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이번 사태 때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바로 이 자리에서 네 번째 학생이 자살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다. 세 번째 자살 학생이 있고서 9일 만이었다."
―이게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책임이고 뭐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솔직히 젊은 학생들이 그런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카이스트 사태 그 뒤' 서남표 총장 (조선일보, 2011. 4. 25)



대학의 총장이다. 더구나 세명, 네명의 아이들이 며칠 사이에 죽어간 대학의 총장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죽어간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그 '젊은 학생들'의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와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은

고사하고,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Scene #2.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4대강 사업 현장에서 노동자가 20명이나 사망한 것과 관련해 “본인 실수로 사망한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 장관은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노철래 미래희망연대 의원이 “공사 진행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생긴 것은 살인적인 공사 진척 때문”이라고 지적하자 이같이 답했다.

정 장관은 질문에 대해 “사고다운 사고는 몇 건 없고 대부분 본인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나 익사사고 등”이라고 말했다. 또 정 장관은 “현장 사고가 많이 난 것은 송구스럽지만 (공사를) 서두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라며 “야간작업을 해서 사고가 난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국토부 장관 “4대강 사망사고는 본인 실수 탓” 파문 (경향, 2011. 4. 21)



장관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면, 그런 정부의 얼굴 중 하나가 

장관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거다. 사대강 사업을 관장하는 주무부서의 장관이, 그 공사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질문 앞에서 저런 말을 했다. '본인 실수다'. 장관이 할 말은 아니다.

수십명이 죽고 있는데도 그저, 개인의 실수로만 몰아간다는 건 사람이 할 말도 아니다. 


Scene #3.

"언론에서 지난 1월 20날 그 사고를 용산 참사라고 합니다. 뭐 때문에 참사라고 합니까?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참사라고 합니다. 누가 뭣때문에 죽었습니까? 우리 경찰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신나와 시너를 끼얹고 거기에 불을 질러서 사람이 죽었습니까? 

2010. 1월 조현오 경찰총장 연설 중.



용산참사로 철거민 다섯사람과 전경 한사람, 총 여섯명이 죽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모독과 증오의

단어들은 계속된다. 테러범이라느니, 죽을 짓을 해서 죽었다느니. 전후 사정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보호해야 할 국민의 생명을 결과적으로 앗아갔다는 점에서 고개를 조금이라도 숙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는 커녕 계속해서 그들의 죽음을 물고 뜯는 건 잔인하다.


Scene #4.

서른두 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홀로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웃집 문에 붙여놓은 마지막 메시지는 ‘창피하지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였다. 많은 이들이 가난한 예술가의 비극에 놀라고 슬퍼했다. 그녀의 동료들은 이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이슈가 되었다. 복지 체계의 미비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게 다 MB 때문”이라는, 지하철 안내방송만큼 감흥 없는 이야기도 반복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 주의를 끈 것은 최씨의 부고 기사 아래에 붙은 인터넷 댓글들이었다. 명복을 비는 댓글 사이사이로, 고인을 질책하고 훈계하는 댓글이 끝없이 매달렸다. 몸이 그 지경이 될 동안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는가, 재능이 없다 싶으면 포기해야지 왜 맨땅에 헤딩을 하는가, 이웃에 밥 달라는 쪽지 쓸 힘이 있으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했어야지….


'잠수함의 토끼' 최고은씨(시사IN, 2011. 2. 23)



윗분들께서만 죽은 자를 모독하고 멸시하는 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나

존중 따위는 없이, 그저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에 따라 폄하하고 재단하기에 바쁜 건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 역시 윗분들 못지 않았다. 말이 없는 사람 앞에서

자기 맘대로 짛고 까불며 훈계하는 댓글들, 언제부터 죽음 앞에 이렇게 무감각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일본 대지진 직후 일부 언론은 국내 경제에 미칠 득실, 돈계산하기에

바쁜 기사를 써내곤 했다. 당장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죽었으니 감이 떨어졌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렇게 한건 한건, 한사람 한사람 죽어가는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고작(!) 이 정도라는 건, 특히나 그 죽음에 가깝거나 먼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 반응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정말 멋진 풍경이었다. 한라산등성을 구불텅 넘어가는 왕복 2차선, 길 양편으론 억새가 무성했고 저 멀리로는

어슴푸레 오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한뼘씩 쌓인 밤길이었고, 지나는 차 한대 마주치기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차는 멈춰야 했다. 짙은 먹장구름이 조금씩 헤쳐지면서 동이 트고 있었다. 앞뒤로 오던 차들이

조금은 일찍 알아서 피해가겠구나, 비상등 깜박이도 잘 보이겠구나, 그 와중에 살짝 안심이 되었다.

불과 그 몇십분 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형형히 헤드라이트를 밝혔던. 

내리막길, 빙판길이었다. 돛대처럼 펄럭, 펼쳐올라 부풀었던 본넷은 그나마 얌전히 구겨 닫았다.

그런 거였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차, 몇 걸음 동동거리기도 전에 발등까지 차오르게 쌓인 눈 덕에 신발도

흠뻑 젖고, 손발도 꽁꽁 얼어버렸댔다. 사실은 내가 다치지 않은 것, 누굴 심각하게 다치게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충격의 순간, 죽는 건가 했다.

제주 지역주인 '한라산'도 19도쯤의 순한 소주가 나왔더랬다. '한라산물 순한소주'. 후유증인지 만성피로인지

몸과 마음이 여전히 축축 처져있어서, 순한소주 따위 말고 저 북조선산스러운 '한라산'을 마셔버렸다.



8월 19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 면입니다. 어제는 양용은 골퍼, 오늘은 나로호 발사...러시아를 위한 사전테스트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로호 기술진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나로호 중요하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차피 나이 든 분들은 가시기 마련 아닙니까. 어차피 기력 쇠한 좌파정부 수장 노인네, 만평거리조차

못된다는 걸까요.

오늘(8/19)자 조선일보. 음...잉크값 좀 들었겠군요. 어떻게 보면 참 단정하다 싶고, 또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기억도 되살리지 못하는 '쉬어가기용' 만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인을 '인동초'라

칭하는 건 (갠적으로는) 80년대까지의 민주화 투쟁에 한해 고인을 평하는 것 같아 좀 입맛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에 대한 언급과 평가를 피하려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좀 낯익습니다. 아마 5월에도 비슷한 만평을 봤던 기억이 있다는 거죠.
지난 5월 어느날 조선일보의 만평입니다. 좀더 선명해지죠. 자신들이 불과 하루 전에도 줄기차게 비난하고

여론몰이를 하던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접하고..."쩝..." 이정도 느낌이었을까요. 할 말은 한다는 신문,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서거 앞에 할 말이 이리도 없었나 봅니다.
 
오늘(8/19)자 중앙일보. 신기한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은...저만의 편견일지요. 뭐랄까, 좌파정권의 수장, 잃어버린

10년의 주동자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북괴의 수장' 김정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만평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조차 북한 비아냥거리기의 소재로 소비해 버리는 중앙일보의 '통큰 만평', 감탄할 수 밖에요.

어쩌면 북한 지도자가 방한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미리 '물타기' 좀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만평입니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최근 어록을 저 구름 위 하늘세상에 말풍선삼아 띄워놓았네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분의 가톨릭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만평 속 그분의 표정,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표정이 처연하네요. 눈밑에 온통

근심걱정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경향신문입니다. 고인을 기리는 만평의 정석 아닐까 싶네요. 성함과 이미지를 넣고, 생몰연대를 적고,

고인의 행적과 생각, 평생의 삶을 떠올릴 만한 한마디를 퍼올리는 거죠.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 '인동초'라는 잔뜩 바랜 이미지,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화투사로서의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한 고인의 업적이 그의 대통령 재임 중에 이뤄졌던 걸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프레시안 어제(8/18) 만평입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울컥한 만평이었는데,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이만한 만평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불과 몇개월 전에 돌아간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오버랩시키고, 그 두분의 죽음을 재촉한 공통의 무언가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게

상식적인 반응일 겁니다.


굳이 '인동초'라는 이미지로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을 가리거나 지워버리려 하고, 남북화해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고인의 죽음 앞에서 북한 지도자 비아냥거리기에 골몰하고 있고, 아니면 아예 대담한 '생략'기법을

구사하는 언론이라면...'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단어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p.s. 혹시나 하고 8월 20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23일날 천만관객을 맞게 된다는

영화 '해운대' 이야기를 20일날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참...그러네요.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감정을 정화하고 정돈시켜,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헤어진 연인이 실제로 헤어지는 순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라던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작년 촛불시위 때의 방향성없는 폭발력과 지금의 전염성강한 눈물바다가 갖는 동일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비루하고 피곤한 삶. 대통령 노무현조차 감당치 못한 강고한 시스템과 주류 세력에 대한 패배감. 울고 싶은 삶.

그 모든 것들을 공유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부글대던 울화, 불만, 그런 것들이 해소되는 거 아닐까.


노무현의 급서 후 눈물을 글썽이고,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불쌍하고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차원의 '자기 위로용'이라는 심증이 갈수록 짙어진다. 노무현에게 미안하단다.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한단다. 존경했고, 훌륭한 정치인이었으며, 서민의 편이었고, '바보'같이 우직한 우리들의

대통령이었단다. 심지어는 그가 그립댄다. 


이런 묻지마식 감정의 물결이 사회를 온통 휩쓸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건 경계할 일이다.


언제, 누구에게 그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았던가. 아마 그가 검찰, 그리고 그 뒤에 선 권력자의 '피살자'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시작된 일이다. 그렇기에 노사모에선 '국민이 죽여놓은' 노무현이 국민장이라니, 당치않다고 펄쩍

뛰었던 거 아닌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를 비난하고,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야, 라는 말을 초딩들까지 입에 물고
 
있던 게 불과 이삼년 전이다.


막말로, 이명박은 왜 당선되었는가. 우리가 노무현을 싫어해서였다.


처음에 방송이 났을 때,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울 일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했고, 그는 더이상 현실세계에 작용하지 않았으며,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유일한 가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티비 속 사람들의 눈가가 빨갛게

축축해지더니, 울고 쓰러지고 그러다가 세네시간씩 줄을 서서 헌화하기 시작했다. 꼬맹이들을 안고 업고, 그렇게.

그러고 보면 그새 티비들은 감동적인 음향이 깔린 다큐멘터리와 코멘트들을 쉼없이 돌렸다.


물론 그를 향한 눈물바다가 죽은 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너그러움이 가미된 애도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대통령 중에 가장 '진보'적이었고, 가장 호감이 갔고, 또 가장 청렴했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했던 대통령인 사실도 맞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정체가 없다. 5공 청문회 스타였다고? 입지전적인 궤적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통령된 후에
 
검사들과 한판 뜨려 했다고? 대통령 된 후의 업적에 대한 다큐는 과문한 탓인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노무현을 바라보고 울지만, 그 눈물은 살아남은 자들, 살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 바치는 눈물이다.

죽은 노무현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표시와 열렬한 지지는, 살아있는 이명박에 대한 극렬한 반대와 증오와

한 짝을 이룬다. 그리고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조차 이명박 정권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묘한 '동류의식'도 한몫 한다.

그들은 자신이 불쌍한 거고, 자신의 처지가 애틋한 거고, 답답한 현실에 또다시 꽉 막혀 버린 가슴에 목메어버린 거다.


울고 싶던 차에 뺨 제대로 맞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별적 차원의 스트레스 해소와 감정 배출이 문제 해결의 의지를 오히려 꺽어버리거나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거다. 이미 촛불시위에 대한 상찬 후 조심스레 등장하기 시작한 비판들이 보여주듯, 한판 난장으로

-축제였고 혹은 '새로운 시위문화의 전형'이었다고 평해지는-들썩들썩했던 그 거대한 에너지는 문제 자체에 대한

해결 의지보다는 스스로의 스트레스 해소에 몰입했던 면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감정과 쿨해진 머리를 갖춘
 
'순치되고 이빨빠진' 양민들이 남을까봐 두렵다.


촛불시위가 정돈되는데 한몫했던 건, 종교계 인사들이 개입하면서 이성적인 문제를 감성적인 문제로 바꿔 버렸던 탓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감정은 분출했고 어느 정도 치밀었던 울화통도
 
해소하고 잔뜩 축적됐던 스트레스도 날려버렸다. (물론 이 정부 하에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스트레스가 누적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심리적인 위로와 종교적인(혹은 도덕적인) 우월감도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이 전혀 변함없이

굴러가는 시스템 내부로 걸어들어간다. 추모 신드롬, 울음바다도 한순간의 반짝, 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렵다.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순치'에 다름아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가.


노무현에 대한 이 중독성강한 추모 물결은, 온국민에 전염되어 버린 듯한 (혼란스러운) 분노와 비통함은, 아직은

우리를 아무데로도 인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그러들었던 노무현에 대한 열광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그저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은 과거에 대한 향수", 그것 밖에 안 보인다. 노무현에 대해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나 이미지라는 게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일종의

신드롬화되어 버린 것은, 그가 오로지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로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초점이 흐려진다. 한미FTA, 이라크파병, 비정규직법, 사학법, 부동산세제, 스크린쿼터제,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투자은행, 금산분리, 언론법...이런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는 노무현인지 몰라도, 이명박의 반대정책, 반대세력은 노무현이 아니다.


노무현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왜 울고 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재우쳐 물어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왜 그를 보며 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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