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도, 거미줄이 보일 때가 있다.

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살고 있단 건 이러저러한 거미줄 틈새에서 몸을 뒤채며 되뇌이는 망상같은 것.


제대하며 두번 다시는 내의지와 무관한, 무기력한 상황에 처하진 않겠다 다짐했지만 사실 그건

애초부터 허세나 뻥카에 가까웠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천장이 불쑥 도드라진 오후.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A : 축의금 대신 돈 모아서 에어콘 한 대 들여주면 되는 거지?

B : 됐어, 방하나짜린데 몰.

A : 정말?
A : 나중에 난 굉장굉장히 쎈 거 바랄 텐데.ㅋㅋㅋㅋ

B : 꼬됴
B : 선풍기 이미 샀다.

A : 그나저나 이제 오일 남았네.
A : 기분이 어뗘?

B : ㅜ.ㅜ

A : ㅋㅋㅋㅋ

B : 뭘 ㅋㅋㅋ 냐

A : 이제 좋은 시절 끝이고
A :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
A : 뺑글뺑글 돌겠고만

B : 그걸 '안정'이라 하지

A : 아.

B : 너같은 망나니는 잘 몰라

A : 쳇

B : ㅜㅜㅜㅜㅜㅜ

A : 근데 왜 우냐 너같은 안망나니는.

B : 기쁘잖어.

A : 진짜 기뻐서 우는 거냐..;;;

B : 맘대로 생각하셔.

*                                                               *                                                               *


어쩌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날밝아 눈뜨면 회사가고, 해떨어질 때쯤 퇴근해서 집에 오고, 다시 자고. 주말이면 조금 노닥대고

휴가 때면 조금 코에 바람이라도 쐬다 오지만. 다시 꼬박꼬박 챙겨 써야지, 하고 엑셀을 밟을 때면 그 뿐,

금세 하얀 속살만 펄럭이고 마는 다이어리처럼 진부하고 판에 박힌 삶이다.


게다가 결혼이라니.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입학, 군대 입대, 제대, 대학교 졸업, 취직, 그리고 결혼.

결혼, 아이 탄생, 유치원 입학, 초등학교 입학, 졸업, 중학교 입학, 졸업, 고등학교 입학, 졸업...어느 즈음 퇴직.


나는 틀렸다. '좋은 시절'은 없었다. 무독무해한 기억속에서 쉼없이 매만져지는 과거가 있을 뿐. 쳇바퀴에 새삼

들어가 정신없이 돌리기 시작한 건 어쩜 태어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결혼이란, 단지 그 쳇바퀴의 기어를

변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어1에서 기어2로.


어디에서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고 방향을 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왠지 하루하루 맘속에서부터 퍼져나오는 울림이 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우리 학교에서 취직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 관련 서면 인터뷰를 했다.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어서, 다소

딱딱하고 도식적인 질문들이 나열되는 피피티 자료의 빈 칸들을 채워넣기란 쉽지 않았지만, 오늘 추가로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그 거칠고 둔한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좀더 자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미 피피티 자료는 근 한 달 전쯤..? 협회와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질문들에도 꾸역꾸역 답을 하고, 이게 무슨

제대로 된 질문이냐 싶은 것들에도 열심히 동문서답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던 얘기랍시고 담았었는데, 막상 오늘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인터뷰어가 쥐고 있던 자료가 분명 내가 썼던 그것임에도 왜 이렇게 낯설던지. 나로부터

나왔지만 이미 나와는 너무 멀어져 버린 듯한 느낌, 혹은 애초부터 내가 어느정도 가식이랄까 포장을 섞었던

것일까. 추가 질문들에 이리저리 대답을 하면서, 과연 내가 일년간 다녔던 이 협회란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공간일까 외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만 차곡차곡 쟁여져버렸다.


무지하게 유니크한 공간. 사기업도 아니지만 공기업이라기엔 그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서비스지향적으로
 
굴러가고, 그러면서 조직 수장의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좀 느슨하고 안정지향적이기 쉬운 조직. 게다가 어쨌든

자체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국가의 무역이라는 '대의' 내지 '공익'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돈을

매년 소비하는 조직..


그 공간에 흔적을 내라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중소 무역업체들의 이해와 목소리를 섬세하게 반영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평가(대외적 생색내기나 핵심정치인들의 눈도장을 받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만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은 더 무역업체들의 최대 이익단체로서 수출업체 뿐 아니라 수입업체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협회의 이름을 보다 협소하게 바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은 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민간 차원의 액터로서 협회의 근간인 회원사들을 위한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다는 평가

(정부기관의 건방짐과 막대먹음이 지금 협회의 포지셔닝의 어정쩡함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협회의 지명도를 높이고 네임 밸류를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 협회의

조직문화가 좀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성숙하는데 일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달까. 그리고 무역 자체가

단순히 몇조니 몇천억이니 하는 숫자놀음으로 환원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발전에 어떠한 질적 기여를 해야 할지..

까지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민하는 조직으로 바꾸고 싶다. 그러한 조직원들의 고민 위에서, 협회가 외부적으로도

훨씬 성숙하고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까지 던질 수 있는 멋진 조직이었으면 좋겠다.


......


내가 이곳에 몸담으면서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 지금의 내게 직장이란 단지 내가 좇는 삶의

물질적인 기반(시간과 자금, 체력)과 정신적 여백(여유)을 남겨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가 내게

무엇인지, 어떤 직장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늘 내가 이 직장이 제공하는 것들로 지금 현재 빚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과 같아져버리고 만다.


지금의 직장에서 늙어죽을 때까지, 아니 늙었다고 짤리기 전까지 다닐지는 모르겠다. 직장의 선배님들이 다니고

있는 걸 보면..난 절대 저 분들처럼 남아있을 거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대안이 보이는 건 아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직장을 제한 나머지 삶의 부분들을 상당히 보장해주고 있으며, 그건 일종의 독묻은 사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이년만에 만난 후배 하나는, 마냥 분방하고 날 것의 이미지가 나던 예전의 나에 비해

왠지 지금은 뭔가 포장이 잘 되어 있다거나, 세련된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있나, 맘이 덜컹 내려앉았다. 난 그렇게 '교정'되거나 '포장'되고 싶진 않은데. 디즈니 만화에선가

허름한 시골집에 묵게 된 자칭 공주가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 침대 시트 밑에 콩 한알을 넣어두는 장면을 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침대 밑에 무슨 커다란 돌이 있는지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이야기하고, 주위 사람들이 시트를

몇개씩 더올려 가며 며칠 밤을 시험해보아도 이미 연약하고 민감해져버린 그녀는 작은 콩알 하나가 커다란 돌처럼

등에 배긴다고 불평하는 장면.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 난 저런 공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공주처럼 자잘한 것들에 무지하게 민감해진 채, 더군다나 큰 그림을 보는 노력조차 제대로 기울이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정말 추해질 거다. 마치 군대에서의 어느 때처럼, 배가 부르면 좋고 졸리면 자고 머리아픈 건 귀찮고.


하루 단위로 살며 콩알 하나를 돌인 양 설레발치는 돼지 하루살이가 되고 있는 걸까.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 확실히

많이 해이해진 거 같다. 그리고 많은 걸 타협하고 그러려니 항복해 버리는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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