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여름의 문짝이 활짝 열린 것만 같던 5월초의 어느 일요일.

 

광화문광장에서 쫄쫄거리고 흘러내리는 물가에 아예 두다리 걷어붙이고 뛰어든 아이들. 

 

 무릎 위까지 걷어젖혔으니 저렇게 잘박거리는 물에는 젖을 리가 없을 텐데, 아이들은 놀라운 존재.

 

아이들 따라 두발 벗고 물장구치며 놀고 싶던 마음이 순간 들었지만 꾸욱 눌러 한턴 쉬고.

 

어디선가 뾰롱뾰롱 비눗방울이 날아오면 손으로던 발로던 터뜨리지 않고선 참아낼 재간이 없다.

 

물가에 철퍽 뛰어드는 건 애써 참아냈지만 비눗방울을 날려대는 꼬맹이한테는 항복.

 

 

 

 

 

 

 

 

 

 

 

 

 

 

 

 

 

 

 

 

 

 

 

 

 

 

 

 

 

 

 

 

 

 

 

 

 

 

 

보문동의 골목은, 서촌이나 이태원 경리단, 혹은 부암동의 골목길과는 또 다른 풍경이 숨어있었다.

 

사람 두명도 어깨를 부딪기며 걸어야 할 듯한 좁은 골목길을 롤러코스터처럼 타고 몸을 맡긴 채 한참을 흐르다가,

 

어느 허름한 집앞에서 문득 풍경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앉지도 못하고 스케치북을 잡은 채 서서 그리길 수십여분, 문득 옆엣집 낮은 담장 너머 중국어가 들리더니 삐그덕,

 

녹슨 철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아마도 중국에서 넘어오신 일가족. 왠지 그분들 중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대표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셨고, 나 역시 왠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꾸벅하고 말았다.

 

 

 

 

 

 

 

 

 

 

  

 

 

 

 

 

 

 

청계천을 걷고 종로통을 지나, 길냥이가 살고 있는 까페로 돌아가다.

 

이로써 짧막한 반나절의 출사는 끝.

 

 

by NX20.

 

 

 

 

 

  

 

 

아바타에 나오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처럼 조계사 앞뜰에 뿌리박은 커다란 나무둥치와 하늘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등들이 내걸렸다. 부처님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뱀을 만들어

 

나무를 휘감고 조계사 마당에 또아리를 틀었다.

 

 

by NX20.

 

 

 

 

 

 

 

 

 

 

 

 

 

 

 

 

 

 

 

 

 

 

 

 

 

 

 

 

 

 

 

 

 

 

 

 

 

 

 

부처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5월의 허릿춤.

 

오랜만에 나간 인사동 골목길은 여전히 사람이 그득했지만,

 

인파를 피해 새어들어간 꼬불거리는 골목 끝 막다른 찻집들은 여전히 나름의 운치를 지키고 있었다.

 

 

 

by NX20.

 

 

강릉 순포해변 옆의 까페 테라로사.

 

올초에 다녀왔던 강릉, 해안가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커피 포레스트 바이 테라로사. 테라로사는

 

강릉 시내에도 있고 여기저기 분점도 있고 하던데, 여기는 정확히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이 곳 자체로 분위기 좋고 커피맛 좋고, 그리고 천장이 높고 자리가 넓찍해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

 

 

이전에 갔을 때나 지금이나 건물의 독특한 외관이나 질감, 그리고 시원시원하게 뚫려있는 창문들이 좋다.

 

계산대, 시멘트의 질감이나 회색빛이 날 것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에서 나뭇결이 살아있는 공간이 두드러진다.

 

 

한쪽에 설치된 주문도우미. 저번에도 이 기계 앞에서 조금 버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아예 점원 하나가 옆에서 도왔다.

 

뭐 신기하긴 한데, 어차피 점원의 손을 거쳐 주문을 받는 거라면 굳이 이렇게 기계를 앞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카푸치노, 아무래도 보헤미안의 카푸치노와 맛이 비교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데, 그에 못지 않거나 더 나은 듯.

 

그리고 예가체프. 같은 술을 마셔도 분위기나 상대, 컨디션에 따라 취하는 정도도 맛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커피 역시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날.

 

2층의 가뜩이나 너른 공간에 앉아서 고개를 들면 보이던 눈부신 하늘, 그리고 한구석에 양념처럼 얹힌 솔가지 몇 개.

 

햇살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번져가는 시간, 잠시후면 까무룩히 산너머로 해가 잠겨버릴 테니 이젠 서울로 돌아갈 때.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에선 차를 타고 슬쩍, 그야말로 옆동네 가는 기분으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옮겼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강릉에서 주문진 건너가는 건 그런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 거다. 경포 앞바다를 떠나 길을 잠시 달리다간

 

어느새 다시 나타난 바다는 좀더 본격적으로 항구도 두어개 끼고, 아저씨들은 그물을 정리하고.

 

 

 

방파제의 두 팔 안에 조심스레 안겨있는 주문진항에서 둥실둥실 여유로운 배들, 그리고 그물을 정리하는 분들.

 

그리고 항구 코앞에 바다를 바라보며 주차된 자전거와 자동차, 수면에 기댄 채 출렁이는 배까지. 탈거리 셋이 모였다.

 

주문진에서 출발하는 크루즈호의 선착장. 크루즈라곤 하지만 글쎄, 그다지 호화스러워 보이진 않던데.

 

 

주문진항 근처의 수산시장을 돌다가 만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가오리 떼들.

 

골목골목 누비다가 만난 '성인나이트'의 숨겨진 간판, 그렇지만 입구도 숨겨진 거 같구 지금도 하는지는 미지수.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단단한 선언조의 문구가 눈을 확 잡았던, 마치 무슨 공산당 테제같은 느낌의 광고.

 

 

골목을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도 재미난 풍경들이 숨어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얼기설기 얹은 허름한 집 앞 자전거.

 

 

수산시장 골목마다 김을 펄펄 피워올리며 새빨갛게 익어가던 가뜩이나 빨간 대게들, 저 녀석들은 물구나무를 서있는 건가.

 

 

주문진항의 상징물 오징어는 왠지 울트라맨에서 자주 나오던 크라켄이던가, 거대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긴 듯.

 

수산시장 입구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들처럼 회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만

 

갈수록 단단해지던 차에, 생선을 따로 사고 회를 따로 떠서 어디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먹기로 결심.

 

광어랑, 청어였던가 제 이름으로 못 불리고 '잡어'로 통칭되는 생선들 몇 마리, 그리고 개불이랑 멍게까지.

 

그리고 주문진 앞바다. 드문드문 바닷가 깊숙하게 쳐들어간 바위 덩어리들은 이렇게 자그마한 금강산 코스프레중.

 

일만이천봉우리가 하나하나 살아나선 뾰족뾰족 하늘을 이었다.

 

 

바위들 위로 기어올라가 제법 뜨끈하게 달아오른 햇살 바라기 좀 해주고, 덥다 싶으면 아이스크림 하나 베어물고.

 

 

멀찍이 보이는 등대 아래춤에선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고. 움직이는 건 바람결에

 

살랑살랑 잔물결을 이어나가는 주문진 앞 바다뿐.

 

조금은 흐린 날씨탓에 하늘과 바다가 분간하지 어려워서 문득 망연해지는 시선을 붙잡아 주는 건, 문득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개를 펼치고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를 따라왔다곤 하지만, 이미 '보헤미안'은 워낙 유명해진 까페가 되고 말았다. 강릉의 까페거리가 있다곤 하지만

 

보헤미안은 이미 강릉을 넘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까페가 되고 말았으니.

 

영화에서 보헤미안은, 호텔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를 찾는 그의 모습에 약간의 허술함과 허세스러움을 덧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 명인 박이추 선생이 내려준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마셨던가. (아닌가, 그건 테라로사에서

 

한 행동이었던가, 기억이 그새 가물가물해져버렸다.)

 

 

여하간 보헤미안에 입성. 조그마한 건물 3층에 있는 까페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박이추 선생을 비롯한

 

세네명의 직원들은 모두 잔뜩 기합이 들어가서 주문받고, 커피내리고, 서빙하는 중이었다.

 

하릴없이 한쪽에 앉아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중. 한쪽 기둥에 박이추 선생이 일본에서 취득한 교육이수증과

 

뭐라뭐라 막 일본어로 적힌 증서같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누군가 그려준 캐리커쳐. 여유롭게

 

커피를 쥐고선 부드러운 눈매에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맘에 든다.

 

그리고 이 스위치 박스도. 여러번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했는지 까맣게 때가 남았다. 뭔가 커피색으로 칠하거나

 

눈에 잘 안 띄게 치장하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으면서도, 또 저렇게 테이프가 까맣게 때묻은 채 너덜거리는 , 살짝은

 

허술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커피 원두를 사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옆에서 비닐 진공 포장을 해서, 이런 종이박스에 담아주기도 한다.

 

원두만 사가서 집에 가서 수동 기계로 갈 때 풍기는 그 냄새도 참 좋은데, 조금 사갈까 싶은 마음이 불끈.

 

생각보다 금방 자리가 났고, 받아든 메뉴판에는 예멘이나 페루의 커피도 있었다. 커피마다 간단한 설명이 있었는데

 

괜히 어렵거나 고상하게 꼬아서 표현하지 않고 '산뜻한 신맛'이라느니 '부드러운 맛'이라느니 '스모크향'이라느니

 

한두가지 특징만 잡아서 평이하게 써두었다.

 

 

잠시 문틈으로 구경한 배전실. 커피 원두를 볶는 배전실에서 박이추 선생님이 뭔가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주문했던 건, 고로케 세트랑 브런치 세트였던가. 일본에서 배우신 분이라 역시 고로케 맛이 남달랐다.

 

 

감자 고로케는 따로 나왔는데, 고기 고로케는 이렇게 빵 사이에 아예 양배추처럼 포개져서 나왔다. 완전 대박 맛있던.

 

그리고 카푸치노. 커피가 다르니 당연하겠지만 카푸치노 맛도 확 다르다. 잔도 이쁘고.

 

'커피의 여왕'이라는 예멘 모카마타리. 원래 이전에 맛봤던 커피 중에 흙맛이 나는 예멘 커피가 굉장히 기억에 남아서

 

그건가 하고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지만 역시 만족. 아무래도 모든 커피를 하나씩 다 마셔보고 싶어지던.

 

 

나오기 전에 계산대를 아무생각없이 훑어보다가, 빼곡하게 늘어선 찻잔 접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류별로, 아마도

 

만들어진 나라도 다 다르지 싶은데 저렇게 모아둔 건 아무래도 바로바로 서빙할 수 있도록 한 편의를 따진 거겠지만

 

보는 입장에선 그 자체로 이쁘다 싶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속 풍경. 정말 보헤미안 오가는 길이란

 

대중교통으론 오지도 못하겠다 싶도록 험하고 외딴 동네였던 거다.

 

 

주말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힘들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주4일 근무인 셈이다.

 

월화수를 쉬는 주4일라면 그래도 나머지 목금토일, 열심히 일할만도 하지 싶은데. 전국에 전파가 시급하다.

 

 

보헤미안 앞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꽃길. 사람이 좀만 덜 찾아오기만 하면 참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곳일 텐데.

 

그러고 보니 왜 건물 3층에 까페를 차렸을지도 슬쩍 짐작이 간다. 박이추 선생의 속내를 알 것 같달까.

 

번잡함이 싫어 서울 대학가에서 강릉, 하고도 외딴 곳을 찾아 들었을 텐데, 그리고도 굳이 3층에 까페를 만든 걸텐데

 

맛 좋은 커피와 장인의 솜씨에 기갈이 든 사람들은 거기까지도 꾸역꾸역 잘도 올라간다.

 

 

나 역시 그곳을 찾아 그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에 일조한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렇게라도 한켠 박이추 선생과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차지해 보고 싶은 거다. 모두들 그런 생각으로 어깨를 부비며 이곳에 찾아드는 거겠지만.

 

 

'맛있는 인생'에서 그가 보헤미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적함과 여유로움의 편린일망정.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을 보고선 겨울에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던 사람이 있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은 슬펐다 했다.

 

그이에게서 영화를 추천받았고, 강릉을 추천받았으며, 어느날은 나 역시 혼자 영화를 좇아 강릉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소 잿빛이었던 둘의 기억에 몇가지 빛깔을 더하는 여행. '맛있는 인생'을 따라잡는 여행이 되었다.

 

 

영화에서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나는 호텔, 경포대 현대호텔은 마침 이날이 영업 마지막날이었다. 아예 다 부수고

 

새롭게 다시 신축을 한다는 이 건물, 그래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문득, 서울에서의 번잡하고 불쾌하고 난처한 일들에서 탈출하듯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강릉,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현대호텔이었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건 호텔의 까페 카리브. 밤이었던가 아침이었던가, 그는 메뉴에 나와있지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찾으며

 

여점원을 괴롭혔고, 그녀는 귀찮은 손님의 난처한 질문에도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었다.

 

그녀가 이 곳에 묵었을 때는 미처 까페까지는 못 둘러봤다 했었다. 여기서 앉아 차라도 한잔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이번엔 함께 왔다는 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어디였더라, 경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였던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라고 딱 집어서 이야길 못하겠다.

 

사실 어디인들 뭔 상관인가.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경포 앞바다가 이렇게 이쁘다는 거,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들이

 

영화를 만들며 이렇게 저렇게 동선을 짜고 구도를 잡았으리라는 상상 자체가 재미있는 거니깐.

 

호텔 앞 로비에 있던 푹신해보이는 쇼파들. 저기 어딘가에 앉아서 그는 그녀가 일이 마치길 기다리기도 했었고,

 

그녀는 일이 없는 날 강릉 구경을 함께 나가기로 한 아침, 그를 기다리기도 했던 거다.

 

어라, 그런데 현대호텔의 마지막밤을 아쉬워했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걸까. 어느 프로축구팀 선수들도,

 

그리고 지방순회 공연중인 듯한 강부자 어르신도 체크아웃을 하곤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호텔이야 부수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고인 물을 할짝거리며 마시는 청설모 한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영화 속에서 그가 그녀를 좇아 스토킹하듯 뒤를 밟던 그 산책로, 그리고 언젠가는 그 혼자 술에 잔뜩 취해서

 

욕지거리를 우물거리며 호텔방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했던 길.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 차들이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늘어선 아스팔트 찻길 너머로 노란 모래사장, 그너머 푸른 바다.

 

그와 그녀, 그리고 또다른 그녀는 이런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호텔 앞 입구. 제법 운치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드는데, 이제 없어진다니 왠지 더 아쉬워서 쉽게 못 뜨겠다.

 

경포 해수욕장을 거닐며, 하나둘 켜지는 가게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해풍에 잔뜩 움츠러든 해송 너머로 새하얗게

 

질린 거대한 불빛 하나가 저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래사장 위 흔들의자가 저거였을까. 노랑 풀꽃이 점점이 피었다.

 

경포대를 따라 이어지는 길 위에서 불쑥 나타난 꽃마차. 세상에, 청계천변에도 꽃마차가 달리더니

 

경포해수욕장에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다. 말을 보면 기분좋게 달그락거리는 그 말굽소리를 꼭 듣고 싶어지는데

 

아쉽게도 아직 꽃마차 장사엔 제철이 아닌지 말들은 모두 가만히 서서 자는 듯 쉬고 있었다.

 

 

 

 

 

 

 

 

 

제주 모슬포항, 고등어회가 유명한 이 곳, 가파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는 곳에서 맞았던 봄.

 

 

짠기운 섞인 비바람에 삭아내려 조각조각 부서져내리는 항구 끄트머리의 나무틀.

 

 

그 틈새에서 용케도 뿌리를 내리고 새 잎사귀를 틔워내고 줄기를 겯고 급기야 꽃망울까지 터뜨린 녀석들.

 

언제고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모슬포항, 곳곳에 그려진 벽화도 무척이나 리얼하다.

 

모슬포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는 버스를 몇차례 타보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꼭 사람만은 아니더라는.

 

기다림이 간절하면 저렇게 갓 박아둔 보도블록 틈새로 손가락만큼 굵은 꽃대를 세우기도 하더라는.

 

 

 

 

 

나제통문, 라제통문, 혹은 그냥 '통일문'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곳은 아주 짧고 자그마한 동굴 하나가 있는 곳이다.

 

비록 동굴은 작고 석벽은 야트막하지만 과거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자연적 경계 역할을 했다는 데서 그 역사적

 

의미와 무거움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삼국이 정립했던 시대에는 동굴 서쪽, 이켠에는 백제의 군사들이, 그리고 저쪽켠에는 신라의 군사들이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었을 거다. 호시탐탐 상대의 동태를 살피고 이상 징후는 없는지, 특이한 동향은 없는지 살피는 와중에도

 

두 나라 군대의 깃발은 저렇게 바람을 희롱하며 나부끼고 있었을 거다.

 

아, 그러고 보니 동굴 아래편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과거에도 이렇게 다리가 동굴 앞에서부터 뻗어나왔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다리없이, 조금은 더 가파르고 험난한 구멍이란 느낌이었을까.

 

그야말로 시골의 한가로운 정경이다. 개울은 맑고 차게 흘러내리고, 그 물을 뿌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움켜쥐고선

 

우쭉우쭉 새순을 밀어올리는 초록 나무와 연둣빛 풀떼기들.

 

가만히 다가가보니 나제통문이라고 돌로 된 간판이 동굴 위에 남겨져 있었다. 저건 돌을 쪼아서 만든 걸까.

 

아니면 시멘트로 치덕치덕 덧바른 후세 사람들의 짓일까.

 

동굴의 반대편으로 뛰어가서 온 길을 되돌아보니 풍경이 확 달라졌다. 단순히 해가 기우는 방향을 거슬러 달린

 

때문이라기엔, 왠지 백제와 신라의 천년 전 경계를 넘었다는 실감이 턱없이 육박해왔기 때문이라 믿고 싶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문을 경계로 양쪽 지방의 언어나 풍습이 확연히 다르다고 한다. 티비나

 

라디오를 틀면 온통 '교양있는 서울사람들이 쓰는' 표준어만 나오는 이 시대에도 양쪽의 사람들은 제각기의

 

오랜 사투리를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요새 드라마를 보면 퓨전사극이니 뭐니,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로 넘어오기도 하고 막 그러는 거 같던데, 왠지

 

이 동굴을 특정한 타이밍에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고 지나가면 순식간에 고백신, 삼국이 정립했던 그 시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비오는 날 깊은 밤에 피티체조를 하며 지나간다거나.

 

 

 

 

 

 

 

태권도공원은 뭐고 태권도원은 뭐야?

 

태권도원? 태권도공원을 짓는단 이야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이번엔 또 태권도원이라고?

 

지자체마다 난립하는 온갖 '생색내기용' 토목공사의 하나인 건 아닐까, 의심부터 하게 된 건 내 잘못만은 아니다.

 

 

 

 

뭐, 일단 의심 하나는 불식된 셈이다. '태권도공원'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부터 시작되었던 사업이 2012년 2월에

 

'태권도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니, 적어도 한국의 국기라는 '태권도'를 두고 지자체들이 질세라 숟가락얹기 경쟁을

 

하는 흉한 모습은 아니니까. 그래도 여전히 궁금증, 혹은 의심은 남는다. 2013년 9월에 개관 예정이라는 태권도원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배종신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과 현장소장과의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태권도원을 왜 지어야 하나요?

 

가장 큰 궁금증은 아무래도, 왜 굳이 태권도원을 짓느냐는 거다. 최근 '태권도人'의 스포츠정신에 누를 끼친 복사기인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굳이 커다란 기념사업이니 거창한 시설물을 지어야 태권도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곤 하지만, 전세계에 널리 퍼져 201개국 7천만명의 수련 인구가 있고 올림픽 정식종목으로도 수년째 자리잡고 있는

 

태권도의 본산이자 종주국으로서 한국에 상징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이다. 일본엔 무도관이 있고, 중국엔 소림사가

 

있다고 치면, 한국엔, 글쎄, 국기원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치만 국기원은 강남의 높고 거대한 건물들 사이에 숨은지 오래다.

 

(이제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나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국기원 앞 사거리 운운.)

 

 

무주에 뭘 어떻게 지을 셈인가요?

 

아무래도 아직 공정율은 38%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현장에는 뼈대밖에 없을 거다. 우선 건설 현장에 도착해서

 

진흥재단 이사장과 홍보팀장의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태권도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다,

 

이제 그럼 왜 무주인지, 그보다 중요한 질문은 뭘 어떻게 지을 건지가 관건이겠다. "우리 세대에 우리가 만드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는 내용물이 있는지 궁금했다.

 

 

무주는, 어렸을 적 무주구천동 계곡에 텐트를 치고 놀았던 기억에 따르자면 완전 심산유곡, 멀고도 험한 오지라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내려갈 때 고속버스로 세시간 정도 걸렸으니 그렇게 먼 곳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반딧불이

 

축제라거나 무주구천동, 나제통문같은 유명한 관광자원을 갖춘, 신라와 백제가 경합하던 내륙중앙부이니 남한 땅에선

 

대충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도 있겠다.

 

그리고 뭘 지을 거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꽤나 그럴듯하고 매혹적인 답안을 갖고 있었다. BODY, MIND, SPIRIT을

 

테마로 했다는 세가지 구역으로 나누어 전시체험, 수련연구, 고단자전용의 용도로 구획한다는 것 정도는 기본이고.

 

무주의 백운산 자락에 기대어 조성되는 9곡 8경, 9개의 골짜기와 8개의 풍경에 태권도의 경지에 따라 밑에서부터

 

차츰 성장하고 깊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해낸다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애초부터 굉장히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득 담고 공간을 조성한다는 거니까 야심만만하면서도 흥미가 바싹 당기는 거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태권도의 띠 색깔을 그대로 차용해서 다리 여섯개를 만들겠다는 계획.

 

밑에서부터 백원교-흰띠, 황원교-노란띠, 청원교-파란띠, 적원교-빨간띠, 품원교-품띠, 그리고 흑원교-검정띠,

 

이렇게 여섯개의 다리를 만들어서 각자의 색깔을 살려내고 각기 단계별 수련과정을 형상화한다는 건, 무슨

 

태권도를 소재로 한 만화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살짝 황당무계하면서도 굉장히 참신한 아이디어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태권도 고수들에게만 허락되는 특별한 공간, 태권전과 명인관을 짓는다는 것도 포인트다.

 

전적으로 기부금에 의탁하여 지을 계획이라는 이 두 건물은 고단자들의 커뮤니티 및 네트워크 공간으로, 말하자면

 

전세계에 퍼져나간 태권도의 정수를 품고 있는 곳이랄 수 있지 않을까. 안에 들어가려면 마치 끝판왕을 깨러가듯

 

즐비한 고수들의 숲을 넘고 온갖 비밀장치들을 해소해야 겨우 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우라가.

 

 

그렇다곤 하지만 아직 기부금이 그렇게 원만하게 쌓이고 있는 상황은 아닌 듯 하다. 아직은 좀 휑해보이는 기부금

 

명단, 그리고 '공' 자가 떨어져나간 '태권도원'의 이름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아무래도 기부금을 걷는다는 건 법적인

 

문제도 있고, 아직까지 '태권도원'의 건립 프로젝트 자체가 거의 홍보가 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과연 현장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백문이 불여일견, 아직 공정율이 그리 높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태권도 경기장이니 기타 시설의 뼈대가 섰고

 

제법 윤곽은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한다. 준비해준 SUV에 차례로 타고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저게 나중에 태권도 띠 색깔에 맞춰서 색이 입혀진다는 여섯 개의 다리 중 하나. 아마도 흰띠를 형상화한 백원교인 듯.

 

 

여전히 현장 곳곳은 높은 크레인이 자재들을 옮기거나 조립된 부분을 얹어 올리느라 분주한 모습이었고,

 

태권도 경기장의 경우는 이제 차근차근 지붕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천지인을 형상화한 삼태극을

 

모티브로 했다는 태권도 경기장은 다 지어지고 나면 꽤나 멋진 건물이 될 거 같다.

 

그리고 태권전과 명인전이 들어서야 할 공간. 아직 기부금이 원만히 걷히지 않아 다른 곳보다 공사 진척상황이

 

늦어지는 편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태권도원의 핵심이자 정수인 곳이니만치 차근차근, 날림이나 부실없이

 

단단하게 지어졌으면 좋겠다.

 

길게 백운산 자락을 타고 달리는 태권도원을 따라 흐르는 개울, 이 곳은 예로부터 백제와 신라가 영토분쟁을

 

벌이며 숱하게 전투를 벌여왔던 곳인지라 태권도원을 조성하기에 풍수적으로랄까 적당한 곳이란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저 붉은 돌 두개는 이 곳의 개울을 정비할 때 발견된 시뻘건 색의 돌로 공사중의 액도 막고

 

앞으로 태권도원의 기상을 지켜줄 상서로운 돌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태권도원의 전경. 둘러보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공사가 꽤나 진척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태권도진흥재단 측에서도 이제 어느정도 눈에 보이는 윤곽이 잡히기에 이렇게 블로거들을 초청해서 소개도 하고

 

본격적으로 홍보에 나설 참이라 했다.

 

나중에 공사가 완료되면 저 산꼭대기 가파른 곳에 위치한 전망대까지 모노레일도 놓일 예정이라 한다. 이왕이면

 

태권도라는 무예의 공간이니만치 일부러라도 더 가파르고 힘든 코스를 만들어 체력단련 코스로 활용하는 게 낫지

 

괜히 모노레일 만들어서 유지비만 많이 들지 않겠냐고 나름의 고언을 했다.

 

태권도원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첩첩한 산봉우리들, 왠지 이런 곳이라면 태권도의 칼날같은 기세와 무예로서의

 

품위에 걸맞는 공간이겠다 싶다. 알고 보니 충청, 전라, 경상 삼도를 가르는 삼도봉이 있는 명산이라 하니 더욱

 

옷깃이 여며진다. 이런 곳에서 우렁우렁 기합소리를 내며 태권도를 연마하는 건 꽤나 멋질 듯.

 

 

2013년 9월, 그때쯤에 이곳은 얼마나 어떻게 단장되어 있을까. 색색의 띠 색깔에 맞춰 지어지는 다리는 어떨까,

 

그리고 태권도의 수양 단계를 비유한 9곡 8경의 풍경은 또 어떨까. 궁금한 것투성이인 채로 일단은 기다릴 뿐.

 

 

 

+ 주변 볼거리

 

나제통문, 신라와 백제의 통로였다는 조그마하고 매우 짧은 동굴이 하나 있다. 두 나라의 자연적 경계였다기엔

 

너무 약소하다 싶지만, 이쪽과 저쪽의 언어와 풍습이 여전히 차이가 뚜렷하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무주구천동 계곡을 따라 달리는 벚꽃길. 벚꽃비가 내리길 기다리기를 한참, 아무래도 바람이 멎었다 싶어 자리를


뜨려는 참에 한줄기 바람이 불었댔다.

 

머루와인 동굴, 수차발전을 위해 만들어졌던 동굴을 와인 숙성창고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독특하지만, 시원한

 

동굴 내로 300여미터 들어가서 맛보는 달콤한 머루와인도 독특하다.

 

적상산 사고, 조선시대 실록과 그 사초를 보관하던 사고 중의 하나인 이 곳에서는 통풍과 제습을 위해 다리를 껑충

 

걷어올린 신기한 한옥들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새 무주의 대표 볼거리는 반딧불이 축제. 인공으로 길러낸 반딧불이를 풀어놓는 게 아니라

 

진짜 자연 속으로 들어가 야생의 반딧불이를 관찰하는 거니까, 그만큼 무주란 곳이 깨끗하고 축복받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렸다.

 

먹거리를 굳이 더하자면

 

'김대중 선생님'도 다녀가셨다는 이 곳의 산채정식은, 테이블 가득 빈틈없이 메워진 반찬 접시들이 하나하나

 

맛있기도 했지만 산에서 갓 캐왔을 것만 같은 온갖 버섯 반찬들이 참 맛나더라는.

 

 

 

 

 

* 이 포스팅은 '태권도진흥재단'의 초청을 받아 '태권도원 팸투어'에 참여하고 취재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렸을 적 백원, 이백원을 쥐고 달려갔던 곳은 으레 허름한 공터에 엉성한 천막으로 지어졌던 '덤블링장'.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쉼없이 튕겨올라오는 그 탄력 넘치는 그물망이 좋아서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을 때까지 뛰었던 기억이 있다. 문득 너무 높게 뛰었다 싶을 때의 짜릿한 공포감 역시 생생하다.

 

 

예기치 않게도 주문진의 어느 골목 귀퉁이에서 만난 '덤블링장', 정식이름은 트램폴린이란 건 이제야 알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신기한 마음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덤블링을 하며 까르르 웃음을 사방에

 

흩뿌리는 중이었다. 연령대에 따른 1점프대, 2점프대로 구분이 된 건 나 어렸을 적에도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난다.

 

자전거를 대충 주차해놓고 그물망 위에서 온몸에 힘을 주어 발을 튕기고 엉덩방아를 튕기며 쑥쑥 키가 크는 아이들.

 

허름한 천막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건지 어설프게 걸쳐진 지붕천 사이로 봄볕이 함께 튕겨들었다.

 

무시하다 다치면 주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안전수칙판의 낡은 상태를 보니, 내 어렸을 적에도

 

저런 거 하나쯤은 옆에 세워져 있었겠구나 싶다. 그런데 다 좋지만 6번은 대체 뭐지. 음주후엔 올라가지 못한다는.

 

그리고 11번도 웃긴다. 크게 소리지르거나 심하게 장난치는 어린이는 퇴장도 감수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룰이라니.

 

 

 

 

 

어렸을 적 무주구천동에 놀러가서 텐트치고 엄마아빠랑 '곰발바닥 닭발바닥~'하면서 놀았던 기억으로만 남았던 곳.

 

꽃구경을 하겠다며 나섰던 4월 마지막주의 무주 봄 풍경.

 

출발하기 위해 모였던 양재역 옆의 새순들. 새싹들이 새살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훌쩍 무주. 점심을 먹었던 식당 옆의 한적한 시골풍경 역시 연둣빛이다.

 

풍성하게 피어나다못해 보도블럭 아래로까지 흘러넘치던 잘디잘은 꽃송이들.

 

올려다 본 하늘에는 내려꽂힌 벼락처럼 우왁스럽고 거침없는 나뭇가지에 여린 이파리가 돋았다.

 

 

 

땅 위에 살포시 놓인 노란 물음표 하나.

 

 

봄철을 맞아 온몸에 영양제 주사를 맞고 있는 나무 한 그루. 피가 되고 살이 되길 바랄 뿐.

 

 

 

 

 

버들강아지도 아니고 뭔지는 몰라도, 오동통하게 살이 불은 솜털보숭이들.

 

 

언제든 그대로 조심스레 파내어 쓰시라며, 땅에 동그랗게 화관을 만들어둔 노랑꽃들.

 

 

 

 

무주구천동로, 두갈래 갈랫길이 쪼개지는 어간에 서서 연둣빛 행진을 사열하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바람조차 숨을 죽였는지 꽃눈이 그쳐버렸다.

 

그래서 슬쩍 자리를 이동하면 그 사이로 놀리듯 지나버리는 바람 한 줄기.

 

 

바야흐로 벚꽃잎을 우수수 밀어내며 연둣빛봄이 남도에 피어나는 중이다.

 

 

 

그나마 비로소 담아낸 한 컷. 벚꽃비가 나풀대며 '초속 5센티미터'로 날아가는 순간.

 

 

 

한바탕 비가 쏟아붓고 난 목요일, 트레이드 타워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멀찍이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한조각 찢어져서 떠가는 애기 구름 하나.

 

건물 옥상에서 밤에 깜빡깜빡거리며 비행기 등의 충돌을 방지하는 붉은 등 너머로 남산타워까지 보이고.

 

역삼역과 테헤란로 저너머 관악산자락이 왼켠으로 웅크리고 있다.

 

 

높은 구름 그림자가 한강에 얼룩덜룩한 흔적을 남기고, 한강의 서안과 동안에 빼곡한 아파트들.

 

봉은사의 초록빛 녹지공간과 그 너머 담색 물결의 한강, 그 위엔 새하얀 구름이 떠가는 푸른 하늘.

 

 

주변을 얼추 돌아보고 나서는 옥상 위 구경. 군사시설로 쓰였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뭔가 낡고 녹슨 시설물들 위로 짙푸른 하늘을 내달리는 새하얀 구름들.

 

건물 옥상에 있는 이 안테나같이 생긴 시설물은 뭘까.

 

 

 

 

점심시간을 틈타 옥상에 올라와서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재미에 홀딱 빠져있는 직장인들.

 

 

선릉. 봉긋한 능 하나가 앞으로 보이고,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이나믹한 녹지가 빌딩들에 포위됐다.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이 소리도 없이 내달리는 순간, 선릉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여의도 방면. 날이 맑으니 여의도 63빌딩이니 쌍둥이 빌딩이 쉽게 눈에 띄인다.

 

 

그러고 보면 서울 시내 끝에서 끝까지 한눈에 들어올만한 거리는 되는구나 싶다.

 

물론 날이 맑아야 하고, 이정도 높이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는 길. 옥상을 가리키는 친절한 화살표들이 사방에 붙어있었다.

 

 

올라가든 내려가든 화물엘레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워낙 고층 옥상의 풍압이 센지라 중간문을 닫지 않으면

 

엘레베이터가 출발을 못하고 휘청거린다는 위협적인 사실.

 

 

 

 

 

 

강남에 위치한 트레이드타워, 전체 54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은 강남에서 가장 높은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63빌딩 위에서 강북의 하늘을 지키는 방공포병들이 이곳에도 한동안 둥지를 틀고 서울 강남의 하늘을 지켰다는.

 

 

날이 좋아 옥상을 개방했던 오늘, 카메라를 들고 위에 올라가서 아래 풍경들을 담았다.

 

바른말 하시던 명진스님과 그를 핍박하던 정치인들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강남의 봉은사.

 

그리고 사각뿔 모양의 강남파이낸스센터, 그 옆에 살짝 가린 GS타워가 있는 역삼역 인근 풍경.

 

삼성역에서 역삼까지 유독 높은 빌딩들이 좌우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곳이 바로 강남의 테헤란로다.

 

전체 54층, 그러니까 옥상은 대충 55층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헬기장이 있는 옥상에 올라와서

 

종합운동장 쪽을 바라보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조금 흐렸던 하늘이 개고 있었다.

 

근처의 높은 건물 옥상의 헬기장이 슬몃 보이는 뒤로 삼성동 아이파크, 그리고 청담대교.

 

그리고 트레이드타워 옥상의 헬기장. 여기서 헬기가 뜨고 내린 적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건물 옥상 한 귀퉁이에 있던 삼각점. 아마도 토지 측량이라거나 평가를 위해서 쓰이는 기준점 아닌가

 

싶지만 정확하겐 모르겠고, 모처럼 228미터에 이르는 트레이드타워 옥상을 밟고 서니 바람이 참 시원하더라는.

 

 

온통 뿌옇고 희끄무레하기만 하던 무채색의 겨울 풍경에 샛노란 개나리빛이 하나 풀어헤쳐졌더니 그냥 봄이다.

 

 

 

서울숲과 바로 이어지는, 금호역 옆의 응봉역과 가까운, '응봉산'. 가끔 차를 몰고 다니다가 문득 눈에

 

띄었던 적은 있을지언정 서울 시내에 이런 이름의 산이 있는지도, 또 이 산이 봄철이면 샛노랗게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인지도 전혀 모른 채 서울살이 30년이 넘었다.

 

 

 

중간에 나타난 쉼터에서 잠시 앉아 쉬는 참, 등산객처럼 몸풀기 운동을 하시는 건지 아이들처럼 마주보며

 

장난을 치는 건지 헷갈리는 두 어르신을 향해 아주머니의 폰이 찰칵 소리를 냈다. 절로 웃음지어지는 풍경.

 

 

 

산이 그냥 노랗다. 아니, 이럴 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 48색 크레파스를 썼던 거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산이 그냥 개나리색 지천이다. 유독 춥고 길던 겨울이다 했는데 어느덧 개나리꽃에 뒤이어 파릇한

 

새잎까지 돋는 4월이 되었다.

 

 

 

온통 개나리꽃 덤불이 지천이었는지라 새하얀 목련 한 그루가 확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직 채

 

꽃망울도 여물지 않아서 가까스로 삐쭉삐쭉 꽃이파리를 내밀고 있는 정도지만 곧 도톰하고 풍만하게

 

물이 차오르면 시원하고 다복스런 꽃망울을 펑펑 잘도 터뜨려댈 거다. 아직 바람이야 좀 차다지만.

 

 

 

응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바로 오늘 2012년 4월 13일 14시~17시까지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이는 공간이기도 하다지만, 사실 이렇게 산 전체가 개나리색으로 출렁이고 있는대야

 

새삼 축제를 벌일 것이 또 무에 있겠는가. 금요일 오후라니, 딱 초등학생들을 위한 어린이 축제겠다.

 

 

그저 그 즈음이 개나리꽃 구경을 위한 최상의 타이밍이겠거니 참고삼으면 족하다. 축제 전전날, 그러니까

 

온통 전국이 시뻘개지던 4.11 총선날에도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서 줄 서서 돌아다녀야 할 정도였다.

 

 

팔각정 도착. 생각보다 너른 공간에는 이미 몇몇 아이들이 저..뭐라 그러더라, 저 그림판을 그려놓고 놀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던 참이었다. 어렸을 때 저거 진짜 많이 하고 놀았는데.

 

 

 

흐물흐물하니 멀찍이 보이는 남산N타워. 보듬어 주겠다는 듯 꽃무더기를 매달고 조심스레 들어올린 꽃가지.

 

아직까지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하기만 한 겨울나무들이 황량한 풍경 앞을 막아선 노란 담벼락.

 

 

 

산이란 게 으레 그렇듯 응봉산에 오르는 길도 꽤나 여러갈래다. 서울숲에서부터 길게 걸어오는 길도 있고,

 

아니면 응봉역이나 금호역에서부터 오는 길도 있고, 아니면 아예 응봉산 둔턱까지 차로 올라와 능청스레

 

슬몃 개나리꽃밭에 섞여드는 길도 있는 거다.

 

 

산에서 내려와 응봉역 쪽으로 걷는 길. 응봉산을 가득 채운 개나리빛 물감이 산비탈을 타고 줄줄 흐르더니

 

살짝 낡고 허름한 풍경에도 발랄하고 따스한 봄기운을 전한다.

 

 

 

 

이태원을 좋아라 하지만, 이쪽으로는 걸어 올라가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녹사평역에서 남산터널 방향으로,

 

그렇게 조금 걷다보면 나타나는 경리단 골목길. 그러고 보니 타코를 먹으러 한 번 왔다가는 영영 길을 잃은 그곳이구나.

 

함께 드로잉 수업을 듣는 동기이자, 부부가 함께 수업을 듣고 계신 잉꼬 한쌍 중 한 분이 나중에 가보라고 찍어주신 곳.

 

좁다란 시장통 골목을 슬쩍 가리고 선 화려하고 거친 파라솔, 그리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꽃망울들.

 

살짝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굵은 가지에서 뻗어나가는 잔가지처럼 좌우로 뻗은 골목길들.

 

비슷한 간격으로 놓인 차들이 쩜쩜쩜... 말줄임표를 만들며 오르막길을 버티고 서 있었고.

 

간헐적으로 쟁여진 계단들은 숨이 가쁠만 하면 쉬어가라며 여남은걸음의 평지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은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슬쩍 날렵한 태를 내비추는 남산S타워.

 

 

그러다가 불쑥, 건물이 이어지던 곳에 주차장이 휑하니 공터를 주장하고 나서자 뒷켠에 숨었던 타워가 덩달아 나섰다.

 

 

이태원의 상권도 여느 이름난 곳들, 신사동이니 삼청동이니 처럼 미어터지기 시작했는지 여기저기 공사중.

 

먼지 비산을 막는 차양을 커튼처럼 치고서 아저씨는 벽돌 등짐을 지려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실핏줄처럼 번져나가는 골목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골라잡고서 무작정 걸어가다보면 무슨 풍경이 나올지 설레는

 

그런 느낌, 상해의 오랜 골목통이나 카이로의 오랜 골목들에서 느끼던 그런 묘한 설레임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공영주차장에 고경일쌤과 함께 올라서는 순간 탁 트이던 풍경. 서울N타워가 바로 지척에서 내려보는 느낌.

 

 

 

납작 엎드린 건물 옥상에서 제법 매운 봄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던 빨래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일단 그림 하나를 후딱 그리고 나서, 타워를 바라보며 조금씩 각도를 옮기며 풍경을 보는 중. 꼬물꼬물한 건물들.

 

 

건물들이 야트마학 사선을 따라 조금씩 무릎을 낮추며 이지러지고 있는 풍경 자체의 운율감이 리드미컬하다.

 

 

 

비슷비슷한 풍경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느낌의 풍경들. 커다란 나무가 웅크린 산비탈 아래의 골목길 끝단에서부터.

 

어지럽게 비틀린 골목길을 따라 잔뜩 어그러진 골목 담벼락.

 

새삼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서, 혹은 재미있어서 이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 중에는 은근 실력자들도

 

많이 숨어 계신데, 이 분도 그런 실력자 중의 한 분. 앉아계신 분위기부터 벌써 다르다.

 

 

경리단길을 오르다보면, 그새 올라간 높이만큼 계단이 삼엄하게 사방으로 오르내린다. 내려와 살피면 옹이구멍만한 하늘.

 

그리고 어느결에 풍경과 하나가 되어버린, 자연스레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하고.

 

 

공영주차장에서 바라본 남산 서울N타워 주변으로 헤쳐모인 성냥갑 집들. 그 오밀조밀 바스락거릴 듯한 풍경과

 

여성전용 주차장 사이에 가로놓인 구멍송송 새하얀 담벼락이 왠지 유럽의 어느 나라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하루.

 

 

 


쁘띠프랑스 안에 츄러스도 팔고 커피도 파는 조그마한 까페, 잠시 앉아갈 수 있나 쭈뼛거렸더니 아주머니가 안으로

 

들어와서 쉬었다 가라며 이끌어주셨다. 생각보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창가엔 선인장이 촘촘하던 자리.

 

걸리적대는 선인장과 창문살을 타넘어 침투에 성공한 햇살이 테이블에 함뿍 스며들고는 바닥으로 따끈하게 흘러내렸다.

 

창밖으로 슬몃 보이는 보이는 건 쁘띠프랑스의 이국적인 건물 지붕선들이 모여 만든 운치있는 스카이라인.

 

다들 입구에 서서 차와 간식을 사서 쁘띠프랑스 안의 어딘가로 향하기 바빠보이는데 이렇게 안에서 느긋하게

 

자리잡고서 커피와 츄러스를 먹는 것도 일종의 '상대적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거 같다.

 

쁘띠프랑스 오가는 길, 커다란 청평호를 끼고 달리는 75번 국도, 호반로를 따르는 드라이브코스는 과장섞어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라고들 하던데. 커다란 청평댐이 그러쥐고 있는 북한강 물줄기가 잔뜩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청평호에서 피어오른 물안개 너머로 수묵담채화처럼 은은하게 그려진 산줄기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존재감이 확연하다.

 

 

선루프를 활짝 열고서 달리는 차를 따라 전선이 함께 달리고, 제법 두터운 구름과 숨바꼭질 중이던 햇살도 함께.

 

 

돌아오는 길 어느 보리밥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나물을 둘로 나눠 탈탈 털어넣고 된장에 슥슥 비벼먹은 밥 한 그릇.

서울 중심, 경복궁을 축으로 동서남북으로 자리한 동네에는 아주 심플한 이름이 붙어 있다. 궁에서 동쪽에는 동촌, 서쪽에는 서촌,

 

그런 식인 거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 퉁명스럽고 게으른 작명에는 일종의 특권의식, 우월감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중궁궐에 가장 근접한 동네, '일번지'를 누리는 셈일테니.

 

그래서 여기는 그 중 서촌, 경복궁의 서쪽에 붙어있는 동네다. 한가한 골목길에 깜빡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성기게

 

듬성듬성 기와지붕 한옥집을 꽂아둔 동네, 이렇게 볕이 좋은 날에 그 중 골목 하나를 골라잡아 자리를 깔고 앉았다.

 

참여연대 부설 아카데미인 '느티나무'에서 수강중인 '서울 드로잉' 수업 첫번째 날, 한옥집과 기와지붕을

 

그려보라는 게 세시간 남짓한 수업시간 중 한시간은 명도 실습, 삼십분은 구도 설명 등으로 날리고 남은 시간,

 

한시간정도를 채워야 하는 미션.

 

고경일 선생님이 몇군데 추천해준 포스트 중에는 '대오서점' 건물도 있었다. 이전에도 지나다가 굉장히

 

매력적인 건물이라 생각했었는데 미처 사진에 담아두지 못했던 곳, 청와대 근처라 온통 야트막한 건물들로

 

스카이라인이 내려앉은 이 곳에서도 특히 땅바닥에 달라붙은 기와지붕은 허물어져내리고 있었다.

 

이 각도로 그림을 그려볼까 잠시 망설이던 사이 같이 수업을 듣는 분들이 우르르 자리를 잡으셨다.

 

구도가 같다고 같은 그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다른 걸 찾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미련을 버리고.

 

그래도 아쉬우니 앞뒤로 좌우로 둘러보며 이 정감가는 건물을 뜯어보았다. 저 기묘한 폰트의 '대오서점' 간판은

 

언뜻 어설프고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인간미가 있는 거 같다. 적당히 허물어져가고 바래가는

 

기와지붕이니 건물의 외벽도 마찬가지.

 

또다른 추천 장소, 그냥 여느 동네의 골목길과 같았는데 문득 말끔한 기와지붕과 단정한 돌담문양 벽면이 서있었다.

 

하다못해 전선들조차 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근대화'된 골목길에 능청스레 살풋 처마끝을 쥐어올린 기와지붕.

 

그런 은근한 까불거림, 혹은 여유가 느껴지는 전통적인 기와지붕이란 건 눈으로 보거나 사진으로 찍을 땐 참 좋은데,

 

그걸 그림으로 담아낸다는 건 굉장히 머리가 아파지는 거다. 좀처럼 평면에 담아내기 쉽지 않은 그 입체감.

 

 

쁘띠 프랑스, Petite France 곳곳에서는 쁘띠 프린스, 어린 왕자의 자취를 찾을 수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작가 중 하나인

생떽쥐베리 재단의 공식 라이센스를 갖고  '쁘띠 프린스'를 초청해 '쁘띠 프랑스'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 것.


어린 왕자는 평소 자신의 조그마한 별 구석구석을 잘 관리해주었다던가. 별을 꺠뜨릴 수 있는 바오밥나무 씨앗을 솎아내고,

화산이 막혀서 폭발하지 않도록 잘 청소도 해주고. 장미꽃의 진딧물을 잡아내고 유리케이스를 씌워주기도 하고.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줬던 양 한마리. 병든 양, 염소같은 양, 뿔이 난 양 따위를 걸러내는 날카로운 선구안을

가진 어린 왕자가 맘에 들어했던 건 사실 상자 속에 들어있던 양이었는데. 그 상자는 여기에서 못 본 거 같다.

별들을 여행하던 어린 왕자가 만난 어른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고, 술에 취했으며, 쓸데없는 일을 벌여놓고는

스스로 만족하려 애쓰고 있거나 우울함에 빠져있곤 했다. 더이상 나와 전혀 관계없는 딴세상 이야기라 말할 수 없는 것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버는일? 밥먹는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건 정말 어려운거란다."


"안녕, 잘 있어" 어린왕자가 말했다.
"안녕, 잘가.... 참,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사막을 아름답게 하는 건, 사막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어서에요..."
"맞아.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
"아저씨가 내 여우와 의견이 같아서 기뻐요."



"널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우선 넌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있는 거야.
곁눈질로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은 오해의 씨앗이거든.
그러면서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내게 가까이 앉으면 돼."

"..."
"..."

"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되면 이미 나는 불안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나는 해 지는 풍경이 좋아.
우리 해지는 구경하러 가..."
"그렇지만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
"해가 지길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지금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가시고 나면(슬픔은 가시는 거니까)
넌 언제까지나 내 동무로 있을거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 질꺼야."

"사막은 아름다와.
사막이 아름다운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그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게 웃고 있는 듯이 보일거야."

"누구나 다 친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잊는다면 나도 숫자 밖에는 흥미가 없는 어른들과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그렇게 되면 황금빛이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밀밭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별이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꽃이 있기 때문이에요.
꽃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정성을 들인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네가 나를 기르고 길들이면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돼.
넌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난 너에게 둘도없는 친구가 될테니까."

"누가 수천,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

자그마한 종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저 버섯같이 생긴 녀석이 '바오밥나무'를 표현하려 했단 건 나중에 알았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촛불집회 때, G20 때, 그리고 각종 크고 작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지금은 핵안보정상회의장 주변을 그의 차벽이 감쌌다.

평소라면 현대백화점 근방을 들고 나는 차들로 붐비고 있을 코엑스 인근 6차선도로가 한개 차선만 남기고 모두 비었다.

우리 나라 국격을 높이려면 이 공간은 '핵무기'와 '강대국만의 밀실 국제정치'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배치되었어야 했다.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노력. 정확하게는, '핵 독점'에 근거한 강대국 중심의 세계질서 유지.

지방에서까지 수만명이 동원되었다는 짭새들. 안쓰럽기도 하지만, 존재만으로도 위압적이고 명령조인 그들은 불편하다.

웃는 얼굴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포도리 나부랭이 인형이라도 출동시켰다면 조금 나았으려나.

횡단보도 신호등이고 교통신호 시스템은 모조리 무용지물, 파란불로 깜빡이며 보행자를 인도하는 신호등이 무색하다.

G20때처럼 블럭 전체를 차벽으로 감싸고는 몇개 되지도 않는 출입문을 만들고. 금속탐지기와 엑스레이 탐색기를

지나도록 하는 경호처와 경찰 인력들. '완장'질에 대한 무조건반사적인 혐오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떽떽거리는 건 팩트.

대체 이런 회의가 한국에 도움이 되는 건 뭘까. G20때처럼 측정도 불가능한 국가브랜드 제고효과니 뭐니, 그딴 거

말고 당장 이 동네에서 출퇴근하거나 먹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율의 허울을 쓴 차량이부제 나부랭이의 부작용을

따져보란 말이다. 삼성역에 전철이 서지도 않고 버스도 내리지 않으며 셔틀버스 따위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고,

코엑스몰이니 인근 음식점은 대부분 문을 닫아 밥한끼 챙겨먹기도 힘든데 '니가 누구냐'며 '가방엔 뭐냐'며

으르렁거리는 짭새들을 참아내주는 사람들의 피해 말이다.

소방차에 닭장차에, 이중 차벽으로 둘러쳐진 코엑스 인근을 다시금 한겹 커다란 차들이 둘러싸고 있다.

M본부니 K본부니 S본부 이외에도 온갖 종편 방송국들 차량까지 차곡차곡 주차되어 있다.


짭새들이 고생하는 걸 모르는 바 아니나, 민생에나 좀더 신경쓰는 게 어떨꼬. 이를 두고 개고생 혹은 MB시대의

아이콘이 된 노가다 도구의 이름을 빌어 '삽질'이라 한다.





차벽을 따라 걸으며 출근을 위한 개구멍을 찾다가...'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따위는 차벽과 경찰떼라는 넘사벽

뒤에서나 존재하는 건가 싶어서 문득 아이러니하더라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논의를 저런 철저한

보안과 경호시스템 속에 처박혀 한다는 건 아무래도 웃긴다. 저 안에 들어가 이야기하는 지들은 무슨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악당들인가.

이딴 쓰잘데기없는 국제행사, 그것도 핵무기 쥐고 흔들어대겠다는 국제 깡패 나부랭이를 계속 끌고 들어오는 MB도

참 자기 성과에 금칠해대느라 고생이다. 고리원전의 위험천만한 인재사고라거나 원자력르네상스라는 허울로 후쿠시마의

교훈을 못본체 하는 꼬라지라거나 합해 생각해보면 참, 목불인견이다.









가평에 있는 쁘띠프랑스, Petite France. '조그만, 작은, 이쁜' 프랑스라는 의미일 텐데 워낙 잘 알려져 있는 곳이고,

사진으로도 많이 담긴 이쁜 곳이니만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니 이미 차들이 그득그득, 인도해 주는대로 길가에 차를 대고 매표소입구로. 아직 바람이 차갑다.

입구를 지나면 나타나는 이국적인 풍경. 파스텔톤의 벽면이나 따뜻한 색감의 기와들, 다양한 표정의 실루엣들이다.

자그마한 분수 광장을 둘러싼 노란 파라솔들, 그리고 다시 파라솔들을 에워싼 색색의 건물들. 그치만 위압적이진 않은.


빨간 제라늄꽃이 창틀에 놓인 건물 사이로 마을의 다른 건물 지붕들이 내려다 보인다.

겨우내 추위와 찬바람에 시달렸을 것들이 이른 봄볕을 찹찹찹 게걸스레 핥고 있다.

제법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인 계단들, 산토리니의 새하얀 계단형 건물들을 살짝 떠올리게 만드는.


아직은 누렇게 말라죽은 채인 풀밭이지만 조금만 더 날씨가 풀리고 따뜻해지면 꽃과 잔디가 융단처럼 깔릴 꽃밭.

갤러리 앞에는 벼룩시장이 열렸다. 도자기 인형들이나 접시가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노랑 우체통.

양철 주전자들이 띄엄띄엄 바닥에 늘어서 있는 폼이 불규칙하면서도 제법 느낌있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마리오네트 인형. 얼굴표정이나 옷감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굉장히 섬세하다. 툭 튀어나온 앞니까지.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왜 이렇게 전부 인상적인 표정과 기괴한 외양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을 높이 맞추고 있다가 문득 바닥으로 내렸더니 왠 화관을 쓴 처자가 비둘기를 한마리 건네주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고 길다. 그 공간을 온통 꽉꽉 채운 프랑스 느낌 가득한 소품들과 장식품들.

프랑스를 상징하는 새, 프랑스의 국조는 수탉이란 걸 갤러리에서 새삼 실감했다. 온통 수탉을 형상화한 장식품들.




근데 한국의 나라새, 한국의 국조는 뭐더라. 까치였던가 싶긴 한데 확신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역시 '까치'가 맞단다.

갤러리를 나와 조그마한 프랑스 마을 같은 쁘띠프랑스 내부를 걷는데 딱 나타난 사진찍기 좋은 곳.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를 나란히 내려놓고 카메라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쁘띠프랑스의 전경, 그리고 청평호수까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오르내리는 계단이 워낙 좁단 게 에러지만.

이렇게 쁘띠 프랑스의 색색 빛깔의 이쁜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거나,

청평댐이 버티고 막아서서 바다처럼 넓은 청평호수와 어른거리는 산그림자까지도 보이는 전망이니 올라갈 만 하다.


야생화 산책길을 지나 '사랑의 종탑'으로. 어린 왕자의 스토리에서 '사랑'과 관련한 경구들은 무수히 뽑아낼 수 있겠지만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을 오르며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르고는 비로소 종에 다다른다. 대앵~ 대앵~

3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는 유럽동화 인형극축제, 평소에 하던 샹송공연이니 마임쇼에 더해서 인형극도

열리고 목각인형 콘서트 같은 것도 열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후가 무르익을수록 점점 늘어나는 꼬마손님들.

안내 포스터에 나왔던 그 여자분이 그대로 나와서 샹송을 부르는 공연. 조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저씨들이

문득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더니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만 하는 수준의 샹송 가수를 받침해주던 악기는 기타, 그리고

약 백오십년 전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전통악기, 그리고 아코디언 한대.

따님의 초등학교 시절 아코디언을 들고 와 연주하시던 이 분이 활을 이용해서 켜는 방식의 프랑스 악기, 무려

한국에 한대밖에 없다는 이 악기도 연주하셨다. 건반이 감겨있는 모자라거나 어깨의 금색술이 인상적인 분.

 

쁘띠프랑스가 워낙 잘 알려진 명소가 된 데에는 장소 자체가 워낙 이쁘게 잘 꾸며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몇몇

방송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얻은 것 같기도 하다. 베토벤바이러스라거나 시크릿가든, 러닝맨까지.

특히 '베토벤 바이러스'의 경우는 메인촬영지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서 전출연자들이 사인도 남겨놓고 세트장의

배치도 고스란히 간직해두었다고 한다. 뭐, '베토벤바이러스'던 '시크릿가든'이던 드라마를 안 봤으니 별 감흥은 없지만.



그 옆에 바로 인접해 있는 건물은 '프랑스 전통주택관'. 근 이백년 가까이 된 프랑스의 고택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전시관이라고 하는데, 주름살처럼 깊이 골이 패인 기둥 하나만 봐도 이 집의 범상치않은 연륜이 느껴진다.

천사가 호롱불을 들고 날아다니는 천장에는 슬쩍 단발 비행기도 날아다니고 있지만 현란한 접시장식들로 숨겨졌다.

이것도 한 이백년쯤 되었으려나, 애기들이 타고 놀았을 목말이랄까, 세발자전거랄까.

집 한채를 통째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런 전등갓처럼 세세하고 고풍스런 장식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백년전 프랑스의 저택에 살던 사람은 이런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겠구나. 세련된 색감이나 문양이 참.

화장실의 전경. 앞에서부터 세면대, 변기, 그리고 욕조 하나. 끝.

그런데 이 변기는 남성 전용인 걸까 아니면 남성 소변 전용인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다 저기서 해결?

인형극장 앞에 있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기념사진 촬영용 판넬. 선그라스를 멋지게 낀 애기가 백설공주의

얼굴을 훔치고는 활짝 웃고 있었다.

프랑스나 유럽의 인형극을 부정기적으로 여는 극장이라고 하는데, 'Guignol', 기뇰이란 건 프랑스 전통의

손 인형극을 말하는 거라고 한다. 4-50석 되어보이는 자리가 꽉 차서는 빨간망토 소녀 인형극을 관람.

15분쯤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에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간단한 구조와 심플한 등장인물들까지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은 내용과 분량인 듯. 감탄할 만큼 현란한 손놀림이나 부드러운 움직임도 관람 포인트.


처음에 한바퀴 돌아보면서는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볼 것들도

많고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들이며 걷게 되었지만, 각도마다 달라지는 풍경도 한 재미.




돌아나오는 길. 샹송 공연에 인형극 공연까지 챙겨보느라 한 세네시간 정도 걸린 듯 하다. 그렇지만 까페에 들어가

커피랑 츄러스도 맛보고, 중간중간 앉아서 쉬기도 했으니 완전 널럴한 페이스였단 걸 감안하면, 작긴 작구나.ㅎ


쁘띠프랑스에서 체크아웃. 조금만 더 날이 따스해지고 야생화니 잔디가 불긋푸릇해지면 더욱 이쁜 풍경이지 않을까.




 

몇달전인가, 어느 시사잡지에서 '통인시장'의 상인분들이 미대생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각자의 상점을 나름대로

이쁘게 꾸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는 생선의 테마로 한 참신한 간판이나 장식들이 내걸렸고

옷가게는 옷을 가지고 꾸며서 사람들의 이목과 발길을 붙잡는다는 컨셉이었던 던 거 같은데, 직접 가서 보니

정말 시선을 확 붙잡을 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여전히 깔끔하게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여기 속옷집이 있다, 비와이X'. 가게 앞에 속옷만 입은 사람 형상의 판넬이 둥둥 공중부양중이다.

건어물가게, 주렁주렁 엮인 명태가 매달려 있는 옆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오징어가 매달려 있다.

'반찬과 함께 사라지다', 오래된 영화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간판과 함께 LP판을 활용한 메뉴판.

두부와 콩나물국과 만두, 새하얀 천과 금박이 입혀진 빨간 천이 번갈아 널린 장식이 제법 단정한 분위기.

어느 생선가게, 겨울이라 조금 춥게도 보이지만 생선들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바다수영의 포스.


미용실 앞에 있는...음...용도불명의, 그렇지만 스케일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딱 미용실을 나타내는 (아마도) 간판.

과일들이 으레 그렇듯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진열된 것 뿐 아니라, 가게 위쪽에도 맛나보이는 과일들이 그득하다.

어느 분식점, 과자 포장지를 활용해서 찢어붙이기를 한 듯, 곰인형 한마리가 둥둥 떠있다.

어느 고깃집 유리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댕기머리 총각. 티비를 훔쳐보는 건가 싶은 재미있는 풍경.

생선가게 앞에 '천하대장군'처럼 우뚝 선 물고기 한마리. 심심하게 서 있던 기둥에 표정이 생겼다.

그리고 심심찮게 보이는 SINCE 천구백몇년, 생각보다 연륜이 오랜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50년이 넘은 떡집도 있고.

자하문길로부터 들어가는 통인시장 입구. 쭉 한길로 이어지는 심플한 시장통이 필운대길쪽까지 뻗어있다.


전통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한번 가서 오뎅 하나 집어먹고 뻥튀기 하나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시장을 정비하고 꾸미고, 이야기를 얹는 등 다양한 노력이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렇게 고객만족센터도 만들고, 통인시장에서 파는 반찬거리나 부식재료로 만든 도시락 까페도 만들어 운영하고,

통인시장은 나름 재래시장으로 살아남고 부흥하기 위한 서비스 마인드와 아이디어가 통통 튀고 있었다.

일회용 우의를 판다는데 포즈는 왜 저리도 시크한지. 우산을 슬쩍 쥐고 있는 두 손가락이나 푹 눌러쓴 모자도 완전 시크하다.

김치마을, 가게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게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통인시장, 통인마을이랄까.

심지어 상점에도 이렇게 손이 많이 들었을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 맛소금이니 밀가루니 따위의

포장재를 하트모양으로 잘라서 달아놓으니 뭔가 가게에서부터 하트가 뿅뿅 날아올라가는 분위기.

분식 집 앞에서 방긋 웃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김밥 내외.

전집 간판에 달라붙어 놀고 있는 몇몇 살찐 졸라맨 버전의 아이들은 '전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발이 전시된 모양 그대로 이미 이쁘단 느낌을 자아내는 신발가게의 간판은 화려한 색감을 더했다.

식당의 메뉴가 그림과 글씨가 묘하게 뒤섞인 캘리그라피로 문짝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떡집의 '떡'자는 화려한 꽃그림으로 치장이 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어느 만두집 간판 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감긴 레이스를 잡아 떼어서 돌돌 뭉쳐만든 듯한 고양이가 한마리.

과일가게의 하얀 벽면에는 제법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과일나무가 한 그루.

무와 배추와 양파를 파는 가게에는 허공에 무가 매달려 있는가 하면 가스통은 꽃무늬 옷을 입은 배추아줌마로 변신했다.

옷 수선점의 간판은, 크고 작은 각종 모양의 실패를 이어달아서 커튼처럼 드리웠다.


필운대길쪽으로 빠지는 통인시장의 입구. 천장이 유리 지붕으로 덮여있는 아케이드 형태인지라 날씨가 궂거나 춥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살짝 들어가서 둘러보기 좋은 재래시장이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는 통인시장.




대학로, 처음 문 연 날 가보고는 두번째로 찾아간 까페. 방송대 옆에 있는 고색창연한 낡은 건물 '예술가의 집' 안에

있는 슬로우가든이다.

천장이 높아 소리가 웅얼웅얼 울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은은한 조명이 샹들리에 크리스탈에 마구 반사되어 한결

부드럽고 화려해졌고, 그리고 테이블 간격이 널찍널찍해서 다른 사람에 방해받지 않고.

브런치세트가 오후 세시까지. 와플세트랑 토스트세트가 있던가. 하나씩 시켰는데 샐러드 드레싱도 맛있고 양도 솔찮던.

프렌치토스트는 포실포실하니 촉촉했고, 벨기안와플은 보들보들하니 부드러웠고. 탱글탱글한 소세지를 뱀처럼

빈틈없이 휘감고 있던 도톰하고 쫀득거리던 베이컨까지.

연극을 보고 나서 돌아가는 길, '예술가의 집'로부터 새어나오는 노랑색 불빛.

알고 보니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슬로우가든' 지점이 존재하는 체인이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삼청동에도

체인점을 냈나보다. 체인점이 번지는 속도도 슬로우슬로우.





속초에서 꼭 돌아봐야 할 곳은 속초관광중앙시장이란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원래 여행을 다닐 때 시장구경하길

좋아하기도 하지만, 수수부꾸미니 닭강정이니 오징어순대니, 항구쪽보다 싼 횟집들까지 먹거리도 많고 이것저것

구경할 것도 많았던 곳이다. (그리고 갯배랑 바로 이어지는 동선이라거나 속초시내 중심에 있다는 점도 좋다)

갯배에서 내려서 조금만 걷다보면 바로 만나는 이 커다란 황금색 황소. 뉴욕 월스트리트가에 있는 황소는

Bull's Market, 호황을 바라는 증권맨들의 마음을 담은 거라면, 이 녀석은 소를 닮은 지형의 속초가 번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속초인들의 마음이 담긴 걸까.

사실 시장이란 게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곳이기도 하고 그자체로 여행의 메타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건 딱히

정해져있는 입구와 출구도 없고, 루트도 없고. 발 닿는 대로 걸으면서 둘러보면 되는 거고, 그러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야지, 라거나 사야지, 라고 맘먹었던 샵이나 위치는 대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어지는 묘한 마력이 있다는.

그리고 시장에선 애써 꾸며지거나 포장되지 않은 모습들이 드러난다는 점도 참 맘에 든다. 이렇게 빛바랜 만국기가

잔뜩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하늘을 가르고 있다는 점도 왠지 맘에 들지만, 저런 '미용휴게실'이니 다방이니 하는

촌스런 간판들이 늘어서 있다는 점도 그렇다.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시장에서 눈에 띈 사람들 중 열에 여덟은 손에 들고 다니는 거 같던 '만석닭강정'.

줄이 어찌나 길던지 뱅글뱅글 용트림을 하고도 한참 늘어서 있어서 좀체 줄을 설 엄두는 못 내고, 맞은편의 맛난

수수 부꾸미와 찹쌀 부꾸미를 파시던 분께 부꾸미를 사며 슬쩍 물어봤더니 그 옆의 '속초닭강정'도 추천해주시더라는. 


먹어본 사람들의 말도 분분하던데, 맛이 거기서 거기다, 라는 말도 있고 아무래도 만석닭강정이 짱이다, 라는 말도.

모르겠지만 가격대는 대략 이렇게 비슷한 거 같고, 아무래도 방송과 입소문의 힘, 그리고 무엇보다 줄이 저렇게

늘어서 있단 건 그 자체로 저 꼬리에 붙어서야 할 거 같은 굉장한 압박감을 주는 거다. 시장입구의 호떡집도 그렇고.

여하간 속초닭강정, '매운맛/보통맛/순한맛'으로 나뉘는 삼단계 양념소스 중에서 보통맛도 조금 매콤하다고 하여

보통맛을 골라 순살닭강정을 맛보는데 오오..따뜻해도 맛있고 식어도 맛있고 배고파도 맛있고 배불러도 맛있고.

시장 안에는 이렇게 천장이 막혀 있어서 바깥 날씨에 상관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도 있고, 여느 재래시장처럼

천장이 없는 대신 파라솔들이 촘촘이 늘어서서 자연스레 하늘을 막고 있는 구역도 있고.

아바이순대타운, 닭전, 어물전, 의류, 그리고 중간중간에 박혀 있는 호떡집이라거나 국화빵집이라거나. 제법 너른 공간에

끼리끼리 뭉쳐있는 상인들의 난전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가 또 줄이 늘어선 호떡 겸 붕어빵 집을 보면 슬쩍 줄을 이어서서 하나씩 맛보기도 하고.

지하에 있는 수산센터, 노르웨이에서 온 냉동 고등어들이 빳빳하게 몸을 비튼 채 박스의 형체를 간직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다듬는 생선은 광어 한마리와 우럭 한마리. 그렇게 간식거리들을 맛보고도 어쨌든 저녁은 먹어야겠다며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먹자는 단순한 소망을 끝내 이루고 말았다.





속초 영금정 앞 겨울바다. 짝다리를 짚고 선 어린 커플 한 쌍이 바다에 찰싹 가까이 붙어서서는 방파제의 끝,

빨간 등대가 침핀처럼 박혀있는 저 너머를 함께 바라보고 섰다.

영금정에서 조금 나아가면 바닷가 끝으로 불쑥 돌출한 파란 지붕의 정자가 있는데, 그 곳까지 이어지는 길은

울렁이는 나무 발판을 가진 현수교 스타일의 짧막한 다리처럼 놓였다.

뭔가 원목을 사용했다거나 단청을 담백하게 올린 맛보다는 거칠고 짠 바닷바람에도 굴하지 않도록 시멘트를 발라

만든 정자, 그래도 나름 한번 그 팔각지붕 아래에서 바다쪽이나 영금정 쪽을 바라볼 만 하다.


영금정에 바싹 인접한 항구는 동명항, 국제여객터미널을 너머 보이는 건 속초항. 배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멀찍이 눈안개에 가리어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하얀 눈덮인 산은 설악산 자락이 아니려나 싶은데, 모르겠다.

영금정 앞에 즐비한 횟집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던 건 찬란한 다홍빛으로 빛나는 대게들. 다른 녀석들을 꾹꾹

즈려밟으며 자기 혼자 당당하게 포즈를 잡고 선 저 녀석은 장군감.


그리고 속초 8경 중의 하나라는 속초등대전망대. 표지판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갈색 관광지 표지판에 있는

언어가 한글, 한자, 영어 이외에도 러시아어가 보여서.

등대보다도 등대 아래에 있는 매점이 눈에 꽂혔다. 어렸을 적 수학여행 다니면서 보았던 저 후지필름 광고가 그려진

허름한 간판에 궁서체로 붓글씨된 커피, 생수, 라면 따위 메뉴들이 자아내는 운치라니.

그리고 속초관광중앙시장까지 걸어가는 길,한산하고 소박한 거리를 걷다가 문득 마주했던 기발하고 참신한

담벼락 풍경. 삶의 농담 같달까, 폐냉장고를 커다란 벽돌처럼 쌓아서 담길을 따라 쌓아둔 모습은 웃음이 난다.



 

할복(割腹)

1. 배를 가름.

2. <수산> 물고기를 가공 처리하거나 보관하기 위해 그 배를 땀. 또는 그런 일.

*연관단어 : 북한어 "밸따기"



그래서 '할복 아줌마 구함'이라는 이 첫눈에 섬찟한, 마치 배를 찢고 자살이라도 할 사람을 찾는 것 같은 현수막은 알고 보면

'물고기 가공 처리/보관을 위해 배를 따는 일을 할 아줌마 구함'이란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속초시의 건조한 인간들을 모아놓은 건조인협회 안내판 아래에는 또다른 단어, '활복'이 있다.

활복(活복). 살아있는 생선 복어를 이르는 말. 표준어라거나 정식 어휘로 등재되어 있지는 않은 거 같은데

어쨌든 '활복'으로 검색하면 활복 지리, 활복 전문점, 활복 요리..따위, 복어와 관련된 음식이 주르륵.





 


속초의 갯배. 온전히 사람의 팔힘으로, 아니 온몸의 힘을 실어 잡아당기는 쇠줄을 따라 꾸역꾸역 움직이는 사각형 배.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초호를 끼고 갯배선착장까지 걷는 길. 호수라고는 하지만 속초항 앞을 지나 바다로

나갈 수 있어서인지 가장자리를 따라 고깃배들이 일렬주차중.

서울역 광장에서 종종걸음치며 날개를 퇴화시키는데 힘쓰는 비둘기떼들마냥, 속초에선 갈매기들이 그런다.

청호대교 위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는 길. 빗발이 듬성듬성 내리는, 그렇다고 우산쓰기는 애매한 날씨.

대교의 고갯마루쯤에 오르면 바깥으로 툭툭 튀어나온 전망대 비스무레한 곳이 있다. 고개를 슬쩍 빼면 저만치 갯배가 떠다닌다.


다리 아래 아스팔트 바닥에서 생선 대가리를 토막치는 분도 보이고, 바싹 뭍에 붙여놓은 조각배도 보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크게 보이는 갯배. 배라기엔 참 투박하고 모양새가 없어서, 그냥 커다란 네모 부표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산책하는 속도랄까, 그래도 한걸음씩 단단히 힘주어 밟아가듯 확실히 전방진행중인 갯배들.


다리 아래, 생각지도 못한 곳에 이런 화사한 그림이 숨어있었다. 하트가 샤방샤방하게 날리는 복어커플.

이런 플래카드는 좀 없어도 좋을 거 같은데. 하긴 이런 방송의 힘이 없었다면 찾아오기도 쉽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용요금은 성인 200원, 아이 200원, 자전거 200원, 손수레 200원. 갈 때 200원, 올 때 200원.


자전거 두 대가 왜 저렇게 묶여있나 했더니, 가을동화에서 그들이 탔던 자전거라고 한다. 그보다 더 흥미롭고 시선을

잡아당겼던 건 저 오징어 모양의 장승. 속초 시내 곳곳에 세워두면 나름 명물이 될 거 같은데.

갯배로 건너가는 구간은 굉장히 짧아서, 설설 걸어가는 속도의 갯배라곤 하지만 채 2-3분도 안 걸리는 거 같다.

그래도 이렇게 갈매기가 마구 날아다니는 엄연한 바다 위를 저렇게 간단한 뱃조각에 기대어, 아저씨가 끌어주는

쇠줄에만 의지해서 건넌다는 건 꽤나 독특한 체험이다. 속초의 이곳, 갯배선착장을 지나면서야 경험해볼 수 있는.

뱃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저렇게 쇠줄을 바투 땡겨잡고는 배가 흔들리거나 풀려나지 않도록 고정하고 계신 아저씨.

 

속초시내에서 걸어다님직한 거리 내에 있는 볼거리들. 야트막한 스카이라인, 허름하고 한산한 거리는 걷기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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