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타타워 위에 올라가니 이스탄불이 온통 발 아래에 펼쳐졌다. 밖에서 올려보며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높은 느낌, 아무래도 탑 자체의 높이에 더해 언덕의 높이만큼 올라선 셈이라 그런 듯하다.

갈라타항에 정박해 있는 호화 크루즈선. 유럽에서부터 관광객들을 뭉텅뭉텅 실어나르는 배라고.

갈라타 대교 너머 왼쪽서부터 성 소피아 박물관, 블루모스크, 그리고 예니사원까지. 기도빨 충전되길

기다리며 장전 중인 수 기의 미사일 미나렛들을 품고 있다.

바닷가, 항만에 빼곡하게 들이차 있는 크고 작은 배들, 도시 한 가운데를 바다가 가로질러 각각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속한 지역으로 갈라놓는단 건 정말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스탄불의

그 마력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건 이렇게 바다를 품고서 세 대륙의 기운을 마구 끌어들여서 아닐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구 시가의 골목은 시원시원하게 규칙적으로 종횡하는 게 아니라 툭툭

중간에 막히고 꺽이고 비틀비틀, 갈지자로 건물 사이를 감아돌아간다. 건물들 모양새 역시 꽤나

독특해서 오각형, 육각형 건물이 심심치 않게 보이던 거다.

그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반듯한 골목 하나.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이 그저 지붕의 붉은 빛을

대충 공유할 뿐인 건물이 좌우로 시립한 채 반듯한 골목을 하나 만들어내고 지키고 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였지만 갈라타 대교 위에서 낚시도 하고 노니는 사람들이 보이는 거 같다.

하늘도, 건물도, 바다도 모두 축축하게 젖은 진회색, 그 와중에 부드럽게 번지는 붉은 지붕.

갈라타 타워 위, 둥그렇게 이어지는 테라스는 사람 하나 넉넉히 지나다닐 만한 폭이었는지라

뱅글뱅글 앞사람 꼬리를 물며 테라스를 한바퀴 도는 게 순례자의 길 같기도.








@ 터키, 이스탄불.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는 멀고 먼 출퇴근길을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책 볼 시간을 벌고 있다 했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지 삼년째인 친구는 올해 첨으로 유럽여행을 해봤다고 했다.


내가 못 가본 길들,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하여 닫혀버렸던 길들, 그런 다른 이들의 현재가

지금 나의 현재를 위로하고 긍정하는 발디딤판으로 쓰인다면 굉장히도 이기적이고 치졸한 짓.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현재와 나의 현재가 그닥 어느 한 편의 승리라 이야기함직한 것도 아니고,

난 책으로 둘러싸인 그의 환경과 쉼없는 지적 자극으로 활기찰 그의 환경이 부럽긴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현재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진 않다. 앞으로야 모르겠지만서도.

깜빡깜빡 위성 신호를 놓치는 DMB를 퍽퍽 치대며 잠깨우듯 그렇게 우선 내 정신부터 차릴 일.







@ 주펀, 타이완.


늘 여행에 나설 떄마다 부딪히고 마는, 걷지 못한 길,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선 외려 다른 마음이 욱씬거렸었다. 그것은 지나온 길에 대한 미련.

인파의 흐름을 거꾸로 역주행을 할지라도 다시 한번 되짚어 돌이키고 싶었던 순간, 장소, 기억들.


그래서, 골목길 아래 황금박물관의 간판이 반짝거리고, 그 너머 퍼렁 불빛이 잉크 번져나가듯

일렁이는 낯선 마을이 있었지만 굳이 골목길을 헤집고 들어가지 않았댔다. 모든 골목들을 전부

샅샅이 열어보려는 건 애초 욕심이었다.





햇살이 반짝거리며 하얀 종이 위에서 튕겨나던 날, 포스트잍이 바람에 치마처럼 나부끼던 날.

상하이의 허름한 뒷골목 분식집을 찾았다. 6위안짜리 라면을 시키고 끄적끄적.

막다른 골목으로 간소한 테이블과 의자가 깔려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집에선 6위안, 7위안짜리 메뉴로 점심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직은 점심먹기엔 조금 이른 11시.

막다른 골목이라긴 어폐가 있겠다. 어느 허름한 아파트의 정문이었나보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문한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인데 오토바이며 자전거가 쉴새없이 눈앞을 지나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 아 그러고 보니 상하이 사람들은 빨래를 전부 창밖에 널어두고 말리는 것 같았다.

워낙 바람이 많은 동네라 쉽게 마르는 듯. 잔뜩 우그러들고 꼬질한 양은 다라이가 모자처럼 씌워졌다.

라면, 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이나 한국에서 먹는 그 '라면'과는 다르다. 고작 6위안이니 대충 천원 정도일 텐데

상하이에 와서 그때까지 먹었던 이런저런 것들보다 맛있었다. 면도 쫄깃쫄깃, 중국산 밀가루가 실은 굉장히

좋다더니 정말 그런 거 같고, 비누냄새 나는 쏙(이던가..)의 미묘한 향기도 국물이랑 잘 어울렸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인사동 피맛골 골목통에서 올려다보는 종로 거리처럼, 상하이의 고층건물들이 뒷골목의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들이차기 시작하는 테이블들.

음식 맛이 이런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호텔이나 고급 음식점의 화려하고 깔끔한 분위기와 데코레이션,

서비스 따위와 함께 나오는 음식과는 정반대의 맛, 정반대의 분위기.

바스락대는 얄포름한 비닐봉지 위로 햇살이 하얗게 내려앉으니 눈부시게 하얀 꽃다발같다.

순식간에 6위안짜리 라면을 국물까지 싹 먹어치우고는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일어섰더니 아까 골목에 들어설 땐

미처 보지 못했던 행상이 하나 더 섰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프랑스의 크레페 만드는 거랑 거의 비슷하게

계란푼 반죽을 둥그렇게 펴고는 속을 얹어서는 요리조리 접어서 건넨다. 크레페랑 다른 점은 그 속이 초코나

시럽, 설탕이 아니라 파니 숙주니 고기니 뭐, 그런 것들이란 점 정도?

그리고 저런 소세지도 들어간다. 사진만 찍기 미안해서 하나 사먹으려다가 잔돈이 없어서 못 사먹었다. 이렇게

혼자 나와서 조금이라도 돌아볼 시간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환전도 안 했었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골목 안 분식집과 행상들이 섰다. 몇 걸음 골목밖으로 나서니 또 다른 세상. 방금까지 살짝

지치고 낡고 남루해보이더니 다시 여느 대도시의 풍경으로 돌아서 있었다.




#1.

두바이, 카이로, 리야드를 거쳐 쿠웨이트시티까지. 비행기를 타면 왠지 인류가 뭔가 대단한 존재에 이르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없이 준엄하게 흐르는 시간과 무려 '경쟁'이라도 하듯 달음박질치는 수준인 게다.

덕분에 첫날은 저녁 먹고, 아침 먹고, 점심 먹고, 밥 먹고, 밥 먹고, 다시 저녁을 먹었다. 하루 세 끼-아침, 점심,

저녁-을 챙겨먹는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개념으로는 좀체 하루에 여섯 끼를 먹는다는 것, 그리고 해뜨고

눈뜨고 해지고 다시 눈감을 때까지의 기간이 24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도무지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간차이는 (머릿속으로야) 이해한다지만, 대체 비행기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다는 건가. 손목시계는 여전히 1초를 1초만에 째깍째깍 새기며 돌아가는데, 어쩌면 비행기 안에서는 1초를

사실 2.4초쯤, 아니면 0.5초쯤으로 새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분은 약해서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다.


#2.

피곤한 일정 탓에 비행기만 타면 최대한 엉덩이를 의자 가장자리로 위태하게 내몰고는 몸을 쭉뻗어 침대인양

스스로를 속이고 잠들어보려 애쓰는데, 좀체 쉽지가 않다. 일단 대체 언제쯤 올지 가늠할 수 없는 타이밍에

쳐들어오는 기내식 냄새. 파블로프의 개처럼, 냄새가 비행기 안을 꽉 채우면 배가 고파지고, 혹은 배가 고프단

걸 깨닫게 되고, 번쩍 잠에서 깨어 기계적으로 포장을 뜯고 포크질을 하기 시작한다.

오른켠 사람의 팔꿈치에 방해받고 왼켠 사람의 옆구리를 질러가면서 꾸역꾸역 밥을 먹다 보면 문득 사육당한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홍색과 똥색이 뒤범벅된 돼지우리 속의 돼지들. 사료 시간만 되면 서로 머리를 치대며

먼저 먹겠다고 아옹다옹대는 뽄새도 그렇지만, 왠지 거대한 비행기 내장 속 기백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에

거의 똑같은 메뉴가 똑같이 배열된 식판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더군다나 문득 눈뜨면

답답함에 돌아버릴 것 같은 좁디좁은 좌석에 빽빽히 꽂혀 있는 사람들 아닌가.


#3.

"근처에 볼 게 없네."라는 말을 몇 번 들었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고 왔던 일행들이 내게 그랬다. 사실 나는 이미

중간중간 땡땡이를 치며 쪼끔씩 주변 골목을 돌아봤던 참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얼마전 버스에서 "사람이

아무도 없네"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허름한 놀이터가 뙤약볕 아래 달궈지고 있었고, 고장난 샤워기같은

분수대에는 페트병들이 수면을 가득 메워 둥둥 떠올라 있었으며, 멋진 아랍어 그래피티가 골목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전혀 낯선, 그리고 평범한 카이로, 리야드의 골목 풍경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아직 소모되어

버리지 않은 신선한 이미지들. 예컨대, 스핑크스가 달고 있는 두텁한 소꼬리 조각같은.


#4.

변태는 날 좋아한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남성이 결혼하려면 굉장히 많은 액수의 지참금이 필요하고,

때문에 결혼을 못한 남성들이 일종의 '대체재'로 동성애를 취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면 난 대체재 중

상급에 속함에 틀림없다. 리야드의 밤거리,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 산책을 하다가 변태를 만났다. 보기 드문

긴머리 히피스타일의 젊은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다가 내 눈과 마주치곤 히죽대며 자신의 온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이윽히 시작된 신음소리와 밭은 한숨소리가 걸음을 재촉해 지나친 내 귓가로 달겨들었다. 잠시후

뒤에서부터 달려온 차는 내 앞에 서더니 오른쪽 차문이 덜컹 열리며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뱉어냈다. 두가지

정도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려봤다. 어디로 갈래? 얼마 줄 거야?


차마 말하진 않고, 그 대신 꺼져줄래, 라고 말해줬다. 한국말로. 그리고 속으로 좋아했다. 꺄오, 뉴욕, 카이로,

태국에 이어 리야드에서 먹히는군하~ 잇힝~* (비록 남자에게일지언정)


#5.

출장도 거의 끝나간다. 여긴 쿠웨이트, 밤 12시. 이번 출장 완전 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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