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바퀴와 앞바퀴, 핸들과 브레이크선 등을 모두 연결한 모습. 부품에서 전체 조립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뭔가 아귀가 딱 떨어지는 느낌이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내게 친구가 말하길, "형 합법적으로 신나 불려고 저거 하는거지?"라니. 그치만 역시 니혼징의 섬세함은 못 따라가는구나..약간 국산품애용캠페인같이 스스로 세뇌를 하면서 어쨌던 끝내자고 다짐다짐.

스티커도 데칼처럼 얇고 정교하면 좋을 텐데 두께가 1미리쯤은 될 거 같은 두꺼운 비닐 소재다.

그래도 나름 추가적으로 도색도 하고, 약간의 커스터마이징도 하면서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보려 노력중.

이런 자전거 받침대의 용수철도 그냥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모양이라 납작하고 부실해 보이는 게 아쉬웠던 점. 진짜 스프링은 못 쓴다고 하더라도 좀만 더 정교하면 좋은데.

그래도 페달은 따로 도색을 했더니 색감이나 텍스쳐가 그럴 듯하다.

브레이크패드 부분도 무광 은색으로 도색을 했으니 그나마 좀 나은 모습. 그렇지만 저런 주형틀 자국이 남은 것들은 좀..

대략 완성샷. 그래도 완성시켜놓으니 뿌듯한 마음은 다를 바 없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plamodel #bicycle 그야말로 악전고투. 조잡함과 정교함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다..저 브레이크 라인은 계속해서 빠지고, 곳곳에서 흔들흔들 위태한 부품들의 결합상태라니.

어쨌든 그래도, 만들면서 자전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어떻게 동력이 전달되고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뜯어볼 수 있었던 기회. 재미있었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무려 20년 전의 모델인데, 친구가 선뜻 내주어 조립을 해볼 수 있었다. 바이크와 건담 이후 또다른 아이템.

그렇게 퀄리티가 높거나 (그래서) 비싼 녀석이 아니라 그런지 부품은 세가지 색깔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말랑거리는 타이어 고무가 맘에 든다.

아무래도 색을 좀더 써줘야 할 것 같아 갖고 있는 타미야 스프레이로 부분부분 포인트를 주기로. 빨간색과 무광 은색, 무광 검정색 정도 얹어주면 될 거 같다.

제법 디테일은 뭉개지지 않은 편이긴 하다. 체인부분이나 기어 부분엔 별도로 도색하니 좀더 나아보이기도 하고.

안장부분도 다시 도색을 했다.

뒷좌석 역시. 그렇지만 싸구려 크롬 느낌나는 은색 부품들이 좀 거슬린다. 게다가 부품이 말끔하게 주형되지 않아 마감이 약간 안타깝기도.

빠른 속도로 프레임을 만들고 뒷바퀴와 체인부분을 완성. 빨간 색으로 페달 부분 일부를 칠한 것도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인 듯.

그러나 이때까지는 몰랐다. 갈수록 태산, 안타깝던 퀄리티가 삐죽삐죽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리란 걸.

금요일 점심마다 짬을 내어 피아노 학원을 다닌지도 어언 3개월, 이제 슬슬 새끼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가고 어렸을 적

배웠던 것들이 몸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질러버렸다. 피아노. CASIO의 PX320, 가뜩이나 책으로 가득차서

좁은 방에 뭔가를 더 들이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멜로디 악기를 쭉 배우고 싶단 생각에 중고로 질렀다.

(셔터속도 15 sec, 조리개 F/29.0, ISO 800)

그리고 틈날 때마다 맹연습 중.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나, 늦게 들어가더라도 괜히 술이 땡기는 날이면 예전처럼

혼자 술을 홀짝이는 대신 피아노 커버를 벗기고 이것저것 치고 있다. 초딩 때 쳤던 정규과정에 따르자면 모차르트

연습곡 번호 5번이나 7번을 치는 수준에까지는 돌아왔는데, 굳이 그 레파토리 따르지 않고 치고 싶은 곡들 치려고

지금은 유키 구라모토의 'ROMANCE'와 야니의 'ONE MAN'S DREAM'을 주로 연습하는 중.

(셔터속도 5 sec, 조리개 F/11.0, ISO 100)

술을 혼자 마시거나 하진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엊그제부터는 집에서 위스키나 꼬냑 한 잔 따라두고 향이 잔잔하게

퍼지기를 기다리며 두어번 곡을 연습하는 재미에 눈을 떠 버렸다. 비틀비틀 건반 위를 허우적대다가 보면 어느 순간

황금빛 알콜의 짙고 끈적한 향이 음표처럼 방안을 떠도는 거다.

(셔터속도 8 sec, 조리개 F/32.0, ISO 1600)

우야튼 그리하여, 정확히 10월 6일에 업어온 피아노. 어느새 3주로 접어들고 있지만 피아노를 향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이름도 지어줘버렸다. '나넬', 모짜르트의 누나이자 숨겨진 천재, 그리고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그녀의 이름)

두고 봐야겠지만 어느 정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 되었다 싶으면 동영상 녹화를 해서 여기에 하나씩 악보와 함께

올려볼까 싶기도 하고. (셔터속도 1/25sec, 조리개 F/3.5, ISO 800)


아, 그리고 악기 사진 올린 김에 겸겸. 회사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기 시작한 알토 색소폰을 불고 있는 사진도.

2년 가까이 배웠지만 주중에 한번 잠깐 배우고 잠깐 연습한 거여서 아쉬운 점이 많다.

2년 동안 불면서 그래도, 아저씨들의 뽕삘 대신 근사한 재즈삘의 엇박을 조금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길고 이쁜 동그라미를 그리며 호흡을 내뿜도록 좀더 가다듬게 되었다는 건 앞으로도 큰 재산이 될 듯.

물론 그 '재즈삘의 엇박' 감각은 정박 클래식 악보를 펼치고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한참 충돌하더니 지금은

어디갔는가 모르겠다. 아마도 안드로메다로.







걸작은 이유가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연기, 군더더기를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깔끔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잔혹한 시험대를 극복한 너른 공감대를 확보해 내는 이야기까지.

그런 세 가지만 확보가 된다면 그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시 다음 시대의 전범 혹은 클래식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영화는 어쩌면 굉장히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8년 신좌파의 혁명이 있었고, 베트남전에서 쓰인 네이팜탄을 개발했던

연구소에 테러를 가했던 젊은 남녀가 도망자 신세로 살아가는 시대, 더이상 히피들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68혁명의 잔당들은 젊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반동의 시대인 거다. 게다가, 쉼없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망다녀야 하는 그 젊었던 두 남녀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하는 나이대에 이른

두 아이의 부모. 이런 가족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88년은 그런 부모와 가족이 정말 있을 법한,

68혁명의 아이들이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키워냈을 맞춤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다. 영화는 68혁명의 잔향에 기대지 않는다. 어쩌면 88년쯤에는 그 향기가 너무도

강하게 남아있어서 다른 것들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또다시 20년쯤 흐르고 나니

조금은 숨겨져 있고 조심스럽던 다른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 같다. 영화가 가리키던 현실을

조금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계속 환기되는 것은 겉으로는 '68혁명의 정신'이지만, 지금에 와서 읽히는 것은 차라리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에 대한 은유거나 '때가 되어 헤어지는 것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히

섬세한 묘사인 것 같다. (간편하게 '성장영화'란 네글자로 뭉뚱그리기엔 뭔가 너무너무 억울하다.)


세상에 믿을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다는 단호하고도 절박한 믿음, 그걸 단순히 꽉 막히고 세상에 겁먹은

부모의 못난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눈감으면 코베어간다'는 세상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선연하다.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금권력을 넘기는 거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 모두 그런 단호한 믿음의 소산인 거다. 세상에 믿을 건 우리 가족, 내 피가

섞인 우리 핏줄이야말로 세상이 무너져도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라는 오래고 오랜 믿음. 당대의 독재자들이

그런 식인데 하물며 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이야 어떠랴 싶어서 부모의 못난 소리는 가슴이 아프다.


사실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수십년 세월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건 '핏줄이 당긴다'며 수십년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르지않는

눈물로 증명되는 거다. 자식 역시, 특히나 한국처럼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부모를 '그(He)'라거나 '그녀(She)'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멘탈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연고로 묶인 패거리문화와 시스템이 최후의 보루로

'가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신성화해 버린 점도 있을 테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가족'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일 테고.


그렇지만 가족은 또다른 가족을 낳으며 분열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필연이다. 플라나리아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면 각기 두 개의 새로운 플라나리아로 분열해 생존하듯, '가족'을 찢어내어 다시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아플 수 밖에 없다. 자식들은 크고 부모는 늙는다. 자식들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죽는다. 단순한 과정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저항과 혼란, 싸움의 징후들이 보이지 않는가.

'허공에의 질주'에서 나온 리버 피닉스처럼 피아노와 대학이 탐탁치 않은 아버지와 맞서기도 하고,

마샤 플림튼처럼 중산층 부모의 삶이 허위에 가득찬 채 인간적이지 않다며 부정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이 철이 없다거나 아직 부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며 갈등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짐은 이르건 늦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예비되어 있는 거다. 언제까지

품안의 자식이고, 언제까지 하늘같은 부모여야 할 건가 말이다. '토이스토리3'에 나왔듯, 살아있는

것은 모두 나이를 먹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칼을 꼽고 손톱을 박으며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잘못된 헤어짐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짐이 된 채

불구를 만들고 만다는 게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들의 오프닝이었으니 적지는 않을 거 같다. 아무리

성숙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좋게 헤어진다고 해도, 그 헤어짐은 마치 자궁을 빠져나오는 순간과

같아서 배꼽이란 상흔을 남긴 채 더이상 이전의 세계를 허용하지 않을 거고.


굳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한정할 것도 없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친구, 선생과 제자,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할 만한 그런 관계에는 어느 순간 헤어짐과 분열의 순간이 닥쳐오게 된다.

그게 우발적이던 필연적이던, 그런 식의 평가는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내릴 수 있을 뿐이지만 만약

언제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피할 수 없는 때라는 느낌이 왔다면 그런 헤어짐에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걸까. 쥬드 허쉬와 크리스틴 라티처럼, 리버 피닉스처럼 나 역시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때론 반발하다가, 결국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슬프고 아름다운 분열의 과정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까. 슬프고, 서럽고,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또 한켠, 뿌듯하고, 기쁘고, 대견하고, 설레는 느낌들이 마구 뒤섞이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바로 그랬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아름답지만 슬픈 헤어짐의 이야기.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헤어짐을 경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평생 기억할 만한 영화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겠다.



@ 서울가족영상축제, CGV송파.




약간 싸구려스럽게 빰빰거리며 울리는 배경음악이라거나 중간중간 챕터 제목을 붙여주듯 커튼이 내려가듯

그림이 끼어있는 것들, 1973년의 미국영화란 건 그랬구나 라는 깨달음은 줄지언정 오히려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던 요소들이었다. 아무래도 요새 영화보다 못하지 않겠냐고 턱없이 얕잡아보며, 그래도 고전을 본다는

의의는 있겠거니 쉽게 생각하며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그렇지만 굉장히 재미있었다. '영화'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능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으리라 그저 믿고 있었는데, 그런 거 아닌 거 같다. 짜릿한 반전의 쾌감은 어쩌면 사십여년 전에도 영화를

갖고 이렇게 재미있고 잘 짜인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데서 오는 신기함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어렴풋이 이름을 들었었던 과거의 배우들, 폴 뉴먼이라거나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력도 그렇고 엔간한 반전은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닳고닳은 이에게도 감탄하게 만드는 스토리도 그렇고,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탄탄하게 끌고 가는 감독의 역량도 그렇고. 도박과 사기를 소재로 한 영화야 쉼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지만, 그 모든 작품들의 원류이자 지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타이완, 주펀.


후텁한 열기가 커다란 물풍선처럼 출렁대며 골목을 꽉 틀어막던 어느 순간, 길 옆의 찻집으로 피신했었다.

뽀송하고 시크한 에어컨 냉기 대신 적당히 눅눅하고 서늘한 지하실의 분위기가 풍기는 그곳에서 만난 선풍기.

워낙 오래 열심히 바람을 불어대느라 반짝거리는 페인트가 대부분 벗겨 날려간 거겠지만, 여전히 정숙하고

야무지게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이 맘에 꼭 들었댔다.

꼭 생긴 것마냥 불어대는 바람, 굉장히 심플하고 순박한.








요새는 위드블로그에 종종 앨범이 리뷰대상으로 오르고 있지만, 위블에서 올린 음반 리뷰의 첫대상이었던 '화나'

힙합앨범이 운좋게 당첨된 이후([FANATIC] 생기다만 귀로 듣는 화나의 힙합.)로는, 전혀 당첨의 기회가 없었던지라
 
아쉬워 하던 참이었다. 아마 그때의 리뷰가 맘에 안 들었나보다, 역시 내 귀는 생기다 말아서 누군가의 음악을

평한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렸나보다..여러 가지 자책감과 자괴감이 물밀듯 몰려오던 중.


"클래식/크로스오버 뮤직의 센세이션! 본드와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된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라고?

본드는 제임스 본드를 말함인가 했지만, 여튼 바네사 메이는 안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나름 좋아라 하며

찾아들었던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란 단어가 와닿는다. 오호...냉큼 신청.

"레드 제플린의 'Kashmir',엔니오 모리꼬네의 'Chi Mai'라니요..이 두곡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해서 연주했는지 꼭 듣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바네사 메이밖에 모르고 본드가 누군지, 에스칼라가 누군지 듣도 보도 못했지만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단 게 대체 어떤 느낌일지 맛보고 싶네요."

라고 알랑방귀 아닌 알랑방귀를 뀌었더니, 뿡, 소식이 왔다. 역시 방구가 잦으면 또...흠, 여튼.

앨범 포장지에도 붙어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최종전까지 진출했던 그녀들인 게다. 하긴 데뷔 앨범에서

'Palladio', 'Kashmir' 두 곡이 동시에 싱글 차트에서 대박을 냈다니 실력은 인정받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들어보니 2번 트랙 Palladio와 3번 Kashmir, 그리고 7번 Chi Mai와 9번 Serabande가 가장 귀에

꽂힌다. 주로 가사없는 클래식 음악이나 뉴에이지 음악류는 틀어놓고 쭉 BGM으로 쓰는 터라 따로 트랙번호나

곡 이름을 확인하는 일이라곤 좀처럼 없는데, 이렇게 네 곡은 앨범을 들춰 제목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특히 Palladio는 그녀들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들고 나간 곡이라던데, 아마 그 쇼에 나가서 처음 이 곡을

선보이던 순간, 심사위원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지 않을까. 포장지를 쭉 잡아찢어 그녀들의 음악을 좀더

맛보고 싶다, 대체 이 세련되면서도 파워풀한 곡 흐름은 뭐지, 두 대의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한 대의

첼로로 이렇듯 풍부한 감정을 탄주할 수 있다니. 아마 그랬기에 최종전까지 올라갔었으리라. 다른 재해석된

곡들도 물론 멋졌지만, 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곡이 바로 Palladio인 것 같다.


나름 클래식한 우아함, 장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스피디함과 보다 드라마틱한 궤적을 화려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씨디를 아예 차에다 갖다놓고 시간날 때마다 듣게 되는 걸

보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는 거다. 아마도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한번쯤 살지 말지를 고민하게 될

법하다. (물론 그 전에 리뷰대상으로 나온다면 꼭 뽑아주세요~하고 저요저요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흐릿한 바네사 메이보단 파워가 약하면서도 좀더 풍부한 화음이 장점이지 싶다.

아무래도 솔로와 밴드의 차이겠지만. 점수를 주라면 솔직히 바네사 메이에 쏠리겠지만, 데뷔 초의 그녀와 비기는게

공정한 거고, 그렇다면 글쎄. 오십보 백보의 점수를 받지 않을까.

멋진 앨범이었지만, 다만 한 가지. 배송 상태가 왜이렇게 엉망인지 씨디 케이스를 열자마자 나뒹구는 씨디와

옥수수 강냉이 이빨빠지듯 사방으로 튀겨나가는 씨디 케이스 쪼가리들. 에어캡을 좀더 감던가 택배직원에게

좀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던가, 씨디를 열 때마다 조심스레 수평맞춰 여는 일이 없도록 다음번에는 신경을

좀 더 써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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