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은 이유가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연기, 군더더기를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깔끔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잔혹한 시험대를 극복한 너른 공감대를 확보해 내는 이야기까지.

그런 세 가지만 확보가 된다면 그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시 다음 시대의 전범 혹은 클래식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영화는 어쩌면 굉장히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8년 신좌파의 혁명이 있었고, 베트남전에서 쓰인 네이팜탄을 개발했던

연구소에 테러를 가했던 젊은 남녀가 도망자 신세로 살아가는 시대, 더이상 히피들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68혁명의 잔당들은 젊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반동의 시대인 거다. 게다가, 쉼없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망다녀야 하는 그 젊었던 두 남녀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하는 나이대에 이른

두 아이의 부모. 이런 가족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88년은 그런 부모와 가족이 정말 있을 법한,

68혁명의 아이들이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키워냈을 맞춤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다. 영화는 68혁명의 잔향에 기대지 않는다. 어쩌면 88년쯤에는 그 향기가 너무도

강하게 남아있어서 다른 것들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또다시 20년쯤 흐르고 나니

조금은 숨겨져 있고 조심스럽던 다른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 같다. 영화가 가리키던 현실을

조금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계속 환기되는 것은 겉으로는 '68혁명의 정신'이지만, 지금에 와서 읽히는 것은 차라리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에 대한 은유거나 '때가 되어 헤어지는 것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히

섬세한 묘사인 것 같다. (간편하게 '성장영화'란 네글자로 뭉뚱그리기엔 뭔가 너무너무 억울하다.)


세상에 믿을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다는 단호하고도 절박한 믿음, 그걸 단순히 꽉 막히고 세상에 겁먹은

부모의 못난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눈감으면 코베어간다'는 세상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선연하다.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금권력을 넘기는 거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 모두 그런 단호한 믿음의 소산인 거다. 세상에 믿을 건 우리 가족, 내 피가

섞인 우리 핏줄이야말로 세상이 무너져도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라는 오래고 오랜 믿음. 당대의 독재자들이

그런 식인데 하물며 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이야 어떠랴 싶어서 부모의 못난 소리는 가슴이 아프다.


사실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수십년 세월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건 '핏줄이 당긴다'며 수십년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르지않는

눈물로 증명되는 거다. 자식 역시, 특히나 한국처럼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부모를 '그(He)'라거나 '그녀(She)'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멘탈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연고로 묶인 패거리문화와 시스템이 최후의 보루로

'가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신성화해 버린 점도 있을 테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가족'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일 테고.


그렇지만 가족은 또다른 가족을 낳으며 분열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필연이다. 플라나리아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면 각기 두 개의 새로운 플라나리아로 분열해 생존하듯, '가족'을 찢어내어 다시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아플 수 밖에 없다. 자식들은 크고 부모는 늙는다. 자식들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죽는다. 단순한 과정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저항과 혼란, 싸움의 징후들이 보이지 않는가.

'허공에의 질주'에서 나온 리버 피닉스처럼 피아노와 대학이 탐탁치 않은 아버지와 맞서기도 하고,

마샤 플림튼처럼 중산층 부모의 삶이 허위에 가득찬 채 인간적이지 않다며 부정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이 철이 없다거나 아직 부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며 갈등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짐은 이르건 늦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예비되어 있는 거다. 언제까지

품안의 자식이고, 언제까지 하늘같은 부모여야 할 건가 말이다. '토이스토리3'에 나왔듯, 살아있는

것은 모두 나이를 먹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칼을 꼽고 손톱을 박으며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잘못된 헤어짐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짐이 된 채

불구를 만들고 만다는 게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들의 오프닝이었으니 적지는 않을 거 같다. 아무리

성숙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좋게 헤어진다고 해도, 그 헤어짐은 마치 자궁을 빠져나오는 순간과

같아서 배꼽이란 상흔을 남긴 채 더이상 이전의 세계를 허용하지 않을 거고.


굳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한정할 것도 없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친구, 선생과 제자,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할 만한 그런 관계에는 어느 순간 헤어짐과 분열의 순간이 닥쳐오게 된다.

그게 우발적이던 필연적이던, 그런 식의 평가는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내릴 수 있을 뿐이지만 만약

언제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피할 수 없는 때라는 느낌이 왔다면 그런 헤어짐에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걸까. 쥬드 허쉬와 크리스틴 라티처럼, 리버 피닉스처럼 나 역시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때론 반발하다가, 결국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슬프고 아름다운 분열의 과정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까. 슬프고, 서럽고,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또 한켠, 뿌듯하고, 기쁘고, 대견하고, 설레는 느낌들이 마구 뒤섞이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바로 그랬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아름답지만 슬픈 헤어짐의 이야기.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헤어짐을 경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평생 기억할 만한 영화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겠다.



@ 서울가족영상축제, CGV송파.



그는 그녀를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게다.

무작정 통영에 내려와서는 다소간의 인연을 빌미로 무작정 불러낸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그녀는 차를 배웅하던 그 순간.

창밖에 선 그녀를 향한 그의 손이 갈고리가 되었다. 그의 손이 유리창을 긁어내렸다.



골목을 뱅글뱅글 돌았다.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씨씨티비를 피해 세워놨던 차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조바심치다 에라 모르겠다. 늘 길찾기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문득 떠오른 그녀의 타박 아닌 타박. 오빠는 어떻게 나보다도 길눈이 어두워.


어차피 집 밖에 나서면 전부 길이다. 낯선 길 위에서 늘 그녀의 말이 맴돈다면 큰일이다.

장소에 주석을 붙이고 기억을 첨부하는 건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세사리같은 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나는 길 위에서 추억한다.


그러다 번쩍, 계시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안농'손칼국수. 지난 3년동안 그녀의 인사는

대개 '안농' 아니면 '안뇽'이었다. 안농. 입술에 주름을 잔뜩 끌어모아 앞으로 바싹, 평온하던

날에 그 인사말은 장난스런 키스의 느낌을 떠올렸댔다. 안농, 그러면 나도 안농.


길 위에서 넘실대던 그녀의 기억이 인도 위까지 들이차기 시작한 걸까. 장마철 보도블록을

핥아대며 역류하는 빗물의 강처럼 뭔가 으슬으슬해졌다. 우리의 시간이 내게 주었던 교훈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 조금은, 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안농'이 내게 남았다. 그리고 다른 고민이 남는다. 그럼 대체 난 뭘 배운 걸까.

그 시간동안, 그 평온했던 날들과 쓰라렸던 날들을 거치면서 결국 뭔가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니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조금씩은 깨달음을 얻는 거 같다.

그때 그랬어, 사실은 그랬어야 했어, 내 문제였어, 둘다 어렸어 따위. 근데 정말, 그렇게

현실이 굴러간다면 지금쯤은 세상엔 사랑에 득도한 사람들만 가득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저 다들 늘어만가는 나이에 부끄러우니까, 깨진독처럼 좀처럼 숙성되지 않는 경험치가

부끄러우니까 있어보이는 척만 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도 그래보일 순 있는데. 허름하니

글자가 깨져나간 간판 하나에 '안농'이니 어쩌니 울렁대지만 않으면. 



[술잔#1] 조각만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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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보일만큼 자그마한 섬에 가보고 싶다.
내가 가보았던 섬들은 모두 너무도 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김한길이 이야기했던가, 북극곰은 다른 곰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고. 평생 한번 만날지조차 기약없는 만남이므로. 그렇게, 조각만한 땅뙈기에서, 술잔과 오른손의 인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술잔#2] 그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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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마주섬에서 시작된다. 설레이며 눈을 마주치고, 술잔과 오른손은 서로가 품고 있는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과 상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채 두손 떨구고 어설픈 사랑.



[술잔#3] 목소리 좀 들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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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동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간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사랑을 말하는 순간 손가락은 술잔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신도 날 보고 있었나요..우선, 술잔 당신의 매끄럽고 후끈한 목소리를 좀 들려줄래요. 우리 목소리부터 익혀나가는 건 어떨지. 손길이 닿으면 갸냘프지만 분명한 술잔의 응답. 말꼬리를 땋기 시작했다.



[술잔#4] 살짝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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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위험하지 않다고, 냄새와 향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꿈이었던양 떠나버릴 것 같아..오른손은 술잔의 부피와 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다. 이 세상에 있었구나, 조각만한 세상에서 병아리오줌만한 인연을 타고. 고마워서.



[술잔#5] 외전. 기어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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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유리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니미럴 절라 높네.



[술잔#6] 니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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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하루가 하루를 지랄같이 소모시켜도 기꺼이 온몸으로 귀가 되어주는 술잔이 있었기에. 서로의 사용설명서를 꼼꼼이 읽어내리며, 조금씩 마카로니 치즈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몇번씩의 구역질과 거부감을 인내한 후에야.



[술잔#7] 어깨 빌려 사람人의 뜻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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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으려면 댄스댄스댄스. 끊임없이 똑딱이며 빛바래가는 세상 속에서 오른손의 이정표는 술잔. 생기와 의욕을 말려버린채 기어코 삶의 뒷켠으로 내리눌러버리겠다는 시간을 비웃으며 어깨도 걸어보고. 가벼운 스텝으로 하루하루 생을 더해갈 수 있다면. 하루치 삶의 의미를 아침마다 떠올릴 수 있다면.



[술잔#8] 손잡고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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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힘들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손잡고 가기도 하고.
지겨워서, 힘들어서, 살다가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손내밀어 이끌어주기도 하는. 어차피 시작해 버린 인생, 최종 목표는 트루 러브라 외치는 술잔과 오른손. 그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한때..아름답다.



[술잔#9] 기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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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기. 허물어지듯 무너지더라도, 두팔가득 받아줄 술잔이 있다면 나중나중에 다시 일으켜세워볼 요량도 생기겠지. 세상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대신 하늘을 빤히 노려봐주는 노랑색눈깔의 술잔.



[술잔#10] 좌우명은 올인(a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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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지 못하겠음 뛰어든다. 이리저리 재봐야 답도 안보이고 머리만 아플터. 맷돌에 장렬히 뛰어든 콩처럼 곤죽이 된채 설설 밀려나올지라도, 올인이다. 눈에 보이고 말이 섞이고 심장이 따라간다면. 오른손과 술잔의 이빨과 이빨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해도, 좌우명은 올인.



[술잔#11] 완전한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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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길에 도착. 정점에 도달했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길만 남은 건가. 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으로..? 완급의 조절, 호흡의 조절. 산낙지마냥 술잔에 엉겨붙은 오른손은 그저 좋댄다. 일생동안 흔치않을 황홀한 충만감. 손을 위한 술잔. 술잔을 위한 손.



[술잔#12]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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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한 게 술잔이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오른손.
어디갔을까,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순식간에 말라붙은 술잔.



[술잔#13] 넌 왜..비어 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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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비견될만한.
넌 왜 비어버렸니.
털썩, 절망한채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오른손.



[술잔#14] 술은 술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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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만한 인연이 사그라들고, 잘록한 곡선과 짙은 향을 닮은 술잔을 다시금 어디선가 들어올리겠지만. 지나간 시간과 흘러간 이야기들은 사진첩에 봉인된 채 고이 '버려진다'. 찍히는 순간 죽어버리는 밴댕이같은 사진, 그리고 그속에 담긴 기억들처럼. 달그림자가 비치듯 그대의 마음에 잠시 비쳤던 것 뿐이니..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오른손의 이야기와 표정을 떠올려 준다면..

술은 눈코입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무엇보다...술과 술 사이, 그 비워진 잔 또한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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