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지침: 위대한 항로에서 항해할 때 항해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섬의 자기를 기록해서 그 자기의 방향에 따라 각 섬을 들러가며 항해해야 한다. 기록 지침이 없다면 위대한 항로에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영구 지침: 기록 지침과 달라서 한 번 섬의 자기를 기록시키면 그 지침을 어디로 옮기든 반드시 그 섬만을 가리키는 지침.

- 원피스 단어백과사전 中 -



그러고 보니 이곳은 여전히 '어디든 되거나 어련히 잘 되겠지'라던 불과 한달전의 마인드의 기록에서 멈춰있었다.

실은 이미 '어련히 잘 된' 홀가분함을 느끼는 목표상실의 멍청한 상태를 지나,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나 라는

긴장감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상태랄까.

연말의 싱숭스러운 분위기를 핑계로 맘껏 늘어져서는 무슨 말로 자신을 추스리기 시작해야 할지 엄두를 못내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새 최초의 홀가분함은 퇴락하고 새로이 부딪힐 문제, 선택들이 정신차리고 진지해지라고

재촉하고 있으니.



수십여 곳에 지원을 했고, 하이바도 안 씌워주는 퀵서비스를 타고 시속120을 넘나들며 가능한 선택지를 넓혀

보고자 욕심을 부렸다. 세달동안 온갖 업종의 기업들 앞에서 내가 했던 말과 보였던 행동은 팔할이

'내숭'이었으며, 04년 이래 늘상 껴왔던 반지를 빼는 행위나 한미FTA를 찬성한다는 프리젠테이션, 혹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친구와의 선약 대신 회사를 택하겠다는 대답들이 전부 그러한 내숭..혹은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꼭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사실 '꼭 가고 싶은 곳'이란 단어로 내가 여태까지 지시해 왔던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선망하던 삶을 이뤄줄 것 같은 레디메이드 형태의 틀이었는지 모른다. 어느정도의 진보성을 두르고 중상류

이상의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미국보다 20-30년 늦은 한국에서 2010년쯤 대박예감의 '보보스'족이랄까.

그치만 그렇게 헐겁거나 만만한 선택지는 없었다. 물질적/비물질적 '보수'와 자신을 위한 '여가'라는 두 측면은

여지없이 상충했으며, 나자신 이미 88만원 세대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정말 뽑아줘서 마냥 감사할 뿐인 일개

구직자였던 거다.



엊그제 동아일보 인턴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랑 같이 인턴면접을 봤던 친구가 그때 많이 놀랐노라는 얘기를

했다. 내 빤짝이는 귀걸이를 보며 면접관이, 직장에 들어갔을 때 그걸 빼라 그러면 어쩔 거냐 그랬더니 내가

그랬댄다. 그 정도의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조직이라면 안 가겠다고. 전혀 잊혀졌던 기억이었다. 음..지금까지

내가 의지해온 것들은, 기록지침이었던 걸까. 어딘가 도착하면 도구로서의 효용을 다하고 버려질 뿐인. 갈지자

행보를 부추기는 기록지침말고..흔들리지 않는 영구지침을 한개쯤 품고는 있는 걸까. 나 자신에 대한 혼란.

협소한 정치적 지형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부하게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혼란.



오늘 우연찮게 중경삼림을 다시 봤다. 당신과의 기억을 통조림에 담는다면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만약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대사. 그 대사가 먹히는 이유는, 대다수의 기억은 편리하게도 유통기한이 파인애플

통조림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일 거다. 사랑과 삶, 영구지침과 만년짜리 기억. 한살 더 먹는다는 따위로,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는 따위로, 그걸 찾는 '척'만 하게 되는 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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