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 깊숙한 곳,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단정하게 세워진 다소곳한 별궁.

내부의 벽면이 전후좌우, 윗면 모두 복잡하게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하다. 창밖너머에서

그득하게 던져지는 햇살을 뚫고 창틀에 기대면 시퍼런 보스포러스 해협이 활짝 펼쳐진다.

날이 쌀쌀해지면 저 실내 스토브에서 불을 피웠던 걸 거다. 아니 근데, 저거 스토브가 맞는 건가.

그리고 밑에는 아마도 세면대..? 아니면 기도시간에 맞추어 발을 씻기 위한 곳인가..; 용도가

아리까리하지만 그림같은 아랍어 글자들과 금박이 단정하고 세련되게 입힌 모양새가 이쁘다.

가까이 들여다본 모자이크 타일의 섬세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 한 장의 타일 내에 구비구비

얽혀있는 문양들도 신기하지만, 그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으면서 이어지고 엮여지는 느낌이 굉장하다.

빛이 스미는 창틀 바닥면에도 빠짐없이 붙어있는 모자이크 타일들이 정교하다.

길게 누울 수 있는 빨간 의자가 긴 벽면을 따라 미리부터 길게 누워있었고, 돌아나오는 발걸음을

잡는 건 좀처럼 심심할 틈 없는 올록볼록한 철문의 문양들.

별궁에서 바다 쪽으로 면한 울타리 너머로 톡 튀어나온 조그마한 정자, 금빛 지붕이 반짝이는

곳에서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너머로는

외적을 침입이나 불청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돌담이 완고하게 버티고 섰고.

이렇게 햇살이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곳에서 긴 의자에 누워서 뻐끔뻐끔 시샤를 맛보며 나른하게

한나절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푹신푹신하고 탱탱하게 탄력을 유지하는 듯 해 보이는 쇼파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새것같은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둥근 돔 천장에서 무게를 잡고 돔을 지탱하는 무거운 추가 늘어뜨려져 있다. 건축학을 전공한다는

여행 친구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왜 저런 걸 늘어뜨렸을까 궁금했는데,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하던

그 친구의 열의 덕에 이해할 수 있었더랬다.

건물 가운데에 네 발로 버티고 선...이것은 뭘까. 향로? 터키에도 향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김새로 보자면 꽤나 그럴듯하게 생긴 향로인 거 같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초를 꼽거나 물을 담아두었을까. 그다지 다른 용도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너무나도

분명히 '나는 향로에요'라고 외치는 듯한 외양.

궁궐 건물들 사이에서 발견한 조금은 외진, 그렇지만 까막 바닥돌들이 하얀 돌들과 어우러져

꽤나 이쁜 그림을 그려내던 길 하나가 눈에 들었다.

돌아나오던 길, 드문드문 비추던 햇살은 깍쟁이처럼 끝내 간만 보이다가 사그라들어 버렸고,

어두침침한 구름 사이에서 톱카프 궁전의 담회색 잿빛 색조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궁전의 곧고 반듯한 포장도로 위에서 젖은 발을 끌며 걷는 여행객들, 그렇지만 이전에 이 길위를

걸었던 건 터키의 왕후장상, 더러는 말을 타고 지나기도 했으려나.

아무리 해도 이런 둥그렇고 완만한 돔 형태의 지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 어렵다. 그냥 눈으로만 잠깐 바라보고 있어도 눈알이 뱅글뱅글, 덩달아 머릿속도

뱅글뱅글 해서 왠지 갸냘픈 폐병환자처럼 풀썩 기절이라도 할 거 같은 거다.

궁전에서 거의 다 돌아나올 즈음, 마치 테마공원의 으리으리한 지붕처럼 양끝의 첨탑이 뾰족하니

깃발을 휘날리는 성문을 지나쳐 나오곤 돌아보았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함께 걸어주던 성벽 근처에선 더이상 아무런 살벌한 기운도, 예리한

금속물질들의 철컹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양이 새끼들 몇 마리가 지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는. 저 녀석들은 고양이라기보다는, 마중냥이나 개냥이 정도.

이제 완전히 톱카프 궁전의 구역을 빠져나오는 길, 돌아나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더 선명히 기억을 남길 수 있었던 거 같았다. 눈앞에서 어른대는 파랗고 하얗던

모자이크 타일들이니, 살짝 뿌연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보스포러스 해협의 검푸른 파도라거나,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거닐던 와중에 발견한 호젓하고 분위기 있던 짧은 골목길이라거나.




드문드문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성마르게 벌써 환히 밝혀진 네온사인들, 그리고 차분하지만 굵게

실루엣을 각인하는 예니 사원의 미나렛 두 개.

유람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비가 드문드문 오는지라 배를 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선착장 역시

생각보다 한적하더라는.

이스탄불을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세조각내는 건 강이 아닌 바다, 바다 건너 보이는

굵직한 탑은 이스탄불의 전경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인 갈라타 타워.

고등어케밥을 파는 배일 텐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장사하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불꺼진 빈 배만 남았다.

간판 왼쪽에 고등어 사진도 붙어있었다. 바게트빵 사이에 구운 고등어를 넣어주는 고등어케밥은 의외로

담백하고 맛있었는데, 비리지도 않고.

예니 사원 앞으로 이중삼중으로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 빨강색의 터키 국기가 선명하다.

갈라타 대교를 통과하기 직전, 대교 옆의 계단 통로에 그려진 그래피티들이 뭔가 인상적이었다.

저 눈알이 줄에 걸린 채 튕겨오른 듯한 그림은 아무래도 '낚시바늘 주의' 정도의 의미 아닐까, 여기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많으니 휙 뒤로 낚싯대를 제낄 때 뒷사람 눈에 낚시바늘 꽂히지 않도록

주의하란 뜻 정도 말이다.

커다란 호화 크루즈선들, 저 정도 사이즈의 배면 안에는 슬롯머신이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을까.

주로 유럽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올 때 저런 크루즈를 이용한다던데 장기간의 배여행도 재미있을 듯.

하늘은 급격히 사위어가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던 노란 가로등이 점점 강렬하게 불빛을 내쏘았다.

갈라타 탑이 언덕배기를 따라 조금씩 키가 커지는 건물들 사이에서 단연 우뚝 솟은 채 노랑색 실루엣을

뚜렷이 새긴 채 길 잃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미나렛 네 개를 가진 성 소피아, 그리고 미나렛 여섯 개를 삐쭉 세워올린 블루 모스크. 저렇게 열 개의

첨탑이 한눈에 들어오니 무슨 로켓 기지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셔터를 누르는 사이의 그 짧은 시간에도 하늘은 그 색깔을 휙휙 잘도 바꾸며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물색처럼 맑고 가벼운 느낌의 하늘이었는데 조금씩 어둡고 무거워지는 느낌, 그렇게 두 가지 얼굴을

한 대기가 서로 뒤엉켜 사방에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사이 크루즈선에도 조그마한 어선에도 갈라타

타워에도 평범한 건물에도 불빛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조금씩 어둠이 짙게 깔리면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사진을 찍기가 점점 어려워졌지만 보스포러스 해협

양 쪽으로 드러난 풍경들이 차마 혼자 보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온통 불빛으로 휘감아 정신없이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적절한 수준으로 특정 건물에만 임팩트를 준 조명들이 오히려 세련되어 보였달까.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은 톱카프 궁전 대신에 19세기쯤 유럽의 양식을 많이 차용하여

새롭게 지은 궁전이라고 얼핏 기억한다. 다른 것보다 바다쪽 정원에서 조그마한 항구랄까 배를

정박할 수 있는 접안시설이 있어서 바로 선박을 궁전에 이어붙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었다. 그렇게

돌마바흐체를 지나 흑해 쪽으로 가다가 다시 빽, 막연하게 들떠있던 어슴푸레함 대신 완연한 어둠이

내린 이스탄불을 바라보았다.




2004년, 휴가때마다 못을 밟아가며 노가다 현장에서 모았던 돈을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제대하곤 사흘만에

훌쩍. 터키와 이집트로 향했었다. 왜 하필 그 나라들을 가겠다고 맘먹었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덕분에 제대하곤 군대에서 공찬 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복학생' 껍데기 따위는 한번도 뒤집어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그만큼 행복했던 터키의 기억, 이번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디지털 모드로

6년만에 다시.

아낌없이 사진을 찍어주리라 다짐했건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새벽에 나와 아침 9시쯤 공항 도착하니

이곳은 일주일 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10월경이 터키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던데 아마 세계적 기상이변의 영향 아닐까, 창밖으로 빗발이 계속 빗금을 긋고 있었다.

톱카프 궁전 들어서는 길, 아침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여행객들이 참 많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사방에서

우산도 팔고 우의도 팔고. 저렇게 파란색 우의를 단체로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크루즈를 타고

놀러온 유럽인들이라 했다. 갈라타항구에 커다란 크루즈선이 정박하면 며칠동안 이스탄불 곳곳에 저들이

출몰하며 혼잡함을 더한다고.

티켓을 끊고 들어서는 곳부터 높은 천장, 금칠된 장식들, 묵직한 대리석의 위용.

이 꼬맹이들은 터키 어디선가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온 걸까. 선생님인 듯한 분이 한 군데로 모아놓고

설명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곳을 보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의 분방함은 어디나 똑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의 흙먼지 풀풀 나는 건조한 분위기에 익숙했다가 초록빛 가득한 궁전 안을 둘러보니 눈이

다 싱그러워지는 듯 했다. 더구나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주는 이스탄불의 아침이다.

궁전 곳곳에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문자들은 아랍어, 아마도 코란의 구절들 아닐까 싶지만 저건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지 여전히 감도 안 잡힌다.

화려한 문양과 금박들로 뒤덮인 궁전에서 이렇게 담백한 벽면 찾기도 쉽지 않은 지라 오히려 더 눈에 띄던

하얗고 소박한 벽면. 게다가 활짝 열린 창문간에 놓인 조그마한 꽃화분까지. 왠지 조그마한 공주님이라도

살고 있을 거 같은 귀여운 방이 창문 너머에 있을 거 같다.

톱카프 궁전에서 꼭 보아야 할 곳 두 군데를 꼽으라면 왕궁 내 여자들이 거처하던 하렘, 그리고 이곳 보석방.

200캐럿이던가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를 위시해서 투르크 왕조가 비장하고 있던 보석류와 호화로운 장신구,

황금칼 같은 것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색감이 참 좋다. 갓 구운 빵의 노릇노릇하고 먹음직스런 빛깔 같기도 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크림 같기도 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세워진 성곽이 왕궁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이스탄불 시내의 근처

해안가에는 오래전 세워진 성곽이 무너지거나 유실되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궁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꽤나 불편해보이는 돌의자 발견. 왕이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저렇게 딱딱한 의자에 바로 앉히진 않았겠지 설마. 십분만 앉아있어도 엉덩이가

시리고 욱신거릴 거 같다는.

독특한 형태의 격자가 들어있는 난간 아래로 졸졸졸, 낙수물이 흘러내린다.

네모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창살에 송글송글 맺힌 빗방울들.

좌우대칭이라거나 정연한 질서가 있지 않아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모자이크가 벽면 가득, 아마도

그때의 미감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던 것일까. 딱히 좌우가 대칭되어야 한다거나 똑같은 문양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던 거 같다. 그런 대칭미나 연속미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톱카프

궁전의 모자이크.

궁전 내에는 은근히 앉아 쉴 만한 곳이 숨어 있었다. 애초 사람을 앉히려고 저렇게 툭 튀어나온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궁전 안을 배회하다 지친 다리를 쉬기에는 안성맞춤. 이미 자리잡고서 느긋이

쉬고 계신 어느 풍채좋은 유러피안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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