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하게 더러워지고 만 도로와는 달리 사람들이 감히 밟고 다닐 엄두도 못 내게 만들던

삼엄한 눈발 속 쓰레기통의 위엄. 자동차도로보다 순결해보이는 쓰레기통이다.

게다가 하얗게 눈모자를 쓰고는, 평소라면 캔 나부랭이나 담겼을 그물망에는 소보록하니

눈송이가 잔뜩 담겼다. 예수가 '사람 낚는 어부' 운운했던 걸 빌자면, 이 쓰레기통이 쥐고 있는

그물망은 '쓰레기 낚는 그물망'이 아니라 '눈송이 낚는 그물망'으로 변신한 셈이다.

그리고 조금은 지치고 시든 듯한 초록빛 상록수잎 위로 그득하게 엉겨붙은 눈뭉치들.

이미 나려들던 때의 여리여리함과 따꼼한 찰나의 온기 따위는 지워버린 채 덜 떨어진

냉동고 속이나 찜질방 얼음방 속에 서걱거리는 얼음샤벳으로 변신해 버렸다.

눈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내일 출근할 때에는 삽 한자루를 쥐고 버스 정류장까지 굴을 만들어서

뚫고 가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밤에 돌아오려니 제법 삼삼한 날씨인 것이 더이상 눈오기는

글러먹었다. 게다가 차도도 대충 무지막지한 염화칼슘의 위력으로 정리된 듯 하니...별로

딱히 일상에 영향을 미칠 거 같지는 않아서 아쉽달까. 하루쯤 일 안하고 모두들 그냥 집안에

갇힌 채 지내는 것도 좋을 텐데. (일체의 열외없이 전부.)

이런 날은 어디든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눈밭에서 마구 뒹굴 수 있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1. 아놔, 카메라가 갑자기 두동강 나서 바닥에 철푸덕. 이제 막 길을 나서서 해장국골목서

한그릇먹고 일어나려다가, 엉덩이가 그대로 붙어버렸다.


#2. 황남빵 한박스 사들고 가끔 꺼내먹으며, 비닐봉다리에 담긴 카메라 두조각 달랑거리며

걷고 있다. 대릉원, 첨성대, 계림, 월성과 안압지를 지나 황룡사지에서 잠시 휴식중.

#3. 걷는 것만큼 확실하고 단단하게 이동하는 방법은 없지 싶다. 내가 감내할 만한 속도로

주위사물들을 하나씩 만지듯 분별하며 뒤로 흘려보내고, 주위 분위기에 흠뻑 젖을만큼

스스로와 풍경을 동화시켜준달까.

#4. 경주 시내를 빠져나와 오릉, 박혁거세니 유리왕이니 소설속 인물같은 이들의 소설같은

무덤을 둘러봤다. 저 언덕들은 참 곱게도 잔디를 입혀놨단 생각만 들 뿐, 죽은 이들이 쉬는

공간에서 느껴져야 할 답답함이나 무거운 공기가 없다. 이천년 가까운 시간이 죽음의

무겁고 퀘퀘한 냄새조차 날려버렸다. (그나저나 안내판엔 온통 한자뿐. 그것도 손글씨.)


#5.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린 우물이라 신라의 우물, 나정인가. 예수보다 육십년쯤 먼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발견된 우물이 아직 남아있단 게 더 신기. 우물이니 알이니

동정녀니, 섹스(혹은 불륜)를 숨기거나 신성화하려는 전략이란 점에서 예수나 혁거세나

베들레헴이나 경주 나정이나 오십보 백보.


#5. 나정에서 포석정을 지나 삼릉골로 가는 길이다. 포석정 뒷길로 남산을 오를까 하다가

매표소 아줌마에게 추천을 청했더니 역시 삼릉골로 오르는 게 볼 것도 많고 길도 재밌다고.

남산은 당시 신라인들이 부처가 머물고 있다 생각했던 곳이라 했던가. 골짜기마다 잔뜩

조성된 석탑과 석불 따위 불교 유적들이 대단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산에 기대듯 부처에

기댔던 거다. 아니면 부처에 기대듯 산에 기댔는지도.

#6. 삼릉골이란 이름은 골짜기 입구에 세 개의 커다란 릉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막상

언덕만한 왕들의 무덤이래봐야 남산에 의탁하고 나니 그다지 위신이 안 선다. 왕이

자연에 귀의한 느낌이랄까, 산자락에 오체투지의 자세로 늘어붙은 것 같은 젖꼭지 세개.

#7. 워낙 삼릉골을 따라 조성된 탑이니 부처가 많은지라 이름모를 조각들도 뒹굴고 있었다.

그 중 문득 시선을 사로잡던 저 미묘하게 불룩한 위치와 모호한 손놀림.

#8. 선각육존불,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여섯 부처를 그려놓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바위

자체의 무늬와 오랜세월 깍이고 다듬어진 자취 때문에 선을 하나하나 식별하기가 이젠

쉽지 않아진 그림판. 군데군데 청동처럼 녹도 슬었다.

#9. 저 바위의 효용은, 그보다는 저 위로 좀더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해바라기했을 때다.

왕릉같이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선을 그려내는 경주의 산들이 바라보였다.

#10. 돌아나오는 길에 어느 새로 짓는 듯한 전통음식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지붕위로

어벙벙하게 웃고 있는 저 표정, 조그만 눈과 헤벌쭉한 입이 그렇지만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2010년에 다시 그린 경주인, 신라인의 얼굴일지도.


* 경주남산 가이드맵.




아야 소피아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다는 손가락 넣고 돌려보기, 저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한바퀴 삼백육십도 회전시킬 수 있다면 소원이 이뤄진다던가. 대체 어떤

이야기가 얽혀있어서 저 구멍이 그런 '행운의 구멍' 역할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냥, 늘 행운과 소원성취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아닐까 싶다.

반쯤 돌리다가 선택의 순간에 직면, 손가락을 꺽어뜨릴 것인지 내 소원을 꺽어뜨릴 것인지, 아무래도

몸을 챙겨야겠다 싶어 포기하고 아야 소피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나름

미끈하게 닳긴 했지만 여전히 꿀렁꿀렁, 옆으로 새는 길은 저렇게 철망이 쳐진 채 길을 막았다.

2층에서 보이는 풍경은 1층에서 볼 때와는 또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색

글자가 샹들리에와 함께 바로 눈높이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데다가, 창문을 바로 등진 위치라서

훨씬 밝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2층은 아야 소피아가 성당이던 시절 그려진 벽화나 기타 작품들을 전시해둔 미술관 같은 분위기.

무슬림들의 공간 모스크로 변하면서 회칠로 덮이기도 했던 그림들이라 도리어 보존상태가

양호한 건지도 모른다. 모스크를 꾸몄던 것들은 이후 다시 기독교도들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전부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림과 글자가 어지러이 섞여 있는 데다가, 그림이 보여주는 전형성들, 그림에서 드러난

상징들을 보면 이 때의 그림이란 게 단순히 미감을 충족시키는 장식용이나 종교적 숭배의

의미 뿐 아니라 교육의 의미도 컸음을 짐작케 한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예수의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같은 공간에, 다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나타나는 신의 형상이 변화한 건 역시 당대 인간들의 상상력 차이 아닐까 싶다.

천정의 무늬를 보란 듯이 한 겹 벗겨낸 뒤에서 드러나는 어슴푸레하지만 분명 다른 문양들.

아마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지배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이 곳에서 지워진 상대의 흔적,

그리고 새롭게 덧씌워진 자신의 흔적일 텐데, 저런 식으로 절개된 모습을 보니 무슨 외과수술

같기도 하고, 역사의 지층을 드러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벽면 가득한 문양들 뒤에서 새롭고도 오래된 흔적을 찾아내는 건 지층을

헤집으며 화석을 찾으며 과거 시간을 복원하려는 노력과도 비슷하겠다. 노란빛 일색으로

뎦였던 그 공간 뒤에서 웅얼대고 있던 옛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또 한 편으로는 지금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을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중이다. 이미 오랜 이야기, 터키가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때, 술탄의 지배 하였던 때,

그런 기억들은 이미 도색된 물감들이 색을 잃고 먼지처럼 바스라질 만큼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 대신 사진과 이미지를 구하러 들르는 시대.

한쪽 돔에서 드러난 성모자의 벽화. 돔의 완만하지만 분명한 곡선벽에다가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은 굉장히 어렵지 않았을까. 그 굴곡진 면의 왜곡되는 정도를 생각하고 실제 아래에서

그림을 볼 때 어떻게 보여질지를 감안해야 했을 텐데.

어느 창 너머를 무심하게 시선이 쓸고 가다가 문득 멈췄다. 창 너머 언뜻 보이는 저 뾰족탑들은

블루모스크의 그것들, 담담하고 차분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옅은 청회색 미나렛이 이쁘다.

아야 소피아에 남아있는 모스크의 자취, 1층과 2층 사이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도공간.

나오려다가 마주친, 전등을 갈고 있던 아저씨들. 이 공간에 켜져있는 샹들리에만 수십개니까

거기에 달려 있는 전구는 대체 몇 개나 되려나. 의외로 저분들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출구로 돌아나오는 길에 올려다본 천장들, 천장을 꾸민다는 행위는 뭐랄까, 가장 덜 필요하면서

또 가장 재력과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싶다. 공간에서 눈이 가 닿을 마지막 부분이

아마도 천장, 그리고 화장실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화장실은 아예 공간 밖으로 빼내어 버리고

천장에도 이렇게 공을 들여 무늬를 그려넣고 모양을 만들고.

아야 소피아의 복잡한 내부 구조를 생각하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 외부는 역시 만만치

않은 복잡한 구조로 이리저리 꺽이고 휘어지고. 이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건축물은 그래서 역시

바싹 붙어서 보려다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도리어 혼란에 빠져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가장 잘 파악하는 길인지도.

원래는 이곳에서 무슬림들이 발을 씻고 손을 씻는 곳일 텐데, 더이상 모스크로 기능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더이상의 실용성을 잃은 정자 정도랄까. 이날처럼 비가 오던 날은 잠시 안에 들어가

일행을 기다릴 수 있는, 비를 긋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리고 굉장히 쿨한 모습으로 금발을 휘날리며 앞서 걷던 두 분의, 아마도 프랑스 아가씨들.

전혀 아야 소피아와 연관되지 않는 사진이라지만, 그래도 출구가 저렇게 생겼구나 정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니 전혀 억지로 끼워넣은 건 아니다.ㅋ




● 일시 : 2010년 5월 11일(화) 24:00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http://ytzsche.tistory.com)

주최 : ytzsche(이채, 異彩)

● 배경 : 만백성과 함께 천국가겠다는 가카의 자애로움

   - 50%가 넘는 지지율을 한몸에 받고 계신 현명하고 자애로운 가카께옵서 하늘도 감동할 만큼 통큰 배포와 아량을 베푸시어,
   - 어리고 못난 백성들에게 지난 2008년의 경거망동을 반성하고 가카를 향한 100% 순도의 충성심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 지난 3년간 진정한 이땅의 주인인 나랏님께 지은 죄를 씻고 순백의 영혼이 되어 함께 하늘나라로 승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


● 방법 : 댓글에 아래와 같은 내용에 부합하는 댓글 팔만자 이내.(아래의 샘플 참조)

   - 2008년 겟세마니 동산에 오른 예수의 마음으로 못난 백성들의 아우성을 애써 참아냈던 가카의 마음을 정성껏 헤아려,
   - 멋모르고 무식하여 좌경빨갱이 불순세력에 이용당했음을 가슴치고 옷을 찢어 렬렬히 반성하고,
   - 두번다시 나랏님 하는 일에 함부로 나불대지 않겠으며 앞장서 나아가 가스통 짊어지고 '반공''토목''경쟁'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서약하기만 하면 됨.


제공 : 면죄부(라고 쓰고 '초대장'이라 읽는다) 10장


● 선정단 : 4대강, 용산, 미네르바, PD수첩, 봉은사 등



In shamefulness of

the disastrous Koreans of the LEE Kingdom,

Ytzsche
(
http://ytzsche.tistory.com)

requests your VOTE to the local election
on Wednesday JUNE 2, 2010



R.S.V.P
ytzsche.tistory.com



샘플.(샘플만 써봐도 알아요, 김희애 曰)




라즈니쉬는 예수가 부처보다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고 평한 바 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에 대해 그다지 성찰하지

않았던 예수와 달리, 부처는 육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을 만큼 섬세했다는 이유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다람쥐, 십자매가 죽었을 때 묻어주면서 느꼈던 그 뻣뻣함과 선뜻함이 전부였다.

군대에서 '쫌생이'라는 고양이 녀석이 '자살'했을 때도 현장을 놓쳤더랬다.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빈 퍼즐조각 하나를 채워넣는 기분이랄까..나이 드신, 나이 드신 채로

멈춰버린 경비 아저씨 한 분이 누워 계셨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뇌성마비 아저씨 한 분이 나오셨다.

다행스럽게도, 험하게 돌아가신 분들은 아니었지만..혹시나 모를 의심을 풀기 위해서 그분들은 험하게

다뤄져야 했다. 간단한 시각화를 시도하면, 안심살, 갈빗살, 곱창, 호두, 육포의 이미지. 그리고 시장에서

그램수로 과일을 담아 팔듯, 그렇게 호명되는 몇가지의 수치들. 브레인 천이백오십. 좌측폐 사백..



'죽어서도 억울할지 모른다'는 오래된 사고방식은,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시와 처벌'을 통한 사회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었다. 죽으면 끝이다. 그렇지만 합법적으로 '평안한 죽음'을 살 수 있는 병원이나 기타 소견서

등을 첨부하지 못한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을 규율하기 위한 '증거'로 남는다. 갈수록 빈틈없어지는 인간들.



관례란다. 부검을 견학하고나면 내장탕을 먹어야 한댄다. 대체 어떤 새디스트가 처음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으되, 식은땀을 잠시 질척하게 흘렸던지라 반가웠다. 나는, 배가 고팠다.



언젠가 집에 아버지가 가져왔던 돼지 앞다리가 생각났다. 털이 여전히 숭숭하고, 돼지 껍데기 밑으로 투실하니

붉은 살이 늘어져 있었다. 생명을 잃고 살이 적당히 발라져서는 먹히는 거다.

동물을 먹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은 아니라는 라즈니쉬의 말에 공감했다. 아직 나는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무차별하게 상상할 수는 없다. 내게 비어있는 또다른 퍼즐조각 하나.




(2006.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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