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사방에서 (남들보다) 좀더 빨리, 좀더 높이 뛰라고 재우치는 상황에서 굳이 새해

다짐까지 좀더 앞당겨서 해보자니, 왠지 뒤숭숭하고 어영부영 지나야 제맛인 연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이건 전적으로 최근 무지하게 뒤엉킨 스텝을 밟으며 온통 헝클어져버린 일상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반성, 그리고 미처 스텝을 추스를 짬도 없이 다가와버린 연말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잡아보려

쥐어짜보는 안간힘같은 거다.


..뭐, 약간은 그런 효과도 노린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어차피 새해 소망따위 작심삼일, 새해들어서 삼일만에

쓰디쓴 자기모멸과 시니컬한 배째라 멘트 수렁에 빠지기 보다, 새해 들어서기 전에 조금은 워밍업도 해보고,

과연 이게 될만한 다짐인지 아닌지, 간도 볼 수 있는 훌륭한 유예기간인 거다. 게다가 굳이 새해소망으로

다짐씩이나 할 만한 것들이라면 굳이 새해되면서부터 시작할 이유도 없는 거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1. 걷거나, 자전거타고 출퇴근하기.

가을에 산 삼각형 자전거, 출장 한번 다녀오니 쎄~하니 추워진 날씨 덕에 얼마 타지도 못하고 겨울이 됐다.

이년차에서 삼년차로 변신하는 시기, 그간 억눌러온 허릿살이 조금씩 반역의 붉은 깃발을 드높이는 바 운동이

절실해지고 있는 시점인 거다. 날씨가 춥거나 비오거나 눈오거나 하면 걷기로, 기타의 경우에는 자전거로.

애초 자전거 살 때 버스값 들어갈 거 모아서 자전거를 사겠노라고 큰소리쳤던 터에. 비록 빡세게 걸어서 30분이

꽉 차고, 사무실에 오르는 엘레베이터 안에선 몸에서 김이 펄펄 날 지경이긴 하지만 우선은 걷고 자전거타보기.


2. 영어 & 제2외국어 말하기 공부하기.

어설피 '영어공부', '중국어공부', 요래봐야 아무것도 공부 못하는 거다. 그냥 실용적인 차원에서, '영어 말하기

& 제2외국어 말하기'에 집중하는 게 필요하다. 워낙 영어 잘하는 사람이야 깔렸으니 치이지 않을 정도로는

해야 할 텐데...제길. 게다가 제2외국어로 대체 뭘 배울지는 아직 맘이 세워지지 않아서 문제다. 조금이나마

하던 걸 계속 하자면 중국어 정도일 텐데, 사실은 일본어나 스페인어를 새로 배우고 싶은 맘도 동하고 있고.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우선 영어부터 어떻게 좀. 2001년 맨하탄에서 알바할 때 '나쁜 영어'를 배우지 못해

한마디 대거리도 못했던 수모는 아직도 생생하단 말이다. 사진은 쌍둥이빌딩 무너지기 며칠전.


3. 색소폰 레퍼토리 12곡 만들기, 여차하면 색소폰 사기.

작년 10월께부터 배우던 알토색소폰. 따지자면 배운지 일 년이 넘었다지만 일주일에 고작 한번 점심시간때

45분 수업, 거기다 역시 일주일에 한번 될까말까한 개인연습시간인지라 우스운 실력이다. 색소폰을 빌려주며

연습시켜주는 곳이라 아직 색소폰도 안 샀으니 말 다한 거다 실은. 그래도 선생님 왈 다른 아저씨들은 색소폰

기본 조금 배우고 바로 '성인가요'로 넘어가지만 형님은 마침 '초견(악보를 보고 바로 읽어내리며 연주할 수

있는 능력)'도 좋고 재지한 감도 있고 하니 제대로 재즈를 해보자고, 나름 탄탄하게 기본기를 닦고 있는 중.

이제 대략 연말께부터 레퍼토리 만들기에 집중하려 했으나 워낙 이런저런 점심약속이 많아 한달 쉬기로 하고

내년 1월부터 다시. 한달에 한곡, 그렇게 연습하다가 집 가까운 곳의 색소폰 동호회 같은데 찾아봐서 색소폰

사서 독립할 예정이다.


4. 수영 배우기(바다 수영이 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운동신경 부족증에 시달리는지라, 수영은 늘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파란 페인트칠

깔끔히 칠해진 실내 수영장에서나 하지, 시퍼런 바닷물이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이끼 짙푸른 오아시스같은

곳에선 목숨을 내걸고 한두번 뛰어들었다간 지쳐 널부러지는 거다. 다이빙 하는 포즈만 잡고 사진찍고 돌아설

때의 그 씁쓸함이라니. 마침 지구 온난화의 기세가 날로 흉흉해지는 이때, 수영은 생존기술이다. 바다 수영이

가능할 정도, 최소한 배영이 가능할 정도로는 수영을 배워야겠다. 겸사겸사 유선형 몸매도 만들어보고.


5. 네팔/쿠바/페루 중 하나 여행가기.

네팔의 주요 수출자원 하나가 '자아'라던가, 네팔을 혼자 배낭여행 다녀온 남자와는 연애도 하지 말란 이야기가

있다지만 몇년전부터 네팔은 로망이 되어버렸다. 카스트로가 죽기 전에는 꼭 가봐야 한다는 쿠바 역시, 생각만

하면 조바심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나라가 된지 오래고. 쿠바. 큐바. 쿠우바. 그러던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잉카보물전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잊고 있던 나라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페루. 이름만 들어도 정말 뭔가

클래식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이 그득한 나라다.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중의 하나에선, 마방진을 풀어서 마법을

부리던 팬더에게 맛난 마멀레이드 잼을 원없이 먹여줬던 할머니가 페루에 살았댔다.

문제는 어느 나라를 가건 짧은 일정으론 녹록치 않다는. 대체 내년엔 휴가를 얼마나 쓸 수 있을지가 관건인 셈.


6. 휴대폰에 저장된 사람들 얼굴 사진 모으기.

새로 바꾼 휴대폰에 오늘에야 전화번호부를 옮겼다. 필요한 번호부터 조금씩 옮기자는 생각이었지만, 그러다간

평생 전화번호부를 못 옮기겠다 싶어서 그냥, 대리점에 가서 삼천원 주고 오분만에 옮겨버렸다. 연락을 자주

하거나 얼굴을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내게 전화번호가 쥐어져 있다는 것 자체로, 언제든 전화할 수 있단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은 다 만나서 얼굴맞대고 이야기를 섞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마다 꼭 상대의 얼굴을 담지는 못하더라도, 2010년엔 주위를 좀더 챙겨야겠단 다짐.


7. 시민단체/정당 활동 좀더 열심히 하기.

대학 때의 고담준론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최소한 내가 먹고 살겠다고 버둥대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내지르고

있는 '해악'들에 상응하는 만큼의 뭔가는 해야겠다. 그저 단순히 당비 내고 후원금 내던 차원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책임있는 역할, 조금은 더 부담되는 역할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오마이뉴스에 드문드문 

싣던 기사들도 좀더 정기적으로 가다듬어진 글을 올리는 게 필요할 거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여태까지보다는

무게중심을 좀더 공적인 활동 쪽으로 옮겨보고 싶긴 한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8. 대학원 준비..? 기타 자격증..?

대학원을 가던 해외연수를 가던, 사실 지금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 변수가 많긴 하지만 어쨌든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자면 조금씩 대학원을 염두에 둔 그림을 그려야 될 때가 된 거 같다. 이년정도 다녔으니 회사는 이미

적응할 대로 해버렸고, 자칫 이대로 무겁게 가라앉아 버리진 않을까 걱정인 거다. 혹은, 가방끈 늘여봐야 사실

별 도움이 안 된다면 차라리 다른 자격증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음......일단 2010년은 뭔가 다른

가능성을 구체화한다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려나.


9. 하루하루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게 살기.

회사-집-회사-집을 쳇바퀴도는 아저씨가 되기는 싫은 거다. 틈틈이, 없는 짬을 내어서라도 미술관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렇게 즐길 수 있는 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다. 그냥 하루하루 지나는 게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밋밋하고 진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뻔한 궤적을 되밟아 나가는 건

편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살짝 벗어나 주는 것도, 혹은 확 예정없이 질러버리는 것도 매력적이니깐.


물론 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 쉼없는 송년회 러시들 때문에라도 얼마나 갈지 회의적이긴 하다. 그치만 뭐,

언제는 삶이 평온평탄했던가. 그런 핑계로 고작 며칠도 안 되어 때려친다거나, 아예 시작조차 못해서는 곤란한

것들이다. 사실 이런 아홉 가지 다짐들은 단지 새해를 맞아 새삼 챙겨먹은 맘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들인 게다. 그저 어제같은 오늘, 오늘같은 내일을 반복하며 살지는 않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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