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문득 덕수궁 돌담길 옆 나무들에 둘둘 감긴 빨간 털실을 보고서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을 알려서 함께 모자를 떴던 게

벌써 일년 전 일입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뜨개질이 참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그리고 올해말, 다시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캠페인' 시즌4가 시작되었네요. 작년에 뜻을 모아

뜨개바늘을 함께 쥐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단체신청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포장이 참 많이 바뀌었네요. 네모지고 약간 높은 박스가 윗도리는

빨갛고 아랫도리는 갈빛인게 크리스마스 기분이 물씬 납니다. 게다가 박스의 네 면에는

둥글고 네모난, 각기 다르게 생긴 다른 표정의 아이들이 그려져 있어서 모자가 그려진

빨간 뚜껑을 딱 덮으면 그 아이들에게 모자를 씌운 듯한 이미지, 와~ 이런 거 좋아요^^

박스를 열어보니 안에는 이것저것, 뭐가 이렇게 빼곡히 채워져 있는지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작년에는 털실뭉치도 하나였던 거 같은데 올해는 두개가 둥글둥글 뭉쳐 있었구요, 나중에

모자를 담아서 보낼 봉투 하나, 그리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보낼 손편지지 하나랑 기타 등등.

보기만 해도 배가 뿌듯하니 불러오는 내용물들이랄까요.ㅎ 무슨 선물상자를 받은 느낌이에요.

작년에는 첨에 털실 색깔을 보고 별로 안 이쁘다 싶어 살짝 실망했었는데, 올해는 색깔도 두개다

참 맘에 들어요. 이게 박스마다 랜덤으로 색깔이 들어가 있는지라 골라잡는 운빨이 매우 중요한데

올핸 나름 흡족하네요. 그치만 몇번씩 뜨고 풀고 뜨고 다시 풀다보면 털실 색깔이 까무잡잡해져서

별로 애초의 발색이 나지 않더라는.;;;

올해 '선물상자'  내용물 중에는 작년엔 없던 것들이 몇개 더 들어있었어요. 하나는 이런 배지!

꼬마 털모자에 핀이 달린 채 선물상자 속에 들어있었는데, 어디든 달고 다니면 굉장히 귀여울

거 같죠? 특히 모자 끝에 달린 저 풍성하고도 보드라운 털뭉치가 참 맘에 들었답니다.

또 하나, 이 빨간색 배지가 참 이쁘더라구요. '저는 지금 모자 뜨는 중입니다'.

아직 모자뜨기 시작하진 못했지만, 저 빨간 모자배지가 참 맘에 들어서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조만간 모자 완성되면 아프리카 아기들한테 보내기전에 인증샷

한번 올릴라구요. (이런 식으로라도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야 질풍뜨개질이 가능할 거 같다는..)






빨간 털실두른 나무를 보셨나요. (2009.12.16)
회사에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을 알려서 단체신청을 했습니다. (2009.12.18)

그렇게 시립미술관 가는 길에 빨간 털실두른 나무를 구경하고는, 덜컥 동해버린 마음에 회사에서 단체신청을

받아, 무려 스무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모자뜨기를 하게 되었다. 엊그제 회사에 커다란 박스 하나가 도착,

일일이 찾아다니며 키트를 나눠주는 것도 일이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었다는.

베이지색 '실내화주머니'처럼 생긴 주머니 안에는 털실꾸러미 하나, 그리고 안내 책자 한 권이 들어있었다.

약간 캠페인 광고와 다르다 느꼈던 점은, 스무 개 중에 어떤 털실도 그처럼 빨갛게 이쁜 색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모두 단색으로 들어가 있어서 좀 아쉬웠다는 점 정도.

책자 안에는 뭔가가 바리바리 담겨 있었다. 살짝 무섭다 싶은 질문, "죽어가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라고 적힌 빨간 책갈피 하나, 스티커, 반납할 때 필요한 봉투 등.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를 위해 뭔가를 꼭 포기해야 하나. 꼭 '죽어가는 아기'라

무섭게 이야기해야 하나. 전도 활동하듯이 공격적으로 포기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싶은데 등.


그치만 또 돌려 생각하면-우호적으로 해석하면-모든 행동에는 기회비용이 따르니까, 모자뜨기에 할애하는

시간과 노력같은 것들이 내가 아기를 위해 포기하게 될 부분인 거다. 뭐, 장기를 하나 떼주거나 대단한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니까 또 내가 흔쾌히 나서기도 한 거고. 모자가 만들어질지 걸레가 만들어질진

모르겠지만 여하간.





연말 분위기낸다고 나무들에 저지르는 만행, 이제 그만하자.

라는 포스팅을 어제 올렸지만, 시립미술관 가는 길에 마주쳤던 멋진 풍경, 멋진 아이디어, 멋진 사람들이 있어

소개를 하고 싶었다. 흉물스런 나무조명들에 눈쌀을 찌푸리며 오르던 덕수궁 돌담길과 함께 걷던 나무들이

빨간 토시를 둘렀다.

새빨간 털실로 정말 보기만 해도 후끈 따뜻하게 보이는 나무들이다. 어쩌면 저렇게 가지런히, 차분하고

정갈하게 털실을 감았을까.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만큼 새빨갛고 따뜻한 색깔로 소개된 캠페인,

신생아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 이건 뭘까.

궁금해 하면서, 또 이런 식으로 나무를 꾸미면서 알리는 방법도 있구나 감탄하면서 미술관 쪽으로 걷다 보니

여전히 작업중이신 분들이 많다. 나무마다 두명씩 달라붙어서, 옷이 더러워지거나 쪽팔리거나 하는 건 신경도

안쓰고 아예 땅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나무에 털실을 감는데 온통 몰입중이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다. 이번주 내내 몰아닥친다던 한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털실을 저렇게 꼼꼼하게 신경쓰며 감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이뿌게 감아내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추위조차 잊었을까.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들이 너무 이뻤다.

미술관에 들어갔다 나올 때도 계속 작업 중이면 따뜻한 캔음료라도 건네리라 했다. 두어시간 구경하고 나오니

해는 떨어지고 추위 역시 더욱 맹렬해져 있었다. 다행인지 그분들도 대략 작업을 마치셨는지 철수하셨다.

음료값은 굳었지만, 웬지 아쉬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 좀 찾아보았다. 대체 누굴까. 빨간 털실을 저토록 정성들여 나무에 감아주는 저 쎈스쟁이들은.

그리고 질문처럼, "지금 아프리카의 신생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http://www.moja.sc.or.kr/  '세이브 더 칠드런'이란 국제연맹에서는 국내외 아동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댄다. 이렇게 실을 나무에 감는 건, 심한 일교차에 목숨을 잃는 아프리카 말리의 신생아들에게

모자를 떠서 보내주자는 메세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자는 커녕 실뜨기도 제대로 못하는데, 라고 맘속으로 중얼대는 걸 들었는지 플래시로 만들어진 첫화면에선

슥슥 글씨가 써진다. "처음 뜨는 모자입니다." 방문객의 맘 속을 짚어 미리 선수쳐주는, 꽤 감각있는 카피다.

아프리카에서 얼어죽을 수 있단 거, 이해한다. 이집트 사하라 사막에서 하룻밤 노숙을 해본 경험상 아프리카의

굉장한 기온차는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할 수 있을 거다. 더구나 저렇게 조그맣고 연약한 아기라면..

"하나의 모자가 한 생명을 살립니다." 불쑥 나도 연말에 털모자나 떠볼까, 싶다.






예비군 훈련을 가려고 옷을 챙겨입을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그리스로마신화의 한 토막이 있다.

헤라클레스에 죽음을 가져왔던 옷. 그의 아내 데이라네이라가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놓칠까 두려운 나머지

헤라(던가 헤라의 사주를 받은 신이던가의) 꼬임에 넘어가 마법의 힘을 가진 옷을 헤라클레스에게 입혔다던가.

일단 옷을 입고 나니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느껴졌으나, 한번 입혀진 옷은 살에 철썩 달라붙어
 
벗겨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군복이 그렇다. 잔뜩 무거운 군화, 잔뜩 내리누르는 하이바, 그리고 불편하기만 한 나무작대기-총,

그저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운이 쏴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의욕을 상실한다.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고 나니, 하루가 너무 지쳐버렸다.


"26일임 병장이다. 낼부터 일주일동안 외박이니까, 병장신고도 째고 외박나감서 병장달고 나가게 되었다. 이제부터 11개월-3주라...

11비에 울 B.X. 가게 물건 받아오면서 전투모 한개 사고, 병장 계급장 오바로크치고, 옆에 이름도 박아왔다. 11비에 두돈반짜리 트럭 뒷켠 타고가면서 계속 무얼 박을까 고민 좀 했다. 보통 남들은 대한민국 공군 아무개, HAWK, HIDDEN CARD정도에서부터 자기 이름, 장비명 머 그런거 하던데, 최종진화된 형태의 전투모에-아니지, 전역모가 또 있었군..-무언가 멋진 문구를 박아넣고 싶었단 거다.

짧막하면서도 내게 의미를 던져주는 그런 단어..명사, 함축어, 상징 그러면서도 약간의 자발적 검열과 수정을 거친. 심사끝에 hasta la victoria, siempre는 넘 길어서 짤렸고, ubermensch랑 siege-mental, solidarite정도가 남았더랬다. 군바리로서의 역할과 내 생각, 거기서 분열된 내 생각들, 부끄러움, 자존심, 그런 걸 계속 갈퀴질하며 뻗어나가다 보니..모자에나마 박아넣을만큼 자신있는 단어가 없지 싶었다. 낯부끄러운...생각해보니 군대서 머라하겠다 싶은 단어를 알아서 제하는 것만이 자발적 검열이 아니더라구..어른거리는 치기를 제하고 의미를 줄 수 있는 단어로.

막막해지는 와중에 차는 덜컹거리고, 엉덩이가 쪼개지는듯한 와중 문득 체가 떠올랐다. 체 게바라...현실에서 살되 꿈을 따르는...68의 상징이자 00년대의 '문화적저항'상징으로 전유되고 만.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진보와의 상관관계는?정치가 타인을 아우르는 거/전유하는 거/헤게모니화하는 거/라면, 문화는? 누구나 공공에게 말을 할때 집단을 거명하지, 우리는, 네티즌은, 시민은, 국민은, 여성은, 시민단체는...순간 포섭되는 이름없는 다중..)

CHE GUEVARA를 박아넣었다. 마치 타투처럼. 일단은, 그의 방식만 모방하기로 한다. 치열함의 방식을 다시금.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빨간색실로 해달라고 졸라 쫄랐는데..안된단다. 걍 광택띈녹색..해서 녹색의 체게바라가 되어버렸다.ㅋㅋㅋ" (2003.9.21)



* 정말 코미디 같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메일을 뒤지고 직접적인 증거력도 없는 문구로 언론재판을 한다.

그렇게 노무현을 보냈던 그들이다. 티비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때, 피에 굶주린 괴물,

앞뒤 안가리고 무작정 제물을 찾아 돌진하는 괴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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