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시내로 출근하는 아침, 개천을 따라 걷는 길이 어찌 이리도 고즈넉한지.


개를 끌고 산책하는 부부의 모습도,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나와 잠시 앉아 쉬는 모습도, 모두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렇게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기능을 다하는 이쁜 다리.


사람들은 차를 운전해서, 자전거를 타고서, 혹은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며 과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이어주었던 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건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덤.


그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건, 슈프레강변에서 이렇게 카누인지 카약인지를 띄우려 시도하시던 백발의 할아버지.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는 틈틈이 응원해주던 친구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능숙하게 카누에 탑승.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어느덧 저만치, 강 중심으로 나아가서는 멀찍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한강에서 저렇게 카약을 타며 노년을 즐길 수 있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노란색 유람선도 지나고 노란색 전철도 지나는 다리가 다시금 눈에 들어와 한 장.




 

강릉, 묵었던 호텔의 주인 아주머니에게 별 생각없이 "맛있는 칼국수 근처에 없나요", 라 물었더니 냉큼 알려주신 곳. '해궁'이란

 

곳의 푸짐한 해물칼국수. 아무래도 바닷가라 그런지 온갖 해산물이 그득그득.

 

아침을 든든히 먹은 후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포호 주변에서 드문드문 목격되는 네발 자전거를 따라 대여장소로 뙇.

 

핸들이 심플하고 단단하니 이쁘게 생겼다. 게다가 스티어링 휠이 작아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회전감.

 

경포호 옆의 공터에 여기저기서 자전거와 네발자전거..사륜마차를 주차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분들이 보인다. 추위를 막을

 

비닐 차양이 씌워진 것도 있고 그냥 날로 벗겨진 것도 있고.

 

달리기 시작, 운전하는 재미도 생각보다 쏠쏠하지만, 경포호가 생각보다 큰 호수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호수 옆에 살짝 주차해 놓고 사륜마차 전신샷. 앞에만 비닐차양을 위로 걷어올리고 삼면을 두꺼운 비닐로 막았더니 그럭저럭.

 

그러고 허난설헌의 생가로 빠지는 샛길을 달려 버렸다. 원래 호수 둘레길은 다소 안정적인 평지였는데, 다리 하나를 넘어

 

경포호에서 백미터 정도만 떨어지면 바로 나타나는 게 허난설헌의 생가. 오르막내리막이 제법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보통 사륜마차는 절대 도달하지 않는 곳에 와 버렸다는 뿌듯함.

 

 

사륜차를 한쪽에 슬쩍 세워두고 설렁설렁 돌아보고. 이미 바람이 차갑고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오는 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종아리는 살짝 기분좋을 만큼의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허난설헌 생가 뒷켠의 해송림 사이 오솔길을 내달리는 길. 아까 경포호에서 이쪽으로 올 때는 내리막이라서

 

엄청난 속도로 오솔길을 육박해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은 (당연하게도) 오르막. 꽤나 헥헥거리며 페달을 밟았다.

 

 

샛길에서 다시 호숫가 둘레길, 공식적인 사륜차의 코스로 복귀하기 직전.

 

찬 바람이 씽씽 불어도 굳이 이 사륜차를 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제 궤도에 올라 좀 편하게 달려볼까 하다가 문득 옆에서 눈에 띈 꼬불꼬불하고 좁다란, 한눈에 딱 보기에도 마구마구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흥미진진해보이는 길. 물 위에 다리처럼 놓였는데 이리저리 배배 꼬였는 것도 재밌어 보이고.

 

그래서 다짜고짜 진입. 그렇게 또다시 사륜차는 옆길로 새 버리고. 생각만큼 길은 좁아서 사륜차 한대가 꽉 끼는 듯 했다.

 

그 와중에 뭐 재미난 게 있나 싶어 뒤를 따라온 다른 사륜차 한 대. 더구나 저건 6인승이어서 휠베이스가 더 길었는데,

 

덕분에 일정 이상의 꼬불꼬불한 코너를 만나면 전부 내려서 자전차를 들어올려야 했다.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오신 중년부부셨는데 어쩌자고 따라오셔서는.

 

그래도 중간에 차를 돌리고 이리저리 움직일만한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와서, 슬쩍 주차해두고 요리조리 구경도 좀 하고.

 

호숫가 한 복판에 이런 나무데크의 다리가 고불고불 이어지는 데다가 그 길에 꽉 껴서 달리는 사륜차도 재미있었다.

 

다시 정상 경로로 복귀. 그러고 보니 길 중간중간에 조각상도 보이고, 허난설헌의 오라비인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장면들을 묘사한 조각들도 보인다.

 

목 좀 축이고 가라며 만들어둔 음수대의 모양이 재미있다. 입을 쩍 벌리고 선 개구리 두 마리.

 

한바퀴를 도는데 한시간이면 느긋하고 유유자적하게, 더러는 딴 길로 새가면서 달릴 수 있는 듯 하다.

 

타기 전에는 뭐 특별한 게 있겠어, 싶다가도 생각보다 경포호 주변으로 샐 만한 곳도 있는데다가 기본적으로

 

두 발로 페달을 저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주는 쾌감이 진하다.

 

 

 

 

 

손이 아프다며 뒤로 뺀 후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먹울먹하며 그 손을 찾아가려는 장년층..

 

그들이 아마도 38%의 강고한 박근혜 지지층 중 핵심을 이룰 텐데.

 

 

잡지 못하는 손을 향한 그들의 '손'바라기, 이제 잡을 수 있는 손을 찾을 때 아닐까.

 

 

 

 

맹신자들 - 4점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

(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햇볕은 참 좋았는데. 부드럽고 진득하게 내려붓는 햇볕을 날카롭고 까칠한 바람이 전부

흐트러뜨려놓던 주말의 석촌호수. 벚꽃이 아니라 복사꽃이던가, 좀더 진하게 핑크빛이

번져있는 꽃잎이 나뭇가지에 온통 포도송이처럼 피어났었다.

하얗고 투명한 햇살 아래서 형광빛처럼 빛을 발하는 꽃무더기들이 황홀했다. 옆엣나무는

이제 그래도 봄이라며 제법 싱그런 연두빛에 힘을 빡빡 주며 그을리고 있는데, 이녀석은

때도 모르고 온통 하얀 빛만 일렁일렁.

석촌호수에서 걷는 사람들을 보면 꼭 한쪽 방향으로만 돌고 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허리춤이

바싹 졸려서 8자모양처럼 생긴 석촌호수를 따라 도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거꾸로 걷다 보면

굉장히 불편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런 시선따위 신경안쓰고 그냥 거꾸로 걷게 된다. 아직은

앙상한 가지가 아스팔트 보도 위를 사방으로 내달리는 균열을 그려냈다.

날씨가 미쳐서 그런가, 단풍나무가 벌써부터 시뻘겋다. 그리고 나뭇가지들이 여전히 앙상한 걸

보고 있으면 대체 지금이 봄인지 가을인지. 햇살만 받고 있음 따끈하니 봄볕은 맞는데 여전히

칼날처럼 에이며 맹렬한 바람까지 얹어지면 헷갈리고 마는 거다.

추워서 들어온 까페에서 만난 커피설탕. 와, 진짜 오랜만이다 싶었다. 어렸을 때는 이거

맛있다며 한알씩 사탕처럼 먹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시럽으로 대체된지 오래라서

좀처럼 못 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김에 슬쩍 한 알. 오도독오도독.

주홍빛 결명자차가 꽉 채워져있던 커다란 유리병, 저런 식으로 만들어진 마개를 보면 몇번이고

딸깍거리며 열었다 닫았다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거다.


나 말고도 역주행을 하는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 마침 네발로 땅을 박차고 튀어오른 시점인듯

공중부양하듯 공중에 뜬 채 주인을 향해 되돌아 달려가는 에너지 넘치는 강아지 녀석.




어느날의 올림픽공원,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집 바로 옆에 있었어도 한번을 제발로 갔던 적이 없던 곳인데,

막상 멀어지고 나니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평화의 문...


사실 올림픽공원도 내가 변해온 만큼이나 계속 변해왔다. 몽촌토성의 자취를 따라 그럴듯한 산책로가 차례로

정비되었고,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찾기 쉽지 않던 곳에 디초콜렛이니 스타벅스니 많이 생겼다. 이런 곳 근처에

살고 있는 건 정말 꽤나 멋진 장점을 안고 있는 셈인데, 사실 지금도 선릉공원이 멀지 않은 곳이면서도 거의

본체만체 중이니 할 말이 없다. 

회사 동기들과 갔던 길이었다. 두툼한 것들이 시야를 가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무슨 그림자극같기도 하다.

우아하게 커피를 꼬나쥔 녀석, 그리고 다소 소심한 듯 조용한 몸짓으로 고요를 지키고 있는 녀석, 길이와 굵기로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녀석, 그리고 긴머리 여자사람 하나까지. 이제 뒷모습만 보아도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쌓이고 있다.

뭔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그럭저럭 뒷태가 괜찮은 건, 이들이 남자사람 둘과 여자사람 하나로 묶여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이어서다. 워낙 개(성)스럽고 확실한 성깔들을 가진 분들이라 쉽진 않지만, 그래도 뭐.






이번주 월요일 오후, 코엑스 3층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진격, 조그마한 초대장

하나를 들고 차려입은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 전우회 따위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들까지

숨넘어갈 만큼 잰 걸음으로 3층 행사장을 찾았다.

얼마나 바글댔냐 하면, 코엑스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에 그들의 숨가쁜 뜀박질 소리가 메아리쳤고, 그뒤를 따라

질서유지를 위해, 그리고 연사로 초청된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안전을 위해 의경들이 떼를 지어 몰려갔었다.

정신사나운 호루라기 소리와 구둣발 소리, 그리고 쉼없이 3층 행사장이 어디냐고, 어디에 가면 라면냄비를

받을 수 있냐고.


심지어 그들은 일층 행사장에서 커피브레이크를 가지며 마주보고 담소를 나누던 외빈들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며 "이건 뭐야~"할 정도로 용감무쌍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비문명적인 인간들이라니.

그나저나, 엥? 라면냄비?? 오후3시인가 시작된다던 행사에 수천명의 사람이 몰렸다더니. 무슨 행사인가 싶어서

시간날 때 올라가 봤댔다. 민주평화통일? 진보쪽 단체인 거 같으면서도 묘하게 보수색채가 진한 듯 보이는

이름이 슬쩍 호기심을 간질였다. 근데 평화통일 어쩌구 행사에 왠 라면냄비 Seeker들인가 말이다.

안내데스크 뒤쪽 가득히 쌓인 라면냄비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전쟁터 한가운데서

부상병이 물한모금을 청하는 심정으로 주위 '어르신'들께 물었다. 이건 대체 뭡니까. 라면냄비는 어떻게 하면

받는 겁니까. 사정인즉슨 이랬다. '북괴를 몰아내는 통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는 '통일무지개회원카드'를

작성해서 회원신청을 하고 나면 입장이 가능하고, 입장이 가능한 사람에게만 무려, '라면냄비'씩이나 제공이

된다는 거다. 다소 소략하게 말하자면, 회원가입신청과 라면냄비의 물물교환이다.

그래서 신청서를 내고 라면냄비를 받는 창구는 이토록 혼잡스러운 거다. 초대권을 흔들며 왜 더 안 주냐고

항의하는 어르신, 양손에 라면냄비가 담긴 종이백을 네다섯개씩 주렁주렁 꿰고 가는 어르신.

한쪽에는 알맹이가 쏙 빠진 채 껍데기만 남은 종이백이 수북하다. 파란색이다.

"핵무기 개발로 세계와 대결하면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2,400만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신음하는

참담한 현실", "초당적이고 범국민적인 국민통합을 이루어 정부의 대북정책에 호응하는 지지층을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관계 고위인사들 인사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 파란색이다.

이런 어이없는 대북관, 게다가 황장엽의 어이없는 통일관. 몇년전 황장엽이 주최하는 소규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때 주체철학의 창시자였던 그는, 그의 '인간중심철학'이 김일성에 의해 일인독재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땅에서의 지분을 받았지만 남겨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동정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북한에 대한 매파적이고

극렬한-결과적으로 한국 보수반동과 통하는-목소리를 더하는 것은 할 짓이 아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머리위에

있는 한국은 한국만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느니 어떻다느니, 정부의 동원능력을 확대하고 시민적

공간과 가치를 훼손하는, 그런 어이없는 민주주의론까지 운위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자리를 위해 화환을 보내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라면냄비' 몇천개를 사라고 돈을 내어주는

사람들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 회원이 되면 낭독하게 될 '선서문'에 보면 적나라한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정부의 대북정책 공감대 확산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솔직히 이런 양반도 마찬가지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김병찬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있다. 뭐,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가서 대통령 팬이니 어쩌니, 내복이 어쩌구 저쩌구 박자맞춰주는 탤런트니 아나운서들도 있으니

이런 조그마한 데서 마이크 잡는게 뭐가 어떠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사실 나는 애 많이 낳자거나 다시 한번

같이 뛰자거나 허리띠 졸라매자는 공익광고에 목소리 빌려주는 사람들도 일말의 가책은 있지않을까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런 관제 행사가 먹히는 상황이 많은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관에서 얼굴마담 내세워 사람들

동원하고 여론몰이하려 들고, 그래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게 별 거 아닌 쭉정이 단체에의

가입신청서를 써주는 조그마한 수고가 되었건, 별 거 아닌 '라면냄비' 따위 일용품이 되었건, 한 사람의 그런

호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 조그마한 호응이 모여 지금같이 괴물같은 시대를 만들어낸 거 아닌가. 그래놓고

뒤로 돌아 정부 욕하고, (돈/지식) 가진자 욕하고 그래봐야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하나더, 굳이 말하자면 '어르신' 문제다. 우리 사회에 대체 존경, 최소한 존중받을 만큼의 어르신이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식민시대라는 시대적 굴레에 대한 일정한 책임,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대한 일정한 책임, 이후

미쳐돌아가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발전이데올로기의 총화라고 해도 심한 건 아니지 싶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겸손한 '어르신'은 찾기가 힘들다. 생물학적으로 나이만 먹었을 뿐.

얼마전 '친일인명사전'에 맞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했다는 어떤 뉴라이트계열 단체의 기자회견장에서

"왜 김대중, 노무현이 포함되지 않냐"라면서 니놈들도 빨갱이다, 라고 하며 급기야 서로 빨갱이 삿대질을 하던

사람들, 오바마 방한때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 어르신들이다. 이미 사고방식이 굳을대로

굳어버려 더이상 개전의 여지조차 없는, 그래서 약간 관조적이랄까, 역사적이랄까 그런 먼 시각에서 보자면

사라지는 것 밖에 답이 없는 존재들 아닐까 싶다. 반면교사로서 훌륭한 귀감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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