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캠퍼스 너머 남산N타워가 올려다보이는 장충단공원에 다다른 짧은 가을 풍경.

 

돌로 만들어진 석교 위로 사뿐사뿐 떨궈지는 색색의 낙엽을 즈려밟고 가을이 줄달음질치는 중이다.

 

 공원 한쪽에는 가을빛을 머금은 맑고 차가운 개울이 흐르고, 그 위로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이 한겹 깔렸다.

 

새파란 하늘, 바삭바삭 익어가는 가을 낙엽들.

 

 

곳곳의 벤치에서 따끈한 가을볕에 몸을 덥히며 여유로운 시선으로 가을 풍경을 만끽하던 사람들,

 

장충단공원의 가을이다.

 

 

 

 

 

 

서울숲, 어디고 슬쩍 돗자리를 벌여놓고 철푸덕 앉아 있노라면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두텁한 공기 가득한 차 속에 낑겨오느라 톡톡 돋았던 땀방울이 어느결에 싹 사라져버린 어느 가을날.

 

 

하늘도 파랗고, 사방으로 구비구비 굽은 나무들도 짙푸르다 못해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누래지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아이를 한 팔에 안고 유모차를 다른 한 손으로 밀던 부모들이 우르르 다녀간 놀이터.

 

김밥 한 줄 싸들고 떠나는 '소풍'이란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아무래도 가을만한 계절이 없다.

 

 

 

 

 

 

 

싱겁게도 길게만 자라난 잔디 잎새들은 초록빛을 잔뜩 머금었고,

 

어느새 노랗게 바래버린 채 툭 떨궈진 잎새 하나를 품을 만큼은 속이 깊어졌나 보다.

 

 

누군가의 상처입은 사랑이 노랗게 곪은 채 저렇게 툭. 떨어지는 계절, 가을.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저런 엉성한 잔디 쿠션이나마 함께하기를.

 

 

 

@ 무악재 안산.

 

 

 

 

의왕 오메기저수지, 딱 육개월 전 쯤에 백운산을 가려다가 잠시 들러서 저수지 옆의 개울에서 잔뜩 놀았던 곳이다.

이제 가을 끄트머리가 되어 다시 찾아보니 분위기가 한결 스산하다.

( 백운산 아랫도리를 적시는 개울에 찾아든 신록. )

솔잎이 가지 끄트머리고 나무둥치고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비죽비죽 솟아나온 듯한, 그래서 소담하게 이파리가

모이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헐벗은 듯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하얀 가을달이 빛나고 있었다.

낙엽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고 뾰족하게 헐벗은 잔가지만 삐죽거리며 내밀고 있는 나무들, 문득 둥그렇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을 그림자가 나뭇잎처럼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에 하얀 달. 파란 물감이 잔뜩 칠해진 하늘에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져 번진 것만 같다. 아직 끈질기게

잔가지를 붙잡고 있는 이파리가 꽤나 신산하고 지친 표정이지만 그래도 테두리에 둘린 톱니의 날카로움은 아직

살아있어 보여 다행이다.


 그리고 저수지, 흑백영화처럼 지지직거리는 수면 위에서 앙상하게 마른 나무 두그루가 부서지고 있었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한번 걸어보려는데 자꾸 길을 막아서는 건 쓰러진 나무, 뿌리만 남아 독하고 질겨진 잡초,

깨진 시멘트 틈새를 살짝 덮은 낙엽들의 훼이크..


사람 키높이만큼 자란 이 풀떼기 사이에서는 계속 뭔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사람 하나 없이 점점

어둑해지는 주변 풍경에 더불어 다소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냥 새들이거나 들짐승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없이 풀이 밟히고 쓰러지는 소리만 단속적으로 들리는 상황은 아무래도 상상력을

이상한 쪽으로 자극하는 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던 듯.

그래서 급, 저수지를 떠나기로 맘먹고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빠져 나왔다.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이미 푸른 빛을 잃고 거무튀튀한 심란한 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세상을 덮을 듯한 그물망이 촘촘히 내려앉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하루 가을방학을 내어주고 대부도 즈음에 풀어두었다. 어느 꼬부랑길을 앞에 둔

차도변에서 문득 마주한 교통표지판 하나를 보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표지판 아래

하늘거리는 갈대와 저 너머 헐벗은 나무 한 그루. 급커브길을 조심하라는 진지하고 열띤 낯빛의

표지판이 문득 푸근하고 너그러운 홍조를 띈 표정으로 바뀌며 가을에게 말해 준다.


조금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떠날 필요 없다구요.

시화호갈대습지를 걷다가 만난 새빨간 열매들, 잎 한장 걸치지 않은 야트막하고 얄포름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뭔가 풍선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으로 탱글거리는 열매들이 직선으로 쭉쭉 뻗고

날카로운, 그래서 조금은 거칠고 외로워 보이는 나무가지들을 사방에서 보듬어주는 것 같다.

벌레먹고 찢어진 나뭇잎이 한 장, 덩그마니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이 짠하다. 마침

오늘 수능을 치고 지난 12년의 교과과정을 한 큐에 검증받아야 하는 안쓰럽고 대견한 학생들을

볼 때 같은 느낌이랄까. 고생했어요, 토닥토닥 해주고 싶은 나뭇잎.

까치밥을 남겼구나,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감나무 한 그루에 딱 한 개 감을 남겨두었던 거다.

철벽수비라도 펼치듯 온통 하늘로 손을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얼기설기 보이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파란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감빛 덩어리 하나.

국화일까, 무슨 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새 같은 쌀쌀한 날씨에 더해 황해의 바닷바람까지

버텨내며 이렇게 탐스런 꽃을 피워냈다는 게 대단하다. 화려한 색감이 남국의 뜨거운 태양을

연상시키면서도 어딘지 가을의 스산함을 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인류는 긴 겨울을 대비해 태양 에너지를 비축하는 중. 무청을 빨랫줄에 잔뜩

널어두고 햇빛을 충전하고 있다. 축축 늘어진 채 아삭하고 풋풋한 생기 대신 햇빛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차곡차곡 쟁여두는, 가을이다.





@ 서울대공원, '가을방학'의 '가을방학'이란 노래가 떠올랐던 낙엽길에서.



넌 어렸을 때부터 가을이 좋았었다고 말했지
여름도 겨울도 넌 싫었고
봄날이란 녀석도 도무지 네 맘 같진 않았었다며
하지만 가을만 방학이 없어
그게 너무 이상했었다며
어린 맘에 분했었다며 웃었지

넌 어렸을 때부터 네 인생은
절대 네가 좋아하는 걸 준 적이 없다고 했지
정말 좋아하게 됐을 때는
그것보다 더 아끼는 걸 버려야 했다고 했지
떠나야 했다고 했지

넌 어렸을 때만큼 가을이 좋진 않다고 말했지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 싶다며
하지만 이맘때 하늘을 보며 그냥 멍하니 보고 있으면
왠지 좋은 날들이 올 것만 같아

처음 봤을 때부터 내 마음은
절대 너를 울리는 일 따윈 없게 하고 싶었어
정말 좋아하게 되었기에
절대 너를 버리는 일 따윈 없게 하고 싶었어

너무나도 늦어 모든 것들이

넌 익숙하다 했지 네 인생은
절대 네가 좋아하는 걸 준 적이 없다고 했지
정말 좋아하게 됐을 때는
그것보다 더 아끼는 걸 버려야 했다고 했지
떠나야 헀다고 했지
누굴까, 이렇게 여행 가방에 탑을 쌓아올리듯 옷가지들을 소복하니 쌓아두곤 뚜껑도 안 닫고 떠나버린 사람은.

헤이리에 차를 대고 나서 룰루랄라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저 이쁘장한 분홍빛 클래식한 여행가방을 발견했다.


쏴아~ 하고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그 바람에 괜시리 마음흔들다 나부끼는 낙엽들의 춤사위도, 그리고 문득

서늘해진 가슴도, 점점이 하얀 빛이 새어드는 파랑 하늘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가을이다.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차로 돌아오니 가방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왠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맛좀 보라지, 하는 표정으로 다짜고짜 여행가방을 싸짊어지고 여행을 떠나는 '불평분자' 아닐까 상상을 잠시.

머릿속에서 탁, 여행가방이 단호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현실은...여행이 아니라 출장을 준비하고 있다능.)


@ 헤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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