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서 취직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 관련 서면 인터뷰를 했다.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어서, 다소

딱딱하고 도식적인 질문들이 나열되는 피피티 자료의 빈 칸들을 채워넣기란 쉽지 않았지만, 오늘 추가로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그 거칠고 둔한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좀더 자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미 피피티 자료는 근 한 달 전쯤..? 협회와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질문들에도 꾸역꾸역 답을 하고, 이게 무슨

제대로 된 질문이냐 싶은 것들에도 열심히 동문서답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던 얘기랍시고 담았었는데, 막상 오늘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인터뷰어가 쥐고 있던 자료가 분명 내가 썼던 그것임에도 왜 이렇게 낯설던지. 나로부터

나왔지만 이미 나와는 너무 멀어져 버린 듯한 느낌, 혹은 애초부터 내가 어느정도 가식이랄까 포장을 섞었던

것일까. 추가 질문들에 이리저리 대답을 하면서, 과연 내가 일년간 다녔던 이 협회란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공간일까 외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만 차곡차곡 쟁여져버렸다.


무지하게 유니크한 공간. 사기업도 아니지만 공기업이라기엔 그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서비스지향적으로
 
굴러가고, 그러면서 조직 수장의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좀 느슨하고 안정지향적이기 쉬운 조직. 게다가 어쨌든

자체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국가의 무역이라는 '대의' 내지 '공익'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돈을

매년 소비하는 조직..


그 공간에 흔적을 내라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중소 무역업체들의 이해와 목소리를 섬세하게 반영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평가(대외적 생색내기나 핵심정치인들의 눈도장을 받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만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은 더 무역업체들의 최대 이익단체로서 수출업체 뿐 아니라 수입업체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협회의 이름을 보다 협소하게 바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은 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민간 차원의 액터로서 협회의 근간인 회원사들을 위한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다는 평가

(정부기관의 건방짐과 막대먹음이 지금 협회의 포지셔닝의 어정쩡함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협회의 지명도를 높이고 네임 밸류를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 협회의

조직문화가 좀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성숙하는데 일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달까. 그리고 무역 자체가

단순히 몇조니 몇천억이니 하는 숫자놀음으로 환원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발전에 어떠한 질적 기여를 해야 할지..

까지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민하는 조직으로 바꾸고 싶다. 그러한 조직원들의 고민 위에서, 협회가 외부적으로도

훨씬 성숙하고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까지 던질 수 있는 멋진 조직이었으면 좋겠다.


......


내가 이곳에 몸담으면서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 지금의 내게 직장이란 단지 내가 좇는 삶의

물질적인 기반(시간과 자금, 체력)과 정신적 여백(여유)을 남겨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가 내게

무엇인지, 어떤 직장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늘 내가 이 직장이 제공하는 것들로 지금 현재 빚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과 같아져버리고 만다.


지금의 직장에서 늙어죽을 때까지, 아니 늙었다고 짤리기 전까지 다닐지는 모르겠다. 직장의 선배님들이 다니고

있는 걸 보면..난 절대 저 분들처럼 남아있을 거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대안이 보이는 건 아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직장을 제한 나머지 삶의 부분들을 상당히 보장해주고 있으며, 그건 일종의 독묻은 사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이년만에 만난 후배 하나는, 마냥 분방하고 날 것의 이미지가 나던 예전의 나에 비해

왠지 지금은 뭔가 포장이 잘 되어 있다거나, 세련된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있나, 맘이 덜컹 내려앉았다. 난 그렇게 '교정'되거나 '포장'되고 싶진 않은데. 디즈니 만화에선가

허름한 시골집에 묵게 된 자칭 공주가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 침대 시트 밑에 콩 한알을 넣어두는 장면을 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침대 밑에 무슨 커다란 돌이 있는지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이야기하고, 주위 사람들이 시트를

몇개씩 더올려 가며 며칠 밤을 시험해보아도 이미 연약하고 민감해져버린 그녀는 작은 콩알 하나가 커다란 돌처럼

등에 배긴다고 불평하는 장면.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 난 저런 공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공주처럼 자잘한 것들에 무지하게 민감해진 채, 더군다나 큰 그림을 보는 노력조차 제대로 기울이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정말 추해질 거다. 마치 군대에서의 어느 때처럼, 배가 부르면 좋고 졸리면 자고 머리아픈 건 귀찮고.


하루 단위로 살며 콩알 하나를 돌인 양 설레발치는 돼지 하루살이가 되고 있는 걸까.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 확실히

많이 해이해진 거 같다. 그리고 많은 걸 타협하고 그러려니 항복해 버리는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호주총리의 공식실무방문에 대한 경호문제가 상당히 빡빡하다.

느닷없는 부시의 방문으로 가뜩이나 정신없어진 청와대 경호팀이지만, 어찌됐건 난 예정대로 금욜쯤에는

청와대로 진격해서 이명박을 해치우고...라기보다는 신원조회절차를 마친 사람들의 비표를 가져와야 한다.


오늘까지는 만찬 참석예정자들의 명단을 완료하고, 호주대사관과 예상참가인원을 검토, 웨스틴조선호텔측과

행사장 세팅에 대해 논의를 마쳐야 했다. 참석희망자들의 주민번호와 주소, 영문이름과 직함까지 포함된

인적사항을 받아야 했는데 호주대사관은 마냥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싶은 게다. 헤드테이블에 앉혀서 지네

총리 체면을 세우고 싶었겠지. 외교부장관, 지경부장관, 국토해양부 장관, 통상교섭본부장, 이회창, 박근혜,

정세균 민주당 대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박진 국회의원 등에 이르기까지..온갖 곳을 다 찔러놓더니

기어이 오늘 터진 거다.


시작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1인. 비서라는 사람이 전화가 와서는, 내가 발송한 공문에는 8월 1일이 신청 마감이라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지가 모시는 사람한테 그런게 어딨느냐, 신원조회 절차도 필요없다, 라고 생떼를 쓰는

거다. 그것도 확실히 참석하겠다는 게 아니라 갈지 안갈지 모르지만 단지 한 자리를 마련해 놓으라는 강짜.

거만하고 느릿한 비서의 말투에 짜증이 버럭 나서 꺼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안되겠다고 단호히

끊어버렸다. 다소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었지만, 나몰라라 하고 뚝 끊었다. 뭐랄까, 한나라당에 잘 보일 일 따위

없다..란 생각과 동시에, 비서가 내 이름 알아봐야 대체 뭘 어쩌겠어..란 얄팍한 산술이 뒤엉켰달까.


뒤이은 또다른 한나라당 국회의원 1인. 신나겠지 한나라당. 맹박이가 그리 망쳐놔도 공정택 너끈히 당선되는

이 지랄맞은 상황이니 더욱. 아까 그사람보다는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는 갖춘 비서였다. 하기야 그는 한-아랍

소사이어티 창립총회를 비롯, 우리쪽 행사에 자주 출몰했던 사람이기도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조금 봐줘서,

지금 당장 참석 여부를 확인해오면 넣어보겠다고 한 발 빼줬다.



이른바 갑-을의 관계, 거기에서 파생하는 기분더러움과 망나니틱한 막무가내식의 행태들은, 어쩌면 그 물고

물리는 위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노동하는 인간'의 고됨이 표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먹고 살기 위해, 죽지 못해 일을 하며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짜증스러운 순간들, 응어리들은 언제든지

약한 곳을 타격하며 터져나가기 십상이다. 예컨대 나보다 약자의 입장에서 전화를 걸어오거나 아쉬운 소리를 할

법한 상대는 언제고 쉽게, 스트레스 해소나 짜증을 분출을 위한 샌드백이 되버리는...


그 스트레스들을 갑-을 놀이의 부산물이라고 하면서 슈퍼갑이 되고 싶어, 라거나 을의 위치에 처한 본인의 상황을

씁쓸해하지만 사실 그 사슬엔 어디에도 정점이 없는데다가, 누군가의 갑은 항상 누군가의 을인 게다. 결국

문제는, 이렇게 덥고 이렇게 짱나는 세상에 닥치고 일만 꾸역꾸역 해야 한다는 거 아닐까 싶다. 회사원이 된다는

것, 낯설게 보면 한없이 낯설어지고 다소 어이없어지기까지 하는 시츄에이션. 개인적인 견지에서야 도닦는셈

치고 '노동하는 인간'의 고됨, 그리고 그로 인한 날카로움과 짜증을 약자에게 전가하며 해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지만, 애초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 빠뜨린 사회와 근대적 시스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던 제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름 아직까지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려고 애쓰고 있다. 호주대사관의 참사관 하나가 어이없이

짜증내며 전화하길래 같이 버럭해주고 나서는, 목소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받은 지방중소업체의 전화에

나긋하게 응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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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켓 두장, 그리고 최소 삼십분의 땡땡이 예상시간에 혹해서 집체 헌혈행사에 참여했다. 트레이드타워

정문에 늘어선 헌혈차들. 저혈압이라며 뺀찌먹고선, 이럴순 없다 하며 다시 신청서를 귀찮게 작성해선 옆 차에

올라 검사를 받았다. 10분전의 뺀찌..부적합 판정 기록이 어느새 내 발목을 잡아서 왠만함 이번에는 쉬시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간호사 누님의 말에 투덜투덜대면서 기어코 피를 뽑았다. 가만히 누워서, 이마와 발끝에서부터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종의 가학? 그리고 피학의 동시만족? 나에 대한 as-is 분석과 to-be 분석..내가 가진 능력과 비전 내지

희망에 대한 매일매일의 새로운 분석은, 새로울 것없이 매일매일 우울하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 능력-소질-관심사-지식-자격증-점수-숫자..뭐하나 맘에 드는 것도, 깊이 벼리고 내세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갑남을녀, 장삼이사, 뭐 그렇고 그런 아무개. 그리고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들, ...난

뭘 갖고 싶은 걸까.라는 곰팡내 나도록 오래고 단물빠진지 오래인 질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이게 내게 최선의, 아니 차선의 결과라도 되는 건 맞는 건지. 그리고

이곳은, 내게 맞는 최소한의 십원짜리 팬티라도 되어줄 수 있을지. 아니라면, 아니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모르겠고, 아무것도.

혹은 두렵고, 정말 모르겠고, 아무것도.


단순히 몇 개의 굵직한 행사가 거듭되어 쌓인 피로 탓일까,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적대기

시작된 탓일까, 회장/부회장의 개념없는 언행들에 진력이 난 탓일까, 아님 이 곳의 학교 선배들 모습을 보며

지레 질려버린 탓일까...혹은 이명박의 사진만 봐도 울화가 치밀고 욕지거리가 나온지 오래인 심리적 분격상태

탓일까, 그리고 얼마전 문득 떼거지로 만났던 대학원생들, 그리고 유학생들의 jargon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말았던 탓일까.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에 휩쓸려 대충대충 정신없이 지내는 하루하루.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허하게 남는 탓일까. 대체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요새 까칠해졌다. 지하철에서 고딩들이 떠들면 니들 안방이냐고 큰소리로 갈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줄타기하는 사람뒤에서 툭툭 쳐대는가 하면, 걸을 때 앞에서 느긋하게 걷거나 역주행하는 사람들에겐 감정실린

어깨를 날려준다. 그래, 사실은 내 앞에서 신경거슬리게 만드는 게 네온사인 간판이던 사람이던, 뭐가 되었건

있는 힘껏 한방 날려줬음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왕임 주먹도 덕분에 피칠갑 좀 했음 좋겠고.


밤늦은 지하철, 영등포구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멍하니 넋놓고 서있는 사이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댔다. 황급히 뛰쳐나와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오지 않았어도 될 길을 멍청하게 되밟아 가면서, 죽어버릴까 하고 사십번은 뇌까렸다.

이게 뭐하는 거냐..집에 가 쉬어야 할 몇분의 시간을 왜 이렇게 멍청하게 허비하는 거냐..아니 잠깐, 요새 넌

시간을 쓰는 거냐 시간을 지우는 거냐..죽어버릴까, 라는 구간반복 무한재생.


어제 엄마가 사왔던 정장바지는 엉덩이가 숨쉬기 힘들었다. 허리는 여전히 31-32정도에서 유지되고 있고 배도

그닥 변질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방심한 엉덩이에 살이 올라붙고 있었다.

우울해져서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래서그래서. 오늘 오후 두시간동안 헌혈이랍시고 땡땡이치고는 '죽음'을 타이밍좋게 체험했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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