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클라우드 아틀라스' 상영이 끝난 후 한 시간 가까이 배두나와의 무비 토크가 이어졌다.

 

우선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전 워쇼스키 남매(前 형제)의 작품-특히 '매트릭스'-에서 풍기던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희석되고 좀더 호쾌하고 재미있는 즐길거리로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배우도 줄줄이 나오는.

 

 

물론 기본적인 베이스는 살아 있다. 수백년에 걸쳐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변하지 않는 약자에 대한 억압,

 

'상식'이라 당연시되는 편견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세대 갈등과 나아가 복제 인류(혹은 식용 인류)에 대한 차별까지


뻗어나가는 그럴 듯한 상상력이 그렇고, 생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삶의 궤적이나 연속성이랄까, 그런 불교적 뉘앙스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풍부한 은유와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몇 개의 인생이 퍼즐처럼 흩어진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겁거나 어렵지 않고, 기본적으로 스펙타클한 장면과 현란한 효과들에 무게를 실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아바타의 뒤를 잇는다'는 광고 카피라거나,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배두나씨가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인 듯.

 

 

결론. 아바타 때도 사실 규모만 크고 뻑적지근했지 내용은 별 거 없다 생각했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그렇다.

 

다만, 그 스펙타클함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면 더 재미있을 영화.

 

 

 

p.s.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2300여년의 서울을 두고, 드문드문 나오는 한글을 두고, 혹은 영화의 여주 배두나를 두고,

 

'한국부심', 애국심을 느끼는 건 정말 뜬금없지 싶다. 그때는 이미 지금과는 국가의 개념도, 민족과 국경의 개념 역시

 

달라졌다는 전제를 깐 미래의 어느 지역일 뿐. "서울이 배경인데 왜 왜색이 느껴지냐" 따위의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그저 아주아주 먼 미래에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룬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p.s.2. 그나저나, 가져간 Pentax의 77 limited 렌즈로 D열에 앉아서 찍은 사진들인데 역시나, 거리와 조명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이 흔들리고 선예도도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두나는 참 이쁘더라는.

 

그녀는, 아니 그녀의 연기는 '고양이를 부탁해'로부터 '공기인형'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담아두게 된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like 1984

언제나 의심해야 할 것은 '충성'과 '민족', '국가' 따위 단어를 내세워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무조건 믿고 따르며 똘똘 뭉치라는 말이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라는 그들의

구호,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거대한 텔레스크린으로 화상지시를 하거나 언제라도 도감청을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정부가 날조하고 의도한 이야기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음악과 예술이 사라지고 10시면 사람들을 집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통제력, 전쟁/테러/질병/

자연재해 등 '외부의 적'을 계속 만들어내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연장하는 그들의 패턴은 똑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위계화된 이래 '권력'은 그런 식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고 조종해

왔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을 가지고 언론과 학계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만들어내고 '상식'을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나왔던 소재는 악의적으로 뿌려진 '신종 바이러스'였지만, 1984에서는

'전쟁'과 '재구성되는 역사'였다. ([1984]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 진행되는 세상, 1984 혹은 현재.)


각시탈 혹은 바더 마인호프

권력에 대항한 '폭력'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맥락을 수긍케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사회통념상' 쉽지

않은 거 같다. 떠올려보면 70년대 독일 적군파들의 무장봉기 및 테러를 앞세운 극좌노선 이야기를

그렸던 '바더 마인호프', 혹은 (한국에서 프로파간다 차원으로 만든 선전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일성 치하 북한에서 각시탈을 쓰고 무력투쟁의 선봉에 서는 '각시탈' 정도일까. '칠레전투3부작'은

조금 그림이 다르니까 논외로 치고, 당장 떠오르는 대부분의 영화는 '폭력은 나쁜 것'이란 선험적인

판단에서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테러를 선동하는 그 행동들의 기저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또다른 폭력, 반폭력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이 깔린 채다. 총 앞에

총으로 맞서봐야 상대는 대포와 미사일을 갖춘 거대한 폭력집단. 중요한 건 잔뜩 움츠러 들어있고

마비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뇌된 부자유에 대한 불만,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대가리가 바뀌어봐야 그대로일테니.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래서 차라리 부차적이다. 굳이 정당화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적인 '매트릭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이 수반하는 모두의 피와 고통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과 세련된 연출력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 'Phantom of Opera'의 사회적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V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정치권력을 살육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바쳐 이전 시대를 끝내고자 했다지만, 그가 권력자 한 두명을 바꾼 건지 '앙시앙레짐' 체제 자체를

바꿔낸 건지에 대해서는 답도 없다. 폭파해나가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팔다리가 찢겨나가 죽었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적당한 가벼움과 오락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현실성과 감동을 획득한다.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빨간 알약, 이번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빨간 알약을 나도 함께 먹은

느낌이 드는 거지만, 그때만큼 막막하거나 멍한 느낌은 없는 거다. 이 세상이 통째로 거짓이란

이야기, 차라리 세상을 떠나 어디 가서 도나 닦는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세상이 거짓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각본하고 짜맞춘 이야기와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하진 않으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피해야 할지 알려주니까.


감동의 3단부스터 (아이유 좋아요)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V의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물밀듯 몰려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탱크와 중무장한 군부대 턱앞까지 두려움없이 다가오던 그 때. 수뇌부가 무너진 군병력이

망연자실 손을 놓은 가운데 바리케이트와 방패와 탱크를 넘어 계속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1단 감동.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사방으로 불을 뿜으며

폭발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2단 감동. 거대하게 화석화된 권위, 사람들로부터 나왔지만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국회의사당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말 국회의사당이 무너져내리자 비로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장면. 감동의 화룡점정, 그야말로 3단부스터였던 거다.

가면 뒤에 숨어서, 가면의 통일성을 빌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전달하던 그들은 이제 가면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웅변하던 장면이었다. 제각기의 얼굴로 제각기의 목소리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만들어낼 거다.


어쩌면,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식의 낭만적인 혁명이 진짜로 가능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답고 깔끔한 혁명이란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게

나도 따라 믿고 싶어지는 어느 혁명의 이야기, 브이 포 벤데타.




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구 소련이 멸망할 때까지 공산정권의 치하에 있었던 이 공간은,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이란 이름으로 독립하게

되고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임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후 두명의 대통령을 맞으면서 사실상의

일인 독재정권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공산주의 정권이나 일인독재 정권이나 어슷비슷하게 통하는 것도 있을 테고,

사람들의 일상이야 딱히 혁명이 일어나 뒤집히지 않은 바에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

어쩌면 북한의 평양 시내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외부에 보이기 위한 일정 구획 안에만 잘 관리되어 있고

그 너머를 향하는 순간 마치 '매트릭스'의 세계의 끝에 도달한 느낌을 던지는.

시내 중심의 커다랗고 새하얀 건물들이 아쉬하바드의 집결된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면, 그걸 좀더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건 곳곳에 서있는 초대대통령의 금빛 동상과 현직대통령의 대형 초상화, 그리고 탑이나 조형물들인 듯.

실제로 저런 커다란 건물들은 관공서, 정부 청사, 역사 혹은 국립 대학이라고 했다. 건물 외벽에 커다란 초상화를

걸어두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물들인 거다.

그에 비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들은 많이 허름했다. 옛 소련식으로 지어졌다는 아파트 건물들하며, 살짝

이지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의 가정집들. 모래폭풍이 심심찮게 불어오는 뿌연 공기 속에 내놓은 채 말리는

빨래들처럼 이들의 삶은 적당히 까끌까끌하고 건조하진 않을까 싶었다. 이 땅에서 많이 난다는 석유와 가스

팔아서 번 돈으로 저런 관청이나 대리석으로 지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건 아닌가.

그치만 또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닌 거 같다. 외부인의 시각으로야 이상하고 비정상적이라 여겨질 만한 일이라도

이들의 시각으로는, 그리고 이들의 기준으로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국가로부터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초대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하늘을 찌르고 현직 대통령 역시 못지 않는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걸 거다. 분수대 앞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 사진을 찍는 어머니도 그랬지만, 길거리를 걷는

많은 투르크인들의 표정은 분명히 밝았었다.

그녀들의 화사한 전통의상이나 원피스도 이쁘고, 나름 생기발랄한 표정도 그렇고, 찌푸리거나 쩔어있는 표정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공산주의국가'나 '독재국가'를 상상할 때 그려지는 회색빛의 음침한 분위기도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들은 이전에도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옷을 입고 다녔을까.

어쩌면 그런 변화는 구소련의 공산정권 치하를 벗어나고부터, 혹은 최소한 가스와 기름 덕에 조금씩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허름하고 흐릿하던 신호등이 이렇게 반짝거리며 녹슬지 않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선명한 LED조명 신호등으로 바뀌었듯이.

그리고 여전히 이 나라는 러시아식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시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그런 나라인 거다.

거리에 서 있다가 누군가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는 딱딱하고 건조한 군인들, 이들은 샤방한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들과 함께 변화중인 투르크메니스탄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쉬하바드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커다란 깃발들, 깃발들을 꽂아 놓은 깃발꽂이들. 저건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평양 시내를 스케치한 사진들에서도 비슷한 걸 봤던 거 같다. 집체 공연을 하거나 군중무를

할 때도 깃발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흔히 활용되는 도구기도 하다. 여기선 대체 뭐에 쓰이는 걸까. 궁금증을

끝내 풀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아파트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 성모 마리아 같은 인물을 그린 종교화 같기도 하고, 인민의 표상 같기도

하고, 혹은 공산주의식의 계급의식을 드러낸 벽화같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로만 따지면 소련의 느낌.

구소련 시절에 세웠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탑'(이라고 해야 하나 위령탑이라고 해야 하나..)이 여전히 남아

있기도 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연합국 측의 승리를 가져온 건 팔할이 소련의 힘이었던 거니까

그들은 이곳저곳 치열한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곳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곳에서 굴러다니는 차들도, 오래 된 것들이다 싶으면 대개 소련에서 양산되어 공급되었던 '국민차'에 속하던

것들이라 보면 딱히 무리가 없다고 했다. 물론 새 차들이야 벤츠에 BMW에 폭스바겐에 전부 외국 브랜드.

저 버스는 뭔가 깡총하게 생긴 게 뒷바퀴가 조금 앞쪽으로 땡겨져 있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꽤나 귀엽다.

그리고 아쉬하바드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는 순간 황량해지는 풍경. 뜨문뜨문 떨어져 있는 건물들조차 저만치

멀어지고, 그 사이로 바싹 마른 채 헐벗은 땅거죽이 붉게 드러났다.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조금만 교외로

빠져도 금세 스카이라인이 땅바닥에 달라붙고 도시적인 느낌이 사라지긴 하지만, 여긴 도시의 외관이 벗겨지면

바로 사막의 거칠고 헐벗은 식생이 드러나니까 더욱 극적인 거 같다.

와중에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은 투르크 여성분이 한 분 지나가셔서 급 화색이 돌던 풍경.

그나마 몇 그루씩 듬성듬성 있는 나무들도 비리비리하긴 마찬가지, 튼실하다거나 싱싱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나무 밑둥에는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하얗게 무언가를 칠해놓았다고 하던데, 알제리에 갔을 때도 이렇게

나무 밑둥을 전부 하얗게 칠해놨던 걸 봤었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거기선 '이뻐 보일라고' 칠했다던데,

어쩌면 알제리 역시 병충해 방지를 위한 목적일지도.

투르크메니스탄에도 소수의 쿠르드 족이 산다. 쿠르드족은 터키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종종 무력 충돌도

일으키고 소요를 발생시키곤 하는 소수민족인데, 이 곳의 쿠르드족은 그런 분리독립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쉬하바드를 벗어나 조금 산 쪽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저쪽 동네가 바로 쿠르드 족의 거주지역이라고.

정말, 아쉬하바드 시내 역시 참 작아서 이십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차로 달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금방

주위 풍경이 바뀌어버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건물다운 건물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건조한 땅을 조금이라도

녹화시켜 보겠다는 의지로 심었을 조그마한 나무들은 사막의 거센 삭풍에 희롱당하며 비척비척.

그래서, 여기가 바로 아쉬하바드의 끝. 공산독재의 지난 세월이, 일인독재의 현재가 어떤 식으로 이 경계지역을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갈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가 아쉬하바드의 끝.





마루 밑 아리에티. 저번주 도쿄 여행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들렀을 때, 아리에티 캐릭터 상품을 샀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고 말았다. 이 단호하고 살짝 딱딱해보이는 토끼머리(?!) 소녀에게, 그리고 그녀가 사는 마루

밑장에 이런 이야기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10센티미터 '소인'의 오감으로 감지하는 인간의 세계를 그토록 치밀하게 묘사해내고 활용할 수 있다니,

토끼머리라고 생각했던 그게 야무지게 머리를 묶은 빨래집게라는 상상력에선 정말 영화관 안의 모두가 빵 터지고

말았다. 한층 세련된 OST들과 잔뜩 신경쓴 게 분명한 사운드의 힘을 빌어 그려내는 하야오의 또다른 세계.




이런 거 눈여겨 보면 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몇가지 영화의 단서들을 주워섬겨본다. 당연히 이는

전적으로 내 기준..;;


# 인형의 집.

일반적으로 '인형의 집'이라 하면 인간이 인형을 위해, 그렇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제공하는 편의

시설인 셈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인형의 집'이라 불리지만 실은 소인들을 위해 수십년전부터 준비되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집이 있다. 생존조차 쉽지 않은 소인들, 아리에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인형의 집'은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은 공간. 그들이 그 집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그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는 건

꽤나 즐거웠다.


# 각설탕.

인간으로부터 '몰래 빌리려던' 각설탕이 노골적으로 주어지는 순간, 그리고 다시금 일련의 모험을 거쳐

인간에게서 아리에티에게 건네지는 순간의 어마어마한 차이.


# 할머니.

일반인. 보통 사람. 방학 때마다 곤충 채집을 하고, 딱딱한 껍데기를 뚫고 알코올을 주사해두곤 했던 어린 나.

그녀의 흐물흐물한 잇몸이 느껴지는 웃음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일종의 공범자 의식, 아니

차라리 나라면 방송국부터 불렀을 텐데. 아무래도 할머니가 대책없긴 하지만 순박한 것도 어쩔 수 없구나.

하야오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늙은이라고 늘 현명하거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따위 안전한 '상식'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



# 배경지식 (지브리 스튜디오 보러가기 전 어디선가 주워들은..)

하야오가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든 후 '월령공주'를 만들지 송충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지 두 개의

작품을 두고 고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과정만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가

되리라던 하야오의 믿음은 확고했지만, 우선 액션이 좀더 들어간 '월령공주'부터 만들자는 주위의 권유에

월령공주가 만들어졌단다. 아마 그 때의 그 송충이 주인공의 영화를 좀더 의인화하여 다듬은 게 이 영화

아닐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그 조그만 발들을 살살살 움직여 시속 10센티쯤으로.


# '매트릭스', 혹은 '인셉션'식의 질문 하나.

마루 밑의 아리에타가 살던 일상은 그녀의 집천장처럼 흔들림없이 단단했다. 단단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녀의 일상은 잔뜩 헝클어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야 하는 타이밍이 온다. 알고보니

그녀의 집천장은 얄포름한 널빤지 한장, 몰랐던 건 아니겠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거나 애써 지우고 있었거나.

그렇다고 마루 위의 인간 쇼우가 사는 일상이라고 단단치도 않다. 심장수술을 모레로 남겨둔, 남은 수명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인간의 세계는 일찍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던 것.


마루 위냐 아래냐,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가 일관되게 말하는 건 하나다.

살아라. 살아라.









 #1. 감기약을 삼키며 상상한다. 이 작지만 다부진 타블렛들이 식도를 지나 내려가다가 내 몸속 나쁜 것들이

윙윙거리고 가래를 뱉어대는 그 모터 스위치를 톡 건드려 꺼버리는 상상.



#2. 인셉션 후기삼아. 매트릭스스러운 아바타? 아바타스러운 매트릭스? 머릿속 칸막이, 꿈 속의 꿈을 보여주겠다는
 
거 자체는 이미 단물빠진 이야기, 비쥬얼과 이야기스킬은 인정하겠지만.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균열 한번

감각하고 나면 먹고먹고또먹는 데까진 금방 생각이 와닿는 법이다.


그렇잖아,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성의 '간지'에겐 나비가 나인데 그 내가 다시

나비인지 의심하는 것쯤이야.


#3. 손바닥 위에 똑바로 세워놓은 초록색 알약. 손바닥에 고인 짭조름한 약간의 수분으로 캡슐을 수직으로

붙여놓기엔 아무래도 무리, 손가락들이 제멋대로 휘청대며 캡슐을 떠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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