던가. 와이프가 탑의 완성을 기다리며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길 마냥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넘 거칠게 요약해 버린데다가 '와이프'란 표현이

전래동화의 격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조금 심심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복원중인 정림사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발굴된

소재가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이런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땠을지, 우뚝 선 완성태의 모습이 아니라 이게 어떤 식으로 하나씩 다져지며 올라갔을지를 상상케 해주는

몇 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해주는 전시들.

그 외에 부여 시대 백제의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를 지붕위에 얹는 장인들의 모습도, 첨에 아무생각없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시선에 저 사람들이 잡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그치만 정림사지에서 만났던 가장 깜놀했던 장면은 바로 화장실 표식. 눈알이 그려지지 않은 채 흰자가 있어야할

부분까지 온통 살색으로 메꿔지고 만 이 젊은 처자는, 왠지 복수심에 불타 입술을 앙다물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래서야 화장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원.

남자라고 별반 다를 거 없다. 뭐 나름 전통 의복을 입혀 놓은 건 좋은데, 역시 눈알이 안 찍힌데다가 흰자위까지

온통 살색이다. 표정 역시 완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 사실 따지려면 한량없다. 저 의관은 백제식으로 갖춰

입혀놓은 건지, 아님 그냥 조선식으로 입혀놓은 건지.

그리고 석불좌상. 5층석탑 너머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림사지는

엄밀하게는 고려의 문화유산, 그 원래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5층석탑만 백제의 것인 셈. 미처 몰랐다. 어쨌든,

번쩍이는 안광에 힘이 빡 들어간 도깨비의 억센 이빨이 손잡이를 물고 있고 연꽃무늬가 장식된 문을 지났다.

뭐랄까, 온몸이 완전히 닳고 닳아버렸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니 아무리 멀리 잡아도 천년인데, 5층석탑이

저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고대로 남아있는데 반해 이 부처님 좌상은 무슨 바위덩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두 돌덩어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른 걸까. 그렇다고 이 석불좌상의 느낌이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다소 죄송스런 맘을 담아 표현하자면, 지하철이나 터미널같은 데서 많이 뵐 수 있는, 몸이 불편하여 땅에 일부를

끌고 다니시는 그런 분들을 닮은 부처다. 팔도 다리도, 온몸이 둥글둥글 지워져 버렸지만 왠지 모를 위엄과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일견 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슬몃 웃음이 물려있는 듯 하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석탑 대신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그려졌다.

정림사지는 여전히 발굴 중, 잔디만 무성한 한쪽 벌판 끄트머리에 뜬금없이 자리잡은 돌계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들이 어깨맞댄 틈바구니에서 풀들만 무성하다.

이런 거 좋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이렇게 적극 활용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박물관에서 뽀얀 뽀샵 조명받고 손도 못대게 박제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에서 1400년전 사람들이

창조해내고 즐기던 미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때로 어떤 사원들은 다른 사원을 짓기 전 공법을 시험하고 디자인을 구현해 보기 위한 '시험판'의 역할을 맡게

되기도 하고, 임시로 다른 사원의 역할을 대행하기 위한 '가건물'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한 큰 규모의 사원인 쁘리아 칸(캄보디아#13. 파괴된 듯 이어지는 사원의 명맥, 쁘리아 칸(Preah

Khan)
)을 세우기 전 그보다 작은 사이즈로 지었던 사원이 바로 따쏨이다.


아마도 그래서 중요성에서 많이 밀리기 때문일까, 사원 내부는 어찌 할 수 없이 드러나는 퇴락과 붕괴의 조짐을

억지로 막아놓는 안간힘의 뚜렷한 흔적들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세라도 비바람 한차례면 무너져 내릴 듯 기우뚱한 입구. 이미 돌덩이가 몇개씩 빠진 이빨처럼 듬성거린다.

입구 하나를 집어삼켜 버린 나무, 처음에 과연 어디에서부터 씨가 싹을 틔우고 가냘픈 연두빛 잎을 내밀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나무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 입구를 움켜쥔 채 땅 위로 끌어올린 느낌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균열과 붕괴의 조짐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왜, 저렇게 지키고자 하는 걸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 혹은 '현대'라고 규정짓고 시대구분을 하면서부터 본격화된 박물, 역사 박제화의 시도들.

그 이전까지는 무너지고 부서지면 그 뿐, 이렇게 처절하게 시간을 거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지금이

'현대'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나면, 백년이백년 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시대를 어떻게 규정지을까. 현대를

넘어서도 몇번은 넘어섰을 테니, 탈탈탈현대쯤? post-post-post-modernism? 늘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차라리 무너지고 사그라들도록 냅두는 것은 안 될까. 어쩌면 '인간이 왜 죽도록 냅둬서는 안 되는지'와 같은

도덕률과 당위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잔뜩 얽히고 섥힌 나무뿌리, 혹은 줄기. 어디서부터 줄기고 어디서부터 뿌리라 해야 할지. 차분하게 가부좌

틀고 앉아 수인을 맺고 있는 부처들의 자태가 고고하다.


 

#1.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베네수엘라, 쿠바..

프레시안에서 체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여정을 좇은 여행 사진전을 열었다. "시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 답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지 시에게 묻는다면 시는 그 답을 해줄 것이다." "여행이

무엇인지.." "사진이 무엇인지.." 그런 식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맥락과 관심사를 통해 외부

사물들을 이해한다. 240여장의 사진을 넘기며 그 때 가졌던 감정과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를 두시간여 조곤거리던

다소 지루했던 사진전에서, 나는 그 여정에 거쳐간 국가 이름들이 갖는 이국적인 느낌에 취해버렸다.

아-르-헨-티-나. 베-네-쥬-엘-라. 페-------루. 큐-바.



#2. 외교부의 미운 털.

이번주 월욜에 있었던 한-아랍 소사이어티 창립총회 때 일이다. 외교부 참사관 하나가, 문득 우리 진영 쪽으로

와서 그런다. 당신이 XXX대리에요? 언제 입사했어요? 여자친구는 있어요? 네, 얼마 안됐습니다. 있습니다.

여기서 내 멘토선배가 한 마디, 여자친구가 얼마나 이뿐데요~* 그 참사관 말이 외교부의 직원들 사이에 나에 대한

성토대회가 한시간이나 열렸댄다. 회장의 일정과 필요를 빙자해 끊임없이 귀찮게 한다나. 신입직원답잖게.

같이 하는 행사니만치 그쪽과 우리쪽의 정보가 공유되야 했고, 나 역시 주겠다는 빈말만 계속하며 짜증내는..

무례하고 건방진 외교부 직원들과 계속 독촉하라는 팀장님 사이에서 얼마나 열받아 있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십장생들. 어쨌든 행사는 무사히 마쳤고 다음날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 모두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선에서

마무리. "행여 제가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 운운" 은근히 그런 거 잘한다, 맘만 잘 먹으면. 니들한텐 어디던

모두 을의 입장이어야 한다는 니넘들의 강변, 인정해줄 수도 있다.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까 그런

갑-을 장난질은.



#3. 박제가 된 천재..는 아니지만.

이상의 그 표현이 날 향했던 건 두번째다. 첫째는 내가 제대하고 고시공부를 할 때. 대체 내가 정부기관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며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날 안타까워하던 식이었달까. 두번째는 엊그제,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군시절 중대장님. 거기에서 뭘 할거냐며 5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박제가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 녀석'이, 서울대 외교학과란 딱지를 갖고서, 메인 스트림..유학도 다녀오고 뭔가

'그렇게' 비전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냐고 했다. (여전히 난 그 '그렇게'의 의미를 전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참 다른 두 개의 방향..이랄까. 체게바라는 죽고나서야 박제가 되어 맥주병 포장지, 티셔츠, 건물외벽을

장식한다지만..난 벌써 박제가 되어 이후의 쓰임과 이전 기억의 용도를 고민하는 것 같아 착잡하다. 아직

살아있는데. 두 지적 모두 내가 요새 답답해하는 이유를 어슷하게 관통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10년 후, 아니 5년 후, 하다못해 1년 후..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을까.



#4. 내 문제는..

직장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멀찌감치 밀어뒀던 가치들..그것들이 헐떡대며 내 등뒤를

잡아채고 내리찍는 사이에, 지금 이곳이 내게 허한 빈 공간들을 채울 의미있는 뭔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 애초엔
 
그게 그래도 꽤나 긴 토막의 텀일 거라 생각하고서는, 내가 안정성과 자기관리를 위한 시간 대신 '포기한' 혹은

포기했다고 믿고 싶은 고액 연봉, 커리어 관리, 다이내믹한 분위기을 대신할 뭔가를 찾는 건 마치 휴대폰 배터리

갈듯 금방 될 거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2월, 3월, 4월, 5월. 아무런 대안도, 새로운 공간도,

흥미도 관심사도 발굴하지 못한 채 지나고 있다. 이걸 희생한 대신 얻겠다던 저것..이 아직 손에 잡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게 뭐여야 할지도 전혀. 감이 없는 상태란 게..날 바싹 말려 박제로 만들고 있다.

'신입직원'으로서의 허니문은 이제 끝났고, 누추하고 더러운 현실이 보이면서 대체 내 '위생관념'과 '긍정적인

사고'란 게 얼마나 갖춰져 있을지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다.



#5. 오늘은.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선배와 술한잔 했다. 안티로 가득한 거리의 정치 그리고 단지 '이명박'과 '광우병'에 초점이
 
맞춰진 지금의 패닉 상황이 기회일지, 위기일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난 위기가 맞다고, 아니려면 FTA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초점을 넓혀가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달에 채 백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몇 년째

일하는 사람들, 딱히 대단할 것도 없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은 마음에 찍히는 숫자가 불었을 테다.

문제는, 나처럼 그 어디에도 하루하루 숫자를 불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 사실 입사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걸로 암담해하는 건 건방진 걸지도 모른다. 6시 좀 지나 사무실을 막무가내로 나서서 경복궁 사진전으로 달렸던

건 그런 암담함을 지워내려는 육체적인 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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