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보려 마음을 세운 것이 벌써 몇 년째, 5월초의 황금연휴에 불쑥-떼밀리듯-내려와버렸다.

 

별생각없이 잡은 숙소는 1구간 중간의 행정마을/삼산마을의 부녀회장님댁. 역시 전라도의 손맛이란 게 어찌나

 

훌륭하던지 아침저녁으로 푸짐하고 맛있으면서 저렴한 식사를 하고 내처 사흘째 걷다가 왔다.

 

 

모내기를 준비중인 논들은 온통 그득그득 물을 받아두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둘레길의 방향과 코스를 안내해주는 표지판들의 도움을 얻어 2구간쪽으로.

 

1구간 남은 곳과 2구간을 걸을 요량이었다.

 

 

 

 

 

유채꽃인지 무꽃인지, 화사하게 피어난 노란꽃들이 지천.

 

 

모내기를 준비하느라 물을 가득 채워놓은 논. 수면에 모든 풍경들을 가둬놓은 모양새가 마치 수상마을 같기도.

 

 

 

그렇게 양쪽에 무논을 끼고 멀찌감치 지리산이 시야에 툭툭 걸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이내 운봉읍까지 도착.

 

 

읍내 곳곳의 조금 낡았지만 정겨운 풍경들도 골목골목 들어가며 찾아보고.

 

 

 

색이 빠지고 바래서 이젠 파스텔톤이 되어버린 간판과 자전거와 풍경들.

 

 

그와중에도 버스 정류장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 듯.

 

 

 

울타리나 철책이 둘리지 않은 자그마한 초등학교.

 

 

 

그렇게 설렁설렁, 금세 도착하게 된 2구간 시작점. 운봉-인월 구간, 거리는 9.9km라는데 뭐 무슨 정복하러 온 것도

 

아니고 갈 수 있는데까지 걸어보고 택시던 버스던 타고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정태춘, 5.18.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도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근 10년만이었다.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기억하고 있던 광주 5.18묘역은 그사이 많이 깔끔해져 있었다. 그때에도 이미

 

신묘역의 말끔함은 억지스런 분칠로만 느껴져서 왠지 모를 거부감과 암담함을 느끼게 했었지만.

 

평일 오전시간. 신묘역, 그러니까 무려 '국립 5.18민주묘지'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관리하시는 분들이나 몇몇 보이지 않는

 

참배객들의 몸가짐에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조심스러움과 함께 역사의 무게를 감각하는 이들의 비극성이 묻어나는 듯 했다.

 

그런 역사를 이렇듯 '성지'화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일렀거나 부주의했다. 여전히 전두환이 건재하고, 5.18을 딛고 선 신군부와의

 

딜을 통해 은밀한 권세를 유지한 유신 잔당들은 다시금 명실상부한 권좌에 앉겠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새 빛이 바랜 (아마도) 2002년의 안내판. 이미 5.18은 오래되다 못해 이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과거가 되어 버린 걸까.

 

묘역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구슬프지만 우아하고 절제된 선율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 뿐, 분노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이전에 찾았던 정태춘의 노래들이라거나 5.18관련 영상들을 다시 찾는데, 이상하게도 많이들 짤렸다.

 

뭔가 오기가 생겨서, 이것저것 괜찮은 자료들을 다시금 퍼올려두기로 한다.

 

 

 

 

'민주의 문'을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서는 길.

 

 

 

 

문재인이, 안철수가, 그 이전에는 이명박과 노무현과 김대중이 섰던 그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내게 광주, 그리고 5.18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이 동영상의 첫머리, 5.18의 '모란꽃'이라 불렸다는

 

전옥주의 가두방송으로부터 시작한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계엄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그렇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세상임에도, 5.18민주항쟁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거대한 그림자와 의미를 던지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여전히 그 주역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의

 

결과와 후폭풍으로 인해서 많은 역사적 변곡선들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신 잔당의 청산 문제, 지역 감정 문제,

 

한국 사회 민주화의 지체 문제들이 그런 것들이다.

 

어쩌면 당시 광주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시민'들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며 일어선 사람들.

 

아마 전옥주는 이런 식으로 언론이 봉쇄되고 언로가 막힌 광주시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을 거다.

 

"당신들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돌아가신 날짜대로 열을 지어 누워 계신 분들. 1980년 5월 18일부터 드문드문 나타난 비석에는 어느 순간

 

1980년 5월 20일자의 죽음들이 셀 수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어미의 마음으로 새겼을, '싸우리라." 비석의 뒤에는 남겨진 이들의, 혹은 떠난 이들의 독백이 단단히 새겨졌다.

 

열다섯의 누군가는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헌혈하고 나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서른여덟의 누군가는

 

진압하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을 몰고 항거하다 숨졌다. 누군가의 아비는, 어미는, 먼저 간 자녀들의 넋과

 

뜻을 기리며 피눈물을 새겼고, 누군가의 형수는 그저 평안하길 바랬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 그나마 '상식'이 있고 그나마 '일반 국민'을 대변한다고 말해지는 자들,

 

그들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광주 민주항쟁은 어떤 빛깔로, 어떤 목소리로 기억될까.

 

 

어쩌면 그건 그들의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올바르고 균형감이 잡혀 있는지를 고백하는 바로미터와 같을지 모른다.

 

 

강풀 원작의 영화 '26년'이 여전히 제작조차 쉽지 않은 나라, 학살자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광주 5.18의 흔적을 보며 그저 슬픔을 느낄 뿐인지 분노를 느끼는지의 차이 말이다.

 

 

 

 

 

어느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이파리를 늘어뜨린 채 해바라기 중이던 초록빛깔 덩굴식물. 삼지천 마을,

혹은 삼지내 마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나 차분함이란 건 저런 덩굴이 꼬물대며 이파리를 밀치는 소리와

움직임이 보일 거 같은 그런 정도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A탐방로니 B탐방로니 일견 복잡해 보이는 코스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울 거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닿고 마음 동하는 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거다. 미처 못 가본 샛길의 풍경이 못내

궁금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면 그저 또다시 휘적휘적 걸어가면 될 일. 그런 게 '슬로우시티'의 호흡이 아닐까.

이리저리 휘휘 감기며 이어지는 돌담길이 끊긴다 싶은 곳엔 반쯤 열린 나무대문이 버티고 섰다. 안 그래도

나뭇살이 조금씩 휘어지고 뒤틀려 안의 풍경이 속살처럼 드러나고 있었는데,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인다.

마을 곳곳에 빈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들. 이 곳에서 민박을 하는 집들이 꾸며 놓은 거기도 하겠지만

딱히 광고나 영리 목적의 홍보가 아니라 마을을 치장하고 소개하는데 더 마음을 쓴 거 같다.

 

한눈에 확 매료되고 만 전통 가옥 한 채가 있었다. 지붕에 촘촘이 얹은 기와 한장한장이 비바람에 씻기고

세월에 퇴락해선 저마다 다른 얼룩과 상처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제각기의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기와들이

삐뚤빼뚤하는 듯하면서도 제법 정연하게 늘어서서 풍겨내는 그 느낌이란 건 참. 틈새 하나 벌어지지 않고

기왓장 한장한장 반짝거리며 단정한 검은색을 뽐내는 새로 올린 기와지붕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흐트러짐과 깨어짐.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 기와지붕은 표정이 있었다.

 

좀처럼 돌아나오기 아쉬웠던 가옥. 아마 집 주인이신 듯한 분께선 왜 이 쪽만 계속 사진을 찍냐고, 새로

기와를 올린 다른 쪽도 좀 보고 그러냐고 하시며, 며칠 전에 다녀간 건축학과 학생들도 이 건물만 죽어라

사진을 찍어대더라며 은근히 뿌듯해 하셨다. 그 건축학도들이 봤던 건 뭘까. 내가 본 건, 건물의 표정.

나팔꽃을 푸짐하게도 얹고 있던 돌담에 자전거 두대의 무게까지 얹혔다. '슬로우시티'라는 인증마크 없이도,

나른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게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못할,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느낌도 절대 아니었다. 품위있게 올라간 기와지붕이나

재래의 냄새 가득한 초가지붕만 있던 게 아니라 잔뜩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도 한쪽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고,

지금도 이곳에선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과 냄새가 여기저기서 남아있었다. 그 흔들림없는

증거로 이렇게, 사람들이 더께를 밀어내고 씻어내는 목욕탕에서 여전히 뜨거운 김이 펄펄 오르고 있던 거다.

마을의 구석구석 풍경들. 어느 골목에선가 뜬금없이 조우한 저 석상은, 원래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뭐 이런 거 아닌가. 덜렁 혼자 남아서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기왓장 위의 고양이, 시멘트담벼락을 거칠하게 기어오른 나팔꽃, 멀찍이 보이는 (여기도 예외없는) 교회

첨탑만큼이나 뾰족뾰족하게 선 녹슨 철문.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는데, 걷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로 슬슬 다니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이 목욕탕 남탕 문이 열렸다. 돌담길 옆 나무가 Y자 모양으로 가지를 벌렸다.

 

누렇게 녹슨 형광등 갓이라거나, 문짝을 걷어올려 걸어둘 수 있는 새모양 등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이며 마룻바닥이라거나. 게다가 담쟁이덩굴이 온통 건물 벽을 따라 기어올라 처마까지 매달린 이런 집,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맘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그리고 마당 앞 귀퉁이에서 피어있는 별모양의 이름모를 꽃,

그리고 고랭지배추 꼬갱이같이 찌글찌글 얄포름한 호박꽃잎하며,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의외로 어울리는

영단어들, LETTERS.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꼭 한옥 민박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 할아버지댁같은 느낌이면서도

아기자기한 풍경이라거나 둥글둥글하게 깍이고 다듬어진 사물의 모서리들이 넘 좋은 거다. 게다가

활짝 열린 문이 겸연쩍었던 듯 얼기설기 낡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둥 마는 둥 해둔 저런 제스쳐까지.

눈길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던가, 갓 부어놓은 시멘트길도 역시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겠단 걸 보여주는 사진.

저 멀리 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 저벅대는 발걸음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였을까, 무슨 급한

일이 있던 건 아닐까, 손주 녀석이 소식도 없이 내려온 건가.

아직은 신선한 노랑빛이 반짝거리는 논, 좀더 햇살을 먹고 가을바람에 다독여지면 한층 가라앉아 무겁고도

차분한 누런 빛깔을 띄게 될 거다. 논두렁길을 따라 걸어 나오며, 비로소 삼지천마을의 마법같은 시간의

흐름에서 차츰 벗어나는 걸 느꼈다. 조금씩 빨라지는 초침 소리.




 

담양의 대표적인 여행지,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과 관방제림을 자전거로 달렸다. 죽녹원 앞에서 자전거를

즐비하게 열맞춰 세워둔 많은 대여점 중에서 하나를 골라 반짝거리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한시간에 삼천원.

아저씨가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과 관방제림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가면 되는지를 자세히 알려주기도

했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자전거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방향만 따라가도 되겠다 싶어서 큰 걱정없이

여유롭게 페달을 밟았다. 차가 거의 지나지 않는 단단한 아스팔트길이 매끄럽게 뒤로 물러선다.

굴다리 앞에서 우회전해서 큰길에서 좌회전하랬던가, 아저씨의 말을 곱씹기도 전에 저만치서 장대한 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모처럼만에 타보는 자전거가 꽤나 즐거운 와중이었는지라 고작 십여분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가 아쉽기도 했지만, 일단 가로수길 입구에 정차. 가로수길 아래로는 자전거 통행금지란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나무 둥치마다 하나씩 차지하고 온갖 포즈를 잡아대는

앳된 커플들도 보였고, 삼각대를 쓰거나 서로의 카메라를 돌려가며 사진을 부탁하는 중후한 부부도 보였고.


그리고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은 생각보다 짧아서 아쉬웠다. 춘천 남이섬에 있는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과

비슷한 길이였던 거 같긴 한데, 옆으로 계속 차들이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호젓한 분위기가 모자란 만큼

가로수길의 길이도 모자라게 느껴진 듯 하다. 돌아나오려는 길에, 문득 마법처럼 사람들이 쏴아 빠져나가고

흙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순간. 아이를 업고 걸리며 앞서 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이 여유롭다.


돌아나오려는데, 가로수길 옆으로 차들이 미어진다. 차를 가져와 잠시 멈췄다 갔더라면 좀더 아쉽지

않았을까. 여행에 걸맞는 속도란 게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행지에 점찍듯 찍고 뜨기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는 풍경들이라거나 바람을 맞는 게 넘 좋았던 거다.


관방제림은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 바로 맞은 편에서부터 시작됐다.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관방제림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쌓아올린 제방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약 700여그루의

나무가 있었지만 현재는 300여그루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나름 물을 다스리는 치수의 방책으로 효과가 계속

되었기에 오랜 세월 관리되고 보존되어 온 게 아닐까. 수백년의 시간동안 검증된 치수책인 셈이다.

관방제림, 방둑처럼 불뚝 튀어나온 길을 따라 달리는 길. 옆에서는 무르익어가는 벼들이 누런 물결을 일렁이고

있었고, 오른켠에는 장승들이 띄엄띄엄 꽂힌 채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은 흙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느낌이 참 좋았다. 메타쉐콰이어 길과는 달리 사람도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가로수길은 차에서 내려 얼른 보고 갈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훨씬 쉬웠다면, 여기는 나름 걸어들어와야 하는 곳이라 호젓함이 보전된 듯.


길은 꾸준히 길고 곧게 이어졌고, 드문드문 앉아 쉴만한 벤치나 정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지 앉아 쉬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길 옆으로 따라 흐르는 개천, 층층이 다듬어진 개천에서 하얗고 뿌연 속살을 드러내는 개울물 틈새를

긴 부리로 비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는 하얗고 길다란 새 한마리가 우아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자전거에 좀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 자전거는 한 손으로 운전하며 다른 한 손으로 되는대로 사진을 찍어대기에

이르렀다. 용케도 수평이 잡힌 사진들. 담양 시내에 가까워진 듯 애드벌룬도 떠있고 뭔가 복작복작한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이르러서야 관방제림이 어느결에 끝났다는 걸 감지하고 뒤로 돌아 나가기로 했다.


관방제림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들 중에서도 아마 이 나무가 가장 컸던 거 같다. 머리를 풀어헤친 듯 사방으로

뻗어올라간 꼿꼿한 가지들의 기운이라거나 왠만한 어른들이 수십명은 모여야 겨우 그 두께만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둥치, 이런 나무를 보면 어쩔 수 없이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저렇게 자라는 동안

쉬지 않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제 몸속에 꼬깃꼬깃 나이테를 채워넣었을 거다.

째째하게 모래사장이나 훑고 마는 파도가 아니라, 말하자면 제법 사이즈가 되는 바위섬쯤을 기어이 갈아내어 형체도

없이 지워버리겠다는 무게감과 여유로움마저 느껴지는 그런 파도소리가 누렇게 익은 논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거의 다 돌아나와서 관방제림 초입쯤 도착했을 때, 아까 띄엄띄엄 놓인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던 장승들이 이번에는

슬쩍 고개를 외로 꼰 채 다닥다닥 붙어있던 즈음에, 미처 못 보고 지나쳤던 얼굴이 사라진 장승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이랑 둘이 사이좋게 얼굴을 하나씩 넣어서 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의 오붓한 모습.

자전거를 반납하러 가는 길, 건물 옆으로 늘어진 전선을 따라 하늘을 가리는 두텁한 커튼처럼 덩굴식물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저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났으면 꽤나 묵직할 거 같은데 전선이 끊기지 않으려나 싶던.

자전거를 반납하고 죽녹원 옆에 있는 전남도립대학을 걷다가 문득 발견한, 시멘트 옹벽에 붙어있는 피어싱들.

하나도 아니고 저렇게 여러개가 길을 걷는데 쭉 늘어서 있어서 재미있어 보여서 사진 한장.


대나무에 기대어 층층이 발판을 얹은 수십개짜리 덩굴계단. 안 그래도 위로 갈수록 작아져보이는 원근법의

마법에 더해,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잎사귀의 모습, 그러면서도 몇몇번째 계단에선 그 비율을 깨뜨리고

불끈 자라난 잎사귀들의 배열이 리드미컬하다.

담양의 죽녹원. 서울에서 전남 담양까지 내려갔으니 사람들이 많이 없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입구부터 꽉꽉

들어찬 사람들,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는 데에도 줄이 잔뜩 늘어서서 입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 기다려야 했다.

입구에서 뒹굴고 있던 팬더 몇 마리. 왠 팬더인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대나무와 팬더는 자연스레 이어지는

한쌍이었던 거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그런 견고한 고리가 내 머릿속에서 깨어진 건 아마도 핑크팬더와

쿵푸팬더의 영향 아닐까. 제법 익살맞은 팬더들 사이에 선 꼬맹이, 암만해도 팬더들 따라 지어본 표정이지 싶다.


사방으로 휘휘 뻗어나는, 그렇지만 그렇게 부담스럽게 길지는 않던 죽녹원의 코스를 거닐면서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나무를 자연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살린 채 가로등 기둥으로 활용하고 있던 모습.

온통 대죽들, 고개를 잔뜩 꺾어 올려야 겨우 그 너머 하늘이 보일 정도로 잘 자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에어컨 바람도 울고 갈 정도였다. 꼬맹이들 앞니 빠진 새로 바람이 노닐듯, 그렇게 간결하고 호리한

대나무 사이로 바람이 노닐며 그 푸른 청량감을 한껏 머금는 듯 하다.


대죽의 색깔도 약간 소프트한 무광택 코팅이 살짝 입혀진 옥빛이랄까,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분이 드는데

실제로 살짝 손만 대어도 대나무가 빈 통속에 보관하고 있던 냉기가 맹렬하게 전달되었더랬다. 죽순의 떡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쭉쭉 뻗어나간 대나무 하나, 워낙 순식간에 자라난다니 가능했을 듯.


그런데 대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그 숲의 짙고 깊은 느낌을 만끽하는데 종종 방해가 되던 현수막들이 보였다.

"저는 대나무입니다. 저를 만지거나 제몸에 낙서하지 마세요. 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꽤나 섬뜩한 문구다.

근데 정말, 그런 현수막이 버젓이 내걸려있는 앞에서도 차키를 들고, 펜을 들고 대나무에 하나씩 달라붙어서

글자를 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나 많이 눈에 띄던 거다. 나이가 많던 적건 상관없이. 심지어 이런

엄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낙서라거나, '개개개자로~' 시작되는 말을 이어놓은 낙서도 있더라는.


대나무들의 저런 눈물어린 읍소에도 불구하고 저런 낙서를 의연하게 하는 사람들은, 담양특산품인 이런

대살회초리로 체형을 내려야 하지는 않을까. 수학여행 때던가 기념품 가게에서 회초리를 사갔던 옛날의

아련하고도 아팠던 기억을 새록새록 자극하던 대살회초리 특산품. 손바닥에 몇대 시험해보니 찰지구나.

죽녹원은 총 여덟개 코스로 구성된 산책로를 갖고 있는데,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죽녹원 안의 숲을 돌아서

그 코스를 전부 밟아도 두어시간이면 충분한 거 같았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건 '1박2일 촬영지 가는길'.

아무리 저 프로그램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저렇게 안내판에 덕지덕지 붙여놓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더구나 이승기가 빠졌었다는 연못엔 '이승기 연못'이란 이름까지. 한 3년만 지나도 저게 왜 저런

이름이 붙었는지, 저기서 뭘 찍었는지 기억도 잊혀질 텐데, 그땐 지우고 새로 안내판을 세우려나.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거다. 그냥 여기가 이런 영화, 이런 프로그램 촬영했던 곳이라는 것만 표시를 남기면

될 것을, 뭘 전체 지도에다가도 요란스레 '1박2일'이니 '이승기연못'이니 정식으로 표기를 해 놓았을까.


 

*토막상식(@ 죽녹원 안내판).   <죽림욕의 효과>

ㅇ 음이온 발생
  - 음이온이란 전기를 띈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로 마이너스 전하가 음이온이다.
  - 대숲에서는 음이온 발생량 1,200~1,700개 발생 (음이온 발생량 700개 이상일 경우 사람은 시원함을 느낌)

ㅇ 풍부한 산소 방출
  - 대나무숲 안과 밖의 온도는 약 4~7도씨 가량 차이가 난다.
  - 대숲 1ha당 1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0.37톤의 산소를 발생

ㅇ 심신안정 효과
  - 뇌에서 알파파의 활동을 증가시켜 스트레스 해소, 신체/정신적인 이완, 심신의 안정 효과


 


 


여덟 코스 중에서도 가장 경사도 있고 길도 좁던 곳은 추억의 샛길,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산책했던 코스라고도 한다. 대나무뿌리가 얼기설기 드러난 흙길 양쪽으로 하늘높은 줄 모르는 죽의 장막을 친

대나무숲 사이를 걸으니까 땀도 안 나고, 걸을수록 상쾌한 느낌이 드는 게 죽림욕 제대로다. 그치만 맘 한켠으론

대통령이 걷기엔 좀 너무 정비되지 않은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 그의 소탈함이 반영되었던 걸까.


죽녹원이라고 대나무숲만 울창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낮은 곳에는 저렇게 하얀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차나무도 있었고, 드문드문 덩굴이 말려올라간 나무들도 있었고.

근데 죽녹원 가운데에 있던 이 동상은 대체 누굴까. 못 찾은 거 같기도 하지만 안내팜플렛이나 지도나 동상

근처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런데 누군가 저렇게 파랑땡땡이 스카프를 곱게도 감아놔서

차갑게만 보일 수 있는 동상에 살짝 온기가 감도는 것만 같다.


죽녹원 맨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한옥체험마을 가는 길. 깔딱고개를 넘어서듯 경사가 급 가팔라졌다가 급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면 한옥들과 정자들이 조그맣게 무리짓고 있는 마을이 나온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옹골차게

짧막한 마디가 꽉 차있는 대나무뿌리가 흙바닥 위로 꾸물꾸물 기어나와선 자꾸 발목을 잡았다.

한옥체험마을, 몇 개의 연못이 이어져있었는데 괜히 궁금해지는 거다. 이 중에서 어디가 '이승기연못'인 거지.

혹시나 하고 굽어본 안내판엔 이승기연못 대신 죽녹원 두꺼비를 지켜달라는 이야기만.

한옥마을과 죽로차체험관, 그리고 시비공원이 모여있는 곳인지라 조경도 잘 되어 있고, 잔디가 곱게 깔린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자갈길은 정말 걸을 맛이 나는 구간이었다. 적절히 안배된 연못과 건축물들, 그리고 나무와

벤치들까지 아기자기한 그림같은 풍경이 돋보이던 곳.


정자에서는 어느 명인 한분이 가야금을 뜯으며 구성진 가락을 한 소절 뽑아내리고 계셨고, 굳이 그 앞에 총총이

모여서 듣지 않아도 부드러운 바람결에 날려 오는 소리가 가을날의 정취를 더했다.


그리고 이곳 연못에서 잠시 앉아 쉬면서 이곳저곳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남은 사진들. 연못 너머 벤치에 우뚝

선 아기를 어르고 있는 부모의 부산스럽지만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라거나, 곳곳에서 쌍쌍이 벤치에 앉아

가을하늘과 가을바람, 가을공기를 즐기는 어린 연인들의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돌아나오는 길, 그러고 보니 요새 코스모스 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얼핏 듣기로 외국산 국화던가, 그런

외래종에 밀려서 점점 코스모스 개체가 줄고 있다고 신문기사를 봤던 거 같은데. 벌 한마리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허벅지에 노란 꽃가루테를 두르고 있었다.

죽녹원을 나오다가 잠시 돌아보았더니, 누렇게 변색된 대나무를 촘촘이 엮어만든 담벼락이 터져나갈 듯

거침없이 쭉쭉 뻗은 대나무숲의 기세가 충천한 느낌이다. 저래서야 비가 와도 물방울이 안으로 새어들어갈

틈이나 있으려나 싶도록 빼곡하게 밀집해선 시퍼런 색감과 칼날같은 잎사귀 모양을 자랑하고 있던 죽녹원의

대나무숲. 아무래도 대나무숲은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이야기를 머릿속에 소환해내는 거 같다.





첫날

8시 서울 출발

12시 담양 도착

12-1시 점심 ; 담양한우


1시 죽녹원

3시반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 by 자전거

4시 관방제림 by 자전거

5-6시 저녁 ; 대통밥 & 떡갈비


둘째날

 

10시 삼지천마을(슬로우시티) 도착


(11-12시 점심 ; 국밥촌)

2시 소쇄원 도착

4시 담양 출발

 

 

 

 

 

 

 




담양에 가서 놓치면 아쉬운 대표적인 음식이라면 역시 대통밥과 떡갈비. 이제는 서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통밥이지만 의외로 처음 대통밥이 만들어진 건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과거의 문헌들과 전래되는 이야기에

기대어 대통밥을 처음 만들었다는 집을 찾아 대통밥+떡갈비 세트메뉴를 주문.

대통밥은 몇번이고 재활용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위생상으로는 물론이고 그 대나무의 효능이 제대로 밥에

묻어나기는 할까 싶은 의구심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 의문에 어느정도 적극적으로 답을

해주고 있었다. 대나무의 하얀 속껍데기나 진액이 진짜배기인데, 그건 한두번만에 전부 빠져버리는 거라면서

애초 개발했을 때부터 이 집에선 재활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통밥에서 대나무 냄새도 좀더 진하게 났던 거 같다. 밥알도 고슬고슬하니 맛있었지만, 그보다도

함께 딸려나온 저 수많은 반찬들. 죽순회니 죽순무침이니 도토리묵이니 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전부 맛있어서

결국 접시를 싹싹 비워내고 말았다. 전라도식으로 양념이 가득한 겉저리김치와 묵은김치도 남김없이 싹.

말갛지만 매콤하던 죽순 된장국도 정말 맘에 들었다. 커다란 죽순이 적잖이 들어있던 것도 좋았고.

그리고 떡갈비, 숯냄새가 감칠맛나게 배어있던 따끈하고 부드러운 고기가 살살 풀리는 게 아주 그만이었다는.

둘째날 늦은 아침식사 겸 점심으로 찾은 곳은, 슬로우시티로 공인받은 삼지천마을 어귀에 몰려 있던 국밥집들.

이것저것 이름만 들었던 암뽕순대라느니, 새끼보라느니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맛볼 수 있어 넘 좋았다.

암뽕순대. 암뽕이란 건 보통 돼지의 내장으로 만드는 순대와는 달리 암퇘지의 내장을 사용하여, 선지를 굳혀서

순대 안에 속으로 넣는다는 것도 다른 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26가지에 이르는 재료를 넣어 만드는 전라도식

수제 순대라고 하는데, 가게 주인 아줌마가 구수한 전라도를 섞어 말씀해주신 거라 정확히 들은 건지는 잘..

그치만 맛은 확실히 특별했다. 껍데기도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했고, 그리고 두툼한 치감도 좋았고.

그리고 새끼보국밥. 암퇘지의 애기집을 새끼보라고 한다는데, 첨에 이걸 주문하니까 주인아주머니가 살짝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먹는 사람이나 먹지 좀 비위거슬려 하는 사람도 있다나. 아무래도 애기집을 썰어서 국밥에 말아

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좀 그런 거 같은데, 음..미안하지만 꽤나 맛있었다. 부위가 부위이니만치 부드럽고 쫀득하고

굉장히 야들야들. 약간 돼지 냄새가 다른 부위에 비해 강한 편인거 같긴 했지만, 원래 그런 냄새 거리끼지 않으니까.

그리하여 담양의 토속 막걸리, '대대포'를 두 병이나 마시기에 이르렀다. 벌꿀과 대잎 성분이 들어있다 했던가,

저 막걸리도 정말 이런저런 지방 막걸리를 마셔본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벌꿀 덕에 조금 달달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깔끔하면서 술술 넘어가는 느낌. 밥으로 먹으려던 순대와 국밥이 어느결에 훌륭한 안주가

되었고, 반주 삼아 마시려던 막걸리는 두 통을 가뿐히 비워버리고 말았다.





'광주에서 즐기는 7일간의 아시아문화여행'이라는 홍보 문구가 잘 보여주듯, 올해 최초로 열린 제1회

아시아 문화주간 행사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문화가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녹아드는, 그런 기회를

여러 차례 예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강력하고 인상적이었던 무대는 역시 음악의 영역에서

아시아 각국의 전통 문화를 서로 소개하고, 알아가고, 끝내 어우러지던 그런 자리들이었다.

2011 광주 월드 뮤직 페스티벌은 문화주간 중에서도 금토일, 가장 중요한 대목에 해당하는 시기를 책임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클라이막스를 광주 도심 한복판의 금남로공원, 아시아문화마루인 쿤스트할레, 그리고

빛고을 시민문화관과 첨단쌍암공원을 넘나들며 책임져야 하는 월드뮤직 페스티벌, 가장 먼저 만났던 공연은

아시아 각국의 대표 연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각자의 고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을 선사했다.

다 같은 아시아인이라고는 하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서로 생김새도 딱히 같다고 하기 뭐하고, 표정이나

악기의 음색, 연주법 따위도 다 다르지 싶으니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기도 했다. 대체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뭘까.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만들게 되는 걸까.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수억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을 쪼개어 각자의 민족국가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아시아'로 뭉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점점 신명나게 고조되는 음악의 힘을 빌어 희미한 힌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 버린 순간 그 다양한 국적,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몽골, 베트남 등등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의

덩어리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모양이 많이 달라지고 제각기의 민족성이나 특성에 따라 변주되는

악기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원형은 지켜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뜨겁고 무더운 날씨에도 관객들은 좌석을 꽉 채우고 더러는 뒤에서 서서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페스티벌의

분위기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다는 점. 점잖게 자리에 앉아 연주되는 음악을 즐기던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쿡 눌러쓰더니 카메라폰을 들고 무대 앞까지 돌입하셔서 사진을 찍기에 이르셨다.

아마도 카메라폰 쓰는 법을 가르쳐준 손자나 손녀에게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걸 함께 나누고 싶어서 아닐까.

다음 무대는 인도네시아였던가, 왠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남국에서 왔을 법한 뜨거운 피를 가진

이들이 차지했다. 그들의 몸에는 온통 타투가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중요부위만을

가린 채 나풀거리는 천조각은 카메라를 들고 그 빈틈을 노리며 무대 주변을 맴돌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차림새나 타투들 만큼이나 노래 역시도 생경해서, 이건 혹시 자메이카나 아프리카 같은 멀고도

이국적인 곳에서 온 음악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동시에 '아시아'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적

배경이나 DNA가 이만큼 광범위하고도 풍요롭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인기 만점이었던 이들의 이 멋진 무대의상, 이랄까 혹은 전통의상이랄까.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사방에서 달려와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려는 통에 그냥 스킵하기로 했다.

은근히 여성 관객이나 여성 진행도우미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낸 듯.

계속 이어지는 공연을 보면서는 계속 그랬다. 넋놓고 그들의 음악을 즐기다가도 어느순간, 어라 근데 이게

아시아음악이라고? 그리고 저 연주자가 아시아사람이라고? 그만큼 음악적인 색깔도, 연주자의 외모나

신체적 특징들도 굉장히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전통의상에서 느껴지는 색감이나 미감 역시

뭔가 여태까지 내가 갖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상식이나 선입견이 얼마나 좁고도 편협했는지 돌이켜보게

해줄만큼 충분히 자극적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무대 뒤에서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미 리허설이나 공연 중간중간의 조우를 통해

서로 얼굴을 익힌 게 틀림없는 공연자들끼리 어느새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서 무대 뒤에서 서로 장난도

하고 웃고 떠들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던 거다. 이런 게 아마 우리가 바라는

'아시아 문화'의 정수 아닐까. 서로에 대한 열린 마음, 친밀한 감정, 그리고 저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마침 한국과 몽골의 수교 20주년을 맞이했다는 올해, 몽골에서 온 연주자들의 공연도 있었다. 선명한 원색의

옷차림에 독특한 악기들이 이목을 특히 끌었었는데,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서는 마치 짙초록색의 드넓은

몽골 초원 위를 내달리는 말위에 몸을 맡긴 듯한 그런 느낌. 초원위를 가지런히 갈퀴질하며 지나는 바람소리를

닮은 그네들의 악기도 그랬지만, 몽환적이고도 격정적인 구령소리같은 노랫소리도 매력적이었다.

 

가만히 보니 현악기의 머리 부분에 조각된 건 다름아닌 말의 머리 모양. 정교하게 말갈기와 주둥이 모양이

새겨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연주와 노래가 마냥 신기했는지 맨 앞자리에 앉아서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들의 뒷모습.

 

 

그렇게 첨단쌍암공원에서의 오픈 스테이지 공연은 일단 막을 내렸다. 아시아 각국, 조금은 친숙한 나라도

있었고 조금은 생경한 나라들도 있었지만 그네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면서 조금씩은 더 반가워지고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네들의 다채로운 복장 만큼이나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만난 아시아

각국의 연주자들, 아마도 그들이 가장 크게 서로에게 자극받고 친숙해진 계기가 된 건 아닐까. 모두가

함께 무대에 올랐던 마지막 연주는 이번 월드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그들이 서로 '아시아인'으로 느끼고

하나되는 화룡점정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곳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맞서 5.18 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카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항쟁 당시 가톨릭센터에서는 천주교광주대교구청과 CBS광주방송국이 들어서 있었다. 천주교광주

대교구청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살상행위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어린 투쟁을

전국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런 곳이 이 곳,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500여명이 사상당한 곳이자, 항쟁

처음부터 끝까지의 중심무대였던 곳이다. 대검으로 임산부를 찔러죽이고 도망가는 시민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내리치고, 심지어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을 쏴갈긴 곳. 예전의 첫 느낌은 생각보다

굉장히 좁은 곳이란 거였고, 이번에 다시 찾고서 느낀 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하는 민망함.

몇걸음 뗄 때마다 세워져있는 조형물들을 마주하게 되어서 하나씩 찍어보기 시작, 그렇지만 그 조형물들이

80년 광주의 기억에 이어져있는 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기준은 작품의 형태와 제목,

그 이상 판단할 여지가 없기도 했거니와 금남로 양측으로 곤두선 건물들에 수반된 공공미술작품으로

늘어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작품이 고추상의 작품이어서 결국 판단은 작품 제목에

많이 기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내린 결론은 역시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것.

제목 : 상징.

제목 : 평화를 추구하는 무등여인상.

제목 : 평화로운 나날.

제목 : 사랑.

제목 : 여심.

물론 금남로가 온통 광주의 기억으로 짓눌려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광주시내의 중심이니 박제된

역사적 공간으로만 남아있어서도 안 되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은 거다.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한복판이니.

다만 금남로공원처럼 이렇게 약간의 공간이라도 조성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아픈 사건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너무나 아무것도 안 남아있는 거다.

금남로4가 전철역 입구에 서있는 지방 무가지 신문박스. 신문은 하나도 안 들어있었다. 그것보다 눈에

거슬렸던 건 그 뒤에 저 싸구려스럽고 촌스런 노랑색 담장.

뭔가 봤더니 노란 바탕색에 돌멩이인 양 그려놓은 회색 얼룩이 얼룩덜룩한 얄포름한 합판을 억지로

세워둔거다. 차들이 지날 때 흔들흔들거리는 게 꽤나 위태해 보였는데, 가늘디 가는 쇠줄 하나가

억지로 그 담장형태의 싸구려 장애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작은 사거리에서 만난 경찰초소. 뒤로 쉼없이 지나는 버스와 택시들, 이 거리에서 100대가 넘는 대형차량들이

시위에 합세해서 도청을 향해 행진했던 그런 날, 저런 경찰초소를 온통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전진하던 그런

날, 어쩌면 그때가 한국 민주주의 정신이 도달했던 정점 아니었을까 싶어 우울해졌다.

금남로 지하상가에도 뭐가 있나 내려가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복작복작함,

지하상가 특유의 활기와 어수선함은 좋지만 왠지 괜히 아쉽다. 지상에도, 지하에도, 어디에도 그 사건은

기억할 만한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았나 보다. 괜히 화장실 사진이나 한번 찍고.

올라오는 길, 대피소 사인. 80년에는 지하상가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치는 않다. 그랬다면 더욱

끔찍한 참사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전경들, 군인들이 사람들을 토끼몰이하듯 쫓아다녔을테니.

제목 : 꿈(DREAM).

제목 : 추의 사념에서.

이렇게 조각들을 찍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 무렵. 지하철 환풍구에 누군가 페인트로

박아둔 글자가 눈에 확 띄었다. **반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반대한다는 표시, 그리고 저렇게

오래도록 남아 뜻을 전하려는 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다. 단순히 미감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두루뭉실한 조각상들을 보다가 눈에 확 꽂혀버린 두 글자. 반대.

제목 : 꿈의 나라로.

제목 : 삶(LIFE).

2011 광주비엔날레에서 채택된 시민 공모 디자인인 듯. 큐브 같기도 하고, 뭔가 이쁜 상자같기도 하고. 저런

공공 설치물에 미감을 더하는 건 대체로 맘에 든다. 물론 주변 경관이나 색감과의 조화라는 부분이라거나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부분도 따져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누비는 디자인'이란 건 긍정적인 거 같다.

제목 : 함께 부르는 노래.

어렴풋이, 꿈 대신 해몽인지도 모르지만, 광주의 역사적 기억에 그 영감이나 의도의 부스러기를 빚지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없진 않았지만 계속 아쉬운 와중이었다. 좀처럼 딱 깨놓고 여기가 그런 공간이었다,

말하고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기념물은 왜 없는 거지. 그러다가 인도 한복판에 굉장히 어색한 위치에

설치된 벤치 두개를 보았고, 벤치에 시선이 팔려서 못본 채 지나칠 뻔 하다가 겨우 발견.

'5.18 민중항쟁 사적 4'라는 잔뜩 녹슨 글자는 쉬이 읽히지도 않는다.


사적비의 뒷면. 숫자가 4라고 붙어있는 걸 보면 다른 것들이 더 있다는 얘긴데, 요새 지자체들 잘하는 것들을

왜 여기엔 적용하지 않나 모르겠다. 포스트마다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부스를 설치해 둔다거나, 사적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비치해 둔다거나. 사실 올레길이니 갈매길(부산)이니 바우길이니 온갖 걷기코스가

개발되고 있는 요즘에, 이런 사적들을 잇는 순례길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굉장히 차별화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80년 광주의 기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 같은데. 


제목 : ~~ 문.

그렇지만 현재 금남로는 커다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불명의, 오로지 거리 미화를 위한 듯한

조각들과 '부자되세요'라는 강력한 생활형 주문에 멈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미술 자체에 불만은

없고, 오히려 다른 거리에 비해 많은 미술작품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이런 거대한 역사적 공간을

그냥 묵히고 있는 게 안타까운 거다.


제목 : 풍경.

제목 : 묵시-전환기적 시점에 서 있던 이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문화전당역, 이라는 역명을 가리키는 버스정류장. 문화전당이라.

제목 : 5.18민주항쟁을 상징하는 기념조형.

제목을 까먹은 조형물 하나를 마지막으로, 짧막한 금남로 두어 블록의 산책이 끝났다. 길 양쪽을 온통

돌아보며 확연히 건물에 부속된 조형물을 빼고 길가쪽으로 설치된 작품들만 찍었는데 정말 꽤나 많다.

그리고, 광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은유가 확연한 작품은 정말 꽤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범상치 않게 보이던 시그널. 추억의 7080 충장축제라던가. 광주의 7080은, 흔히 티비에

나오는 추억의 7080쑈라느니 하면서 달달한 통기타 노래들을 공유하는 그런 게 가능할까. 단순히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그 시대의 부조리와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들이 종종 토로하듯 그 시대에

멋내고 통기타치고 고고장 다니는, 그런 문화만 있던 건 아니었던 게 분명한데 말이다. 마냥 축제인듯

아름답고 멋지게 빛바랜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 광주에서.


내가 감정과잉의 상태로 광주를 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괜히 하나하나 민감해져서, 광주에서 사는

생활인이라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이미지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외지인이라 해서, 실제로 그 고통을 겪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해서-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다는 훌륭한

핑계에도 불구하고-할 말을 못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금남로에서 80년 광주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단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기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군부독재의 총칼과 맞선 광주, 전남 애국시도민들이 자유와

헌정수호의 결의로 굳게 뭉쳐 민주의 대**를 걸고 도청 탈환의 처절한 피의 항쟁을 전개한 곳이다.

더러는 찔리고 더러는 *고 무자비한 신군부의 탱크와 총칼에 희생된 채 수많은 사상자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는 시산시해의 격전장을 이루었다. **하여 도청앞 광장 그날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민주**의

투쟁현장으로서 마침내 역사를 넘어 죽음을 넘어 새로이 부활하는 한국민주주의의 제1번지

'5.18 민주광장'으로 명명되었다."

대리석 위에 새겨진 글자조차 훼손되고 마모되어서 보이지도 않는 추모탑, 그조차도 전남 구도청을

칭칭 휘감은 장벽 안 쪽에 격리된 채 잡풀만 무성해 있었다. 5.18 민주광장의 의의가 채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뒷방 어딘가로

밀려난 채 녹슬고 잊혀지고 지워지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80년 광주, 대학교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본격적으로 접했던 그때의 그 사건,

그 처절했던 마지막 순간에 시민사수대가 지키던 옛 전남도청 청사. 최근 그 청사 건물이 너무 낡아

붕괴의 위험까지 있다고 하여 철거하자는 측과 보존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이 맞서고 실력행사까지

있었다던가. 결국 보수,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니 다행이지만 아직 문어대가리와 물태우가

살아있는 와중에 '인권', '민주주의'같은 가치에서 '문화'로 넘어가버리는 건 좀 걱정스럽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0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풀빛

 


전남도청에서 쭉 이어지는 금남로, 5월 21일의 계엄군 발포로 54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한 걸로

추정되는 피비린내 가득한 공간. 그렇게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시민 봉기가 무장항쟁으로

전환되어 광주는 22일부터 27일까지 짧지만 의미심장한 꼬뮌의 역사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27일 새벽,

최후의 시민군 14명이 희생되면서 도청을 빼앗기며 끝나버린 광주민주화항쟁. 그렇지만, 아무리 지금

보수공사 중이라곤 하지만, 7,8년전에 왔을 때도 그랬듯 참 남아있는 것들이 없다.

그래도 그때 왔을 때는 도청의 외벽에서 총탄의 흔적도 발견하고, 나름 비장한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일종의 민주화 성지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저 초현대적인 가림막이 치워지고 나서 다시 나타난 모습도

그런 아우라가 남아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컨테이너박스를 재활용해 만든 쿤스트할레 건물에

올라 바라본 도청, 근데 이거 도청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가리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 여기가 도청 건물의 정문이었다. 가림막 안쪽으로, 그 바깥의 공사현장을 구획한 높다란 장벽 너머로

보이는 하얀 색깔의 정문. 여기 어디선가 총탄 자국을 찾았던 거 같은데 아무리 망원렌즈로 땡겨서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 어디였더라...못 찾겠다. 도청 위에 내걸린 태극기만 힘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래, 80년만

해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었다.

"전남도청 본관. 1930년 건립. 이 건물은 관공서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던 시기에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와 시공 과정에 참여하여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건립

이후 70년 이상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 된 곳이며,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산 현장으로서

전남 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에 수직으로 나란히 3개의 창을 설치하고 창문

사이에는 코린트 양식을 단순화한 주두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당시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의장이다." 1930년에 건축되었는지는 몰랐다. 굉장히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셈이다. 


붉은 연꽃이 커다랗게 피어나 있는 도청 앞 분수대, 천천히 위아래로 일렁이는 꽃잎의 빛깔이 너무

선연하다. 뒤로 보이는 도청 건물이 언제 가림막을 벗고 새롭게 단장된 형태를 내보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와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민주화의 성지로, 80년 광주의 잊지말아야 할 상흔을 그대로 후세에

전달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교육할 산 현장으로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공사현장 곳곳에 섬처럼 격리되어 있는 조형물들, 광주의 사건과 그 정신을 기리고 있을

추모탑이니 조각이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사람들 앞에 풀어놓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다.







전주의 전동성당 앞 골목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발견한 간판 하나.

국수카페, 카페 이름이 그냥 국수인 걸까 아니면 국수도 팔고 커피도 파는 카페라는 걸까,

조금 당황스런 마음으로 몇 초간 하염없이 바라보던 간판이었다.


뭘까. 손님들이 한쪽에서 후루룩쩝쩝 하며 국수를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커피잔을,

이왕이면 앙증맞은 에스프레소잔을 손가락에 꼽은 채 그럴듯한 표정짓기 놀이중이란

그림은 좀 상상이 되지 않는데..뭘까나.




전주 한옥마을 근처로 비빔밥을 먹으러 가다가 문득 독특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돌담 너머 언뜻

비치는 기와지붕들이 느적느적대던 스카이라인 가운데 불쑥, 로켓처럼 하늘을 향해 온몸 뻗쳐있는

건물 하나. 그렇게 크지도 않은 건물이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끌리듯이 다가섰다. 이 아름다운 건물이 영화 '약속'에서 박신양과 전도연이 슬픈 결혼식을

올렸던 그 곳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전동성당'이란 이름의 유명한 건물이란 것도.

두 팔을 한껏 벌린 예수가 성당을 꼭 껴안을 듯 하다.

뭐랄까, 전문용어로는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했다는 이 성당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를 기리고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정문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틀 덕분에 뭔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길고도 멀어보이는 느낌이 든다. 마침 미사 중인지 성가를 부르는 소리가

문밖으로 메아리처럼 흘러나왔다.

내부는 사진촬영금지, 잠시 들어가 몸을 녹였다가 숨을 참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번 주말

날씨가 어찌나 춥던지, 서울에서 한참 남쪽에 있는 이곳도 서울처럼 춥기는 매한가지. 그치만

차 안에 앉아 볕을 쬐노라면, 혹은 실내 찻집에 앉아 밝은 양달을 내려보노라면 꽤나 따뜻해

보일만큼 햇살은 좋았다. 사진 속에서도, 그림자가 지고 잔설이 남은 곳 말고 햇살을 바로

쬐고 있는 곳들은 은근히 포근해보이기까지 하는 듯.

한바퀴 빙 둘러보는데 이거 은근 흥미로운 구조다. 정면에서 보면 평평한 구조물이 뾰족뾰족

탑을 이뤘고, 길쭉하게 뒤로 뻗은 몸통은 일정한 패턴으로 연장되며, 마지막으로는 둥글게

십자가를 모신 공간 배치까지.

그리고 어디에서 보던, 꽤나 멀리에서까지 분명히 식별할 수 있을 저 십자가와 세 개의 둥근 돔.

붉은 벽돌로 처음 지었을 때에는 반짝반짝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좀더 들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적당히 녹슬고 빛바랜 지금의 모습은 많이 부드럽고 현명해 보인달까. 굳이 비기자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뭔가 생기충만하고 의욕이 넘치는 모습, 저 안에서 기도를 하면 바로

푸슝! 하고 하늘로 힘차게 쏘아올려질 것 같은 그런 에너지가 있었을 거 같다면, 지금은 뭐랄까

저런 곳 안에서는 기도도 왠지 조심스럽고 온화하게 드릴 거 같다.

사제관인 듯한 옆 건물도 불그스름한 파스텔톤이 되어버린 벽돌들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식빵 모양처럼 뚫려있는 곳으로 바람이 거침없이 숭숭 들고 나면 실제로는 굉장히 추울 듯.

전주 한옥마을 옆에 바로 붙어있던 전동성당.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에게도 눈에 번쩍 띌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그 성당 안의 (촬영) 금지된 모습과 분위기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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