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개월여, 토요일마다 서울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

 

고등학교 언젠가부터 칼로 끊기듯 뚝 끊겼던 4B연필이나 '그림그리기'와의 인연이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둘 그어본 선들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게 신기했다.

 

고경일 선생님이나 김부일 선생님의 칭찬은 넘쳐올라 들썩이는 파도가 되었다.

 

 

서울 곳곳의 숨어있는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도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서촌, 이태원, 보문동, 애오개, 양화진..서울이 숨긴 풍경을 지긋이 응시하는 두어시간.

 

 

실력은 치졸하지만, 아마 그림 그리기의 매력이란 그런 거 같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듯 슬쩍 사진에 담아내고 말 풍경을, 한방울씩 곱씹으며 가만히 퍼올려내는 작업이랄까.

 

 

 

- 참여연대 부설 아카데미 느티나무강좌 '고경일, 김부일의 서울 드로잉' 3기 소감.

 

 

 

엽서로 제작된 내 그림 두 점.

 

나무 판넬로 제작되어 전시될 그림 한 점. 어느 비오는 날 실내에서 본인이 갔던 여행지 사진을 그리는 날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 위,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드로잉.

 

 

 

 

다른 그림들 몇 점..

 

 

 

 

 

서울 통인동에 소재한 참여연대 건물, 여기 1층에 있는 '까페 통인'에서 2주 정도 걸려있을 그림들.

 

6/22~7/6, '전시회'라기도 우스운 '학예회' 수준의 자리라는 게 맞겠지만 혹 시간 나시면 들러서

 

'숨은 서울찾기展'의 숨어 있는 제 그림들을 찾아 보시길.

 

 

 

 

 

 

 이번 시간은 합정역에서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

 

1890년대 외세의 개화 압력에 나라의 빗장을 연 후, 이 땅에서 사망한 서구의 선교사와 정치가, 사업가 등이

 

묻혀 있는 외국인 묘역을 찾았다.

 

 

 

 

 합정역에서 외국인 묘원까지 걷는 길은 찻길도 아닌 것이 인도도 아닌 것이 묘한 느낌이었고,

 

그 묘한 길의 한켠으로는 벌건 벽돌담 너머로 슬몃 고개를 내민 기와지붕이 숨어있거나 아니면

 

아예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커먼 속을 온통 드러낸 조그마한 서점이 놓여 있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흔히 좀비가 일어선다거나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보이던 두꺼운 대리석 십자가와 석비들이

 

즐비한 공간, 서울 한복판에 이런 느낌을 자아내는 풍경이 있었는줄은 몰랐다.

 

 

 

 이 곳은 말하자면, 바로 옆에 인접한 가톨릭 교회의 성지인 절두산성지에 비견될만한 기독교계의 성지화 작업이

 

한창인 그런 곳인 거다. 참배객, 순례자, 부담스런 어휘들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자꾸 찔러왔다.

 

 

 

 

 

 그래서 조용히 카메라만 들고 주변 풍경을 담기 시작..

 

 

 

 팔 하나가 떨어져나간 돌십자가도 보이고.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무덤과 상징들이 보였다. 아마도 그 주인의 국적과 문화에 따라 다른 거였을 듯.

 

 

 

 

 

 

 

 굉장히 우람하게 생긴 비석을 머리맡에 세워둔 고인은 아마도 그만큼 영향력도, 지위도 남달랐으리라.

 

 

 혹은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대리석으로 구획해놓은 고인들 역시 어느정도의 끝발이 있었을 테고.

 

 이렇게 특색없는 석비에 간략한 생몰연대와 이름만 적힌, 비좁게 열맞춰 선 고인들의 이야기는 늘 안갯속에 잠겨있다.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늘어선 석비들과 몽땅한 나무들이다 싶었는데, 이 나무 한그루는 유독

 

하늘 높이 삐쭉 치솟아 발치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얼핏 하늘을 받치고 선 느낌이기도 하다.

 

 

 

 

 

 

 

 

 

 굉장히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 기하학적 형태의 교회. 그려볼까 하고 잠시 쳐다보았지만

 

너무나 딱딱 각이 맞고 직선들만 가득한 건물임에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석비들의 모양새, 무덤의 생김생김이 다르다며 한참을 돌아보고 나니 이제 좀 싱싱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보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묘원의 분위기는 생기발랄함이나 밝음과는 거리가 있는 거다.

 

 

 

5월의 묘지로부터 눈을 돌려 싱싱한 초록의 나무들로, 그리고 땅거죽을 흥건히 덮고 피어나는 꽃망울들로.

 

 

 

 

 

티비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아티스트가 온몸을 기울이며 커다란 화폭 앞뒤로 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며,

 

손끝에서 사방으로 튀던 물감방울이며. 그런 이미지가 그대로 담긴 '드로잉쇼'의 티켓함.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장충동 웰콤씨어터에는 R석과 S석이 있었는데, 앞섶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아예 입장할 때

 

비옷이 제공되었다. 대체 얼마나 물감비가 쏟아져 내리려나, 사방에 마구 흩뿌리는 광란의 분위기가 연출되려나

 

조금 걱정도 되고 묘하게 설레기도 했는데. 생각보다는 물감 한방울 휘날리지 않는 깔끔한 공연이었다.

 

 

공연 중에는 카메라를 꺼내들지 않는 게 공연과 배우와 관객들에 대한 예의염치. 근 한시간반에 걸친 공연이 끝나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커다란 그림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사진 촬영 시간을 안배해 주었다.

 

 

굉장히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우 중 한 명. 대사 하나 없이 보여지는 그림 만으로 극을 끌어가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거다. 특히나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내는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관중의 감탄을 얻어낼 만큼의 윤곽이 드러나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가 관건일 터.

 

 

그럼 틈새를 역동적인 액션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몇 마디 괴성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로 때론 진지하게, 때론

 

코믹하게 채워나가는 걸 지켜보는 자잘한 재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즉석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선 하나,

 

실루엣 하나가 공연 전반에 흐르는 강렬한 에너지와 역동감이 그대로 담긴 듯 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공연이 있던 웰콤씨어터. Welcome을 왜 굳이 웰콤이라 부르나 했더니 철자부터가 달랐다. Welcomm.

 

 

엉거주춤 선 사람과 쪼그려 앉은 사람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저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명료하면서도 살짝

 

젠틀하다는 느낌마저 전해준다. 왜 쪼그려앉은 사람에게서는 머리에서  저게 나가는 걸까.

 

 

웰콤씨어터 건물 자체도 요모조모 뜯어볼 만한 구석이 많았다. 어느새 길어진 햇살마저 뉘엿거리는 시간대엔 더욱.

 

 

 

다음에 이 쪽에서 공연을 볼 일이 있다면, 저 의자에 가만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괜찮겠다. 혹은, 아무 일 없이도

 

근처에 들를 일이 있다면 그저 앉아서 책 한권 뚝딱 읽고 일어서도 좋을 듯.

 

 

동대입구역에서 웰콤씨어터까지 왔다갔다 하는 길 위에서 만난 이쁜 건물 장식 하나.

 

 

그리고, 이 날 드로잉쇼를 보기 전 저녁식사로 먹었던 빠네 파스타와 먹물도우 피자.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찍었던 풍경과 공연이 끝난 후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후의 풍경이 워낙 다르다.

 

어쩌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보다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게 더 많은 걸 공감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느 가족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보금자리였겠지만 이젠 한무더기의 건축폐기물로 변한 돌무덤

 

위를 밟고 올라가 아현동 일대의 재개발지역을 한눈에 내려보았다.

 

 

그 와중에 돌무덤 틈새를 비집고 노란 꽃줄기 한 가닥이 꿋꿋이 피어오른 모습이란.

 

 

 

누군가 신었을 발레슈즈도 탁하고 무거운 시멘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하늘하늘, 반짝거리고 있었다.

 

 

 

B&W 모드의 사진 몇 장. 뒤에 우뚝 서 있는 삼성 아파트와 그 앞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들이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다.

 

 

화장실 창문만한 조그마한 창에 엉성하게 덧붙은 가림막.

 

붕괴 위험으로 막아놓은 길 너머엔 이십년 전에나 보았을 법한 비디오테잎이 나뒹굴고 있다. 저 안은, 1990년대인 건가.

 

낚시바늘로 성을 지은 것처럼 살벌한 담장 끝 방범창살.

 

 

빛과 그림자. 왠지 딱 그런 문구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집앞에 잔뜩 쟁여진 쓰레기들, 그리고 생활 폐품과 재활용품들.

 

 

저 집은 아무래도 사람 얼굴이다. 눈썹 붙인 게 뜯어져버린 오른쪽 눈에 너덜거리는 왼쪽 눈,

 

게다가 젓가락을 꼽고 있는 한쪽 콧구멍. 뭔가 일본식으로 즐기며 술을 마시는 중인가 싶은.

 

 

 

 

 

어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부지런히 모아서 꽁꽁 동여매 놓으셨을 폐지 묶음들. 어렸을 땐 그러고보니 저거 챙겨서

 

학교에 가져가서 무게도 달고 그랬는데.

 

애오개 고개에 자리잡은 철거촌, 그 곳에 핀 꽃들은 이쁘다기보다는 왠지 풀죽은 채, 그렇지만 가시를 세운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아마도 저 허름하고 시트조차 다 사라져버린 소파는 이 곳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거 아닐까.

 

 

재개발지역을 떠나 차들이 씽씽 다니는 큰길로 올라서는 계단, 시멘트 계단에 녹물이 흐르고 흘렀는지

 

붉게 염색이 되어 버렸다.

 

5호선 애오개역, 출구에서 내리고 몇걸음 떼지 않아 저너머로 보이는 황폐한 옛 성같은 느낌의 외딴 건물.

 

 

큰 길가에서 한발, 골목을 내딛었을 뿐인데 공기부터 달라지는 듯한 분위기.

 

 

 

 

 

 

가로등과 건물들이 켜켜이 어깨를 이어붙이고 선 좁은 골목, 불빛이 사정없이 짓쳐드는 게 불편했던지 아랫도리를 둘렀다.

 

마치 종로 피맛골 골목통에서 옛 국세청 건물을 올려다보는 듯한 풍경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세발 자전거는 누가 타고 놀았을까. 언제부터 저 야트막한 지붕들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얹혀 있었을까.

 

 

 

 

 

 

골목 한 귀퉁이엔 언제 잘려나갔는지 제법 굵직한 나무 밑둥이 그대로다. 심지어 연둣빛 싹마저 돋았다. 어쩌려고.

 

 

아귀가 틀어져버린 붉은 벽돌담. 언제부터 저런 계단식 균열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철거가 빠를까 붕괴가 빠를까.

 

 

 

하늘에다 대고 날리는 주먹감자처럼, 뻐큐손가락처럼, 삐뚜스름하게 올려세워진 연통.

 

 

 

방범창살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린 위에는, 고작해야 나무 판넬 몇장에 헝겊이 덮인 천장 뿐인데. 하늘이 무거웠나보다.

 

 

어디론가 계속 발걸음을 유도하는, 골목과 골목과 골목들. 이집트 카이로의 옛 거리나 상해의 골목통을 찾을 일이 아니었다.

 

 

납작 엎드린 건물 뒤에서는 훤칠하고 반듯한 아파트가 위세를 부리고 섰다.

 

 

벽돌들과 폐건축자재로 가림막을 친 조그마한 채소밭..이랄까. 행여 누가 뜯어갈세라 사람사는 집만큼 높은 담장을 둘렀다.

 

 

어느 집 대문 밖에 내걸린 채 하릴없이 바람에 시달리던 몸뻬바지 한 벌.

 

 

 

 

한줌 볕조차 다닥다닥한 게딱지 지붕에 걸려버려서, 골목은 으레 어두침침한 데다가 선뜻한 냉기마저 감돈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어느 집에선가 커다랗고 호들갑스러운 라디오 광고도 들리고,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싸우는 소리도 들린다. 좁은 골목통을 비집고 들어오기엔 벅찬 한줌 햇살 대신 골목을 채운 건 어디선가 날아온

 

짙고 끈적한 메주 냄새, 음식물 썩는 냄새.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사방으로 난반사되는 소음들만 난무하는 덕에 현실감각이 살짝 비틀어지는 듯 했지만,

 

그래도 여기 사람이 산다. 비닐봉투에 야무지게 묶여 나온 하얗게 타버린 연탄 네장.

 

 

 

 

이태원을 좋아라 하지만, 이쪽으로는 걸어 올라가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녹사평역에서 남산터널 방향으로,

 

그렇게 조금 걷다보면 나타나는 경리단 골목길. 그러고 보니 타코를 먹으러 한 번 왔다가는 영영 길을 잃은 그곳이구나.

 

함께 드로잉 수업을 듣는 동기이자, 부부가 함께 수업을 듣고 계신 잉꼬 한쌍 중 한 분이 나중에 가보라고 찍어주신 곳.

 

좁다란 시장통 골목을 슬쩍 가리고 선 화려하고 거친 파라솔, 그리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꽃망울들.

 

살짝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굵은 가지에서 뻗어나가는 잔가지처럼 좌우로 뻗은 골목길들.

 

비슷한 간격으로 놓인 차들이 쩜쩜쩜... 말줄임표를 만들며 오르막길을 버티고 서 있었고.

 

간헐적으로 쟁여진 계단들은 숨이 가쁠만 하면 쉬어가라며 여남은걸음의 평지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은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슬쩍 날렵한 태를 내비추는 남산S타워.

 

 

그러다가 불쑥, 건물이 이어지던 곳에 주차장이 휑하니 공터를 주장하고 나서자 뒷켠에 숨었던 타워가 덩달아 나섰다.

 

 

이태원의 상권도 여느 이름난 곳들, 신사동이니 삼청동이니 처럼 미어터지기 시작했는지 여기저기 공사중.

 

먼지 비산을 막는 차양을 커튼처럼 치고서 아저씨는 벽돌 등짐을 지려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실핏줄처럼 번져나가는 골목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골라잡고서 무작정 걸어가다보면 무슨 풍경이 나올지 설레는

 

그런 느낌, 상해의 오랜 골목통이나 카이로의 오랜 골목들에서 느끼던 그런 묘한 설레임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공영주차장에 고경일쌤과 함께 올라서는 순간 탁 트이던 풍경. 서울N타워가 바로 지척에서 내려보는 느낌.

 

 

 

납작 엎드린 건물 옥상에서 제법 매운 봄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던 빨래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일단 그림 하나를 후딱 그리고 나서, 타워를 바라보며 조금씩 각도를 옮기며 풍경을 보는 중. 꼬물꼬물한 건물들.

 

 

건물들이 야트마학 사선을 따라 조금씩 무릎을 낮추며 이지러지고 있는 풍경 자체의 운율감이 리드미컬하다.

 

 

 

비슷비슷한 풍경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느낌의 풍경들. 커다란 나무가 웅크린 산비탈 아래의 골목길 끝단에서부터.

 

어지럽게 비틀린 골목길을 따라 잔뜩 어그러진 골목 담벼락.

 

새삼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서, 혹은 재미있어서 이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 중에는 은근 실력자들도

 

많이 숨어 계신데, 이 분도 그런 실력자 중의 한 분. 앉아계신 분위기부터 벌써 다르다.

 

 

경리단길을 오르다보면, 그새 올라간 높이만큼 계단이 삼엄하게 사방으로 오르내린다. 내려와 살피면 옹이구멍만한 하늘.

 

그리고 어느결에 풍경과 하나가 되어버린, 자연스레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하고.

 

 

공영주차장에서 바라본 남산 서울N타워 주변으로 헤쳐모인 성냥갑 집들. 그 오밀조밀 바스락거릴 듯한 풍경과

 

여성전용 주차장 사이에 가로놓인 구멍송송 새하얀 담벼락이 왠지 유럽의 어느 나라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하루.

 

 

 

서울 중심, 경복궁을 축으로 동서남북으로 자리한 동네에는 아주 심플한 이름이 붙어 있다. 궁에서 동쪽에는 동촌, 서쪽에는 서촌,

 

그런 식인 거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 퉁명스럽고 게으른 작명에는 일종의 특권의식, 우월감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중궁궐에 가장 근접한 동네, '일번지'를 누리는 셈일테니.

 

그래서 여기는 그 중 서촌, 경복궁의 서쪽에 붙어있는 동네다. 한가한 골목길에 깜빡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성기게

 

듬성듬성 기와지붕 한옥집을 꽂아둔 동네, 이렇게 볕이 좋은 날에 그 중 골목 하나를 골라잡아 자리를 깔고 앉았다.

 

참여연대 부설 아카데미인 '느티나무'에서 수강중인 '서울 드로잉' 수업 첫번째 날, 한옥집과 기와지붕을

 

그려보라는 게 세시간 남짓한 수업시간 중 한시간은 명도 실습, 삼십분은 구도 설명 등으로 날리고 남은 시간,

 

한시간정도를 채워야 하는 미션.

 

고경일 선생님이 몇군데 추천해준 포스트 중에는 '대오서점' 건물도 있었다. 이전에도 지나다가 굉장히

 

매력적인 건물이라 생각했었는데 미처 사진에 담아두지 못했던 곳, 청와대 근처라 온통 야트막한 건물들로

 

스카이라인이 내려앉은 이 곳에서도 특히 땅바닥에 달라붙은 기와지붕은 허물어져내리고 있었다.

 

이 각도로 그림을 그려볼까 잠시 망설이던 사이 같이 수업을 듣는 분들이 우르르 자리를 잡으셨다.

 

구도가 같다고 같은 그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다른 걸 찾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미련을 버리고.

 

그래도 아쉬우니 앞뒤로 좌우로 둘러보며 이 정감가는 건물을 뜯어보았다. 저 기묘한 폰트의 '대오서점' 간판은

 

언뜻 어설프고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인간미가 있는 거 같다. 적당히 허물어져가고 바래가는

 

기와지붕이니 건물의 외벽도 마찬가지.

 

또다른 추천 장소, 그냥 여느 동네의 골목길과 같았는데 문득 말끔한 기와지붕과 단정한 돌담문양 벽면이 서있었다.

 

하다못해 전선들조차 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근대화'된 골목길에 능청스레 살풋 처마끝을 쥐어올린 기와지붕.

 

그런 은근한 까불거림, 혹은 여유가 느껴지는 전통적인 기와지붕이란 건 눈으로 보거나 사진으로 찍을 땐 참 좋은데,

 

그걸 그림으로 담아낸다는 건 굉장히 머리가 아파지는 거다. 좀처럼 평면에 담아내기 쉽지 않은 그 입체감.

 

 







첫 경험은 대부분 부끄러운 실패작이지만 점점 실력이 향상된다.

천천히 하는 것이 더 좋다.

최고의 결과를 얻으려면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둔다.

절제하기 힘들다.

엄청나게 훌륭하지는 않을 때라도 꽤 괜찮다.

한 시간을 할 수도, 1~2분이 걸릴 수도 있다.

실험은 보통 재미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1년에 한 번 하는 광란의 행사보단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낫다.

충동을 억누르면 어딘가에서 폭발하기 마련인데 그 어딘가가 마음에 안들 수도 있다.

교습을 받을 수는 있지만 필요치는 않다.

여기에 돈을 치르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방법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다.

다 끝나고 나면 뭔가를 바꿔야 한다. (종이나 침대 시트)



참여연대 부설 아카데미 느티나무강좌 '고경일, 김부일의 서울 드로잉' 3기, 출발.


위에 예시로 들어놓은 에셔라거나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이라거나, 나카지마 리에라는 사람의 일러스트라거나

심지어 에드가 드가의 인물 소묘까지, 저런 경지까지 따라갈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굉장히 재미있을 듯.(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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