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로 가는 길은 한가지다. 제주 동쪽끝의 성산 일출봉, 성산포항에서 거의 한시간 간격으로 있는 카페리에

몸만 싣던, 아님 차도 싣던 해서 그 배를 타고 우도로. 승용차 기준 9대가 꽉 차는 카페리의 아가리가 닫히고

15분 정도만 바다 위를 달리면 우도가 나타난다.

2층의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는 선장님, 촘촘하게 나사를 박아 단단해 보이는 창문 너머 허브 화분이

눈에 띄어서 한장. 그리고 불과 3.8킬로미터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우도는 벌써부터 보이길래, 저 너머

길게 소가 물속에서 머리를 내민 모양으로 보이는 바로 우도다. 소牛 자를 써서 우도.

바다가 생각보다 많이 거칠었다. 듣고 보니 제주 서남쪽 모슬포항에서 출발하는 가파도행, 마라도행 배도

궂은 날씨로 뜨지 못했다던가. 저번에 왔을 때는 작은 섬이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제법 큰 섬이었다.

섬 해안도로만 따라 걸어도 17킬로미터, 약 천오백명이 사는 섬이라니.

우도는 해양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특별히 관리될 만큼 자연생태나 풍광이 빼어난 섬인데, 그런 풍경을

'우도팔경'이라고 이름붙여 놓았다. 제주에서 배타고 우도로 향하는 중에 보는 우도의 풍경, 앞선 사진의

그 모습도 그 중 하나. 그리고 천진항으로 입항해 우도봉으로 걸어올라가는 길의 너른 잔디밭도 팔경 중 하나.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게 우도등대공원,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릉의 꼭대기가 우도봉. 132미터밖에

안되는 높이이긴 하지만, 거칠것 없이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대는 탓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 가족들과의 대화도 목소리를 키워서 해야 했다.

우도의 소 형상, 그중에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섬머리'라고 불린다는 부분이 바로 여기니깐,

말하자면 소 머리를 기어오르는 길인 셈이다.

방금 배타고 도착했던 천진항이 저만큼 내려다 보였다. 우도엔 천진항과 하우목동항, 이렇게 두 개의 항구가

있는데 대부분의 배가 왕래하는 곳은 천진항. 그 너머 보이는 게 제주도 본섬이니 날씨가 좋아 저 구름이

다 걷히는 때면 한라산도 보이지 않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우도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의 저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모양새. 중후한 독일제 세단을 보는 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계속해서 소머리를 밟고 올라가는 길. 키작은 잔디가 촘촘하게 자라나 푹신하게 밟히는 느낌이 참 좋다.

섬 바깥쪽으로는 무너지는 곳도 있고 지반이 약한 곳도 있다 하여 이렇게 넉넉하게 울타리를 둘러놓고는

'넘어가지 마세요'라고 안내판도 붙여두었지만, 장난스런 누군가가 두 글자를 지워 의미를 뒤집어버렸다.

사람들이 밟지 않는 쪽 풀떼기들은 뭐가 저리도 무성한지, 먼바다 파도처럼 넘실넘실.


우도봉 정상..이라기엔 좀 뭐한 높이지만, 그래도 속이 탁 트이도록 시원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높이다.

싱싱한 초록색의 잔디가 곱게 깔려있던 구불구불한 길이 울타리의 인도를 받았고, 그 너머로는 짙푸른

담청색의 바다가 제주도와 우도를 갈라놓았다. 머리가 사방으로 봉두난발처럼 뻗쳐나가게 희롱하던

바람의 위력이란. 저 풀떼기들이 여자들 싸울 때 머리끄뎅이 잡아뽑히듯이 전부 뽑혀 훌훌 날려갈 기세.

울타리쪽으로 고무깔판을 깔아두어 미끄럼을 방지한 길 대신, 잔디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듬성듬성 야트막한 산처럼 쌓인 말들의 '생의 흔적'을 만났고, 그 중 한 곳에서는 질펀하게

싸제껴진 똥덩어리 사이로 노랑색 꽃을 피워낸 민들레를 발견했다. 저것이 양분이 되어 꽃을 틔웠다기엔

시간차가 좀 있는 거 같고, 이제라도 더욱 선명하고 이쁜 노랑색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제주도식 무덤은 꼭 이렇게 봉분 주변을 돌울타리로 한번 치는 게 상례라고 했다. 소나 말, 혹은 다른 동물이

행여 봉분을 훼손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라는데 보통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올려 울타리를 치더니 여긴

시멘트로 아예 발라버린 거 같다. 천오백명이나 산다더니 정말, 이쪽의 양지바른 곳에 묘지가 잔뜩 모인 게

거의 공동묘지 분위기였다. 야트막한 언덕이 온통 올록볼록 엠보싱.

잔디밭 한가운데 시멘트로 엑스(X)자 모양을 만들어둔 헬기 이착륙장을 지나, 우도봉 뒤로 일찌감치

봐두었던 우도등대공원으로 걸었다. 정신없이 불어제끼는 바람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발길을 돌려 우도의 해안으로 가는 거 같았지만, 저번에 여기 왔을 때 꽤나 멋졌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굳이 걸어올라갔다. 사실 얼마 멀지도 않고.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는지 길 한복판에 둥둥 떠서 멈춰있던 잠자리에 깜짝 놀랬다. 날아가는 모습 그대로

공중에 멈춰 있다니, 자세히 보니 길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이어진 커다란 거미줄에 걸려서 이미

적잖은 시간 비바람에 시달린 듯 하다.

거미줄을 피해 조심조심 오르는 길, 나무 데크로 잘 정돈된 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나라나 세계의 주요 등대들

모형이 차례로 만나게 된다. 마라도니 독도니, 우리나라의 주요 뱃길을 비추는 등대들도 그렇고, 뉴욕의

허드슨강을 지키던 등대니 뭐니, 이것저것 훑어보다 보면 어느새 공원의 끝, 우도 등대에 다다르는 거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실제로 쓰였다는 우도 등대. 그리 높진 않지만 단단하고 든든해보이는 체구의 하얀 등대다.

아래부터 위까지 스캐닝하듯 쭉 훑어보다가 발견한 저 풍향계, 그리고 꽃술처럼 풍성하게 벌어진 피뢰침.

풍향계에 그려진 N, E, W, S가 뚜렷하다. 그러고 보니 동서남북의 사방을 가리키는 영어 첫자를 따서 어케

잘 조합하면 뉴스(NEWS)가 되는구나. 뜬금없는 생각에 괜시리 감탄 한번.

그래도 역시, 더이상 쓰이지 않고 사람들이 드나들지도 않으며 비바람에 씻겨갈 뿐인 건물이란 건 왠지 슬프다.

문에 걸린 채 붉은 녹물만 주룩주룩 흘려대는 자물쇠 몇 개가 앙상하게 부식된 껍데기를 떨구고 있었다.


우도등대 앞에 서서 내려다본 우도의 마을 풍경. 시퍼렇다 못해 시꺼먼 바다가 해안에 다가와선 시퍼런 거품을

만들며 시위 중이었다. 그리고 울타리 틈틈마다 거미줄을 만들며 삶을 이어가는 거미. 샛노랗고 까뭇한 색의

대비가 바다보다 화려했다.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된 하얗고 조그만 등대 대신 그 뒤에 버티고 선 등대전시관의 등대가 새로 작동하고

있다고 했던가. '에어콘 가동중'이란 안내에 낚여 뛰쳐들어갔다가 전혀 냉기 따위 없다는 걸 직감하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뛰쳐나오느라 이 건물 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바람은 강했지만 바닷가이다 보니 습하고

소금기 꿉꿉한 기분까지는 어쩔 수 없어서 에어컨으로 좀 말리고 싶었단 말이다.(버럭!)


우도를 지키는 해안경비단을 지나 다시 내려오는 길. 아까는 나무데크가 잘 정돈된 길로 올라가며 등대공원의

여러 전시품들을 둘러봤었고, 이번엔 완만한 내리막길로 걸어내려오며 바다 너머 제주도의 구름 가리운

풍경과 (무엇보다) 발밑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다시 우도의 너른 초원을 걸어내려가는 길, 옆에서 이리저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이 있고 1박2일팀이

와서 말을 타고 갔다는 광고가 내걸려있다. 가족 중의 누구 한번 타보라는 권유에 선뜻 앞으로 나선 동생,

요새 승마를 좀 연습했으니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기대.

종아리를 다 덮는 기다란 장화를 신고는 아저씨에 이끌려 초원으로 향했다. 조금 걷다가, 이내 머리가 날리도록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제법 멋지다. 쏜살같이 내달려 어느새 손톱만한 사이즈로 변해버린 두마리 말을 좇아

카메라를 이리저리 들이대야 했다. 말을 배우려면 이렇게 풍경 멋진 데서 오르막 내리막을 모두 경험하며

배워야 한다고 아저씨가 코웃음쳤다던가.


차를 주차해둔 쪽으로 걷던 중에 우도의 명물 땅콩을 파는 아주머니들 옆으로 망아지 한 마리가 휘적휘적

유유히 걸어다닌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그저 제 갈길 간다는 태도. 그 옆에는

망아지 갈기와 땅콩 껍질을 소용돌이치듯 갈퀴질하는 거센 바닷바람에 날려 뒤집혀버린 하얀 의자가 적나라하니

나뒹굴고 있었다.

서빈백사. 우도의 서쪽 바닷가에 하얀 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에 있는 모래는 온통 하얗게 반짝거렸다.

하얀 산호와 조개껍데기들이 깨지고 부서져서 바닷가에 쌓인 게 이 모래 아닌 백사장의 정체라고 하는데,

우도팔경 중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발로 밟으며 걷기엔 조금 아픈 감도 있는 게 아직 산호나

조개껍데기가 모래알처럼 작게 깨지거나 고와지지 않고, 나름의 형체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산호가 풍화되어 생겨난 하얀 백사장은 우리나라에서 여기 딱 한 군데라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독특한 풍경 속에서, 맨발벗은 발을 따꼼따꼼 찌르는 아픔 속에서도 천막에 앉아 해삼과

멍게, 그리고 우도 특산물이라는 '톳'을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다른 해산물들도 다들 싱싱하고 맛났지만

특히 이곳에서 처음 맛본 톳은 싱싱하고 탱글거려서 제일 먼저 없어져버렸다는.

무려 3미터짜리, 3톤이 넘는다는 해녀상이 서 있던 하고수동 해수욕장. 세계 최대의 해녀상은 1932년 3개월동안

1만 7천여명의 해녀가 항일 항쟁을 벌였던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데, 당시 해녀가를 지어 불렀던

해녀가 우도 출신이었기에 여기 이런 거대한 해녀상이 선 거라고 한다. 
 

그 앞에는 또 하나의 해녀상이 서 있었는데 그 유래는 전혀 모르겠고, 시선이 계속 쏠리는 건 그 상들 너머

에메랄드빛 바다. 자잘하게 부서진 파도가 잔잔하게 이는 그 깊고 투명한 색감의 바다가 멋지다.

어라, 제주도에 비양도는 북서쪽 금능해수욕장 맞은 편 아니었던가. 알고 보니 여기도 비양도라는 같은 이름을

쓰는 섬이 하나 우도랑 연결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섬이고 우도랑 붙어 있어서 그냥 시멘트길이 넓게 이어져

차를 타고도 쉽게 한바퀴 돌아보고 나올 수 있었는데, 섬 앞머리 표식이 인상적이다. 온통 조개 껍데기를

탑처럼 쌓아올린 표식 바깥에 촘촘히 붙여놓아서, 멀리서 보면 새하얗게 반짝거리던 것.

우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검멀레 모래사장 앞 '동안경굴'. 검멀레는 왠지 발음부터 연상되더니

역시, 검은 모래를 가리키는 제주도말이라 하고, 그 앞의 동굴까지 사람들이 내려가 볼 수 있는 거다. 이 동굴에

옛날엔 커다란 고래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데 그 앞의 깊고 짙푸른 바다를 보면 왠지 상상이 되었다.

동안경굴, 우도팔경 중의 하나였던 그 동굴 위로 뻗은 산책로 앞에 있던 제주도 전통 대문인 '정낭'의 나뭇살

세개가 모두 구멍에 끼어져 있다. 주인이 멀리 출타 중이란 의미를 남길 때 저렇게 세 개를 모두 구멍에

끼어놓는다고 했는데, 산책로를 당분간 폐쇄한다는 안내판에 꼭 맞는 의미심장한 표식인 셈이다.


* 참고로, 제주도 전통 대문인 '정낭'의 표식에 대한 의미 정리. (네이버 지식인 참조)
 
ㅇ 나무가 한 개도 걸쳐 있지 않을 경우 : 집안에 사람이 있음

ㅇ 나무가 한 개 걸쳐져 있는 경우 : 가까운 곳(이웃집 등)에 잠시 나가 있음

ㅇ 나무가 두 개 걸쳐져 있는 경우 : 이웃 마을 등에 갔음

ㅇ 나무가 세 개 모두 걸쳐져 있는 경우 :  멀리 출타중임


동생과 내가 각자 직장을 다니다 보니 부모님이랑 3박4일 가족여행을 맞춰 떠나기도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부모님과 동생은
3박4일, 난 마지막 하루 일정을 빠지고 2박3일만 함께 했던

오랜만의 가족여행이었다. 렌트카를 빌려서 돌아다니는 기동성있는 여행일정으로 참고삼아

제주시와 동부를 아우른 2박3일, 그리고 제주 서남부를 포함한 3박4일 스케줄을 기록.



첫째날. 한라산 등반


06:50 김포 출발

08:00 제주 도착 - 렌트카 픽업, 점심거리 구매

08:30 제주공항 출발

09:20 성판악 도착, 등산 시작

13:00 백록담 도착

13:30 백록담 출발
18:00 관음사 도착

19:00 숙소(제주시) 도착, 저녁식사

21:00 해안도로 까페촌



둘째날. 제주 동북부


08:30 숙소 출발

09:30 다희연 도착

12:00 산굼부리 도착


13:30 점심 (말고기)


14:30 제주미니랜드 도착


16:00 사려니숲길 도착 (불어난 계곡으로 인해 출입금지)

16:30 김녕미로공원 도착


18:30 삼양검은모래해변 도착


20:00 저녁 (붉은못허브팜 빅버거) take-out


20:30 숙소(제주시) 도착



셋째날. 제주 동부


07:30 숙소 출발

08:40 성산포항 도착

09:00 우도행  카페리 출발(15분 소요)

09:15 우도 - 우도봉, 우도등대공원, 서빈백사, 하고수동해수욕장, 비양도, 동안경굴


11:30 성산포행 카페리 출발(15분 소요)

11:45 성산포항 도착

13:00 제주시 진입, 점심 (전복뚝배기)

14:00 제주민속5일장 (2/7일 개장)


15:30 제주공항 도착




(남은 일정)


쇠소깍

쉬리의 언덕

내국인면세점(10-21시 운영)

숙소(모슬포) 도착, 저녁식사


* 넷째날. 제주 서남부

제주조각공원

화순해수욕장, 용머리해안

초콜렛박물관

생각하는 정원

유리의성

금능해수욕장-애월항 해안도로 드라이브





짧은 제주 일정의 마지막 경유지는 바로, 성산 일출봉. 대학교 일학년 때 친구들과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할 때

멀리서부터 그 봉우리를 보고는 다들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이번에는 일출봉 바라보고

가던 길에 배가 고파 살짝 무슨무슨 맛집, 어디 프로그램 소개 맛집, 요런 데 들러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앞에 무질서하게 쌓아올려진 듯 보이는 돌담, 바람이 숭숭 잘도 통하게 쌓아놨다.

매표소 옆의 계랸색 매점 건물을 지나 눈을 높이면, 웅장한 맛을 풍기는 일출봉이 우뚝하다.

제주 지역방송들이 방송 중간중간에 간지 끼워넣듯 껴넣는 이미지, 성산 일출봉에 해뜨는 모습이라지만 사실 여기서

해뜨는 건 번번이 못 보고 지나갔었다. 가족들과 어렸을 적 왔을 때는 아예 요앞에서 묵으며 해를 기다렸는데 날이

흐려서 못 봤었고, 다른 날은 여기에서 일출이나 일몰을 기다릴 타이밍이 되지 못했더랬다.

성산봉 오르는 길목, 초록빛 싱그러운 초원 위에는 잘 생긴 갈색 말 몇 마리가 묶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제주도를 돌다 보면 드문드문 승마 초보자 환영, 말타볼 수 있는 곳, 이런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초원 같은 평지, 살풋 각도가 느껴지는 평지를 지나 본격적으로 등산 시작. 일출봉 어귀에 있던 매점에는 중국어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샨샹메이요우슈웨이~. 일출봉 오른 후엔 물 파는 데가 없으니 여기서 사란 얘기.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은 눈에 참 많이 띈다.

일출봉 가는 길이 그때도 이렇게 잘 닦여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고 힘들지도 않은 코스, 지레 겁먹었던 동생님도 어느새 생기발랄해졌다. 왕복 50분이면 넉넉히 보고 돌아올 듯.

일출봉에 올라서서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데, 좀 곤란하다. 커다란 분화구 모양의 일출봉. 사진을 찍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허용치 않은 채 나와 방문자들을 덥썩 안아 버렸다. 제법 까끌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초록빛

커버가 분화구를 매끈하게 메우고 있었다. 현무암에 잔뜩 슬어있던 이끼같기도 하고, 스프 위에 좀 과하게 뿌려놓은

아스파라거스 가루 같기도 하다.
 
안개 자욱한 분화구 너머 마을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분화구의 오톨도톨한 가장자리가 험준한 산의 능선이나

백두대간처럼 쭉 이어진 산맥처럼 보인다. 파도치듯 쉼없이 달려나가는 백두대간의 미니어쳐랄까. 아님 우유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우윳방울이 낙하한 직후의 왕관같은 흔적과도 흡사하다. 천분의 일초 쯤으로 찍어올린 장면,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정상에서 굽어본 중간 쉼터. 사람들이 조그만 게 개미같고, 나무들은 딴딴하고 속이 찰진 파슬리나 브로콜리 같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저건 호수인 척 하는 바다일까. 그러고 보니 이날 날씨가 하루종일 흐린 편이었기에

더위도 덜했고, 땀도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바람이 찍혀 나온 사진.

성산 일출봉에 올라 사람들이 밟을 수 있는 영역이란 딱 여기까지다. 울타리가 설치된 구간은, 커다란 분화구의

오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의 공간만 확보해 주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름

최선의 뷰를 잡아보려 애쓰지만, 어쩌면 이 곳의 풍광을 오롯이 감상하려면 열기구나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맨눈보다도 못한 카메라로는 눈으로 감상하는 풍경의 절반도 담지 못하겠더라. 적어도 나는.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니 내게 남아있던 일출봉의 이미지란 단지 그 뾰족한 화구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푹신해보이도록 깔려있는 녹색의 잔디밭, 언덕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그 너머에서

산산이 부서져 있는 햇살, 그 햇살이 둥둥 표류하는 바다.

어라, 한쪽에는 모터보트 선착장도 생겼나보다. 이런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계속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굳이

대조해보게 되는 건 왤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려고 애쓰면서도, 막상 쉽지 않다. 어쨌거나, 혹시

모터보트 추격신이 필요하거나 해안 총격장면을 찍어야 하는 감독이라면 한번 추천해주고 싶긴 하다.

내려오는 길 어딘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듬어진 돌계단길을 버리고 잔디밭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보폭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계단인지라 계속 왼쪽 다리로 계단을 내려서게 되거나, 혹은 반발짝을 마저 걸어야 하는

등 좀 불편하고 힘들었다. 푹신푹신, 경사가 제법 되는 길인데도 사방을 둘러보며 걸을 여유가 생겼다. 덩달아

여유로와보이는 저너머 '노인과 말'.

늘 생각하지만 제주도에 가서 성산 일출봉은 왠만함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봉우리 하나

등산하듯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그 봉우리 앞에 쫙 펼쳐져 있는 이런 풍경들, 이렇게 이쁜 길들, 그것들은

'성산 일출봉'이란 이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공간들이지 싶다. 일출봉이 덮고 있는 무릎깔개처럼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 보들보들하고 싱싱한 녹색.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구경갔던 골프장의

인공조경과 비견할 만한 굴곡에 녹색이다.


일단 올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기는 여기서 끝~*


제주#1. 제주올레 7코스, 외돌개를 끼고 걷기 시작하다.
제주#2. 꽃길, 찻길, 논두렁길, 바닷가길을 넘어 건너.
제주#3. 철조망에서 자유로운 제주도의 해안..?
제주#4. 남/녀 노천탕에 사람은 없고 조개껍데기만.
제주#5. 올레길 7코스의 바닷가 우체국.
제주#6. 강정포구 가는 길(올레길 7코스)
제주#7. 올레길 7코스 vs 해군기지.
제주#8. 월평포구에서 끝난 올레길 7코스.
제주#9. '업'에서 나왔던 커다란 새를 찾아내다.(아프리카 박물관)
제주#10. 오설록녹차박물관에서 '현미녹차'를 생각하다.
제주#11. '식상한' 천지연보다 '제주감귤와인'이 궁금했다.
제주#12. 이름이 왜 5.16도로일까.
제주#13. 숲다운 숲, 비자림 거닐며 산림욕 한번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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