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3년 2월 19일(화) PM 06:15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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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28



 

 

 



일시 : 2012년 7월 4일(수) PM 05:00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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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yztsche(이채, 異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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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도, 거미줄이 보일 때가 있다.

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살고 있단 건 이러저러한 거미줄 틈새에서 몸을 뒤채며 되뇌이는 망상같은 것.


제대하며 두번 다시는 내의지와 무관한, 무기력한 상황에 처하진 않겠다 다짐했지만 사실 그건

애초부터 허세나 뻥카에 가까웠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천장이 불쑥 도드라진 오후.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6점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붙잡았다. 이럴 때는 원어로 된 제목을

봐야 한다. 번역본은 더러는 시류에 영합하려고, 혹은 편집자의 과욕으로 영 이상한 제목을 달고

나올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 책 역시, 조금 제목이 과했다.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


레토릭이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학적 표현을 말한다. 뭐랄까, 논리의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결국 논쟁에서 이기겠다는 최종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말하기 전략이랄까.

상대의 논설이 가진 논리적 어그러짐을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상대의 주장이 놓친 이면을

가능한 확장하거나 변형하여 '꼬투리'를 잡아내는 것, 그런 게 수사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 6점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어렸을 때 봤던 책 중에 이런 책이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지었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상대의 논리는 최대한 일반화해서 허점을 키우고 자신의 논리는 최대한 구체화해서 허점을

줄이라거나, 상대가 아니라 청중을 설득하라거나, 의미없는 말들을 쏟아내라거나 따위의 야비한,

그렇지만 굉장히 실용적인 방법들이 무려 38가지나 소개되었던 책이다. 그는 이걸 활용하라는게

아니라 이런 식의 수사를 동원하는 상대를 대비하라는 의미로 지었다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억누른 후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제는 그거다. 실제로 레토릭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 권위에의 호소,

잘못된 인과, 대중에의 호소, 성급한 일반화 따위의 이야기들은 책 속에만 우스꽝스런 사례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신문사설에도, 정치인들의 입에도, 늘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실제 사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은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레토릭을 잘 쓰는지가 더러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건 비극이다.


그런 레토릭은 상대보다는 청중을 장악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의

레토릭
은 더욱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정치학자 마셜이 제기한 민주주의 3단계론의 각

계단에서 사회의 보수진영이 어떤 레토릭으로 시민권, 정치권, 경제사회권으로 확장되어가는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았는지를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와 논설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레토릭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고 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실제로 나머지의 레토릭들은 이 세 가지의 변형이거나 부산물이라는 게 저자의 관찰이다.


1) 역효과론 :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무용론 : 그래봐야 기존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위험론 :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풍부하게 인용하는 당대의 보수 석학들은 근대의 개인을

처음으로 세워낸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 1인1표의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줄곧 거부하거나 부정해왔던 거다. 실제로

그 간단한 레토릭이 대중을 움직이고 여론을 만들어내어 민주주의의 확장을 막아왔다.


세 가지 레토릭에 기반해서 사실을 호도하고, 대중에 호소하고, 이성보다 감정에 의지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일이라지만,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지 싶다.

민주주의, 혹은 복지국가라는 큰 아젠다를 둘러싸고 벌이는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무상급식이니

무상의료니 따위의 이슈를 두고 팩트의 해석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바로 책에서 보였던

여러 역사적 논쟁과 국면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하면 오히려 서민가정이 피해를 입는다거나, 무상급식을 한다고 서민가정에 좀더

수혜가 가지도 않을 거라거나, 심지어 무상급식으로 우리나라 재정이 파탄나고 모두가 위태롭게

될 거라는 식의 논변. 게다가 시대착오적인 사대강 삽질과 언론규제 따위의 이슈에 대해서도

약간씩의 변형이나 강약은 있겠지만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현실이 겹쳐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제기될 법한 당연한 질문 하나. 보수파만 레토릭을 활용했을까. 진보파도 같은

논변을 통해 보수를 굴복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역사적으로 진보파가

대중을 장악하기 위한 논쟁에서 다소간 열세에 있었으며, '진지성'이 너무 강해 '풍자'에는 약했다는

정도로 넘어가려는 듯 하다. 조금 보태자면,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지키려는 입장보다 뭔가 바꾸고

변혁하려는 입장이 아무래도 취약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 레토릭을 안다고 해서, 레토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처럼 논쟁에서 휘말리지

말라는 실용적인 목적이라기엔 저자는 좀더 본격적이었다. 저자는 이미 '두 개의 똑같은 불합리'라고

지적된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레토릭간의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에서 벗어나서 이른바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아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는 의도란다. 그렇지만 그도 이미

지적한 것처럼 레토릭은 레토릭일 뿐, 실제로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사이에서 움직여 왔다.

레토릭을 벗어나 '민주주의 친화적'인 영역을 찾으려면 단순히 레토릭을 아는 것 말고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P.S.

아마도 그건 청중들의 수준이 그걸 감별해내고 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다. 몇 마디의 논설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단어로 인기를 얻고 감정을 흔드는 정치야말로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자면 '포퓰리즘'인 거다. 레토릭에 휘둘리는 '포퓰리즘' 정치를 벗어나려면

우선 피아식별을 하고 줄기차게 싸워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상황에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자면, '어린애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냐'느니, '말꼬투리

잡는데 연연한다'느니 따위의 정치 일반에 대한 막무가내식 손가락질과 비난을 피해야 한다.

모두에 대한 비난은 결국 그 누구에 대한 비난도 아닐 뿐더러, 정치적 허무주의만 조장하고

마는 거니까. 그렇게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감내하는 게,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는 첫걸음이지 않을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전 티스토리 초대장 30장을 빌미로 많은 분들의 고견을 경청한 결과 제 블로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초대장 30장(완료)] 블로그명 바꾸려는데 도와주셔요~*)

그러고 나니 대체로 반응은 좋은 거 같은데, 명함이 문제네요. 작년 티스토리 우수블로거로 선정되면서 그토록

바라던 블로거 명함을 잔뜩 받았는데, 더이상 써먹기가 좀 애매해져 버렸다는.

얇은 플라스틱 재질의 명함이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이걸 이제 다 어째야 할지 걱정입니다. 음식점 응모함에도

넣고, 지하철 광고판에도 좀 꼽아넣고 그래야 할까요.;

처음에 명함을 받고 워낙 좋았던지라, 그렇게 허투루 쓸 수는 없고 이렇게라도 써야겠습니다. 뭐, 제 손글씨가

양념처럼 조금 얹히는 것도....;;;;


여튼, 해서 제 블로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공지 겸 명함 아깝다는 투정 겸~ 겸겸.






제가 처음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았을 때는 그냥 잠깐 해보다가 신통찮으면 금방 접을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디야 늘 쓰던 ytzsche, 이채가 있었으니 그대로 간다고 쳐도, 대체 블로그명은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어렵다면 한없이 어렵고 쉽다면 또 한없이 쉬운, 그런 게 작명의 아이러니함인지라, 그냥 당시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책에서 한 구절을 따오기로 했습니다.


경험적 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칸트가 영구평화론과 더불어 유토피아를 펼쳐보이는 그 단초에서 나왔던

말이었을 텐데, 사실 칸트는 그다지 익숙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토피아란 어정쩡하고 형이상학적인 단어도

그렇거니와, 딱히 관념적 세계를 대비해서 강조할 필요도 못 느끼는 터에 경험적 세계라니, 여러 모로 단어의

과잉, 단어들의 부정교합이 느껴지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래서, 30장의 초대장을 빌어 '집단지성'의 힘을 빌어보기로 했습니다.
● 일시 : 2010년 4월 12일(월) PM 10:00부터

장소 : 舊) 異彩가 꿈꾸는 경험적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http://ytzsche.tistory.com)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 자격 : 블로그 이름을 적절한 이유와 함께 골라 주시는 분중에서 당선작을 선택한 분께 드립니다.(객관식 : 6가지 선택지 중 하나 선택)

제공 : 초대장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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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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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시고, 골라 주신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키워드로 잡은 건 자유, 그리고 기왕이면 이채라는 이름도 좀 들어갈 수 있음 좋을 거 같더라구요.

혹은 약간의 변형을 가해 주시거나 더 좋겠다 싶은 게 있다면 추천해 주셔도 넙죽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1) 스스로自의 이유由를 찾는 異彩의 여행.

2) 스스로自의 이유由로 떠날 자유.

3) 스스로自의 이유由를 찾는 다른색깔異彩

4) 걸음을 멈추지 않을 스스로自의 이유由.

5) 다른異 색깔彩를 지켜낼 자유.

6) 스스로自의 이유由로 걷고 싶은 이채異彩.


머...사실 전부 신통찮아 보여서, 이것저것 다 아니다 싶으면 "그냥 원래꺼 쓰세요..." 이렇게 말씀해주셔도...;

잘 부탁드립니다~*





 

Mad bullying disease

Apr 2nd 2009 | SEOUL
From The Economist print edition

Press freedom under attack

NORTH KOREA this week detained a South Korean man for criticising Kim Jong Il’s regime and “trying to lure a female North Korean” south. No surprise there. More strikingly, across the border, South Korean prosecutors last week arrested a producer at the country’s second-biggest television station,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MBC), and four union members at a 24-hour TV news channel, YTN.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고 북측 여성을 꼬시려 했다는 이유로 남한 사람을 붙잡아놓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MBC의 PD를 체포했던 일이나

YTN의 노조원 네 명에 대한 영장을 신청한 건을 비웃고 있네요.


Lee Choon-keun, a producer at South Korea’s best known investigative television programme, PD Notebook, spent 48 hours in jail after a former agriculture minister and his deputy accused the programme of slandering them in April 2008. The programme had asked whether American beef was free from mad-cow disease. The prime minister, Han Seung-soo, says the information was misleading and “led Korea into chaos” by sparking vast street demonstrations against the government’s decision to resume imports of American beef. Arrest warrants are out for five other PD Notebook journalists. Some MBC employees are sleeping in the station’s lobby to prevent police from seizing their videotapes and notes.
 
PD수첩이 광우병(MAD COW DISEASE)에 대한 정보를 오도했고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는 한승수

총리의 말을 인용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은 MAD BULLYING DISEASE입니다.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는

PD수첩의 보도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네요. 미국산 소가 광우병에서 안전한지에 대한 물음이라구요.

의도적인/악의적인 오역이니 선전선동이니 거짓이니 말이 많지만, 약간 한국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떨어져있는 영국잡지인지라 오히려 핵심이 명료해 보입니다.


At YTN, the leader of its union, Roh Jong-myun, and three others were arrested for obstructing the president, Gu Bon-hong, from entering his office. YTN’s union feared that Mr Gu, who was appointed to his post by the government last year, would undermine the station’s editorial independence. Nearly half the channel’s employees went on strike because of Mr Roh’s detention, though the dispute was settled this week. Amnesty International claims his arrest was part of “an increasingly concerted effort by the government to control South Korea’s media”. It says that last year the heads of four other media groups—the state-owned Korea Broadcasting System (the country’s largest television station), Korean Broadcasting Advertising Corporation, Arirang TV and Sky Life—were replaced by government supporters.

국제사면기구(암네스티)는 한국 정부의 언론통제노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정부의 집중된 노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을 썼네요.

KBS, 한국방송광고공사, 아리랑TV, 스카이라이프까지. 네 개의 언론그룹 수장이 정부인사로

교체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The ruling Grand National Party is now debating whether to make it a crime to post inaccurate or misleading information on the internet. A blogger, Park Dae-sung, was arrested in December after being rude about the government’s economic management. He is still in jail. “Every journalist in South Korea is fearful right now,” says PD Notebook’s Mr Lee.

기자가 이 글을 쓰면서 분명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렸을 것 같습니다. 혹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피길

기다리느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게 빠르겠다'란 옛말을 기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네르바는 여전히 감옥에 있다, 라고 썼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브랜드밸류를 떨어뜨리는 놈들은 대체 누구인가요.

부끄럽고, 또 화가 나는 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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