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w. 아마도 싱가포르의 정류장, 공공시설물, 까페 등등에서 제일 자주 접했던 문구인 듯 하다.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처음 왔던 싱가포르, 어렸을 적 어마어마한 벌금과 엄격한 법집행에 기반한 공중도덕과 청결한 도시의 화신처럼 배웠고 대학 때도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운운하는 이야기에 쎄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사는 한국과 멀지 않다. 츄잉껌을 수입하거나 만들지 않고, 온갖 것에 벌금을 매겨놓고 있는 싱가포르라지만..., 이미 우리는 큰사거리 건널목마다 주춤주춤 문워크중인 차들과 골목마다 눈에 불을 켠 씨씨티비의 천국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또 갑갑하기만 하다. 이번에 들고 온 책이 김세균 서울대 정치과교수의 고별강연집, '사상이 필요하다'였는데 발간된 시점은 박근혜 당선직후쯤. 공저자인 홍세화 전 진보신당대표나 손호철 교수, 계간 문화과학 발행인이었던 강내희 교수 등등 필진은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었고 책도 사둔지 오래건만 여태 펼쳤다 덮길 수차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기본기'란 부제가 무색하도록 세상은 역진중이다.

진보 대 보수, 란 페이크 프레임이 끝내 다른 가능성들을 전부 막아버린 꼴이다. 안철수에 기대한 건 단지 제3의 공간을 열어주길, 양당제로 고착화되는 추세를 조금은 지연시켜주길 바랬던 것 뿐이나 역시. 싱가포르와 한국.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형식을 빌린 천민자본주의사회란 건, 어쩌면 압축성장을 경험한 풍요로운 경제와 천박하고 미발전한 시민사회 및 지평을 가진 나라의 귀결일지 모른다.

이제 점점 거대해지는 자본권력과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입으로 어떤 공간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제3당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가능성과 사상이 들어설 자리는 봉쇄되고, 삿된 영웅-안철수-는 그나마 민주당과 새누리당 사이에 공간을 벌려 스펙트럼을 결과적으로 넓히나 했더니 투항해버리고, 민주당도 안철수도 결국 파이를 키우기보다 있는 파이를 지키는 현실적 선택을 해버린 것 같다.

그저 노무현이 읊조렸듯 말한마디로 치우고 넘기면 편하려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이미 모든 것이 소비일진대 정치 역시 일인일표의 소비행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뭐가 이상하냐고. 싱가포르, 한국의 근미래에서 한국의 현재로 워프하기 직전, 한발 재겨 딛을 수 밖에.

 

(2014. 3. 2. from FB note.)

 

 

포항 호미곶,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 곳을 가본 사람이던 안 가본 사람이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바로 이렇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커다란 손의 형상. 갈매기들이 쉬어 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작아 보일 수도, 혹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99년 12월에 완공된 상생의 손,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로,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 이렇게 두 손이 함께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손이 육지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성화대에 있는 화반은 해와 달을 의미하고,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던가.

 

바다에 있는 오른손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육지의 왼손. 그 앞에는 독도 일출과 피지의 일출에서 얻어온 불씨가

 

2000년 1월 1일 이래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왼손과 오른손, 상생하라는 두 개의 손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을 쥐고 있는 듯

 

살짝 움켜쥔 모양새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미곶에 와서야 알게 된 손 조각상의 진실이랄까.

 

호미곶에 도착하면 딱 보이는 꽃마차들. 말갈기를 쉼없이 희롱하고 있던,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말들은 꿈쩍없었다.

 

상생의 왼손을 에둘러 바다쪽으로 훅 들어가는 전망대.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배경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시야를 가리는

 

갈매기들 틈새로 상생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전망대 걸어들어가는 길에 한번씩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 문어상. 포항이 문어로도 유명한 데다 심지어 문어축제도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갈 곳 없는 전망대의 끝단에 서면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선 꼬마 아이의 동상이 있고, 호미곶의 위치가 잡혀 있는

 

한반도 지도와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분분히 날아다니며 상생의 손을 향한 시야를 여지없이 가리는 정신사나운 갈매기들. 사람들이 자꾸 과자를 던져댄 탓이다.

 

이쪽에서 보이는 상생의 오른손 측면샷. 아무래도 육지의 왼손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그림도 훨씬 이쁘게 잡힌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서, 미처 보지 못했던 가로등에 눈길이 간다. 포효하는 호랑이 형태의 한반도가 장식된 가로등이다.

 

같은 형태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상 , 검고 노란 줄무늬가 선연하던 가로등 호랑이와는 달리 흰색과 하늘색의 줄무늬를 가졌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둥싯 떠있는 하얀 달을 움켜쥐려는 듯 내뻗은 육지의 왼손상.

 

 

광장에는 지난 새천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라거나 각종 기념물들. 그 와중에 수쳔년 전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기념한 기념탑이 하나 숨바꼭질중.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로 가는 길은 엘레베이터와 계단. 계단으로 갔더니 대충 4층에서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거 같다.

 

 

옆에 나란히 선 풍력발전기 한 대. 시험삼아 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효성의 광고판 같아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닷바람이 매우 세게 몰아치기는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얼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연을 날리고 있었고,

 

호미곶에 갓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부모손을 끌고 연 하나씩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바닷가의 소도시답게,

 

혹은 바닷가의 명소답게 저런 연들을 담은 종이박스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잡힌다. 돌자반.

 

 

 

 

'비판적 지지'가 이렇게 다급하던 적은 없었다.

 

최소한 이전의 2002년과 2007년, 이렇진 않았다.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내가 원하는 후보를 찍었었으니깐.

 

 

대체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선거 국면에서) 내세운 정책이 다른 게 뭔지, 그 이전의 노무현 5년의 경제정책과 이명박 5년의 그것은

 

또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 많은 부분 의구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민주당 세력이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문재인을 찍기로 했었다. 어쨌든 자격없고 부끄러운 대통령의 등장은 피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안철수를 '범진보'세력으로 억지로 낑겨넣으며 판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키를 놓쳐버린 민주당은,

 

아무 선거전략도 없이 SNS와 세대론에 기대어 낙관론에 빠져있었던 걸로 판명되었다. 뭐 하나 치고나온 의제도 없었고.

 

그저 '정권교체'만을 앞세운채 '닥치고 민주진보 대통합'을 외치며 군소후보나 정당을 고사시켜버렸다.

 

 

선거 후의 모습은 더욱 절망적이다. 왜 졌는지, 보다 선명하지 못해서였는지, 소구층이 분명치 않아서였는지,

 

정권교체의 부글거리는 민심을 받아안을 의지도, 정책도, 전략도 없이 그저 '세대론'과 '지역론' 따위에 머무른 채

 

정신승리 중이다. 48%의 가능성을 봤다거나, 여기가 바닥이라거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뻔한 이야기들. 지친다.

 

 

이런저런 정치 평론과 논설들도 마찬가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인구구성이 어떻고 광주부산이 어떻고.

 

그래놓고 마지막에는 민주당의 쇄신과 지지층의 멘탈 회복을 요청한다. 그만큼이라도 잘했다 우쭈쭈.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응원이 아니라, 가루가 되도록 박살내고 좌절시키는, 현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전망이나 희망섞인 기대는 한참 나중의 일.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로는 참.

 

 

프레시안에서 퍼온 아랫글은, 그래도 대선 후 나온 글 중에 가장 내 생각과 유사한 판단과 비판을 담고 있어서.

 

 

 

 

노인과 싸우는 진보, 5년 후도 글렀다

[기고] 박근혜가 당선되어 가슴 아픈 이들에게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기사입력 2012-12-24 오전 9:58:29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박근혜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고 가슴이 아팠는데, 박근혜가 당선되어 더 가슴이 아픈 이들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 아래서 살아가야 할 향후 5년을 생각하면 눈앞이 노래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심과 우울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이번 선거에서 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승리했을까, 그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새누리당의 변신과 의제 희석화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변화를' 주장하면서 4·11 총선에서 승리했다. 더구나 그 총선에서 박근혜 본인이 공천한 인물들이 대거 당선되었고 그 결과 박근혜 캠프의 두뇌와 수족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이미 총선 결과를 통해, 야권이 주장해온 '이명박근혜'라는 비난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었다.

총선 승리 이후 박근혜는 준비된 후보로서의 힘 있는 행보를 진행했고, 보수 진영의 어느 누구도 박근혜에 대적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갔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를 가진 보수 정치권 전체를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또 박근혜 캠프는 지역 구도, 세대 구도, 계급 구도, 이념 구도로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 국면을 잘 이해했고, 그 수족들이 지역성을 기본으로 열심히 뛰게 만들었다(그에 반해 민주통합당의 지역구 의원들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열심히 뛰지도 않았다).

또 박근혜 캠프는 세대 구도에서 유리한 선거 의제들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야당이 제시한 경제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반값 등록금, 복지 관련 공약 같은 '계급 성격'의 의제들마저 선점하고 단계적으로 희석시켜 감으로써, 성공적으로 야권의 공세에 대응하였다.

구진보의 몰락

지난 10년간을 돌이켜 보면, 2004년의 민주노동당 약진 이후부터 한국 사회의 진보 정당은 대략 13~20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의 덕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행한 각종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들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 중소 상공인, 영세 자영업자, 도시 빈민층의 삶이 오히려 질적으로 악화된 것도 이 시기 진보 정당의 득표율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이들 서민들의 경험과 인식은 열린우리당에서 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민주통합당의 지평을 넘어섰다. 이들 진보적 서민들은 올해 4·11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를 적극 지지했다. 물론 전통적인 진보 정당 지지자 중 일부는 진보신당과 녹색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명박 정부 치하에서 고통 받는 서민들을 감동시키는 정책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게을리 한 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권력 나눠 먹기 식의 야권 연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서민들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외면했다.

더구나 소위 친노 패권주의와 통합진보당 내 패권주의의 문제가 4·11 총선 이전부터 터져 나왔다. 4·11 총선 직후 터진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로 인해 그간 '진보 정당'으로 표현되어온 세력들 즉 통합진보당(그리고 분당 이후 진보정의당까지 포함)과 진보신당 등은 일반 국민들의 여론 속에서 '한통속으로' 평가되며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녹색당은 대선 시기에 제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길게 보면 198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구진보'의 분열과 지리멸렬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하면서도 더 심해졌다. 그 결과 '구진보'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볼 때 거의 무의미한 세력이 되었다.

 

▲ 문재인-안철수의 '새로운 진보'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뉴시스

새로운(?) 진보의 실패

친노 패권주의에 환멸을 느낀 이들과 진보 정당에 실망한 이들을 위한 빈자리를 안철수는 '새로운 진보'를 주장하며 자리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진보'는 국민들의 '삶'을 바꿀 만한 '미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진보였다. 즉 실제로는 '민주 진보 개혁'이라는 좋은 단어들의 조합에 불과했다.

안철수의 대통령 출마 선언과 그 이후 행보가 앞에서 언급한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 13~20퍼센트의 국민에게 무슨 감동을 주었겠는가? 정치적으로 가장 열렬한 진보 지지자인 13~20퍼센트의 국민들에게는 설자리가 없었다.

진보 정당들이 지리멸렬하자, 중도주의를 내세우며 결집한 안철수 지지자들은 애매모호한 '정치 혁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지지자들은 '닥치고 반이명박, 반박근혜'만 이야기했다. 과연 그런 중도주의, 그런 '닥치고 반이명박근혜'가 얼마나 보통 시민들의 열정에 불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한술 더 떠, 분열된 구진보는 심상정, 이정희, 김소연, 김순자라는 무려 네 명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냈다. 그러자,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온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은 그야말로 "이젠 망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박근혜의 당선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13~20퍼센트의 진보 유권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문재인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을 비판하면서도, '박근혜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하며 또 좌충우돌 변명하며 문재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 여론 조사에서 '정권교체'를 원하는 여론이 60~70퍼센트로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 조사는 항상 박근혜가 60~70퍼센트로 높았다. 그런 조사 결과가 나온 데는, '찍으려 해도 찍고 싶은 놈이 없다'고 고민하던 이런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선거 전략의 실패

본격 대선전에 돌입하자마자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는 단계적으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지난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여와 야 그리고 진보 후보의 3자 구도가 아닌, '보수 대 진보의 양자 구도 대결'이 되었다. 그러자 새누리당은 보수의 위기의식을 최대한 자극하는 선거 전략에 주력하였다.

'보수의 총결집과 인물 경쟁력'이 핵심 선거 전략이 되었고, 보수의 위기의식이 보수층의 광범한 결집을 가져왔다. 이것이 결정적 승인 중 하나이다. 또 박근혜라는 인물에 맞설 후보로서 문재인은 선거 기간 내내 존재감이 미약했다.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치하의 경험상 도저히 문재인을 선택하기 싫어하는 유권자들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더구나 애매모호한 중도주의를 표방한 안철수 후보로는 비정규직 노동자과 자영업자, 농민 등 하층민들의 실제적인 삶의 요구와 열정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문재인과 안철수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의 대변자이기에는 그 인물됨과 가치관, 세계관이 협소했다.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열심이지 않았다. 결국 도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대중의 선거 열기를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전국의 유권자 분포에서 차지하는 수도권의 비중이 서울 20.7퍼센트, 경기 23.1퍼센트, 인천 5.3퍼센트로 합계 49.1퍼센트인 점을 고려할 때, 수도권의 정치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게다가 수도권은 '지역성'보다는 '계급성'에 가까운 투표 성향을 늘 보여 왔다. 따라서 '무상 급식'과 같은 폭발력 있는 사회 복지 의제의 개발과 전략적 집중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만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그것을 위한 관심도 능력도 약했다.

역대 선거에서 야권이 이긴 것은 항상 수도권에서의 정치적 열기가 초래한 '준 혁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때뿐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재인과 안철수 (그리고 심상정과 이정희마저도)는 모두 '단일화'만 되면 이길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 머물렀다. 문재인 캠프나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캠프 모두 과거 민주노동당 등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이 문재인으로 통일된 '야권 단일 후보'로 결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 중 다수는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중 아무도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권을 지지하는 선거 열풍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당연히 언감생심이었다.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이번 대선의 30대 이하 유권자는 1547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8.2퍼센트인데 반하여 50대 이상 중장년층은 1618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9.9퍼센트이다. 반면 10년 전 노무현이 당선될 때인 16대 대선에서는 30대 이하가 1690만 명으로 48.3퍼센트, 50대 이상 유권자가 1024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29.3퍼센트였다. 10년 동안 2030 세대의 인구 비중이 10퍼센트 포인트 줄고 5060 세대는 10퍼센트 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투표율이 높아지면서 투표장을 많이 찾은 것은 젊은 층만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의식을 느낀 5060 세대다.

주류 보수 언론은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시종일관 중계 방송하듯이 강조하였다. 즉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은 인구 구성비상 비중이 높은 장년층과 노년층의 불안 심리를 교묘하게 조직했고, 이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각종 네거티브 캠페인을 활용하여 묶어냈다. 예컨대 <나는 꼼수다>와 김용민, 진중권, 이정희 등으로 대표되는 '예의 없는' 2030 세대에 대한 5060 세대의 불만과 불안을 보수 언론은 잘 조직해 냈다.

선거 직후 출구 조사 발표를 보면 50대의 89.9퍼센트가 투표를 했고, 이들이 박근혜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 지지 이유에 대해 신문마다 분석이 떠들썩하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이 유리하다는 얘기는 2030 세대의 인구 구성비가 많았던 10년 전에나 통하던 얘기이다. 이 점을 사전에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야권은 2030 세대에 비해서도 가난하고 빈곤한 5060 세대를 탈박근혜 지지자로 전환시켜 정치적으로 중립화 시켜낼 의지도 전략도 없었다.

또 2030 세대와 4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제의 개발과 제시에도 게을렀다. 그저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30년 전 행적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살림살이와는 동떨어진 순환 출자 금지 같은 재벌 개혁, 재벌 해체의 어젠다를 집중적으로 제시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야권은 시종 일관 여당에 끌려 다니는 '색깔 없는 선거'를 치르면서 패배했다.
한편, 2030 세대의 '보수화 경향'도 깊이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애국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 60대 이후 노년층만이 아니라 신세대에게도 일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방송 3사 출구 조사를 보면, 문재인 후보가 2030 세대에서 65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지만 박근혜 후보 또한 3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대선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최근 10년간의 선거 때마다 전체 2030 세대의 3분의 1이 보수주의를 지지한다. 젊은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사회 개혁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의 개인의 삶이 엄청나게 피폐한 층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주요한 한 원인이다.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용인하고 더구나 노인 세대에 맞서야 한다며 2030 세대의 투표율을 높이려 독려하며 그것을 사실상 더 부추긴 것은 민주통합당과 진보 정치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앞으로 백전백패일 뿐이다. 왜냐하면 출산율 저하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2030 세대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그에 반해 5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치권과 야권이 무상 급식과 같은 계급적, 탈지역적, 탈세대적 선거 어젠다를 전략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소홀히 했던 이번 선거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역주의 구도가 다시금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도는 당연히 여권에 유리했다. 지역의 인구 구성비로 볼 때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영남 기반 보수 세력이 이긴다는 자명한 현실을 야권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보수는 결집한다. 진보 정치는 지역주의를 벗어나야 하며, 이번 선거처럼 전라도 같은 특정 지역의 몰표에 여전히 의존하는 정치적 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향후 진보 정치권은 세대 간 대결 구도가 아닌 세대 간 연대의 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2030 세대가 되었건, 5060 세대가 되었건, 가난한 청년 및 노인들 대 부유한 청년 및 노인들 간의 대립 구도, 계급적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야 앞으로의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예컨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간의 세대 간 연대 의식이 강하게 작동해야만 존재 가능한 것이 국민 연금과 기초 노령 연금의 획기적인 확대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 국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주의 노인 복지 체제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정치적, 제도적 축 역시 세대 간 연대이다. 이렇게 세대 간 연대 의식이 필수적인 어젠다를 놓고 계급 투표가 가능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미래가 있다.

박근혜 캠프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준비된'이라는 구호가 주로 급작스럽게 후보로 나선 안철수, 문재인과 비교하여 준비된 인물이라는 것을 홍보하는데 이용되었다면,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는 실제로 여성층 특히 주부층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았다.

즉 보육과 교육, 의료, 노인 복지처럼 가정주부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정책 어젠다에서 문재인 캠프가 박근혜 캠프와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공약을 제시하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이에, 박근혜 후보가 제시한 '여성'이라는 슬로건이 여성계와 주부들 사이에서 실제 큰 힘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야권은 사실상 대응을 못하거나 안했다.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 프레시안, 손문상 화백

 

 

1) 한국정치가 양당제로 고착화될까.


유럽과 같은 다당제가 이념정치, 계급정치가 가능할 거란 점에서 우리나라 의회정치도 그렇게 가는 게 이상적이라 생각했는데 갈수록 회의적이 되어간다. 특히 지리멸렬해진 진보블록을 대신해 치고 나온 안철수의 역할과 성과가 문제가 될 텐데...만약 그가 자체의 정치세력을 만들어내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이제 한국사회는 양당제가 고착화되지 않을까.

안철수가 뭔가를 제대로 해내기는커녕 이쁘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가능성이 농후해지면서 제3세력에 대한 대중의 냉소와 불신은 팽배할 테고. 이미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불러낸 대중들의 피로감과 분노를 가중시키는 존재가 되어가는 듯 하다. 그렇다면 역시, 한국도 미국처럼 양당제로 고착하게 되는 걸까. 심지어 미국보다 못한 식의 중도우익과 극우세력의 양강구도가 되리라 예상되지만.

 


2) 진보정치세력의 구심은?


이른바 재야나 운동권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건설된 진보정당에서 지켜온 의회 내 진보정치의 기치는, 어느덧 아웃오브안중이 되어가는 거 같다. '진보', '개혁', '복지', '경제민주화' 따위 단어에 대한 소유권도 모두 넘어가버렸고 좀처럼 회복될 거 같지도 않다. 이는 진보정당의 한계기도 하고, 이나라 민주주의와 '계몽'의 한계기도 하다. (안철수 현상의 안쓰러운 미망을 보라) 의회정치 내에서 진보적 가치를 표방할 수 있으려면 진보정당이 아니라 차라리 민주당 내 진보블록을 미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의회 밖의 정치적 필드는 별도로 치고)

 


3) 비판적 지지의 문제


이념적 비전이 어디까지 뻗어나가든 현실은 찔끔찔끔 변한다 했을 때, 보다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 뭘지에 대한 고민이다. 페이퍼당원이나마 진보신당 당적을 갖고 있지만 당에서 미는 후보가 아닌 타당의 후보를 이렇게 거리낌없이, 혹은 절박하게 미는 경우는 또 처음이니까. 진보신당의 공식지지 후보 김소연 후보, 그녀의 자격과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지지하지만 현재로선 문재인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문>박,안)

 


4) 선택지에 대한 고민...박과 안의 비교.


다만, 단일화된 결과 안철수가 야권 후보가 된다면 다시 난 고민하게 될 거 같다. 그에게 기본적인 국정운영의 능력과 자원이 있을까. 정치라는 것에 대한 그의 얕은 인식과 부정적인 시각에 더해서, 도대체 그가 가진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능력은 무엇인지 문제해결능력-정치력-은 있는지 뭐하나 알 수 없단 점에서 그렇다.
수첩공주라지만 박양은 할튼 조조처럼 재사들을 주위에 많이 모으고 있고, 독재자의 딸이라지만 그건 이제 까봐야 먹히지도 않으며, 민주주의적 감수성이나 가치관이 부족하다지만 기성 정치인들 대개 오십보백보인 거 같기도 하고. 최소한 안정적인 국정운영은 되지 않을까. 박양이 된다고 애비처럼 독재를 하거나 총칼로 짓밟진 않을 테고 뭐, 엠비만큼 하겠지...니미.


굉장히 우울한 그림이지만, 안철수가 하면 뭐가 나아질까, 그리고 뭐가 불안해질까를 계량했을 때. 난 안과 박양 둘다 지랄같은 결과일 거 같아서. 그땐 차라리 진보정당의 후보를 찍을 생각이다. 현재로선.

 

 

4-1) 안철수에 대한 단상

 

정치개혁'이라는 말을 협소한 지평에 지 나름의 상식에 가둬놓고는,
피와 살이 느껴지지 않는 '국민'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모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단어, '개혁'과 '변화'의 이미지를
냉소의 도가니에 빨아제낀 걸레짝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

대체 안철수가 바라는 '정치개혁'이라는 건 뭘까.
감성적으론 알 듯 말 듯 하다가도, 정작 디테일은 없다.
니들이 알아서 국민의 소리를 들으면 정답이 나올 거다, 라는 식인데
이건 어쩌면 자기도 뭘 어째야 할 지 몰라서일지도.

* 이번에 다시 국회의 구조조정/정리해고를 말하는 꼬라질 보고 확 열받아서.

 


5) 요약.


박양이 대통령이 될 거 같고, 안철수는 엑스맨인 거 같고, 문재인과 민주당은 확연한 진보성은 고사하고 리더십도 전략도 없는 거 같고. 그런데 진보정당은 다 말아먹었고. 당비가 아까울 지경이고. 뭐 이딴 지랄같은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는지 니미.

 

게다가 더욱 좌절스러운 건, 엠비5년의 시점, 나라의 가치관과 비전과 성장/분배전략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굉장히 큰 공간이 열렸음에도 이지경이라는 점. 분명 큰걸음 한발자국 왼쪽으로 뗄 수 있는 객관적인 호조건이 도래했음에도.

 

 

 

 

 

 

손이 아프다며 뒤로 뺀 후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먹울먹하며 그 손을 찾아가려는 장년층..

 

그들이 아마도 38%의 강고한 박근혜 지지층 중 핵심을 이룰 텐데.

 

 

잡지 못하는 손을 향한 그들의 '손'바라기, 이제 잡을 수 있는 손을 찾을 때 아닐까.

 

 

 

 

민주통합당은 위기감 없이, 표를 얻기 위해 '오른쪽'으로 가겠다며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리 나눠먹기 중이고,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구호를 내버린 채 대중정당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자멸 중이고,

 

새누리당과 박근혜와 이명박은 꽃놀이패를 쥐고 즐기는 참이고.

 

 

그 와중에 홍세화 당대표가 '전태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태일의 집'을 전국에 짓자는 제안을 해왔다.

 

문득, 총선에서의 패배를 예감했던 4월의 어느날 이래 멎어있던 심장이 뛰었다. 두근. 전태일당이라니.

 

5월 총선 이후 그가 침통하고 분루를 삼키던 사진이 숙제처럼 컴퓨터에 저장만 되어있다가, 이제야 올린다.

 

 

 

 

우리는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왜 다시 전태일을 호명해야 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 ― 4년 전의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일주일 전쯤, 20대의 한 청년 당원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이 글을 시작하려는 지금 다시 내 마음을 짓누른다. 동네 가게 주인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선거 때 표 찍어달라고 열심히 다니던데, 그런 정당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앞날이나 잘 챙기라”고.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아버지뻘의 가게 주인에게 “그 당은 제가 속한 당이 아니”라며 설명하려는데 억울하고 목이 메여 눈물이 핑 돌더라는 얘기였다. 선거에 패배하여 이제는 그 이름조차 기억 속에 묻어야 하는 당을 변명해야 했던 그 청년 당원 앞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4년 전에 쓴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그것은 2008년 2월 13일 민주노동당을 떠나며 남겼던 글이다.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 ‘25994’는 이제 주인이 없다”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나는 “민주노동당에 민중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오직 요란한 구호의 장식품이었을 뿐, 오로지 배제 행위에 의한 권력 싸움만 남은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의 전시장이라고 썼다. 나는 그 글의 말미에 이렇게도 썼다. 기어이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그래서 진보신당 평당원으로 3년 반을 채울 즈음, 당 대표를 지낸 이른바 명망가들이 당 대회의 결정에 아랑곳없이 떠나는 것을 보아야했다. 그리하여 한낱 서생에 자족해온 내가 그 빈자리에 올라 어울리지 않은 직책의 무게에 허덕이며 오늘에 이른 셈이다.

나는 이제 다시 쓴다. 지난 총선에서 당의 존립을 지키지 못한 패장으로서, 그러나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슬픔보다는 쓸쓸함으로 이 글을 쓴다. 그것은 위장전입과 당비 대납, 대리투표와 비례대표 독식 등 4년 전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몰염치와 오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몰염치가 한 치의 오치도 없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데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4년 전 그 글을 썼을 때, 그리고 그 글이 이른바 당을 장악한 종북 편향의 패권주의자들에게 알량한 쁘띠의 ‘유럽사대주의’의 발현으로 읽혀졌을 때, 이미 나는 그들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접었다.

 

나는 ‘진보대통합’에 대해 어떤 통합이냐고 묻는 동지들을 ‘고립주의 독자파’로 몰아붙이고 주저 없이 떠난 이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3당 통합이 ‘노무현과 전태일의 만남’이라고 정의될 때 노무현 시대가 노동하는 인간에게 어떤 시대였는지 기억하는 노동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타적 지지’를 강행했던 조직노동의 대표자들에게 묻기 위해, 그리고 진보정치가 통합진보당의 독점물이 되도록 여론 몰이에 앞장선 한겨레를 포함한 이른바 진보매체들이 이제서 이 당의 비례대표경선 부정에 새삼스레 경악하며 집중포화를 퍼붓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정말 이제 비로소 알았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실현되는 지점까지만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이 되고 ‘개혁적’이 되는 국민참여당 출신들의 반응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민주노총은 무엇을 용인할 수 없고 또 어디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분당은 절대 없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전의 진보신당 대표이자 오늘의 통합진보당 대표인 여성 정치인은 왜 4년 전엔 분당을 결단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분단의 질곡이 보수를 왜곡시켜 극우의 품에서 사익을 추구하게 했듯이, 본디 보수인 민족자주세력이 패권주의를 통해 주류 종파가 되었고 이들의 뭉뚱그려진 헤게모니 아래 이른바 진보주의자들과 노동조직까지 실리를 챙기려 했던 공모의 결과물이 통합진보당의 실체 아니었던가. 막무가내로 패권을 휘두른 이른바 당권파들이 차라리 단순한 편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막무가내가 될 때까지 침묵하고 방관하고 용인하다가 마침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서는 사람들은 복잡한 편이다. 이제서 당권파들을 제물 삼아 몰아세우며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있음을 입증하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들...왜 그 예민한 지성의 분개는 사태의 본질이 감추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늘 퇴각하는 권력에 대해서만 가혹하게 작동할까? 차라리 몰랐다면 진솔한 자기고백이 필요할 뿐, 대중의 분노 뒤에 숨어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욕구는 자제했을 터이다.

 

아마도 4년 전과 오늘이 다른 게 있다면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명분을 필요로 했던 자유주의자들까지 끌어들여 키우고자 했던 파이(권력)의 크기가 커졌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13개의 숫자로 불어난 권력이 지나치게 한편에 치우쳐 작금의 갈등이 촉발되었다면, 그 권력을 다시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대한 합의에 따라 갈등이 봉합될 것이라 전망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던가? ‘좌파(여기서는 문맥상 ’진보‘라 하는 게 맞겠다)의 신화’는 그것이 실제의 혁명과는 무관해지는 순간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그런데 권력정치로 변질된 진보가 여전히 혁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권력의지를 그 속에 감추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진리’라 ‘법칙’이라 ‘섭리’라 ‘운명’이라 왜곡하기 시작하는 이 순간은 동시에 이 신화의 수명이 파국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역사마저 비틀어버린 불행한 동거의 파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왔어도, 권력정치의 레일에서 열차가 이탈해 완전히 전복되기 전까지 그들의 현란한 정치공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갈 진보신당을 옹호하기 위해 목 메이던 청년 당원의 눈동자 속에 어른거리던 열정 때문에 차마 못했던 말을 이제는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한국에서 진보는 죽었다. 진보라는 말에 담겨 있던 아름다운 인간의 가치들은 그 가치들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권력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에 의해, 진보정치를 현실적 실리와 명분이라는 ‘떡’을 양손에 쥐고자 했던 자들과 더불어 사망선고를 받았다. 진보신당 또한 죽었다. 권력정치와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우리의 안간힘 역시 참담히 패배했다. 진보정치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던 성장주의와 결별하고자 했으나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일구어내지 못한 우리들 역시 사망선고를 받았다.

 

젊은 벗이여, 이제는 서둘러 낡고 병든 진보(정치)의 신화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땅속에 묻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 자신에게도 권력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면 그것도 함께. 이 진보의 장례식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땅 속에 내려간 진보의 죽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치의 씨앗으로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의 참담과 추악과 왜곡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이 쓸쓸한 봄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는다. 오웰 스스로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 했던 이 빼어난 르포르타주는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의 정치드라마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증언한 고발서의 의미를 갖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페인 인민의 열망 편에 서려고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스페인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고 억압당하고 끝내는 죽음을 당했는지를 증언하는 책이다. 이 책보다 먼저 발표된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에세이에서 소비에트를 등에 업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연합의 정치적 논리는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것이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는 것이었다. 그 논리 아래 인민 민주주의 지향은 부르주와 민주주의에 의해 차단되었다. 스페인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식견이 너무 ‘오른쪽’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왼쪽’이어서” 처형당했다.

 

너무 먼 역사이야기인가? 한 가지만 덧붙이자.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 오웰의 책은 소비에트와 연결된 자신의 이해를 실리적으로 계산하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들, 심지어 출판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한 세기 전의 상황이 2012년 한국과 너무 닮아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렇게 ‘배신당한 혁명’으로 프랑코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파시스트들에게 쫓겨 스페인의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나는 1980년대 파리에서의 망명시절 국제엠네스티 프랑스 지부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 2세 한 여성을 알고 지냈다. 스페인에서 쫓겨 온 그녀의 부모세대들은 그 무렵 이미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하나 둘씩 남의 땅에서 눈을 감았다. 동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백발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래,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들은 끝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고발서라기보다 제목 그대로 ‘찬가’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여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인간들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기억하기 위해 오웰은 그것을 망각 속으로 밀어낸 권력정치의 드라마를 고발했던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턱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이같이 불편한 글을. “대여섯 살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았다”는 탁월한 작가 오웰과 달리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고된 짐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쓰는가? 우리에게도 분명 존재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되찾고 싶어서다. 그 노래를 한 번 함께 불러보고 싶어서다.

 

오늘의 절망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정당운동의 첫걸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의 미래를 앞당기려는 희망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길을 잃게 되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언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권력에 대한 현실적 욕망으로 뒤바뀌고 진보정치가 권력정치의 주술에 갇히게 되었을까?

 

올해로 귀국한 지 꼭 10년이다.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아온 시간과도 고스란히 겹쳐지는 이 10년 동안 내가 가장 빈번히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먼저 바뀌는지를 줄곧 지켜봐왔다. 그리고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이 스스로를 ‘민중권력’이라 강변하던 그 시간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그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숫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나는 왜 쓰는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인간의 고통과 시간을 건너뛰어 자유주의-진보주의 연합을 이룩한 저들의 허위와 몰락을 증언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머물러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는 아직 이 노래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 구절을 외는 것만으로 인간의 숭고함 속으로 성큼 다가가는 것 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졸도 안 되는, 기껏해야 지상에서 누린 지위가 봉제공장 재단사 보조밖에 안 되는 스물셋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겨준 노래...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쓴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는 제목의 시에는 제목 외에 전태일은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의 연이 바뀔 때마다 80페니히의 가격이 매겨진 건포도빵, 1마르크 20페니히의 출근길 맥주, 장벽이 무너진 베를린광장 앞에서 파는 5마르크의 기념품, 4마르크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눈동자 없는 눈’을 지닌 신들의 전시실 같은 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까지 완벽히 삼켜버린 물신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사물을 넘어 살아있는 인간 모두에게 가격을 매겨놓은 물신의 세계가 펼쳐놓는 매끄러운 스크린 위에 모든 것들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 전태일이 그림자로서나 어른거릴 뿐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장막을 찢지 않고선 그도, 그가 사랑으로 껴안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아픔도 볼 수 없다. 이 물신의 세계에 파열을 내지 못하는, 그저 권력정치에 포섭된 노동조직이 전태일을 실체 없는 유령으로 만드는 까닭이다. 유령이 된 전태일이 노무현을, 나아가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놓은 자본과 권력, 이들과 만나지 못할 까닭도 없다.

 

지난 반 년 동안 기꺼이 나의 글의 첫 독자가 되어준 진보신당 당원 동지들, 그리고 젊은 벗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간곡한 제안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재창당할 당의 이름을 <전태일당>으로 하자고. 그리고 <전태일의 집> 운동으로 오늘 권력정치에 질식당한 진보좌파운동의 새로운 길 찾기를 하자고.

 

좌파정당의 이름으론 낯선가? 전태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사유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전태일당>과 <전태일의 집>은 ‘망자亡者와의 연대’이며 배제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에게 다가가 부둥켜안기 위해 물신의 세계에 저항하며 싸우는 정당의 정신을 당당히 선언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으로 우리를 침탈한 데 머물지 않고 등록취소가 되자마자 곧 진보당으로 바꾸겠다는 저들에게 응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약속하기 위함이다. 전태일 자신이 그랬듯이.

 

절망할 일로 가득 찼을 스물셋 봉제노동자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고 탄식했을 때 그 희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돌아가기 위해’ 죽음도 무릅써야 했던, 그리하여 기어이 그가 만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태일은 버림받고 감추어진 자들을 부둥켜안으려는 사랑이고 만남의 정신이었다. 연대는 내게 넘치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부족한 걸 떼어주는 것이다. 늘 배고픈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나눠주기 위해 버스비를 아껴 수유리에서 청계천 평화시장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던 전태일의 발걸음을 정의하는 말이다.

 

진보신당 대표가 되어, 지금도 어색하기만한 옷을 입고 주로 했던 일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철폐’, 이런 구호들 속에서 나는 ‘연대’라는 말만 들으면 늘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과 미안함,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단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걸 의미하는가?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것도 두 번 버림받은. 한 번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리고 다음에는 정규직 노동조직에 의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 대해, 그들의 노조가입조차 배제된 현실에 대해 침묵하면서 외치는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정규직 노동조직 자신이 배제한 비정규직의 존재를 자본과 권력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은 염치없는 정치적 알리바이 아닌가.

 

우리가 오늘 전태일을 다시 호명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시대의 노동현실에 가로놓인 이 이중의 배제구조를 외면하고 외치는 노동정치에 대해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이 허위의 현실에 안주해온 죽은 진보를 이제 땅 속에 묻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어이 전태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남도의 끝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매달린 절망에 연대하기 위해 달려간 버스에 ‘희망’이란 말이 붙은 것을 나는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는 전태일의 탄식에 대한 응답이고, 그리하여 죽은 전태일이 죽음을 무릅쓰려는 김진숙을 살려낸 기적이다. 김진숙의 기록 『소금꽃나무』는 내가 읽기에 ‘망자와의 연대’이다. 크레인 위에서 떨어져 죽어간 동료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기어이 크레인 위로 올라갔던 그녀가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부활은 기적을 통하지 않고선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 진보의 죽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기적 아닌가? 이제 우리가 만들 당의 이름이 전태일, 그의 이름이면 안 되는가? 우리의 당의 정신이 온통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정신인 그의 정신이면 안 되는가? 평생 집이 없었던 그의 이름으로 집을 짓고 배제되고 쫓겨나고 상처받은 노동자들이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게 하는 일에 전력하는 일, 그게 새로운 정당운동이면 안 되는가?

 

오늘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그것이 우리가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존재이유라고 자위해선 안 된다. 우리 자신은 검게 드리운 권력 정치의 그림자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 진보정당이란 몸통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우리들은 과연 민중의 고통을 따라 움직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설움 받는 평화시장 어린 동심을 지켜보던 그의 눈을 닮은.

 

진보신당을 변명하며 목 메이던 젊은 벗에게 송경동 시인의 시 한편 발췌해 남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망자와의 연대’의 의미이다.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낭송 듣고도 울지 않고/ (……)/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헤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사내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

―송경동의 시, 「김남주를 묻던 날」

 

 

 

 

 

*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생각난 예전 홍세화 대표님의 글


 

 

총선이 끝난지도 벌써 한달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엉망이다.

 

역사에 죄를 지은 민주통합당은 여전히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자중지란 중이고,

 

제버릇 개 못주는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들은 '진보/좌파'에 '종북'의 똥물을 뒤집어 씌우고 있으며,

 

여전히 '쫄지마씨바'를 되뇌이며 모 아니면 도, 우리편 아니면 남의편, 이란 이야기중인 나꼼수도 곁다리다.

 

 

애초 거리의 만담꾼인 그의 인기를 제도정치권에서 어찌해보려 한 민주통합당의 꼼수가 더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꼼수 자체는 애초 그랬듯 그저 듣고 즐기는, '정신승리'를 위한 자위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할 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꼼수 자체가 불러들인 역기능과 폐해도 적지 않은 데다가

 

총선 패배의 일정 기능을 담당한 그의 패거리와 일종의 자극적인 인트로덕션 이상의 기능은 불가능한 그들의 수준을

 

감안하면. 오마이의 이 글이 다소 공격적이다 싶긴 하지만 그다지 틀린 말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나꼼수와 김어준이 틀렸다
[정치 톺아보기] 반MB와 '쫄지마 씨바'는 약발 끝?

 

 

 

서울 대학로 <나는꼼수다>(나꼼수) 카페 '벙커'에 마련된 녹음실.
ⓒ 권우성
나꼼수

 

나는 600만 명이 다운로드 받았다는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딱 한 번 들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끊임없이 '사실'에 천착해야 하는 기자로서는 설(說)을 전파하는 공간에서 웃고 즐기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나꼼수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때도 나는 논평할 가치를 못 느꼈다. 왜? '개그'니까. 전직 국회의원이든, 정치평론가이든, PD든, 기자든 개그 프로그램에 나온 이상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것은 개그일 뿐이다. 개그에 정색을 하고 논평을 하는 것은 모기 잡자고 칼을 빼어든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런 일이다.

 

개그는 아니지만 증권가 소문을 집대성(?) 해놓은 '찌라시'에도 설이 난무한다. 일부 언론사는 찌라시의 정보를 가공해 돈을 받고 팔기도 한다. 그런데 찌라시 정보의 절반은 나중에 실제 사실로 확인되곤 한다. 찌라시에도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설이 섞여 있는 셈이다. 그 사실과 설을 구별하는 것은 기자의 몫이다.

 

 

'나꼼수'와 '찌라시'의 공통점은 사실과 설의 혼재

 

그런데 나꼼수는 사실과 설이 구별되지 않고 섞여 있다(김어준이 나꼼수에서 전파한 사실 아닌 설들을 여기에 열거하는 것은 지면 낭비다. 설령 그것이 '사실 반, 설 반'이 아니라 '순도 99%의 사실과 1%의 설'을 배합한 것일지라도, 설은 설일 뿐이다. 오히려 99%의 사실 속에 숨긴 1%의 의도된 거짓은 전체를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에 더 나쁜 거짓말이다).

 

그래서 찌라시에 실린 것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 것처럼 나꼼수에 대해서도 언급할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하는 얘기라면 상황이 다르다. 김어준은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나꼼수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비로소 언급할 가치를 느끼게 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어준의 상황 인식과 진단은 틀렸다. 김어준의 <한겨레> 인터뷰(우리가 15석 날렸다는 덧씌우기는 진보·보수의 '국공합작', 4월 28일자)를 보면, 그가 중증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김용민의 출마와 막말 논란에도 사퇴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선거 패배의 나꼼수 책임론을 방어하는 김어준의 논거는 ① 가카는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 ②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논리와 승리 이데올로기 ③ 만사형통의 '조중동 프레임'의 세 가지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이 '가카'(MB)와 박근혜 그리고 '조중동 프레임' 탓이라는 피해망상이다.

 

 

[오류 ①] 가카는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 이정민
나는PD다

우선, 그가 보는 정치-사회 현상의 본질은 일종의 음모론이다. '가카가 매사에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이다. 그는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까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쫄지마 씨바'라는 나꼼수의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명박은 박근혜가 자신을 완전히 털고 갈 수 있도록 검찰을 동원해 자신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데, 그 안에는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검찰이 갑자기 엄정해져서 이명박 측근을 우수수 잡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순서와 수사 강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게 바로 이명박이 여전히 갖고 있는 힘이다."

 

나꼼수가 '쫄지마 씨바'라는 애티튜드(태도)를 고수해야 하는 근거로 내세운 것은, 그가 별다른 근거없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거래' 가운데 하나로 추정한 '가카가 만든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어준은 "그런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는 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바라본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인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박근혜와 '가카'의 거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방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觀心) 현대판 미륵'?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어디서 많이 본 '시추에이션'이다. 그렇다. 후삼

국시대 궁예의 '관심법'(觀心法)과 일맥상통한다. 궁예는 자신을 '사람의 마음을 읽는(觀心) 미륵'이라고 칭했다. 중세 암흑시대의 마녀사냥도, 공산주의자를 때려잡던 매카시즘도 같은 이치다. 누구든 낙인이 찍히는 순간, 역도(逆徒)가, 마녀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하지 못하면 곧, 죽음이다.

 

그는 심지어 김용민의 총선 출마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가카다"고 단정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정봉주가 빠진 뒤~'라고 하는데, 그는 빠진 게 아니라 계속 까부니까 잡혀간 거다"면서 "우리는 그런 가카의 결정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MB가 정봉주를 잡아가두는 바람에 '제2의 정봉주'(김용민)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계속 까부니까 잡혀간 거"라는 출마의 전제부터가 틀렸다. '가카'는 그의 주장처럼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에 입각해 죽은 척하는 게 아니고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한 '식물인간'이다. 국정 운영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레임덕 대통령'의 힘이 빠진 근거는 차고 넘친다.

 

이번 선거는 철저히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의 선거였다. MB는 이번 총선 비례대표 공천에 단 2명의 후보자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이봉화 전 차관은 공천위에서 공천이 취소되는 바람에 청와대 몫은 단 한 명이었다(지난 2008년 총선 공천 때는 이정현 의원과 임두성 전 의원 등 2명이 비주류였던 친박계 몫이었다).

 

역대 총선에서 MB처럼 '배제'된 대통령은 없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MB처럼 총선에서 '배제'된 대통령은 없었다. MB가 건국 이래 치러진 11번의 직선제 대선에서 가장 큰 530여만 표(22.6%P) 차이로 2위를 따돌린 대승을 거둘 때만 해도 임기말 총선 공천에서 청와대 몫이 '단 한 명'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다 '가카'가 자초한 것인데.

 

지난 2010년 8월 MB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현오 경찰청장을 임명했을 때 이미 후임 경찰청장은 이강덕 당시 부산경찰청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경찰대 1기 출신으로 '영포 라인'인 이 청장은 실제로 서울경찰청장에 기용됨으로써 차기 경찰청장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MB는 임기말에 쓰려고 아껴놓은 '이강덕 카드'를 쓰지 못했다. 사실상 박근혜측의 '비토'로 인사청문회 통과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한 명 공천하지 못하고, 임기말 경찰청장도 '자기 사람'을 임명하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는데도 '가카가 설정한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 운운하는 것은 나꼼수에서나 통용될 법한 '개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선거는 철저히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의 선거였다.

 

그런데도 나꼼수에 대한 탄압을 견뎌내고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 국회의원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는 출마 논리는 구차하기 짝이 없다. 김용민은 자신의 출마 배경을 "'나꼼수' 안했으면 정봉주는 감옥갈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또한 가카가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만사를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과 맥이 닿아 있다. 자신이 싸우는 상대방에 대한 조작된 공포의 극대화를 통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특히 김용민이 출마를 결심한 이유를 "국회의원이 되면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나꼼수가 제기해온 여러 의혹들을 좀더 자유롭게 파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데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국회 본회의장을 '개그 콘서트' 장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오류 ②] 남이 하면 불륜, 나꼼수가 하면 로맨스?

 

지난 4월 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나는 꼼수다>(나꼼수)'삼두노출' 번개모임에서 김어준 총수, 주진우 기자, 김용민 민주통합당 노원갑 후보가 팬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나꼼수

 

김어준의 두 번째 오류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논리와 승리 이데올로기다. 김어준은 막말 파문으로 '뜨거운 감자'가 된 김용민에 대한 사퇴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극단적 대결 국면에서의 사퇴는 지지층의 정서적 전선을 무너뜨리고 상실감과 열패감을 부른다"면서 "이건 논리적 설득으로 단기간에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금품수수 논란 때 진영논리로 그를 감싼 것에 대해서도 김어준은 "곽 교육감이 저들의 공격을 받아 사퇴했다면 지지층은 정서적으로 무너졌다"면서 "곽 교육감이 사퇴했으면 박원순 후보는 졌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가설'을 합리화했다. 그의 단언과 자기 합리화의 근거는 이번에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인 것이다(그런 논리라면, 그가 사퇴를 안하고 버티는 바람에 향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오는 대선에서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도 함께 실시하기 때문에 대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도 성립한다).

 

김어준은 조작된 공포의 극대화와 나꼼수의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나꼼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사건의 형평성과 사찰 및 도청 의혹을 연관지어 제기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그는 선관위 고발을 탄압으로 받아들이냐는 질문에 "나꼼수 진행자는 민간인 사찰의 직접적 대상이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또 "우리의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나꼼수에서 뱉은 '이바구'처럼 의혹일 뿐, 확인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서울시 선관위는 4·11 총선기간인 4월 1일부터 10일까지 8차례에 걸쳐 민주당 정동영 후보와 김용민 후보 등 특정 후보를 대중 앞에서 공개 지지하고, 대규모 집회를 연 혐의로 김어준과 주진우 <시사인> 기자를 검찰에 고발했다. 선관위의 고발 취지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발행인이고 주진우는 현역 기자 신분이므로 형식논리로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이 분명하다.

 

그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믿은 일을 했지만 선관위는 당연히 했어야만 하는 일을 다하지 않았다"면서 "선관위가 공정했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 손수조 후보의 카퍼레이드나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해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박근혜 위원장을 편드는 논설을 내놓았던 (이상일)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문제를 지적했어야 한다"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통상적인 정당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당의 대표자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인 자신의 행위를 동등 비교한 것은, 이른바 '나꼼수 삼두노출' 카퍼레이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박근혜와 자신을 '동급'으로 보는 착각이다. 또 그의 지적처럼 '친박' 성향인 이상일 논설위원이 박근혜를 편드는 논설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해 놓고 그런 논설을 쓴 것과, 그런 논설을 쓴 뒤에 비례대표 제의가 들어와 응한 것은 차이가 크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상일은 후자다.

 

정봉주 수감이 MB 뜻이라면 곽노현과 한명숙은 어찌 설명하나?

 

'개그'의 장에서는 사실이 아닌 설과 거짓을 전파해도 명예훼손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원 강용석이 '개그 콘서트'에서 자신을 풍자한 개그맨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초절정 코미디'였다. 그런데 설과 거짓이 '개콘'이 아닌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으로 나오는 순간 달라진다. 물론 나꼼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신이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 신분임을 알면서도 광장과 공론의 장으로 나와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실정법 위반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선관위 고발을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김 총수는 차라리 언론인의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악법'과 싸우기 위해, 다른 언론인들처럼 숨어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내놓고 했다고 떳떳하게 주장했어야 했다.

 

지난 2002년 <오마이뉴스> 사례를 소개하면, 오마이뉴스는 당시 대통령 후보경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선후보 초청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선관위는 인터넷신문은 정기간행물법상의 언론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후보들의 토론회 참석을 선거법 위반이라며 막았다. 이 때문에 토론회에 참석하려던 노무현 후보가 두 번이나 발길을 돌리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오마이뉴스는 <주간 오마이뉴스>를 창간해 정간물로 등록함으로써 <주간 오마이뉴스> 주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편법으로 선거법 장벽을 돌파했다.

 

'@bbk_sniper'라는 트위터 계정처럼 지난 대선 당시 'BBK 저격수'로 맹활약한 정봉주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당시 한나라당측은 BBK 의혹 사건과 관련, 정봉주 의원과 박영선 의원 그리고 정동영 대선후보 등 6명을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해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선거법 위반)로 고소했다. 그중에서 정봉주만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된 데는 가장 앞장서 정권에 밉보인 탓도 있지만, 그만 혼자 앞장서 검찰에 출두해 진술조서를 받은 탓도 있다.

 

대선 이후 한나라당은 고소-고발을 취하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검찰과 법원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검찰의 공소장 변경이 이뤄져 명예훼손 부분은 빠졌지만, 1, 2심 재판부는 허위사실 유포(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상고심도 결론은 같았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3년 6개월 만에 판결한 것은, 불기소되거나 무죄를 받은 다른 BBK 피고소인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꼼수는 이런 과정과 사정을 생략한 채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따른 수감을 MB가 마치 사법부까지 장악해 나꼼수를 탄압한 것으로 호도했다. 그것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사법부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곽노현 교육감을 법정구속하지 않은 것이나, 검찰이 두 번이나 기소한 한명숙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해 두 번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류 ③] 나꼼수 책임론은 '조중동 프레임'?

 

제19대 총선을 하루앞둔 지난 4월 10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역 부근에서 열린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 출신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 유세에서 김 후보가 'V'를 만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 권우성
김용민

 

김어준의 세 번째 오류는 나꼼수를 비롯한 진영 논리론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조중동 프레임'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어준도 김용민의 막말 논란과 나꼼수 책임론을 '조중동 프레임' 탓으로 돌렸다.

 

김용민 막말 논란이 선거에 미친 영향이 가장 컸다는 지적을 반박하는 근거로 그가 내세운 것은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D-6) 중에 매일 전국 유권자 7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리얼미터 조사결과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막말 파문'이 김용민 지역구(서울 노원갑)와 비례대표 정당 지지율에 다소 영향을 미쳤지만 전국 지역구 후보의 지지율에는 변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용민 막말 논란이) 1~2위에 등장하는 사후 여론조사는 많이 봤지만 그건 결과에 맞춰 거꾸로 원인을 추론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이렇게 반박했다.

 

"리얼미터처럼 최종 1주일치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는 것도 없이 '나꼼수 때문에 15석 날아갔다'는 식의 주장은 조중동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먹은 결과 야권 패배의 책임을 나꼼수에 덧씌우기 위한 일종의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요컨대, 선거일 사후 여론조사는 믿을 수 없고 사전(D-6~D-1) 여론조사에 근거하지 않은 '나꼼수 책임론'은 '조중동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한 보수와 진보세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전국 단위 정당 지지도 조사(표본조사 대상 750명을 전국 246개 선거구로 나누면 지역구마다 평균 3명꼴로 설문에 참여한 셈)를 근거로 개별 선거구에 영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설이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그게 왜 가설인가. 데이터인데"라고 반박했다. "나꼼수의 총선 책임론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라는 질문에는 "인정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건 사실이 아니고 틀린 거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번엔 김어준이 틀렸다. 그가 잊고 있는 중요한 전제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라는 민주주의 선거의 4대원칙이다. 이를테면 공개투표가 아닌 이상, 세대별 투표율은 알 수 있지만 세대별 지지율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장 출구조사나 사후 여론조사로 근사치를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전 여론조사(리얼미터)는 '데이터'이고 사후 여론조사는 '가설'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게다가 한겨레의 지적처럼, 김용민 막말 논란이 선거에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물어본 사전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선거학회-YTN이 공동으로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D-4~3일, 전국 성인남녀 1500명 대상)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6.7%가 김용만 막말이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영향을 받았다는 응답자는 상대적으로 고연령층(44%)과 보수층(43.5%)에서 더 많았다. 김용민 변수가 새누리당 지지층의 결집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이는 '조중동 프레임'이 아니고 '민심의 프레임'이다.

 

▲ 총선에 영향 미친 이슈 리얼미터의 사후 여론조사(D+1, 전국 성인남녀 750명)에서도 4.11 총선에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는 '막말 파문'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 리얼미터
4.11총선

 

심지어 리얼미터의 사후 여론조사(D+1, 전국 성인남녀 750명)에서도 4·11 총선에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는 '막말 파문'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리얼미터가 선거 다음날 총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에 대해 물어본 결과, '막말 파문'(22.3%)이 1위였고, 그 다음은 경제 민주화 공약(16.1%), 민간인 불법사찰(14.9%), 한미FTA 폐기논란(10.7%), 야권 여론조사 조작파문(9.7%), 북한 로켓 발사준비(5.1%), 제주해군기지 건설 논란(3.7%) 순으로 나타났다. '가설'이 아니고 '데이터'다.

 

응답자 특성을 보면, 이 조사에서도 일관된 여론의 흐름이 엿보이는데, '막말 파문'의 영향은 연령별로는 40대 이상 중장년층, 지역별로는 서울(30.1%)과 대전/충청(30.3%), 지지정당별로는 새누리당 지지층, 이념성향별로는 보수층과 중도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대로 '민간인 불법사찰' 이슈의 영향은 30대, 호남, 민주당 지지층, 진보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막말'은 새누리당 지지성향 유권자를 결집시켰고, '불법사찰'은 민주당 지지성향 유권자를 결집시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자기 진영에 유리한 데이터만 인정하고 불리한 데이터는 배제하는 것은 전형적인 진영 논리다. 김어준과 나꼼수는 범진보 진영의 소중한 자산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20대의 눈길을 정치에 돌리게 한 '치어리더'로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어준이 틀렸다. 방송 1주년을 맞이한 나꼼수의 '반MB'와 '쫄지마 씨바'는 약발이 많이 떨어졌다. 김어준과 나꼼수가 또 다른 기발한 '개그'로 대중을 즐거운 정치참여의 길로 유혹하는 '삐끼'가 되길 바란다.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꼼수'를 조금 듣다가 말았다. 재미없었다. 정치 이야기를 예능처럼, 헐리웃 영화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MB만 없어지면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믿습니까!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신들의 이야기가 반MB의 전부인 양 구는 것도 맘에 안 들었다.

멤버들의 당차고 도발적인 말투는 '비주류'였을 땐 멋졌지만, 그들이 대중을 등에 업고 말한다고 느껴지니 역겹기 시작했다.


"정치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만의 싸움도 아닌데 <나꼼수>는 정치를 마치 종교처럼 선악구도화하고 대통령에 대한 조롱을 풍자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예능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정권말기에 (현 정권의) 독이 빠진 상태에서 이명박을 겨냥하고 두들겨 패는 쾌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명박하고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재능교육이라든지 더 들여다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명박이 BBK로 처벌을 받으면 우리 사회의 진보가 이뤄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문제라든지, 관료의 문제라든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나꼼수>는 MB만 없어지면 천국이 올 것처럼, 야권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기사 중에 나와있는 말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낡은 구조가 복잡하고 건재하게 살아있는 현실을 풀어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꼼수식 이야기가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스스로가 MB 반대진영을 전부 아우르는 양, 혹은 대중의 환호성과 지지에

우쭐해져서 완장이라도 찬 양 구는 건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다.


둘다 불편하다. 나꼼수에 열광하는 대중, 그리고 나꼼수 멤버들.

대중은 몇년전 '질서유지선 안의 촛불'로 정치를 소비하던 트렌드를 '인터넷방송 안의 씨바, 쫄지마'로 정치를 소비하는 걸로

유행을 좇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분노하고 현실에 몸을 던지기보다 적당히 도발적이고 일탈적인 순간의 카타르시스만을

탐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함과 분노가 '올드한 입진보'나 '운동권'처럼 간주되고 있어서야 답이 없다.


나꼼수 멤버들 역시. 애초부터 그들에게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정치에 좀더 관심을 끌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뭔가 반MB 교주를 자처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끼리 즐겁고 유쾌하고 가볍게 가는 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 파급효과를 감안하건대 방식과 이야기 모두를 정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만들어낸 '나꼼수' 신도들이 보이는

-일부의 행태일지언정-배타적이고 MB스러운 행태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배태된 거라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꼼수'를 건드리면 입진보라며 낙인찍고 이죽거리는 것, 나꼼수가 MB와 기득권을 까는 방식이 딱 그거다.

양날의 칼. '나꼼수'가 지금까지의 열풍을 몰고 삽시간에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풍자나 시니컬함이

가진 강력한 산화력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진지함'과 '정당한 분노'를 희석시켜 버린다. 그리고도 기껏 그리는

세상이 MB없는 세상, 노무현 만세라고?




아래는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건드리면 '폭풍까임' '입진보' 낙인
<나꼼수> 편가르기, 빨간불 들어왔다
[신년기획] 진보논객 3인에게 <나꼼수> 현상을 묻다
홍현진 (hong698) 기자
트위터에 <나는 꼼수다> '찬양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이 '우리편'이라고 생각하는 진보진영에서도 '<나꼼수> 현상'을 불편해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8일~30일 '진보논객'으로 불리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전공 교수,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씨, <안티조선 운동사>를 쓴 자유기고가 한윤형씨에게 <나꼼수> 현상에 관해 물었다. 이들은 <나꼼수> 현상을 "소중한 현상"이라면서도 <나꼼수>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편집자말>
'BBK 의혹'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인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주진우 <시사인> 기자의 배웅을 받으며 자진출두하고 있다.
ⓒ 유성호
정봉주

그야말로 '핵폭탄'이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김용민 시사평론가, 정봉주 전 국회의원, 주진우 <시사인> 기자 4인이 지난해 4월 시작한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는 '회당 600만 명 청취'라는 영향력을 과시하며 '대안미디어'로 자리잡았다. 기성 언론에서 <나꼼수>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이 속속 만들어졌고, 제도권 정치인들은 <나꼼수>에 출연하기 위해 줄을 섰다.


지난해 11월 30일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한미FTA 반대 나꼼수 특별공연'에서 만난 김경래(30)씨는 "<나꼼수>를 들으면서 뉴스를 안 보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존의 언론들이 다뤄주지 않는 내용을 <나꼼수>에서 들으면 속이 시원해진다"면서 "주로 <나꼼수>와 트위터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는 2008년 '촛불' 이후 집회 참여 인원으로서는 최대인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나꼼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의 공격도 거세졌다. 이들 언론은 <나꼼수>의 '음모론'과 '편파성'을 문제 삼으면서 <나꼼수>를 '선동매체'로 규정했다.


<나꼼수>를 향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수구보수 진영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진보논객들 역시 개인 트위터와 지면을 통해 <나꼼수>에 '쓴소리'를 해왔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대표적인 예다. 진씨는 지난해 10월 <나꼼수> 콘서트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불륜과 사생아 의혹이 제기된 것과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unheim)를 통해 "한껏 들떠서 정신줄 놓고 막장까지 간 거다. 포르노라는 게 원래 노출 수위를 계속 높여야 한다"면서 "제발 경쾌하고 유쾌하게 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 예능화' 통해 정치 관심 없었던 사람들 유입"


'국내 유일의 가카(각하) 헌정방송'을 표방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꼼수>의 주요 흥행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전공 교수(@worldless)는 "이명박 대통령이 표상하는 '꼰대스러운 가치'가 있다. 권력은 가졌지만 남들은 다 욕하는데 자기만 모르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라느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같고. <나꼼수>는 그것을 조롱하는 본격적인 프로그램"이라면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일종의 '교양'처럼 된 사회에서 <나꼼수>는 정치풍자 코미디로서 일반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fatboyredux)씨는 이를 '정치의 예능화'라고 표현했다. 박씨는 "정치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만의 싸움도 아닌데 <나꼼수>는 정치를 마치 종교처럼 선악구도화하고 대통령에 대한 조롱을 풍자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예능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면서 "정치를 단순화시키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유입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음모론'이 더해진다. <안티조선 운동사>를 쓴 자유기고가 한윤형(@a_hriman)씨는 "이명박 정부라든지, 검찰이 왜 나쁜지, 정치에 새로 유입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어떤 사건이 있는데 배후에는 일을 꾸미는 누군가가 있고 은폐공작이 일어난다는 것'"이라면서 "음모론은 정치에 막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 가장 쉽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박권일씨는 "주류 미디어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음모론이라는 형식이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보았다. 박씨는 "잡을 수 있는 완벽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나꼼수>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항하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엮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음모론으로 간 것은 필연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MB VS 반 MB' 선악구도화... "MB만 없어지면 천국 오나?"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인 김용민 시사평론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2011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한미FTA 반대 특별 야외공연에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나는꼼수다

이들 진보논객들은 한 목소리로 <나꼼수>가 '가카'를 모든 사태의 중심에 두고 'MB 대 반 MB'를 선악구도로 설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나꼼수>식 조롱과 풍자를 "축제 중에서도 힘 빠진 짐승을 칼질하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육제"라고 표현한 박권일씨는 "정권말기에 (현 정권의) 독이 빠진 상태에서 이명박을 겨냥하고 두들겨 패는 쾌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명박하고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재능교육이라든지 더 들여다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명박이 BBK로 처벌을 받으면 우리 사회의 진보가 이뤄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국회 비준 과정에서 지난해 말 또 다시 논란이 되었던 '한미FTA'는 '반 MB' 구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박씨는 "<나꼼수>는 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와 '노무현FTA'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데도 마치 다른 것처럼 여론몰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반MB 전선에만 매몰될 경우 구조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문제라든지, 관료의 문제라든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나꼼수>는 MB만 없어지면 천국이 올 것처럼, 야권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씨는 "우석훈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정봉주는 살아서 신이 된 사나이'라고 썼던데 정봉주씨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마치 순교자처럼 되어 버렸다"며 "정봉주씨가 억울하게 형이 집행된 측면도 지적을 해야겠지만 본질은 불합리한 선거법"이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선거법 문제가 집중적으로 이야기됐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울고불고 신파로 끝나버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반 MB 전선'만 절대화... 비판하면 '입진보'


한윤형씨는 "MB를 축으로 보는 시선 역시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전제한 뒤, "MB를 축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고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시각들이 공존을 해 나가야 한다"면서 "그러나 반 MB 도식을 처음으로 배우고 이 도식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상상할 수 없는 경우, 반 MB 도식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 적으로 돌리는 경향이 <나꼼수> 팬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나꼼수>에 쓴소리를 하는 진보논객들은 '입진보'라는 비아냥과 함께 트위터 등을 통해 '폭풍까임'을 당하게 된다. 진중권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목숨 걸지 않으면 나꼼수 못 까요", "꼼진리교 신자들은 워낙 닥치고 찬양이 아니면 다 나꼼수에 대한 질투로 읽더라구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씨는 "'입진보'가 원래는 입으로만 진보를 말하고 실천을 안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갖다 붙이는 말이 됐다"면서 "반 MB 전선을 절대화하다 보니까 나머지 전선은 폄하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택광 교수는 "<나꼼수> 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 중 하나가 '진보'를 현실적인 힘이 없는, 쓸모없는 세력으로 본다는 것인데 이는 신보수주의적인 논리"라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꼼수>가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박씨는 "기본적으로 선거구도를 반한나라당 전선을 세워놓고 거기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입진보'라고 하는 것은 주객전도"라고 말했다.


'민주화 투사'된 4인방... <나꼼수>의 딜레마


'BBK 의혹'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검찰에 자진 출두한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문 앞에서 지지자들이 정 전 의원을 떠나보내며 빨간 장미와 응원하는 손피켓을 놓고 있다.
ⓒ 유성호
정봉주

이러한 현상은 정봉주 전 의원의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더욱 과열되고 있다. '<나꼼수> 멤버들이 목숨을 걸고 현 정권과 싸울 때 '입진보'들은 뭐했느냐'는 것이 요지다.


<나꼼수> 멤버들이 마치 '민주화 투사'처럼 영웅화되는 분위기와 관련해, 이택광 교수는 "지나친 오버"라면서 "<나꼼수>가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초기에 멍청한 위정자를 놀리는 역할을 하면서 기존의 언론이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정치풍자 코미디였던 <나꼼수>가 점점 심각한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친노세력'으로 대표되는 <나꼼수> 지지자들은 결집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깥의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꼼수>가 소수정파(친노세력)의 선동방송이 될 경우, <나꼼수>가 설득해야 하는 40%의 부동층에 대한 외연을 확대하기 곤란해진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한윤형씨 역시 "내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중간파 유권자를 공략해야 하는데 <나꼼수> 팬들 가운데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쇄신을 엄중하게 봐야 한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나꼼수>를 듣는 청년층 지지자가 있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는 등 사태를 안일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면서 "'우리 편'끼리 모여서 놀다보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못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박권일씨는 "<나꼼수>가 지지자들만을 결집시키는지, 외연을 확대하는지에 대해서는 관련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지금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면서도 "<나꼼수> 팬들의 과잉된 행동이나 노무현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둘 다 지지하지 않는 중간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더 냉소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라고 충고했다. 진보논객들의 '쓴소리'를 단순히 "<나꼼수>를 도발해서 덩달아 뜨고 싶은 것"(정봉주 전 의원)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종편 이전이라고 네이버니 다음의 포털 대문 기사들이 쓸만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능프로그램 독후감같은 글에 인터넷 짤방에 대한 소감문같은 글에, 내용과는 동떨어진 자극적인 낚시성 제목들까지.


그렇지만 지금은 또 차원이 달라졌다.

종편 4개국이 개국하고 나니 이건 도대체. 흔히들 하는 말로 '찌라시' 수준의 막장을 보여주는 쓰레기 기사들, 정말

전파낭비 온라인공간낭비 인력낭비 에너지낭비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들인 거다. 도무지 안 되겠어서, 네이버 대문에

마이뉴스를 설정하기로 했다.

누군가 말했듯, 조선, 중앙, 동아, 매경, 연합 따위가 보수지라 싫은 게 아니다. 보수든 뭐든 그들이 걸치고 있는 안경과

정치색은 인정할 수 있고 가끔은 읽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이 상식에 부합하고 언론으로서의 균형과 역할에

충실하려 할 때의 이야기다.


그저 자신들의 이해 관철을 위해 현실을 곡해하고 여론을 왜곡하며 펜대를 굴리는 쓰레기들, 그딴 건 언론이 아니다.

이제 좀 그나마 깔끔하게, 내 취향과 상식에 맞을 법한 대문을 볼 수 있을 듯. 사실 이게 최선은 아니지만.







공지영이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김진표 원내대표가 사전에 '날치기'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의 트윗을
리트윗한 이후, 민주당 대변인이 사실과 다르다며 해명하고 공지영의 사과를 요구해 문제가 되었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치기 통과 이후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 사전에 알았건 몰랐건 결과적으로
별반 다를 게 없는 추이를 보인다.

단순히 당리당략 차원의 반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국민을 움직이고 감동시킬 수 있으려면, 나아가
진정 나라를 위해 한미FTA 통과를 저지하려면,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뭘 해야 할 때인지는 명확하다.
그들이 여태 이야기한 대로 한미FTA가 그토록 중대하고 치명적이며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스스로 믿는다면.


물론, 그 이전에 노무현 재임 시절 추진한 한미FTA정책에 대한 반성이 앞섰어야 했지만. 지금 급한 것은
날치기 통과를 막고 한미FTA시대가 기정사실화되는 것을 막는 것. 입발린 수사처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국민들을 위해 금배지를 던져버릴 각오가 있다면,
지금 그걸 던져버릴 때 아닐까.

그리고 사실, 개인의 이해를 따져보더라도 이렇게 비상한 시국에 금배지에 연연않는 모습을 보인 국회의원이라면,
금방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더욱 큰 지지율을 업고.



* 진보신당 논평.



김혜경 진보신당 비대위원장, “한미FTA날치기, 야당의원 총사퇴로 맞서 싸우자”

오늘 오후 3시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한미FTA날치기 무효 야5당 및 한미FTA범국본 연설회’에서 우리 당 김혜경 비대위원장은 야당 국회의원 총사퇴로 한나라당과 MB정부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다. 다음은 발언전문.


“지난 21일, 역사에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날치기 한미FTA통과가 있었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나. 국민의 손으로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생존을 나 몰라라 하고, 노동자, 농민, 서민이 죽을 수밖에 없는 한미FTA를 통과시킨 것이다.”


“우리 국민은 날치기 당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우리 야당의원들이 모든 의사일정을 취소하고, 등원을 거부했다. 잘 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죽어 없어진 마당에,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독재권력인 한나라당이 득실대는 국회에 왜 우리 야당의원들이 있어야 하나. 내년 총선 몇 개월 남지 않았다. 저는 이렇게 주장한다. 야당의원들이 모두 국회의원 뱃지를 국민에게 반납해 달라. 그것만이 살 길이다. 이제 국회의원 총사퇴 결의를 통해 국민과 함께, 국민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여달라. 부탁이다.”


“이 자리에 한미FTA저지를 위해 노력한 민주당 정동영 의원,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그리고 국회에서 결의를 보여준 김선동 의원 모두 계신다. 정말 애쓰셨고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민을 위해 아낌없이 의원직 사퇴를 부탁드린다. 의원총사퇴를 통해 한나라당이 더 이상 역할을 못하도록 국회를 해체시켜야 한다.”


“이번 사태를 몰고 온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우리 국민들이 이런 대통령을 뽑아서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2007년 허세욱 열사가 분신하였다. 한미FTA 시작이 돼지 말았어야 한다. 이제 원천무효와 이명박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총사퇴한 의원들과 함께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내자.”


2011년 11월 24일

진보신당 대변인실

진보집권플랜 - 6점
조국.오연호 지음/오마이북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말했다. "1948년 이래 가장 나은 정부가 1987년 이래 가장

나쁜 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이 역설을 고민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이 어쩌다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일 거다.


왜일까. 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무현의 사후 1년이 지나고 어느 잡지에서

'우리시대 노무현의 정의'를 모으는 기사에 내가 썼던 한 줄이 여전히 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재임 시절에도 늘 생각하던 것.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ytzsche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다."

그를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강제할만큼 그도 우리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덜컥 그가 대통령이 되고, 돌아갔죠.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 “노무현은 마라톤 42.195Km이다.”(2010.5.23, 시사IN)



이 책의 내용보다 더 궁금했던 것


사실 이 책을 읽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나름 2000년을 전후해 대학에서 '돌과 빠이'를

쥐었던 데다가 '진보신당의 (페이퍼)당원'이 내 정체성 중의 큰 부분이라 생각하는 '좌파'로서,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경제민주화, 교육과 남북 문제, 권력 등의 내용은 내게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거다. 진부하고 심심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왜 이 책일까. 왜 갑자기 이 책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일까. 대담이란 형식의 특성상 정식화하고 나면 몇 페이지에 불과한

팜플렛 밖에 안 될 내용인데, 딱히 새로운 발상이나 아이디어도 없는데, 이런 정치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데, 대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진보집권플랜'을 집어들었을까.


몇가지 음흉한 음모론이 있을 수 있다. 노회찬의 사상이 섹시하다며 그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던 이들에게 잘 생기고 젠틀하며 사상도 섹시한 조국 교수는 가히 팬덤을 몰고 올만한

인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다.) 때론 경악스러운

트렌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와아~ 하며 우르르 달려가는,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

책들에 달려간 새삼스럽고 집단주의적인 구매 성향의 일환일지도. 너무 시니컬한가.



'진보'정권의 집권을 위한 공부 열풍

조금은 희망적이고 싶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거치면서, 준비되지 않은 집권이 결국

그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질곡에 몰았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기적이나 요행처럼 대통령 하나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저 구습에 대한

부정이나 분노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우리 모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새로운 비전과 플랜이 필요한 거다. 뽀록구도 실력이라지만 그런 거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거니까, 다행히도 이제는 '진보'라 자처한다 하여 '빨갱이'로 등식화되는 지경은

벗어난 거 같으니까 좀더 본격적이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거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국과 오연호가 말을 주고 받은 이 기록은 '진보'를 위한 최소한의 상식선,

최소한의 공유 가치를 품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 리뷰는 여기부터.


그렇다. 이 책은 '시작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교과서같은 이야기만 있는 듯

보이면서도 현실정치에 적용이 가능해보이는 수준의 정책적 구상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제언들이 들어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책은, 조국 버전의 '진보'와 조국

버전의 '집권플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건 또다시 민주당 위주의 일치단결,

한나라당 말고 될놈 찍자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다.


조국의 통큰 '진보'는 누구인가

그는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칭해 민주정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리고

현재의 야권을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런 전제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두 정권을 두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라 평하기도 하고, 현재의 야권 중 민주당의

적잖은 의원은 수구/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DNA를 갖고 있다 평해지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의 입장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적잖이 보인다. 한미FTA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 일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입장이나, '친미'와 '반미'를 넘어선 '용미'를

하자는 그의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입장-이미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가 익히 말해온

개념이지만 역시 알맹이를 알 수 없는- 따위가 그렇다. 그리고 북한의 3대세습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진보'와는 균열을 그을 거 같다.


'진보'의 가치를 어떤 정치세력에게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집권,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 자체가 정당을 기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했기에

수구/보수의 집권기라고 말하듯 특정 정당이 집권해야 '진보'가 집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조국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거다. 현재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진보가

집권한 건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 김대중과 대통령 노무현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조국 버전 '진보집권플랜'의 한계

물론 조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이슈에 대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도록 대중이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할 거다. 현재의 민주당은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 '복지'니 '무상급식'이니 좌향좌하는 기색도 있으니 지켜보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연정의 가능성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이 책에서 제기된 진보적인 의제들을 받아서

어쨌든 다음 정권에선 '진보'가 집권하자는 게 그의 취지이고 충정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현실 정치에서 돌아가는 판세는 이미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는 고작 두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일반론 차원에서

언급하고 만 '복지를 위한 증세' 부분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많은 논란이 일고 지향이 갈라지고

있는지만 봐도 그렇다. 그밖에 해외파병이나 다문화사회에 대한 원칙적인 답변도 막상 현실에

닥쳐 결정을 해야 할 시기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차게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의 민주당이

보여주는 노선, 행태, 리더십을 진보 쪽에 가깝게 끌어갈 수 있을까. 그의 표현을 빌어 개혁

담당 민주당과 진보 담당 소수 정당들이 서로 이해를 조율하여 하나의 진영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밥먹여준다'는 걸 보여주고 '밥의 품격'을 논하는 게

사람들의 표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그나마 노무현의 정책 이상으로

진보적 가치에 접근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이 책의 진보정책 구상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 
 

'반MB' 명분 하의 진보개혁 진영의 소통합 결과는.

결국 우려스러운 지점은 그거다. 이 책의 온갖 장점과 '진보'정책 일반의 지향을 세워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보집권플랜이 결국

지극히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반MB'로 뭉치게 되는, 혹은 뭉쳐야 한다는 절박하고

긴급한 요청으로 수렴되는 건 아닐까. 그의 '통큰' 진보는 MB와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보수'를 뺀 여집합과 같기에, 쉽게 말해 한나라당 말고 될 놈, 민주당 찍으란

이야기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조국도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2012년이던, 2017년이던, 언제가 되었건

진보진영이 집권했을 때 제대로 해서 더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만들자는

게 그의 반복된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잉대표되고 승자독식하는 한국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통찰과 제안이 있어야 했지 싶다. 그리고 '진보'라는

단어를 그렇게 느슨하고 통크게 써서 '진보/보수'의 구도로 한국 정치를 보는 것보다

'(진보)/중도/보수'의 구도로 읽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시작점이다. 여기로부터 논의가 만발해서 다양한 집권플랜이

짜이고 더욱 가다듬어지도록 맨처음 부어진 마중물의 역할이라면 부족함은 없어보인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6점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붙잡았다. 이럴 때는 원어로 된 제목을

봐야 한다. 번역본은 더러는 시류에 영합하려고, 혹은 편집자의 과욕으로 영 이상한 제목을 달고

나올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 책 역시, 조금 제목이 과했다.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


레토릭이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학적 표현을 말한다. 뭐랄까, 논리의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결국 논쟁에서 이기겠다는 최종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말하기 전략이랄까.

상대의 논설이 가진 논리적 어그러짐을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상대의 주장이 놓친 이면을

가능한 확장하거나 변형하여 '꼬투리'를 잡아내는 것, 그런 게 수사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 6점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어렸을 때 봤던 책 중에 이런 책이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지었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상대의 논리는 최대한 일반화해서 허점을 키우고 자신의 논리는 최대한 구체화해서 허점을

줄이라거나, 상대가 아니라 청중을 설득하라거나, 의미없는 말들을 쏟아내라거나 따위의 야비한,

그렇지만 굉장히 실용적인 방법들이 무려 38가지나 소개되었던 책이다. 그는 이걸 활용하라는게

아니라 이런 식의 수사를 동원하는 상대를 대비하라는 의미로 지었다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억누른 후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제는 그거다. 실제로 레토릭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 권위에의 호소,

잘못된 인과, 대중에의 호소, 성급한 일반화 따위의 이야기들은 책 속에만 우스꽝스런 사례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신문사설에도, 정치인들의 입에도, 늘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실제 사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은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레토릭을 잘 쓰는지가 더러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건 비극이다.


그런 레토릭은 상대보다는 청중을 장악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의

레토릭
은 더욱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정치학자 마셜이 제기한 민주주의 3단계론의 각

계단에서 사회의 보수진영이 어떤 레토릭으로 시민권, 정치권, 경제사회권으로 확장되어가는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았는지를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와 논설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레토릭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고 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실제로 나머지의 레토릭들은 이 세 가지의 변형이거나 부산물이라는 게 저자의 관찰이다.


1) 역효과론 :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무용론 : 그래봐야 기존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위험론 :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풍부하게 인용하는 당대의 보수 석학들은 근대의 개인을

처음으로 세워낸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 1인1표의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줄곧 거부하거나 부정해왔던 거다. 실제로

그 간단한 레토릭이 대중을 움직이고 여론을 만들어내어 민주주의의 확장을 막아왔다.


세 가지 레토릭에 기반해서 사실을 호도하고, 대중에 호소하고, 이성보다 감정에 의지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일이라지만,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지 싶다.

민주주의, 혹은 복지국가라는 큰 아젠다를 둘러싸고 벌이는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무상급식이니

무상의료니 따위의 이슈를 두고 팩트의 해석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바로 책에서 보였던

여러 역사적 논쟁과 국면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하면 오히려 서민가정이 피해를 입는다거나, 무상급식을 한다고 서민가정에 좀더

수혜가 가지도 않을 거라거나, 심지어 무상급식으로 우리나라 재정이 파탄나고 모두가 위태롭게

될 거라는 식의 논변. 게다가 시대착오적인 사대강 삽질과 언론규제 따위의 이슈에 대해서도

약간씩의 변형이나 강약은 있겠지만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현실이 겹쳐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제기될 법한 당연한 질문 하나. 보수파만 레토릭을 활용했을까. 진보파도 같은

논변을 통해 보수를 굴복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역사적으로 진보파가

대중을 장악하기 위한 논쟁에서 다소간 열세에 있었으며, '진지성'이 너무 강해 '풍자'에는 약했다는

정도로 넘어가려는 듯 하다. 조금 보태자면,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지키려는 입장보다 뭔가 바꾸고

변혁하려는 입장이 아무래도 취약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 레토릭을 안다고 해서, 레토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처럼 논쟁에서 휘말리지

말라는 실용적인 목적이라기엔 저자는 좀더 본격적이었다. 저자는 이미 '두 개의 똑같은 불합리'라고

지적된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레토릭간의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에서 벗어나서 이른바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아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는 의도란다. 그렇지만 그도 이미

지적한 것처럼 레토릭은 레토릭일 뿐, 실제로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사이에서 움직여 왔다.

레토릭을 벗어나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으려면 단순히 레토릭을 아는 것 말고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P.S.

아마도 그건 청중들의 수준이 그걸 감별해내고 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다. 몇 마디의 논설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단어로 인기를 얻고 감정을 흔드는 정치야말로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자면 '포퓰리즘'인 거다. 레토릭에 휘둘리는 '포퓰리즘' 정치를 벗어나려면

우선 피아식별을 하고 줄기차게 싸워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상황에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자면, '어린애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냐'느니, '말꼬투리

잡는데 연연한다'느니 따위의 정치 일반에 대한 막무가내식 손가락질과 비난을 피해야 한다.

모두에 대한 비난은 결국 그 누구에 대한 비난도 아닐 뿐더러, 정치적 허무주의만 조장하고

마는 거니까. 그렇게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감내하는 게,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는 첫걸음이지 않을지.





선거 후 말이 많았다. 오세훈이 강남통합구청장이라느니, MB의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느니, 다음 검색어 1위가

'레임덕'이라느니. 그리고 선거 전 '백욕이 불여일표'라느니 등으로 투표를 독려했던 MB에 대한 불만집단들은

나름의 성과로 조금은 안심하고 조금은 만족한 듯 보인다.


그 와중, 한명숙이 당선되지 못한 걸 두고 진보신당 노회찬이 왜 단일화(라고 쓰고 '투항'이라 읽는다)하지

않았는지 욕설과 불만이 들끓는다. 말인즉슨 노회찬이 완주한 때문에 한명숙이 석패하고 말았다는 거다.

솔직히 난 민주당이 MB의 대안이라 생각지 않는다. 민주당은 2인자 놀이 중이다. 민주당의 프레임, 정책,

마인드나 한나라당의 프레임, 정책, 마인드는 사실 오십보 백보다.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놓쳐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2인자 놀이중이지만 (엄연히)

거대 기득권집단인 그들이 '진보'라는 탈을 쓰고 세력을 회복했다 치자. MB에 질려버린 사람들의 열망이

모아지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이 모아져서, 그들이 막말로 차기 대선에서 수권했다 치자.


그러면, 뭔가 바뀔까. 김대중, 노무현. 분명 절차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적잖은 발전이 있었지만, 또한 그게

그네들의 한계였다. 절차가 완비되고 나면, 혹은 절차를 완비하기 위한 마인드가 무엇인지의 문제. 내용상의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지향이 없이는 방황하거나, 회귀한다.


한명숙,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의 시위를 경찰력도 아닌 군인들이 투입되어 진압했을 때 아무런

유감 표명도 없이 적법했다 강변했던 사람이다. 그게 민주당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적대적 공범자'들이다.

그들은 같은 기득권을 공유하는 풀 내에서,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진 말싸움으로 서로를 차별화하며-대개 그건

불분명하기 짝이 없어 언제든 당을 옮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만-국민을 기만한다.


그리고 남는 건 사람들의 회의. 정치는 나와 관계없어. 누가 되나 똑같애. 바꿔봐야 똑같더라. 정치하는 놈들은.

욕심으로야 '진보X당'은 그렇지 않아, 아직 우린 제대로 된 대안 정당을 만나지 못해 그래,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까지는 무리일 듯 하고, 최소한 그렇다. 민주당을 뽑아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 얼마나 바뀔까.


좀더 까놓고 말해서, 김대중과 노무현 치하에서는 행복했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

좀더 성숙된 민주주의로 진전했다. 그건 맞지만, 거기서 실제 생활에까지 파급되지 못하는 민주주의였다. 그건

그들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한계이자,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그려내는 '민주주의'의 한계.


그 와중, 이명박은 변하지 않는다. 벌써 프레임이 조작되고 있다. 강남통합구청장 오세훈은 (조선일보에 따르면)

위기를 딛고 일어선 차차기 대선후보이자 유례없는 재선 시장이 되었다. 기실 조중동 언론에서 이토록 엄살을

피우며 여권을 압박하는 건, 차기 정권을 자기네 입맛에 맞도록,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들이기 위한 엄포용.

그리고 이명박은 '여론을 겸허히 수용하며 경제에만 몰두하겠다' 한다. 소나기만 살짝 피하고 다시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다. 자, 선거끝났으니 이제 셧업유어마우스.

귀에 삽박았다.


깝깝한 이야기다. 깝깝하고 민감하고 편향된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궁금하다.

민주당이 내세운 '노무현 정신'이란 게 포인트가 뭔지, 예컨대 한명숙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을 때 뭐가

얼마나 어떻게 바뀔지, 그리고 '민주당 아니면 한나라당'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현재의 정치지형이 언제쯤이나

좀더 열린 지형으로 바뀔지.





사회악들을 위한 도구가 비단 '채찍'만은 아니다. 보수라는 껍데기를 쓰고 결국 제밥그릇 챙기기, 기득권 지키기에

여념없는 넘들도 그렇고, 마치 한 사람의 망자가 진보의 표상이자 모든 가치인 양 2인자 놀이중인 넘들도 그렇고,

그 와중에 비정치적인 양 X-Man 놀이중인 관리위원회니 시니컬하고 시크한 척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을 위한 도구가 꼭 '채찍'일 필요는 없다. (사진은 2010 아랍문화축전 리비아 공연 중 팜플렛 촬영)

그래서는 아니다. 이건 선거운동은 아니고, 그냥 오늘 문득 떠오르는 숫자, 아마도 내일까지 맘에 맺혀 있을 것

같은 숫자 하나를 포스팅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은근히 많다. 계산기 위에, 키보드 위에.

전화기 위에.

그리고 달력 위에.

심지어는 골치 아픈 오후에 '일트윗시간'동안 해치워버린 건망고 포장지에도 그 숫자가 떠올랐다.

'Knowing'이란 영화가 오버랩되는 순간. 아...그렇구나. 그렇게 되야 하는 건 맞지만, 정말 그렇게 되겠구나.

(투표만 한다면.)

사무실 계단에 숨어있던 숫자가 화살표를 타고 올랐고,

맘먹고 찾아본 일력의 7월 7일까지.

투표로 심판 제대로 못하면 이 술 일곱 병, 마침 또 7병이다, 이 술 다 먹고 나면 생길 숙취보다 더 지독한

놈들과 지독한 세월을 보내야 할 거다. 작정하고 나쁜 새끼들, 그리고 2인자 놀이에 빠진 놈들, 비정치적인 듯

치사하게 정치적인 사람들과 함께, 시멘트 천국 토건왕국에서.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그간 '범야권 정치예비세력'으로 숱하게 하마평에 올랐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로 내정되었단다. 서울시장 후보니 국회의원이니 말이 많았지만 본인이 한결같이

고사해왔다고 알고 있는데 참 의외다. (국무총리 후보에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내정)


정권 차원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가 충청권을 감싸앉고 나아가 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대선후보를

키우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명색뿐인 '친서민행보'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중도실용노선'을 끌고 나가기 위한 신선한 얼굴마담으로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더구나 그간 '범야권'

진영의 후보라 여겨졌던 만큼 정권의 포용성이랄까, 강부자/고소영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불식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아마 정운찬은 기왕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기 이전에 총리직을 맡는 것이

유리하면서도, 적당히 힘이 빠져 개인의 운신이 폭이 조금은 넓고 자신의 목소리를 투영하기 좋은 타이밍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G-20도 있으니 국제 무대에서 나름의 비중있는 역할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본인이 충청권과 여차하면 호남, 수도권까지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걸까.


참 실망이다. 아무리 정권에 대한 분칠용으로, 본인의 정치욕구에 대한 해소용으로 잇속이 서로 맞았다고 해도,

정운찬이 그러는 건 실망이다. 나름 지난 대선에 범여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고, 박원순 변호사니 누구니

재야 세력과 함께 묶여서 고려되던 사람 아닌가. 서울대 법인화에도 반대 목소리를 명확히 냈던 걸로 기억하고
 
있고, 교육 정책 등에도 상당히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던 사람인데, 결과가 어떻게 되던 일단 실망이다. 게다가
 
똥물만 잔뜩 묻히고 쫓겨나오기 십상이지 싶다.


무서운 건 청와대다. 정운찬을 총리로 발탁하는데 성공하다니, 이런 깜짝 카드를 구사할 만큼의 능력치로

레벨업했다. 집권 초나 얼마전까지의 어리버리함, 막무가내식의 땡깡이 아니라, 나름 머리를 쓰며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노무현과 김대중의 연이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세력화는 커녕 정체성조차 뚜렷치 않은

야권 세력, 그 비극 중에 묻혀 버린 진보 세력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뿐이다.


물론 청와대는 그들과 이해를 함께 하는 언론과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다. 당장 최장집 교수가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강연 중에서 했던 몇몇 대목을 끌어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곧 진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메치기되어

되려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칼로 돌아오게 만든 조중동의 활약이 있지 않은가. 그분의 근본적인 문제의식 따위는

모조리 거세된 채 그저 선정적인 문구 하나만 발췌해서 써먹는 수법이라니.(중앙일보·동아일보, 최장집 띄우기 왜?)


그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이명박의 통치술이 점점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력 따위 제로에 가깝고

그저 선불맞은 멧돼지모냥 앞으로만 직진하는 미친 불도저인 줄 알았더니, 네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나름

영악스럽게 정국을 장악해 나가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논평] 김민선, 청산가리 발언 사과하라

- 자신만 맛있는 미국산쇠고기 햄버거 먹고, 남들에겐 먹지말라 -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털어넣겠다’는 발언을 한 영화배우 김민선씨가 육류수입업체로부터 수억원대 소송을 당했다고 한다.

유명연예인으로서 김민선씨는 당연히 이제라도 잘못된 발언으로 인한 국민적 오해를 푸는데 노력해야 하며 육류수입업체에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지고 손해배상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국내 육류수입업체 에이미트는 11일 “MBC 'PD수첩'에서 지난해 방송된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과 김씨의 발언으로 15억원의 영업손실이 발생했다”며 “‘PD수첩’ 제작진 5명과 김씨를 상대로 영업손실액 중 3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장을 지난 10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인지도 있는 배우로서 공인의 신분이다. 문제가 된 글을 올린 곳도 수백명의 네티즌이 방문하는 그의 미니홈피다. 그의 ‘카더라 통신’은 광우병 정국 하에서 연예관련 매체는 물론 일간지를 장식하며 크게 알려졌다.

일반인들이 무분별하게 인터넷 상에서 나누는 광우병 괴담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발언으로 인해 수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피해자측의 주장에 고개가 끄떡여질 수 밖에 없다

그는 5월 ‘청산가리’ 발언이 나오기 전인 3월 케이블TV M.net에 출연해 미국 햄버거 체인인 'In & Out'에 가서 쇠고기햄버거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방송장면이 논란이 되자 좌파에서는 새우버거다, 피쉬버거다 등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김민선을 감싸기도 했다.

'In & Out'은 100% 미국산쇠고기 햄버거만 파는 햄버거집으로 다른 종류의 햄버거는 팔지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In & Out'은 김민선씨와 좌파들이 그렇게 문제 삼았던 미국산쇠고기와 SRM부위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고 SRM제거과정을 동일하게 미국 캘리포니아주 발드윈팍에 있는 공장에서 진행한다.

불과 수개월만에 맛있게 먹던 햄버거가 갑자기 청산가리로 둔갑이라도 한 것인가. 그가 의도적으로 정부를 공격하고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공인이라면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실수라면 실수였다고 분명히 사과를 해야 한다. 김민선은 이제껏 진심어린 사과도,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도 한 적이 없다.

이번 소송은 무분별한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해 한 기업이 얼마나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김씨는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야 할 것이다.

2009.08.11

자유주의진보연합



*                                                                          *                                                                         *

'진보'의 가치를 쥐고 있는 게 사실 '보수꼴통'이라 불리는 자신들이라며 이름도 그럴듯하게 지었던 '자유주의진보연합'.

진보적이라는 그들이 김민선 피소사건을 보는 시각이 이렇댄다. 대단한 진보주의자들이다.


별로 그들의 '막되먹은' 이야기에 더하고 싶은 건 없고, 마침 오마이뉴스에 관련 칼럼이 올랐기에 일부 발췌.

소송의 남용은 폭력이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 재판 청구권이 행사될 수는 없다. 이건 폭력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법적요건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선의 발언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거부감정 등이 어떻게 인과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발언과 손해 사이에 어떠한 상당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어느 법률가가 그 발언과 손해의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를 입증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손해를 특정해 낼 수 있을까. 손해의 액수를 어떻게 산정해 낼 수 있을까. 특정업체를 비난한 것도 아니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헌법상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데, 그것도 미니홈피를 통해 자기 자신을 향해 독백을 했을 뿐인데, 왜 이러한 행위가 불법행위로 평가받고 손해를 끼친 행위로 평가받고, 발언과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일까. 상식을 가진 법률가라면 법적 자문단계에서 이런 류의 소송은 거부되어야 한다. 소송 상대방의 명예와 권리도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소송, 미국쇠고기 수입업자 vs. 김민선



 

<브리핑>

노회찬 “오늘 날치기된 언론악법이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위험하다”

언론악법 날치기 규탄 및 MB정권 반대 진보신당 시국대회 발언   


- 7.22(수)19:30 명동 우리은행 앞


요즘 내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대통령 잘못 만나 길거리 연설을 하다보니 이렇게 됐다. 내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두 달인데 아직도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없다. 이런 대통령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이 80%나 됐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통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문동 시장에 방문해 떡볶이와 오뎅을 먹었다. 누가 먹는 것을 바꾸라고 했나. 통치를 바꾸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낮은 30% 지지율에서 헤매고 있다.


경제위기가 닥쳐 모든 나라들이 가난한 사람들 복지 늘리고 부자증세를 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 서민감세는커녕 부자들 세금 깎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부세만 13조, 올해는 25조, 2012년까지 무려 90조의 부자감세를 해준다. 그러면서 담배, 소주세는 인상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빼앗아 부자들에게 나눠준다. 대운하 안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4대강 사업이라고 해서 30조씩이나 쓴다고 한다. 사교육비 반값은커녕 학원비 등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국정기조를 바꾸기는커녕 오늘에는 언론악법을 날치기 직권상정으로 통과시켰다. 오늘 텔레비전을 보면 국회 육박전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그 속에서 본질을 봐야 한다. 이 언론악법은 국민 모두의 생활과 연결돼 있는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토록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유는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는데 정권재창출을 해야 하니 여론장악, 언론장악을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겠는가.

  

저 노회찬이 국회의원 한 석밖에 없는 당의 대표인데, 100분토론과 심야토론에 가장 많이 출연했던 사람이다. 왜 그랬겠는가. KBS도 MBC도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수의 목소리도 방송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조중동방송이고, 삼성방송이었다면 이것이 가능하기나 했겠는가. 내 신발도 안나왔을 것이다. 재벌과 족벌신문이 자기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여론을 장악하는 법이 바로 오늘 통과된 언론악법이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위험한 법이 이 법이다. 이제 대통령과 국회를 바꾸는 일만 남았다. 썩어빠지고 무능한 대통령과 국회를 바꾸는 데 여러분이 함께 해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대변인실

 

시국연설회 일정
* 23일(목) 오전12시 여의도역 사거리
* 23일(목) 오후6시  종로 젊음의 거리
* 24일(금)  오전12시 구로디지털단지(구로 이마트)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감정을 정화하고 정돈시켜,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헤어진 연인이 실제로 헤어지는 순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라던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작년 촛불시위 때의 방향성없는 폭발력과 지금의 전염성강한 눈물바다가 갖는 동일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비루하고 피곤한 삶. 대통령 노무현조차 감당치 못한 강고한 시스템과 주류 세력에 대한 패배감. 울고 싶은 삶.

그 모든 것들을 공유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부글대던 울화, 불만, 그런 것들이 해소되는 거 아닐까.


노무현의 급서 후 눈물을 글썽이고,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불쌍하고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차원의 '자기 위로용'이라는 심증이 갈수록 짙어진다. 노무현에게 미안하단다.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한단다. 존경했고, 훌륭한 정치인이었으며, 서민의 편이었고, '바보'같이 우직한 우리들의

대통령이었단다. 심지어는 그가 그립댄다. 


이런 묻지마식 감정의 물결이 사회를 온통 휩쓸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건 경계할 일이다.


언제, 누구에게 그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았던가. 아마 그가 검찰, 그리고 그 뒤에 선 권력자의 '피살자'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시작된 일이다. 그렇기에 노사모에선 '국민이 죽여놓은' 노무현이 국민장이라니, 당치않다고 펄쩍

뛰었던 거 아닌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를 비난하고,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야, 라는 말을 초딩들까지 입에 물고
 
있던 게 불과 이삼년 전이다.


막말로, 이명박은 왜 당선되었는가. 우리가 노무현을 싫어해서였다.


처음에 방송이 났을 때,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울 일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했고, 그는 더이상 현실세계에 작용하지 않았으며,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유일한 가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티비 속 사람들의 눈가가 빨갛게

축축해지더니, 울고 쓰러지고 그러다가 세네시간씩 줄을 서서 헌화하기 시작했다. 꼬맹이들을 안고 업고, 그렇게.

그러고 보면 그새 티비들은 감동적인 음향이 깔린 다큐멘터리와 코멘트들을 쉼없이 돌렸다.


물론 그를 향한 눈물바다가 죽은 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너그러움이 가미된 애도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대통령 중에 가장 '진보'적이었고, 가장 호감이 갔고, 또 가장 청렴했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했던 대통령인 사실도 맞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정체가 없다. 5공 청문회 스타였다고? 입지전적인 궤적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통령된 후에
 
검사들과 한판 뜨려 했다고? 대통령 된 후의 업적에 대한 다큐는 과문한 탓인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노무현을 바라보고 울지만, 그 눈물은 살아남은 자들, 살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 바치는 눈물이다.

죽은 노무현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표시와 열렬한 지지는, 살아있는 이명박에 대한 극렬한 반대와 증오와

한 짝을 이룬다. 그리고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조차 이명박 정권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묘한 '동류의식'도 한몫 한다.

그들은 자신이 불쌍한 거고, 자신의 처지가 애틋한 거고, 답답한 현실에 또다시 꽉 막혀 버린 가슴에 목메어버린 거다.


울고 싶던 차에 뺨 제대로 맞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별적 차원의 스트레스 해소와 감정 배출이 문제 해결의 의지를 오히려 꺽어버리거나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거다. 이미 촛불시위에 대한 상찬 후 조심스레 등장하기 시작한 비판들이 보여주듯, 한판 난장으로

-축제였고 혹은 '새로운 시위문화의 전형'이었다고 평해지는-들썩들썩했던 그 거대한 에너지는 문제 자체에 대한

해결 의지보다는 스스로의 스트레스 해소에 몰입했던 면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감정과 쿨해진 머리를 갖춘
 
'순치되고 이빨빠진' 양민들이 남을까봐 두렵다.


촛불시위가 정돈되는데 한몫했던 건, 종교계 인사들이 개입하면서 이성적인 문제를 감성적인 문제로 바꿔 버렸던 탓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감정은 분출했고 어느 정도 치밀었던 울화통도
 
해소하고 잔뜩 축적됐던 스트레스도 날려버렸다. (물론 이 정부 하에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스트레스가 누적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심리적인 위로와 종교적인(혹은 도덕적인) 우월감도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이 전혀 변함없이

굴러가는 시스템 내부로 걸어들어간다. 추모 신드롬, 울음바다도 한순간의 반짝, 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렵다.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순치'에 다름아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가.


노무현에 대한 이 중독성강한 추모 물결은, 온국민에 전염되어 버린 듯한 (혼란스러운) 분노와 비통함은, 아직은

우리를 아무데로도 인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그러들었던 노무현에 대한 열광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그저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은 과거에 대한 향수", 그것 밖에 안 보인다. 노무현에 대해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나 이미지라는 게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일종의

신드롬화되어 버린 것은, 그가 오로지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로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초점이 흐려진다. 한미FTA, 이라크파병, 비정규직법, 사학법, 부동산세제, 스크린쿼터제,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투자은행, 금산분리, 언론법...이런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는 노무현인지 몰라도, 이명박의 반대정책, 반대세력은 노무현이 아니다.


노무현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왜 울고 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재우쳐 물어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왜 그를 보며 울고 있는가.
 


티비에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어리벙벙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안나던 기억.

2001년, 3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다 돌아온지 채 며칠이 안 되었을 때였다.


비몽사몽 늦잠에 취해있는데 잠을 덜컥 깨운 엄마의 한마디. "노무현 죽었다".

뭐라고? 이건 흡사 9.11때 기억의 반복 아닌가. 난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여전히 티비 속보들은 잠에 취했는지,

자살이네 실족이네 서거네 운명이네, 온갖 단어들을 동원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투신자살'이라니. 노무현의 허약하고 위세없는 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글쎄, 개인적으로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았고, '진보'를 표상-혹은 위장-했던 그가 끝내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더더욱 실망했지만. 아니, '진보'라는 단어에 똥물을 뿌리고 '도덕성'이란 기준 자체를 회의에

빠뜨리고 말았던 그가 끝내 자신의 언행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죽음을 선택하다니. 또다시 '경망스럽다'는

표현을 듣지 않을까 저어스럽다.


주위 사람들의 몇 가지 반응.

"광주학살을 부르고 몇백억씩 해처먹은 인간도 잘만 살고 있는데 왜 죽고 그러냐.."라는 안타까움.

"이건 결국 이명박이 초래한 거 아니냐.."라는 분노.

"남겼다는 유서에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겼을지 모르지만, 혹시 다 까고 간 거 아니냐.."라는 기대(?).


모르겠다. 장자연리스트때도 그랬지만 죽은 사람은 더이상 말이 없고, 죽은 사람은 더이상 (쥐뿔 남은)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며, 그는 이제 주위 사람들을 남기고 온갖 문제들을 남기고 홀로 떠나버렸다.


혹시 故 노무현 전대통령 만큼이나 말실수 잦고 오해를 자주 부르는 그 사람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이라느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자'라느니...제발 그런 속내가 있어도 말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들, 노무현 전대통령 때 중소기업 사장이 목매달아 자살했던 것을 두고 사실상 노 전대통령이 죽였느니

어쨌느니 말많았던 언론들, 이번엔 과연 누구더러 책임지라 하는지 두고 보자.




[당선소감] MB정권 심판을 위한 진보양당, 북구주민, 국민 공동의 승리입니다
 

<조승수 후보 당선 소감문>

MB정권 심판을 위한 진보양당, 북구주민, 국민공동의 승리입니다
대안야당으로 우뚝 서는 진보신당 만들겠습니다

존경하는 북구주민 여러분.

너무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지지로 저 조승수가 오늘 울산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저의 당선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심판하려는 북구 노동자와 서민의 요구가 분출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진보정치로, 노동자, 서민, 북구주민 여러분의 권리를 지키라는 준엄한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명령하신대로 성실한 의정활동을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 저의 승리는 진보진영 단일화를 함께 이뤘던 민주노동당과 김창현 후보 공동의 승리, 더 나아가 노동자, 서민의 진보정치를 바라는 북구 주민 여러분 모두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과 김창현 후보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북구주민 여러분. 전국의 노동자, 서민 여러분.

오늘은 저 조승수가 승리한 날이기도 하지만, 진보신당이 승리한 날이기도 합니다. 저의 당선으로 진보신당은, 창당한지 1년 만에 국회에 진출하였습니다. 비록 울산 북구가 노동자 기반 도시이기는 하지만, 영남지역에서 진보신당이 거대 집권여당을 누르고 승리했다는 것은, 앞으로 이 나라에서 진보정치가 활짝 꽃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더욱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의정활동, 노동자 서민을 대변하는 의정활동을 통해서 진보신당이 대안야당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북구주민 여러분.

저는 국회에 들어가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자감세, 재벌 감싸기, 특권층 편들기를 바로 잡겠습니다. 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부자감세, 재벌 감싸기는 결국 서민들의 복지를 후퇴시키고, 지방재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 국회에 가서, 경제무능 정권 이명박 정권을 호되게 꾸짖겠습니다. 그리고, 고용안정, 비정규 권리보장, 서민경제 활성화, 복지정책 실현, 지방경제 회생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북구주민 여러분,

여러분께서 오늘 저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지만, 그 승리는 회초리를 들고 안겨주신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진보신당이 잘못된 길을 가면 언제든지 여러분께서 회초리를 드실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겸허하게 오직 북구주민 여러분과 전국의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서민들을 대변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의정활동에 임하겠습니다.

거듭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4월 29일
울산북구 국회의원 재선거 당선자 진보신당 조 승 수 드림




*                                                                    *                                                                    *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했을 때에는 물색 모르고 좋아했었다. 말년 병장의 기운을 빌어 친하게 지내던

부사관들에게 민주노동당을 찍도록 종용하기도 했고, 부모님과 주위 친구들에게까지 나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민노당을

알렸었다. 대학에 있을 때 선배 하나는 자신이 죽기 전에 우리나라에 진보정당이 자리잡을 수 있을지, 심지어 원내진출이

가능할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기에, 그 날 민노당이 무려 10석..이던가, 지역구 2석에 비례대표 8석. 그렇게 원내에 진출한

밤, 나는 내가 관리하던 B.X 로 몰래 진출해 친구들과 복분자주과 양주를 맘껏 마셨더랬다. 뭐랄까 우리도 드디어 좌파

정당이 주류 정치 스펙트럼 내에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감흥과 함께, 많은 것들이 바로잡히리라 기대했었다.


그리고 이제 온갖 우여곡절 끝에 진보신당이 원외정당으로 떠돈지 일년만에 다시 원내 진출. 마땅히 기뻐하고 설레어야

할 일이겠지만, 예전만큼 그렇게 기쁘지가 않다. 한 석. 물론 진보신당과 진보진영에 그 한 석은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어차피 여의도를 버린 MB에게 0:5의 한나라당 완패가 큰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는 판이다. 조승수 후보의 당선 소감 중에, '이명박 정권을 호되게 꾸짖겠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들은 꾸짖는다고 말을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있다. 국회의원 한 명의 힘으로 될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 민중, 혹은 보통사람들의 정치세력화'라는 명제가 원내 진출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건 이미 2004년 이래로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터. 조승수 후보의 당선이 당연히 축하해야 하고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더 가슴이 시리고 기분이

더러운 건, 정작 더 중요한 건 아직 다가오지도 않고 있다는 예감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