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뱅글뱅글 돌았다.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씨씨티비를 피해 세워놨던 차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조바심치다 에라 모르겠다. 늘 길찾기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문득 떠오른 그녀의 타박 아닌 타박. 오빠는 어떻게 나보다도 길눈이 어두워.


어차피 집 밖에 나서면 전부 길이다. 낯선 길 위에서 늘 그녀의 말이 맴돈다면 큰일이다.

장소에 주석을 붙이고 기억을 첨부하는 건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세사리같은 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나는 길 위에서 추억한다.


그러다 번쩍, 계시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안농'손칼국수. 지난 3년동안 그녀의 인사는

대개 '안농' 아니면 '안뇽'이었다. 안농. 입술에 주름을 잔뜩 끌어모아 앞으로 바싹, 평온하던

날에 그 인사말은 장난스런 키스의 느낌을 떠올렸댔다. 안농, 그러면 나도 안농.


길 위에서 넘실대던 그녀의 기억이 인도 위까지 들이차기 시작한 걸까. 장마철 보도블록을

핥아대며 역류하는 빗물의 강처럼 뭔가 으슬으슬해졌다. 우리의 시간이 내게 주었던 교훈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 조금은, 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안농'이 내게 남았다. 그리고 다른 고민이 남는다. 그럼 대체 난 뭘 배운 걸까.

그 시간동안, 그 평온했던 날들과 쓰라렸던 날들을 거치면서 결국 뭔가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니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조금씩은 깨달음을 얻는 거 같다.

그때 그랬어, 사실은 그랬어야 했어, 내 문제였어, 둘다 어렸어 따위. 근데 정말, 그렇게

현실이 굴러간다면 지금쯤은 세상엔 사랑에 득도한 사람들만 가득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저 다들 늘어만가는 나이에 부끄러우니까, 깨진독처럼 좀처럼 숙성되지 않는 경험치가

부끄러우니까 있어보이는 척만 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도 그래보일 순 있는데. 허름하니

글자가 깨져나간 간판 하나에 '안농'이니 어쩌니 울렁대지만 않으면. 



#1. 암기 강요

부대에 배치받고 내무실이 정해지자마자, 바로 위 고참은 '몇월 군번'인지 서열에 따라 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하단으로 내려가는 군홧장 앞으로 데려갔었다. 몇 월에 입대했는지를 외우고, 이름을 외우고,

보직이 뭔지를 외우고, 30분을 줄 테니 전부 외우라고 했었다. 그게 편한 군생활을 시작하는 길이라고.

당연히 한번에 외우지는 못했고 그때마다 얼빵하다느니, 그것밖에 안 되냐느니 따위 비아냥과 갈굼을

들어야 했었다. 필사적으로 외우고 났더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다른 내무실도 전부 외워야했다.


#2. 각잡고 앉아있기

내무실 맨 끄트머리에 더블백을 풀고는 이내 자세를 잡고 앉았다. 허리를 바싹 세우고 책상 다리를

하곤 두 팔을 빳빳이 펴서 양쪽 무릎 위에 올려두는 자세, 자연스레 양 어깨가 귓볼까지 와닿는

바싹 주눅든 채 굳어버린 모양새가 나오는 거다. 그야말로 신병의 기본자세, 갈기거나 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닥다닥 붙어서 그 자세로 앉아있다가 옆에서 발차기라도 날아오면 속절없이

우르르 넘어졌다가 후다닥 다시 모양새를 잡아야 했다.


#3. 코골이.

원래 코를 안 고는데, 노란 따까리를 붙이고 긴장한 채 뛰어다니는 신병 생활인지라 밤에 조금 코를

골았나보다. 슬리퍼가 날아오고 군화가 날아오더니, 씨발씨발거리며 내 자리로 와서 따귀를 철썩

갈기고 다시 잠들던 말년 병장이 있었다. 담날부터 베개를 안 베거나 엎드려 자거나 심지어 휴지를

돌돌 말아 코피날 때처럼 양쪽에 박아두기도 했지만 별무소용, 일주일 후인가 그는 한밤중에 내무실

전체 인원을 깨우더니 전부 머리박게 시키며 소리를 쳤다. "신병을 얼마나 풀어놨길래 잘 때도

긴장 하나 안하고 코를 고냐!!" 내게 하이바를 씌우고는 소총으로 머리를 때리고 발로 걷어차다가,

자기부터 차례차례 하나씩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자도록 했었다. 이후에도 방독면을 쓰고 자기도 하고,

군대가면 철든다는 건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코고는 습관은 확실히 고쳤으니.


#4. 뻗치기 등 직접적인 구타행위

내무실 관물함과 벽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었는데, 일과 이후 취침 점호 때까지 거기에 들어가 있으란

것도 하나의 처벌이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요새 군기가 빠졌어'란 말로 축약될

그런 애매모호한 것들이었다. 벽을 바라본 채 똑바로 서서 두세시간씩 버티고 있는 건 눈앞이 핑핑

돌고 귀가 멍멍해지는 일이었지만, 귀로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티비소리에 정신을 집중해서 버티곤 했다.

그 밖에 너무도 흔해 오히려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들, 식당 뒤로 집합시켜서는 머리박기, 엎드려뻗쳐,

쪼인트까기, 따귀 때리고 발로 밟는 따위. 사실 초등학교 때 보이스카웃 단장을 겸했던 선생님에게부터

단련된 것들이니 새삼 군대 구타가혹행위라 하기도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5. 빨래해주기, 말리고 개어서 관물함에 넣어주기

병장이 되면 세탁기와 세제를 쓸 수 있었고, 조금 잘 보이면 상병 5호봉이 되고도 쓸 수 있는 게 내가

이병 때의 룰이었던 거다. 착한 고참은 자신의 빨래를 해주는 대신 내 빨래도 함께 슬쩍 돌릴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고, 나쁜 고참은 그냥 자기 빨래만 세탁기 돌리도록 했었다. 이후 빨랫줄에 널거나

건조기를 돌리고 찾아오고 각잡아 개어서 각자의 관물함에 넣어주는 건 막내들의 몫.


#6. 사제 용품 금지

상병이 되면 샴푸, 린스를 쓸 수 있었고, 병장이 되면 폼클렌징과 바디워시를 쓸 수 있었다. 그 전까진

초록빛 비누 한장으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어느 내무실에서 이병이 샴푸, 린스를

휴가다녀오며 들고 왔을 때 전 내무실장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랫것들 군기 제대로 잡자는 방침을 천명하고 이후 강고한 구타와 정신교육으로 '밥대가리 없는

것들의 정신나간 행위'를 박멸했던 적이 있었던 거다.


#7. 삐엑스, 독서실, 헬스장, 피씨방 등 출입금지

보통 피엑스라 하는 매점, 공군은 삐엑스라 하는데 거긴 상병 이상만 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독서실과 헬스장은 병장 이후, 피씨 세대가 놓인 피씨방은 사실상 유명무실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책 한권 보거나 아령 하나 들어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군기빠진 생각이자 건방지기 짝이없는

불순한 생각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던 거다.




별로 오랜 이야기는 아니다. 2002년부터 2004년 8월, 2년 5개월 1주일동안 공군으로 복무했던 시절의

앞부분 이야기니까. 2002년 한국의 월드컵 경기 직전마다 전 내무실을 돌며 '대한민국~ 짝짝짝' 응원을

홀로 목청껏 외치고서야 경기를 볼 수 있었던 때쯤의 이야기니까. 새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요새

'숨소리가 크다'느니 따위의 이유로 벌어진다는 전의경들 사이의 구타가혹행위가 그야말로 '새삼'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웃겨서다. 여태까지 그런 게 없었던 것처럼 새삼 부각시키는 이유는 뭐지, 그리고

전의경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체 군대의 문제임은 왜 끝내 외면하려 드는 거지 싶어서.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이러저러한 피해자였던 동시에 누군가에게 가해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밥이 차고' '힘이 생긴' 후에 평소 생각하던대로 각종 금지를 풀고 암기니 뭐니 하지 말도록 했지만

그 이전에 어느 순간에는 밑의 후임을 갈궈야 했던 거다. 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내려오는 갈굼 쓰나미에

휩쓸렸다고 자위하기에는, 내 머리와 손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는지

어쨌는지, 어느새 나도 조금은 군대물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누군가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욕설을

내뱉는 그 기분은 처음보다는 두번째가 덤덤했고, 두번째보다 세번째가 덤덤해졌었다.


반성부터 해야 할 일이다. 피해자로만 자처하기에는, 그 군대라는 시스템 하에서 시간이 흘러가며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맡겨졌던 악역과 가해자 역할의 시간 역시 짧지 않았다. 좀더 철저했더라면

자신이 맞는 것을 거부하는 만큼이나 자신이 때리는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거부했어야 했다. 고작

이년여의 시간만 지나면 끝나버릴 병정놀이였는데 너무 진지하게 몰입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좀더

폭력에 민감한 채 유지했어야 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두번 다시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원치 않는 역할을 맡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생각보다 바깥 사회와 군대 내의 사회는 비슷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요새는 점점 더 비슷해진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로 밀어붙이는 꼰대들은 여전하고, 한발 떨어져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은 권력과

위세를 부리며 못살게 구는 '가해자'들의 유치함과 폭력성도 비슷하다. 게다가 웬만한 폭력은 전혀

폭력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불감증이 온사회에 만연해 버린 느낌도 여전하다. 지금의 치유불가능한

꼰대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해결될까.


더욱 무서운 사실 하나, 나름대로 부대 내에서 입지를 쥐고 난 이후 모든 부당한 차별과 불평등한

제한들을 풀어버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던 거 같다. 군대란 원래 그런 조직이며, 군대에서 배워야 할 건

그런 인내심과 '사회생활'이라는 식의 생각, 그 이면에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질시나

배아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대하고 난 이후 다시 원상으로 복귀했다고 들었다. 길고

긴 군생활을 재밌게 하려면 처음부터 다 풀어주면 안 된다고 했다던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

박정희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복지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와 비교해서.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사회화', 그게 모범답안인 양 사회 전체에 횡행하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군대를 이야기하는 건 사회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군대 내의

구타가혹행위의 가해자들이 아무런 가책이나 반성없이 똑같은 마인드를 가진 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결코 근거없지 않은) 상상, 혹은 자신은 그저 군대의 선한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맘대로

기억을 재구성하듯 지금도 숨죽인 채 사회 시류에 휩쓸리는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노라면, 많이 우울해지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배우고 있다.



"그냥 국물 몇 숟갈 뜨고, 못 먹겠다고 하면서 삼계탕이나 하나 시켜먹어."


저녁 회식자리에서 개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알린 나도 나지만, 문자를 받고 득달같이 전화한 엄마도 엄마다.

그만큼 우리 집에서 '개고기'는 아무도 먹어보지 않았고 먹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금기의 음식'.

뭐 딱히 개를 사랑해서라거나, 비위가 약해서는 아니다. 우리 집안에선 예전부터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 개고기를 안 먹는 이유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개고기를 먹는단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안 먹던 거니까, 왠지 찝찝하니까 정도의 부담감이랄까. (그렇지만 안 먹어 보았던 새로운 음식을 먹는 건 아주

좋아라 하니 찝찝함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도 되겠다.)

처음 와 봤으니 이것저것 맛을 봐야 한다 하여 수육이랑 탕이랑 테이블 위에 올랐다. 기름을 반들반들 머금은

고기가 나오는데, 속살은 흑염소고기처럼 결이 져서 부드럽고 껍데기쪽은 쫀득거린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음식점 한 켠에는 '드시지 못하는 분을 위해 외부음식의 아웃소싱을 해드린다'는 안내까지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있던 룸 내의 사람들은 전부 잘만 먹더라. 딱히 먹으면서 추억할 만한 누렁이와의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먹으면서 점점 내 말소리가 개소리로 변해가는 것 같지도 않고.


집에 도착해선 다녀왔습니다, 대신 멍멍, 짖어서 인사를 갈음했다. 국물만 먹었냐고, 고기 정말 먹었냐고

그러길래 계속 멍멍, 그렇게 답하다가 한 대 맞고. 그러다가 개고기를 먹어선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나름

'치열한(이라 쓰고 저열한, 이라 읽는다)' 논리 싸움. 우리 윤씨는 대대로 개와 잉어를 피했다고 하길래,

조상이 개나 잉어에서 변신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그러다가 멍멍거린다고 한 대 맞고. 뭐라더라,

개랑 잉어한테 도움을 입었다던가, 그래서 그랬다. 어차피 키우던 소랑 돼지랑 닭한테도, 그리고 키우던

깻잎이랑 상추한테도 도움을 입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집안에 도움이 된 게 어디 개와 잉어 뿐이겠냐고.


그리고 친가 쪽만 조상이냐고, 외가 쪽에서는 먹지 않냐고 했다가 외가 쪽도 안 먹는다는 말에 깨갱 한번.

뭐 대충 그렇게 일 합씩 주고 받는 상황에서 우리 집 족보가 과연 진짜일까욤, 요런 질문 던져봐야 별로

도움될 이야기는 아니어서 속으로만 하고 말았지만, 사실 그것도 그렇다. 씨족에 따라 존중하고 보살피는

동물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 씨족에 대대로 속해서 족보와 가계에 맞는 오리지널 정통 계보가 얼마나

되려나 싶다. 대부분 돌쇠, 점순이를 조상으로 갖고 있을 텐데.


할머님이 먹지 말라 했다고 당부하셨다고, 옛날 어른들 말씀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랬다. 손에 잡히지 않는

'조상'이란 단어보다는 훨씬 와닿는 할머니의 말씀이었다니 왠지 뜨끔하긴 하지만, 옛날 어른들 말씀이라고

다 삶의 지혜니 살아본 경험이니 응축된 건 아닌 거다. 막말로 사람들 영혼 빼앗긴다며 사진찍히지 말라던 것도

고작 백년안팎 이전의 옛날 어른들 말씀이다. 혹시 모르지, 현대 과학으로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겠지만 특정

성씨의 씨족에겐 개고기의 DNA와 충돌하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거나 하여 옛 어른들의 경험칙으로만 구전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젯밤은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몸을 보하는 게 아니라 허하게 만드는..;


결국 우리집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개고기를 먹는단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던(먹지 말라는 불문율이 내려오는) '전통' 혹은 '조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겠다. 그런 조심스러움에 더해 조상님들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거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외경이

개고기에 대한 찝찝함을 증폭시키는 이유랄까. 맛보고 나니 사실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전혀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긴 했는데, 왠지 그런 부분이 걸려서 딱히 다음에도 또 먹고 싶을 만큼 땡긴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괜히

조상님들을 화내게 만들고 싶진 않아..란 생각이 깊숙이 인셉션되어 있는 거랄까. (아...이렇게 심지가 약했던 걸까...)


물론 그 밖에 개고기를 둘러싼 많은 찬반의 이야기들이 있다. 개는 인간의 친구라느니, 가장 유전적으로

유사한 생명체라느니, 혹은 반대로 우리 민족의 전통이라느니(사실 동남아니 다른 나라에서도 참 많이들

먹고 있다길래 깜짝 놀랬지만) 따위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영양학적 근거를 통해 우수한

단백질 보충원(보양식꺼리)라는 입장과 요새같이 영양분 넘치는 세상에 굳이 개고기까지 먹을 필요가 있냐는

다소 실용성에 주목한 입장(음식의 맛 차이나 그런 요소는 모조리 무시한) 등이 있는 거다. 혹은 위생적으로

전혀 깔끔한 도축 과정이나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지금의 실태를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라거나 아님 아예

금지하라는 입장도 있는 거고. 정답은 뭘까.


그냥, 개인적으로는 아무 생각없이 개고기를 가리키며 "개속살은 담백하니 맛있네요. 근데 개껍데기는 좀

쫀득하면서 돼지족발같애요."라고 이야기했다가 살짝 뜨아했다. 개속살, 개껍데기라...돼지속살, 돼지껍데기랑은

조금 다르게 울리던 단어들. 그리고 사실 단순히 이 문제는 개냐 돼지냐의 취사선택이라기보다는 육식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좀더 근본적이고 깊이있는 프레임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국과수에서 시체 부검하는 것보고

생각했던 것처럼. (음식의 미학-부검 견학의 감상.)


* 나름 개고기계에서 이름난 맛집이라 하여 첨부해 보는 정보. 먹을 사람은 먹어야지 싶어서.


어쩐지 오늘 기분이 무지하게 싱숭생숭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납량특집인 듯한 '군대 꿈'을 꿨던 것 같다.

잔뜩 얼고 쫄아있던 이등병 시절, 밤에 코 곤다며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고 쓰레빠를 던지고 하이바를 던지고

급기야 하이바를 뒤집어 씌우고 주먹질에 발길질을 해대다가 새벽까지 내무실 전체를 뒤집어놨던 말년 병장의

패악질이 생생히 되살아났었다. 그치만 어쩌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밤에 잘 때 코에다가 휴지를 돌돌 말아

(소음기 삼아) 끼우고 자는 거랑, 그자식 팬티니 반팔티니 널어주고 거둬오고 개켜줄때 한개씩 두개씩 돌에

감아 지뢰밭에 던져버리는 정도. 그조차도 지 팬티 자꾸 사라진다며 또다른 낙수물효과식의 구타를 낳았지만.

아, 휴가 나오던 날 세살인가 어리던 바로 윗고참이 아침에 주임원사실에 가두고 갈구고 주먹질하던 것 역시

잊을 수 없는 기억. 훈련소에서 특식이라며 나눠줬던 '치토스'의 '따조'가 허가받지 않은 놀이기구라며 전부다

수거해가고 다먹은 과자봉지를 네모나게 '파지해서' 버렸던 기억도 있다.


뭐, 재미있던 기억도 있다. 민노당이 최초로 원내진출하던 때 BX를 털어 밤새 복분자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던

기억, 밤에 동기들과 BX 냉장고 불빛을 조명삼아 맥주궤짝에 앉아 한박스씩 마셔대던 기억,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 녀석들까지. 그 때나 지금이나, 군대는 인간과 인간성에 백해무익하다고 믿고 있지만.


네이트 대화명을 바꿨다. "장어를 뜯고 삼계탕을 마시니 남는 것은 애정욕."에서, "6년전 오늘, 제대할때만 해도
 
꿈많던 소년."으로. 2004년 8월 5일, 제대를 했었다. 무려 2년 5개월하고도 1주일, 지랄같은 군생활을 마치고

거대한 마침표, 혹은 쉼표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기념삼아, 바로 그날, 6년전 오늘 올렸던 싸이월드의 끼적거림 하나쯤 스크랩.



궁극의 업. (2004.08.05)

정말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난 몇가지 아직 내가 희미하게밖에 잡아내지 못하던 감정표현들과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감정이 복받치는" "심장이 두근거릴정도로 좋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죽도록 좋은""뱃속이 요동치도록 좋은"..게다가 몇몇 가슴시리도록 절박해보이는 갈구의 표정들, 자유의 몸짓들...

그런 놓여남의 순간들...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단단하고도 생생한 느낌으로 내 안에 이제야 각인된 듯한.


어제 잠시나마 평소 늘 가던 자기계발실의 두번째 자리에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떠오르고 할말을 집어낼 수 없이
 
멘탈이 아웃된 상황에서 꾸역꾸역 그 공간에서의 마지막 일지를 적었다.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그저

좋아서였는지, 혹은 실감이 안 나서였는지, 아님 한번 풀려버린 긴장을 추스리지 못하고 여전히 늘어져

버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년휴가 복귀때 꼭 챙겨간 일기는 막판까지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을 뿐인데, 감정이 토해지더군.


울컥울컥, 제대다 제대. 이제 여길 뜬다. 약간 늦었다. 아님 약간 이른지도 모르겠다. 아무생각없이, 제대다 제대.


넘 경계심없이 올라갈 때까지 올라와버린 걸까. 살짝 돌아갈 길이 걱정된다. 이 '궁극의 업'된 경지에서...어떻게
 
해야 상처받지않고 연착륙할 수 있을지. 그야, 제대하고 나서 세상이 뒤집히길 바라거나 갑자기 모든 일이 날

중심으로 훌훌 풀리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라 여길만큼 내가 '불손'하진 않은 거 같다. 다만, 아무리

'겸손한' 해방감일지라도...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하리만큼 충만한 행복감은, 금세 스러져버릴거란 게 뻔한 걸.


마치 무진장 좋은 영화를 봤을 때 당분간 입을 딱 다물고 그 황홀함을 두고두고 되새기려 애쓰듯이..그렇게

당분간은 혼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어느 순간엔가 입을 떼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는 데다가,

더이상 '군바리'라는 핑계로 주위에 투정부릴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에 조금쯤은 입다물고 지금의 감정을 아껴서

맛봐야겠다. 살아간다는 게 어찌할 수 없는 늙어감의 동의어라면 어찌할 수 없는 상처입음 또한 같은 거 같다.

감정이 움직움직하며 긁히고 까이고 패이고 혹은 흉터가 이지러지거나 조금씩 상실해 가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쯤 '신품 인간'의 기준에서 빗겨나가는게 피할 수 없는 과정인 거 같아서..흔치 않은 이런 업에 올랐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 경착륙 내지 추락해 버리고 싶진 않거든. 최대한 이뿌게, 고아한

곡선을 그리며 일상적인 평정심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우왁스런 진폭으로 리듬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사절.


몸값 어쩌구 하며 만남을 '종용'하거나 '선택'하려 하던 군바리의 투정은 이제 접어야 할 때, 인간들과 같은

생활을 살며 비슷하게 바빠지겠지. 제대했고, 세상이 경천동지는 커녕 어줍잖은 기상 이변조차 없이 멀쩡했고,

여전히 아무일 없이 조용했거나 여전히 어제처럼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여전히 두다리로 걸어다녔고,

전화통에 불이 나는 일도 없었고, 행인들이 화환을 걸어주거나 꽃을 뿌려 주는 일도 없었으며, 여전히 땀은

끈적하고 불쾌했고, 밥을 안먹으면 금세 배가 고파왔고, 이제 슬 피곤을 느끼며 잠도 오기 시작했고, 내가 아는 한
 
오늘을 임시 공휴일로 삼거나 국경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은 절대로 없었다.


그렇게 어쨌든 난 홀로 궁극의 업된 상태를 체험하며 제대했다. 제대.




* 제대가 오신다. (2004.07.06)

끝나간다. 담주 화욜임 말년휴가 나간다. 부산가서 이틀정도 놀다가, 잘함 알바 거기서 구해서 한 이삼일 더

일하고=놀고 할지 모르는 일이며..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또다시 드러운 기분으로 복귀하면 8일만 개김 된다.

머 제대선물도 받을 거 같고, 제대회식도 뽀지게 함 할 테고. 부대 함 삥 돌면서 인사해주고, 그러면...

클클클...나도 제대란 걸 하는군.


한달 고참들이 제대하고 나서야 나도 제대하겠구나, 란 느낌이 정말 찐하게 들었다. 제대란 걸 하긴 하는구나.

이제 내 차례구나. 여전히 전역신고하고 부대를 내려올때의 기분이 상상조차 안가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부대

정문정도까지는..내 상상력이 뻗어갔다. 제대를 하면, 하면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몇개 더 늘어날 거

같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탈옥한다던가, 쇼생크탈출의 포스터와 같은 액션에 담긴 감정, 사형선고받았다가
 
전기의자가 고장나서 무기형으로 감형되는 죄수, 그 정도까지는 감정을 얼추 이입할 수 있지 싶다.


외박 나갈 때마다 집에서 그런다. 너처럼 유난하게 군대 싫어하는 넘 첨 본다고. 머, 어느 집의 경우를 보셨는지

몰겠지만, 제대회식할 때쯤 보면 그래도 내 '유난스러움'이 외롭지 않단 걸 느낀다. 다들 감춰놓고 있었거나,

잠시 무뎌져 있었거나, 혹은 제대하기 위해 걍 외면하고 있었거나...그게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 때가 제대회식이란
 
자린 거 같다. 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 좆같음의 새삼스런 일깨움(얄밉다..), 바깥에 대한 동경...근데 알아버린

거 같다. 군생활 끝, 이란 말로 어떤 일상을 매듭짓는 일이라거나 새로운 시작 등의 말로 심기일전해보려

해보아도, 내가 분기탱천하는 그 순간에 세상 전체가 깨어 새로운 의욕으로 쇄신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이미

'못 가볼 길'이란 건 하루하루 내 전망을 좀먹고 있는 셈인 탓이다. 아니, 그다지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보고

있는 건 아니다. 존재가 귀속되는 공간과 시간, 그 밖의 제반조건들-객관적이던 주관적이던-자체가 존재를

구성한다니까. 그냥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지평이나, 내가 발딛을 수 있는 지형이나..내가 코드와 모드가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인간群이나..그런 것들은 새까만 어둠 한가운데서 작은 꼬마전구 주위의 세상을 구성하는 셈이다.

그림자를 가진 것들.


해서, 제대라는 이벤트를 수행한다고 미션 클리어, 넥스트 스테이지, 이딴 문구가 뜰 리도 없고, 아마 2002년

1월 쯔음의 세상이 나름대로 나이먹은 채 '연속'되어 성큼 다가올 거 같다. 비슷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슷한 단검과 방패를 가지고, 비슷한 능력치에 약간의 경험치를 더한채 복귀한다. 환류.


제대가 오신다. 아무런 환상이나 근거없는 기대 따위 버리고 replay다. 결국 같은 곳에서, 약간의 문스텝으로

시동을 걸어줄지언정, 2년 6개월은 나나 너나 훌륭하게 해치웠다. 글치 세상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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