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그리고 몇 가지 책이 드러내는 아쉬운 지점.
1) 자살에 대한 내재적 접근은 '자살' 현상 자체를 블랙박스 안으로 넣어 버린다.
아메리는 애초부터 심리학이나 사회학 따위에서 해석하는 자살의 의미에 대해 관심이 없다. '자살'에 대한 내재적인 접근이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고리는 그야말로 '자살을 기도해본 사람'이 아닌 바에야 쉽게 유추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되는 거다. 그 결과 자살을 극도로 개인적인 문제로만 바라보게 만들어, 자칫 자살자가 처하는 상황 자체를 그저 긍정해버리고 만다. 결국 자살할 정도에 이른 사람이 내린 결단이라면 옳다,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2)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자살까지 더한 큰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현실=자본주의의 억압'이라는 등식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진실은, 사회는 사회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따라줄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우리는 개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사회의 요구를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오로지 하나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려야만 비로소 모순은 사라진다. '현실', 즉 무수히 많은 생각들의 균형을 잡아 각 개인들의 공감을 얻어낸 것으로 규정된 현실은 거부할 수가 없다."
아메리는 이렇듯 개인으로서 실존적인 차원의 자살 결단만을 주목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태일의 분신, 순교자들의 자살은 아메리의 자살과는 다른 맥락이다. 예수의 죽음, 가미가제 특공대, 군인들의 결사 작전 역시 다른 맥락이다.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다양한 형태의 자살이 있을 수 있는 거다. 보다 폭넓은 '자살론'을 이야기하고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아메리는 이 책을 쓰고 2년이 지난 후 자살했다.
3) '자살'과 '자유죽음'이라는 단어를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자유죽음이던 아니던 죽음을 철학으로 변호할 수는 없다. 자살을 이미 기도했거나 자살할 뜻을 가진 사람이 소수파에 속한다고 해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훼손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먼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부터 인정해주고 접근할 때 가장 진솔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만들어 '자살'이란 단어와 구분하는 실익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죽음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에 있다. 그렇지만 아메리는 '인간성과 존엄성을 위한 자살'만을 자유죽음으로 한정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곳곳에서 풍긴다. 생존본능과 사회성을 거부하고 개별자로서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 그 자체를 변호하고 복권시키려는 목적이라면, 자살 그 자체를 옹호한다고 명확히 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굳이 자살과 자유죽음을 구별할 이유가 없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Apr 2nd 2009 | SEOUL From The Economist print edition
Press freedom under attack
NORTH KOREA this week detained a South Korean man for criticising Kim Jong Il’s regime and “trying to lure a female North Korean” south. No surprise there. More strikingly, across the border, South Korean prosecutors last week arrested a producer at the country’s second-biggest television station,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MBC), and four union members at a 24-hour TV news channel, YTN.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고 북측 여성을 꼬시려 했다는 이유로 남한 사람을 붙잡아놓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MBC의 PD를 체포했던 일이나
YTN의 노조원 네 명에 대한 영장을 신청한 건을 비웃고 있네요.
Lee Choon-keun, a producer at South Korea’s best known investigative television programme, PD Notebook, spent 48 hours in jail after a former agriculture minister and his deputy accused the programme of slandering them in April 2008. The programme had asked whether American beef was free from mad-cow disease. The prime minister, Han Seung-soo, says the information was misleading and “led Korea into chaos” by sparking vast street demonstrations against the government’s decision to resume imports of American beef. Arrest warrants are out for five other PD Notebook journalists. Some MBC employees are sleeping in the station’s lobby to prevent police from seizing their videotapes and notes.
PD수첩이 광우병(MAD COW DISEASE)에 대한 정보를 오도했고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는 한승수
총리의 말을 인용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은 MAD BULLYING DISEASE입니다.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는
PD수첩의 보도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네요. 미국산 소가 광우병에서 안전한지에 대한 물음이라구요.
의도적인/악의적인 오역이니 선전선동이니 거짓이니 말이 많지만, 약간 한국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떨어져있는 영국잡지인지라 오히려 핵심이 명료해 보입니다.
At YTN, the leader of its union, Roh Jong-myun, and three others were arrested for obstructing the president, Gu Bon-hong, from entering his office. YTN’s union feared that Mr Gu, who was appointed to his post by the government last year, would undermine the station’s editorial independence. Nearly half the channel’s employees went on strike because of Mr Roh’s detention, though the dispute was settled this week. Amnesty International claims his arrest was part of “an increasingly concerted effort by the government to control South Korea’s media”. It says that last year the heads of four other media groups—the state-owned Korea Broadcasting System (the country’s largest television station), Korean Broadcasting Advertising Corporation, Arirang TV and Sky Life—were replaced by government supporters.
국제사면기구(암네스티)는 한국 정부의 언론통제노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정부의 집중된 노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을 썼네요.
KBS, 한국방송광고공사, 아리랑TV, 스카이라이프까지. 네 개의 언론그룹 수장이 정부인사로
교체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The ruling Grand National Party is now debating whether to make it a crime to post inaccurate or misleading information on the internet. A blogger, Park Dae-sung, was arrested in December after being rude about the government’s economic management. He is still in jail. “Every journalist in South Korea is fearful right now,” says PD Notebook’s Mr Lee.
기자가 이 글을 쓰면서 분명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렸을 것 같습니다. 혹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