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시간대. 방금까지 고요하게 느적대던 대기, 차들이 씽씽거릴 즈음에야 무겁고 게으르게 뒤척이던 대기가

번쩍 눈을 뜨고는 사방으로 천개의 팔을 한껏 뻗어 기지개를 켜는 느낌.


그럴 때면 뭔가.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할 일들이 이뤄지거나 간절히 바라기만 하던 일이 실현되는 그런,

그런 마법같은 일이 벌어져도 그다지 놀라웁다거나 거푸 의심하지는 않을 거 같은 거다.


이태원에서. 차들이 거침없이 씽씽대는 소리와 사방팔방으로 폭죽 터지듯 터져나가는 빛살의 소란스러움을

헤치고 어느 육교에 올랐던 날. N극을 날카롭게 가리키고 있던 서울타워가 '인셉션'의 팽이처럼 뱅글거렸다.




여기저기 한옥마을이니 뭐니 하여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을 사이좋게 모아둔 공간이 꽤나 생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세트장보다는 그럴 듯한 느낌이

덜하다. 민속촌 같은 컨셉은 조금 더 실생활에 가깝게 복원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일 테니 이쁘고

운치있게 보이기 위한, 그리고도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기 위한 세트장과는 목적부터가 다른 거다.

남양주에 있는 종합촬영소에는 19세기말 종로통을 재현해 둔 민속마을 세트장이 있었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좌우로 열지어 있는 이 골목이 인사동에 남아있는 피맛골의 예전 모습이었겠구나,

아무리 말로 백번 들어봐야 한번 이렇게 보는 것만 못하다. 머릿속에 과거 피맛골의 모습이

대번에 아로새겨졌다.

애초 오원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 영화 '취화선'의 세트장으로 마련된 이 곳은 이후 '천년학'이나

'왕의 남자', '스캔들', 심지어는 '다모'나 '해신'같은 드라마 세트장으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 최대한 공간을 조금 차지하면서도 다양한 구도를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걸까, 아니면 정말 저 시대에 저렇게 기와집과 초가집이 바싹 붙어있었던 걸까.

세트장이라고는 하지만 건물들의 외관만 보면 다들 굉장히 번듯번듯하고 오래 묵어 보여서, 실제로

사용되던 건물들을 보존해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만 살피면 기와 밑에 숨어있는 비닐이나

스티로폼 따위 현대의 건축 자재들이 살짝 드러나 있는 부분들도 있고, 열린 문짝 안으로 들여다본

내부는 좀체 사람손이 닿지 않은 싸늘한 기운만을 가득 품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의 조그마한 동네 하나를 만들어둔 규모의 세트장인지라, 안에서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몇몇 영화에서 접했던 조선 말기 한성의 풍경과 겹치면서 더욱 실감나더라는. 둥그스름한

초가지붕이 저 너머의 둥글둥글한 야산의 실루엣을 닮았다.

그리고 여기는 판문점 세트장, 판문점에서 실제 영화 촬영이 불가능하니까 이곳에 실물의 85% 규모

판문점 세트장을 마련했다고 한다. 판문점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JSA, 유명한

장면 속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인형 두 개가 서있었다. 이병헌과 송강호의 얼굴 대신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저 안에 들어갔을 거다.

판문점 남측 사무소인 '자유의 집', 여기서 어떤 장면이 찍혔었는지는 좀체 기억이 안난다. 

그러고 보니 공동경비구역 JSA가 대체 언제적 작품인가 싶기도 하고, 그 중 한두장면이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게 대단하지 싶기도 하고.

야외 세트장에서 실내의 영상지원관으로 내려가는 길, 영상지원관 내부에는 소품실, 의상실,

법정 세트장 등이 개방되어 있다고 해서 꽤 재미있을 거 같기도 했고, 생각보다 11월 중순의

날씨가 선뜩선뜩 서늘했던 탓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반대편 벽면에는 무려 '포토존'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밭 한가운데

그려져 있었다. 마치 요정인 양 그 글자를 가린 채 화려한 나비 날개를 달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재미있어서 사람들의 대범한 포즈를 잠시 구경.

건물 안에는 지금 촬영이 진행중인 스튜디오도 있고 불이 꺼져 있는 스튜디오도 있고, '촬영중

조용히'라는 표지에 불이 켜진 스튜디오 안에서 무슨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살짝

문을 돌려봤지만 열리지 않아 포기. 궁금증은 여전했지만.

국내에서 유일하다는 법원 세트장, 우리 나라 영화나 드라마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법원 장면일 텐데 그렇다면 그 장면들은 모두 여기서 찍혔다는 이야기 아닐까. 내부를 전후좌우,

심지어 위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천장이 휑하니 뚫려 있던 대법원 세트장의 법관석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이 모두들 한 번 앉아서 사진을 찍어보려 하는 명당 중 명당.

워낙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르다보니 조금 조악하게 느껴지는 몇몇 특수촬영 체험관을 지나고

영화의 풍부하고 실감나는 사운드를 더하는 폴리 음향을 직접 만들어보고 영화에 덧입혀보기도

하는 체험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실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없이 조금 둘러보다가

금방 나와야지, 했는데 막상 들어가서 여기저기 세트장을 둘러보고 체험 같은 것들도 시간 맞춰

함께 해보고 그러다보니 반나절 가까이 지나버리고 말았던 것. 야외도 둘러보고 실내도 둘러보고,

날이 조금만 덜 추웠어도 좀더 야외 세트장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살짝 아쉬웠다.




마루 밑 아리에티. 저번주 도쿄 여행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들렀을 때, 아리에티 캐릭터 상품을 샀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고 말았다. 이 단호하고 살짝 딱딱해보이는 토끼머리(?!) 소녀에게, 그리고 그녀가 사는 마루

밑장에 이런 이야기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10센티미터 '소인'의 오감으로 감지하는 인간의 세계를 그토록 치밀하게 묘사해내고 활용할 수 있다니,

토끼머리라고 생각했던 그게 야무지게 머리를 묶은 빨래집게라는 상상력에선 정말 영화관 안의 모두가 빵 터지고

말았다. 한층 세련된 OST들과 잔뜩 신경쓴 게 분명한 사운드의 힘을 빌어 그려내는 하야오의 또다른 세계.




이런 거 눈여겨 보면 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몇가지 영화의 단서들을 주워섬겨본다. 당연히 이는

전적으로 내 기준..;;


# 인형의 집.

일반적으로 '인형의 집'이라 하면 인간이 인형을 위해, 그렇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제공하는 편의

시설인 셈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인형의 집'이라 불리지만 실은 소인들을 위해 수십년전부터 준비되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집이 있다. 생존조차 쉽지 않은 소인들, 아리에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인형의 집'은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은 공간. 그들이 그 집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그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는 건

꽤나 즐거웠다.


# 각설탕.

인간으로부터 '몰래 빌리려던' 각설탕이 노골적으로 주어지는 순간, 그리고 다시금 일련의 모험을 거쳐

인간에게서 아리에티에게 건네지는 순간의 어마어마한 차이.


# 할머니.

일반인. 보통 사람. 방학 때마다 곤충 채집을 하고, 딱딱한 껍데기를 뚫고 알코올을 주사해두곤 했던 어린 나.

그녀의 흐물흐물한 잇몸이 느껴지는 웃음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일종의 공범자 의식, 아니

차라리 나라면 방송국부터 불렀을 텐데. 아무래도 할머니가 대책없긴 하지만 순박한 것도 어쩔 수 없구나.

하야오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늙은이라고 늘 현명하거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따위 안전한 '상식'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



# 배경지식 (지브리 스튜디오 보러가기 전 어디선가 주워들은..)

하야오가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든 후 '월령공주'를 만들지 송충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지 두 개의

작품을 두고 고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과정만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가

되리라던 하야오의 믿음은 확고했지만, 우선 액션이 좀더 들어간 '월령공주'부터 만들자는 주위의 권유에

월령공주가 만들어졌단다. 아마 그 때의 그 송충이 주인공의 영화를 좀더 의인화하여 다듬은 게 이 영화

아닐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그 조그만 발들을 살살살 움직여 시속 10센티쯤으로.


# '매트릭스', 혹은 '인셉션'식의 질문 하나.

마루 밑의 아리에타가 살던 일상은 그녀의 집천장처럼 흔들림없이 단단했다. 단단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녀의 일상은 잔뜩 헝클어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야 하는 타이밍이 온다. 알고보니

그녀의 집천장은 얄포름한 널빤지 한장, 몰랐던 건 아니겠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거나 애써 지우고 있었거나.

그렇다고 마루 위의 인간 쇼우가 사는 일상이라고 단단치도 않다. 심장수술을 모레로 남겨둔, 남은 수명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인간의 세계는 일찍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던 것.


마루 위냐 아래냐,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가 일관되게 말하는 건 하나다.

살아라. 살아라.









 #1. 감기약을 삼키며 상상한다. 이 작지만 다부진 타블렛들이 식도를 지나 내려가다가 내 몸속 나쁜 것들이

윙윙거리고 가래를 뱉어대는 그 모터 스위치를 톡 건드려 꺼버리는 상상.



#2. 인셉션 후기삼아. 매트릭스스러운 아바타? 아바타스러운 매트릭스? 머릿속 칸막이, 꿈 속의 꿈을 보여주겠다는
 
거 자체는 이미 단물빠진 이야기, 비쥬얼과 이야기스킬은 인정하겠지만.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균열 한번

감각하고 나면 먹고먹고또먹는 데까진 금방 생각이 와닿는 법이다.


그렇잖아,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성의 '간지'에겐 나비가 나인데 그 내가 다시

나비인지 의심하는 것쯤이야.


#3. 손바닥 위에 똑바로 세워놓은 초록색 알약. 손바닥에 고인 짭조름한 약간의 수분으로 캡슐을 수직으로

붙여놓기엔 아무래도 무리, 손가락들이 제멋대로 휘청대며 캡슐을 떠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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