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쪽으로 차를 몰고 놀러가다 보면 늘 지나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던 구비구비 꺽여도는 철제 계단길,

이번엔 놓치지 않고 한번 올라가 보겠노라고 작정하고 나섰다. 정확하게는 한강진역 앞에서부터 하얏트호텔 앞의

소월길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라는 게 맞겠다.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꾸며진 길을 오르기 전 사진 한장.

제법 경사가 가파르다. 그래도 그리 높지 않은 나무 계단이 차근차근 놓여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있으니, 몇걸음

걸어오르다 뒤를 올라다 보면 어느새 이만큼 올라왔나 하고 놀라게 된다.

산책길 초반에는 무슨 건물인지 양철 굴뚝에서 하얀 김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겨울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저렇게 풍성하고 소담하게 피워올려지는 입김이나 수증기같은 것들이 있어서다. 그다지 애쓰지 않고도 입에서

폴폴 하얀 입김을 내뿜을 수 있으니, 몇번만 해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본격 산책로 진입. 양쪽으로 놓인 풍경도 거슬림없이 나무들이 무성하다. 봄이나 가을에 걸으면 괜찮겠다 싶은.

저만치 남산 서울타워도 보이고. 앞에선 온통 까만 옷의 앞뒤로 박수치느라 바쁘신 아주머니가 한분 다가오셨다.

이건 S자도 아니고, S자에 더해 한번 더 휘였다. 나무들이 벼락처럼 땅에 내리꽂혀 있었고, 다소 기우뚱한

느낌으로 구비구비 버혀진 산책로에서 수평수직 감각을 지탱할 만큼 믿음직하게 서 있는 가로등 하나.

산책로는 대략 1km쯤 되나 싶은데, 한강진역 앞에서 시작해서 하야트호텔 앞에서 끝나서 남산 소월길과 만나버렸다.

지날 때마다 저긴 어떻게 건널 수 있는 걸까 궁금해지던 그 육교랄까 다리가 바로 코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다시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는 길,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으니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는 것도 재밌다.

오던 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뒷통수 너머의 풍경이라거나, 정반대의 각도에서 흘러들어갈 수 있는 샛길이라거나

놓쳤던 풍경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테니스장 바싹 마른 그물에 낚여있던 볼링핀 시계.


살짝 내리막이 진 경사로를 내려오면서 줄곧 따라오던 한남동의 전경. 어느 건물들엔 연말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눈꽃 장식들이 건물 외관에 장식되어 있기도 하고, 멀찍이 교회인지 성당의 십자가가 보이기도 하고.

하얏트에서는 이태원 모스크의 꼭대기도 보였었는데 여기선 잘 안 보인다. 대신에 뚝뚝 끄트머리가 잘려나간 채

몇개의 앙상한 선으로 남은 나뭇가지가 시선을 가렸다.


어딘가 커다란 크레인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한남동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기도 했다. 가파르게 고개를

곧추세운 크레인 아래로 바싹 엎드린 이태원 근방의 건물들이 납짝해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내릴 듯한

하늘이다 싶더니, 툭툭 옷소매를 건드리며 진눈깨비가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바삭하게 말라붙은 덩굴손이 가까스로 시멘트벽을 움켜쥐고 있는 거나, 철근을 미처 다 감싸안지 못한 채 울퉁불퉁

거칠고 거뭇거뭇한 시멘트벽이나 뭔가 통하는 느낌. 을씨년스럽고 차가운.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그리고 이태원으로 진입. 오랜만에 날이 풀렸다 싶어서 타고 갔던 오토바이를 까페 앞에 세워두고 흐뭇한 뒷태를 

감상. 이제는 정말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봉인해둬야겠구나, 싶어서 뿌리는 녹방지제는 어디서 사나 생각도 하고.

그렇게, 올해 마지막 휴가 하루.

따뜻한 기억이 서린 까페, 바로 옆에 있는 듯 느껴지는 그녀, 스미르노프 아이스, 비그포르스, 가벼운 단렌즈의 카메라,

창밖의 진눈깨비, 좋은 노래, 그리고 후희(post-play)같은 오토바이의 여운까지.






주말을 보내고 나니, 성질급한 시계가 벌써 월요일을 알렸다.

더이상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되어버린 월요일.

흥, 시계 따위가 째깍거리며 아무리 나를 재우쳐댄다 할지라도

나는 일요일과 마지막 후희를 즐기겠어, 라며 조그만 와인을 두 병 마셔버렸다.

주말과의 만남은 늘 금욜밤의 전희, 일욜밤(혹은 월욜 새벽)의 후희로.


상큼한 화이트와인, 칠링은 되어있진 않았지만

좀처럼 꾸물대는 인상을 펼 줄 모르는 춘래불사춘의 봄날이 곱게 싸쥐고 있던 병이라 나쁘지 않았다.

오늘의 네이트 대화명은 Green Thumb for Spring. 꽃구경 가고 싶은 월요일.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다. 더이상 고수부지나 집근처 공원같은 공간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무한도전, 혹은

J-Channel같은 프로그램을 달린다. 촛농처럼 땀이 흐르고 난 조금씩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린다.(고 상상한다.)

한시간반쯤 뛰면 머리가 멍해지는데, 그러고 나서야 쇳덩이 좀 들고 기구 좀 사용해 준다. 다른 부위는 모두

구속한 채 특정 부위만을 해방시키는 기구에 몸을 묶은 채 느슨해진 근육들에 긴장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새

두시간이 훌쩍 넘어있다. 꼬챙이에 꼽힌 채 커다란 칼로 살살살 벗겨내지는 케밥용 고기처럼 그렇게 내

껍데기에서는 지방이 벗겨지고, 안쪽에서부턴 왜소하게 박혀있던 근육들이 둔중한 부피감을 과시하며 차츰

밀려나와 안팎으로 꿈틀대는 중이다.(라고 상상한다.) 무리하고 있다. 왼쪽발목이 삐그덕대기 시작해서, 낼부터는
뛰지 말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걷고 있다. 강남구청역 바로 옆에 있는 영어 학원에 가려면 한시간반씩 걸리며 두번이나

환승해야 하는데다가, 층을 오르내리며 수업을 들어야 한다. 매일 9시부터 3시까지 있는 수업 역시 녹록치만은

않아서 오전중에 벌써 개풀처럼 지쳐버린다. 어쨌건 덕분에 끈떨어진 졸업생치곤 아주아주 근면성실하게 살고

있는 것같은 포만감은 들지만, 사실은 이게 다다. 헛배만 불렀다.



정몽구는 동아일보 인턴할 때 공판을 지켜봤었고, (인터뷰라기엔 살짝 머한) 짧막한 대화도 살풋 나눴었다. 그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보면서, 얼마나 유리처럼 취약한 세계관에 기대어 우리가 살고 있는지..한심스럽고도

가련했다. '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을 하기 꺼려졌다'는 대목. 재판관은

법의 정신에 따라 판결만 하면 된다지만, 법조목에만 능한 그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소양은 기껏해야 신문에서

줏어본 '상식'이다. 마치 외교과 교수들이 '국익'을 논하면서, 그저 경제학원론 수준의 경제적 이론-규모의 경제,

자유무역의 이익-을 전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과 같다. 전부다 기능인들 뿐이다.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를 빌려온 채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양념을 뿌려 판.단.한다.

혐오스러운 기능인들. 최소한 자신이 기능인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자기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나이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거다. 물론 그가 판결을 내리려면, 국제정치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식의 거친 '상식의 개입'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사실은, 모든 종류의 세상살아가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최근의 소설이 전부다 일인칭의

자기분석적 서술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지만,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구태여 타인의

시각을 전지적으로 개재시킬 필요도, 능력도 없다는 포스트모던한 자각에서 비롯한 걸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을

해석하고 감정을 헤아리는데 있어서의 기능인. 자신의 감정에 투영시켜 상대를 보고, 자신과 같은 상대의 감정을

기대하는. 내가 갖는 느낌은 기껏해야 내 신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 그나마 운전을 할 때라거나 검도를 할 때. 내 존재가 차의 보디를 따라 연장/확장되는 느낌이 들면서, 바퀴가

돌을 밟으면 내 다리에 밟힌 것처럼, 엔진이 쿨럭이면 내 심장이 잠시 버거운 것처럼 감각한다. 검을 따라 내 팔이
늘어난 것 같은 감각 역시. 그치만 이것들은 도구화된 무생물일 뿐이다...



촛농처럼 땀을 흘리면서 징징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무한도전보며 웃다가 자빠질 뻔 하기도 하는 녀석이

무슨 감정을 품고 살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알기 힘든 판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상식대로, 혹은 내가 바라는 '상식'대로 굴러간다고 믿는 게..편하다. 자기편의적인 효용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만 안 주면야, 내 편한대로 '상식'을 초혼하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후희(post-play), 혹은 금단 현상(withdrawal syndrome).

감정이 달리는데 있어서 전희(fore-play)라는 게 갖는 비중만큼이나 후희라는 것도 중요하다면..오케이.

여전히 남은 온기와 따뜻함의 여운을 쓰디쓰게 되씹는게 충실한 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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