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곳곳으로 까페가 급격하게 번지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까페를 찾는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이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쿠션이 엉덩이와 허리를 받쳐주는 등받이의자,

테이블과 몸뚱이 사이에 꼽아서 고정시켜둘만큼 두툼하고 단단하면서도 보들보들한 쿠션 두어개, 또

옆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말을 섞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충분한 테이블간의 널찍한 거리,

굳이 통유리가 아니어도 햇살과 바깥 풍경이 꾸물꾸물 스며드는 창문과 맘에 드는 노래, 거기에 굉장히

진한 에스프레소나 더치커피 같은 것들. 그런 거라면 반나절은 족히 까페에서 뒹굴 수 있는 거다.

책을 보던, 음악을 듣던, 이야기를 하던, 다이어리를 끄적거리던, 공부를 하던, 사실 가장 좋은 건

여행책자를 펴놓고 여행계획을 짜거나 어디 놀러갈지 생각하는 거지만. 사실 그렇게 치면 까페에

들어가 마시는 커피나 차류는 일종의 자릿값인 셈이다. 커피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뭔가

쿠션과 테이블,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니까.

이렇게 볕이 한조각 떨궈진 공간에서 꾸물꾸물 밀려나는 그림자와 볕이 잠식한 빛의 영토를 시계삼아,

아침부터 점심, 점심부터 저녁..이렇게 대충 얼버무려진 하루를 하릴없이 까페에 앉아 뒹굴거리는 것.

굳이 분단위, 시단위의 시계나 전화기에 신경쓰지 않으며 책 한권쯤 읽는 것. 그러고 보니 그런 여유를

즐긴지도 꽤나 된 거 같다. 이 까페에 갔던 것도 어느새 수십일 전쯤.

그렇게 조용히 있다 보면 이런 평범한 앞접시에 숨어있던 밤하늘 별들과, 조그마한 망아지 한마리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거다. 흘낏 지나치는 시선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것들.

카메라라도 쥐고 있으면 더 좋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곳곳에 렌즈를 들이대며 다짜고짜

찍어대기도 하고, 잘 안 쓰던 카메라 기능을 이렇게 저렇게 시험도 해보고.

아무래도 그렇게 즐겨 찾아드는 까페는 사람들이 좀 적은 곳, 덜 알려진 곳이기 마련이다.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찾더라도 상대적으로 조금 채워져 있는 시간대일 법한 때에 찾아가고. 사실 웬만한

까페는 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곳이어서, 그런 고즈넉하고 편안하고 조용한 까페를 찾기란 쉽잖다.

까페 이름이 처음엔 '고기'라고 읽는 건가 했다. 까페 이름이 고기라니, 했더니 알고 보니 고기가

아니라 '고희'란다. 제법 맘에 든 까페여서 앞으로도 틈나면 가보려고 생각 중.

돌아나오는 길은 가정집도 많고 조그만 이층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늘어선 다감한 느낌, 어렸을 적

왠지 무섭고 위축감 느끼게 만들던 저 사자머리 철문손잡이가 여전히 버티고 섰다. 이제 더이상

무섭지도 쫄지도 않게 되어 버렸지만, 그런 골목의 느낌도 애써 찾아다닐만한 거 같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Pentax K-r로 거의 처음 찍어본 사진이다. 케잌을 하나 사서 집에 들어가니

이미 동생이 숫자초까지 야무지게 준비한 케잌을 사놨길래, 두개 모두 꺼내고 초에 불을 쟁였다.

태국 방콕으로의 여행. 갑작스럽게 떠난 길이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 넘 질려있었고

따끈한 햇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던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온통 매진된 항공권들 속에서 운좋게

방콕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방콕 시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던 수로, 그 위에 슬쩍 얹힌 나무벤치.

그리고 비둘기가 지켜보고 있는데, 비둘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식사중이신 아주머니 한 분.

분홍꽃이 뚝뚝 굵은 눈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차 위에도, 벤치 위에도, 가리지 않고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온통 꽃이 만발한 도시였지만 가장 인상적이던 꽃은 역시 선인장꽃. 에피톤프로젝트의

'선인장'을 들으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근처를 한참 서성거렸다.

왕실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의 의례용으로 쓰이는 금빛 번쩍이는 날렵한 선박들이 보수 중인 곳이었다.

다리를 오므려 꽉 쥐고 있는 대포는 선수에 장식된 괴물 '가루다'의 무시무시함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

이런 날것의 시멘트벽의 색감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건 여행의 효과일 거다. 벽돌틈 사이로 조금씩

삐져나온 시멘트의 굳은 모양새도 맘에 들고, 대충 그려넣은 티가 역력한 저 화살표 사인도.


왓 포에서 만난 수십수백개는 헤아릴 듯한 탑들. 지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채 사람들의 염원을

쭉쭉 흡수해서는, 날렵하고 유려하게 응축해내며 한방울의 엑기스로까지 끌어올리고는 하늘로

발사하는 거다.

짜오프라야 강 서쪽 기슭에 서 있는 왓 아룬, 새벽사원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 극히 섬세하지만

자칫 조잡해지거나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역시 한땀한땀에 들인 땀과 노력.

강을 건너며 멀찍이서 보면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어슴푸레한 실루엣이 멋지다.

그리고 토끼를 향해 치솟다 허공에 얼어버린 듯 멈춘 물방울들의 부동심결. 구슬구슬 꿰어서


만들어진 목걸이 같기도 하고, 몽글몽글 불규칙하게 뭉쳐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담겼다.

태국에서 만났던 신들. 불교 일색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만 시내 어딘가에서 요한바오로2세

전 교황이 방문했다는 성당을 우연찮게 찾아낸 건 큰 소득이었다. 천사에게도, 교황에게도 부처에

그러듯 똑같이 화환을 걸어주고 발밑에 봉헌하는 태국인들의 신앙심. 신 옆에는 항상 꽃이 있었다.


신 옆에 항상 꽃이 있더라는 발견을 살짝 뒤집으면, 꽃 옆에는 항상 신이 머물지도 모르겠다.

온갖 색깔과 모양의 꽃들이 그득하게 쌓인 꽃시장을 구경하다가, 이 곳에서도 신에게 바쳐진

꽃다발은 얼기설기 창백한 형광등 밑에 매달려있었다. 노랗고 보들한 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로 옆의 허름하고 구질한 건물들 사이에도 신이 머무는 사당과 화환들은 원색이 선연했다.

꽃시장 앞에 일렬로 늘어서있던 삼륜 오토바이들. 열맞춰 세워져있는 귀엽고 조그마한

앞바퀴도 재미있었고, 툭툭 튀어나온 눈알같은 헤드라이트들이 주르륵 열선 것도 웃기고.

해가 기울어가는 '마법의 시간', 슬쩍 공원으로 들어와서 벤치에 누워 하늘이나 보려는데 왠 꼬마가

공원 대리석 바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공을 몰고 우다다다 중이었다. 귀여워서 한참 보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정말 거짓말처럼 딱, 멈춰서서 포즈를 잡아주는 녀석. 위대한 축수선수의 삘이.


허름한 방콕 시내를 쾌속으로 질주하는 쾌속선. 사방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 기슭의 집들에

거대한 파도를 철썩이게 만드는 그 스피드도 놀랍지만 귀가 멍멍하도록 시끄러운 소음도 놀라웠다.

그리고 금빛으로 번쩍대는 관광지 말고, 허름하고 누추하지만 화분 하나씩은 꼭 키우는 판잣집들.


짜오프라야 강은 방콕의 젖줄과도 같은 커다란 강이다. 방콕 시내 곳곳을 거미줄처럼 흐르는

수로들이 모여서 이뤄지는 너른 강, 유람선을 타고 돌거나 강변을 따라 걷거나. 강을 즐기는 방법.

하얗고 까만 건물의 색감이 뚜렷이 대비되는 것 같다. 하얀 건물은 오래전 지어진 요새인지라

사방에 자잘한 금과 얼룩이 땟국물처럼 남았고, 검정 건물은 카오산의 유명한 까페인지라

온통 꽃이 만발했다.

태국의 유명한 맥주, 캔 위에는 안쪽 원통을 따라 빨간 동물이 몇 마리 그려져 있었다. 눈뜨이면

일어나 대충 씻고 외국인이 적은 음식점을 찾아 쌀국수 하나, 캔맥주 하나로 늦은 아침을 먹던

그 때.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도 전에 시원한 맥주가 먼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태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무에타이. 킥복싱 연습장이 동네 여기저기에 하나씩은 숨겨져

있었던 거 같다. 야외에 설치된 링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땀을 말리는 글러브들이 빨갛고 파랗다.

방콕의 야경, 조리개를 적절히 조정했더니 불빛이 육각형의 별모양으로 변해버렸다. 짙은 보랏빛이

되어버린 하늘 아래 주홍불빛들이 별처럼 늘어섰고, 눈에 불을 밝힌 차들은 짐승처럼 내달렸다.

색감을 좀 바꾸고, 셔터 속도를 좀 바꿨다. 마치 백투더퓨처의 한장면처럼, 노랑색 초록색이 반반으로
 
뒤섞인 방콕의 택시가 길게 그림자를 늘이고는 휙 사라졌다.

매봉터널을 걸었다. 왠지 패닉의 '달팽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길고 긴 터널, 온통 플라스틱

창문으로 차도랑 분리되어 있는 그곳에서는 지나치는 행인도 드물지만 누군가 지나친다고 해도

괜시리 마음이 황량해지는 그런 느낌의 공간.

집앞. 그렇다고 어린이집에 사는 건 아니고, 하루에 두번씩은 꼭 지나치는 곳이지만 시간대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참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이날은..

조금 기분이 까맣고 하얗게, 그렇게 얼룩덜룩했던 날인 거 같다.

방에서 키우는 선인장 하나. 선인장이 이렇게 이쁘게 생긴 건 처음 봤다. 잎새도 하나하나 포실포실

도톰하게 살이 올랐고 붉게 물든 가장자리에 솜털이 촘촘이 자란 것도 그렇고. 전자파먹고 쑥쑥 자라길.

봄맞이 건물청소. 사층짜리 건물 꼭대기쯤에 가느다란 줄 하나로 매달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건물벽을 닦고 있는 아저씨가 용맹스러워보였다, 그렇게 커다란 움직임들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결혼식. 신부대기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잔뜩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풀어주려

애썼지만 역시. 그녀를 웃게 하는 건 그녀의 신랑.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서는 그들의 표정이

한편으론 화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비장해보이기도 했다.

오랜 연애를 거쳐 드디어 결혼에까지 이른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나름 '민주적인 가정'을

강조하는 주례 교수님의 짧고 임팩트있는 덕담에 귀기울이며. 새하얀 드레스와 노란 꽃들에 꽂혔다.

양가 부모에 다소곳이 인사하는 갓 태어난 부부 한 커플. 은은한 조명과 얄포름한 면사포, 노랗게

일렁이며 떨궈지는 촛불과 꽃불이 인상적이었다.

신논현역 근처의 어느 주점. 빨갛고 하얀 조명이 비닐 커버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아랫춤에선

술잔이 넘칠 듯 술을 따른 두 젊은이가 망연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께집의 붉은 조명. 바람이 불어 벽에라도 세게 부딪혔는지 딱 모서리가 깨져나갔다. 아직 달린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깔끔한 느낌의, 새것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조명등인데 격하게도 터져나갔다.

문앞에서 달그랑거리던 풍경, 물고기의 등뼈에서 뻗어나온 각기 다른 길이의 금속 대롱들이

가시처럼 성가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렇게 생긴 풍경은 좀만 세게 닫겨도 한참동안 지들끼리

비비 꼬여있단 말이지.

어느 까페. 창밖에서 볕이 손가락을 뻗쳐왔다. 이미 봄볕에 사로잡힌 꼬마아가씨는 분홍빛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룰루랄라 스텝을 밟으며 봄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스며들어온 봄볕은

꽃무늬가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보랏빛 쿠션이 보드라운 의자위에 느긋이 몸을 눕혔다.


풍성하게 바람넣은 머리처럼 불룩한 화분을 둥지삼아, 붉은 새 한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주체못하고 쏟아져들어오는 봄볕, 강물에 빠져버린 자동차의 깨진 창문으로도 저렇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을 거다.


이층과 일층을 잇는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종종 수평감각을 희롱한다.

이렇게 보니 계단이 아니라 격자처럼 좁아져 나가는 통로같기도 하고 거울은 천장에 붙은 듯.

사선으로 그어진 채 첫째 곰의 몸뚱이를 두개로 쪼개놓은 햇살 아래서 보니 표정이 떠오른다.

저 녀석들의 조심스런 손의 위치, 살짝 외로 꼬은 고개의 각도, 그리고 조금 우울하게 늘어진 표정.


쓰리쿠션으로 치고 들어가는 조명. 벽에서부터 뻗어나온 얇지만 완강한 메탈의 가지는 천장으로

치고 올랐다가 불쑥 꺽어져선, 슬쩍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벽에 있던 이집트 냄새나는 조각상 하나. 쭉 찢어진 눈이라거나 칼처럼 날카로운 콧날들이 좀

영특하다 못해 교활한 분위기를 주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꾸밈을 보면 대충 만들어진

물건은 아닌 거 같다. 하긴,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음..어디려나.

봄이 오려나, 싶은 날씨지만 창밖에 내밀어진 화분들은 여전히 바싹 마른 채다. 그 위로 데코처럼

외벽을 감싼 얄궂은 청록색의 잎사귀들이 눈에 띄지만 땅 아래 사람들은 케잌에 정신이 팔렸다.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많은 사람들의 발이 나무를 조금씩 깎아낸 거다. 색깔이

빠지고, 나무의 이빨이 빠지고,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궤적이 남았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병들이라지만 일정한 수량이 넘어서는 순간 나름의 미감이 생겨난다. 규칙없이 내걸어둔

티스푼 장식장들이라지만 역시, 나름의 균형이 잡히고 미감이 떠오른다.

이곳의 불빛과 저곳의 불빛. 저 창문을 거울삼아 비치고 있는 풍경 속에는, 좀더 각도를 틀어서

여기저기 이쪽 세상을 비쳐본다면 뭐가 더 보일런지.


제법 선명하고 튀는 색감의 테이블, 의자들, 쿠션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는

어찌어찌 정돈되는 게 신기하다. 창문이라고 뚫려있는 곳에 보이는 곳은 이웃한 건물의 붉은 벽돌

뿐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호의적으로 봐줄 수 있다.


까페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고만고만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탑처럼 우뚝 솟아난

나무하며, 해가 지면 바통체인지해서 불을 밝힐 야트막한 가로등 하나. 밑을 내려다보면 여느

때처럼 줄을 늘어선 채 삼청동을 순례중인 사람들. 여기서 저쪽은 잘만 보이는데, 왠지 저쪽에서

여긴 안 보이는 거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다.


얼음만 남기고 홀딱 마셨던 라떼, 얼음이 녹은 자리엔 물이 들이찼다.

물과 기름이 미끌거리며 서로 버텨내듯 가만히 녹아내린 얼음은 잔뜩 흐려진 라떼의 잔해와 버텨낸다.


마치 무슨 우주선처럼 스르르 다가오는 스크류 모양의 장식품들. 이상하게 꼬였네~ 하는 노래도

생각나는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선명한 그림자만큼이나 단호하고 거침없는 존재감.

어느 갤러리. 빨강 주황 노랑으로 이어지던 갤러리의 간판이 아쉽다 싶더니 그 너머에서

초록색 국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나 여기있소, 나 여기있소 하는 것 같이. 그래서 빨주노초.

서울민속박물관. 장승이니 석물이 곳곳에 서 있던 제법 너른 부지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입춘대길'이란 종이가 아직도 붙어있나, 했다가 아직 입춘만도 못한 날씨지 싶기도 하고.

경복궁 담장을 배경으로 해서 옹기종기 서있던 각종 석물들. 어딘가의 할매 바위, 어딘가의 장승,

어딘가의 장군상 따위들이 모여있어서 그런지 저마다 표정을 찡그리고 험상궂어보이려 여념이 없다.

어느 화원의 꽃다발. 아무래도 이 기능은 참 매력적인 거 같다. 빨강색과 노랑색만 읽히는 세상이

있다 해도 세상이 딱히 덜 아름답지는 않을 거 같단 생각이 팍팍 드는 거다.

흑백의 공간에서도 화려하기만 한 꽃들을 마지막으로 Pentax K-r로 꾹꾹 눌러찍은 일상 끗.





얼음만 남기고 홀딱 마셨던 라떼, 얼음이 녹은 자리엔 물이 들이찼다.

물과 기름이 미끌거리며 서로 버텨내듯 가만히 녹아내린 얼음은 잔뜩 흐려진 라떼의 잔해와 버텨낸다.

창밖에서 볕이 손가락을 뻗쳐왔다. 이미 봄볕에 사로잡힌 꼬마아가씨는 분홍빛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룰루랄라 스텝을 밟으며 봄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스며들어온 봄볕은

꽃무늬가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보랏빛 쿠션이 보드라운 의자위에 느긋이 몸을 눕혔다.

풍성하게 바람넣은 머리처럼 불룩한 화분을 둥지삼아, 붉은 새 한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주체못하고 쏟아져들어오는 봄볕, 강물에 빠져버린 자동차의 깨진 창문으로도 저렇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왔을 때도 눈여겨봤던, 그렇지만 별다른 감상없이 봤던 곰 두 마리. 사선으로 그어진 채

첫째 곰의 몸뚱이를 두개로 쪼개놓은 햇살 아래서 보니 표정이 떠오른다. 저 녀석들의 조심스런

손의 위치는, 살짝 외로 꼬은 고개의 각도는, 조금 우울하게 늘어진 표정은. 뭘까.

그리고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몇 장의 도자기 접시. 몇 장의 도자기도 붙어있고, 몇 장의 흔적도

여전히 붙어있다. 벗겨진 페인트로 그 존재를 주장하려는 것들은 깨져서 떼어낸 걸까 아니면

억지로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긴 걸까.

이층과 일층을 잇는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종종 수평감각을 희롱한다.

이렇게 보니 계단이 아니라 격자처럼 좁아져 나가는 통로같기도 하고 거울은 천장에 붙은 듯.

여기에 올 때마다, 뭔가 삼청동에서 숨겨진 잠수함 같은 곳에 올라타는 느낌이다. 의미상

잠수함이라면 수면 밑으로 내려가는 게 맞겠지만, 여긴 위로 부상해있음에도 조용하고,

사람들 눈에도 딱히 안 띄는 거 같고. 그리고 저 제법 든든해 뵈는, 잠수함 창문같은

이중 유리창들을 활짝 여는 건 뭔가 역설적인 즐거움을 준다.

제법 선명하고 튀는 색감의 테이블, 의자들, 쿠션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는

어찌어찌 정돈되는 게 신기하다. 창문이라고 뚫려있는 곳에 보이는 곳은 이웃한 건물의 붉은 벽돌

뿐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호의적으로 봐줄 수 있다.

벽에 있던 이집트 냄새나는 조각상 하나. 쭉 찢어진 눈이라거나 칼처럼 날카로운 콧날들이 좀

영특하다 못해 교활한 분위기를 주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꾸밈을 보면 대충 만들어진

물건은 아닌 거 같다. 하긴,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음..어디려나.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많은 사람들의 발이 나무를 조금씩 깎아낸 거다. 색깔이

빠지고, 나무의 이빨이 빠지고,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궤적이 남았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병들이라지만 일정한 수량이 넘어서는 순간 나름의 미감이 생겨난다. 규칙없이 내걸어둔

티스푼 장식장들이라지만 역시, 나름의 균형이 잡히고 미감이 떠오른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고만고만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탑처럼 우뚝 솟아난

나무하며, 해가 지면 바통체인지해서 불을 밝힐 야트막한 가로등 하나. 밑을 내려다보면 여느

때처럼 줄을 늘어선 채 삼청동을 순례중인 사람들. 여기서 저쪽은 잘만 보이는데, 왠지 저쪽에서

여긴 안 보이는 거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다.

자리에 앉아 가져간 책을 조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위로 들린 창문에도 불빛이 하나 떠있다.

앨리스가 빠져들어간 거울나라, 원더랜드의 시작은 이런 조그만 균열감, 일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약간의 낯선 기미부터 시작했을 거다. 이곳의 불빛과 저곳의 불빛. 저 창문을 거울삼아 비치고 있는

풍경 속에는, 좀더 각도를 틀어서 여기저기 이쪽 세상을 비쳐본다면 뭐가 더 보일런지.

가져갔던 책을 다 읽고 라떼를 다 마시고 다이어리를 다 정리하고 이곳의 추억들을 조금 되씹고도

못내 아쉬워서,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이미 나보다 늦게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나가버린, 그래서 다시금 혼자가 된 공간이었다. 그때 발견한 외계인들의 우주선. 까페를

침공하는 중이었다. 스크류 모양으로 생긴 메탈빛 강한 것들이 짙은 그림자를 바닥에 새기며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계인들이 이층 혹은 삼층에 불시착할 것을 일찌기 예측이라도 했다는 양, 까페 주인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런 안내문을 계단 내려오는 길목에 붙여놨댔다. 머리 조심. 제법 가파른 그 계단은

보통의 지구인들도 자칫 머리를 부딪힐 가능성이 농후한 곳인 거다. 마지막으로 아쉽게 주위를

둘러보고 까페를 떠나는 나를 배웅한 건 역시, '머리 조심'. 또 올께요.



총 3층짜리 자그마한 까페. 아담한 높이의 아담한 너비, 뭐랄까 조그마한 방 하나를 켜켜이 쌓아올렸다는 느낌.

2층의 천장 한복판에는 샹젤리제처럼 저울이 매달렸다. 우주선이나 잠수함처럼 단단하고 믿음직하게 생긴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발, 그렇지만 정말 깜깜한 우주나 심해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묵직하지만

따뜻한 어둠이 걸쭉하게 고여있는 곳.

FRAGILE의 딱지가 아무것도 안 놓인 반대편 저울보다 무겁다는 위트. 섬세하고 예민해서 깨질 것만 같은

그대의 예기치못한 묵직함.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창문, 기차에서 떼어온 듯한 통유리창에 누군가 풍선든 소녀를 그려놓았다.

의자와 책상의 부조화가 나름의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만드는 건 '빈티지'를 표방한 삼청동이나 효자동 까페들의

기본기 중의 기본기지만, 어둑어둑함이 촉촉하게 서린 공간에서 녀석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난파된 잠수함의
창문을 깨뜨리며 격하게 난입하는 파도처럼 덤벼드는 빛발 덕분인지도 모른다.

묘한 색감과 분위기, 게다가 갈 때마다 사람도 별로 없는 축복받은 곳. 사람들이 기차놀이하듯 일렬로 선 채

순례하는 삼청동이란 걸 감안하면 더더욱.

화장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다. 화장실 창문도, 그 위의 환풍기 보호커버도 예사롭지 않다. 볼수록 세심하게

손길이 여기저기 닿아있음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어라, 이런 곳까지, 의 느낌이랄까.

2층에서 3층 올라가는 길, 3층이 아니라 옥상 위 옥탑방 가는 길이라 해야 하려나. 유리로 덮인 천장에서

하얗게 쏟아져내리는 빛이 눈발처럼 내려서는 유리병, 장식장, 등불에 조용히 쌓였다.

삼청동, 갈수록 사람들만 많아지고 길가는 전부 공사중인 데다가 많이 범속해져 신비감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갈 만한 까페 하나가 있어 다행. (사실은 삼청동 내 마이 페이버릿.ㅋ)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대장정'의 영웅 마오쩌둥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중년의 마오쩌둥 사진. 그런데 뭔가

다르다. 귀에 삽을 박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이이는 이어폰을 귀에 걸었다. MP3로 노래라도 듣고 있는 걸까.

그들의 국부라 할 수 있고, 중국공산당의 아버지라 할 만한 사람의 귀에 이어폰을 꼽아주다니, 어쩌면 중국은

이제 한국보다도 정치적으로 유연하고 관용적인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해의 '신천지(新天地)', 삼청동 쯤을 연상케 하는 그럴듯한 까페와 갤러리들이 모인 곳의 어느 가게에서 무심코

카메라를 꺼내들게 만들었던 그림 한장. (사실 그런 갤러리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마련이다.)

상해의 조계 지역이었을까. 굉장히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의 벽돌건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저 햇볕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느낌이 아니라 파리 샹젤리제 거리같은, 그런 여유롭고 유럽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다.

왠지 커피빈은 외국에서 만나면 반갑다. 아놔.

바닥의 포석들도 나름 신경써서 깔아둔 듯 하다. 최소한 아무런 미감이나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치 않고 그저

아무데나 막 깔아버리는 '범용' 포석은 아닌 거 같단 이야기. 포석이 이쁜 길은 걷기에도 즐겁다.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요리조리 방사형으로 퍼진 골목길 따라 늘어서 있었다. 1층엔 까페, 2층엔 갤러리,

뭐 그런 식으로 공간을 겸하고 있는 샵들도 보였고, 저렇게 생긴 테라스들이 이층마다 툭툭 턱처럼 나왔었다.

아직 뜨겁다기보다는 따땃해서 기분좋은 햇살을 걸러주는 연두빛 투명한 여린 잎사귀들.

그리고 빨간 완장이 우스꽝스럽던 토실토실한 아저씨는 바싹 마른 소같은 자전거를 타고 소처럼 느릿느릿

햇살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유연한 그의 페달질에 놀랬고, 붉은 완장이 생각보다 그럴듯해 또 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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