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w. 아마도 싱가포르의 정류장, 공공시설물, 까페 등등에서 제일 자주 접했던 문구인 듯 하다.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처음 왔던 싱가포르, 어렸을 적 어마어마한 벌금과 엄격한 법집행에 기반한 공중도덕과 청결한 도시의 화신처럼 배웠고 대학 때도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운운하는 이야기에 쎄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사는 한국과 멀지 않다. 츄잉껌을 수입하거나 만들지 않고, 온갖 것에 벌금을 매겨놓고 있는 싱가포르라지만..., 이미 우리는 큰사거리 건널목마다 주춤주춤 문워크중인 차들과 골목마다 눈에 불을 켠 씨씨티비의 천국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또 갑갑하기만 하다. 이번에 들고 온 책이 김세균 서울대 정치과교수의 고별강연집, '사상이 필요하다'였는데 발간된 시점은 박근혜 당선직후쯤. 공저자인 홍세화 전 진보신당대표나 손호철 교수, 계간 문화과학 발행인이었던 강내희 교수 등등 필진은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었고 책도 사둔지 오래건만 여태 펼쳤다 덮길 수차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기본기'란 부제가 무색하도록 세상은 역진중이다.

진보 대 보수, 란 페이크 프레임이 끝내 다른 가능성들을 전부 막아버린 꼴이다. 안철수에 기대한 건 단지 제3의 공간을 열어주길, 양당제로 고착화되는 추세를 조금은 지연시켜주길 바랬던 것 뿐이나 역시. 싱가포르와 한국.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형식을 빌린 천민자본주의사회란 건, 어쩌면 압축성장을 경험한 풍요로운 경제와 천박하고 미발전한 시민사회 및 지평을 가진 나라의 귀결일지 모른다.

이제 점점 거대해지는 자본권력과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입으로 어떤 공간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제3당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가능성과 사상이 들어설 자리는 봉쇄되고, 삿된 영웅-안철수-는 그나마 민주당과 새누리당 사이에 공간을 벌려 스펙트럼을 결과적으로 넓히나 했더니 투항해버리고, 민주당도 안철수도 결국 파이를 키우기보다 있는 파이를 지키는 현실적 선택을 해버린 것 같다.

그저 노무현이 읊조렸듯 말한마디로 치우고 넘기면 편하려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이미 모든 것이 소비일진대 정치 역시 일인일표의 소비행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뭐가 이상하냐고. 싱가포르, 한국의 근미래에서 한국의 현재로 워프하기 직전, 한발 재겨 딛을 수 밖에.

 

(2014. 3. 2. from FB note.)

 

 

You are not forgotten. 11월 11일 베테랑스 데이,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호국장병의 날이거나 국군의 날쯤 되려나.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에서 전차와 오토바이들을 앞세운 퍼레이드가 시작되는가 하면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사열식이 퍼포먼스처럼 쉼없이 이어졌다.

 

 

 시청 앞의 왕복 6차선을 통제하고는, 전차나 버스 등의 운행도 일체 멈추고 시청 앞 광장에서 학생들의 사열을 받는 노병들.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나온 (아마도) 과거 역전의 용사들이려나. 백발의 배나온 할아버지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즐기는 중이다.

 

 

 길어도 5분을 넘기지 않은 학생들의 퍼포먼스가 퍼레이드하듯 시청 앞 공간을 지나가고, 더러는 굉장히 잘 한다 싶도록

 

절도와 '각'이 살아있는 팀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무슨 당나라 부대 군기를 연상케 하는 미국식 군기를 선보이는 팀도 있고.

 

 

 그 와중에 반질반질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나오는 광빨이 죽이는 클래식카도 속속들이 모여들고, 아마도 한국식으로라면

 

해병전우회쯤 되려나. 성조기로 옷을 해입고 두건을 만들어쓴 할아버지들이 위풍당당하게 집결하다.

 

 와중에 세찬 샌프란시스코 바닷바람을 가득 부여안고 펄럭이는 캘리포니아 주깃발.

 

 

 

연단 위에 마련된 귀빈석에서 푸릇푸릇한 학생들을 사열중인 현역, 그리고 퇴역 군인들의 감개무량한 모습.

 

나라를 지켜냈다는, 지키고 있다는 한점 의심없는 단순한 팩트만으로도 얼마나 사람은 당당해질 수 있는지.

 

복잡다단한 진실을 헤쳐푸는 건 사실 군인의 몫은 아닐 거다, 장수를 부리는 군주 혹은 군사가 충분한 명분과 명예를 제공하면 그뿐.

 

 그러기에 충분한 자긍심과 명예를 제공해준다는 것, 아마도 그런 것이 성조기와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애국심의 원천 아닐까.

 

 

 특히나 저런, 차 옆에 붙어있는 스티커에 담겨있는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상징 행위. 어떻게든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자세.

 

 

 

그리고 나름 보수의 품격은 동방의 어느 나라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지키고 있을 퇴역 군인의 뿌듯한 미소.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그 중에서도 구시가 중심이랄 옐라치치 광장을 둘러싼 오육층은 가뿐히 넘어보이는 건물들 너머로

 

덧니처럼 뾰족하니 튀어나온 첨탑 두개의 주인공. 광장 오른켠에 자리한 카프톨 언덕 위의 성모승천 대성당이다.

 

구시가의 낡고 오랜 건물들 사이를 흐르는 이차선 도로, 그 옆에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나이든 크로아티아의 할아버지,

 

너머로 삐죽 고개를 치켜올린, 근 천년을 지켜온 성모승천 대성당의 보수중인 첨탑 하나.

 

 

카프톨 언덕을 휘적휘적 올라가면 마주치는 대성당 앞의 광장에는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성모마리아상이 우뚝 솟았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 아래서도 번뜩이는 금빛을 발하는 성모상과 아래의 천사들은 살짝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설수록 더욱 실감나는 성모상의 유별난 높이. 성모승천 대성당을 찾는 이뿐 아니라 자그레브, 아니 크로아티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높이다.

 

게다가 눈에 신경을 집중해서 그 진중하고도 살짝 근심어린 듯한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진짜 하늘에서도 그럴 것만 같다.

 

 

성모승천 대성당의 섬세하고도 우아한 입구, 상아빛의 대리석과 조각상들이 차곡차곡 접혀들어가며 녹슨 청동문으로 집약되는

 

그 운동감이 너무 좋아서 한참동안 보고 있는 사이에 신부님도 수녀님도 신자분들도 조심스레 입구를 드나들었다.

 

문 위 벽공에 바쳐진 유달리 하얗고 거칠지만 에너지 넘쳐보이는 대리석 조각상도 가만히 눈여겨볼 만 하다.

 

 

정문의 좌우에 시립하고 선 (아마도) 카톨릭의 성인성녀들이려나. 화려하고 섬세한 대리석 조각 장식들은 가만히 뜯어보면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고 매무새도 다르다.

 

그리고 성모승천 대성당을 삥 에둘러 한바퀴 돌아보는 길, 성당 옆에 자리한 부속 건물들에서 느껴지는 연륜도 못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반질반질 매끈해진 대리석 재질의 포석들이 밟히는 소리가 따각따각 경쾌하던 그 곳.

 

 

 

두 개의 종탑은 최근까지도 모두 보수중이다가 최근에야 하나가 산뜻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바싹 당겨서 본 그 모습은

 

디테일하고도 부드러운 매무새가 왠지 돌을 다루는 경지에서 경주의 다보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당 옆구리에 나있던 이러저러한 나무문들, 어느 것 하나 심심하거나 허술하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공들여 치장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성당 외벽에 붙어있던 커다란 태엽시계, 그 아래에서 비둘기들에 빵을 뜯어주던 아저씨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참이다.

 

 

섬세하고 세밀한 조각들로 치장되어 있는 첨탑이라거나 정문과는 달리, 성당의 어느 외벽은 이렇게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나잇살 깨나 먹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주 시내와 불국사가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감이 전혀 없었다. 수학여행의 기억은 몇 장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시내에서 적잖이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불국사, 그러고 보면 불국사 안의 풍경 역시 깜깜하니 기억 하나 남지 않았었다.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구름다리. 우아한 아치를 그리고 선 돌다리가 정문과 불국사 본전을 잇고 있었다.

 

남쪽부터 슬슬 봄바람이 일기 시작하는지 연못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능수버들엔 연두빛 물이 올랐다.

 

 

너무 새빨갛거나 새파랗지 않게 적당히 세월을 머금은 단청의 빛깔이 녹록치 않은 불국사의 역사와 위상을 말해주는 듯. 

 

 

그러고 보니 여기는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짜고짜 저 높고도 날렵한 계단 앞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기억.

 

경내에 들어서면 좌우로 복도가 있는데, 울긋불긋한 그 단청이 적당히 까뭇한 그늘에 반쯤 가리운 풍취가 참 좋다.

 

 

그리고 어디랄 것도 없이 적당히 녹슨 듯, 적당히 이끼가 스민 듯한 분위기의 불국사 풍경이라니. 사실 불국사는 1900년대

 

중반까지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몰락해가는 낡은 절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복원을 거듭하며 현재의 위용을

 

되찾았다는 건데, 그 시절 역시 적잖이 소요되어 이렇게 건물의 맵시나 색감이 자연스러워졌나보다.

 

불국사, 하면 빠질 수 없는 것 두 가지. 석가탑과 다보탑..인데, 근데 다보탑이 이렇게 컸던가.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아쉽게도 다보탑과 마주한 석가탑은 그 탑신을 볼 수가 없었다. 2010년 기단 덮개돌에 균열이 발견되었다나, 하여

 

지금은 완전히 해체해서 수리 중이라고 한다. 2015년이 되어야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 보이지도 않는 가림막에

 

아무리 고개를 들이밀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봐야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 무영탑이라더니,

 

아크릴로 된 가림막에는 과연 다보탑의 그림자만 비칠 뿐, 석가탑은 그림자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불국사 심장부에 위치한 대웅전, 살짝 이르지만 나른하니 기분좋은 봄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를 반짝거리는 스님은 어딘가로 총총걸음을 옮기고 계셨고.

 

 

대웅전의 청록빛이랄까 청동빛에 가깝도록 바랜 나무창살문을 보며 대체 이런 데를 내가 온 적이 있던가, 다시금 패닉에 빠지고.

 

도무지 단청을 화려하게 드리운 이런 오랜 사찰에 들어서면 눈을 사방으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뭔가를 늘 놓치는

 

기분이다. 워낙에 오밀조밀한 구석까지 디테일을 챙겼던 옛 선조들 덕분에 전후좌우 위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돌리는 중.

 

 

 

휘영청 하늘을 향해 말려올라간 처마의 곡선을 따라 푸른용 한마리가 고개를 들고 금세라도 뛰쳐오를 듯한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금세라도 콧김으로 불기운을 내뿜을 듯한 이 형상은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 사이로 문고리를 꽉 움켜물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기가 쉽지 않은, 수평하거나 수직한 직선도 아니고 사선도 아닌 처마의 저 율동감 넘치는 은근한 곡선미.

 

 

 

그러나저러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우르르 불국사에 몰려와서는 대체 뭘 보고 갔던 걸까. 이토록 아무 기억이 없다니.

 

 

아마도 천년은 훌쩍 넘었을 부처님의 모습을 수호하고 있는 붉은 나무울타리. 저 나무들이 모두 삭아 스러진대도 돌에 새긴

 

부처님은 다시금 천년을 버티고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하다.

 

 

음..절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건 저런 크고 작은, 높고 낮은 돌탑들. 다른 돌들의 균형을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돌 하나를

 

그 위에 얹는다는 행위가 갖는 기묘한 주술적 효과라거나 기복적인 요소를 인정하더라도, 여기만큼 대대적으로 벌어진 발원과

 

욕망의 탑쌓기는 처음 본 거 같다. 멀쩡한 마당도 모자라 기와가 오른 담장 위에도, 쪽문 위에도, 빗장 위에도 온통 돌탑이다.

 

 

 

워낙 사방으로 문이 나있어서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게 되는 건지 주춤거리게 된다. 게다가 한두개의

 

문만 지나와도 같은 듯 하면서도 또다른 실루엣과 풍경이 전개되는 판이라 마치 작은 미로 속에서 헤매이는 느낌이 들기도.

 

그 와중에 만난 복돼지상. 돼지라기보다는 살짝 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삐죽삐죽 묘사된 털도 그렇지만 저 얍실한 눈빛.

 

 

 

 

그리고, 무려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란다. 저렇게 돌을 깍아만든 두 발디딤대 사이로 장차 비료가 될 것들이 보관되었단 이야기.

 

 

다시 돌아내려오는 길, 왠지 들어가던 길과 다르다 했더니 역시. 그러고 보니 불국사로 드나드는 길이 꼭 한 개가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넓은 부지, 넓은 정원과 수많은 전각들. 대체 난,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친구들과 어떤 길을 어떻게 밟았던 걸까 싶다.

 

그림자 없는 석가탑과 십원짜리 다보탑의 이미지조차 온전히 간직하지 못했던 걸 보면, 아마도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노느라

 

정신없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전날밤에 몰래 마셨던 술의 뒤끝에 잡혀서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지지'가 이렇게 다급하던 적은 없었다.

 

최소한 이전의 2002년과 2007년, 이렇진 않았다.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내가 원하는 후보를 찍었었으니깐.

 

 

대체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선거 국면에서) 내세운 정책이 다른 게 뭔지, 그 이전의 노무현 5년의 경제정책과 이명박 5년의 그것은

 

또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 많은 부분 의구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민주당 세력이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문재인을 찍기로 했었다. 어쨌든 자격없고 부끄러운 대통령의 등장은 피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안철수를 '범진보'세력으로 억지로 낑겨넣으며 판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키를 놓쳐버린 민주당은,

 

아무 선거전략도 없이 SNS와 세대론에 기대어 낙관론에 빠져있었던 걸로 판명되었다. 뭐 하나 치고나온 의제도 없었고.

 

그저 '정권교체'만을 앞세운채 '닥치고 민주진보 대통합'을 외치며 군소후보나 정당을 고사시켜버렸다.

 

 

선거 후의 모습은 더욱 절망적이다. 왜 졌는지, 보다 선명하지 못해서였는지, 소구층이 분명치 않아서였는지,

 

정권교체의 부글거리는 민심을 받아안을 의지도, 정책도, 전략도 없이 그저 '세대론'과 '지역론' 따위에 머무른 채

 

정신승리 중이다. 48%의 가능성을 봤다거나, 여기가 바닥이라거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뻔한 이야기들. 지친다.

 

 

이런저런 정치 평론과 논설들도 마찬가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인구구성이 어떻고 광주부산이 어떻고.

 

그래놓고 마지막에는 민주당의 쇄신과 지지층의 멘탈 회복을 요청한다. 그만큼이라도 잘했다 우쭈쭈.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응원이 아니라, 가루가 되도록 박살내고 좌절시키는, 현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전망이나 희망섞인 기대는 한참 나중의 일.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로는 참.

 

 

프레시안에서 퍼온 아랫글은, 그래도 대선 후 나온 글 중에 가장 내 생각과 유사한 판단과 비판을 담고 있어서.

 

 

 

 

노인과 싸우는 진보, 5년 후도 글렀다

[기고] 박근혜가 당선되어 가슴 아픈 이들에게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기사입력 2012-12-24 오전 9:58:29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박근혜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고 가슴이 아팠는데, 박근혜가 당선되어 더 가슴이 아픈 이들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 아래서 살아가야 할 향후 5년을 생각하면 눈앞이 노래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심과 우울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이번 선거에서 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승리했을까, 그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새누리당의 변신과 의제 희석화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변화를' 주장하면서 4·11 총선에서 승리했다. 더구나 그 총선에서 박근혜 본인이 공천한 인물들이 대거 당선되었고 그 결과 박근혜 캠프의 두뇌와 수족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이미 총선 결과를 통해, 야권이 주장해온 '이명박근혜'라는 비난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었다.

총선 승리 이후 박근혜는 준비된 후보로서의 힘 있는 행보를 진행했고, 보수 진영의 어느 누구도 박근혜에 대적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갔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를 가진 보수 정치권 전체를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또 박근혜 캠프는 지역 구도, 세대 구도, 계급 구도, 이념 구도로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 국면을 잘 이해했고, 그 수족들이 지역성을 기본으로 열심히 뛰게 만들었다(그에 반해 민주통합당의 지역구 의원들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열심히 뛰지도 않았다).

또 박근혜 캠프는 세대 구도에서 유리한 선거 의제들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야당이 제시한 경제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반값 등록금, 복지 관련 공약 같은 '계급 성격'의 의제들마저 선점하고 단계적으로 희석시켜 감으로써, 성공적으로 야권의 공세에 대응하였다.

구진보의 몰락

지난 10년간을 돌이켜 보면, 2004년의 민주노동당 약진 이후부터 한국 사회의 진보 정당은 대략 13~20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의 덕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행한 각종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들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 중소 상공인, 영세 자영업자, 도시 빈민층의 삶이 오히려 질적으로 악화된 것도 이 시기 진보 정당의 득표율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이들 서민들의 경험과 인식은 열린우리당에서 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민주통합당의 지평을 넘어섰다. 이들 진보적 서민들은 올해 4·11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를 적극 지지했다. 물론 전통적인 진보 정당 지지자 중 일부는 진보신당과 녹색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명박 정부 치하에서 고통 받는 서민들을 감동시키는 정책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게을리 한 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권력 나눠 먹기 식의 야권 연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서민들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외면했다.

더구나 소위 친노 패권주의와 통합진보당 내 패권주의의 문제가 4·11 총선 이전부터 터져 나왔다. 4·11 총선 직후 터진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로 인해 그간 '진보 정당'으로 표현되어온 세력들 즉 통합진보당(그리고 분당 이후 진보정의당까지 포함)과 진보신당 등은 일반 국민들의 여론 속에서 '한통속으로' 평가되며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녹색당은 대선 시기에 제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길게 보면 198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구진보'의 분열과 지리멸렬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하면서도 더 심해졌다. 그 결과 '구진보'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볼 때 거의 무의미한 세력이 되었다.

 

▲ 문재인-안철수의 '새로운 진보'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뉴시스

새로운(?) 진보의 실패

친노 패권주의에 환멸을 느낀 이들과 진보 정당에 실망한 이들을 위한 빈자리를 안철수는 '새로운 진보'를 주장하며 자리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진보'는 국민들의 '삶'을 바꿀 만한 '미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진보였다. 즉 실제로는 '민주 진보 개혁'이라는 좋은 단어들의 조합에 불과했다.

안철수의 대통령 출마 선언과 그 이후 행보가 앞에서 언급한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 13~20퍼센트의 국민에게 무슨 감동을 주었겠는가? 정치적으로 가장 열렬한 진보 지지자인 13~20퍼센트의 국민들에게는 설자리가 없었다.

진보 정당들이 지리멸렬하자, 중도주의를 내세우며 결집한 안철수 지지자들은 애매모호한 '정치 혁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지지자들은 '닥치고 반이명박, 반박근혜'만 이야기했다. 과연 그런 중도주의, 그런 '닥치고 반이명박근혜'가 얼마나 보통 시민들의 열정에 불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한술 더 떠, 분열된 구진보는 심상정, 이정희, 김소연, 김순자라는 무려 네 명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냈다. 그러자,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온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은 그야말로 "이젠 망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박근혜의 당선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13~20퍼센트의 진보 유권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문재인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을 비판하면서도, '박근혜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하며 또 좌충우돌 변명하며 문재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 여론 조사에서 '정권교체'를 원하는 여론이 60~70퍼센트로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 조사는 항상 박근혜가 60~70퍼센트로 높았다. 그런 조사 결과가 나온 데는, '찍으려 해도 찍고 싶은 놈이 없다'고 고민하던 이런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선거 전략의 실패

본격 대선전에 돌입하자마자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는 단계적으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지난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여와 야 그리고 진보 후보의 3자 구도가 아닌, '보수 대 진보의 양자 구도 대결'이 되었다. 그러자 새누리당은 보수의 위기의식을 최대한 자극하는 선거 전략에 주력하였다.

'보수의 총결집과 인물 경쟁력'이 핵심 선거 전략이 되었고, 보수의 위기의식이 보수층의 광범한 결집을 가져왔다. 이것이 결정적 승인 중 하나이다. 또 박근혜라는 인물에 맞설 후보로서 문재인은 선거 기간 내내 존재감이 미약했다.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치하의 경험상 도저히 문재인을 선택하기 싫어하는 유권자들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더구나 애매모호한 중도주의를 표방한 안철수 후보로는 비정규직 노동자과 자영업자, 농민 등 하층민들의 실제적인 삶의 요구와 열정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문재인과 안철수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의 대변자이기에는 그 인물됨과 가치관, 세계관이 협소했다.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열심이지 않았다. 결국 도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대중의 선거 열기를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전국의 유권자 분포에서 차지하는 수도권의 비중이 서울 20.7퍼센트, 경기 23.1퍼센트, 인천 5.3퍼센트로 합계 49.1퍼센트인 점을 고려할 때, 수도권의 정치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게다가 수도권은 '지역성'보다는 '계급성'에 가까운 투표 성향을 늘 보여 왔다. 따라서 '무상 급식'과 같은 폭발력 있는 사회 복지 의제의 개발과 전략적 집중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만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그것을 위한 관심도 능력도 약했다.

역대 선거에서 야권이 이긴 것은 항상 수도권에서의 정치적 열기가 초래한 '준 혁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때뿐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재인과 안철수 (그리고 심상정과 이정희마저도)는 모두 '단일화'만 되면 이길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 머물렀다. 문재인 캠프나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캠프 모두 과거 민주노동당 등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이 문재인으로 통일된 '야권 단일 후보'로 결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 중 다수는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중 아무도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권을 지지하는 선거 열풍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당연히 언감생심이었다.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이번 대선의 30대 이하 유권자는 1547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8.2퍼센트인데 반하여 50대 이상 중장년층은 1618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9.9퍼센트이다. 반면 10년 전 노무현이 당선될 때인 16대 대선에서는 30대 이하가 1690만 명으로 48.3퍼센트, 50대 이상 유권자가 1024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29.3퍼센트였다. 10년 동안 2030 세대의 인구 비중이 10퍼센트 포인트 줄고 5060 세대는 10퍼센트 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투표율이 높아지면서 투표장을 많이 찾은 것은 젊은 층만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의식을 느낀 5060 세대다.

주류 보수 언론은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시종일관 중계 방송하듯이 강조하였다. 즉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은 인구 구성비상 비중이 높은 장년층과 노년층의 불안 심리를 교묘하게 조직했고, 이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각종 네거티브 캠페인을 활용하여 묶어냈다. 예컨대 <나는 꼼수다>와 김용민, 진중권, 이정희 등으로 대표되는 '예의 없는' 2030 세대에 대한 5060 세대의 불만과 불안을 보수 언론은 잘 조직해 냈다.

선거 직후 출구 조사 발표를 보면 50대의 89.9퍼센트가 투표를 했고, 이들이 박근혜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 지지 이유에 대해 신문마다 분석이 떠들썩하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이 유리하다는 얘기는 2030 세대의 인구 구성비가 많았던 10년 전에나 통하던 얘기이다. 이 점을 사전에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야권은 2030 세대에 비해서도 가난하고 빈곤한 5060 세대를 탈박근혜 지지자로 전환시켜 정치적으로 중립화 시켜낼 의지도 전략도 없었다.

또 2030 세대와 4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제의 개발과 제시에도 게을렀다. 그저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30년 전 행적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살림살이와는 동떨어진 순환 출자 금지 같은 재벌 개혁, 재벌 해체의 어젠다를 집중적으로 제시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야권은 시종 일관 여당에 끌려 다니는 '색깔 없는 선거'를 치르면서 패배했다.
한편, 2030 세대의 '보수화 경향'도 깊이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애국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 60대 이후 노년층만이 아니라 신세대에게도 일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방송 3사 출구 조사를 보면, 문재인 후보가 2030 세대에서 65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지만 박근혜 후보 또한 3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대선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최근 10년간의 선거 때마다 전체 2030 세대의 3분의 1이 보수주의를 지지한다. 젊은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사회 개혁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의 개인의 삶이 엄청나게 피폐한 층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주요한 한 원인이다.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용인하고 더구나 노인 세대에 맞서야 한다며 2030 세대의 투표율을 높이려 독려하며 그것을 사실상 더 부추긴 것은 민주통합당과 진보 정치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앞으로 백전백패일 뿐이다. 왜냐하면 출산율 저하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2030 세대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그에 반해 5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치권과 야권이 무상 급식과 같은 계급적, 탈지역적, 탈세대적 선거 어젠다를 전략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소홀히 했던 이번 선거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역주의 구도가 다시금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도는 당연히 여권에 유리했다. 지역의 인구 구성비로 볼 때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영남 기반 보수 세력이 이긴다는 자명한 현실을 야권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보수는 결집한다. 진보 정치는 지역주의를 벗어나야 하며, 이번 선거처럼 전라도 같은 특정 지역의 몰표에 여전히 의존하는 정치적 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향후 진보 정치권은 세대 간 대결 구도가 아닌 세대 간 연대의 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2030 세대가 되었건, 5060 세대가 되었건, 가난한 청년 및 노인들 대 부유한 청년 및 노인들 간의 대립 구도, 계급적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야 앞으로의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예컨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간의 세대 간 연대 의식이 강하게 작동해야만 존재 가능한 것이 국민 연금과 기초 노령 연금의 획기적인 확대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 국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주의 노인 복지 체제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정치적, 제도적 축 역시 세대 간 연대이다. 이렇게 세대 간 연대 의식이 필수적인 어젠다를 놓고 계급 투표가 가능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미래가 있다.

박근혜 캠프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준비된'이라는 구호가 주로 급작스럽게 후보로 나선 안철수, 문재인과 비교하여 준비된 인물이라는 것을 홍보하는데 이용되었다면,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는 실제로 여성층 특히 주부층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았다.

즉 보육과 교육, 의료, 노인 복지처럼 가정주부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정책 어젠다에서 문재인 캠프가 박근혜 캠프와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공약을 제시하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이에, 박근혜 후보가 제시한 '여성'이라는 슬로건이 여성계와 주부들 사이에서 실제 큰 힘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야권은 사실상 대응을 못하거나 안했다.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냉철히 따지면 놀랍지는 않은 상황.

 

그저,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바심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 치세 시작.



패인은 크게 두 가지 아닐까. 근본적으로 보수로 경도된 한국사회의 지형도는 차치하고,

 

인구비례로도 보수화된 투표자층도 차치하고, 선거 국면에서만의 패인을 따져보면

 

1. 민주당의 비전없음과 무사안일함. 2. 취향화된 'personalized network'밖에 되지 않는 SNS에 대한 과잉기대와 의존.

 


1. 민주당의 무능함과 무책임함.

 

그것이 안철수 현상을 부르고, 멘토 열풍에 힘입은 안철수의 아마추어식 진단에 힘을 실었으며, 결국 그의 한마디한마디에

 

선거판이 흔들리게 허용하고 말았다. 붉은 색을 선점하고 나선 영악한 새눌당의 선거전략과 아젠다세팅에 제대로 한번 반격조차

 

못한 채 '안철수 현상'만 바라보고 치고 나가지 못했다. 안철수 현상 뒤에는 민생과 유리된 정치,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

 

당면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음에도, 안철수만 보았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듯, 사실상 안철수와의 단일화 실패. 안이 다시 움직이긴 했다지만 이미 극적이고 감동을 주는 단일화 따위,

 

국민의 염원을 받아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안철수가 나눠져야 할 비판.

 

 

그렇지만 역시 포인트는, '안철수 현상'을 봐야 할 순간에 '안철수'만 보았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민주통합당 나부랭.

 

 



2. SNS라는 안경의 편향과 키보드워리어식 역량소진.

 

범 진보..민주당과 그 왼쪽, 그리고 '상식'을 표방한 시민들과 연예인급 셀렙들의 SNS에 대한 환상이 여전했다.

 

이미 트위터는 각자의 취향에 따른 개인화된 언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전의 선거들에서 경고되었었지만 별무소용.

 

인증샷을 나누고 이벤트를 하고 RT를 하고. 그래봐야 이미 취향과 정견에 따라 분류된 사람들끼리만 돌고 도는 정보들이다.

 

물론 SNS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SNS에서의 소통이 진짜 소통인 양, 그게 전부인 양 거드름피웠던

 

모습들 아닐까. SNS를 믿고, SNS의 인기도를 업은 안철수를 믿고, 막판까지 민주당이 안일했던 거 같아 하는 말이다.



소통은 기본이었다. 소통보다 중요한 건 컨텐츠. 민주당(과 왼편)은 컨텐츠도 부실한데 소통조차 '전근대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새눌당에 뒤지고 말았다. SNS안에서 의제가 돌고도는 것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뭐가 되었건 공세적인 이슈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냥 SNS의 젊은이들은 우리편이야, 이런 자위에 기대었던 거 아닐까.

 



* 대통령 한 명이 해먹어봐야 얼마나 해 먹을까. 그냥 전임 대통령이 해먹은 거 지켜주고, 지가 또 해먹겠지. 역설적으로 그 끝에는,

 

제3세계중 예외적인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던 한국이 애초 가야 할 곳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남미형, 주변부 자본주의국가의 정글.

 

 



이명박근혜의 십년. '잃어버린 십년'의 하프타임이 지나간다.

 

 

 

 

 

손이 아프다며 뒤로 뺀 후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먹울먹하며 그 손을 찾아가려는 장년층..

 

그들이 아마도 38%의 강고한 박근혜 지지층 중 핵심을 이룰 텐데.

 

 

잡지 못하는 손을 향한 그들의 '손'바라기, 이제 잡을 수 있는 손을 찾을 때 아닐까.

 

 

 

 

맹신자들 - 4점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

(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종편 이전이라고 네이버니 다음의 포털 대문 기사들이 쓸만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능프로그램 독후감같은 글에 인터넷 짤방에 대한 소감문같은 글에, 내용과는 동떨어진 자극적인 낚시성 제목들까지.


그렇지만 지금은 또 차원이 달라졌다.

종편 4개국이 개국하고 나니 이건 도대체. 흔히들 하는 말로 '찌라시' 수준의 막장을 보여주는 쓰레기 기사들, 정말

전파낭비 온라인공간낭비 인력낭비 에너지낭비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들인 거다. 도무지 안 되겠어서, 네이버 대문에

마이뉴스를 설정하기로 했다.

누군가 말했듯, 조선, 중앙, 동아, 매경, 연합 따위가 보수지라 싫은 게 아니다. 보수든 뭐든 그들이 걸치고 있는 안경과

정치색은 인정할 수 있고 가끔은 읽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이 상식에 부합하고 언론으로서의 균형과 역할에

충실하려 할 때의 이야기다.


그저 자신들의 이해 관철을 위해 현실을 곡해하고 여론을 왜곡하며 펜대를 굴리는 쓰레기들, 그딴 건 언론이 아니다.

이제 좀 그나마 깔끔하게, 내 취향과 상식에 맞을 법한 대문을 볼 수 있을 듯. 사실 이게 최선은 아니지만.







진보집권플랜 - 6점
조국.오연호 지음/오마이북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말했다. "1948년 이래 가장 나은 정부가 1987년 이래 가장

나쁜 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이 역설을 고민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이 어쩌다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일 거다.


왜일까. 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무현의 사후 1년이 지나고 어느 잡지에서

'우리시대 노무현의 정의'를 모으는 기사에 내가 썼던 한 줄이 여전히 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재임 시절에도 늘 생각하던 것.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ytzsche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다."

그를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강제할만큼 그도 우리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덜컥 그가 대통령이 되고, 돌아갔죠.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 “노무현은 마라톤 42.195Km이다.”(2010.5.23, 시사IN)



이 책의 내용보다 더 궁금했던 것


사실 이 책을 읽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나름 2000년을 전후해 대학에서 '돌과 빠이'를

쥐었던 데다가 '진보신당의 (페이퍼)당원'이 내 정체성 중의 큰 부분이라 생각하는 '좌파'로서,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경제민주화, 교육과 남북 문제, 권력 등의 내용은 내게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거다. 진부하고 심심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왜 이 책일까. 왜 갑자기 이 책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일까. 대담이란 형식의 특성상 정식화하고 나면 몇 페이지에 불과한

팜플렛 밖에 안 될 내용인데, 딱히 새로운 발상이나 아이디어도 없는데, 이런 정치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데, 대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진보집권플랜'을 집어들었을까.


몇가지 음흉한 음모론이 있을 수 있다. 노회찬의 사상이 섹시하다며 그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던 이들에게 잘 생기고 젠틀하며 사상도 섹시한 조국 교수는 가히 팬덤을 몰고 올만한

인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다.) 때론 경악스러운

트렌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와아~ 하며 우르르 달려가는,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

책들에 달려간 새삼스럽고 집단주의적인 구매 성향의 일환일지도. 너무 시니컬한가.



'진보'정권의 집권을 위한 공부 열풍

조금은 희망적이고 싶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거치면서, 준비되지 않은 집권이 결국

그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질곡에 몰았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기적이나 요행처럼 대통령 하나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저 구습에 대한

부정이나 분노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우리 모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새로운 비전과 플랜이 필요한 거다. 뽀록구도 실력이라지만 그런 거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거니까, 다행히도 이제는 '진보'라 자처한다 하여 '빨갱이'로 등식화되는 지경은

벗어난 거 같으니까 좀더 본격적이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거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국과 오연호가 말을 주고 받은 이 기록은 '진보'를 위한 최소한의 상식선,

최소한의 공유 가치를 품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 리뷰는 여기부터.


그렇다. 이 책은 '시작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교과서같은 이야기만 있는 듯

보이면서도 현실정치에 적용이 가능해보이는 수준의 정책적 구상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제언들이 들어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책은, 조국 버전의 '진보'와 조국

버전의 '집권플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건 또다시 민주당 위주의 일치단결,

한나라당 말고 될놈 찍자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다.


조국의 통큰 '진보'는 누구인가

그는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칭해 민주정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리고

현재의 야권을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런 전제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두 정권을 두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라 평하기도 하고, 현재의 야권 중 민주당의

적잖은 의원은 수구/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DNA를 갖고 있다 평해지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의 입장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적잖이 보인다. 한미FTA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 일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입장이나, '친미'와 '반미'를 넘어선 '용미'를

하자는 그의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입장-이미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가 익히 말해온

개념이지만 역시 알맹이를 알 수 없는- 따위가 그렇다. 그리고 북한의 3대세습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진보'와는 균열을 그을 거 같다.


'진보'의 가치를 어떤 정치세력에게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집권,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 자체가 정당을 기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했기에

수구/보수의 집권기라고 말하듯 특정 정당이 집권해야 '진보'가 집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조국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거다. 현재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진보가

집권한 건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 김대중과 대통령 노무현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조국 버전 '진보집권플랜'의 한계

물론 조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이슈에 대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도록 대중이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할 거다. 현재의 민주당은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 '복지'니 '무상급식'이니 좌향좌하는 기색도 있으니 지켜보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연정의 가능성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이 책에서 제기된 진보적인 의제들을 받아서

어쨌든 다음 정권에선 '진보'가 집권하자는 게 그의 취지이고 충정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현실 정치에서 돌아가는 판세는 이미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는 고작 두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일반론 차원에서

언급하고 만 '복지를 위한 증세' 부분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많은 논란이 일고 지향이 갈라지고

있는지만 봐도 그렇다. 그밖에 해외파병이나 다문화사회에 대한 원칙적인 답변도 막상 현실에

닥쳐 결정을 해야 할 시기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차게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의 민주당이

보여주는 노선, 행태, 리더십을 진보 쪽에 가깝게 끌어갈 수 있을까. 그의 표현을 빌어 개혁

담당 민주당과 진보 담당 소수 정당들이 서로 이해를 조율하여 하나의 진영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밥먹여준다'는 걸 보여주고 '밥의 품격'을 논하는 게

사람들의 표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그나마 노무현의 정책 이상으로

진보적 가치에 접근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이 책의 진보정책 구상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 
 

'반MB' 명분 하의 진보개혁 진영의 소통합 결과는.

결국 우려스러운 지점은 그거다. 이 책의 온갖 장점과 '진보'정책 일반의 지향을 세워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보집권플랜이 결국

지극히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반MB'로 뭉치게 되는, 혹은 뭉쳐야 한다는 절박하고

긴급한 요청으로 수렴되는 건 아닐까. 그의 '통큰' 진보는 MB와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보수'를 뺀 여집합과 같기에, 쉽게 말해 한나라당 말고 될 놈, 민주당 찍으란

이야기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조국도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2012년이던, 2017년이던, 언제가 되었건

진보진영이 집권했을 때 제대로 해서 더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만들자는

게 그의 반복된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잉대표되고 승자독식하는 한국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통찰과 제안이 있어야 했지 싶다. 그리고 '진보'라는

단어를 그렇게 느슨하고 통크게 써서 '진보/보수'의 구도로 한국 정치를 보는 것보다

'(진보)/중도/보수'의 구도로 읽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시작점이다. 여기로부터 논의가 만발해서 다양한 집권플랜이

짜이고 더욱 가다듬어지도록 맨처음 부어진 마중물의 역할이라면 부족함은 없어보인다.






"나가봐야 총알받이밖에 더 되나요?" 연평도 사건이 딱 터졌을 때, 사무실에서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이 내게 그랬다. 너도 총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분위기는 조금 싸해졌고, 요새 젊은이들 애국심이 어쩌고 후렴구가 들려오길래 조금은 수습해야

되겠다 싶어서 '요새 전쟁을 어디 총으로 하나요' 운운, 얼버무리고 치웠지만, 그리고 들려온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에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조차, 국가가 지켜야

할 국민의 생명을 저토록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다니. 전쟁나면 도망가야겠구나.


서해5도에 군사령부를 창설한다느니, 세계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다 놓는다느니, 국방비 예산이

6% 가까이 증액된다느니, 심지어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중국 코앞까지 들이쳐 군사훈련을 한다느니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무서운 소식 뿐이다. 전쟁 무기의 쓸모라곤 오로지 전쟁을 벌이는데

있으니 거기 들어가는 돈은 아무 생산유발효과도 없을 뿐더러 언제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 위기만 고조시키는 거다. 심지어 중국땅에까지 이미 수송된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다시 한국으로 회수해 오겠다는 통일부의 발언까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나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국가가 존립할 수 있고 외적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유지되고 난

이후에야 평화공존이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이명박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라고 까지 이야기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보수를 떠나서 현 정부는 대북 정책과 국방 정책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마추어스럽단 거다.


문제는, 지금 마구 쏟아내듯 국방비를 증액하고 접경지역에 군사적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걸로

과연 요새 드러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군대의 허약함과 무질서함이 해결될까
하는 점이다.

우리의 군사력이나 국방비 예산, 무기 수입 비중 따위들의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 나라는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절대적 견지에서는 군사 대국에 가깝다. 이미 돈과 무기와, 한달에 몇 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싼 '총알받이'까지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건, 내게 총이 쥐어졌을 때 '이쪽'의 대가리들이 아니라 '저쪽 인민'들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전쟁'에 나가는 쫄따구들은 상대 쫄다구의 몸에

총구멍을 내고 목숨을 빼앗으러 가는 것, 그런 살해행위의 비도덕성과 야만성과 죄악을 국가의 이름으로

사해 줄 수 있는지, 기꺼이 살해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겠지만, 전쟁이 일단 벌어지고

내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이쪽 대가리나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는

쫄다구 '인민'들 사이에서 꼭 저쪽을 쏴죽여야 할 필요나 정당성이 있는가.


비단 병역 기피의 문제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쫄따구로

전쟁에 임하는 내 위치에서, 나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 이토록 박하게 대하며 함부로 내팽개치는 '이쪽

대가리'들의 책임 방기에 대해 나 역시도 파업을 선언하겠다는 거다. 전쟁을 불사하고 내 목숨이라도

내걸겠다는 의지가 생길만한 국가가 아니다. 사실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이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들의 장단에 발맞추어 내가 손에 피를 묻히고 목숨을 그들

손에 내맡기지는 않겠다는 거다. 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며 맏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던 어쩌던,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며 총알받이를 거부한다는 거다.


대체 지금의 한반도 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는 자들은 무엇을 판돈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혹시 그 판돈은 대가리 이외 자들의 목숨과 재산은 아닌가. 전쟁 위기 앞에서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여느 때나 비슷했지만 특히나 이명박의 국가는 이미 누차에 걸쳐

필요하면 힘없고 돈없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임을 선포했으니, 이 나라가 내

목숨과 재산과 일상을 지켜줄 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제각기 자신의 목숨 보전은 알아서 해야 할 일.


북한에 두세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느니, 왜 (성능에 열배에 달한다는 포탄을) 80발 밖에 쏘지

않았냐느니, 전면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도 자식과 부모가 죽은 슬픔을 안겨야

한다느니 온갖 되먹지 않은 소리들이 사방에서 번져나온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들의 권력놀음을

위해, 북조선의 세습 기도와 남한의 '반공신도'들의 놀이판 위로 '애국심'에 홀려 들려올려가 무익하고

무의미한 개죽음 당하기를 거부한다. 전쟁나면 도망가야겠다.






사회악들을 위한 도구가 비단 '채찍'만은 아니다. 보수라는 껍데기를 쓰고 결국 제밥그릇 챙기기, 기득권 지키기에

여념없는 넘들도 그렇고, 마치 한 사람의 망자가 진보의 표상이자 모든 가치인 양 2인자 놀이중인 넘들도 그렇고,

그 와중에 비정치적인 양 X-Man 놀이중인 관리위원회니 시니컬하고 시크한 척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을 위한 도구가 꼭 '채찍'일 필요는 없다. (사진은 2010 아랍문화축전 리비아 공연 중 팜플렛 촬영)

그래서는 아니다. 이건 선거운동은 아니고, 그냥 오늘 문득 떠오르는 숫자, 아마도 내일까지 맘에 맺혀 있을 것

같은 숫자 하나를 포스팅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은근히 많다. 계산기 위에, 키보드 위에.

전화기 위에.

그리고 달력 위에.

심지어는 골치 아픈 오후에 '일트윗시간'동안 해치워버린 건망고 포장지에도 그 숫자가 떠올랐다.

'Knowing'이란 영화가 오버랩되는 순간. 아...그렇구나. 그렇게 되야 하는 건 맞지만, 정말 그렇게 되겠구나.

(투표만 한다면.)

사무실 계단에 숨어있던 숫자가 화살표를 타고 올랐고,

맘먹고 찾아본 일력의 7월 7일까지.

투표로 심판 제대로 못하면 이 술 일곱 병, 마침 또 7병이다, 이 술 다 먹고 나면 생길 숙취보다 더 지독한

놈들과 지독한 세월을 보내야 할 거다. 작정하고 나쁜 새끼들, 그리고 2인자 놀이에 빠진 놈들, 비정치적인 듯

치사하게 정치적인 사람들과 함께, 시멘트 천국 토건왕국에서.



너무 하얘서 어리벙벙하던 타지마할을 등지니, 들어설 때 심상하게 보였던 녹색 잔디밭이나 적갈색 벽돌건물이
새삼스럽다. 잔디밭 위에서 노니는 하얗고 우아한 새들이 눈에 딱 띈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정면의 분수대에 물에 반사된 아름다운 모습을 최고로 친다는데, 그런 호젓한 광경을

맛볼 수 있는 행운은 여전히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저 하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여행자들.

사람이 워낙 많아 전경을 방해받지 않고 찍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게다가 가뜩이나 희끄무레한 녀석이라

시간대도 중요하지 싶은데, 고즈넉한 새벽이나 저녁무렵, 아무에게도 개방되지 않은 타지마할을 독점할 수

있다면 굉장히 다른 분위기, 그리고 굉장히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웠다.

갑남을녀의 여행객 중 하나인지라, 찍히는 건 사람이 반 풍경이 반.

타지마할의 현관문에 멈춰서 감상중인 사람들.
이곳부터 조금씩 복원/보수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엔간한 문화 유산들은 대개 돌려가며 보수

중인 타이밍이다. 앙코르왓도 그렇고, 타지마할도 그렇고, 파리의 그것들도 그렇고. 인류 문화유산은 보수중.

입구부터 죽은 척 널부러져있던 강아지들 중의 한 마리였을까. 유연한 포즈로 늘어진 채 타지마할을 바라보던

녀석이 한순간 카메라를 의식한 듯 벌떡 일어나 도망쳐 버렸다.

'현관'을 지나면서, 갈색과 적색이 섞인 듯한, 뭔가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 맛있어 보이는 색깔을 띄고 있던

현관의 천장은 생생한 입체감까지 완비하고 있었다. 사물을 조각하고 모사할 수 없는 이슬람의 문화적 특성상

기하학적 문양과 형상들이 발전했다는 말이 역시 허명이 아니었다.

뒤늦게 돌아나오는 길에서야 발견한 표지판. 타지마할엔 남문, 동문, 서문이 있는 거다.

참...여기 개들은 전부 기력이 쇠했나보다. 나무가 드리워준 그늘 안에 포옥 안겨 있었다.

타지마할을 끝내 벗어나기 전 돌아본 길, 좀더 자유로웠다면 하루종일이라도 돌며 햇살도 기다리고, 조금이나마

사람이 적은 타이밍을 노린답시고 어슬렁거렸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





그녀의 '숟가락 정치'가 또다시 한나라당뿐 아니라 보수 세력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 이번엔 친박세력 내부에서도

미디어법안 처리를 두고 입장이 갈리는 만큼 "현 시점에서의 직권상정 반대"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는 추종세력에조차

적잖은 혼란을 일으켰다고 보인다. 중요한 타이밍마다 예기치 못한 말한마디로 판을 흔들고, 그녀의 무게감을

시위하는 그녀 나름의 '정치' 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폭발력을 갖고 정국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반작용도 만만치

않아서 보수의 대표주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인 그녀를 이제는 우파 내부에서 내치자고 한다.


그래서다. 대체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박근혜는 어떤 사람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녀가

바로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이다. 육영수 여사 사후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하며 정치감각을 익혔다거나, 박정희의

지도력을 이어받았다는 식의 높은 평가가 따라붙는다.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의 이미지를 덧씌우는가 하면 여성 특유의

정치적 리더십도 겸비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북한의 정권 세습을 비난해 마지 않는 일부 보수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의 재림을 갈망하며 박근혜를 무조건 지지하는 친위대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좌파를 포함한 그녀의 반대세력이 그녀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입장은 다르지만, 그건 '박정희의 딸'로서의

박근혜를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독재자의 딸이라거나,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사과가 없다거나,

순전히 박정희를 등에 업고 분에 넘치는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식의 평가가 그것이다. 그녀의 정견이나 정치적

색깔에 대해서도 별로 깊은 분석은 안 보인다. 다만 박정희를 지지하고 심지어 찬미하는 일부 보수세력과 그녀를

동류로 배치하고, 신자유주의라느니 국가주의라느니 헐겁고 피상적인 분석만 이어질 뿐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의 캐릭터 자체가 불분명한 탓이다. 박근혜가 스스로의 정치적 이상이나 지향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적은 과문한 탓인지 듣도보도 못했다. 그녀의 정치 스타일 역시 이번과 같은 이슈에 대해 '숟가락만 걸치는'

대중추수적인, 인기에 영합하거나 정치적 지분과 명분을 쌓기위한 정략적 행보가 두드러질 뿐, '큰 그림'은 안보인다. 

게다가 그녀의 정치적 행보나 입장을 보아도, 선정적인 몇마디를 제외하면 이른바 '보수꼴통'세력과 별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으며 다만 그녀의 친위세력이랄 친박연대에 대한 밥그릇 챙겨주기에만 골몰한 듯 보인다.


그렇지만 박근혜는 엄연히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몇년째 선두를 지켜오고 있다. 뭔가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무지한 대중'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사람들의 지적능력에 대한 건방진 폄하이며,

특히 차기 집권을 노리는 세력이라면 그렇게 둔탁한 분석으로는 절대 그녀를 이기고 민심을 잡을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그녀가 조금씩 MB와 각을 세우는 모양새를 취하고, '친서민행보'를 취한다는 MB보다 더욱 친서민적인 발언을 토하며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내세워 현명하게 어필한다면 승산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체를 명료히 분석해야 한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 행보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그녀의 정치적 본색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정책적 선명성 대결과 합리적 판단을 요청해야지, '박정희의 딸'이니 안된다는 식이어서는 더이상

곤란하다. 그건 국민들이 왜 박근혜를 선호하는지, 왜 박근혜가 설문조사에서 매번 1위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와도 같다. 박근혜가 누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정치색을 갖고 있는지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고 진지하게 맞대응해야 할 때다.


덧댐. 그녀의 '숟가락 정치'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미지와 정견은 숨겨진 채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애매모호한 한마디가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가면을 벗기고 구체적인 논리를 가진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녀가 과연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은 있는지, 이상은 있는지, 그리고 로드맵은 있는지 말이다.

* 관련기사들. 

돌풍주역 박근혜… 사생결단 정세균(서울신문)

조갑제, 박근혜 탈당하라(오마이뉴스)

‘여론’에 몸 실은 박근혜… MB정책과 ‘선긋기’(중앙일보)

‘박근혜 정치’… 실체는?(문화일보)




동아일보 국제면은 해외토픽인가.

 조금이라도 한국에 관련된 기사는 다른 지면으로 넘어간다. 여타 신문도 마찬가지지만, 동아일보의 국제면은 특히 그렇다. 포차 떼고 장기두는 격이다. 미일-중러의 군비 경쟁,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정치면에서 다룬다. 북한, 독도문제는 정치, 사회면, 그리고 동원호는 사회면이었다. 오늘자 발제를 봐도 그렇다. 사실의 선택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점은 알지만, 국제면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대체로 무미하다.

 국제부에서 종합면이나 사회면을 빌어 쓰는 기사는 그렇지 않다. 동아일보는 국제면을 약간은 진지한 일종의 해외 토픽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국제부 기자는 국제면과 일반 지면을 오가면서 기사를 쓰는 것이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지적은 무의미해지겠지만, 국제면 자체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가.



사실을 꿰는 바늘은 누가 쥐고 있는가.

 국제면에서 기사화된 ‘미국’, ‘레바논’ 등의 먼나라 이야기들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의미를 던지게 된다. 스트레이트성의 기사들은 나름대로 깊이 있는 이해와 전문지식을 가지고 쓰여졌고,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사실들을 꿰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국제부 외부의 칼럼진이나 논설위원이고, 아주 가끔은 ‘기자의 눈’, ‘광화문에서’를 확보한 국제부 기자이다.

 동아일보는 국제부(라는 정체성이 존재하는지는 차지하고라도)에서 그러모은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고정적인 공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동아일보의 정견과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조율이야 불가피하겠지만, 동아일보가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스펙트럼 내에서 국제부 기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에 나서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과 해석이 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이 바로 언론들이 논조를 세련화하고 서로 소통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초석이다.



여전히 특파원이 필요한가

 인터넷을 통해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오늘날, 특파원은 해당 지역의 뉴스에 대한 우선 접근권을 상실했다. 특파원에게 남겨진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현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생함을 기사에 투영하는 것이 하나이고, 해당 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취재를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특파원 제도는 그러한 문제 의식없이 구태의연하게 운영되는 것 같다.

 지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파원을 보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단기 특파원 제도를 활용하거나 현지 언론과의 제휴를 강화해서 현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파원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마치는 개인적인 소회

 신문은 더 이상 신속성이나 가독성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굳이 신문을 찾아보는) 독자들은 수준도 높고 관심도 크다. 역피라미드형의 우람한 기사틀은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를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흔히 칭하지만, 인턴을 해보니 그보다는 ‘사실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아직까지는 적절한 듯하다.

 국제부의 인턴 프로그램이 참 좋았다. 기자를 본격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본격적인 기자 훈련보다 이곳의 분위기와 개략적인 이미지를 얻는 것이 훨씬 유익했다. 그리고 이아무개 선배, 김아무개 선배를 비롯한 국제부 기자들도 인턴기자를 귀찮아하지 않고 살갑게 챙겨주는 것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점심시간에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뉴스브리핑 갔을 때 이아무개 선배가 점심은 어떡할 것인지 네 번이나 전화를 해서 챙겨줬던 것이 제일 가슴에 와닿았더랬다. 부장님, 이아무개 선배님, 김아무개 선배님의 술 약속도 잊지 않고 있다.



하나 더.

 동아일보는 보수지다. 이는 위험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은 말로 들려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두 주간 하면서,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많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던 ‘동아일보’라는 ‘공기’는 이제 나름의 내부 동학을 가진 ‘기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보수적인 논리와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이 ‘기업’의 영업방식이다.

 다행인 것은, ‘찜질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질방 기사를 쓰더라’는 인턴 동기의 이야기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국제부의 선배기자들은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어서 좋았다. ‘보수’, 혹은 (상대적인 개념어로서) ‘좌파, 우파’라는 단어가 거부감없이 쓰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동아일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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