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적으로 1학년 수업이지만 묘하게도 고학번들에 점령당한 대학국어 섭, 자그마치 외교과 97학번 선배까지
모시고 있으니. 자기소개 삼아 몇명 되지도 않는 새내기들한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얘길 해주라는 강사의 말에
저마다 인생 다 살아본 늙은이처럼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놀고 학점 신경써라, 전략적으로 사고해라,
술마셔봐야 남는거없다, 인턴 등 경험을 많이 쌓아라..무슨 얘길 하느냐보다 더 날 거슬리게 만들었던 건,
그 태도였다.
고작 대학이란 공간내에서 위와 아래에 놓였을 뿐인데, 마치 세상의 한끝과 다른 한 끝에 선 양, 어깨에 힘준
말투와 회상조의 어투. 마치, '내가 살아보니 이러니까 넌 저렇게 살아라'라는 어른들의 훈계와 같은. 늙기도 전에
늙어버린 척 하는 꼬라지하고는.
하긴, 나도 어느순간 더이상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감정에 먹힌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거부감이
생겨났었다. 말마따나 손톱만큼 펼쳐낸 감정을 두고 수박만하게 읽어내는 호들갑도 버거웠지만, 좀 중심을 잡고
누구든 와서 기댈만한 그런 씩씩한 모습을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지글지글 끓는 사막 한가운데서
휘영청 늘어진 그림자를 펼친 야자수같은, 그런 노회함과 여유로움을 [가질, 드러낼, 과시할]때가 되었다고.
그건 이미 일종의 자기검열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감정이 부글부글 끓는 순간이나 감정에 모가지째 먹히려는
위태로운 순간에도 꾹 눌러 참고서는..이제 그럴 때는 지났어, 라고.
사실은 여전히 나 자신에게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일 투성이. 역맛살이 있고 사람만나는 걸 좋아하는 내가
여행 가이드를 하면 안 될 이유. '방황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어?' "왜 피하는 거지? 대답은? 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 거지?" 당장이라도 짐싸매고 내키는대로 여행 좀 하고 싶은데 내 발목을 붙잡는 것들의 정체.
'3월엔 토익, 4월엔 한자, 5월엔 컴퓨터.' "별수없이 당신도 벌써 노쇠해버린 건가."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항상
새롭고 똑같이 낯선 이유.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약점을 상대에게 쥐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너지기 위해 존재할지 모르는 특별함의 아우라. "대체 당신이 스스로를 잘났다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자존심빼고 뭐가 있지?" 잠시 '노출증'을 고민했던 내게 7년쯤만에 반복해 들린 씁쓸한 질타, '당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그동안 조금은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도 뭘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건지 감을
못잡겠어." 그런가 하면 또다른 목소리, '혼자 사는 법을 좀 배워야 할 거 같아.'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다만
만의 하나를 찾고 싶을 뿐야." '웅얼웅얼웅얼.', "웅얼웅얼웅얼." '넌 누구냐', "그러는 넌 누구냐."
그러고 보면 내게 안정되고 성숙한 멘탈리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건 말도 안 된다고 믿고 있는걸. 어른스런 모습..이랄까. 그건 고인물 같은 거라, 썩어가길 기다리는
것뿐야..라는 강변. 난 그런거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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