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사회 적응 못하는 한국인

한겨레|입력2012.04.15 20:50|수정2012.04.15 22:40

 

[한겨레] 중국동포,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여성 등 국내에 거주하는 특정 지역 출신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감정이 혼란을 겪고 있다. 이미 2007년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지역 출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한편, 실업과 사회 양극화로 고조되는 불만이 저임금 노동시장을 채우고 있는 이들을 향한 질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커지는 피해 의식

수원 여성 살해사건 뒤 중국동포 추방운동까지 '일자리 잠식' 인식 한몫

인권침해·차별 여전

이주여성 국회 진출 불구 임금체불 등 빈번히 발생 "범죄집단 모는 건 위험"

지난 13일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소름 돋는 외국인 노동자들, 어린 여학생 강제 헌팅 장면'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올라왔다. 지하철역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추정되는 남성 3명이 한국인 여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2명에게 치근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번지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지난 1일 경기도 수원에서 중국동포가 20대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중국동포 운영 상점 불매운동이나 중국동포를 추방하자는 내용의 청원운동이 포털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최황규 서울중국인교회 목사는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총격 사건이나, 수년 전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총격 사건 때도 미국 사회는 한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며 "다문화·다민족 사회 경험이 적은 우리나라는 개인의 범죄를 집단으로 모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이런 인식의 배경에는 실업난과 사회 양극화에 따른 불만도 깔려 있다. 2008년 한 포털에 개설된 다문화 정책 반대 카페는 15일 현재 회원이 8500여명이다. 이 카페의 소개글을 보면 '다문화는 후진국의 값싼 인력과 우리 서민을 저임금 경쟁시키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다. 이는 가난한 서민에겐 재앙이다'라고 돼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민들의 일자리와 생계를 위협한다는 우려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건설업·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한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잠식하는 측면이 있지만, 전체 경제규모나 수준 등을 고려하면 이들이 (내국인들이 꺼려하는) 일자리를 채워주는 부분이 크다"며 "직업을 잃은 일부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당연하겠지만, 전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확대해석을 사회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4·11 총선에서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이자스민(35)씨가 새누리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자, 이에 대한 반감이 인터넷 등을 통해 생기는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정부가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여성이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겪는 인권침해·차별을 본질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에게만 시혜를 베풀거나 지원을 몰아주는 정책 위주로 펴다 보니, 서민들은 그 집단 전체가 수혜를 받는다고 생각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실업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불만 등에서 비롯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무시·차별은 외국인 범죄의 원인이 돼 사회 갈등을 일으킨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범죄율은 2007년 대비 131% 늘었다. 지난 6일엔 한 중국동포가 못 받은 임금 때문에 다투다 직업소개소장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은 이와 관련해 "임금 떼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 중국동포들이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갈등은 수시로 일어날 수 있다"며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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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달린 오천개가 넘는 댓글들, 그리고 추천수가 미친 듯이 많은 댓글들...먹고 사는 팍팍함에 외국에서 밀려들어온

 

저임금 이주노동자로부터의 위협이 일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이빨을 드러내고 맹렬하게 혐오하는 모습은 끔찍하다.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로

 

인한 것이며 최근의 자극적인 사건들은 한국 경찰력의 무능력이나 기초 치안의 공백을 탓할 일이지 외국인 노동자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니까. 방향을 잘못 잡은 분노는 쉽게 눈에 띄고 만만한 상대에게로 향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새누리당'에 대한 비난을 토하며 '진보'인 양 하고 MB를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비난과 반대를

 

이자스민, 그리고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 외국인 노동자 이주정책은 워낙 복잡한, 경제와 문화,

 

사회적 측면에서 살펴야 할 부분들이 많고 세밀하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쉽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다만 그 기본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무작정

 

이빨 드러내고 백색테러라도 벌일 듯 막말 퍼레이드를 벌이는 게 호응받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정말.

 

 

(개인적으론 이건 새누리당이 이번 19대 총선을 압승, 과반승한 것 만큼이나 역겨운 일이고, 결국 이게 우리나라의

 

수준이란 생각이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문제, 다문화문제가 어쨌던 한국사회가 맞이하는 큰 변화의 일부라는 점에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새누리당에 이슈를 선점당한 것 역시 아이러니하고 어처구니없긴 마찬가지.)

 

 

 

 

 

 

 

 

 


올해의 인물로 안철수니 박원순이니, 김어준이니 하는 많은 이름들이 거명되지만 내겐 단연 그녀다. 김진숙.

영도조선소 75호 크레인, 소금꽃나무,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회, 그리고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도되었던 연대의 방식까지. 그녀는 2011년의 열쇳말들을 응축시킨 하나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미 그녀의 동료와 동지가 죽어갔던 그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이며 끝내 살아 내려온 그녀가

희망버스라는 형태로 연대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해서

잠시 읽어보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희망버스라는 방식, 그리고 나꼼수 등 기타의 방식에 대한 유보적이고 회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연말이라고 모든 걸 용서하고 내년엔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될 듯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냉정한 자세로 올 한해가 남긴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계속 이어가야 할 싸움들을 떠올려 보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기사 내용)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난…
이름모를 그대들, 고맙습니다

한국사회 올해의 인물
김진숙

목숨 하나 살려야 한다는 그 애절함들이 만든 기적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한겨레
» 김진숙씨가 지난 21일 저녁 부산구치소 앞에서 열린 송경동 시인 등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목도리를 다시 매고 있다. 크레인 농성 중 트위터로 친구가 된 ‘영도희야’씨가 김진숙씨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올해의 인물’로 30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통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운 김진숙씨를 선정했다.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갔던 ‘희망버스’는 올해 한국 사회가 길어올린 가장 값진 성과물 중 하나다. 김진숙씨가 309일의 크레인농성을 되돌아보고 희망버스 탑승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보내왔다. 국내 분야별 ‘올해의 인물’은 10면에서 만날 수 있다.


영도 바람은 유명하다. 일명 똥바람. 크레인은 24시간 흔들렸고, 바람이 심한 날은 토하기를 여러번.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거짓말처럼 바람멀미가 멈췄다.


걱정하고 응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눈물 속에 크레인을 내려와선 땅멀미에 시달렸다. 흔들리는 땅, 갑자기 커진 사람들. 멀찍이만 보이던 사물과 차들이 눈앞에서 번잡을 떠는 어지러움. 이번엔 땅 위에서 토했다. 땅멀미가 웬만큼 가라앉자 방향감각이 문제가 됐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법도, 계산하는 법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309일이 만만한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힘든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 날은 크레인 위에 심은 상추, 치커리, 딸기, 방울토마토. 파르르 떠는 그 어린 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니들도 힘들지?”


추워서 힘들지 않으냐고, 이 더위를 쇳덩이 위에서 어떻게 견디냐고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건 사람으로부터 왔다. 끊임없는 강제침탈의 시도들, 한진 자본은 85크레인만 끌어낼 수 있으면 정리해고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자고 나면 불거지던 공권력 투입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화되더니 특공대가 84호 크레인을 면밀히 정찰하고 가는 걸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런 움직임들이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알자지라>를 시작으로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공’권력으로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동원된 게 ‘사’권력이었다. 6월27일. 공권력의 힘을 빌려 조합원들을 쫓아내고 크레인을 완벽히 접수한 용역들. 그날부터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크레인을 둘러싼 용역들은 시도 때도 없이 크레인으로 뛰어올라왔고, 그게 여의치 않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크레인을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이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졌다. 크레인의 전기는 물론 주변의 전기까지 다 끊어진 깜깜절벽. 몸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걸로 저들의 시도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만 끝내고 싶은 유혹들.



그때마다 천사가 파견한 듯한 사람들이 왔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수원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전주에서, 목포에서, 청주에서, 충주에서, 마산에서, 울산에서, 진해에서, 제주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핀란드에서, 일본에서, 홍콩에서…. 그 먼 곳에서 달려와 온종일, 혹은 며칠씩 크레인만 바라보던 사람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크레인을 바라보며 밤을 새우던 사람들, 매일 저녁 백배서원을 올리던 사람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잉태한 웃음은 희망버스라는 기적을 낳았다.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희망버스가 한번으로 그쳤다면 2003년의 상황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1월6일 새벽, 크레인에 오르던 순간, 이미 삶과 죽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강제침탈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내가 크레인에서 몸을 던지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저들은 바로 3, 4도크에 그물을 쳤다. ‘사람 목숨 하나쯤이야’ 할수록 그 목숨 하나를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들. 그 애절함으로 만들어낸 희망버스. 희망버스의 모습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1차 750명이 2차에선 1만명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의 얼굴을 겨냥해 뿌려대던 최루액, 색소 섞은 물대포, 그리고 무차별적인 연행과 폭력. 저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무참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디다. 그 길었던 밤과 새벽들, 어둠이 주던 공포, 누우면 몸을 펼 수도 없었던 춥고 작은 공간, 아홉 걸음이면 허공에 닿던 좁고 위태로운 난간. 그 좁은 곳에서 일어난 일상치곤 너무나 다양했던 시간들. 매일매일 시시각각이 달랐던 309일. 아무 기약이 없었던 크레인에서 기다림을 가르쳐준 희망버스. 쇳덩어리 위에서도 푸른 잎을 키워낸 바람과 햇살들.


내가 반평생을 싸웠듯 앞으로도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해고자들은 복직을 기다리고 있고, 저들은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킬 복수노조를 꿈꾼다. 재능, 쌍용자동차, 전북고속, 강정 등 희망을 기다리는 곳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 스스로 놀랐듯이 우린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송경동, 정진우가 출감하는 날, 맘껏 소리지르며 승리를 기뻐하자. 그리고 또다른 승리를 위해 희망을 싣고 달려보자.

 

 

2011년 12월22일 김진숙




종편 이전이라고 네이버니 다음의 포털 대문 기사들이 쓸만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능프로그램 독후감같은 글에 인터넷 짤방에 대한 소감문같은 글에, 내용과는 동떨어진 자극적인 낚시성 제목들까지.


그렇지만 지금은 또 차원이 달라졌다.

종편 4개국이 개국하고 나니 이건 도대체. 흔히들 하는 말로 '찌라시' 수준의 막장을 보여주는 쓰레기 기사들, 정말

전파낭비 온라인공간낭비 인력낭비 에너지낭비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들인 거다. 도무지 안 되겠어서, 네이버 대문에

마이뉴스를 설정하기로 했다.

누군가 말했듯, 조선, 중앙, 동아, 매경, 연합 따위가 보수지라 싫은 게 아니다. 보수든 뭐든 그들이 걸치고 있는 안경과

정치색은 인정할 수 있고 가끔은 읽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이 상식에 부합하고 언론으로서의 균형과 역할에

충실하려 할 때의 이야기다.


그저 자신들의 이해 관철을 위해 현실을 곡해하고 여론을 왜곡하며 펜대를 굴리는 쓰레기들, 그딴 건 언론이 아니다.

이제 좀 그나마 깔끔하게, 내 취향과 상식에 맞을 법한 대문을 볼 수 있을 듯. 사실 이게 최선은 아니지만.







▲ 김진숙 지도위원이 내려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 트위터 @ez2dj81 (프레시안에서 재인용)


김진숙 위원, 드디어 땅을 밟다!(1보)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경찰, 건강 진단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 조사
2011-11-10 15:36 부산CBS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여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농성을 풀었다.

지난 1월 6일 크레인에 올라간 지 309일 만으로, 309일간 고공 농성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례 없는 기록이다.

김 씨는 오늘 노사의 잠정 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무투표로 가결되자, 그동안 농성을 벌인 영도조선소 3도크 옆 높이 35m의 85호 크레인에 내려와 땅을 밟았다.

한편 경찰은 김 지도위원을 부산의 한 병원에서 건강 진단을 받도록 조치한 뒤 업무 방해 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한진중 사태, 309일 만에 종결…땅 밟은 김진숙 "고맙습니다" (프레시안)

“높은데 오니 전망이 좋다” 309일 그녀 웃음만은 여전 (한겨레)


                        ▲ 한겨레 표 재인용


드디어 내려오셨구나...안철수니 뭐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으로 희망의 '촛불'이 몰린 사이, 여론이 잠깐 타올랐다가

주춤해진 사이, 그래도 그 짧고 허망한 열기를 딛고서 드디어 김진숙님이 내려오셨다고 한다. 309일만이다.


모쪼록 건강 검진 결과에 아무런 심각한 문제가 없기를. 그리고 이후 당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도록 한진중공업의

중재안이 제대로 실행되기를. 무엇보다, 당신이 앞서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에서 상식이 통용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짐을 지고 여기까지 혼자 오셨다...당신의 진정성, 당신의 고민을 부디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눠받기를.



(언론이 외면하는) 김진숙을 향한 '2차 희망버스' 참가기.

(사진은 한겨레 재인용)

경찰이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린 시민을 강제연행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기각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경찰이 G20 회의를 앞두고 과잉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일 서울 남대문경찰서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경찰은 지난달 31일 G20 공식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리던 박아무개(40·번역가)씨 등 2명을 긴급체포한 뒤 박씨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손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은 2일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달 31일 오전 1시30분쯤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주변 가판대에 붙여진 G20 홍보 포스터 7장에 검은색 스프레이를 이용해 쥐 그림을 그려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그린 풍자 그림은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청사초롱이 그려진 G20 공식포스터 오른쪽에 쥐가 등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박씨는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의례적인 행사를 정부가 너무 호들갑스럽게 포장하고 있는 것 같아 풍자하고 싶었을 뿐인데 경찰이 구속영장까지 신청해 놀랐다”고 말했다. 박씨의 변호인인 박주민 변호사는 “불과 몇 달 전에도 서울시 홍보 포스터에 대학생들이 풍자글을 쓴 것이 방송에 나왔음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경찰이 G20을 앞두고 본보기로 박씨를 혼내주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창배 남대문서 형사과장은 “국익을 위해 중요한 국제 행사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는 국가 홍보물을 더럽히는 것이 (시민의) 정상적인 사고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G20 포스터에 쥐 그렸다고 구속영장 신청? 한겨레  201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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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정상적인 사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넘의 쥐 참 잘 생겼다.

경향 보도에 따르면 구속될 뻔 했던 두 사람은 "경찰 조사에서 이들은 “단지 G20의 ‘G’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면서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려 한 것인데, 이 정도 유머도 용납이 안되느냐”고 말했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정도 유머도 경찰이 내달려와 구속시키겠다 으름장 놓는 게 현실인 나라라면.ㅜㅜㅜㅜ




8월 19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 면입니다. 어제는 양용은 골퍼, 오늘은 나로호 발사...러시아를 위한 사전테스트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로호 기술진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나로호 중요하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차피 나이 든 분들은 가시기 마련 아닙니까. 어차피 기력 쇠한 좌파정부 수장 노인네, 만평거리조차

못된다는 걸까요.

오늘(8/19)자 조선일보. 음...잉크값 좀 들었겠군요. 어떻게 보면 참 단정하다 싶고, 또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기억도 되살리지 못하는 '쉬어가기용' 만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인을 '인동초'라

칭하는 건 (갠적으로는) 80년대까지의 민주화 투쟁에 한해 고인을 평하는 것 같아 좀 입맛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에 대한 언급과 평가를 피하려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좀 낯익습니다. 아마 5월에도 비슷한 만평을 봤던 기억이 있다는 거죠.
지난 5월 어느날 조선일보의 만평입니다. 좀더 선명해지죠. 자신들이 불과 하루 전에도 줄기차게 비난하고

여론몰이를 하던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접하고..."쩝..." 이정도 느낌이었을까요. 할 말은 한다는 신문,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서거 앞에 할 말이 이리도 없었나 봅니다.
 
오늘(8/19)자 중앙일보. 신기한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은...저만의 편견일지요. 뭐랄까, 좌파정권의 수장, 잃어버린

10년의 주동자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북괴의 수장' 김정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만평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조차 북한 비아냥거리기의 소재로 소비해 버리는 중앙일보의 '통큰 만평', 감탄할 수 밖에요.

어쩌면 북한 지도자가 방한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미리 '물타기' 좀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만평입니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최근 어록을 저 구름 위 하늘세상에 말풍선삼아 띄워놓았네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분의 가톨릭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만평 속 그분의 표정,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표정이 처연하네요. 눈밑에 온통

근심걱정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경향신문입니다. 고인을 기리는 만평의 정석 아닐까 싶네요. 성함과 이미지를 넣고, 생몰연대를 적고,

고인의 행적과 생각, 평생의 삶을 떠올릴 만한 한마디를 퍼올리는 거죠.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 '인동초'라는 잔뜩 바랜 이미지,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화투사로서의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한 고인의 업적이 그의 대통령 재임 중에 이뤄졌던 걸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프레시안 어제(8/18) 만평입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울컥한 만평이었는데,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이만한 만평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불과 몇개월 전에 돌아간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오버랩시키고, 그 두분의 죽음을 재촉한 공통의 무언가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게

상식적인 반응일 겁니다.


굳이 '인동초'라는 이미지로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을 가리거나 지워버리려 하고, 남북화해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고인의 죽음 앞에서 북한 지도자 비아냥거리기에 골몰하고 있고, 아니면 아예 대담한 '생략'기법을

구사하는 언론이라면...'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단어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p.s. 혹시나 하고 8월 20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23일날 천만관객을 맞게 된다는

영화 '해운대' 이야기를 20일날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참...그러네요.






이웃 띠보님께서 [이벤트] 14회 한겨레문학상 <열외인종 잔혹사> 리뷰어 모집이란 포스팅에 "예쁘게 귀엽게 섹시하게
 
당황스럽게 유머러스한 댓글"
을 달면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책을 배려해 주시겠다 하였다.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섹시하지도 당황스럽지도-아마 1그램쯤 당황스러우셨을까-유머러스하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지만, 경쟁률이 1:1이 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나로서는 기적적인!) 사정이 도래하여 책을 받아 보았다. 봉투에 찍힌 도깨비 그림 도장이 귀엽다.


이야기는 단숨에 읽혔다. 책을 받아보고 잠시 몇장 펼쳐볼까 했던 게, 세네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읽고 나니

뭐랄까..너무 허했다. 이야기의 구조나 전개가 무슨 골다공증 마냥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한 모양새여서가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스피디하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은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의 앞면.

주위에서 너무 쉽고 익숙하게 접하던 캐릭터와 공간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선 딱히 희소할 것도 없는 10대 불량청소년 하나, 눈에 밟히고 발에 채이는 30대 남성노숙자 하나,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와 인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려는 20대 여성 하나와

매일 군복을 갖춰입고 탑골공원에서 온갖 빨갱이들이 등장하는 시국연설에 열을 올리는 60대 할아버지 하나라는 등장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마치 길안내하듯 자세하게 그려지는 압구정역 3번 출구 옆 맥도널드와 코엑스 배스킨라빈스와

푸드코트, 혹은 홍제동과 독립문역의 풍경까지.


어쩌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노숙자에, 구직자에, 완고한-시니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부산물'이랄-

친미보수우익 노인네, 그리고 번쩍거리며 재탄생한 용산역과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상징, 코엑스몰과 압구정까지.

코엑스몰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잊지 않고 순례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기도 하다.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전쟁터로 변한다. 방화용셔터가 전부 내려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며, 대량의 인질극이 발생하고,

여차하면 당겨진 방아쇠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아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생생한 현실감에 되려 서늘한 날이 서면서 그 공간이 낯설어진다. 어라.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동시대인들이 문득 괴물같은 상황에 떠밀려 '모처럼 심장터져라 뛰는' 지경에 이른다. 낯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란 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거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쉼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이라는 건. 혹은 스스로의 괴물같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뭐 이런 카니발도 나쁘진 않네요.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 음..."


뫼비우스 띠의 뒷면.

연미복에 양머리를 뒤집어쓴 '최악'의 멤버들. 양털이 복슬복슬한 그 양머리는 단정하지만 과장스런 연미복 차림과

기괴한 매치를 이루며 왠지 이 땅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들의 '양머리 카니발'이란 게 시작되는 순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공간. 노숙자들의 서툰 쿠데타가

가십처럼 벌어졌던 용산역에서처럼, 그치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전면적으로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런 낯선 것들은 어느 순간 온전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니 또 이상한 노릇이다. 양머리를 뒤집어

쓰고 사방에 총을 난사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한 살인행위와 웅얼대는 혁명선언도 묘한 기시감을 수반한다.

그러다 보면 번쩍이는 은빛 총을 움켜쥐고 양머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임중독 10대 청소년이 양머리들보다

괴물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봉착하기도 하고, 양머리들의 난동이 되려 인간적이랄까, 안쓰럽달까, 그런

동정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양머리들뿐이야. 목자가 없어. 그래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 그런데 왠걸. 우리가 목자라고 믿고 싶던 대상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했어. 또 어떤 얼어 죽을 사이비 목자들은 우리를 썩은 오물통 속으로 밀어넣기도 하고 말이야."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열외인종"

그렇게 띠의 앞면과 뒷면, 각기의 흐름을 타고 일상에서 비일상을, 비일상에서 일상을 퍼올리던 흐름은 어느순간

하나로 합쳐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처럼. 양머리를 쓴 노숙자는 더이상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낑낑대며 끌어올렸을 거대한 돌덩이가 거친 소리와 함께 산비탈을 달려내려가듯

차라리 호쾌하게 내려닫는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그전까지 가벼운 조증에 걸린 듯 시니컬하면서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화자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고는 완전히 시니컬해진다. 혹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이라도 느끼듯, 돌연 잔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을 불러낸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다 알고 있다!"라는 외침. 그 외침이 누구의 관심도, 누군가로부터의 반향도 얻지 못하고

헛헛하게 공중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떨까.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10대, 20대, 30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뭔가 스스로의 의지나 행위와는 달리 제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장 치솟는 어리둥절함과 분연한 의기, 그 뒤를 바싹 좇는 무기력감과 소외감, 억울함과

열패감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잔혹하다. 이런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이런 결말이라서 잔혹하다.

"어떻게 천만 인구가 아웅다웅 모여사는 서울특별시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 죽어나간 이 대대적인 인질극에 대해 한마디도 없냔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조차 탑 이슈로 보도하는 이 판국에."


열외인종 잔혹사 - 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 2004.10.27(수) 한겨레.

외국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 청년을 만났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 세계 여행기를 읽었다는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그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몇 년 전 케냐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 근처에 우리 단체의 구호캠프가 있었다. 대규모 가뭄 긴급구호로서 식량 및 물 배분과 동시에 이동 안과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은 한센병(나병) 비슷한 풍토병과 함께 악성 안질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었다.

그 이동 병원에 40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었다. 알고 보니 대통령도 만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인데 이런 깡촌에 와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는 거였다. 궁금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나요?”

이 친구, 어금니가 모두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죠.”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고 머릿속이 짜릿했다. 서슴없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의사가 몹시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그 제대병도 잠시 생각하더니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 것 아닌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긴급구호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데는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할 것인지,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를 말이다. 나는 두 번째 삶에 온통 마음이 끌리는 사람만이 긴급구호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지치지 않는다. ‘누가 시켰어?’ 이 한마디면 일하면서 겪는 괴로움이 곧바로 사그라들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멋에 겨워 흉내만 내고, 남 탓을 하거나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다르잖아요?” 제대병이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물론 다르다. 그러니 선택이랄 수밖에. 평생 새장 속의 새로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창공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새장 속의 삶을 택한 사람들의 선택도 존중한다. 나름대로 충분한 장점과 이점이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새장 밖은 불확실하여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백전백패의 무모함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새장 밖의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새장 밖의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새장 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그러니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며칠 전 비행기 안에서 한 청년에게 던졌던 질문, 내가 나에게도 수없이 하는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며 ‘한비야 칼럼’을 마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쓰고 또 쓰고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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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이야기를 끌어나가려면, 적당하고 보기 좋게 재단된 멘트들로 상대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거겠지만,

내 생각엔 저건 별로 와닿지 않는다. 일단...저 말투...군바리틱한 저딴 딱딱한 말투를 내가 썼을 거 같냐..ㅡㅡ;;

또...저리 어눌하거나 쉽게 감동을 먹으며..내가 저자세로 나갔을 거 같냐..--; 마지막으로..내가 청년이냐..ㅡㅡ;;;

사실...'제대병'이라거나 '청년', '친구'란 말보다 걍 모군..정도 불러줬음 좀 좋아..하는 아쉬움으로.ㅋㅋ

머..XXX(23, 서울, 01x-xxx-xxxx) 이런 식으론 아니더라도 말이지. 누군가에게 해석되고, 또 그것이 누군가에게

다시 전달이 된단 건...상당량의 자중손실(dead-weight loss)을 유발하는군. 어긋나게 맞춰진 500개짜리 조각

퍼즐같이 왠지 찜찜한 느낌이다. 딱히 두드러진 차이가 있는 건 아닌데, 우리가 서로 생각했던 이야기의 초점과,

이 글에서 드러내려 했던 초점과, 그런 것들이 살짝살짝 어긋나면서 무언가 그녀가 아는 내게서 휘발되어 버렸단

느낌. 언로를 누가 확보했느냐, 누가 마이크를 쥐었느냐의 문제일까.

내 목소리가 변조됐다. 내목에 변조장치-.ㅡ^ 비야누님, 누나라고 불러달라면서요..ㅜ


조심하라구~ 조만간 마이크쥘 여러 사람들.ㅋㅋ 아니, 어쩜 우리가 가진 이 답답하고 무기력한 언어와 조악한

감정이입의 상상력이란 원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참, 한비야 그녀의 이 칼럼은 2005년 12월 발간된 "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해"(공선옥, 샘터사)라는 책에 실렸다.

"신문은 싸우면서 만드는 거다."

국제부 선배기자가 했던 말이다. 동아일보에서 국제부란 공간은, 귀양지랄까, 다소 소외받고 있는 곳 같다.

정치부에 있다가 노무현 탄핵사태때 미운털이 박혀서 떠밀린 선배. 신문은 싸우면서 만드는 거라면서,

동아일보에 굵게 그어진 균열선 하나를 보여준다. 평기자들 대 데스크 윗계급 사이. 사회부에 왔어도 마찬가지다.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있는 선배들도 동아일보의 '삿대질'같은 기사들을 보고 아연해한다.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동아일보'란 덩어리가 내부의 다양성을 무시해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히 그어버린

전선은 많은 것들을 지워버린다. 요샌 젊은 기자들이 동아일보 데스크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알아서' 골라

쓴다는 것, 세무조사때 조선과 중앙의 개뻘짓과는 달리 동아는 기자총회를 거쳐 아무런 조직적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부서가 관할하는 기사에는 전혀 서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fact를 다루는

기자는 결국 기능인에 불과하다는 것.

눈높이를 어디에 맞추냐에 따라 새로운 문맥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인턴기자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한겨레만 보며 감정적으로 치닫고 아주 순진하고 이상적인

편향성을 가진 대학생" 정도랄까. 선배기자들과 말을 섞으면서 계속 부딪히는 편견. 생각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대학생이라고 덩어리짓는 힘보다 갈기갈기 찢는 힘이 클지도 모르는데. 확고한 ready-made의 시각이 편할지는

몰라도, 공허해질 뿐이다. '구호'에서 '구체'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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