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빠진 신호등이 파랗게 빛나는 걸 보고는 어딘가로부터 훌쩍 시야 안으로 날아들던 비둘기 한마리.

 

온통 빨간 불이 삼엄하게 들어온 차도 위 육교를 건너며 짐짓 시크하게 담배를 꺼내무는 아저씨.

 

그리고 온통 쾌청한 파란 하늘, 드문드문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흰구름따라 게으르게 깜빡이는 신호등 하나.

 

 


@ 도쿄.



타이완 도로에는 유난히 스쿠터들이 많다. 평소엔 버스니 승용차니 차선을 오롯이 차지한 차들과 다름없이 씽씽

잘만 달리다가, 일단 어디에고 신호등에 걸려 차들의 속도가 떨어지고 나면 맨 앞으로 스물스물 모여들어

그들만의 무리를 이루는 거다. 그들을 위해 신호등 앞에는 이렇게 스쿠터 전용 신호대기 공간까지 네모지게

만들어두고 스쿠터 모양의 표지까지 그려 두었다.

꼭 그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 자갈과 모래를 막 섞어둔 혼합물을 통안에 넣고 열심히 흔들면 모래는 밑으로 다

가라앉고 자갈들만 슝슝 모래를 뚫고 올라오는 분리 실험. 하나둘 차들 사이를 비집고 앞까지 기어나온

오토바이들이 늘어나다가 신호가 바뀔 무렵이 되면 거의 무슨 폭주족처럼 모여버린다.

밤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게들의 불빛이 대부분 꺼져버린 열두시 가까운 시간에도 일단 빨간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고 차들이 멈춰서면, 산개해서 달리던 오토바이들이 어느순간 신호등 코앞에 몰려든 채 부릉거리며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거다.




타이완의 거리에는 온통 일본차 뿐이다. 한국차는 5일동안 두 대? 그 정도 밖에 못 봤고, 일본차가 대부분, 그리고

벤츠니 베엠베니 독일 고급차들.

어딘가의 사거리 앞에서 집중적으로 눈여겨본 신호등. 언뜻 보면 어느 나라나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또

은근히 제각기의 개성이 있어서 약간씩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한다. 저렇게 서 있는 빨간녀석 역시 뭔가 신선하다.

대로의 사거리라 빨간 불이 길어서 이리저리 배회하던 카메라에 재미난 게 잡혔다. 건물 벽면에서 사람들이

줄을 타고 내려오고, 위태하게 창밖으로 넘어오는가 하면, 아예 몸을 절반 넘게 기울인 채 사다리를 타고 있다.

살짝 놀랐는데, 다음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건물 벽면에 스티커 작업으로 붙여 놓았던 그림.

그리고 둥그런 건물 외벽에 층층이 이국적인 한자어 간판이 빼곡한 건물도.

오래 기다렸다. 비로소 시작된 파란 불 타임, 숫자가 번쩍이고, 숫자 아래 사람은 흐느적대며 걷기 시작했다.

약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율동감있게 걷는 게 뭔가 리듬을 타고 있다는 느낌이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다리와 팔의 흔들림도 그렇고.


동영상까지 찍었는데, 영상이 눕고 말았다. 신호등을 건넌다기보다 뭔가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등산의 느낌이

강하게 되어 버렸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이 파란 녀석의 리듬감.






앙코르왓이 있는 씨엠립에선 신호등 같은 거 신경도 안쓰고 다녔는데, 역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좀더

교통체계도 잡혀 있고 무단횡단도 함부로 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그치만 내가 알기론 여전히 캄보디아에는

교통관련법이 정돈되지 않은 상황이라 한다.)


프놈펜에서 몇 차례나 내 앞에서 번쩍이며 제자리뜀을 즐기던 녀석, 한국처럼 빠르게감기로 돌아가는

초시계가 아니라 캄보디아스럽게 여유로운, 아마도 느리게감기중인 듯한 초시계도 인상적이었다는.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글 하나. 그러고 보니 꽤나 오래전이다. 근 10년 전이구나. 하이쿠야.


요새라면,

아마 차창 너머 운전자들이 쏘아대는 눈빛과 무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하릴없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을까.

건너고 나면 대략 깜빡이다 빨간 '서시오'로 바뀌어 버릴 신호등에서 '뒤로 돌아'를 해선 다시 파란 '가시오'가

반짝 불을 밝혀주길 기다릴지언정.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일상이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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