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에 이어 찾은 곳은 석굴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석굴암 가는 길은 그야말로 지그재그. 지리산 대청봉을 보고 달리는

 

와일드한 드라이브 코스에 비길만한 커브와 경사로가 연속된 구간이었다. 불국사에서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는데 왕복 2시간쯤.

 

전혀 기억에 없던-하긴 관광버스로는 이런 짧은 터널을 지나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겠지만-터널이랄까 문을 지나다 말고

 

잠시 차를 세웠다. 아마도 석굴암의 내부 한쪽 면에서 봤거나 혹은 국사책 어딘가에서 봤던 기억이 어렴풋한 나한이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달까.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 커브가 심한 이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산을 꽤나 올라왔다 싶더니 역시나 전망이 탁 트였다.

 

 

구름이 조금 끼어있는 날씨가 아니라 완전 청명하고 파란 하늘이 반짝거리는 날씨였다면 저 아래 경주 시내가 좀더 잘 보였을 듯.

 

석굴암이 주차장 바로 앞에 있을 거라고, 전혀 근거는 없지만 그냥 막연히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서부터 또 한참

 

산길을 걷고 오르고 해야 도착하는 게 바로 석굴암. 여기는 그저 주차를 하고 티켓을 구매하는 입구에 불과하더라는.

 

 

알록달록한 연등이 양쪽에서 길을 안내해 주고, 산등성이의 짙은 그늘을 따라 걷기엔 꽤나 추워서 쉽지 않다고 느낄만큼

 

깊은 산의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길을 따라 이십분여 걸었을까.

 

불쑥 나타난 건물 한 채. 이게 석굴암이었던가 살짝 당황하고 있는데.

 

불쑥 나타난 저 위의 자그마한 또다른 건물 한 채. 이게 바로 석굴암 되시겠다.

 

원래는 석굴암의 외벽이 저렇게 시멘트로 발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고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본존불의 이마에는

 

거대한 보석이 박혀서 때에 맞춰서 광선을 석굴암 내부로 찬연하게 반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하간, 내부는 촬영금지.

 

그런데 정말, 석굴암의 본존불상은 굉장했다. 비록 유리벽으로 막힌 채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했지만, 인상은 압도적이었다.

 

소소한 세상사, 갑남을녀의 개인적인 고민은 비집고 들어가기도 민망할 만큼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것을 마주하고 있는 표정이랄까.

 

최소한 일국의, 아니 인류의 차원에서 대두된 문제들, 나타날 문제들에 대한 깊고도 고귀한 명상과 성찰을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신적인 지혜와 깨달음이 가득한 자의 표정과 눈빛이었다. 굉장히 우아하고 존엄한 분위기, 이런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자를 뭐라고 부르던, 당신과 나는 절대 동등하지 않으며 그 지혜와 깊이에 있어 난 하잘것 없는 미물이노라고 고백하고야 말 듯한.

 

이런 분위기의 부처를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할 만큼, 마음을 뒤흔들어버렸다. 분명히 예전에도 이걸 봤었을 텐데. 비록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지만, 그 때 전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도, 그리고 지금 이런 분위기와 표정에 충격을 받은 것도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이건 전혀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자 극한에 달한 신성함..에 가깝지 않을까.

 

 

 

조금은 멍해진 채로, 저런 부처에게 세사 잡일을 고하고 일신의 복을 기원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달까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석굴암의 부처는 사람들이 복받고 행복하게 사는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인류 모두의 정신적 고양과 열반이랄까, 그런 것들에 주의를 온통 쏟고 있는 거다.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라

 

살짝 경직되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지만.

 

 

 

그리고 석굴암에서 내려와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담은 몇몇 풍경들. 비록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가깝진 않고, 또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길 역시 그리 쉽거나 가깝지 않지만, 석굴암의 부처님을 만나는 건

 

어쩌면 세속화된 부처들, 인간화된 신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굉장히 드물고 경이로운 순간으로 남을지 모른다. 내가 그랬듯.

 

 

 

 

모방범 1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2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3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세계.


"너희들은 인간의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남의 생명이니까, 남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피스는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인이나 친구는 죽이지 않아요. 죽으면 슬프니까요. 그렇지만 남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남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와는 관계없어요."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단 거야!"
"즐겁지요. 당신도 해보면 알걸요.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단순히 미친 또라이의 생각일까. 남의 생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생명일 뿐이라는 저런

식의 사고라는 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서부터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거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사람들과 타인을 가를 경계, 그런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 지구 곳곳에서 쉼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일본에서, 휴전선 너머에서,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부당하게 고통받고 괴롭힘당하며

죽거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거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단

일초라도 웃을 수나 있을까. 우리가 주위 사람, 가까운 사람만 보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평생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의 대다수가 경계선 밖에 '남'으로 존재하고 있단 얘기다.

급작스레 커져버린 세계와 헤아릴수 없이 많아진 인간들을 대하고선, 인간 능력에 한계가 온 건

아닐까. 정말이지, 세계가 이토록 커져 버린 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니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인류가 갑자기 흉포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커지고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범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하지만, 지금처럼 보잘것없이 살아봤자 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기획한 이 연속살인극에 참가하면 네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돼. 모든 사람이 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줄 거야. 모든 사람이 너의 죽음을 애도해줄 테고. 이거 너무 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는 '모방범'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와 같은 무엇이다. 범인들이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목을 끌고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거다. 범죄사건의 목격자이던

논평자이던,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오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인정욕구에 목말라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광활해지기만 하고

사람수는 헤아릴수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와중에, 거대한 도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남고

두드러지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인정받고 싶지만, 또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다. 너무 커져버린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 팽개쳐진 영혼들.


범죄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버려졌다고,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 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였던 사람들 역시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진 채였다.

굳이 시니컬하게 '자존심 비대증의 실패자'라며 비하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들의 삶은 공히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커진 세계로부터 결정적인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다.



도시 반대편에 사는 사람에게 신, 혹은 스타가 되다.


"나는 안 잡혀. 계획은 완벽해.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스토리야. 가즈아키, 잘 들어. 이 사회는 내가 만들어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 이야기와, 최고의 클라이맥스와, 길게 여운이 남는 라스트신. 그러니까 네가 협력해줘야지. 공연자로서 말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타인을 발아래 둔 채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두를 위한 스토리를 통제하는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분에 들떠 추측만 해댈뿐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경이다.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작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연쇄살인 역시

도시 반대편의 사람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은 채 소비되고 만다. 마치 해외토픽처럼.

이미 그런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들은 계속 수위를 높여가며 제공되고 있었고, 연속선

상에서 연쇄살인사건 역시 최초의 충격을 지나서는 그저 엔터테인먼트, 남일이었을 뿐이다.


그건 합리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들이 사람을 죽여봐야, 자신의 일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친구의 일이 될 가능성이란 건. 대개의 경우 그런

사건은 내가 아닌 절대다수의 '타인'에게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많다.



언제고 또 나타날 '모방범'.


'모방범' 속의 사건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일들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기나 집전화를 이용해서 서로 연락하는 그런 시대이다.

지금은 그나마 거대한 세계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인류가 조금은 서로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도구들이 많아진 시대다. 휴대폰도,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따위의 소셜 네트워킹도.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그런 도구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세워두는 경계선이 좀더 확장되거나,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다. 휴대폰이 생겼어도, 가상 사회가 건설되었어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깜냥 자체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능력, 의지.


결국,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못견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 반대쪽의 살인마를

키워내는 건 이쪽에서 티비를 보며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소모하는 우리들 아닐까 하는 거다. 이 소설이 아무래도 우울한 비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 거대해진 세계, 인간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세계에서 '모방범'의 도래를 피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Pentax K-r로 거의 처음 찍어본 사진이다. 케잌을 하나 사서 집에 들어가니

이미 동생이 숫자초까지 야무지게 준비한 케잌을 사놨길래, 두개 모두 꺼내고 초에 불을 쟁였다.

태국 방콕으로의 여행. 갑작스럽게 떠난 길이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 넘 질려있었고

따끈한 햇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던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온통 매진된 항공권들 속에서 운좋게

방콕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방콕 시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던 수로, 그 위에 슬쩍 얹힌 나무벤치.

그리고 비둘기가 지켜보고 있는데, 비둘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식사중이신 아주머니 한 분.

분홍꽃이 뚝뚝 굵은 눈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차 위에도, 벤치 위에도, 가리지 않고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온통 꽃이 만발한 도시였지만 가장 인상적이던 꽃은 역시 선인장꽃. 에피톤프로젝트의

'선인장'을 들으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근처를 한참 서성거렸다.

왕실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의 의례용으로 쓰이는 금빛 번쩍이는 날렵한 선박들이 보수 중인 곳이었다.

다리를 오므려 꽉 쥐고 있는 대포는 선수에 장식된 괴물 '가루다'의 무시무시함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

이런 날것의 시멘트벽의 색감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건 여행의 효과일 거다. 벽돌틈 사이로 조금씩

삐져나온 시멘트의 굳은 모양새도 맘에 들고, 대충 그려넣은 티가 역력한 저 화살표 사인도.


왓 포에서 만난 수십수백개는 헤아릴 듯한 탑들. 지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채 사람들의 염원을

쭉쭉 흡수해서는, 날렵하고 유려하게 응축해내며 한방울의 엑기스로까지 끌어올리고는 하늘로

발사하는 거다.

짜오프라야 강 서쪽 기슭에 서 있는 왓 아룬, 새벽사원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 극히 섬세하지만

자칫 조잡해지거나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역시 한땀한땀에 들인 땀과 노력.

강을 건너며 멀찍이서 보면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어슴푸레한 실루엣이 멋지다.

그리고 토끼를 향해 치솟다 허공에 얼어버린 듯 멈춘 물방울들의 부동심결. 구슬구슬 꿰어서


만들어진 목걸이 같기도 하고, 몽글몽글 불규칙하게 뭉쳐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담겼다.

태국에서 만났던 신들. 불교 일색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만 시내 어딘가에서 요한바오로2세

전 교황이 방문했다는 성당을 우연찮게 찾아낸 건 큰 소득이었다. 천사에게도, 교황에게도 부처에

그러듯 똑같이 화환을 걸어주고 발밑에 봉헌하는 태국인들의 신앙심. 신 옆에는 항상 꽃이 있었다.


신 옆에 항상 꽃이 있더라는 발견을 살짝 뒤집으면, 꽃 옆에는 항상 신이 머물지도 모르겠다.

온갖 색깔과 모양의 꽃들이 그득하게 쌓인 꽃시장을 구경하다가, 이 곳에서도 신에게 바쳐진

꽃다발은 얼기설기 창백한 형광등 밑에 매달려있었다. 노랗고 보들한 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로 옆의 허름하고 구질한 건물들 사이에도 신이 머무는 사당과 화환들은 원색이 선연했다.

꽃시장 앞에 일렬로 늘어서있던 삼륜 오토바이들. 열맞춰 세워져있는 귀엽고 조그마한

앞바퀴도 재미있었고, 툭툭 튀어나온 눈알같은 헤드라이트들이 주르륵 열선 것도 웃기고.

해가 기울어가는 '마법의 시간', 슬쩍 공원으로 들어와서 벤치에 누워 하늘이나 보려는데 왠 꼬마가

공원 대리석 바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공을 몰고 우다다다 중이었다. 귀여워서 한참 보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정말 거짓말처럼 딱, 멈춰서서 포즈를 잡아주는 녀석. 위대한 축수선수의 삘이.


허름한 방콕 시내를 쾌속으로 질주하는 쾌속선. 사방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 기슭의 집들에

거대한 파도를 철썩이게 만드는 그 스피드도 놀랍지만 귀가 멍멍하도록 시끄러운 소음도 놀라웠다.

그리고 금빛으로 번쩍대는 관광지 말고, 허름하고 누추하지만 화분 하나씩은 꼭 키우는 판잣집들.


짜오프라야 강은 방콕의 젖줄과도 같은 커다란 강이다. 방콕 시내 곳곳을 거미줄처럼 흐르는

수로들이 모여서 이뤄지는 너른 강, 유람선을 타고 돌거나 강변을 따라 걷거나. 강을 즐기는 방법.

하얗고 까만 건물의 색감이 뚜렷이 대비되는 것 같다. 하얀 건물은 오래전 지어진 요새인지라

사방에 자잘한 금과 얼룩이 땟국물처럼 남았고, 검정 건물은 카오산의 유명한 까페인지라

온통 꽃이 만발했다.

태국의 유명한 맥주, 캔 위에는 안쪽 원통을 따라 빨간 동물이 몇 마리 그려져 있었다. 눈뜨이면

일어나 대충 씻고 외국인이 적은 음식점을 찾아 쌀국수 하나, 캔맥주 하나로 늦은 아침을 먹던

그 때.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도 전에 시원한 맥주가 먼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태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무에타이. 킥복싱 연습장이 동네 여기저기에 하나씩은 숨겨져

있었던 거 같다. 야외에 설치된 링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땀을 말리는 글러브들이 빨갛고 파랗다.

방콕의 야경, 조리개를 적절히 조정했더니 불빛이 육각형의 별모양으로 변해버렸다. 짙은 보랏빛이

되어버린 하늘 아래 주홍불빛들이 별처럼 늘어섰고, 눈에 불을 밝힌 차들은 짐승처럼 내달렸다.

색감을 좀 바꾸고, 셔터 속도를 좀 바꿨다. 마치 백투더퓨처의 한장면처럼, 노랑색 초록색이 반반으로
 
뒤섞인 방콕의 택시가 길게 그림자를 늘이고는 휙 사라졌다.

매봉터널을 걸었다. 왠지 패닉의 '달팽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길고 긴 터널, 온통 플라스틱

창문으로 차도랑 분리되어 있는 그곳에서는 지나치는 행인도 드물지만 누군가 지나친다고 해도

괜시리 마음이 황량해지는 그런 느낌의 공간.

집앞. 그렇다고 어린이집에 사는 건 아니고, 하루에 두번씩은 꼭 지나치는 곳이지만 시간대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참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이날은..

조금 기분이 까맣고 하얗게, 그렇게 얼룩덜룩했던 날인 거 같다.

방에서 키우는 선인장 하나. 선인장이 이렇게 이쁘게 생긴 건 처음 봤다. 잎새도 하나하나 포실포실

도톰하게 살이 올랐고 붉게 물든 가장자리에 솜털이 촘촘이 자란 것도 그렇고. 전자파먹고 쑥쑥 자라길.

봄맞이 건물청소. 사층짜리 건물 꼭대기쯤에 가느다란 줄 하나로 매달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건물벽을 닦고 있는 아저씨가 용맹스러워보였다, 그렇게 커다란 움직임들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결혼식. 신부대기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잔뜩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풀어주려

애썼지만 역시. 그녀를 웃게 하는 건 그녀의 신랑.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서는 그들의 표정이

한편으론 화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비장해보이기도 했다.

오랜 연애를 거쳐 드디어 결혼에까지 이른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나름 '민주적인 가정'을

강조하는 주례 교수님의 짧고 임팩트있는 덕담에 귀기울이며. 새하얀 드레스와 노란 꽃들에 꽂혔다.

양가 부모에 다소곳이 인사하는 갓 태어난 부부 한 커플. 은은한 조명과 얄포름한 면사포, 노랗게

일렁이며 떨궈지는 촛불과 꽃불이 인상적이었다.

신논현역 근처의 어느 주점. 빨갛고 하얀 조명이 비닐 커버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아랫춤에선

술잔이 넘칠 듯 술을 따른 두 젊은이가 망연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께집의 붉은 조명. 바람이 불어 벽에라도 세게 부딪혔는지 딱 모서리가 깨져나갔다. 아직 달린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깔끔한 느낌의, 새것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조명등인데 격하게도 터져나갔다.

문앞에서 달그랑거리던 풍경, 물고기의 등뼈에서 뻗어나온 각기 다른 길이의 금속 대롱들이

가시처럼 성가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렇게 생긴 풍경은 좀만 세게 닫겨도 한참동안 지들끼리

비비 꼬여있단 말이지.

어느 까페. 창밖에서 볕이 손가락을 뻗쳐왔다. 이미 봄볕에 사로잡힌 꼬마아가씨는 분홍빛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룰루랄라 스텝을 밟으며 봄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스며들어온 봄볕은

꽃무늬가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보랏빛 쿠션이 보드라운 의자위에 느긋이 몸을 눕혔다.


풍성하게 바람넣은 머리처럼 불룩한 화분을 둥지삼아, 붉은 새 한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주체못하고 쏟아져들어오는 봄볕, 강물에 빠져버린 자동차의 깨진 창문으로도 저렇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을 거다.


이층과 일층을 잇는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종종 수평감각을 희롱한다.

이렇게 보니 계단이 아니라 격자처럼 좁아져 나가는 통로같기도 하고 거울은 천장에 붙은 듯.

사선으로 그어진 채 첫째 곰의 몸뚱이를 두개로 쪼개놓은 햇살 아래서 보니 표정이 떠오른다.

저 녀석들의 조심스런 손의 위치, 살짝 외로 꼬은 고개의 각도, 그리고 조금 우울하게 늘어진 표정.


쓰리쿠션으로 치고 들어가는 조명. 벽에서부터 뻗어나온 얇지만 완강한 메탈의 가지는 천장으로

치고 올랐다가 불쑥 꺽어져선, 슬쩍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벽에 있던 이집트 냄새나는 조각상 하나. 쭉 찢어진 눈이라거나 칼처럼 날카로운 콧날들이 좀

영특하다 못해 교활한 분위기를 주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꾸밈을 보면 대충 만들어진

물건은 아닌 거 같다. 하긴,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음..어디려나.

봄이 오려나, 싶은 날씨지만 창밖에 내밀어진 화분들은 여전히 바싹 마른 채다. 그 위로 데코처럼

외벽을 감싼 얄궂은 청록색의 잎사귀들이 눈에 띄지만 땅 아래 사람들은 케잌에 정신이 팔렸다.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많은 사람들의 발이 나무를 조금씩 깎아낸 거다. 색깔이

빠지고, 나무의 이빨이 빠지고,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궤적이 남았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병들이라지만 일정한 수량이 넘어서는 순간 나름의 미감이 생겨난다. 규칙없이 내걸어둔

티스푼 장식장들이라지만 역시, 나름의 균형이 잡히고 미감이 떠오른다.

이곳의 불빛과 저곳의 불빛. 저 창문을 거울삼아 비치고 있는 풍경 속에는, 좀더 각도를 틀어서

여기저기 이쪽 세상을 비쳐본다면 뭐가 더 보일런지.


제법 선명하고 튀는 색감의 테이블, 의자들, 쿠션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는

어찌어찌 정돈되는 게 신기하다. 창문이라고 뚫려있는 곳에 보이는 곳은 이웃한 건물의 붉은 벽돌

뿐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호의적으로 봐줄 수 있다.


까페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고만고만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탑처럼 우뚝 솟아난

나무하며, 해가 지면 바통체인지해서 불을 밝힐 야트막한 가로등 하나. 밑을 내려다보면 여느

때처럼 줄을 늘어선 채 삼청동을 순례중인 사람들. 여기서 저쪽은 잘만 보이는데, 왠지 저쪽에서

여긴 안 보이는 거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다.


얼음만 남기고 홀딱 마셨던 라떼, 얼음이 녹은 자리엔 물이 들이찼다.

물과 기름이 미끌거리며 서로 버텨내듯 가만히 녹아내린 얼음은 잔뜩 흐려진 라떼의 잔해와 버텨낸다.


마치 무슨 우주선처럼 스르르 다가오는 스크류 모양의 장식품들. 이상하게 꼬였네~ 하는 노래도

생각나는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선명한 그림자만큼이나 단호하고 거침없는 존재감.

어느 갤러리. 빨강 주황 노랑으로 이어지던 갤러리의 간판이 아쉽다 싶더니 그 너머에서

초록색 국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나 여기있소, 나 여기있소 하는 것 같이. 그래서 빨주노초.

서울민속박물관. 장승이니 석물이 곳곳에 서 있던 제법 너른 부지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입춘대길'이란 종이가 아직도 붙어있나, 했다가 아직 입춘만도 못한 날씨지 싶기도 하고.

경복궁 담장을 배경으로 해서 옹기종기 서있던 각종 석물들. 어딘가의 할매 바위, 어딘가의 장승,

어딘가의 장군상 따위들이 모여있어서 그런지 저마다 표정을 찡그리고 험상궂어보이려 여념이 없다.

어느 화원의 꽃다발. 아무래도 이 기능은 참 매력적인 거 같다. 빨강색과 노랑색만 읽히는 세상이

있다 해도 세상이 딱히 덜 아름답지는 않을 거 같단 생각이 팍팍 드는 거다.

흑백의 공간에서도 화려하기만 한 꽃들을 마지막으로 Pentax K-r로 꾹꾹 눌러찍은 일상 끗.





신님,

그간 신님께서 제게 얼마나 냉정하셨는지는 신도 알고 나도 아는 일입니다.

흔한 레퍼토리로 조상님이 꿈에 나타나서 번호 여섯 개를 불러주는 일도 없으셨고,

드라마에서 보듯 대기업 총수가 불쑥 나타나 '내가 니 애비다'하는 일도 없었으며,

자동차를 걸고 노트북을 걸고 널리고 널린 경품행사에서는 늘 개인정보를 베풀기만 했으며,

주위의 자랑질처럼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도 두툼한 지갑 하나 줍는 일도 없었고,

하다못해 어렸을 적부터 커피 자판기며 음료수 자판기의 잔돈 구멍을 후벼도 백원짜리 두개를 못 봤습니다.


남들보다 착하게 살았느니, 누구 해꼬지 한 적 없다느니 구구하게 이야기 안 하렵니다.

이제 제게도 천원에 로또를 사서는 십원에 폐지로 팔아야 하는 슬픔 대신

준 돈보다 받은 돈이 열배는 뻥튀기로 돌아오는 환희를 맛보게 하소서.

그저 천원짜리 마권을 사서는 오만원짜리 현찰과 바꿀 수 있는, 조그마한 축복을 내리소서.


아멘할렐루야나무아미타불알라.


*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쥐고 있던 돈다발들. 내 돈도 아니고 쥐었다가 금세 사라질 돈들, 아쉬워서 사진이나.

* 알제리에서 쥐고 있던 돈들, 저 돈들로 부채를 만들어 바람을 부쳤더니 똥냄새가 풀풀 났었지만 그래도 좋더라는.

그게 바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의 숨겨진 의미.

* 현실은, 지갑속엔 이천원이 딸랑딸랑. 카드를 쓸수록 지갑이 두꺼워지는 마술이 일어나고 있다는.

쌓여가는 명세서를 세절기로 찢듯 가늘게 짝짝 찢으며 느끼는 쾌감 대신 두툼한 지갑에서 돈냄새를 맡고 싶어요.

집사야 되는데.;;;;



반띠아이 쌈레의 건물은 좀 묘한 느낌을 준다. 붉게 산화한 라테라이트석의 색깔이 기이한 느낌을 뿜어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태 둘러보았던 앙코르 유적군의 다른 유적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확연하다.

뭘까, 뭐가 다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보통 사원 외벽을 장식하기 마련인 무수한 압사라와 여신들,

그리고 정형화된 형태의 조각들이 하나도 없이 맨벽인 거다. 아마 벽돌이 저렇게 풍화되기 전에는 맨들맨들한

벽이 조각가의 손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었던 게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셈.

드문드문 부조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위로부터 흘러내린 다크서클같은

검은 얼룩, 그리고 때가 낀 건지 이끼가 낀 건지 알 수 없는 세월의 자취.

그래도 연씨 무늬를 차용해서 만들어진 창은 훼손되지 않고 그 모서리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창살 사이로 환하게 스며들어오는 햇살. 사원 내부의 매끈한 벽면은 뭔가 외부와는 다른 마감재를 써서

그런 걸까, 천년 세월에도 여전히 시멘트를 바른 양 매끈하기만 한 표면.

그리고 그 안에는 여전히 '신'이 모셔져 있었다. '신'이 모셔져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은 쉼없이

향이 피워올려지고 싱싱한 꽃이 바쳐지는 기적을 만들어내었다.

사원 위에 삐쭉삐쭉 올라있는 공룡 등뼈같은 뿔들은 그냥, 적당히 다듬어낸 길쭉한 돌들을 세워놓은 거였다.

여기 상당한 폭우가 무시로 쏟아져내리는 열대기후의 땅일 텐데, 저렇게 작은 돌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것들이

단단히 붙어있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정감가는 형태, 연꽃이 활짝 만개한 형태의 중앙사원. 보통 정사각형 형태로 꾸며진 크메르사원은 사방에서

중앙성소로 접근할 수 있지만, 중앙성소에 있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 중 동쪽으로 난 문을 제외한 세 개의

문은 문의 형태만 조각된 가짜문이다. 역시, 해뜨는 동쪽이 대세.




사원 내부는 너무 어두컴컴하다.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창문 역시 외부의 빛을 잘 들여보내주지 않는

구조여서, 자칫 발을 헛딛거나 미끄러지기 쉽다. 그나마 이렇게 창문이 조금 깨져 나가 빛이 들어오는 곳은

나은 편이고.

내부에서 장식을 발견하긴 쉽지 않지만 중앙성소쪽으로 가는 가짜문에는 나름의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괜한 크메르 노동력의 낭비다.

캄보디아의, 크메르의 푸른 하늘. 그리고 정글의 침투와 시간의 부식을 막고 천년을 버틴 그들의 석조 문명.

반띠아이 쌈레는 꽤나 큰 사원이고, 앙코르왓의 3층 성소탑을 재현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일부러 반띠아이 쓰레이와 앙코르왓은 마지막 일정으로 빼놓은 게, 거길 보고 나면 어쩌면 다른 곳들이 굉장히

시시해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도 하고 사전 조사했을 때에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기 때문.

사원 내부에는 종종 이렇게 천장이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된 방들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듯, 무너져

내린 모양 그대로 꽤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사원의 방과 방을 잇고 있는 문턱은 어찌나 높은지 좀 돌아보다가 발이 무거워지면 툭툭 걸리기 일쑤다.

커다란 입을 귀밑까지 찢고는 무슨 벌레알같은 이빨을 우르르 과시하고 있는 괴수. 이거 호랑이인가?

창틀 밖을 내다본다는 것, 창틀과 함께 바깥 풍경을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관음의 욕구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에서 밖을 보는 것, 창틀에 기대어 '액자'처럼 외부를 훔치는 것.
 
구석구석 새싹들을 품고 있는 돌덩이 사원. 길게만 자라 축축 처진 잎사귀들은 대체 뭘 먹고 자라는 건지.

사진 모델을 자처한 꼬맹이들. 카메라를 보곤 슬쩍 자세를 잡아주다간 좀 찍어볼라 하면 수줍게 도망가버리는

순진하고 귀여웠던 꼬맹이들이었다. 근데 밑의 꼬마는 다시 보니 킬빌의 그녀가 오버랩되는 듯.

어딘가 사원 구석에서 발견한 조각상의 잔해. 무슨 슬리퍼 두 짝이 남아있는 거 같아 재미있다. 무슨 조각이

이 슬리퍼를 신고선 자세잡고 서있었을까. 조각이 서있었을 자리에는 이제 무슨 연장통같은 나무상자가.

사원에서 빠져나가는 길, 이제 반띠아이 쓰레이로 간다.

뚝뚝이 기다리고 있는 사원 입구 쪽에 도착하니, 내가 그랬듯 수많은 아이들에 포위된 채 어쩔 바를 몰라

당황한 미소만 짓고 있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저 아이들의 애교 공세를 넘어서 반띠아이 쌈레 구경 잘 하시길.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내눈을바라봐 넌행복해지고

내눈을바라봐 넌건강해지고

허경영을불러봐 넌웃을수있고

허경영을불러봐 넌시험합격해

내노래를불러봐 넌살도빠지고

내노래를불러봐 넌키도커지고

허경영을불러봐  넌더예뻐지고

허경영을불러봐  넌잘생겨지고

아침점심저녁 허경영을세번만부르면 자연스레웃음이나올것이야

망설이지말고 right now

call me touch me with me every day every body

난너를원해 난너의전화를원해 바로지금두려워하지말고 허경영을불러봐

신나는일이생길꺼야 즐거운일이생길꺼야 행복한일이생길꺼야 놀라운일이생길꺼야


이명박에 대한 비난, 비판은 때로 환각 효과를 일으키고 또 그것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만악의 근원이 이명박 개인인 것처럼 '상상'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용산과 같은 철거문제도,

미디어법안과 금산분리문제도,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하겠다는 것도, 경제가 만성적인 위기 상태에 처해있는 것도,
 
쌍용차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도, 삼성의 불법재산 상속이나 주식승계 문제도, 사교육 광풍도, 부동산 투기도, 

북한과의 대결 구도나 심지어 일본에 대한 외교사적 문제까지도, 그 모든 게 이명박 일개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비롯한 일인 것처럼 주장된다.


똑같다. 5년전과 똑같다. 그 때도 이게 다 놈현 때문이야,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명박 탓이라 돌리기는 쉽다. 사실 노무현 탓이었다 돌리기도 쉬웠다. '권력'의 가시적인 상징으로, 시스템의

살아있는 징표로서, 때리기도 쉬웠고 욕하기도 쉬웠다. 눈앞에 보이니까. 깊은 생각없이 그저 모든 문제를 그의

앞으로 밀쳐두고 욕하기는 쉬웠으니까.


그렇지만 구분되어야 한다. 이명박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어야 하는 게 맞지만, 이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은 아니다.

사실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자인했듯, 권력을 시장으로 넘어간 지 오래, 근본적인 문제는 그나마

제도적인 감시가 가능하고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어느새 통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변했거나 우리 내부에

이식(혹은 자생)되어 있는 부분에 있는지도 모른다.


뭔가 근본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질문을 던져 볼 때라고 생각한다.


뭔가 우리가 바라던 건 '철인정치인'이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리들의 '어질고 현명한 목자'였던 건 아닌가.

우리는 우리를 알아서 잘 다스려주고 어여삐 보살펴줄 성인군자, 혹은 시혜자, 혹은 전지전능한 왕의 재림을

기다리는 건 아닌지. 그런 부풀려진 기대가 노무현과 이명박, 그리고 죽은 노무현을 다시 불러내는 우리 안의

토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좌절하고, 여기는 썩었어, 희망이 없어, 라는 또다른 극단적인 자기혐오와

패배의식으로 달려가고 말이다.


이건 일종의 병리적 현상 아닐까. 사실 이명박의 한마디로 언론의 논조와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기소, 그런

이 사회의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며 반동적인 부분들이 조종, 통제된다고 생각하기에는, 적나라한 공권력의

행사로 목숨을 부지중인 이 정권이 너무나도 허약한 게 사실인데도, 이명박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또 반대로, 이명박 자리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만사형통이었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 개인에 모든 문제점을 귀착시키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나오는 게 있다. 이미 나와 버렸다. 허경영이 "건강과 행복과 웃음"을 약속했다. 허경영이 "시험합격과 다이어트 성공,

키높이깔창과 성형수술 성공"을 약속하고 나선 거다. 그는 이제, 대중의 기대와 눈높이에 맞는 신이 되겠노라

선언하고 나섰다.


기대를 한몸에 받던 노무현, 한순간에 모든 국민의 비웃음감이 되어버린 노무현, 어쨌든 당선한 경제대통령 이명박,
 
모든 사람이 증오하게 된 이명박, 또 다시 기적처럼 부활한-마치 토굴 속에서 사흘만에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고 노무현. 이미 한국의 대통령은 신적인 존재로 취급된지 오래다. 그게 전능한 구세주던, 혹은 악신이던간에.

허경영은, 그리고 허경영의 "Call Me"란 노래는 사실 우리가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 선한 목자의 재림을

기다리는 양떼같이 말이다.




#1. 신과 인간 자아와의 관계

신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지, 외부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오랜 성찰에 대해, 비교신화학자인 저자는 구석기

인류의 모권중심적 세계관, 혹은 이를 보다 온전히 이어받은 동양신화의 세계관과 주로 레반트(중근동)에서

유래한 서양신화의 부권중심적세계관이 부딪히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신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는 입장은

신의 역사하심(곧 신화)을 역사, 과학으로 해석하여 자기완결적인 계시로 완성시키고자 골몰한 나머지, 일종의

훈고학적인 강박이나 단일진리를 향한 광기를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 부각되었다.


실제로 수 가지의 원전이 수 세기에 걸쳐 편집된 'Sacred Book'의 오리지널리티 혹은 마술성에 대한 주장이,

각 종파들간의 '이단' 투쟁이나 그를 빙자한 정치투쟁에 원용되었다. 그에 더해서 경전상의 지역과 스토리를

역사에 덧씌우려는 노력으로 인한 '역사강역'의 침탈, 그로 인한 끊임없는 지역분쟁은 여전하다. 특히 '신의

은총'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급독점의 상품이 여전히 개별 종교시장, 특히나 서구 기독교 계통에서 먹히는 이유도,

내 안의 신을 부정하고, 외부의 엄격하고도 질투심많은 심판자만을 바라보는 그들의 신화적 기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전복된 상징과 이미지들.

그렇지만 부권중심의 신화가 모권중심의 신화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변형해 차용한 과거의 상징, 이미지들은

여전히 그 내부에 이미 그와 반대되는 맥락과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신화 내의 많은 사례들-메두사에 대한

여러 변주된 이미지들-을 제치고라도, 무엇보다 선악과와 뱀을 둘러싼 이미지가 그렇다는 지적이다.

인류에 최초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이후 삶의 고역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고 만 선악과, 그리고 그 죄를

범하도록 유도한 뱀의 사악성과 여성의 미욱함이라는 소재는, 기실 기독교신화 이전에 전혀 내용의 방향을

달리하던 것들을 새로이 짜깁기하고 정렬시킨 에 불과하다. 애초 삶에 대한 긍정과 지혜의 획득을 의미하던

사과와 지혜의 나무는 차마 오르지 못할 금기의 대상으로 바뀌고 세상을 주재한는 뱀과 여자(여신)는 남성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방해자로 변화했다. 그렇지만 짓눌린 과거의 이미지와 스토리는, 어느때고 여차하면 돌진하여

그 위에 지어진 텍스트를 공격한다.



#3. 헬레니즘 - 인간 중심주의..신과의 관계에서.

여호와가 큰뱀 리바이어던에게 승리를 거두며 뽐냈다는 기록이 바로 부권질서가 모권질서를 전복했다는

의기양양한 선언이라고는 하지만, 부권적이라 통칭하는 서양신화 역시 나름의 균열을 갖고 있다. 레반트의 전통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이 신 앞에서 인간적인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유럽의 토착전통인

그리스, 로마 등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가치를 지키면서 그에 의거해 신들의 성격을 판단하는 굵은 구분선이

그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과 긍정에 기초한 헬레니즘의 범신론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본성에 따라 희노애락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듯 인간은 선행을 한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갚아주실
 
터이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기독교 교리와의 관점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의 내용은 이후 인간의 본성을 이성에서 신성(부활의 신비)으로 대치한 중세 기독교교리로 변질되어

인간중심적인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말았지만, 르네상스로 되살아나게 되었고 다시 신을 인간의 도구로 돌려놓은

게 아닐까.



p.s. 매달 한차례 점심시간에, 코엑스 모처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인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나는,

일종의 의식을 참관하고 그 인위적인 성스러움을 느긋이 즐긴다는 기분이다. 다채롭고 혼란스러운 원전들에서

재구성된, 그치만 나름 고도화된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쌓여 올려진 신비적 제의와 신학적 백업.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칭한 맑스의 말은 여러모로 맞다. '응급처방약'이란 걸 알고 적당히 쓰일 수 있겠고,

아님 중독되어 버린 나머지 그로 인해 피어오른 망상 속에 평생을 지낼 수도. 어느 쪽이냐면 나는,

(굳이 말한다면)

Q.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성체를 모실 수 있다. ( O )

제사상 음식 지분거리지 말라지만, 배고프면 전부치면서 먹잖아.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 8점
조셉 캠벨 지음, 정영목 옮김/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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