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느 가족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보금자리였겠지만 이젠 한무더기의 건축폐기물로 변한 돌무덤

 

위를 밟고 올라가 아현동 일대의 재개발지역을 한눈에 내려보았다.

 

 

그 와중에 돌무덤 틈새를 비집고 노란 꽃줄기 한 가닥이 꿋꿋이 피어오른 모습이란.

 

 

 

누군가 신었을 발레슈즈도 탁하고 무거운 시멘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하늘하늘, 반짝거리고 있었다.

 

 

 

B&W 모드의 사진 몇 장. 뒤에 우뚝 서 있는 삼성 아파트와 그 앞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들이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다.

 

 

화장실 창문만한 조그마한 창에 엉성하게 덧붙은 가림막.

 

붕괴 위험으로 막아놓은 길 너머엔 이십년 전에나 보았을 법한 비디오테잎이 나뒹굴고 있다. 저 안은, 1990년대인 건가.

 

낚시바늘로 성을 지은 것처럼 살벌한 담장 끝 방범창살.

 

 

빛과 그림자. 왠지 딱 그런 문구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집앞에 잔뜩 쟁여진 쓰레기들, 그리고 생활 폐품과 재활용품들.

 

 

저 집은 아무래도 사람 얼굴이다. 눈썹 붙인 게 뜯어져버린 오른쪽 눈에 너덜거리는 왼쪽 눈,

 

게다가 젓가락을 꼽고 있는 한쪽 콧구멍. 뭔가 일본식으로 즐기며 술을 마시는 중인가 싶은.

 

 

 

 

 

어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부지런히 모아서 꽁꽁 동여매 놓으셨을 폐지 묶음들. 어렸을 땐 그러고보니 저거 챙겨서

 

학교에 가져가서 무게도 달고 그랬는데.

 

애오개 고개에 자리잡은 철거촌, 그 곳에 핀 꽃들은 이쁘다기보다는 왠지 풀죽은 채, 그렇지만 가시를 세운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아마도 저 허름하고 시트조차 다 사라져버린 소파는 이 곳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거 아닐까.

 

 

재개발지역을 떠나 차들이 씽씽 다니는 큰길로 올라서는 계단, 시멘트 계단에 녹물이 흐르고 흘렀는지

 

붉게 염색이 되어 버렸다.

 

5호선 애오개역, 출구에서 내리고 몇걸음 떼지 않아 저너머로 보이는 황폐한 옛 성같은 느낌의 외딴 건물.

 

 

큰 길가에서 한발, 골목을 내딛었을 뿐인데 공기부터 달라지는 듯한 분위기.

 

 

 

 

 

 

가로등과 건물들이 켜켜이 어깨를 이어붙이고 선 좁은 골목, 불빛이 사정없이 짓쳐드는 게 불편했던지 아랫도리를 둘렀다.

 

마치 종로 피맛골 골목통에서 옛 국세청 건물을 올려다보는 듯한 풍경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세발 자전거는 누가 타고 놀았을까. 언제부터 저 야트막한 지붕들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얹혀 있었을까.

 

 

 

 

 

 

골목 한 귀퉁이엔 언제 잘려나갔는지 제법 굵직한 나무 밑둥이 그대로다. 심지어 연둣빛 싹마저 돋았다. 어쩌려고.

 

 

아귀가 틀어져버린 붉은 벽돌담. 언제부터 저런 계단식 균열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철거가 빠를까 붕괴가 빠를까.

 

 

 

하늘에다 대고 날리는 주먹감자처럼, 뻐큐손가락처럼, 삐뚜스름하게 올려세워진 연통.

 

 

 

방범창살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린 위에는, 고작해야 나무 판넬 몇장에 헝겊이 덮인 천장 뿐인데. 하늘이 무거웠나보다.

 

 

어디론가 계속 발걸음을 유도하는, 골목과 골목과 골목들. 이집트 카이로의 옛 거리나 상해의 골목통을 찾을 일이 아니었다.

 

 

납작 엎드린 건물 뒤에서는 훤칠하고 반듯한 아파트가 위세를 부리고 섰다.

 

 

벽돌들과 폐건축자재로 가림막을 친 조그마한 채소밭..이랄까. 행여 누가 뜯어갈세라 사람사는 집만큼 높은 담장을 둘렀다.

 

 

어느 집 대문 밖에 내걸린 채 하릴없이 바람에 시달리던 몸뻬바지 한 벌.

 

 

 

 

한줌 볕조차 다닥다닥한 게딱지 지붕에 걸려버려서, 골목은 으레 어두침침한 데다가 선뜻한 냉기마저 감돈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어느 집에선가 커다랗고 호들갑스러운 라디오 광고도 들리고,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싸우는 소리도 들린다. 좁은 골목통을 비집고 들어오기엔 벅찬 한줌 햇살 대신 골목을 채운 건 어디선가 날아온

 

짙고 끈적한 메주 냄새, 음식물 썩는 냄새.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사방으로 난반사되는 소음들만 난무하는 덕에 현실감각이 살짝 비틀어지는 듯 했지만,

 

그래도 여기 사람이 산다. 비닐봉투에 야무지게 묶여 나온 하얗게 타버린 연탄 네장.

 

 

 

 

용산 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을 하던 문규현 신부가 쓰러졌다. 문 신부는 단식 10일째 22일 새벽 5시 신월동 성당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문 신부는 숨을 쉬지 못했고 맥박도 뛰지 않았다. 함께 있던 나승구 신부(역시 단식 중)가 심장 마사지를 했고, 119를 불러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조치를 마친 뒤 문 신부는 오전 8시 55분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다.

   
ⓒ시사IN 장일호
병실을 지키는 문정현 신부와 용산참사 유족 전재숙씨.
나승구 신부는 “오전에 쓰러지실 때 심장마비가 왔다. 병원 쪽에서 그 때 뇌로 산소공급이 안 돼 뇌손상으로 의식이 없다고 한다. 하루 정도 있으면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여의도 성모병원 최승필 응급실장은 “심폐소생술 등 응급 처지를 했다. 현재 의식은 없지만 혈압은 안정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큰 위기를 넘겼지만 의식이 돌아오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의식은 하루정도 지나면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문수
지난 5월18일 저녁 용산 참사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에서 열린 광주항쟁을 기념 및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한 오체투지로 순례중인 문규현 신부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현재 병원에는 전종훈 신부와 문규현 신부의 여동생 두명이 병실을 지키고 있다. 문 신부의 형인 문정현 신부는 문 신부가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용산 참사현장으로 돌아갔다.
용산 참사현장에서는 문 신부를 비롯해 전종훈 신부, 나승구 신부 등이 단식을 계속 하고 있었다. 전재숙 씨 등 병원을 찾은 용산 참사 유족들은 “(단식)중단하셔야 한다. 안 그러면 저희도 모두 단식에 들어가겠다”라고 말했다.


2009년 10월 22일 (목) 13:38:38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                                                               *                                                               *

네이버 포털 중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를 제하고는 기사창에 뜨지도 않았다. 온통 '서울대생이

술통에 쩔어간다'라느니, '김태희가 생각보다 글래머'라느니, '강남 5대미녀, 난 양치질해도 화보'

라느니, 포르노가 어쩌구, 콘돔이 어쩌구저쩌구.


어제는 생각없이 웹툰을 뒤지며 뭔가 찾다가 꽤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무슨 광고/홍보용

웹툰이 그렇게 많아. 심지어는 삼성 MP3플레이어 아이콘을 소재로 한 웹툰도 있었다. '도전만화'에서

'요일 웹툰'으로 정식 등극하기 위해서, 혹은 보다 많은 노출이 되어 '베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추천을

해주고 높은 평점을 매겨줘야 하는데, 이런 시스템으론 상업자본의 분탕질에 너무 취약하지 않을까.


인터넷이 처음 도입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 열광했었다. 정보격차를 줄이고

그야말로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로 양질의 정보가 선순환할 거라 생각했었던 게다. 그런 식의 환상은

이미 사그라든지 오래, 오히려 '빅브라더'라거나 하루키의 1Q84식으로 말하자면 '리틀피플'이 날뛸

가능성만 높이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전보다 나아지진 않은 것 같다.


문 신부님,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얼른 일어나셔요..ㅜ





용산참사현장을 돌아보며 느꼈던 건..이 곳이 단순히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사고 현장일 뿐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분향소이자, 거리의 감수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거리미술관이자, 또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한

추모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대로 적나라한 한국의 현실과 빈궁한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근거지이기도 했다.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1/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2/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니들이 경찰이면 나는 송혜교다".(3/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용산학살를 용서하지 않다!"(4/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매일 추모미사가 열립니다.(5/5)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용산참사 해결없이 이땅에 민주주의란 없다.

진상 규명은 사실상 그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어느정도 된 상황아닌가. 누가 잘못한 건지, 안전수칙을 누가 어겼는지,

그리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대충 언론보도로 (중구난방식일지언정) 노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선.

과잉진압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생존권대책 마련없는 난개발정책 중단하라.

용산 참사현장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유가족분들에게 힘을 보태고, 귀막은 정부와 언론이 바라는 대로 잊혀지지는

않는다는 걸 직접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에 더해 민주주의를 위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 가는 길 :

용산역 1번 출구, 혹은 신용산역 2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10분 이내.

저기 번개가 내리꽂힌 곳이 바로 용산4구역 철거민분들이 망루를 짓고 올라가셨던 곳이다.

..바로 여기.

다음 스카이뷰에 오른 사진은 언제 찍혔던 걸까. 아직 건물이 멀쩡히 제 기능을 할 때, 유리창들이 온전할 때, 그리고

그때만 해도 누군가 저 위에 올라가리라곤, 또 올라가 불에 타 돌아가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때임에는 틀림없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세난이 가중되면서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강남권 등 지역에서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의 60% 수준까지 치솟자 전세입주자들이 아파트에서 연립이나 다세대주택, 단독주택 등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고 같은 서울 지역에서도 값싼 다른 지역이나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서민들의 주거 수준이 하향이동하는 현상이 잇따르고 일부 있는 것.

아울러 아파트의 경우 전세난이 매매가격을 밀어 올리는 현상도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서민들의 내집장만 여건도 더욱 험난해지고 있다.

■전세난 속 서민 주거환경 악화


3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주택 전세난이 서울 강남권에서 강북지역 등으로 확산되면서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다.

서울 반포동의 부동산명가공인 관계자는 “최근 아파트의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자금이 부족한 신혼부부나 무주택 서민들이 인근 단독주택가로 몰리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서초구 방배동이나 동작구 사당동 일대 단독주택의 전세가격도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개발로 주거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더욱 악화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저가 수요가 몰린 빌라, 단독주택 가격도 크게 오르면서 이제는 저소득층이 서울 내에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2000년대 초에는 더 좋은 생활환경이나 투자처를 찾아 서울 거주자들이 외곽으로 나갔다면 지금은 전세자금이 부족한 무주택 서민들이 김포나 광명 등 경기 외곽지역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용산구 시티부동산의 한 관계자는 “용산구 일대에 새로 분양한 재개발 아파트 전세값이 2억∼3억원을 호가하다 보니 인근 단독주택이나 빌라 전세가도 모두 억대로 급등했다”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전세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경기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용산구 용문시장 일대에서는 불과 2∼3년 전만 해도 3000만∼5000만원이면 투룸짜리 전세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돈으로 원룸 빌라도 구하기 힘들다.

ⓒ 파이낸셜뉴스 (2009-08-03 17:44:21)


저녁 7시에는 어김없이 용산 참사 현장 바로 옆 골목에서 추모미사가 열린다. 6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제단을 설치하고

미사 준비가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다. 대체 이런 골목에서, 더구나 차들이 씽씽 달리는 8차선도로를 바라보며..미사가

가능할까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 걸까, 생각이야 약간씩 다르고 해법 또한 다를지언정 가슴속 답답함이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와서 이 자리를 채웠는지 모르겠다. 바닥에다가 길다란 깔개를 십여줄 깔아놓는 걸 방금전에

보았는데, 잠시 한눈판 사이에 사람들이 사이좋게 자리를 메웠다. 어린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도 보이고, 혼자

오신 듯한 할머님도 보이고, 친구들끼리 온 듯한 젊은 처자들도 보인다.

7시. 미사가 시작됐다. 난 문정현 신부님이나 다른 빈민활동 담당하시는 신부님이 늘 미사 집전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190여일째 진행되는 추모미사라 그런지, 전국에서 신부님들이 오셔서 돌아가며 집전을 맡는다고 하셨다.

이날은 인천에서 오신 신부님이 미사를 주관하셨다.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고 윤용현님을 위한 생명평화미사.

미사라고는 하지만 종교, 혹은 가톨릭의 신을 위한 제의가 아니다. 시작성가는 노찾사의 그루터기 1절. 민중가요가

골목 안을 꽉 채웠고, 골목을 삐져나간 가요소리는 지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신앙을 전파하려는 전도의

목적이 아니라, 세속의 일을 세속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설득의 목적으로 열린 미사다.

제단을 향해 미사 참석자들의 머리가 숙여진다. 부디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벼르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늘에 계신 분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관하시라 하고, 땅에 있는 우리들은

땅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일들을 알아서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한쪽에는 '질서유지선' 뒤에 정복 차림 의경 넷이 뭔가 열심히 전화도 받고 무전도 받고, 보고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의경 네 명이 질서유지선을 설치하고 현장의 질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이들이 질서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미사가 골목을 메우고 집전되고 있는데 정작

경찰들은 그렇게 질서정연하고 성숙한 분위기 바깥에 쫓겨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질서유지선이 왜 저기에 쳐져 있는지도 궁금하고, 이 경찰아저씨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기에 나란히 넷이서

서있는지도 궁금하다. 사람들이 경찰에 질서를 부여해준 것만 같다. 경찰을 위한 질서유지선인 거다.

그러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진행되는 미사. 혹은 미사의 형태를 빌어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산 자도 더불어 위로하는

신부님의 부드럽지만 힘있는 나직한 말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쳐다본다.

앞에 길게 깔린 깔개들 말고 뒤에는 색색의 간이의자가 놓였더랬다. 엄격하게 열이 맞춰서 놓이지는 않은, 편할 대로

의자를 땡겨서 앉아 미사를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인 데다가, 나처럼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적잖았지만

미사 분위기만은 그 어느 미사보다 팽팽하고, 살아있었던 느낌이다.

7시 반..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다시 한번 올려다본 참사 현장. 네모반듯한 아가리들을 시꺼멓게 벌리고 선

건물이 참...흉흉해 보인다. 건물 탓은 아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 탓이다.

여전히 질서유지선이 경찰들로부터 미사 참석자들을 보호해주고 있었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치만 조금씩 속도를 내어 용산 참사현장을 벗어났다. 공기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거긴.

진상 규명은 사실상 그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어느정도 된 상황아닌가. 누가 잘못한 건지, 안전수칙을 누가 어겼는지,

그리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대충 언론보도로 (중구난방식일지언정) 노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선.

과잉진압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생존권대책 마련없는 난개발정책 중단하라.

단순히 약자에 대한 도덕적 공감이나 정서적 동정심으로 그쳐서 될 문제가 아니다. 한번으로 끝날 일도 아닐 뿐더러,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리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학살를 용서하지 않다!" 서툴고 얼핏 웃기는 말, 그렇지만 흔들림없이 다부지게 내려간 ㄹ의 획이라거나

90도로 딱딱 꺽여있는 단정한 서체를 보자니 그 문구를 쓰는데 기울였을 열의와 집중도를 알겠다. 외국인들이

아마 '연대'하러 와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그 뜻은 분명히, "용산학살을 (일으킨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였을 거다.

"대학생이 함께 하겠읍니다!" '읍'의 센스도 센스지만, 반드시 이길 거라는 격려가 와닿았다.

아예 시커멓게 문대버린 벽면에 남아 있는 건, 꽃잎, 그리고 꽃잎 사이로 부유하는 다섯 분의 영정사진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다. 위에서부터 단정하게 써내려갔는데 기둥이 모자라 말을 다 못한 느낌.

여지없이 아스팔트 바닥도 선전 공간이 된다. "이윤보다 사람이다."

이윤 대신 사람을 챙기란 말이 아니다. 이윤을 챙겨도 사람부터 챙겨놓고 챙기란 말이다. 이것도 못하겠다면..

여기 사람이 있다. 잊지 않는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 잊지 않는다.

3천쪽을 공개하라..는 구체적인 요구조차 묵살당하고 있다.

경찰은 인제 큰일났다. 담벼락에는 살벌한 가위 표시, 공중화장실에는 "견찰사용금지" 표시. 어쩔 테냐.

'내 인생이랑 상관없는 대한민국 7%의 부유층을 위한 건물.' 그걸 위해 부서지는 93%의 생존 공간.

어쩌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란 믿음 내지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7%의 가능성에 눈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개천에서 용나기란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감에도.

우비를 붙여 놓고, "국민들이 완전히 뒤돌아 설 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이걸 설치한 사람의 센스도 센스지만,

완전히 뒤돌아 서게 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갈수록 섬뜩한 공포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오세훈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광화문광장, 오늘도 10명이 기자회견 중 끌려나갔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광장'이란

아무런 소음이나 불만세력의 '준동'없이 모두가 하하호호하며 개별적으로 즐기는 공간만을 이른다. 나머지는 얼룩.

빠염~* 플리즈 빠염~^^

그래도 웃자. 왠지 이 삼엄하고 살벌한 땅 위에 저런 스마일 표시가 강림하다니, 이걸 적은 사람은 초인인 게다.

그래도 웃자. 맞는 말인데, 이 상황에서 웃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왠지 먹먹하다.

차라리 이게 인간적이다. 전경은 걷지마, 라고 땡깡을 부리듯. 떽!! 이라는 고함소리까지.

지우려고 애쓰는 사람과 지우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 누군가 촌평했듯 독일 베를린 장벽에 그려졌던 온갖 그림과

메시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무언가에 대한 항의, 희구, 그리고 열정.

건물 중 아직 철거되지 않은 한 동의 건물에는 민노당 용산4구역세입자분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적잖은 갈등이

이미 있었는지 온통 빨간글씨로 도배되어 있다.

인권의 사막 용산. MB정권의 흉터 용산. 양심의 집결지 용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용산.

작가선언의 이런 언명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함이다. 양심의 집결지가 되어야 하며,

더이상 밀려날 수 없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곳이 용산이어야 한다.




 
"니들이 경찰이면 나는 송혜교다".ㅋㅋㅋㅋ 문득 웃음이 터졌었다.

거울까지 달아놓았다. "거울아 거울아".

"이명박씨, 당신이 선택하시라!" 이미 그는 수차례 선택을 선언해왔다. 새삼스레 바랄 것도 없지 않나..는 게 갠적인 생각.

"용산 참사 해결없이 이 땅에 민주주의란 없다."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목숨값도 가벼워야 합니까...

씁쓸했던 손자보 하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언젠가 새벽은 온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시절

했던 말이다. 이만큼, 뒤로 돌아갔다.

버려진 매트리스 세개로 그려진 세폭짜리 그림. 입에서 포클레인이 나오는 그대는, 진정한 트랜스포머.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라는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만평들을 다시 만났다. 반갑다기보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때만 해도 2개월이나 지났으니 뭔가 해결이 되겠지..했는데 어느덧 6개월이 넘어간다.

"돈놀이로 사람 죽이는 이 미친 개발을 당장 멈춰라." 돈과 사람 사이에 부등호를 세운다면 아가리가 돈 쪽으로 가는 세상.
"삶 자체를 철거하는 재개발 정책."

다섯 분의 영정이 실크스크린같은 형태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걸 굳이 다시금 지워버리려 한 누군가의 덧칠이 보인다.

이건 전쟁이다. 이 좁고도 별볼일없는 담장을 둘러싼 여론 싸움이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지우며, 다시 그 위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공간은 보수언론이 장악한 거대한 체스판의 아주아주아주 미미한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만큼 날 것의, 그만큼 적나라한 이야기가 활자화되는 거지만, 동시에 그건 그만큼 세가 약하고 외롭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MB 퇴진. 의원내각제였다면 벌써 정권이 열번은 넘어졌을 거라고 손호철 교수가 그랬던가.

길바닥 역시 유용한 선전공간..이라기 보다는, 통로가 없다. 이들이 발언하고, 동의를 구하고, 자신들의 목청을 높일

공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온 비명같은 외침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깊이깊이 새겨진다.

"철거하면 이명봙". 봙.

"공권력 메롱". 굳이 지난 촛불시위 때의 발랄함과 재치있는 움직임들을 들지 않아도, 조금씩 그들은 우스워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고 있으니, 풍자의 의욕은 날로 높아간다.

"우리는...더 큰 울음소리로 살아날 것이다." 그치만 때는 진보세력조차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게 만드는 시대.

울음소리가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해야 하는 시대.

어느새 용역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버렸다. '용역경찰 박살내자'.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란 책의 표지에 나왔던 판화 그림이 붙어있었다.

"비록 패배가 지금 우리의 삶일지라도, 우리는 사랑도 알고 꿈도 안다." ...

돌아보다 보니, 무슨 전시회나 미술관을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짧막하지만 생생하고 강력한 아포리즘들과 그림과 사진,

판화와 만평, 때로는 설치미술작품같은 것들까지. 그래피티가 별거인가. 어쩌면 애초 그래피티 정신엔 훨씬 어울린다.

이렇게 누군가가 열심히 지우는데 여념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때론 무지막지한 상말이 난무할지라도,

용산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현세던가, 처음 포돌이 포순이 캐릭터를 제공하며 집회 현장에서 인형가죽을 뒤집어쓴 경찰을 만들어냈던 게.

그야말로 양의 가죽을 쓴 늑대란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물론 모든 경찰 구성원을 싸잡을 생각도 없고, 경찰력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착한 척 귀여운 척 '민중의 지팡이'입네 하면서도 결국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학살도 주저치 않는 엄연한 '합법적 폭력조직'의 양면성이 엄존한단 걸 잊으면 안 될 거 같단 이야기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랍니다..그날의 화염이 자꾸 눈 속에 어른거려서..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참사가 벌어졌던 건물 옆 골목을 들여다보니 지역 전체가 재개발로 인해 허물어진 상태였다. 이미 많이 부서졌고,

앞으로 철거를 앞둔 듯 텅 비어버린 건물들. 거기에 철거민분들과 유가족들은 다시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여기 아직 사람이 산다. 여기, 사람이 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반년, 여기에 있는 사람, 여기서 외치는 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걸까.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흥얼거리며, 아...나도 한때는 철거민이었고

소상인, 노점상이었으며 의분 넘치는 운동권이었노라고 자뻑에 취해 있는 걸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때도 반입이 금지되었던 만장용 대나무다. 죽창으로 언제든 변신할 수 있어서라나.

사실 용산참사의 일차적인 평가는 너무너무 명료하다.  생존권 투쟁에 나선 철거민에 대한 과잉진압. 거기에

덧붙여 철거민에 대한 보상의 법적 문제라거나 재개발사업의 불합리함, 등등을 따질수야 있겠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여섯 명이나. 안전수칙도 어기고, 그것도 용역과 함께 과잉진압했다, 미안하다, 진상조사해서

재발 방지하겠으며 책임자에 대해 처벌 확실히 하겠다. 이런 말 한마디 못한다니 말이 되나.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정도도 이분들에겐 사치스러웠나.

그러는 와중에 전면에서 부딪히는 건 극도로 날카로워진 철거민분들, 유가족분들과 전/의경들을 앞세운 경찰이다.

이곳으로부터 심심찮게 들렸던 신부님들에 대한 구타, 과잉 대응 사례들은 급기야 천주교 측의 공식 항의로까지

이어졌었다고 들었다. "권력자의 개", 혹은 "민중의 보호자"라는 극단적인 그림 가운데 근래 급격히 어느 쪽에

가까운 모습이 선연히 부각되는 건 사실이다.

주변 철거완료지역을 에워싼 벽에 붙어있는 경고문. 애초 손해 보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하루아침에 퇴거를

강요당한 철거민들이 살 길을 터달라고 이곳에 버티는 순간, 불법점유, 무단침입, 업무방해, 재물손괴, 폐기물관리법

위반, 폭력행위, 주거침입, 특수주거침입죄..에 더해 안전사고의 책임까지 몽창 떠맡게 된다. 국가의 보호로부터

배제당하게 된 그들인지라, 용역에게 협박당하고 구타당해도 의지할 곳이 없다.

"우리의 웃음이 없는 민주주의 민생은 거짓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환상인지도 모른다. 가진자들은 여전히 그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절대법칙은 공고한데

대체 뭐가 민주주의란 말인지. 그게 현실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궁해지는 거다.

용산 참사 유가족분들을 돕기 위한 장터랄까, 포차가 열렸었나 보다. 철거된 건물들, 철거될 건물들이 온통 주위를

삼엄하게 메운 가운데 샛노랗고 새파랗고 새빨간 간판이 왠지 슬프다.

바로 뒷 건물은 그림책 화가분들이 전시 공간으로 쓰고 계셨다. 전시공간이자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는지 사람이

계속 상주하는 것 같았다. 우린 끝까지 간다. 우린 힘들지 않다. 최면 문구와도 같은 그런 말들을 현수막에 내걸고.

옆의 텃밭은 고추, 상추, 깻잎, 열무 등 이런저런 채소류를 품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드시라는 소개글과 함께,

'공동선을 위한' 공권력이란 문구가 언뜻 눈에 띈다. 공동선은 별게 아니다. 같이 살자는 거.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피해주지 않고 함께 살려나가자는 거. 쉽다면 이토록 쉬운 거다. 채소 나누기만큼.

한 쪽에 쌓인 녹슨 쥐덫들. 아마 예술하시는 분이 작업하려고 놔두신 건지, 퍼포먼스나 작품에 이미 쓰였던 건지.

80년 광주 학살, 09년 용산 학살. 단순 등치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리고 희생자에 대해 '우리'라는 마인드를 갖기란

더욱 쉽지 않을 거다. '전라도치'나 '철거민'이나 '우리'란 단어로 묶기는 어렵기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란 책의 한대목에 그런 말이 있다. 철거민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철거민이 될 거란 상상은 꿈에도

못했노라고. 마치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처럼 재개발 사업이 닥친 거고, 제도적으로 '보험'조차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음은 그 이후에야 깨달은 것 뿐이었다. 그뿐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만든 현수막인 듯 하다. 맞춤법도 맞지 않고, 다소 낯선 색감에 못알아들을 단어들이 가득하지만,

그 의도와 의지만은 분명하다.

집은 살 것, 상품이 아니라 살 곳, 기본적인 권리다. 집을 이윤을 위한 상품으로만 여기는 순간,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순간 그 공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이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계속해서

열악한 지역으로, 철거와 재개발을 기다리는 지역으로 옮겨가 결국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그들의 게으름, 못 배움, 재수없음, 팔자...를 운운할 바에야, 차라리 2등국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솔직하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몇몇 작품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이 연필 그림.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다.

얼굴이 비어있는 여섯번째 영정사진, 그 경찰과 유가족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부는, 그들에게는

제대로 사과하고 유감을 표했을까. 그조차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을 부수고 생겨난 멋진 도시는, 가구수도 적고 집값도 월등히 뛰기 마련이다. 주변집값도

덩달아 뛰어 버리니 결국 집주인과 세입자를 막론하고 원주민 대부분에겐 동네를 떠나는 길 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정비해요. 시멘트를 발라서.

문득 걱정이 생겼다. 이런 작품 찍어올리는 것도 저작권 위반일까. 작가의 의지와 별개로 고발당할 수 있다고 얼핏

들은 거 같은데..문제가 된다면 바로 삭제하는 수 밖에. 쫓겨날 일없어 좋겠다, 불지를 놈없어 좋겠다.는 마지막 문구.

영업합니다, 란 간판이 되려 휑한 분위기를 더했다. 뒷쪽으로 쭉 늘어선 음식점들이 몇군데 문을 열긴

했지만...아마 조만간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거다. 제대로 보상은 받으셨을까.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걸까. 바로 옆의 맥주집 지하로 내려가는 길엔, 폴리스라인이 쳐져서 출입을 금지했다.

참...황량하다. 잔뜩 깨져나간 유리조각들이 흥건한 물처럼 고여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거리며 기울어지는 시각. 건물 철거가 완료된 공터를 둘러싼 가림막에 마지막 햇빛조차 텁텁하다.

사람이 살았던 곳, 누군가가 살림을 하고 누군가가 미래를 상상하며 몸을 뉘였을 곳. 세입자의 재산을 털어

건설자본과 구청, 일부의 배만 불려주는 현재의 재개발이 쓰나미처럼 예기치않게 지나고 난 현장이라 더욱 살벌하다.

돈없고 빽없고 힘없으면 당해야지, 어떡하냐. 라고 묻는다면 역시 할 말이 궁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란 게, 그정도로

허약하고 별볼일없었다.

이런 식의 구도를 굳이 잡고 싶진 않았다. 뭔가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을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런 의도가 아니고, 사실 그런 구도로 보는 게 맞지도 않는다. 이건 '부'를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한쪽 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집의 내부가 훤히 보이는 집 한채를 마주쳤다. 적나라하게 내부가 드러났다. '집'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안온함과 포근함 따위 모두 휘발되어 버린, 시멘트 블럭만 거기 남아있었다.


용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런 거다. 적나라하게 내부가 드러났다. '우리'란 단어에서 헤아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란 게 얼마나 황공무지한지.





경찰, 용산 철거현장 강제 진압... 5명 사망 참사
"특히 특공대들은 수십미터 높이의 대형 기중기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참극이 벌어진 농성 현장에 접근했다. 철거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대테러 작전을 펼친 것."(데일리중앙, 2009. 1. 20)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강제 퇴거, 괴롭힘 또는 기타 위협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유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사회권규약 일반논평4)


책을 보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몇장 힘겹게 넘기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져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사를 보았다. 쌍용차 공장에서도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쌍용차 공장에서는 용역들이 새총을 쏘고 불을 지르고, 용산참사에서처럼 똑같이 합니다. 경찰이 엄호하고 합동작전도 하고 경찰 장구도 빌려줍니다. 경찰력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자존심이 있지, 일반 용역깡패에게 지위 안 넘깁니다. 경찰은 경비업법 위반과 중상해죄, 공무원 사칭의 공범입니다. (권영국 변호사)"("테이저탄 맞아 뺨 썩는데 항생제 없이 수술..." - 오마이뉴스)


어제그제, 울음을 삼키며 책을 읽어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올 초였다. 사람이 여섯 명이나 '학살'당했다. 경찰특공대는
 
용역과 손발을 맞춰 '도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혹한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펼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그분들은 장례조차 못 치르고 있다. 만평 그대로, "뒤는 걱정않고 뭉개버렸던"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 채 또다른 살인, 또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개발문제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고, 2000년의 봉천3동 철거촌에서 며칠 깔짝대며 나름대로 남들보다 보고 들은 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오늘은 봉천 3동에서 이루어진 동계 노동자 빈민 학생연대투쟁(줄여서 빈활)의 첫날이었다.

이미 포클레인에 무참히 무너져내린 빈 집들이 쭉 좌우에 도열한 가운데 성했을 무렵에도 꽤나 볼품없었을 그런 집의 길쪽 창가에나마 여전히 갸날프게 매달려 있던 방범철창들...그건 공권력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비웃는 듯 했다.

겨울철에는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불법임에도, 이주 비용조차 없는 빈민들을 위한 가수용단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철거깡패들을 동원한 폭력과 방화 등의 살인적인 강제 철거가 지금에도 계속 사실상 경찰의 비호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빈민들-대부분이 세입자인데-에게는 약간의 이주비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재개발 사업 지역에서 충돌이 그치지 않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되는 거 같다.
가옥이 재산으로만 파악이 될뿐, 실지로의 삶의 터전, 즉 주거의 공간으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을 '빈민'으로 칭하던 그때의 대학생이 사회인이 되고 나니 알겠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가진 꿈은 '내집 마련'.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은지 오래건만, 전체 가구의 40%가 전월세로 살고 있다. 10명이 5,508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이라거나, 전체 인구의 1%가 전체 사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그냥 넘기기로 한다.

소득불균형이 아니라 부의 불균형을 따진다면 나라가 벌써 엎어졌을 거라던 이준구 교수님의 이야기도 그러려니 한다. 


정말 복장터지도록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거다.

왜. 미분양 아파트는 쌓여만 가는데, 계속해서 더욱 비싸고 넓고 고급스런 아파트만 지어지고 있는 걸까.


좀더 적은 세대수를 가진, 좀더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아파트를 위한 현재 방식의 재개발이 지속되는 한,

철거민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거나, 혹은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밥그릇' 그 자체를 일부 땅주인들과

건설업자, 공무원들의 이익을 위해 통째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세입자 보상은 재개발 사업의 너무 늦은 단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에서 그저 강요된 독배처럼 이뤄진다면.
가게에 대한 투자금과 전세금
등을 100% 보상받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의 영업지역, 생활권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장사를 일으키라며 막무가내로 내쫓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인접지역은 재개발 열풍에 휘말려 잔뜩 전세금이 올라버린 상황, 사람들은 체념을 강요당한다.


그나마 아직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가능한 인근한 주거지로 옮겨간다. 물론 순식간에 두배 이상 뛰어버린 전세금을 감당하기

쉽지 않고 사고처럼 닥친 '재개발사업'에 재산도 반토막났지만, 그래서 이전보다 좁고 열악한 환경으로 가기 일쑤지만,

어쨌든 '입에 풀칠하란 법은 없다'는 속담이 아직 힘이 된다. 이전에 비해 더욱 힘겨워진 삶이고, 심지어 집주인들조차

잔뜩 올라버린 집값을 감당치 못하고 튕겨나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주변에 그나마 연착륙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철거되는 지역에서 곧 철거될 지역으로 이동한다. 계속

낙후한 곳으로 밀려나고 밀려나 어느순간 '소시민'에서 '거지'로 전락해버린 걸 깨닫는 사람들. 그렇게 밀려날 수 없어서

항의를 시작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면 그들의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애초 도심에 비비고 살고 있었던 게 잘못이다.

원하던 원치않던 자녀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기는 등 아이들 교육 환경이 바뀌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다니던 직장이 조금 멀어지고, 출퇴근이 조금 어려워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조그마한 가게 없어지면, 어디서든 새로 열어 손님 새로 만들고 단골 만들면 되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이웃간의 정이니 마을의 화목함 따위야 돈없고 촌스런 자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며 고급스러워서 돈되는 건물을 올리겠다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대로 국가발전을 위한

최적의, 최고효율의 자원 배분을 하겠다는데. 그게 비록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착각.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난한 사람이면 가난한 사람답게 교육에도 욕심 안 부렸어야 했고, 직장이니 가게니 어차피

당신들 눈에 보이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텐데 그런 걸로 쪼잔하고 구차하게 굴지 말아야 했으며, 삶의

터전이니 뭐니 촌스러운 단어로 '떼잡이질'했던 것들 너무너무 반성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라고. 그런 건가.


용산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다. 지금까지 장사해왔던 이곳에 주상복합 상가를 지은 후
 
다시 이 곳에서 영업할 수 있도록 상가를 임대조건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공사기간 중 영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수용상가를 개발지역 내에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밥그릇 싸움이다. 다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개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던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생존권만을 확보해 준 상태에서 개발을 하라는 거다. 세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주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도 내놓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손해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던 거다.


그리고 그건 모두를 대신한, 생업에 바쁘고 어쨌던 삶을 이어가기에 바쁜 사람들을 대신한 항의였다. 서울에만 50개가

넘게
짓겠다는 뉴타운 공약을 비롯 전국각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사업, 그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재개발 지역의 혼란상.
 
잔뜩 올라버린 집값과 앉은 자리에서 슬금슬금 빼앗기고 있는 우리네 재산. 없는 이들의 재산이 있는 자들, 세입자 한번도
 
안 해봐서 세입자 심정 모르겠다며 똥배짱 튕기는 용산구청장, 건설자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고발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용역과 경찰과 법과 언론에 위협받았으며...끝끝내 살해당했다.


"지금,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님은 말한다. 불행한 사람들, 불행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연대의 깃발 하나로 목숨을 건 전철연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돈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언론이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계절 넘게 망루 투쟁을

벌였던 용인 어정상가/공장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대신 돌아가신 거라며 눈물흘렸고, 용산4구역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도와주러 왔다가 돌아가신 분들때문에 고개를 못든다며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조세희 작가가 놓친 한 부류가 더 있다. 행복해하는 자, 혹은 최소한 눈물흘리지 않는 자의 한 부류가 더 있으니,
 
그들은 살인자다.


아무리 그들이 돈없으면 죄인이요, 망루가 너희를 반기리니 회개할지어다..라고 떠들지라도, 세상이 온통 가진자

위주로 돌아간다는 섬뜩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 정말 끝끝내 진실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하루 휴가를 낸 내일,
 
내일은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들고 용산에 가야겠다.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사는 것 같지않게 살아가시는 분들..

여기도 사람이 있다고, 죄송하다고 찾아뵈야겠다.



용산참사 반년, 사회 원로 대표 시국선언(7.23)


- 이전 포스팅들

▶◀ 불도저식 진압, 이건 살인이고 학살의 시작이다.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여기 사람이 있다 - 10점
강곤 외 지음/삶이보이는창




#1. 데자뷰로 위장된 변함없는 일상

가끔씩은 어제 신문이 오늘 신문같고, 또 오늘 신문이 내일 신문같을 때가 있다. 기자들은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

듯이 떠들고 이런저런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려 애쓰지만, 그건 어쩌면 매일매일 새로운 NEWS를 찾아내야 하는

그네들의 직업적 특성이거나 생계유지를 위한 언론인들의 암묵적 공모인지도 모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쏘공이 씌여진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난장이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임을 말하는 신애도 그렇게 말한다.


"사회 부조리 시정 촉구한 고위층, 당직 개편 않겠다고 밝힌 야당 당수, 사회 안전법 해설, 남북한 대화 촉구한

UN사무총장...10년 동안에 여덟배로 늘어난 강력범죄, 학교 돈 1억원을 횡령한 재단 이사장...경기 회복되어도

계속 흐릴 고용전망...한 개에 1천만원이 넘는 기둥 스물 네개로 떠받들여진 여의도 새 의사당, 30만 원이 없어

아파트 입주 포기하고 새 터전 찾아 떠나는 재개발 지구의 철거민들...톱밥으로 만든 고춧가루...어제의 신문과

다를 것이 없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마다 같은 신문을 찾아 읽는다."



그렇지만 일종의 데자뷰, 기시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난쏘공의 나오는 사람들이 내뱉는 탄식, 절망, 분노는

낯설지 않다. 사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침없이 터져나왔던 것들이지만, 근래 다시 그들에게 마이크가 향했다는

점이 새삼스런 오버랩을 가능케 했을 거다.



#2. 난장이와 난장이 가족들, 난장이와 한편인 사람들의 이야기

난장이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자극했던 지섭, "일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만 읽는다는 지섭에게 과외를

받았던 윤호 역시 탄식한다. "여기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어.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난장이가 '난장이의 가족'들과 함께 살던 서울시 행복동 집에 철거계고장이 날아온 날, 아파트 입주할 돈이 없어

입주권을 팔고 원치 않게 추방당한 그들의 가족들은 분개하지만 난장이는 말한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난장이의 큰 아들, 그의 속깊음과 따스함으로 결국 사형대에까지 떠밀린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깨닫고 있었다.

무허가건물이 난립한 그의 동네에 찾아와 철마다 표를 구걸하던 거짓말쟁이들은 계획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실. "이미 많은 계획들이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고, 설혹 무엇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그건 실제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되리라"
는 깨달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나가고 나니 마음이 차라리 편해졌다던 그들. 난장이의 아들딸들.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다나. 그 보호란 건 그 구역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보호였고,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엄격히 나누어진 세계에서 이질집단으로 평생 낙인찍힌 채라야 받을 수 있는 보호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마음이 편하댔다. 그러면서도 바다에 떠있는 늙은 수부가 목말라 괴로워하듯, 회색에 감싸인 축소된 집과 축소된

가족들을 들여다 보며 "물, 물, 어디를 보나 물 뿐, 그러나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
고 또한 괴로워했다.


공장의 사장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이야기로 그들을 위협했다. 회사가 당면한 위기를 말하고,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혹은 힘껏 일한 후 함께 누리게 될 부와 희망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른바 '파이 논쟁', 키워서 나눌지 나누면서 키울지가 2009년까지도 여러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변화는 없었다. 나빠질 뿐이었다."


#3. 새삼스레 촌스러운 이야기, "촌스러운" 용산참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없는 세계라고 했다. 배운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생각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밥 대신 모래라도 먹일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폐수 집수장

바닥에 구멍을 뚫어 폐수를 직접 바다로 흘려넣는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촌스럽다.


지섭도 말했다. 달나라의 이름으로 펼쳐보였던 그 사랑이 가득한 세상은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그는

목사, 과학자와는 달리 스스로가 많은 희생자 중 하나로서 노동자였다. 작품을 통틀어 계속해서 끈질기게

자칭 타칭 '근로자'라 불려왔으나, 손가락 두개를 잃은 지섭의 재등장과 함께 '노동자'라는 단어가 비로소

등장한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어감 차이, 그건 단순히 근면성을 강제하는 뉘앙스의 차이만이 아닌 거다. 못 배운

사람, 약자에게 경제적 고문을 퍼붓는 시대에 A대학 법학부에서 쫓겨난 그는 노동자,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역시 촌스럽다. 현장에 뛰어드는 학출 노동운동가라니, 촌스럽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업들의 구태는 말하자면 '우리의 대표브랜드'라는 세련된 분장 뒤에 숨었다.

"협조적인 사람이 이끄는 노조라고 해도 그것이 기업에 이익을 줄 리는 없으며, 기업에 해롭고 우리 모두에게

해로운 노조는 우리 전체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악마의 도구"
라는 마인드는 더더욱 촌스럽지만, 천박하게 번쩍이는
 
도금 광택으로 세련됨을 강변한다. 용산 참사 뒤에 숨은 대자본 건설사의 야만성과 촌스러움, 경찰과 검찰의

비열함과 촌스러움, 사과조차 없이 뭉개고 앉았는 위정자들의 더러움과 촌스러움, 그리고 여론을 스스로

자처하는 보수 언론들의 저열함과 촌스러움 역시 무엇인가로 위장되거나 혹은 스스로 세련됨을 강변하고 있다.


난장이의 아들딸이 보기에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같다던 먹이 피라밋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님 더욱 강해진 것은

아닐까. 대학교 신입생의 구성이라거나, 소위 좋은 직장의 신입 직원 구성이라거나, 무엇보다 세습을 포함한 부의

불균등한 분배에 이르면 더욱 공고하고 가팔라졌다는 느낌이다. 대학교 때 토지경제학을 가르치셨던 이정전교수는

우리 나라에선 절대 부의 불균형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봉과 같은 소득 불균형

자체도 이미 이렇게 심각하지만 부동산이나 물려받은 재산등이 포함된 '부'의 불균형이 공표되는 순간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셨던가. 분명치는 않지만. 


이미 난장이의 아들은 자신의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던 게다. 부모는 그의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지만, 이미 자식들은 첫번째 싸움에서 져버렸다. 노비 매매문서에 적힌 그들의 조상에서 넘겨진 삶의 무게와

질곡에 눌린 아버지는 난장이가 되었고 난장이의 아들은 그보다도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라는 예감.


#4. 悲

언론의 또다른 특징은, 새롭지도 않은 NEWS의 행진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아버린다는

점이다. 혹자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미 한달여가 지나 OLDS가 되어버린 용산 참사,

그리고 사실 조세희가 이 소설을 쓴 때부터 OLDS였던 철거민 문제, 그런 것들이 대장 속에서 쉼없이 연동하는

그런 것들처럼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잊혀진다. 의도적이던 아니던.


용산 참사 후 한 달,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 한 철거민은 "박정희도 이러진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프레시안, 09.02.2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뫼비우스의 띠 장마 외 - 10점
조세희.윤흥길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