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 다운타운의 해안,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이 있는 곳이다. 대략 150년 이전의 범선부터 2007년까지

 

활동하던 잠수함까지 7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의 내외부를 일일이 둘러볼 수 있다는 게 포인트. 특히나 동해를 무대로

 

활동하던 구소련제 공격형 잠수함인 B-39의 좁고 불편한 내부를 살피는 건 꽤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박물관의 중심건물이랄 수 있는 1898년 건조된 버클리 선. 증기를 내뿜었을 커다란 굴뚝을 높이 세운 선박 안에는

 

증기선의 엔진이라거나 실내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뜬금없게도) 타투샵도 들어가 있었다.

 

1700년대 영국의 프리깃 선을 복원한 서프라이즈 선, 내부에는 그래도 제법 오래된 느낌을 살린 대포라거나 각종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대포의 여러 부품에 대한 이름과 작동방식에 대한 설명도 나와있고.

 

해먹 대신 그래도 널판지가 깔린 침대에서 몸을 뉘일 수 있었던 상급 선원의 공간도 둘러보고.

 

선장의 호화로운 식사 공간도 슬쩍 훔쳐 보는 재미.

 

당대의 선원들이 어떤 식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요일별 식단을 아예 소개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18세기의 대영제국을 건설하는데 선봉에 섰을 전투선박인 거다. 충분히 해양박물관의 앞머리에 설 만하다.

 

그리고 1974년에 건조되었다는 구소련의 잠수함. 굉장히 투박하고 못 생겼다라는 느낌인데다가, 내부를 돌아보려면

 

우선 저 앞의 동그란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지 확인한 후에 들어가야 한다. 설마 그렇게 좁은 출입구가 있겠어, 하기

 

쉽지만 정말로 저렇게 좁고 불편한, 당장이라도 폐쇄공포증에 시달릴 것만 같은 공간이 저 안에 있었다.

 

온통 새까맣게 칠해진 구소련 잠수함의 꼭대기에 그려진 혁명의 붉은 별, 그 붉은 빛이 선연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것부터가 벌써 뭔가 숨통이 턱 막히는 느낌.

 

어뢰나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공간인 거 같은데, 이렇게 조밀하게 공간을 채워넣으려 애써도 선원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고작해야 발딛고 움직일 수 있는 두어뼘 남짓이다.

 

그리고 잠수함에 탑승하기 앞서 시험해봤던 바로 그 문과 동일한 사이즈의 철문.몸집이 큰 미국인들에게는 꽤나

 

통과하기 어렵겠다 싶은데, 실제로 저 정도의 아저씨도 한참을 낑낑거리며 버거운 몸뚱이를 부비적거렸다.

 

그나마 화장실이 이정도 공간이라도 확보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온통 파이프와 전선과 손잡이로 포위됐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꽤나 현대적이랄까, 배관과 원형의 손잡이와 전선들이 최적의 공간 활용을 꿈꾸며 사방으로

 

내리달리는 모습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계란색 바탕에 빨갛고 파랗게 정돈된 색감 역시.

 

 

 

역시 어디서든 사람이 생활하는데 긴요한 건 먹는 것, 그리고 싸는 것. 잠수함 승조원들의 일과와 식사시간에 대해서

 

자세한 메뉴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비록 그런 삼시세끼 식사를 만들어내는 주방이라는 게 무슨 보일러실처럼 이렇게 작고 보잘것 없다고 해도.

 

재미있는 건, 이 잠수함의 작전구역이 한국의 동해지역이었다는 점, 때로는 대한해협을 통해 남해와 서해 지역까지도

 

작전지역으로 삼았다니 일촉즉발의 냉전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전사임에 틀림없다.

 

그런 잠수함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까지 항해해서는 결국 샌디에고에 안착, 해양박물관의 주요 전시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도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전히 이런 상급 장교의 의복이나 구소련의 영도자들 사진을 남겨둔 채.

 

잠수함 승조원들의 세면장..이라는데, 설마 여기서 모든 세면을 다 하지는 않았겠지? 고작해야 싱크대 수준인데.

 

 

그리고 다른 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발견한 선실 창문에 반사된 샌디에고만 앞바다의 풍경. 온통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기도 한데다가 1700년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배들이 뒤섞여 있다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그리고 해양박물관에서 가서 알게 된 재미있는 프로세스 하나. 참치 통조림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

 

 

 

 

새만금 아래, 변산반도국립공원 끄트머리에 있는 격포항에서. 허리와 엉덩이와 입술을 맞댄 배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조의 연환계라도 쓴 듯 그렇게 바다를 뒤덮은 채로 옴쭉달싹 못할 거 같은 배들 너머로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가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조금 너머에는 배 세척을 사이좋게 나란히 묶어둔 채 둥실둥실하는 모습도 보였다. 가운데 있는 배가 조금

커보이긴 하지만 비슷한 사이즈의 비슷한 색깔, 모양새의 배 세척이 고양이 발가락처럼 곰실곰실.

여객선터미널을 지나 쭉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과 대치하고 선 우락부락하게 층진 암반, 그위에 살풋

얹힌 단풍들. 저쪽으로 좀더 걸어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모자란 관계로 패스, 어찌나 아쉽던지.

대신 무지개빛의 바람개비 옆을 지났다. 바람이 불지 않던 탓에 빳빳이 굳어있던 바람개비들은 바다쪽으로부터

육지쪽을 향해 날아갈 폼만 잡고는 장대 위에 게으르게 앉아있었다.

바다도 보고 언덕도 보고, 그리고 단풍도 즐기며 변산반도 쪽, 다음에 시간 내어 제대로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개비들이 씽씽 돌기 시작했다. 저러다간 어느 순간 포르르 날아가버리겠다 싶도록.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목포의 유달산 일출을 찍기로 한 출사 여행이었던지라 저녁 일정은 일찍 마쳤다. 술도 깰 겸 하여 습관처럼

카메라를 둘러메고 훌쩍 혼자서 나온 건 이미 늦은 밤, 그래도 밤 공기도 선선한데다가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 너무 좋아 내처 걸어보기로 했더랬다. 알고 보니 숙소가 위치한 유달산쪽은 옛 목포항이 있던

곳이라나, 몇걸음 걷기도 전에 물결치는 필체로 쓰인 '예향목포'란 돌덩이부터 만났다.

역시 항구도시인지라 길가에 이렇게 닻을 겹겹이 쌓아둔 채 셔터를 내린 상점들도 보이고, 스크류니 프로펠러니

선박에 관련된 장비들을 취급하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지나는 사람은 고사하고 차들도 흔치 않아 조금 헛헛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혼자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밤길을 걷는 건 굉장히 유쾌한 일이다.

나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선 한밤 중에 단풍놀이도 즐기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절여졌을 텐데도 노랗게 잘도

익은 나뭇잎들이 이쁘다. 그런데 그 밑에 줄줄이 주차해 있는 저 리어카들은 왜 저렇게 바닥이 길게 덧대어져

있는 걸까. 한 두대도 아니고 우르르 세워진 리어카들이 전부 저 모양이니 더욱 궁금증이 이는 거다. 나중에

목포 수협 위판장까지 걷고 나서야 풀린 의문.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는 길이 아니었으니, 골목이 나오면 괜히 한번 꺽어들어가 보기도 하고, 뭔가 호기심을 잡아끄는

게 있겠다 싶으면 옆길로 새보기도 하고, 아니면 굳이 뒤로 되돌아와 확인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떠도는 중에 지나친

골목 중 하나. 작고 여윈 이층짜리 건물에 문짝은 왜 그리도 많이 달렸는지, 문짝 하나 창문 하나로 이루어진 상점들이

세네개는 들어서 있는 거 같았다. 가로등 불빛을 양분삼아 하얀 스티로폼 상자 속에서 쑥쑥 자라던 상추들도 있었고.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문득 다다른 곳이었다. 목포수협 위판장.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곳이 멀찌감치에서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을 향해 걸었을 뿐이었는데 무슨 마을 잔치라도 벌어진 듯이 웅성대는 분위기에 온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온 듯 바글바글한 인구밀도까지. 뭔지 몰라도 바싹 구미가 당겨서 풍경 틈새에 비집고 들었다.


그 결과, 조기가 풍년이라는 요새, 어떻게 어선들이 잡은 생선이 모이고 분류되고 포장되는지 그 과정을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다음날 새벽 5시부터 경매가 진행된다는 정보도 입수해서,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생선들이 팔려나가는지까지 알 수 있었던 뜻밖의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우선은 경매를 준비하기까지,

생선들이 집하되고 분류되고 포장되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사진은 어쩌다보니 역순으로 찍혔더라는.

어선들이 항구에 배를 가까이 대고 나면, 크레인차가 배 곁으로 바싹 붙어선 단단히 위치를 잡는다.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불쑥 튀어나온 배와 그 우악스런 불빛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데, 게다가 어디선가

솔솔 풍기는 기름 냄새와 둔중한 기계의 울음까지.

배의 갑판 위에서 잡은 고기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선원 아저씨들. 예비군 모자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젊은이도 있고,

그야말로 뱃사람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저씨도 있고. 옷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그네들의 팔뚝은 두꺼운 근육들로 감겨

사방으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다. 크레인이 늘여뜨려진 배의 한복판에서 잰 손놀림으로 뚝딱 짐 하나를 꾸린 사람들.


그렇게 잘 여며진 생선 상자들이 크레인의 움직임에 따라 번쩍 들려서는 안전하게 항구 위 단단한 바닥에 옮겨졌다.

두껍고 까만 크레인 낚시바늘이 생선 비늘처럼 반짝거렸지만, 그런 건 일하는 사람이 아닌 놀고 있는 사람 눈에나

보이는 법인가 보다.

한짐을 꽁꽁 안전하게 묶고 있던 두꺼운 밧줄을 헤집어서는 번쩍,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옮겨진

생선들은 노란 플라스틱 박스에 부어져서 아주머니들이 분류해주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어찌나 생선들이

많은지, 당연하지만 한마리 한마리 긁히거나 찌그러지지 않게 챙길 여유는 없는 듯 했다. 마치 우유가 담긴

그릇에 씨리얼을 붓듯이 가차없이 부어버리는 그 냉정한 손속이라니.

일렬로 늘어선 아주머니들과 노랑 박스를 무질서하게 가득 채운 조기들과의 기싸움이 시작되고. 아주머니들의

군더더기라곤 없는 정연한 몸놀림과 생각보다 현란한 패션센스에 뒤지지 않는 생선들의 아크로바틱한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쩍쩍 벌린 채.
 

아주머니들은 인어공주처럼 온통 반짝거리는 비늘로 뒤덮인 하반신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색감의 형광등 아래에서

미끌거리며 반짝거리는 비닐 앞치마 자체의 광택도 눈이 부셨지만. 생선의 사이즈에 따라 각기 다른 상자에 옮겨담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생선들을 분류하는 손놀림에서 일말의 망설임이나 잡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무슨 '생활의 달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달까.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생선들은 아직도 숨이 붙어 펄떡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이 제각기의 패션센스와 칼라를 과시하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왠지 슬며시 웃음이

나오게 되는 그런 따뜻한 풍경이기도 했다. 열두시가 넘은 오밤중에 나와서 쉼없이 저렇게 일하시는 게 그렇게

마냥 재미있는 일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도 노랑 박스에 포위당하다시피 한 상태로 끊임없이 새로 부어지는

생선들의 산을 의연하게 해치우시는 모습은, 뭐랄까, 약간 영웅적인 분위기마져 풍겼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사이즈별로 분류된 생선을 받아서는 저렇게 가지런히 정리하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사이즈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약간씩 자세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데, 무슨 테트리스 조각맞추듯이 이렇게 저렇게 짜맞춰선

틀림없이 저런 봉긋한 언덕 모양의 생선박스를 만들어내시는 거다. 그 손놀림 역시 신묘하기가 달인의 경지더라는.

완성된 생선꾸러미엔 저렇게 물을 한바가지 끼얹어서는 창고 맨 뒤쪽부터 차근차근 놓이게 되는 거다.

그 전에 생선의 선도 유지를 위해 빠질 수 없는 얼음 한 삽. 큰 칼 옆에 차고 자세를 잡으신 충무공은 아니라지만

눈삽을 옆에 차고 깔맞춤된 '구루마'에 턱하니 기대선 모습이 어찌나 멋지시던지. 마침 약간 빛살도 새어들어와

머리 위로 내려떨어졌으니 더할나위없는 영웅의 풍모.

이렇게 안에서부터 바싹 붙어선 차곡차곡 채워지는 생선들은 이제 새벽에 있을 경매를 기다리며 네다섯시간을

얼음찜질하는 거다. 물론 이 곳으로 목포 근방의 어선들이 모두 집결하니까 생선량이 어마어마할 수 밖에 없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조기가 정말 풍년이긴 한 것 같다. 드넓은 위판장 바닥이 온통 저렇게 빈틈없이 빽빽하게 갈무리된

조기 꾸러미로 깔려 버렸다.

그래도 그 옆에서 수협 위판장 바닥에 대한 나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녀석들은 새우젓 드럼통들. 꽁꽁 묶인

주둥이 사이로 용케도 삐져나온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고 나서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던 위판장 벽면의 무슨 전기스위치상자. 손대지 맛시요. 위염. '맛시요'란 말은

전라도의 특징적인 억양을 그대로 살려서 적은 거 같은데 왠지 발음하며 읽어볼수록 맛깔스러운 거 같다.

손대지 맛시요. 알았시요, 라고 얼른 대답해 주고 싶은.

조금이라도 자고 몇 시간 후에 있을 경매 모습을 구경하려면 얼른 돌아가야겠다 싶어서, 이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숙소.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짧았고, 생각보다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그토록 길게 덧대어진 리어카들의 쓰임을 알아냈으니, 생선을 담는 나무상자를 가능한

많이 싣고 옮기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 저런 식으로 '대륙'의 느낌 가득하게 나무상자를 바리바리 싣고는

위판장에서 필요할 때 옮겨와서 쓰는 거 같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미 자정이 지난 늦은 밤이었지만 시꺼먼 바다를 가르며 불빛들이 나타나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생선을 실은 배인지 아니면 막 내려놓은 배인지 모르겠지만 불빛 세 개가 발톱처럼 수면을

긁으며 앞으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배가 지나가고 나면 길 옆으론 온통 까만 어둠이다. 빵꾸난 구멍으로 새어나올 법한

불빛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먹지같은 까만 벽이 하나 바닥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세워진 느낌. '바다'라는 곳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망연함이란 건 사실 저런 형태 아닐까 싶었다. 제 손가락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무저갱의 어둠 속. 아마도 밤바다가 웅크리고 있을 그 무시무시한 공간을 옆으로 두고는

열심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새만금, 몇 년전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전에는 간간히 뉴스나 신문에서 접했던

그 곳 새만금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디서 어디가 매립지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그 곳, 직선으로 쭉쭉 뻗은 도로만이

이 곳이 지도위에 그려진 몇개의 직선을 따라 만들어진 땅일 거라 짐작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거침없는 직선으로

내뻗은 도로를 따라 함께 저너머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내달리는 건 듬성듬성하지만 역시 완고한 직선으로 심어진 잔디.


2009 희망다큐프로젝트 "살기 위하여" 시사회..물막이댐을 쓸어낼 '재해'를 기다리며.

 

다큐를 보고 나서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이런 대규모 간척사업이 대체 무슨 경제적 이득이 있을지, 그리고 설사

이득이 있다 해도 다른 생태계 파괴 등의 요소를 고려했을 때도 여전히 이득일지는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땅이 좁은 나라라 하지만, 실제로 쓸 땅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계획과 시스템의 문제 아니던가 싶어서다.

새만금을 둘러본 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지라 판단에 새로운 팩트를 가감하지는 못했지만, 풍경은 남았다.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채 공사중이었던 새만금 관광센터 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그란 순환로가 있었다.

군산으로, 부안으로, 그리고 수변로로 빠지는 길들이 동그라미 밖으로 빠지는 화살표들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옆에 노란 삼각형 안에 검은 화살표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왠지 '재활용 표시'같기도 하다. 플라스틱이니

알루미늄이니 재활용이 가능하단 표시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순환하는 화살표. 그렇지만 빨갛고 노란 바탕색에

검정 화살표가 그려져 있으니 재활용이 불가능하다는 불길한 징조 같기도 하다.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공사중인 모습. 저 멀리 무슨 갑각류의 딱딱하고 화려한 껍데기처럼 반짝이는 주황색

포크레인이 여러 대 세워져 있고, 앞에는 물빼기 작업용으로 쓰였을 녹슨 쇠파이프가 여러개. 그렇게 물이

바싹 빠진 바닥에 물새들이 몇 마리 깃을 접고 내려앉았다.

방조제를 따라 이어진 수변로를 쭉 걷다 보니 방조제 안쪽으로, 아마도 이제 폐선으로 버려지고 만 듯한 배들이

생각보다 잔뜩 있었다. 아직은 방조제 안쪽의 물이 전부 빠지지 않은 상태인지라 제법 둥실거리며 떠 있긴 했지만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하릴없이 낡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수변로 옆의 성기게 심어진 잔디밭 위에 동그마니 놓여있던 배 한 척. 그 조금 위로 씽씽 달리는 관광버스와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리는 배는 어쩜 잔디가 일으키는 물결을 타고 있는 거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잔디가 어쩜 저리 반듯한 이랑을 만들어 놓고 있는지, 정말 굉장히 작위적이기도 하고 인공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죽죽 그어진 잔디밭 골들은 그대로 얼어붙은 파도 같기도 하다. 안개가 잔뜩 끼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빗발도

흩뿌리는 날씨 탓에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반쯤 헐벗은 채 얼어붙은 파도 위에 올라앉은 배 한조각이 분위기를 더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저 콘크리트 기반 위에 비석처럼 서 있는 게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봤다.

방조제 관리를 위한 전기설비 단자함이란 걸 알고 난 후에도, 이 땅 밑에 잠들어있을 수많은 바다 생명들, 이곳에

깃을 접고 내려앉았을 뭇 생명들, 그리고 이 곳에서 땅을 파고 바다를 일구며 살아왔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반듯한 직선으로 만들어진 비석같기만 했다.


이 곳은 방조제로 감싸이지 않은, 살아있는 바다 쪽의 갯벌. 아직 살아있는 것들이 생생한 자취를 남기고, 그에

더해 파도가 얼기설기 갯벌을 흐트러뜨리며 손자욱을 깊게 긋고 내리는 곳.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갯벌을 뒤집고 뭔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수변로 안 쪽의 갇힌 배들과는 달리 바닥을 드러낸 맨땅 위에 기우뚱 정박해있는 배들, 그건 오히려 이들이

아직 갇히지 않고 자유로이 바다 위를 달리며 움직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다시 물이 들이차면 둥둥 떠올라선

사람들을 싣고 고기를 잡으러 앞바다로 나갈 준비가 된 배들이다.

수변로를 따라 앞서 내달리던 일군의 자전거 무리들. 관광안내소 앞 주차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달리기

대신 이층으로 탑쌓기 놀이 중이었다. 화려한 유니폼 때문인지 자전거를 차곡차곡 챙기는 모습이 무슨 탑쌓기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더라는.

새만금 방조제가 가둬버린 땅과 바다에는 더이상 파도가 갈퀴질할 갯벌도, 갈퀴질의 흔적이 남을 만큼 말랑한 공간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신 남은 건 온통 쭉쭉 뻗은 단단한 직선들이다. 게다가 아직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직선들은 사람들의 손길이나 자연의 세례를 받지 못해 엄청 날카롭고 황량해보이기조차 한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보았던 유일한 동그라미조차 생태계의 순환이 파괴되고 재생이 불가해졌음을 묵시하는 것 같았던 거다.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화장실이 급할 만큼 긴 시간 배를 탄 적이...부산에서 후쿠오카 건너갔던 때 말고는 없었던 거

같다. 그 쾌속선이야 워낙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으니 딱히 화장실이 눈에 띌 만큼 특징적이지도 않았지만,

남해의 소매물도니 외도를 돌아보는 이 유람선에 이렇게 설치되어 있는 화장실은 신기했던 거다.


뭐,이런 화장실에 눈이 갈 만큼 긴 시간 배를 탔던 것도 이유겠고, '소변만 가능'하다는 저 협소하고 불편해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이 불쑥 혹처럼 튀어나온 게 눈에 잘 띄기도 했고. 살짝 문을 열어보고는 그 강렬한

냄새와 위생상태에 질겁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 파도만 좀 잔잔해서 바다가 거울같이 반반하고 실크처럼 매끈하다면, 그래서 배가 전혀 요동이 없고

흔들거리지 않았다면 화장실이 그렇게까지 되어버리진 않았을 거라 짐작해 본다. 배 위에서 일을 본다는 건

일종의 거대한 천재지변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의지, 그 의지로 자폭해버리거나 뒷사람에 민폐를

끼치는 걸 막기 위해 아마도 '소변만' 가능하다고 읍소한 거였나 보다.




제주도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은 어디일까. 좌우로 길쭉하게 생긴 제주도의

모양새를 보자면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바로 접근가능한 서귀포는 차라리 가깝다고 말해야 할 거

같고, 동쪽의 성산이니 섭지코지쪽도 딱히 멀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가장 먼 곳은 아무래도 마라도,

가파도로 향하는 배가 뜨는 모슬포쪽 아닐까. 제주도 서남쪽, 올레길 10코스가 있는 곳이다.

화순에서부터 시작하는 올레길 10코스,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탓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드문드문 빗발이 날리는 날씨였지만, 멀찍이 커다란 바윗덩이같은 산방산이 흔들림없이

섰다. 궂은 날씨에도 밭에 나와 일하고 계신 분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그 풍경, 산방산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제주도 남서해안길을 따라 걷는 게 10코스의 매력이다.

젖은 날개를 쉬러 잠시 꽃들에 내려앉은 배추흰나비들. 금방이라도 쏴아 비가 쏟아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보니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빗물에 씻겨서 거의 형광색에

가깝도록 강렬하고 선명하게 빛깔을 내뿜는 꽃들 옆에 쪼그리곤 이리저리 구경.


제주도에 출장으로도 오고, 여행으로도 오고, 혼자도 오고, 가족이랑도 오고, 어떻든 올 때마다

주변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 많다니 조심하라는. 바람 구멍 숭숭난

깜장 현무암 돌담 옆을 우르르 걷는 여자들의 그림이 그럼 제주도의 단적인 이미지일까.

여자들 대신 보이는 건 농사일이나 장사일로 고단하신 어르신들이다. 제주도의 지역소주는

한라산, 그렇지만 맥주는 뭍이나 여기나 똑같다. 카스, 하이트, 맥스..관련 법규정이 워낙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기업 위주로, 빡빡하게 되어있어 그렇다던데 지역 맥주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제주도의 맑은 물로 빚은 맥주라면.

화순 금모래해변가로 바싹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본격 올레길 시작. 음..그치만 사실 길에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나. 올레길로 구간구간 끊겨있긴 하지만, 어디서고 올레길에 들어서서

또다시 어디서고 내키는대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랄까. 올레길이 불어온 걷기열풍이니

'자기를 찾는 도보여행'이니 따위의 말의 성찬에 걸맞는 사용법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파도에 씻긴 어두운 암갈색의 바윗덩이 해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듯한 해변가에 셀수없이

들이치고 빠져나갔을 물결무늬가 그대로 새겨진 기암괴석들. 짙은 안개인지 구름이 끼어 정상부

절반쯤이 뚝 잘려나간 산방산이 계속 눈앞이다.


날이 잔뜩 찌푸린 거 치고는 잔잔한 바다다, 싶었는데 어느결에 조그마한 복어 한마리를 뱉었다.

점점이 흰 알맹이가 박힌 검정모래사장 위에 뉘인 하얀 배의 복어새끼, 그 거무스름한 등판에도

점점이 하얀 얼룩이 박혀있었다.

화순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나고 슬쩍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을 따랐다. 짙고 검은 바위들을

질식시킬 듯이 빼곡히 들어찬 녹색 풀떼기들이 검고 딱딱하고 까칠한 그것들을 바다로, 바다로

밀어내는 것만 같다. 녹색생명과 암석생명간의 전면전이랄까.

문득 언덕길 아래로 한뼘만한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삼면이 까만 바위로 둘러쳐진 채, 자동차 두어대만

대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제주도에서는 보기 힘들것 같은 황금빛 모래가 곱게 쌓여있는 비밀의 공간.

아까는 뾰족뾰족, 파도에 벼려진 칼날같은 바윗덩이들 사이로 걷는 게 곧 길이더니, 이번엔

파도에 씻겨서 둥글둥글해진 해변가 올레길이다. 뾰족하고 동글하고, 그걸 모두 파도 핑계로만

돌리는 건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세상이 잘 못한다는 말은

대개 핑계이기 마련. 내 단단함과 심지를 먼저 살필 일이다.

'썩은 동앗줄', 누군가의 배를 항구에 비끄러매었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을,

아니면 하다못해 그물망이라도 잡아놓고 있었을 그런 나이롱끈이 깡충하게 짧아진 채 해안가

모래톱 위에서 가늘고 야윈 몸을 뒤채고 있었다.

딱딱한 바위판, 두터운 각질처럼 해변가를 덮고 있는 길은 군데군데 여린 곳이 파이고 깨어져

물이 제법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고, 곳곳이 웅덩이였다. 테이블처럼 깍아지른 바위판에

파도가 밀려오니 철썩철썩 극적으로 하얗게 부서져내리기도 하고.

용머리 해안으로 접어드는 길. 올레길 표지가 언제 저렇게 쌈빡하게 바뀌었을까. 해안을 따라 걷던

좁은 길이 확 트이며 숲사이로 이어지는 즈음, 흙바닥은 톱밥이 깔린 듯 폭신폭신.

'산방연대'가 뭔가 했다. 산방산에 있는 연대, 그러니까 연기를 피워올리는 봉화대를 말하는 거다.

조선시대에 변경 최일선에 설치한 시설물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대 위에는 각종 병기와 생필품을

간수하는 창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저렇게 말끔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나 했더니, 최근에 보수한

거라고. 안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려야 할 곳에는 잡초만 듬성듬성. 조선시대라면 평화로운

때로구나, 하겠지만 이미 봉화대는 퇴역한지 오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삼엄한 시절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여기란다. 용머리해안.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중국의 누군가 와서 이곳에 칼을 꼽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칼을 꼽자 천지를 진동하는 비명소리가 번졌다던가. 하멜은

그런 전설이 서린 이곳에 처음 당도했을 때 저런 풍경을 봤을 거다. 그러고 보면, 올레길 10코스를

걷는단 건 당시 하멜이 봤던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은 아닐까. 조난당하고, 근처를 배회하고, 혹은

조선의 병사들에게 압송되거나 민간인들에게 길안내를 받거나. 그렇게 걸었던 길 아닐까.

하멜 동상과 하멜이 타고온 범선이 놓인 한 옆에는 네덜란드문화체험관이 조그맣게 서있었다.

네덜란드의 나막신들을 직접 신어볼 수도 있고, (좀 뜬금없지만) 히딩크 생가나 캐리커쳐도 있고,

풍차니 튤립이니 모양을 딴 장식품들도 전시되어 있고. 풍차의 날개를 돌려 운수를 보라더니

'좋은 사람을 만나니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라'랜다.

산방산자락을 끼고 계속 가는 길, 올레길이 설마 산방산 위까지 올라가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우회하는 길이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검푸르딩딩한 바다가 잔뜩 찌푸린채 빗발을 날리는

하늘이랑 섞여들어버렸다. 그나마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표지하는 건 길게 늘어진 섬하나.


파도에 씻기고 쓸려서 오랜 옛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모습이 되어 있는 해안가 바위들, 녹조류가

이끼처럼 온통 돋아난 모습이 신기하다. 암석의 때로 격하고 때로 부드러운 굴곡이 리드미컬한

가운데 부드러운 녹색 이끼가 빼곡하니 융단처럼 내려앉아 더욱 보드라운 느낌을 던져준다.

검정 모래사장 위에 떠밀려온 미역 비스무레한 해초류 동가리. 쪼글쪼글한 잎새 모양이 변기

청소하는 솔 같기도 하고. 굉장히 탱글탱글하고 두툼하니,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해안에 바로 붙어서 걷는 길은 이제 좀 뜸하려나, 해안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오래지않아

나타난 조그만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는, 잠시 길가 벤치에 앉아 쉬는 중에 발견한

누군가의 호루라기.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던 이 곳이 마라도 잠수함타는 곳이라던가. 어느

부산한 가이드가 흘리고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형제섬이 보이는 바닷가. 바닷물이 들고 남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섬의 크기나 갯수가

달라진다는 형제섬을 흘낏거리며 걷는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사람들의 소원도 만나고,

무슨 십장생도의 영지버섯처럼 자라난 풀떼기들도 만나고, 형제섬 앞으로 달리는 유람선도 만나고.

좀 가다 보니 나타나는 송악산 자락. 송악산은 제주도의 오름(기생화산) 중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인데, 제일 먼저 마주한 건 산자락에 뽕뽕 뚫린 구멍들. 일제시대에 여기에

대공포 요새를 만들었다나, 굴을 파고 포들을 숨겨놓았다 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통제된 채

그저 먼 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뽕뽕뽕 구멍들.

그리고 송악산 중턱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 가만히 네다리로 버티고 선 채 잠을 자는 듯

미동도 않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이좋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풀도 뜯고 꼬리를 휘둘러

파리도 쫓는 (아마도) 부모자식간의 말 두마리도 있었다. 그리고 올레길 10코스 처음부터

우릴 따라 내달려온 저 말모양의 표지판도.


송악산 정상, 성산일출봉만은 못하지만 그만큼 거대하게 푸욱 꺼진 분화구는 한눈에 채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려야 크레이터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위에서 아래까지 시선으로

거칠게나마 훑어볼 수 있었던 것. 그 풀떼기들과 돌무더기들의 거친 질감과 거리감을 담기엔

카메라가 너무 가까웠다. 가뜩이나 황량한 풍경, 불쑥 코앞에 닥친 거대한 크레이터 때문에 더욱

막막해지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이 만들어진지도 이제 꽤 되었나. 파랑 페인트로 그려진 화살표가 놓인 돌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풀씨가 새어들어가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화살표를 뚝 끊어먹었다. 애초 돌부터 쪼개져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화살표를 따른 오솔길 옆으로 말들이 슬몃슬몃 숨어있는 풍경이

희끄무레한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아까까지는 돌무더기가 거칠거칠하거나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가를 걸어서 힘들다 싶더니

어느결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호젓한 산길 위로 걷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더구나 저 좁은 길 위로

폭탄처럼 투하되어 있는 말똥들의 향연이라니. 한발 한발, 지뢰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텐션 가득한

순간들. 그 덕에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보기보다는 발끝만 바라봐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빗물에

씻긴 풀꽃들이라거나 나무를 칭칭 감은 채 하얗게 변색된 덩굴 따위, 눈에 콕콕 박혔다.

말들이 돌아다니는 걸 막으려 했나보다. 제법 넓은 길이 나타났다 했더니, 어느 틈에 저런 울타리가

길 앞을 가로막았다. 숲까지도 길게 이어져있는 엉성한 울타리, 사람들은 저 옆에 한번 꺽여있는

좁은 창구로 이동해야 한다. 말을 막고 사람은 걸러내는 그런 신기한 울타리.

그렇게 울타리를 넘고 나니 또다른 말들이 나타났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뒷배경이 모두

날아가버린 어느 언덕 위에, 미끄럼틀처럼 고개를 드리우고 풀을 뜯는 어미말 옆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망아지 한마리. 아니 근데, 말에 접근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올레길 표지는 말 옆에 저리도 바싹 묶어둘 수가 있나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말들,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푹 꺼진 땅에 구축된 콘크리트 구조물.

말들이 느긋하게 늘어져서 풀을 우물거리는 정경은 분명 평화로워야 함에도 왠지 모를

서늘함과 살벌함이 느껴지는 건 저 구조물 때문이었다. 뭔고 하니, 일제시대 이 근처에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포진지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군사시설을 부랴부랴 확충하던 시기 건축하던 것으로 5기 중

하나는 미처 완공도 못한 상태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군사시설이 조선이 해방되는 순간을

그대로 멈춘 채 증거하는 셈이다.

흡사 정글 트레킹을 하는 기분.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가방과 옷을 흠뻑 적시곤

삶의 무게를 한껏 더해주었고, 물방울을 머금어 축축 처진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리고 길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날이 맑았다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리고 목도 금방 말라버리고, 여러모로

그것도 쉽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끈덕진 가랑비도 쉽진 않단 말이다. 온통 희뿌옇게

'밥안개'가 내려앉은 제주도의 시골 풍경, 대충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올레길 10코스가 끝물에

다다른 참이어서, 조금 더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예기치 않게 눈앞에 저런 시멘트 구조물이 나타나서 조금 놀랬다. 그리고 조금 지나 나타난 텅빈

주차장과 단발 비행기의 앙상한 얼개까지. 사람 하나 얼씬대지 않는 곳에 이런 것들이라니. 더욱

을씨년스럽고 추적추적 청승맞은 느낌이다. 알고보니 그 '알뜨르 비행장'과 관련된 시설들,

시멘트 구조물은 비행기 격납고, 주차장은 인근 양민학살장과 비행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

아직도 남아있는 청보리밭이 조금. 청보리축제는 이미 3,4월에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밭이 조금 남아있었던 거 같다. 상큼하고 건강한 보릿대가 위로 뻗어올라가면서

초록빛을 쭉쭉 짜올리다가 급기야 가늘고 보드라운 붓털같은 끄트머리에서 팡, 공기중으로

퍼뜨려 버리는 느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저 보리밭 위로 연두빛 구름이 곱게 뭉쳐있을 것만

같은데, 바람이 슬슬 일렁이며 초록빛 기운을 온통 흐트려버렸다.

그렇게 10코스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흙길엔 온통 물구덩이가

패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 열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10코스를 첨부터 끝까지 걷는데

5시간에서 6시간내외로 걸린다고 보면 될 듯.


아마도 청보리가 가득 차 있던 밭이 아니었을까. 양쪽으로 시꺼먼 흙, 굉장히 비옥해 보이는

흙이 잘 다독거려진 채 빗발을 흔적없이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 난 곧고도 좁은 길 하나가

하모해수욕장, 모슬포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BGM : '마도로스K의 모험 Ⅱ' from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외도를 한바퀴 걷고 돌아나오던 길, 선착장이 가까워졌다 싶어서 바다를 내다보니 오밀조밀

덩어리가 하나 떠 있었다. 뭔가 싶더니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그것은 똑같은 사이즈의 배 다섯 척.

외도를 오가는 수십대의 선박들이 시간에 맞추어 선착장에 들고 나면서, 기다리는 배들은

저기에 사이좋게 나란히 정박을 해두고 있나보다. 자동차에 비기자면 저기는 일종의 주차공간,

선도 그어지지 않은 바다 위에서 솜씨좋게도 딱딱 기장도 맞추고 각도도 맞추어 주차를 해뒀다.

그 와중에도 한 대가 새롭게 주차를 하려는지 그 옆으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미처 '마도로스K'의 마술적인 주차 실력을 일견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다섯 대가 이렇게 우르르 정렬해선 바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떠 있으니 재미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무너뜨린 '연환계'가 떠오르기도 하고, 뭔가 선박들을 모아 커다란

벽을 만들어둔 느낌.



토실한 엉덩이. 탄력도 좋아 처짐없이 탱탱하다. 키를 잡고 있는 이 시퍼러딩딩한 녀석은 이 전시관의 마스코트.

색깔로 보아하니 상해엑스포 심벌인 '하이바오'와 친척간인 듯.

여긴 중국선박기업연합관, 강남조선공장(江南造船厂)의 일부를 변형, 개조하여 설계하였다고 한다.

생선의 등뼈와도 같은 배의 용골 모양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전시관, 빳빳한 벽면을 둘러친 공간이 아니라 기분상

좀더 넓고 탁 트여보인다.

선박 제조공간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중간중간 최대한 녹색 식물로 치장한 게 눈에 띄었다.

이번 상해 엑스포의 주제가 녹색생활인지라 역시 나름 친환경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인 거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엑스포 한번 치루기 위해 발생하는 건축 쓰레기와 대규모 인파가 몰려들고 빠지면서

발생하는 온갖 유무형의 공해라는 걸 감안하면, 애당초 이런 소비적, 과시적 관념 위에 선 '박람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고민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넓은 공간에 까페도 있고, 레스토랑도 있고, 푸서 지역에 위치한 지라 그렇게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좀 심하게 공장 냄새가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까 보였던 그 살짝 변태캐릭의 앞모습. 뭔가 귀엽지도 않은 게 귀여운 척 하느라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다.

아직 중국은 자체의 미감과 자연스러움이 살아있는 캐릭터를 못 만드는 건가..

그리고 다소 민망한 사진. 이 녀석은 성별이 뭐지. 자웅동체인가, 달팽이처럼.

어떻게 보면 불룩한 위아랫배에 더해 섹시한 엉덩이까지. 정준하의 몸매가 문득 연상되는 질펀한 몸매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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